우리 말도 익혀야지

 (1091) 바래다 (바램)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 그것은 우리 바람이었어

→ 우리는 그것을 바랐어



  ‘바란다’고 할 적에는 ‘바람’처럼 명사형(이름씨꼴)을 삼습니다. ‘바랜다’고 할 적에는 ‘바램’처럼 명사형을 삼지요. ‘바라다(바란다)’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되어 달라고 생각하다”를 뜻하고, ‘바래다(바랜다)’는 “볕이나 바람이나 물 때문에 빛깔이 바뀌거나 허옇게 되다”를 뜻합니다.


 바라다 - 바라요 - 바람 (꿈)

 바래다 - 바래요 - 바램 (빛을 잃다)


  그런데 방송이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수많은 ‘어른’들은 ‘꿈’을 이야기하려 하면서 으레 ‘바람’이 아닌 ‘바램’을 말해요. 꿈이 빛을 잃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꿈이 제 빛을 잃지 않고 맑고 밝게 드리우기를 바란다면 ‘바램’이 아닌 ‘바람’으로 노랫말을 쓰고 노래를 불러야 올발라요.


  방송이나 무대에 서는 어른들은 으레 ‘사람들이 ‘바램’으로 알거나 생각하니까 ‘바람’으로 쓰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방송이나 무대에 서는 어른들이 ‘바램’이 아닌 ‘바람’이 맞다고 꾸준히 얘기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이제껏 잘못 알았네’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꿈’을 ‘바램’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더라도 이를 핑계로 삼아서 엉터리로 노랫말을 붙여서 불러도 되지 않습니다. 방송이나 무대에 서는 사람일수록 옳고 바르게 말하면서, 사람들한테 옳고 바른 말을 즐겁고 사랑스레 나누거나 퍼뜨리는 몫을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다’를 ‘바람’으로 노래할 적에 잘못 알아듣겠구나 싶어서 걱정스러우면 ‘꿈’이라는 한국말을 곱게 쓰면 됩니다. 4348.6.30.불.ㅅㄴㄹ



더 살펴보기 : 바라다 (바램)


저희의 한결같은 바램이기도 합니다

→ 저희로서는 한결같은 바람이기도 합니다

→ 저희는 한결같이 바랍니다


자신의 바램을 밝히기도 했다

→ 제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 제 꿈을 밝히기도 했다

→ 제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잘 풀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 잘 풀리기를 빕니다


바램이 있다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 바람이 있다면 한말씀 하셔요

→ 바라는 일이 있다면 한말씀 하셔요

→ 꿈이 있다면 한말씀 들려주셔요



※ 방송이나 신문에서 ‘바람’을 ‘바람’대로 말하지 못하거나 적지 못하는 일이 퍽 잦습니다. ‘바람’을 ‘바람’대로 알맞고 바르게 말하거나 적는 사람도 많습니다. ‘바라다’를 ‘바람’으로 적어야 하는 줄 잘 모르겠으면 ‘꿈’이라 하면 되고, ‘빌다(빎)’라는 낱말을 쓸 수 있습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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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창비시선 167
이경림 지음 / 창비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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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7



시와 삶

―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이경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9.25.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을 적에는 잎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봅니다. 햇볕이 내리쬐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애벌레한테는 잎을 배부르게 갉아먹어서 몸을 살찌우는 일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몸집을 불리고 불린 뒤에 허물을 벗어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고, 다시 더 큰 애벌레가 되려 하며, 이윽고 밥먹기를 그치려 해요.


  밥먹기를 그치는 애벌레는 깊이 잠들고 싶습니다. 자고 또 자고 다시 자면서 고요히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애벌레는 고치를 짓습니다. 애벌레는 고치에 깃들어 먼먼 옛날부터 ‘저(애벌레)를 낳은 어미가 했’듯이 잠이 듭니다. 잠이 들면서 꿈을 꾸고, 애벌레가 꾸는 꿈은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누가 실바람으로 잔가지를 지나간다 / 지금 누가 저 황원에서 쓸쓸히 노래하고 있다 (저 깊은 강)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 / 사이프러스 나무 숲에 둘러싸인 궁전 (내 속의 알함브라)



  잠에서 깨어나는 애벌레는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온몸이 간지러울 뿐 아니라 쑤십니다. 몽툭한 다리가 사라지면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생깁니다. 더듬이가 생기고 날개가 돋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하던 몸은 날렵하면서 가벼운 몸으로 바뀝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번데기를 벗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애벌레는 한참 동안 몸과 날개를 말립니다. 첫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를 때까지 바람이 잠들며, 풀과 꽃과 나무는 새로 깨어난 나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풀밭이나 숲에 서면 온갖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길을 모아 풀줄기나 나뭇잎을 들여다보면 조그마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면서 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비가 날고,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자라요. 한쪽에서는 풀이랑 나무가 새 잎을 내놓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애벌레가 풀잎이랑 나뭇잎을 갉습니다.


  그리고, 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하늘을 날고,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릅니다.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먹는 새가 있고, 나비나 잠자리는 안 쳐다보는 새가 있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서로 얼크러지면서 들바람이 불고 숲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랑한 건 그 남자 / 가 아니라 담요였네 언 몸 녹여주던 담요! / 그것의 부드러움 그것의 휘감김 그 가벼움을 / 사랑했네 그 밑의 따스함 그 밑의 어두움 그 밑의 / 은밀함 그 알몸 덮어버리는 폭력! (내가 사랑한 담요)



  이경림 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김정란 님은 시집 끝자락에 비평을 붙입니다. 김정란 님은 이경림 님 시를 놓고 “80년대에 등단했더라면, 그녀의 시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경림의 시는 부서진 80년대의 대서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부활한 90년대의 소서사의 한 전형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김정란 님이 말하듯이, 참말 이경림 님 시는 1980년대에 살아남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똑같이 흘러야’ 하지 않습니다. 더 깊거나 넓게 알아보거나 사랑해 줄 사람이 적더라도,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아끼거나 가슴에 품을 사람은 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대서사’이든 ‘소서사’이든, ‘서사(敍事)’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삶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뿐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들 이야기요, 권력자나 정치꾼 이야기뿐 아니라,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 이야기요, 도시에서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하는 골목사람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도 하지 산다는 건 / 마알간 잠의 밑바닥에는 바닥 모를 우물이 파이고 / 고통과 사랑과 그리움과 배반과……, / 진짜들은 늘 허공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토론토에서)


어머니를 속에 감춘 계집아이 하나와 / 계집아이를 속에 감춘 어머니 하나가 / 손잡고 갑니다 (숨은 모녀)



  삶은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삶은 언제나 오직 하나이기에 대단합니다.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기에 삶은 늘 대단합니다. 1월 1일을 이틀쯤 누리거나 7월 1일을 안 누려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거나 열네 시간인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서 자리에 눕느라 다른 일을 못 하더라도, 몹시 바빠서 쉴 겨를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은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맞아들이고, 똑같은 삼백예순닷새를 맞이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나날을 저마다 새로운 삶으로 누리니, 누구한테나 삶은 대단합니다.


  역사책에 남을 만한 일을 했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릴 만한 자리에 서기에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삶이 수수하면서 대단합니다.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삶이 투박하면서 대단합니다. 거리낌없이 뛰노는 아이들 하루가 대단하고, 신나게 웃고 노래하면서 놀 줄 아는 아이들 삶이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을 언제나 시로 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북돋우거나 예술을 살찌우는 몸짓이 되어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쓰기에 시이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타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싣거나 이름난 작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시인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즐거웁게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이야기를 짓는 삶이 된다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가꾸고 기쁘게 일구는 삶을 노래할 줄 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덤프트럭은 시절 없이 오가고 방범대원은 골목골목 호루라기를 불어댄다네 /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고 그 사랑 가로등 아래 우울한 그늘 만드네 (상처들은 나무마다 환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밝은 유리문이 있다 (加恩이라는)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바로 이 시를 쓴 이경림 님 삶이 깃들었을 테지요.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삶이 깃들고, 웃음이 번지기도 하는 삶이 깃듭니다. 아픈 삶이 깃들고, 설레거나 벅차는 삶이 깃듭니다.


  그늘을 바라본 삶을 시로 노래하고, 햇살을 마주한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도시에서 지내던 하루를 시로 읊고, 시골로 마실을 가거나 이웃나라를 다녀온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시집을 덮고 고요히 생각에 잠깁니다. 책상맡에 촛불을 켜고 지긋이 바라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에 느즈막하게 잠든 아이들을 가까스로 재우고서 비로소 숨을 돌리는 깊은 밤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나는 오늘 하루 잠들고 나서 이튿날에는 어떤 시를 쓸 만할까요?


  시 한 줄에 흐르는 삶을 읽다가, 내 삶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시 두 줄에 감도는 사랑을 헤아리다가, 내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밤오줌을 누려고 큰아이가 잠에서 살짝 깹니다. 쉬를 누고 다시 자리에 누운 아이를 다독입니다. 이불을 여미어 주고, 작은아이도 살핍니다.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반듯하게 누인 뒤 이불을 새로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언제나 두 팔을 옆으로 뻗어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와 가슴과 배와 팔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기쁜 꿈을 꾸자고 속삭입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삶이 즐거우면서 아름답겠지요.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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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사람



  술을 퍼마신 뒤 바보짓을 저지른 여러 사람 이야기가 요즈막에 불거졌다. 진보논객이라는 ㅎ씨는 이녁 여자친구를 날마다 두들겨팼다 하고, 이름난 만화가 ㄱ씨는 술자리에서 으레 성추행을 했다 한다. 바보짓을 저지른 사람은 ‘거의 날마다’ 또는 ‘날마다’ 또는 ‘자주’ 술을 마신다고 한다.


  술이란 무엇일까? 바보짓을 일삼으려고 몸에 퍼넣기에 술인가? 삶을 즐기려고 알맞게 마시려는 술이 아닌가?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가게나 술집에서 술을 사다가 마시는 사람이 꼭 바보짓을 일삼지는 않는다. 참말 즐겁고 아름답게 술을 맞이하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삶이 아름답고 사랑이 따스하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주먹부림(폭력)을 일삼을 테고, 스스로 사랑을 생각하지 않기에 바보짓으로 흐를 테지.


  지난날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지내고, 여러모로 책하고 얽힌 일을 하며 서울에서 여러 작가를 만날 적에 으레 술자리에 갔는데, 술을 정갈하게 마시는 작가나 평론가도 많으나, 술을 지저분하게 마시는 작가나 평론가도 많았다. 스스로 ‘어른’이나 ‘유명인’이라고 하는 이들은 술김을 빌어서 ‘못된 손’이 되기 일쑤였다. 술김이 아니어도 벌건 낮에 ‘음담패설’을 참으로 즐긴다.


  밤새 술을 퍼마시는 작가나 평론가가 꽤 많은데, 이들한테 아이가 없을까? 이들은 이녁 아이가 보고 싶지는 않을까? 이들은 이녁 아이한테 음담패설을 물려주고 싶을까? 이들은 이녁 아이가 코앞에 있는 술자리여도 ‘못된 손’이 되려나? 이들은 집안일을 어떻게 할까? 이들은 이녁 아이들하고 놀아 주기는 할까?


  진보논객 ㅎ씨나 이름난 만화가 ㄱ씨가 적어도 한 해 동안 술을 못 마시도록 하면서 어린이집에서 날마다 자원봉사를 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술 없이 ‘맨마음’으로 아이들을 날마다 만나서 이녁 삶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기를 빌어 본다. 4348.7.2.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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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손질 361 : 트렌드 흐름


 지금의 트렌드 흐름을

→ 오늘날 흐름을


trend : 동향, 추세

동향(動向)

1. 사람들의 사고, 사상, 활동이나 일의 형세 따위가 움직여 가는 방향

2.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의 낱낱의 움직임. ‘움직임새’로 순화

추세(趨勢) : 어떤 현상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



  영어 ‘트렌드’는 ‘동향’이나 ‘추세’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말 ‘동향’이나 ‘추세’는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거나 나아가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동향’은 ‘움직임새’로 고쳐쓸 낱말이라고도 하는데, 움직이거나 나아가는 결이란 곧 ‘흐름’입니다.


  ‘트렌드 흐름’은 영어하고 한국말을 나란히 쓰기는 했으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 셈입니다. 영어를 쓰고 싶다면 영어를 써도 될 터이나, 굳이 영어로 말하기보다는 한국말로 손쉽게 ‘흐름’이라고 적으면 넉넉하리라 봅니다. 4348.7.1.물.ㅅㄴㄹ



도시 비즈니스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트렌드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 도시에서 사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오늘날 흐름을 잘 읽으리라 본다

《아베 히로시,노부오카 료스케/정영희 옮김-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남해의봄날,2015) 120쪽


“도시 비즈니스(business)를 경험(經驗)한”은 “도시에서 사업을 해 본”이나 “도시에서 사업을 한”이나 “도시에서 장사를 해 본”으로 손봅니다. ‘지금(只今)의’는 ‘오늘날’로 손질하고, “파악(把握)하고 있을 것이다”는 “알리라”나 “읽으리라 본다”나 “헤아리리라 본다”로 손질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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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66 알·애벌레·번데기·나비



  알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알입니다. 알은 으레 풀잎이나 나뭇잎에 처음 자리를 잡습니다. 요즈음은 아파트 벽이나 쇠기둥에도 알이 붙을는지 모르나, 알을 낳는 ‘어미’는 풀잎이나 나뭇잎이 아니라면 아무 데나 알을 두지 않습니다.


  알은 따스한 볕을 받으면서 어느 날 조용히 깨어납니다. 조용히 깨어난 알에서는 아주 조그마한 벌레가 나옵니다. 아주 조그마한 벌레는 ‘아기 벌레’라 할 만합니다. ‘애벌레’입니다. 애벌레는 볼볼 기면서 알껍질부터 갉아서 먹습니다. 신나게 먹은 뒤 쉬고, 다시 먹습니다. 알이 붙은 풀잎이나 나뭇잎도 먹습니다. 신나게 먹고 또 먹습니다.


  잎사귀를 갉아먹는 애벌레는 잎똥을 눕니다. 푸른 빛깔이 도는 똥을 누면서 잎사귀를 꾸준히 먹습니다. 이제 애벌레는 조금 자랍니다. 허물을 벗습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됩니다. 조금 큰 애벌레가 되면 잎사귀를 더 많이 먹습니다. 잎사귀를 더 많이 먹으니, 풀똥을 더 많이 누고, 풀똥을 더 많이 누던 어느 날 다시 허물을 벗어 더욱 큰 애벌레가 됩니다.


  더욱 큰 애벌레는 바지런히 잎사귀를 갉아먹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몸이 무척 무겁습니다. 커다란 덩치만큼 굼뜨는 몸은 아닙니다. 어쩐지 잠들고 싶습니다. 아니, 잠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듯합니다. 맛난 잎사귀를 더 먹지 않습니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꼬물꼬물 기어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이윽고 몸이 딱딱하게 굳습니다. 어느덧 고치가 생깁니다.


  고치에 깃든 애벌레는 조용히 고즈넉히 잠듭니다. 잠든 애벌레는 아주 천천히 번데기로 바뀝니다. 번데기로 바뀐 몸은 그대로 고치에 머뭅니다. 번데기로 몸이 바뀐 줄 깨달은 애벌레는 ‘내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듭니다.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없이 깊디깊이 잠이 듭니다.


  잎사귀를 잊고, 애벌레 몸뚱이를 잊으며, 번데기가 된 새로운 몸까지 잊은 이 아이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꿈결에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르는 누군가를 봅니다. 바람결이 몹시 보드라우면서 재미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꿈속에서 바람을 부릅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람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람아, 나도 네 등을 타고 하늘 구경을 해도 되겠니?” 바람은 고개를 살레살레 젓습니다.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는단다. 하늘 구경을 하고 싶다면, 네가 스스로 하렴.” “내가 어떻게 하늘을 나니?” “그래, 못 나는구나. 못 날면 할 수 없지. 못 날면 하늘 구경을 못 하지.” “그래도 하늘 구경을 하고 싶어.” “네가 살짝 등을 내 주면 될 텐데.”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내 등에 태우지 않아. 다만, 나는 누구나 하늘로 오르려 하면 함께 놀지. 너도 얼른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아, 졸립다. 더 자야겠어. 더 잘 테니 이따가 보자.” 바람과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는 더욱 깊이 잠듭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어느 만큼 꿈속을 헤매었을까요. 번데기는 갑자기 온몸이 간질간질합니다. 고치가 답답합니다. 뭔가 다 벗어 버리고 싶습니다. 갑갑한 껍데기는 이제 내려놓고 싶습니다.


  고치가 갈라집니다. 번데기라는 옷(몸)을 입은 아이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눈이 부십니다. 퍽 오랫동안 깜깜한 고치에 깃들어 잠을 잤으니, 눈이 따갑습니다. 게다가 몸이 축축합니다. 내 몸이 왜 이리 축축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이는 갑자기 등짝이 아픕니다. 등짝이 쩍 갈라집니다. 쩍 갈라진 등짝에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옵니다. 딱딱한 껍데기를 벗고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몹시 홀가분합니다. 다만, 눈이 부시고 몸이 축축하니, 눈을 쉬고 몸을 말려야 합니다.


  한동안 잎사귀에 매달려 눈을 천천히 뜨고 몸을 말린 아이는 문득 ‘내 몸이 예전하고 사뭇 다른’ 줄 알아차립니다. 뭘까요? 무엇일까요? 눈을 떠서 하늘을 볼 수 있고, 몸이 다 말라서 가벼운 아이는, 잎사귀를 붙잡은 발을 모두 놓습니다. 어느새 하늘을 가르면서 바람 옆을 함께 납니다. 어, 이 아이 등에 날개가 달렸습니다. 이 아이는 나비입니다. 조그마한 알에서 애벌레를 지나고 번데기를 거쳐서 새로 태어난 나비입니다. 나비는 바람 등짝을 간질이면서 날개를 팔랑입니다. 바람은 새로 찾아온 동무가 반갑습니다. 오래오래 함께 하늘을 누빕니다. 파란 하늘에서 파란 숨을 마시면서 새롭게 삶을 누립니다. 4348.3.4.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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