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반달 그림책
성영란 글.그림 / 반달(킨더랜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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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9



조용하게 찾아온 기쁜 ‘어떤 날’

― 어떤 날

 성영란 글·그림

 반달 펴냄, 2015.9.14. 14000원



  숨바꼭질하고 술래잡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손을 재빠르게 놀려서 뭔가를 숨기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두 손을 써서 구슬 감추기를 할 적에도 잘 못 맞히지요.


  따로 숨바꼭질이 아니어도 집안에서 아무 말을 않고 조용히 어디엔가 숨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기도 합니다. 퍽 어린 두어 살이나 너덧 살 아이들도 어머니나 아버지가 뒷밭이나 뒤꼍 같은 데에서 조용히 풀을 베거나 씨앗을 심어도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곤 합니다. 시골집은 뒷간이 집 바깥에 있습니다. 볼일을 보러 뒷간에 웅크리고 앉아도 사람이 없는 줄 여기지요. 일고여덟 살쯤 되면 집안이 조용할 적에 ‘모두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찾지만, 나이가 이 밑인 아이들은 으레 울음부터 터뜨립니다.



다들 어디 갔지? (4쪽)





  성영란 님이 빚은 그림책 《어떤 날》(반달,2015)을 조용히 읽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고 하는 성영란 님은 어느 ‘어린 날’에 겪은 ‘어떤 날’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이니 조용하게 책을 넘기면서 시골 어린이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마 해남이 아닌 서울이라면, 강진이 아닌 부산이라면, 장흥이 아닌 인천이라면, 고흥이 아닌 대구라면, 사천이 아닌 대전이라면, 통영이 아닌 광주라면, 이처럼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는 매우 드물거나 겪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자동차 한 대도 어쩌다가 지나갈 동 말 동하는 시골마을에서 노는 시골 아이 삶자락이니, 어느 날 문득 “다들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릴 만합니다.



혼자 노니까 재미도 없고 (19쪽)




  아이는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났을까요? 책이라도 빌려서 읽다가 문득 둘레가 아주 조용한 줄 느꼈을까요? 숙제를 하다가, 아니면 공부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소꿉놀이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가위로 종이인형을 오리다가, 내 둘레에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줄 느꼈을까요?


  다른 때에는 혼자 놀아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뛰고 달려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음껏 놉니다. 다른 때에는 동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다른 때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데 둘레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떤 날’에 비로소 나는 깨닫습니다. 이 땅에, 이 마을에, 이 집에, 바로 이곳에 나 혼자만 있지 않은 줄 깨닫습니다. 다 같이 어우러져서 마을을 이루고 보금자리를 이루며 삶을 이루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22쪽)




  아무라도 만나려고 집을 나섭니다. 누구라도 찾아보려고 고샅을 걷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귀를 댑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헤아립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어떤 날’에는 구름조차 안 보이고, 바람조차 안 붑니다. 그야말로 고요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요. 어디 먼 데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는 부릅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넋을 차립니다. 어머니한테 달려갑니다. 이윽고 동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걷다가 자꾸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돌립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다가 내 손을 놓고, 나는 동무들이 부르는 곳으로 땀이 나도록 달려갑니다.



다들 어디서 나타났지? (32쪽)




  먼 별나라에서 우주선이라도 날아와서 나를 살짝 데려갔다가 이곳에 도로 데려다주었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먼 어느 곳을 나들이하다가 문득 바로 이곳으로 돌아왔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스라한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갔다가 조용히 이 자리에 다시 왔을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아무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 이야기를 가만히 아로새깁니다. 아리송한 어떤 날 이야기를 가슴에 묻습니다. 알쏭달쏭한 어떤 날 하루를 가슴에 씨앗처럼 심습니다. 나를 다시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보며, 동무들하고 이웃들을 다시 보던 어떤 날 이야기를 고이 되새깁니다.


  그림책 《어떤 날》은 우리가 늘 맞이하는 하루가 ‘늘 같지’는 않은 줄 넌지시 보여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는 언제나 ‘오늘 하루’뿐이면서 ‘내 삶에서 꼭 하루’뿐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그립니다.


  가을볕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샛노란 들녘을 어루만지는 시월에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오늘 누릴 즐거움과 재미와 웃음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밥 한 그릇 맛나게 비우고 마실을 다녀와야겠어요. 자전거를 꺼내어 천천히 논둑길을 달려야겠어요. 들내음을 마시고 가을바람을 먹으면서 햇볕도 듬뿍 쬐어야겠어요. 새로운 ‘어떤 날’로 내 가슴속에 드리울 수 있도록.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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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 가니까 누나야 기다려



  누나가 앞장서서 달려도 산들보라는 더 악이나 떼를 쓴다. 다만, 요새는 “누나야, 기다려!” 하고 부른다. 때로는 “벼리야, 기다려!” 하고 부르는데, 이때에 큰아이는 “벼리야가 아니지, 누나야라고 해야지.” 하고 바로잡아 준다. 그나저나 너희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는 뒤에, 한참 뒤에 놔두고 너희끼리 저 멀리 앞장서서 갈 셈이니. 너희 아버지는 안 기다려 줄 셈이니.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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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구슬나무가 있던 자리에



  고흥읍 한쪽에 냇물이 흐르고, 냇가를 따라 크고작은 나무가 많았다. 짧은 다리 한쪽에는 꽤 우람한 멀구슬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군청에서는 나무가 우거졌던 자리를 밀어서 시멘트를 덮더니, 다시 시멘트로 기둥을 받치면서 주차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주차장을 마련한 지 한 해 즈음 된 얼마 앞서 ‘멀구슬나무가 있던 자리’에 꽃밭을 마련해 놓았다.


  무슨 짓일까? 주차장으로 바꾸었으면 그냥 주차장으로 두든지, 꽃 한 송이나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도 없어서 메말라 보인다면 처음부터 우람한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든지. 도무지 한치 앞조차 내다보지 못하거나 않는 행정이라면, 이러한 행정은 앞으로 또 무슨 짓을 벌일까.


  나무를 그대로 두고, 풀밭을 그대로 두며, 냇물을 그대로 두는 길이 바로 ‘가장 잘하는 정책이자 행정’이다. 도랑에 시멘트를 퍼붓지 말고, 논둑을 시멘트로 바꾸지 않는 길이 바로 ‘가장 잘하는 정책이자 행정’이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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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아이 172. 바람개비 싱싱싱 (15.9.24.)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드디어 바람개비를 돌린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종이가 젖으니 마당을 달리지 못하지만, 비가 그친 뒤에는 맨발로 마음껏 마당을 가로지른다. 이리 가로지르고 저리 가로지르면서 바람개비가 싱싱싱 돌도록 힘차게 달린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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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는 학교가 싫다 난 책읽기가 좋아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 비룡소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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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13



꾸지람만 듣는 학교에 누가 가고 싶을까

― 올가는 학교가 싫다

 준비에브 브리작 글

 미셸 게 그림

 김경온 옮김

 비룡소 펴냄, 1997.7.11. 6500원



  우리 집 큰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할 만한 것이 없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기도 했고, 큰아이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가기도 합니다. 흔히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아이한테 함부로 ‘의무’를 들이밀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로만 가르치고,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며,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을 치르는 점수에 맞추어 대학 줄세우기를 시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이 ‘집짓기’를 배울 수 있다면 기쁘게 학교에 보낼 만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옷짓기’를 익힐 수 있다면 즐겁게 학교에 보낼 만하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밥짓기’를 지켜보면서 손수 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신나게 학교에 보낼 만해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오직 ‘교과 수업’과 ‘학습 활동’뿐입니다.



올가 물건은 한 번씩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음메’ 하고 우는 젖소 인형, 일곱 식구 트럼프 놀이, 면이 아홉 개인 주사위, 타고 남은 성냥개비들, 상자를 열면 갑자기 튀어 나오는 꼬마 도깨비, 박하껌 두 개, 유아원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남자 친구 살뱅과 함께 파리잡이 끈끈이를 만들려고 둔 투명 테이프 등이었다. (8쪽)



  준비에브 브리작 님이 글을 쓰고, 미셸 게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올가는 학교가 싫다》(비룡소,1997)를 읽습니다. 《올가는 학교가 싫다》에 나오는 ‘올가’라는 아이는 학교에 처음 들어간 아이로구나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몇 살부터 학교에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일고여덟 살로 보입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언제나 제 가방에 온갖 장난감을 챙깁니다. 문방구 가게 임자가 되려면 온갖 장난감을 다룰 줄 알고, 만들기도 해야 하며,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 올가는 교과서나 공책이나 다른 것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만 온마음을 쏟습니다.



올가는 엄마에게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선생님이 여기다가 뭐라고 써 주셨는데, 뭔지 모르겠어. 나는 읽을 줄 모르잖아. 엄마, 나는 책읽기를 배우고 싶지도 않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읽을 줄 알아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 (12쪽)



  이야기책을 가만히 읽으면, 올가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가한테 거의 아무런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이야기를 거의 안 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아이 어머니도 아버지도 거의 안 듣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빠서 안 들을 뿐 아니라, 이내 잊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 그러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하느라 바빠서 아이 얼굴을 볼 틈도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빙그레 웃습니다. 아니, 한국만 이런 모습이 아니네 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서도 이러네 하고.


  게다가 학교에서도 올가는 고단합니다. 올가가 다니는 학급을 맡은 교사는 올가하고 말을 제대로 섞지 않습니다. 그저 올가 가방에 있는 장난감을 아무 말 없이 몽땅 빼앗을 뿐입니다. 장난감만 챙긴다고 해서 아이를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꾸짖을 뿐입니다. 아이한테 왜 이런 장난감을 챙기느냐고 차분히 묻지 못하는 교사요, 아이한테 부드럽거나 따스한 말로 ‘학교에서 무엇을 하면서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교사입니다.



올가는 저녁마다 자그마한 깜짝쇼가 벌어지지 않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올가는 엄마가 더 이상 선물을 하지 않으니까 이젠 자기가 엄마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일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19쪽)


“엄마! 엄마는 왜 내 목걸이 선물을 받고서 그걸 목에 걸지 않는 거야?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올가는 뾰로통해졌다. (22쪽)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교사가 훌륭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훌륭해야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사라는 자리에 서려면 ‘교과서 수업 진도 나가기’가 아닌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 마음을 읽고 아이한테 무엇을 즐겁게 가르쳐서 이 아이가 아름답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을 먼저 차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훌륭한 교사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아침부터 저녁(이나 낮)까지 마주하는 어버이 같은 몫을 맡는 교사라면, 아이가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북돋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연락장에는 날마다 선생님 편지가 씌어 있었다. 올가가 가지고 가는 수집품들은 뭐든지 다 압수당했고, 분명한 이유조차 모르면서 올가는 늘 야단맞았다. 그래서 올가는 늘 허둥거렸으며,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소란부터 떨곤 했다. (34쪽)



  이야기책을 덮고 한국 사회를 돌아봅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는 온갖 행정서류가 넘쳐서 학교에서 교사가 고달팠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으로 갖가지 ‘수행 결과 입력’을 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라기보다 ‘서류 처리반’ 같은 얼거리요, 교사가 교사로서 아이들을 느긋하고 넉넉하게 마주하기 힘들도록 내모는 행정 얼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이 이름 그대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생도, 이 이름 그대로 아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삶을 누린 뒤 이 삶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이끄는 사람입니다.


  아이를 낳기만 한대서 어버이가 아닙니다.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서 아낄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를 따사로이 아끼고 살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삶꽃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올가와 실뱅은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놀이를 했다. 올가가 선생님을 했고, 실뱅이 학생들 모두를 맡았다. 학생들 중에는 올가사 소피처럼 착한 아이도 있었고, 오스카 패거리나 실뱅과 고티에처럼 못된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엄격했다. 그러면서도 공정했다. 선생님은 착한 아이들을 칭찬했고, 못된 아이들에게는 벌을 주었다. (53∼54쪽)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 삶을 기쁘게 누리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공부해야 하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고 튼튼하게 자라면서 마음껏 웃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하는 숨결입니다.


  꾸지람만 듣는 학교라면 아무도 안 가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겁게 꿈꿀 수 있는 학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요. 윽박지르기만 하는 집이라면 이러한 집에서 살고픈 아이는 없을 테지요. 아무도 아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학교도 집도 모두 싫을 테지요.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도 이와 똑같습니다. 꾸지람만 듣는 회사에 가고 싶은 어른이 있을까요.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려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어른이 있을까요. 아이들은 참고 참습니다. 아이들은 참고 참다가 ‘선생님놀이’나 ‘학교놀이’를 하면서 겨우 버팁니다.


  어른들이 바쁘지 않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이 아이한테 기쁜 사랑을 아름답게 가르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0.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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