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79 물구나무서기



  우리는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네 곳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새녘이나 하늬녘이라 하든, 이곳은 다른 데에서 보면 마녘이나 높녘이 됩니다. 새녘이라 할 곳은 따로 없고, 높녘이라 할 곳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됩니다.


  한복판이란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여기’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리가 한복판입니다. 왜 ‘어느 곳이든 언제 어디에서나 한복판이 되는가’ 하면, 참말 어느 곳이든 모두 한복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없습니다. 위와 아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름은 늘 ‘나’를 한복판에 놓고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서 새와 하늬가 갈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나눕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도 알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를 말하는데, 북반구라고 해서 똑바로 서지 않고, 남반구라고 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북반구이든 남반구이든, 또 적도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똑바로 서’고 ‘한복판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섬이 마녘에 있는 데가 아닙니다. 제주섬으로 치면 제주섬이 한복판입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다른 시골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길에서는 언제나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한복판’에서 ‘저 한복판’으로 가지 않는다면, 움직임이 생길 수 없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오롯한 하나’에서 ‘다른 오롯한 하나’로 갑니다.


  해에는 위나 아래가 있을까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별에 위나 아래가 있을까 헤아릴 노릇입니다. 해나 별이나 지구에서 위나 아래를 따지려 한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온누리에서 위아래를 따질 적에는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위’를 말하면 위는 언제나 곧바로 ‘아래’가 되고, ‘아래’를 말하면 아래는 늘 막바로 ‘위’가 됩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두 발은 하늘을 밟습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여느 때에는 땅을 두 발로 밟는 동안 두 손으로 하늘을 짚었구나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하늘을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사는 숨결입니다. 온별누리(은하계) 하늘을 늘 두 손으로 짚으면서 살아요.


  우주선을 타면 알 테지만, 우주선에서는 위나 아래가 없습니다. 거꾸로 나는 우주선은 없습니다. 늘 날아야 할 자리로 날 뿐입니다. 사람 몸에는 손과 발이 있는데, 왜 손과 발이 있느냐 하면, 손은 언제나 하늘을 짚어야 하고, 발은 언제나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 몸에 깃든 넋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넋이 생각을 지어서 심는 마음에는 손이나 발이 있을까요? 마음에 왼쪽이나 오른쪽이 있을까요? 사랑이나 꿈에 위아래가 있을까요? 넋이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을 크기로 따질 수 있을까요? 큰 마음이나 작은 마음이 있을까요?


  별에는 ‘별힘(당김힘, 중력)’이 있습니다. 별힘은 무엇인가 하면, 별이 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어느 별에서든 몸이 살려면 발이 있어서 땅을 밟아야 합니다. 어느 별에서든 ‘한복판’이 있기 마련이고, 한복판이 한 곳 따로 있기에, 이곳을 바탕으로 위아래나 옆이나 새·하늬·마·높 같은 자리를 따집니다.


  온별누리에는 ‘온별누리힘’, 다시 말하자면 ‘온힘’이나 ‘누리힘’이 있습니다. 온힘이나 누리힘에는 위아래나 크고작음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언제나 모든 자리에서 새로운 기운이 됩니다. 온별누리에서는 한복판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한복판입니다. 그러니 ‘별힘(당김힘, 중력)’이 없어서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모든 곳(온 곳)이 ‘모든 것(온 것)’이 됩니다.


  별을 바라볼 적에 삶을 배우고, 별누리를 살필 적에 넋을 살피며, 온별누리를 헤아릴 적에 사랑을 헤아립니다. 삶에는 바탕이 되는 한복판이 있습니다. 넋에는 위아래나 크기가 없습니다. 사랑은 가없이 넉넉하면서 끝없이 포근합니다. 별(지구별)에서는 따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하지만, 이 별에서 몸이라는 옷을 살며시 벗고 온별누리로 나아가는 숨결이 되면, 늘 홀가분하게 ‘고요춤’을 추는 새로운 밤무지개빛이 됩니다. 4348.3.22.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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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에서 읽다 만 책을 집에서



  어제 저녁에 장흥에서 바깥일을 보고 오늘 아침에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읽으려고 예닐곱 권을 챙겼다. 시외버스에서 여섯 시간 즈음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오늘 빗길에 구불구불 흔들리는 길을 시외버스가 빠르게 달리면서 뱃속에 많이 힘들었다. 어인 일인지 뱃속이 매우 힘들고 어지러워서 책을 거의 못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머리와 몸을 달래면서 드러눕다가 책을 조금 펼쳐 보았다. 시외버스에서는 도무지 눈에 안 들어오던 책이 집에서는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시외버스에서도 씩씩하게 어떤 책이든 잘 읽을 수 있도록 몸을 다스렸다고 여겼으나 아직 멀었네 하고 새삼스레 느낀다. 집에서 느긋하게 몸을 쉬면서 저녁밥도 못 차린다. 곁님이 아이들 저녁을 챙겨 주었다. 드러누워 책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기 앞서 아이들하고 영화를 보다가, 문득 한 가지를 더 헤아린다. 내 마음에 심는 씨앗이 무엇인가 하고. 아이들하고 이 보금자리에서 가꾸려는 꿈이 무엇인가 하고. 초 한 자루를 켜면서 고요히 마음을 돌아본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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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햇볕 먹는 나락

빗물 맞이하는 나락

바람 마시는 나락


흙이랑 노는 나락

풀벌레하고 나비랑 노는 나락

제비랑 참새랑 노는 나락


우리 아버지가 심은 나락

우리 어머니가 돌본 나락

이제

이 나락을

동생도 나도 낫 쥐고서

즐겁게 베어야지.



2015.9.30.물.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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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30일, 전남 장흥, 장흥도서관에서 장흥 어른이웃하고 청소년과 함께 모여서

이야기마당을 나누었다. 이때에 들려준 이야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또 궁금한 대목을 물어보는 대로 이야기를 했고,

이 글은 이야기마당에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

나중에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 써 둔 글이다.


..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살기

- 장흥 청소년과 어른들한테



  해마다 가을이면 고등학교 앞에는 뭔가 걸개천이 걸립니다. ‘뭔가 걸개천’이라고 했는데, 이 ‘뭔가 걸개천’이 그야말로 뭔가 하면 ‘대학입시’하고 얽힌 걸개천입니다. 서울 같은 큰도시이든 장흥이나 고흥 같은 작은 시골 군 단위이든, 고등학교 앞에는 어디에나 걸개천을 내걸지요. 대학교에서 붙이는 광고 걸개천도 있고, 학원에서 붙이는 광고 걸개천도 있으며, 무엇보다 학교에서 스스로 붙이는 걸개천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대학교에 얼마나 많이 보냈느냐’를 놓고 걸개천을 붙이는데, 이 가운데 ‘서울대학교’라는 곳에 한 아이라도 보냈으면 자랑하려고 애씁니다. 서울대학교에 아이들을 많이 보내는 학교라면 더욱 크게 자랑하기도 하겠지요.


  저는 고흥에서 살기에 고흥 이야기를 한다면, 고흥에서는 ‘서울대학교’가 아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라도 붙으면 걸개천을 큼지막하게 붙입니다. 학교 앞에도 붙지만 마을 앞에도 붙어요. 면소재지나 읍내에도 걸개천이 붙어요.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가 아니어도 ‘박사 학위’를 받는다든지 ‘진급·승진’을 한 일도 으레 걸개천을 붙여서 알립니다.


  장흥은 어떠한지 궁금하군요. 장흥도 고흥처럼 ‘군대에서 계급 하나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라든지 ‘공무원 급수가 하나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를 걸개천으로 붙이는지요?


  저는 고흥이라는 곳에서 산 지 다섯 해입니다. 처음 도시를 떠나 고흥에 올 적에 우리 식구를 보면서 ‘가서 잘 살라!’고 북돋운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시골로 간다고 해도 ‘도시하고 그렇게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 굳이’ 가야 하느냐고 묻기 일쑤였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보기라도 할 듯이 여기기도 했고, 도시하고 가까운 시골도 아니고 전라남도에서도 맨 끝자락, 게다가 장흥이든 해남이든 강진이든 그나마 길(고속도로)이라도 잘 뚫린 데도 아닌 고흥처럼 아주 구석진 곳으로 간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아마 도시에 사는 분들은 고흥이라는 곳을 잘 모르겠지요. 장흥이라는 곳도 잘 모를 테고요. 지도를 좍 펼쳐서 서울은 여기요 부산은 여기이고 고흥과 장흥은 여기라고 손가락으로 콕 찍으면 그제서야 ‘우와, 이렇게 멀리 있네!’ 하고 생각하리라 느낍니다.


  맞는 말입니다. 고흥이나 장흥은 도시하고, 아니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하고 아주 멉니다. 게다가 고흥은 광주하고도 시외버스로 두 시간이 넘는 길이에요. 거리로 치면 고흥하고 광주는 그렇게까지 멀지 않지만, 광주와 서울 사이를 오가는 길보다 광주와 고흥 사이를 오가는 길이 훨씬 멉니다. 같은 전라남도에 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고흥하고 장흥 두 곳을 오가는 길은 고흥이나 장흥에서 광주로 오가는 길보다 더 멀어요. 재미있는 일이에요. 장흥하고 고흥 사이를 오가는 시외버스는 하루에 꼭 한 번입니다. 그렇지만 장흥하고 고흥은 광주를 오가는 버스가 무척 많고, 서울로 오가는 버스도 너덧 차례가 넘어요.


  이제 한 가지를 이야기해 보지요.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시골에서 살든 서울 같은 큰 도시로 오가는 길은 가깝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서로 맞닿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서로 오가는 길이 무척 멉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으로 시골과 시골 사이를 다니려면 1박 2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곳이 있어요. 그런데, 시골과 시골 사이를 다니더라도 서울을 거치면 그리 멀지 않기 마련입니다.


  제가 왜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국은 무엇이든 서울 같은 큰 도시에 몽땅 쏠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와 청소년은 ‘서울에 그대로 남아서 서울에서 밀리지 않는’ 학교교육을 받습니다. 서울 아닌 다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와 청소년은 ‘서울로 들어가서 살아남는’ 학교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서울 아닌 다른 도시에서는 ‘서울로 못 가면 우리 도시에라도 남아서 살아남는’ 학교교육을 받아요. 자, 그러면 시골에서는 어떤 학교교육을 받을까요? 장흥이나 고흥 같은 시골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떤 학교교육을 받을까요?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장흥에 계신 분이라면 다 알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서울로 간다. 둘째, 서울 옆에 있는 인천에라도 간다. 셋째, 부산이나 대전처럼 큰 도시로 간다. 넷째, 정 안 되면 광주로 간다. 다섯째, 그도 안 되면 순천으로 간다. 여섯째, 그마저도 안 되면 읍내에 있는다. 그러면 일곱째는? 일곱째는 없어요. 장흥이나 고흥 같은 시골에서 받는 학교교육으로는 ‘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와 청소년이 바로 이 시골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사는 길’을 받지 못합니다.


  교과서를 보아도, 국정 교과서에서는 ‘시골 농사’를 안 가르칩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서 씨앗 갈무리와 씨앗 심기와 열매 거두기를 가르치는 교과목은 없습니다. 시골에서조차 농업고등학교가 사라져요. 요즈음 시골에 ‘농고’가 어디에 있을까요? 농사를 가르치는 학교는 몽땅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만합니다. 충청도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를 빼고는 농고라는 이름조차 안 써요. 그렇다고 홍성 풀무학교를 마치는 아이들이 다 농사꾼이 되지도 않아요. 풀무학교를 마친 아이들 가운데 농사꾼이 되겠다는 아이는 몇 사람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시골마다 늙은 할매와 할배밖에 없습니다. 젊은 농사꾼이 없습니다. 그나마 귀촌한 농사꾼이 있으면 삼십대나 사십대 농사꾼이 더러 있지요. 정년퇴직을 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육십대 농사꾼도 생기지요. 그런데, 이십대 농사꾼이 없어요. 십대 농사꾼은 더더구나 없지요.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농사는 농사가 아니라 ‘농업’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입니다. 화학농약과 화학비료를 잔뜩 쓰고 비닐과 시설과 기계를 잔뜩 쓰는 ‘산업인 농업’이에요. 이런 ‘농업’은 돈이 있고 땅도 넓어야 돈을 벌 만합니다. 그러니, 땅도 돈도 얼마 없는 젊은이는 농업 언저리에 들어서기도 어렵습니다.


  학교에서 받는 직업훈련은 ‘돈을 잘 버는 길’만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길을 열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스스로 꿈을 키우는 직업을 찾도록 도우려 하지요. 부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알맞게 벌어서 즐겁게 삶을 가꾸는 직업을 찾아서 살도록 이끌려고 합니다.


  그러면,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돈 많이 버는 농업’이 아니라 ‘알맞게 자급자족을 하면서 스스로 꿈을 키우는 길’을 가도록 돕는 ‘시골학교 교육’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돈을 버는 농업이 아니라 자급자족을 하는 농사를 짓는다면, 네 식구를 잣대로 삼으면 논 100평이면 네 식구 먹을 쌀을 얻고도 남습니다. 100평 논농사로도 이듬해에 심을 씨나락을 남기고 밥도 배불리 먹어요. 다만 ‘돈’은 안 남지요. 김치를 담거나 반찬으로 삼을 텃밭을 가꿀 적에는 몇 평이 있으면 될까요? 다섯 평이나 열 평으로도 넉넉해요. 스무 평 텃밭을 가꾸면, 무나 배추는 다 못 먹고 이웃한테 나누어 주어야겠지요.


  자급자족을 하는 농사로 논밭을 일구면 이러한 들일은 매우 수월합니다. 시간이 그리 많이 안 듭니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살며 자급자족으로 논밭을 ‘완전한 자연농’으로 하면서 ‘돈이 되는 일’을 따로 거느릴 수도 있어요. 돈을 굳이 바라지 않는다면, 자급자족을 하면서 오일장에 내다 팔 푸성귀를 조금 더 지어서 살림돈을 이럭저럭 얻을 수 있겠지요.


  장흥이나 고흥쯤 되면 시골이라면, 우리 장흥군이나 고흥군은 이곳이 ‘도시’가 아닌 ‘시골’인 줄 똑똑히 깨닫고, 제대로 바라보면서, 장흥 어린이와 고흥 어린이가, 또 장흥 청소년과 고흥 청소년이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기쁨과 보람’을 누리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지 싶습니다. 요즈음 도시에서 시골로 귀촌하려는 사람들은 땅이나 집을 마련하려고 그렇게 머리를 태우고 근심걱정도 크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그대로 시골에서 살 수 있으면, 머리를 태우거나 근심걱정을 할 일이 없어요.


  도시로 가서 이름을 드날리거나 큰돈을 벌어들이거나 자가용을 몰거나 큰 아파트를 거느린다면 ‘성공’을 했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성공’을 했다고 할 적에 즐겁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느긋하게 웃고 넉넉하게 노래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면 즐겁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자, 둘레를 살펴보셔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일에 치여서 죽으려고 합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휴가 한 번 받으려고 그야말로 죽을 동 살 동 밤을 새우면서 회사에 얽매입니다. 그러다가 기껏 이레쯤 휴가랍시고 받아서 어디를 가나요? 서울에서 휴가를 누리나요? 외국에 나가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서울사람은 ‘바람과 물 맑고 숲과 나무 아름다운 시골’로 가려고 해요.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와 청소년을 도시로 보내려고 안달을 하고 용을 쓰는데, 정작 도시사람은 ‘어떻게든 아득바득 휴가를 내어 시골로 휴가를 가서 몸과 마음을 쉬려’고 합니다. 참 웃기고 재미있는 노릇이에요. 시골사람은 시골을 싫어하고, 들과 숲과 골짜기와 바다와 멧등성이와 냇물만 있는 이 시골을 안 좋아하지만, 서울사람은 바로 이러한 시골을 그리워 하니까요.


  서울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움직입니다. 시골에서는 언제나 흙으로 움직입니다. 서울에서는 무엇이든 대형 발전소나 원자력 발전소에서 뽑아낸 전기하고 석유가 있어야 움직입니다. 시골에서는 햇볕과 바람과 냇물로 움직입니다. 서울에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니면 밟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풀과 꽃과 나무를 언제 어디에서라도 만집니다.


  나무 한 그루는 돈으로 사서 키우지 못합니다. 백 년 된 나무나 오백 년 된 나무는 돈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으리으리한 도시 건물도 백 년을 못 버티지요. 서울에 있는 63빌딩은 앞으로 언제까지 버틸까요? 서울에서 40층이나 50층으로 솟는 아파트는 앞으로 언제까지 버틸까요? 그런 집이나 건물이나 아파트나 상가가 몇 억이나 수십 억원이라 하더라도 고작 100년은커녕 50년도 못 버텨요. 그런데 시골에서는 50년 된 나무는 아직 ‘아기 나무’입니다. 적어도 200년이나 300년쯤 되는 나무라야 그늘도 아름답고 우거져서 멋지지요. 그리고 500년 된 나무를 베어서 지은 시골집은 목숨이 500년입니다. 300년 된 나무를 베어서 지은 시골집은 목숨이 300년이에요. 이를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면, 천 년 된 나무를 베어서 지은 시골집은 천 년을 갈 테지요? 무량수전이라고 하는 절집이 천 년을 넘도록 버틸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수수께끼와 실마리가 함께 있습니다.


  우리 시골사람은 시골을 먼저 제대로 바라보고 알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시골부터 제대로 바라보고 배우면서 이 시골마을을 어린이와 청소년이 제대로 알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골에서 사는 어른들도 이 시골이 어떠한 삶터요 보금자리인가를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배워야지요.


  장흥에 계신 어른들이 아시는가 모르겠지만, 서울사람은 서울 막걸리를 마셔도, 맛없는 수돗물에다가 수입 쌀과 밀을 섞은 막걸리를 마십니다. 장흥에도 수입 쌀이나 밀을 섞은 막걸리가 있을 테지만, 장흥은 맑은 물을 바탕으로 이 고장 쌀로 멋지게 빚은 막걸리가 있겠지요. 늘 마시는 바람하고 물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 사람이 살기에도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서울은 사람이 많이 살아서 돈 될 일이 많은 곳이니,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란다면 서울에 가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아야지요. 서울에서는 돈만 많이 벌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맑은 바람이나 물은 바랄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맑은 물을 돈을 비싸게 치러서 사다 마셔야 할 테지만, 시골에서는 맑은 물을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껏 누립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사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제가 사는 고장인 고흥에서 나고 자라는 어린이와 청소년과 어른이 이 시골마을을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같은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바로 숲이라고 하는 터전, 시골이라고 하는 터전, 흙이랑 풀이랑 풀을 만지면서 삶을 짓는 터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국어학자가 돌보거나 가꾸는 한국말이 아니라, 시골사람이 시골스러운 손길로 시골스러운 사랑을 북돋울 때에 새롭게 태어나는 한국말이에요. 고맙습니다. 2015.9.2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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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생각합시다 8

 

 한자말을 쓰지 말자?

 

  나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나는 언제나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말로 녹아든 ‘한자로 지은 낱말’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낱말’이나 ‘영어에서 온 낱말’이라면, 모두 똑같이 한국말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국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게 씁니다. 다만, ‘한자로 지은 티’가 풀풀 나는 한자말은 굳이 안 씁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내 온 사랑을 듬뿍 담아서 즐겁게 쓰면서 기쁘게 삶을 노래하도록 생각을 북돋우는 한국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우리는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으면 돼요. 우리는 서로 마음이랑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으며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돼요.


  눈을 감고 바라보셔요. 무엇이 보일까요? 눈을 감은 눈으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두 눈을 감고 서로 바라본다면, 네 얼굴이나 키나 몸짓은 하나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두 눈을 감고 서로 마주한다면, 네가 아무리 부자이거나 가난뱅이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대목도 처음부터 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을 나눌 적에도 언제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자말을 덕지덕지 넣는 말투’인가 ‘토박이말이라고 하는 말로 꾸민 말투’인가를 살필 일은 없습니다. 어떤 낱말을 골라서 쓰든 낱말 하나는 그 사람 삶이고 몸짓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 삶하고 몸짓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서야 그 사람 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자말을 쓰지 않는 일을 하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말을 찾아서 즐겁고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아이들하고 아름답게 나눌 말을 즐겁게 헤아려 보셔요. 시골 할매랑 할배하고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기쁘게 헤아려 보셔요. 우리 이웃하고 나눌 말을 가만히 살펴요. 내 마음이 네 마음에 닿고, 네 마음이 내 마음에 닿을, 마음꽃을 피울 말을 생각해서 써요. 그러면 됩니다. 4348.10.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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