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413) 급하다急


 급한 일 → 바쁜 일

 돈이 급하다 → 돈이 빨리 있어야 한다

 급하게 먹다 → 바삐 먹다 / 헐레벌떡 먹다

 급하게 서두르다 → 허둥지둥 서두르다 / 허겁지겁 서두르다

 마음만 급하지 → 마음만 바쁘지

 병세가 급하다 → 병세가 깊다 / 병세가 안 좋다

 급하게 경사지다 → 매우 비탈지다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 비탈이 가파른 곳에서는

 개울은 물살이 급해서 → 개울은 물살이 빨라서


  외마디 한자말 ‘급하다(急-)’는 “1. 사정이나 형편이 조금도 지체할 겨를이 없이 빨리 처리하여야 할 상태에 있다 2. 시간의 여유가 없어 일을 서두르거나 다그쳐 매우 빠르다 3. 마음이 참고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조바심을 내는 상태에 있다 4. 병이 위독하다 5. 성격이 팔팔하여 참을성이 없다 6. 기울기나 경사가 가파르다 7. 물결 따위의 흐름이나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처럼 일곱 가지로 쓰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뜻을 살피면 처음부터 ‘바쁘다’나 ‘서두르다’나 ‘조바심을 내다’나 ‘병이 깊다’나 ‘참지 못하다’나 ‘가파르다’나 ‘(물살이) 빠르다’로 쓰면 될 노릇입니다. 한국말로 알맞게 쓰면 되는데, 한국말로 슬기롭게 쓰지 못한 탓에 자꾸 ‘急하다’ 같은 외마디 한자말을 끌어들이고 맙니다. 4348.10.21.물.ㅅㄴㄹ



선물이란 언제나 받는 사람의 마음을 급하게 만드는 법이다

→ 선물이란 언제나 받는 사람 마음을 바쁘게 하는 법이다

→ 선물이란 언제나 받는 사람 마음을 서두르게 하는 법이다

《준비에브 브리작/김경온 옮김-올가는 학교가 싫다》(비룡소,1997) 20쪽


급하게 지나쳐 갈 수 있다

→ 얼렁뚱땅 지나쳐 갈 수 있다

→ 설렁설렁 지나쳐 갈 수 있다

→ 후다닥 지나쳐 갈 수 있다

→ 빨리 지나쳐 갈 수 있다

《가와이 에이지로/이은미 옮김-대학인, 그들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유원,2003) 14쪽


다른 아이들이 급하게 자라는 것뿐

→ 다른 아이들이 일찍 자랄 뿐

→ 다른 아이들이 빨리 자랄 뿐

→ 다른 아이들이 바삐 자랄 뿐

→ 다른 아이들이 서둘러 자랄 뿐

《추둘란-콩깍지 사랑》(소나무,2003) 52쪽


급한 경사를 이루며

→ 가파르게 기울어지며

→ 가파른 비탈을 이루며

 가파르며

《셀마 라게를뢰프/배인섭 옮김-닐스의 신기한 여행 1》(오즈북스,2006) 125쪽


나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바쁜 나머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바빠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호-할아버지의 뒤주》(사계절,2007) 147쪽


급해!

→ 바빠!

→ 서둘러!

→ 어서!

→ 빨리!

《배유안-분황사 우물에는 용이 산다》(파란자전거,2010) 85쪽


나는 마음이 급해

→ 나는 마음이 바빠

→ 나는 서두르고 싶어

《박금선-내가 제일 잘한 일》(샨티,2015) 17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적' 없애야 말 된다

 (1761) 모범적


 모범적 사례 → 모범 사례 / 좋은 보기

 모범적 운영 → 모범 운영 / 훌륭한 운영

 모범적인 학생 → 모범 학생 / 훌륭한 학생

 일을 모범적으로 하다 → 일을 훌륭히 하다 / 일을 잘 하다

 먼저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면 → 먼저 모범을 보이면


  ‘모범적(模範的)’은 “본받아 배울 만한”을 뜻한다고 합니다. ‘본(本)받다’는 “본보기로 하여 그대로 따라 하다”를 뜻하고, ‘본(本)보기’는 “본을 받을 만한 대상”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말뜻이 빙글빙글 돕니다. 마지막으로 ‘본(本)’을 찾아보기 “= 본보기”로 풀이합니다.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한국말사전입니다.


 모범적인 교사 → 모범 교사

 모범적인 사람 → 훌륭한 사람 / 좋은 사람

 모범적인 모습 → 모범이 되는 모습 / 배울 만한 모습 / 좋은 모습


  쉽게 헤아려 본다면, “보기로 삼아 배울 만한”을 가리키는 ‘모범’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모든 ‘모범적’에서 ‘-적’을 덜어내면 됩니다. “모범적인 운영”이 아니라 “모범이 되는 운영”이거나 “배울 만한 운영”이나 “훌륭한 운영”이거나 “좋은 운영”입니다. “모범적으로 살다”가 아니라 “모범이 되어 살다”나 “배울 만하게 살다”나 “훌륭하게 살다”나 “아름답게 살다”이지요.


  한자말 ‘모범(模範)’까지 안 써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 한자말을 알맞게 쓸 수 있다면 알맞게 쓰면 됩니다. 다만, ‘-적’을 붙일 까닭이 없으며, 이야기 흐름에 맞추어 “배울 만한”이나 “훌륭한”이나 “좋은”이나 “아름다운”으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법을 지키는 일을 ‘모범적으로’ 한다면 이때에는 ‘올바로’ 지킨다고 손질할 만합니다.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때에는 ‘틀에 박힌’ 모습으로 보인다고도 할 만합니다. 4348.10.21.물.ㅅㄴㄹ



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 법을 누구보다 잘 지키며

→ 법을 앞장서서 지키며

→ 법을 훌륭히 지키며

→ 법을 올바로 지키며

《편집부 엮음-슬기로운 겨레녀성들·기업인편》(료녕민족출판사,1997) 2쪽


지나치게 모범적인 느낌이라 싫지만

→ 지나치게 모범생 같아서 싫지만

→ 지나치게 훌륭한 느낌이라 싫지만

→ 지나치게 잘 짜인 느낌이라 싫지만

→ 지나치게 틀에 박힌 느낌이라 싫지만

《니노미야 토모코/서수진 옮김-노다메 칸타빌레 12》(대원씨아이,2005) 155쪽


모범적인 직장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 모범이 되는 직장 생활을 해 나가는

→ 보란 듯한 직장 생활을 하는

→ 훌륭하게 직장을 다니는

→ 훌륭하게 직장 일을 하는

《문흥미와 여덟 사람-이어달리기》(길찾기,2006) 5쪽


나는 그곳에서 지극히 모범적으로 평범했다

→ 나는 그곳에서 아주 모범이 되도록 수수했다

→ 나는 그곳에서 아주 보란 듯이 수수했다

《박금선-내가 제일 잘한 일》(샨티,2015) 7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80) 너의


 우리 집 . 내 집 . 네 집 (o)

 우리의 집 . 나의 집 . 너의 집 (x)


  ‘나의’와 함께 잘못 쓰는 말이 ‘너의’입니다. 한국말은 ‘내’와 ‘네’입니다. “내 의무”이고 “네 의무”이지, “나의 의무”나 “너의 의무”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나라”처럼 잘못 쓰는 말투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라”처럼 옳게 써야 하는 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네 목소리가 들려

 너의 뒤에서 → 네 뒤에서

 너의 얘기를 들어줄게 → 네 얘기를 들어줄게

 너의 하늘을 보렴 → 네 하늘을 보렴


  한국말은 오직 ‘네’ 하나입니다. ‘너 + 의’ 꼴로 쓰는 모든 말투는 틀립니다. 글흐름을 살펴서 ‘자네’나 ‘너희’나 ‘너네’나 ‘그대’를 넣을 수 있습니다. 4348.10.21.물.ㅅㄴㄹ



너의 교실이야

→ 네 교실이야

→ 너네 교실이야

→ 너희 교실이야

→ 네가 갈 교실이야

 네가 배우는 교실이야

《김수정-홍실이》(서울문화사,1990) 130쪽


너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네가 할 일을

→  할 일을

→ 네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 스스로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하트마 간디/진영상,함석헌 옮김-날마다 한 생각》(호미,2001) 174쪽


우리가 너의 눈이 되어 줄게

→ 네게 눈이 되어 줄게

 네 눈이 되어 줄게

→ 너한테 눈이 되어 줄게

《오오니시 덴이치로/이규원 옮김-너의 눈이 되어 줄게》(청어람미디어,2003) 61쪽


너의 얼굴이 이미 주름지고

→  얼굴이 이미 주름지고

→ 그대 얼굴이 이미 주름지고

《홍대용/이숙경,김영호 옮김-의산문답》(꿈이있는세상,2006) 32쪽


너의 배운 것부터

→ 네가 배운 것부터

→ 자네가 무엇을 배웠는가부터

 그대 배움부터

《홍대용/이숙경,김영호 옮김-의산문답》(꿈이있는세상,2006) 32쪽


너의 부모님이 아는 사람

 너희 부모님이 아는 사람

→ 네​ 부모님이 아는 사람

→ 너네 부모님이 아는 사람

《카롤린 필립스/유혜자 옮김-황허에 떨어진 꽃잎》(뜨인돌,2008) 23쪽


너의 꿈을 부지런히 키우며

 네 꿈을 부지런히 키우며

→  마음에 품은 꿈을 부지런히 키우며

→ 네가 ​품은 꿈을 부지런히 키우며

→ 네가 이루고픈 꿈을 부지런히 키우며

《최광호-사진으로 생활하기》(소동,2008) 66쪽


너의 목소리

→  목소리

→ 네가 들려주는 목소리

→ 네가 말하는 목소리

《강무지-다슬기 한 봉지》(낮은산,2008) 153쪽


너의 엄마 말을 듣고

 너희 엄마 말을 듣고

 네 엄마 말을 듣고

 너네 엄마 말을 듣고

《카롤린 필립스/유혜자 옮김-황허에 떨어진 꽃잎》(뜨인돌,2008) 171쪽


너의 방문에

→  방문에

→ 네가 와 주어

→ 네가 찾아 주어

→ 네가 찾아와 주어

《빈센트 반 고흐/박홍규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2009) 101쪽


너의 좋은 점이야

→  좋은 점이야

→  좋은 구석이야

→ 너한테 좋은 모습이야

《이와오카 히사에/오지은 옮김-토성 맨션 2》(세미콜론,2009) 153쪽


너의 삼촌 되는 어른

→  작은아버지 되는 어른

→ 너한테 작은아버지 되는 어른

→ 네게 작은아버지 되는 어른

《현덕-광명을 찾아서》(창비,2013) 39쪽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  머리를 살짝 빌리기로 하자

《안희연-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 46쪽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 보기도 하는

→ 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보기도 하는

《안희연-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 4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겹말 손질 368 : 원하다 바라다


원하고 바라는

→ 바라고 바라는

→ 바라 마지않는

→ 바라디바라는

→ 바라는


원(願)하다 : = 소원하다

소원(所願)하다 : 바라고 원하다


  한국말사전에서 ‘원하다’ 같은 외마디 한자말을 찾아볼 사람이 있을까요? ‘원하다’는 ‘소원하다’하고 뜻이 같다고 하는데, ‘소원하다’는 “바라고 원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아주 돌림풀이입니다. 이래서야 말뜻을 짚을 수조차 없습니다. 다시 ‘바라다’를 찾아보면, “1. 생각이나 바람대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다 2. 원하는 사물을 얻거나 가졌으면 하고 생각하다 3. 어떤 것을 향하여 보다”로 풀이합니다. 이제 ‘바라다 = 바람을 이루다’나 ‘바라다 = 원하다’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한국말사전 말풀이부터 겹말풀이인 터라, “원하고 바라는”처럼 쓰는 분이 많은 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는지 모릅니다. 애타게 바란다면 같은 말을 되풀이할 만한데, 참으로 애타게 바란다면 “바라고 바라는”이나 “바라 마지않는”이나 “애타게 바라는”처럼 쓰면 됩니다. 4348.10.21.물.ㅅㄴㄹ



원하고 바라는 그것을 꺼내세요

→ 참으로 바라는 그것을 꺼내세요

→ 더없이 바라는 그것을 꺼내세요

《박금선-내가 제일 잘한 일》(샨티,2015) 6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화창 세계사 시인선 143
김영승 지음 / 세계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101



맑은 마음이 되어 살림을 꾸리는 밑힘

― 화창

 김영승 글

 세계사 펴냄, 2008.6.30. 6000원



  어제는 낮부터 집안을 신나게 치웠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안을 새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제는 겨울옷을 꺼내어 마당에 말렸고, 오늘은 깔개 하나만 마당에 말리고는 뚝딱뚝딱 책꽂이하고 피아노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이동안 두 아이는 어딘가에서 흙을 퍼 와서 마당에 쏟아부으면서 놉니다. 어쩌다가 누구한테 잡혀서 죽고 만 범나비 애벌레 곁에서 무덤도 살짝 덮어 주면서 흙놀이를 합니다.


  끝방에서 피아노를 빼내어 컴퓨터 있는 방으로 나를 즈음 큰아이가 묻습니다. “도와줄까?” 그렇지만 너는 이 피아노를 밀지도 못하는걸. 큰아이는 몸을 피아노에 붙이고 영차영차 용을 씁니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옮겨?” 그러게 말야. 피아노는 두 사람이서 날라야 하는데 혼자서 하자니 아주 죽겠는걸.


  온통 나무조각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이니 무거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끝끝내 옮기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톡톡 쓰다듬으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 봅니다. 얘 피아노야, 마루를 살살 굴러서 옆방으로 가 보자. 우리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곧바로 피아노를 보며 ‘아침에 즐겁게 노래 한 가락 치면서 열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렴, 하고 속삭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오늘은 이만큼만 하고 이튿날 마저 해야겠네.” “그럼요. 오늘 아버지 피아노 나르느라 힘들었잖아요. 다 알아요.”



사진은 /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영정이고 / 權威를 획득하게 된다 (사진)


미친 개나리인 줄 알았더니 / 개나리 비슷한 안 미친 식물이었다 / 그 식물께 미안했다 // 남녘 어딘가에 개나리가 피었다는데 // 내 나이가 47인지 48인지 몰라 / 물어보았다 (미친 개나리)



  맑은 마음이 되어 살림을 꾸리는 밑힘이라면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지 싶습니다. 예부터 집집마다 아이들이 참으로 많았어요. 예부터 집집마다 손수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지었어요. 그 많은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어떻게 옷이며 밥이며 집이며 손수 지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와 삶터가 모두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살림을 꾸리는 동안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몸을 쓰는 힘’으로 살림을 거들지 않아도 언제나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쓰는 마음이야말로 어버이나 어른이 새롭게 기운을 내도록 북돋우는 밑바탕이 됩니다.


  김영승 님 시집 《화창》(세계사,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하늘이 맑게 개고,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갭니다. 하늘이 맑게 갠다는 말은, 구름이 가득 끼어 찌푸리던 하늘이 새롭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갠다는 말은, 온갖 근심에 걱정에 시름에 짜증에 골부림이 가득하던 마음속이 새롭게 트인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없어질까 // 천국이니 지옥이니 / 무인도니 // 관념의 공간들은 이미 / 가득 차 // 갈 곳도 없구나 (병술 대보름)


大地는 地雷를 大洋은 / 魚雷를 // 수용한 적도 / 생산한 적도 / 없다 地雷는 (지뢰밭의 괴뢰)



  시를 쓰는 김영승 님은 시를 쓰면서 이녁 마음속에 깃들던 구름(근심이든 걱정이든 짜증이든 골부림이든)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구름 하나를 걷어내도 다른 구름이 아직 남고, 이 구름을 걷어내니 저 구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름 걷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구름이 자꾸 찾아들면 그때그때 다시 구름을 걷어내면 되어요. 맑은 하늘을 바라면서 구름을 걷어냅니다. 맑은 마음이 되기를 꿈꾸면서 시름이며 아픔을 걷어냅니다.


  언제나 스스로 거듭나려고 애씁니다. 언제나 스스로 노래하려고 목청을 틔웁니다.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할 일입니다. 남이 불러 줄 수 없는 삶노래입니다. 스스로 부르면서 살림을 짓고 삶을 가꾸는 노래입니다.



아들이 갖고 놀던 / 노란색 반투명 플라스틱 물총 // 기관단총 같은 물총도 있었고 / 물총은 수십 개였으나 // 다 버리고 하나 남은 물총 // 이제 이 물총은 / 나의 취미 (물총)


할머니들은 / 여기가 어디예요? / 잘 묻는다 // 그 불안한 표정은 / 어머니다 (지게)



  작은아이가 자다가 발로 아버지를 걷어찹니다. 끄응 하고 잠을 깨며 손을 뻗습니다. 틀림없이 이불도 걷어찼을 테지. 맞습니다. 작은아이는 잠꼬대를 하며 까르르 웃습니다. 뭔 놀이를 하는데 잠자리에서도 이렇게 날아다닐꼬. 제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아버지 이불을 빼앗으려 합니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너 말이야, 말로 차고 이불도 뺏으면 어떡하니.


  부시시 일어나서 작은아이 이불을 찾아서 덮어 줍니다. 작은아이는 제 이불이 몸에 덮이자 이 이불을 꼭 끌어당깁니다. 네 이불 찾았지?


  얼마쯤 지나니 큰아이가 두 발을 내 몸에 올립니다. 너는 또 무슨 잠꼬대를 하느냐. 너는 네 꿈나라에서 어떤 신나는 놀이를 하느냐. 아이들이 발로 차든, 아니면 저희 발을 내 몸에 올리든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손을 뻗어서 이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는지 살핍니다. 누운 채 팔만 뻗어서 이불깃을 여밀 수 있으면 이렇게 하고, 누운 채 할 수 없으면 부시시 일어나서 깜깜한 방을 밤눈을 밝혀서 이불을 찾아냅니다.



옛날 술 한창 마실 때 / 하도 잘 부러뜨리고 깨뜨리어 / 제일 싼 걸로 고른 것인데 // 아들은 그 안경을 멋있어 한다 자기도 / 똑같은 것을 썼다 (안경)


총이 있으면 쏘고 싶어진다 / 자지가 있으면 // 그러니까 없애야 한다. // 자지를 가지고 장난한 세월이 / 벌써 몇 년이냐 / 질리지도 않냐 (‘동전’으로 가지 말자)



  김영승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김영승 님이 나고 자란 삶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젊은 날 모습이 드러나고,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드러나며, 곁님하고 어깨동무하는 나날이 드러납니다.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어요. 은유나 비유를 쓰지 않아도 돼요. 한자말을 쓰든 영어를 쓰든 대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더라도 모두 ‘노래하는 사람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마디입니다.


  아마, 말만 번드레레하게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러한 시는 시조차 못 되리라 느낍니다. 겉보기로 번드레레하게 꾸미려고 한다면, 이러한 글은 글조차 못 되리라 느껴요.


  꾸며서 부르는 노래는 귀가 따갑습니다. 억지로 꾸며서 추는 춤은 눈이 아픕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면 가락이 틀리거나 셈여림이 어긋나더라도 마음을 찡하게 울릴 만합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눈물이나 웃음을 부르는 노래라면 엇박자가 되더라도 가슴을 쩌렁쩌렁 울릴 만해요.



여고생들은 참 너무 예쁘다 / 가장 예쁜 나이이다 / 내가 예수라면 / 저 전철에 앉아 있는 / 여고생들을 보라 / 그렇게 말하겠다 (三美神)



  문득 생각해 보니, 1982년에 인천에서 첫발을 뗀 야구단 이름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삼미’는 한자로 ‘三美’로 적었습니다. 이 야구단이 경기를 벌인 곳은 도원야구장(또는 숭의야구장)이었고, 이 야구장 옆에는 중앙여상이라는 여고가 있고, 이 여고 옆에는 광성고라는 남고가 있습니다. 나는 이 학교들하고 야구장하고 퍽 가까운 신광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야구장에 걸어가서 놀았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리니, 남고생이 무리지어 지나갈 때면 무서워서 다른 골목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 국민학생한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거의 다 깡패처럼 보였고, 국민학생 주머니를 터는 중·고등학생이 몹시 많았어요. 어떤 동무는 야구장으로 놀러가다가 야구장갑이나 야구공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국민학생인 동무들은 남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하고는 눈조차 안 마주치려고 했습니다. 이와 달리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지나가면 마음을 놓고 그 골목을 걸어갔습니다. 여중생이나 여고생 가운데에도 국민학생 주머니를 털던 깡패가 있었을 테지만, 나는 여중생이나 여고생 깡패를 마주친 적이 없고, 내 동무들도 이런 깡패는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된 남학생도 국민학생이던 무렵 똑같이 주머니가 털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어 예전에 받은 아픔을 똑같이 되풀이할는지 모르지요. 예쁜 나이를 살면서 스스로 예쁜 줄 모르는 셈이라 할 테고, 아름다운 나이를 누리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줄 모르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밤 버스는 // 내려줄 데를 내려주고 // 별로 진다. (밤 버스)



  날마다 별이 돋고 집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집니다. 어제도 오늘도 밤별이 잘 보입니다. 구름이 거의 없습니다. 낮에는 시골자락 가을들이 가을볕에 잘 익고 잘 마릅니다.


  맑으면서 밝게 갠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도 맑으면서 밝은 숨결로 흐르도록 건사하자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몸짓으로 밥을 짓고, 기쁘게 춤추는 손짓으로 우리 아이들하고 신나게 어우러져서 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집을 살며시 덮습니다. 시집을 덮고 두 손에 그림책을 쥡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길 예쁜 그림책을 펼칩니다. 고운 그림에 고운 이야기가 어우러져서 새롭게 흐르는 사랑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4348.10.2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