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59) 극도의


 극도로 긴장하다 → 더없이 긴장하다 / 마음을 바짝 조이다

 극도로 흥분하다 → 매우 흥분하다 / 매우 북받치다

 극도에 달했던 초조와 불안 → 하늘을 찌르던 조마조마함

 극도의 두려움에 떨다 → 몹시 두려워하다 / 몹시 두려워서 떨다


  ‘극도(極度)’라는 한자말은 “(‘극도로’, ‘극도에’, ‘극도의’ 꼴로 쓰여) 더할 수 없는 정도”를 뜻한다고 합니다. “더할 수 없는 만큼”을 뜻한다면 이러한 뜻대로 쓰면 되고, “더할 나위 없이”나 ‘더없이’로 쓸 수 있습니다. ‘대단하다’거나 ‘매우 크다’고 해도 잘 어울립니다. 4348.9.22.불.ㅅㄴㄹ



극도의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다

→ 더없이 쪼들렸다

→ 살림이 몹시 힘들었다

→ 살림이 매우 쪼들렸다

→ 살림이 찢어지듯 고되었다

→ 아주 힘들도록 가난했다

→ 무척 고달프고 가난했다

→ 더할 수 없이 가난했다

《박연구-어항 속의 도시》(문예출판사,1976) 93쪽


극도의 영양실조였어

→ 끔찍한 영양실조였어

→ 대단한 영양실조였어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

→ 밥을 제대로 먹어 보지도 못했어

→ 못 먹어서 삐쩍 말랐

→ 죽을 만큼 굶주렸

《싼마오/조은 옮김-사하라 이야기》(막내집게,2008) 43쪽


주체성 상실에 무식을 겸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자아낸다

→ 줏대도 없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몹시 볼썽사납다

→ 줏대를 잃고 바보스러운데다가 매우 볼꼴사납다

→ 줏대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무척 보기 싫다

→ 줏대를 잃은데다 멍청해서 도무지 봐줄 수 없다

《이수열-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2014) 342쪽


극도의 노력을 다해야 만질 수 있었다

 온힘을 다해야 만질 수 있었다

→ 젖먹던 힘까지 다해야 만질 수 있었다

→ 몹시 애써야 만질 수 있었다

《조에 부스케/류재화 옮김-달몰이》(봄날의책,2015) 133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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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사 비평’을 바란다면



  앞으로 누군가 나한테 주례를 서 달라고 여쭐 사람이 있을까? 앞날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한테 주례를 서 달라고 여쭐 사람이 나올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면 나는 주례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까? 두 사람이 듣기에 달콤한 말을 늘어놓을까, 아니면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사랑을 북돋울 말을 새롭게 펼칠까.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없다. ‘주례사 비평’을 할 마음이란 터럭만큼조차 없다.


  내가 읽은 책을 놓고 나는 어떤 느낌글을 쓸까? 책마을에는 내 이웃님이 꾸리는 출판사도 많고, 편집장이라든지 편집자로 일하는 출판사도 많다. 그러면, 나는 내 알음알이에 맞추어 ‘주례사 비평’을 하면 될까? 아니다. 아무리 가까이 사귀거나 아는 출판사라고 하더라도,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없다. 오탈자가 나오면 낱낱이 짚어서 알려주고, 잘된 대목과 아쉬운 대목을 나란히 짚으면서 말해 줄 수밖에 없다. 내가 보고 느끼며 알아차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몫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다.


  글을 쓰든 책을 내든 책을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맨 먼저 ‘읽는이(독자)’이다. 스스로 읽는이인 줄 생각하면서 책을 엮는 사람하고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으면서 책을 엮는 사람은 사뭇 다른 길을 걷는다. 스스로 읽는이라면 주례사 비평을 할 수도 없으며 바라지도 않는다.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는다면 주례사 비평을 하거나 바라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한국 사회에 왜 주례사 비평이 넘칠까? 독자도 출판사도 비평가도 작가도 스스로 읽는이인 줄 잊으면서 서로 ‘동업자’가 되기 때문이다. 동업자는 무엇을 할까? 서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면서 지켜 준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과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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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5.9.17. 큰아이―미국 가자 (2015.9.17.)



  우리 식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즐거운 삶을 큰아이가 그림으로 그려 준다. 우리는 미국도 가고 남미도 가고 유럽도 가고 아시아 여러 나라도 돌고, 또 이 나라 곳곳을 즐겁게 누빌 수 있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이든 마음껏 둘러볼 수 있지. 아름다운 이웃을 만나고,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이웃이 되어, 언제나 사랑스러운 삶을 지을 수 있지.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그림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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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문학동네 동시집 7
김륭 지음, 홍성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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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9



‘아름다운 사랑’을 아이들하고 나누려는 동시

―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김륭 글

 홍성지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9.7.24. 8500원



  언제부터인가 퍽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겨레나 이웃 겨레도 고양이를 퍽 사랑하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고양이 사랑’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느껴요. 그래서 예전에는 개는 그냥 ‘개’라 하고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라 했습니다. 다만, 집에서 밥을 주면서 키우는 짐승이라면 ‘집개·집고양이’라 했고, 사람이 밥을 따로 주지 않는 짐승이라면 ‘들개·들고양이’라 했어요. 그리고, 개나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으면 ‘도둑개·도둑고양이’ 같은 이름을 썼어요.



엄마 아빠 싸우는 날 / 화난 아빠 눈 속에 떠 있는 나는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고양이가 많이 늘었습니다. 고양이 모습은 예나 이제나 그대로이지만 사람살이가 사뭇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골목고양이’라든지 ‘길고양이’가 있고, ‘마을고양이’도 있습니다. 아마 ‘아파트고양이’도 있을 테며 ‘동네고양이’라든지 ‘달동네고양이’ 같은 이름도 따로 붙일 만하리라 봅니다.


  김륭 님이 빚은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문학동네,2009)를 읽습니다. 동시집에 붙은 이름이 ‘도둑고양이’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동시를 쓴 어른 김륭 님은 왜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을 골랐을까요? 그냥 ‘고양이’라고만 해도 되었을 텐데요?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양이”라면 더더구나 ‘고양이’라고만 해야 알맞지 않을까요?


  아이는 어른하고 다릅니다. 아이는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풀이나 짐승을 바라볼 적에 ‘굳은 생각(편견)’을 ‘치우치게’ 품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은 고양이’가 지짐판(프라이팬)을 타고 먼먼 우주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 주고 왔어요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내가 만일 과일이 된다면 / 수박이 될 거야 / 과일들 중에 대통령을 뽑는다면 / 덩치 크고 힘센 수박이 당선될 테니깐 (수박 대통령)



  아이들은 ‘대통령’을 알까요?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본다면 대통령을 알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둘레 어른들이 얘기하면 대통령을 압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안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대통령이 ‘으뜸’이라거나 ‘가장 크고 힘센 무엇’이라고 여긴다면 그야말로 대통령을 잘못 아는 셈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대통령은 으뜸이나 가장 크거나 힘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어떤 사람일까요? 네, 대통령은 ‘심부름꾼’이거나 ‘머슴’입니다. 대통령은 바지런히 일을 할 사람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꿈을 이루도록 도와야 하는 심부름꾼이지요.


  크고 센 힘으로 뭔가를 한다면, 이때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우두머리’라고 해서 힘으로 윽박지를 수 없습니다. 슬기롭고 똑똑하며 훌륭할 때에 비로소 우두머리(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박 대통령〉 같은 동시는 어린이 마음을 잘못 짚는다거나 얄궂게 건드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과일을 좋아할 뿐, 으뜸 과일이라든지 가장 크고 멋진 과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포동포동 살찐 배추벌레 한 마리 입에 물고 / 날아간다 꽁지 빠지도록 / 새끼들 찾아간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


나무들도 자전거가 있어요 / 쥐도 새도 모르게 자전거를 타고 놀아요 / 두 팔 쭉 뻗어 올려 훔친 해와 달을 바퀴로 굴려요 (자전거 타는 나무들)



  동시는 언제나 ‘생각하는 힘(상상력)’입니다. 생각을 마음껏 펼치기에 동시를 씁니다. 생각을 한껏 드날리기에 동시를 읽습니다.


  〈나무들도 전화를 한다〉라든지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처럼, 생각을 넓히고 펼칠 적에 비로소 동시가 태어납니다.


  다만, 〈자전거 타는 나무들〉 같은 작품을 보면 “훔친 해와 달”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어딘가 아리송해요. 나무가 왜 해와 달을 훔칠까요? 참말 나무가 이러한 마음일까요? 그냥 골목고양이나 마을고양이를 ‘도둑고양이’로 굳이 쓰고야 마는 시인 마음이 ‘나무가 해와 달을 훔친다’고 하는 동시를 쓰도록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밥풀의 상상력)



  곰곰이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무는 사람한테 무엇이든 다 내어줍니다. 나무는 그늘도 내어주고, 줄기도 내어주며 꽃과 열매도 내어줍니다. 가지도 내어주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야말로 나무는 맨 나중에 그루터기까지 내어주지요.


  다만,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주는 숨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동시를 쓰면서 ‘창작’이나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해와 달을 훔치는 나무” 이야기를 그려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동시도 여러모로 재미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 본다면, 나무한테 ‘얘, 나무야, 너 해와 달을 훔치고 싶니?’ 하고 물어 보고서 이러한 동시를 썼는지 궁금해요. 나무로서는 멀쩡히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인데, 동시를 쓰는 어른이 나무가 ‘도둑처럼 훔치려는 마음이나 몸짓’인 듯 엉뚱하게 그린 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 그네처럼 매달려 가던 동생이 /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앙앙 떼를 쓴다 (무당벌레)


뿌지직뿌지직 신기해 / 엄마, 똥꼬에서 새가 나오려나 봐 // 자꾸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려 / 콕콕 부리로 똥꼬를 찔러 (변기 위의 아기 펭귄)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고스란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여느 때에 읊는 말을 고스란히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씁니다. 그래서, 어른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도둑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골목고양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널 사랑해’ 하고 말할 뿐 아니라, 어른이 ‘너 미워’ 하고 말하면 아이도 똑같이 ‘너 미워’ 하고 말하지요.


  동시는 재미나거나 남다른 이야기를 꾸미는 문학이 아닙니다. 동시는 어린이가 제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북돋우도록 돕는 이야기를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담는 동시이기 때문에, 어른끼리 읽고 나누는 ‘어른 시’하고 사뭇 다르게, 말 한 마디까지 더욱 꼼꼼히 살피고 더욱 낱낱이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한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인데, 재미난 이야기 못지않게 ‘아름다운 사랑’이 드리우는 말로도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은 재미만 읽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말도 읽고 사랑도 읽고 느낌도 모두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은 동시 한 줄을 쓸 적에 아주 깊고 너르면서 슬기로운 숨결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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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배움자리 61. 사름벼리 산들보라 이름



  어제 면소재지 놀이터에서 두 아이를 놀도록 하려는데, 이곳 초등학교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놀겠다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 이름을 묻는다. 그러면서 저희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이름이 ‘넉 자’이고 ‘성이 없다’고 하는 대목을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말한다. 여덟 살 큰아이는 이곳 학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아무 말을 못 하고 놀지도 못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타이를 수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아이들을 불러서 그만 가자고 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집이나 학교에서 이름이나 삶이나 동무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자전거를 달려서 면소재지를 벗어나 들길이 나올 무렵 큰아이한테 얘기한다. “벼리야?” “응?” “누가 벼리한테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어.” “누가 벼리한테 이름을 묻는다고 벼리 이름을 알려주지 마.” “응.”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어. 모르겠어.” “누가 벼리한테 이름을 묻는다고 벼리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어.” “알았어.” “누가 벼리한테 이름을 물으면,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먼저 말하라고 해. 자,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모르겠어. 다시 한 번 얘기해 줘.” “누가 벼리한테 이름을 물으면,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인지 먼저 말하라고 해. 자,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누가 벼리한테 벼리 이름을 물으면 말하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음, 못 들었어.” “그 사람한테 그 사람 이름을 먼저 말하라고 해.” “그 사람한테 그 사람 이름을 먼저 말하라고 했어요.” “벼리야, 이름이 뭔지 알아?” “음, 몰라.” “벼리하고 보라한테 붙인 이름은, 벼리와 보라가 이곳에 태어난 까닭이야. 그리고, 벼리와 보라가 앞으로 살아갈 사랑이야. 그래서, 벼리하고 보라 이름을 아무한테나 함부로 알려주지 않아. 마음으로 사귈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어른도 우리 아이들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들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도 못 알아듣기 일쑤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아이들 목소리와 눈높이에 제 마음을 맞추어서 귀여겨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읊는 말을 한 번에 다 알아들을 뿐 아니라 늘 잘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이런 이웃은 그야말로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똑같은 한 사람 숨결’로 아이들하고 마주하는 사람이다. 이런 이웃은 우리 아이들한테뿐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나 누구하고라도 아름다운 사랑을 맺는 멋진 숨결이다. 자전거를 들녘 한복판에 세운 뒤 큰아이하고 찬찬히 이야기를 더 나눈다. “벼리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한테나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을 말하지 않지?” “응.” “왜 그럴까?” “모르겠어.” “벼리야, 어머니 이름은 뭐지?” “응, 뭐더라.” “아버지 이름은?” “숲노래.” “그래, 어머니 이름은 라온눈이야.” “아, 그렇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스스로 붙인 이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 땅에 태어난 뜻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랑이야.” “응. 알았어.”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이름을 스스로 아끼면서 써. 벼리 이름도 보라 이름도 모두 뜻이 있고 사랑이야. 자,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벼리 이름에도 뜻이 있고 사랑이라고 했어요.” “우리 이 이름을 잘 생각하자.” 4348.9.2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집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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