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를 아이하고 새롭게 보기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안 지는 꽤 되었으나, 막상 이 영화를 처음 본 때는 큰아이를 낳은 뒤이다. 곁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아마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를 한참 뒤에서야 보았을 수 있다. 곁님하고 아이가 나한테 오기 앞서까지 나한테는 ‘책’만 있었지, ‘영화’는 아예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하고 함께 볼 만한 영화’라는 대목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나한테 처음으로 일깨웠다고 할 만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사랑스러운 영화’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책’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노래’가 있고, 사랑스러운 ‘춤’이 있으며, 사랑스러운 웃음과 이야기와 눈물과 삶이 있다고 하는 대목을 참말로 느즈막하게 알아차렸다.


  우리 집 두 아이, 아직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인 두 아이는 〈빌리 엘리어트〉를 보는 내내 ‘서서 함께 춤을 춘’다. 그렇다. 아이들은 춤을 추고 싶다. 아이들은 춤을 추면서 웃고 싶다. 아이들은 춤을 추면서 노래하고 싶다. 춤추면서 웃고 노래하는 아이들이 바로 이 땅을 새롭게 바꾸고, 이 나라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새로운 꿈이 자라도록 북돋운다. 4348.11.2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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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더 높이
제르마노 쥘로 글, 알베르틴 그림, 조정훈 옮김 / 키즈엠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83



‘1227미터짜리 집’ 꼭대기로 피자 배달을 하라고?

― 높이 더 높이

 제르마노 쥘로 글

 알베르틴 그림

 조정훈 옮김

 키즈엠 펴냄, 2012.11.30. 12000원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 같은 큰도시로 나들이를 가면 언제나 앞만 보고 걷습니다. 다른 곳을 보기 어렵기도 하지만,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에 앞을 안 보다가는 다른 사람들한테 부딪히기 일쑤이고, 발도 곧잘 밟힙니다. 서울 같은 큰도시는 거님길이 좁고, 버스나 전철을 탈 적에도 언제나 사람이 북적거리는데다가, 한눈을 판다 싶으면 내릴 곳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가게도 많고 집이나 건물도 많은 서울입니다. 사람이 많으니 자동차도 많은 서울이요, 찻길도 넓은 서울이에요. 이런 서울에서는 하늘 볼 겨를이 없습니다. 북적거리는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하늘을 안 보기도 하고, 애써 하늘을 보려고 해도 건물이나 전깃줄에 가로막힙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틈으로 하늘을 살펴보더라도 그저 새카맣거나 뿌옇기에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친 뒤에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로 돌아올 적에는 버스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너덧 시간을 달리는 버스에서 내내 하늘을 보다가 버스를 내리면, 크게 기지개를 켜고 하늘을 실컷 올려다봅니다. 이 파란 하늘을 보고 싶었다고, 이 파란 하늘을 흐르는 하얀 구름을 보고 싶었다고, 이 파란 하늘을 흐르는 하얀 구름을 가르는 새를 보고 싶었다고, 마음속으로 노래합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벼락 씨의 집. 모으고 모아서 부자가 된 차곡 씨의 집. (1∼2쪽)




  제르마노 쥘로 님이 글을 쓰고, 알베르틴 님이 그림을 그린 《높이 더 높이》(키즈엠,2012)라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자동차와 짐차와 삽차를 좋아해서 날마다 자동차 놀이를 하는 작은아이하고 읽을 마음으로 이 그림책을 장만했습니다. 작은아이뿐 아니라 큰아이도 이 그림책을 재미있어 하는데, 큰아이는 늘 그림을 그리며 놀기 때문에 ‘높이 더 높이’ 오르다가 그만 와르르 무너지는 줄거리가 흐르는 이 그림책을 보면서 깔깔깔 웃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무척 아슬아슬한 줄거리입니다. 부자가 된 두 사람이 자그마치 1227미터에 이르기까지 집을 올린다고 하는데, 한쪽 집이 와르르 무너지니 사람이 다칠 수 있거든요.


  어린이가 함께 보는 그림책이니, 사람이 다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1227미터나 올리다가 무너지는 집 이야기를 읽다 보면, 참말 사람들이 세우는 문명이나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집을 올리고 또 올려야 할까요? 높이 더 높이 올려야만 할까요? 경제성장을 높이 더 높이 이루어야 할까요? 성적이나 결과나 실적 따위를 높이 더 높이 거두어야 할까요?



옷을 잘 입는 건축가, 겉멋 씨. 깐깐한 토목 기술자, 꼼꼼 씨. (5∼6쪽)



  그림책 《높이 더 높이》에는 두 가지 부자가 나옵니다. 한 부자는 “벼락치기 부자”입니다. 다른 한 부자는 “차곡차곡 모은 부자”입니다. ‘벼락부자’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결에 따라서 ‘벼락건물’을 올리려 합니다. ‘차곡부자’는 차곡차곡 부자가 된 결에 맞추어 ‘차곡건물’을 올리려 합니다.


  그림책 《높이 더 높이》는 길쭉하게 끝없이 오르는 집 모습에 맞추어 길쭉한 판짜임입니다.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는 두 집을 견주어 보이려고 하는 판짜임인데, 책꼴도 재미있습니다.


  그나저나 1227미터에 이르기까지 올린 집에서 늘 맨 꼭대기에 머물며 산다는 두 부자인데, 두 부자는 저렇게 높은 곳에서 무엇을 할까요? 저렇게 높은 곳에 있어야 ‘다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선다고 여길까요?




세계 모든 텔레비전 전파를 잡을 수 있는 우산 모양의 안테나. 차곡 씨의 애완견 말티의 다섯 번째 생일을 위한 콘서트. (13∼14쪽)



  그림책을 보면, 벼락부자도 차곡부자도 마치 돈자랑을 하는구나 싶도록 온갖 큰잔치를 엽니다. 아무 때나 잔치를 벌이고, 집안에 골동품이라든지 보물이라든지 잔뜩 그러모으려 합니다. 쓰지도 않을 것이지만 남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을 자꾸 갖춥니다. 벼락부자뿐 아니라 차곡부자도 ‘돈을 쓰고 더 쓰는 삶’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웃하고 나누는 삶이 아니라, 언제나 혼자 쓰고 혼자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기만 해요.


  1227미터에서 끝난 ‘집짓는 다툼’을 벌인 두 부자는 이제 1227미터에 이르는 집에서 머물다가, 벼락부자는 집이 와르르 무너져서 ‘무너진 집’에서 더는 살지 못합니다. 이와 달리 차곡부자는 집이 튼튼해서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차곡부자한테는 다른 말썽거리가 있지요.


  차곡부자는 벼락부자하고 ‘똑같이’ 스스로 밥을 지어서 먹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니 심부름꾼을 둘 테고, 심부름꾼이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해 주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돈으로 심부름꾼을 부릴 수 있다고 해도, 1227미터에 이르는 높은 곳에 사는 부자한테 맞추어 줄 심부름꾼이 더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저 높은 데까지 밥을 실어다 나르자면 얼마나 고단할까요. 날마다 ‘높은 산’을 오르내리듯이 밥을 갖다 주고 이 일을 하고 저 살림을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버틸 수 없는 노릇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한들, 이런 ‘1227미터짜리 집’에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차곡부자는 전화를 걸어서 피자를 시켜요. 자, 피자집 일꾼은 어떻게 할까요? 차곡부자는 피자집 일꾼더러 1227미터에 이르는 꼭대기까지 피자를 갖다 달라고 하는데, 피자집 일꾼은 ‘피자 배달’을 1227미터까지 들고 올라가서까지 마칠까요?




“현관에서 비밀번호 PARK79를 누르고 왼쪽 계단으로 올라오세요. 복도 끝까지 오면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그걸 타고 8층까지 올라오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왼쪽 두 번째 문에서 비밀번호 JO82를 누르세요. 앞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와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4층까지 올라오세요. 복도 끝까지 걸으면 빨간 발판이 깔린 작은 계단이 있어요. 계단을 내려오면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그걸 타고 63층까지 올라오세요. 그리고 나선 모양 계단을 올라와서 왼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78층까지 올라오세요. 복도 끝까지 와서 오른쪽으로 7번째 문에서 비밀번호 YUNSEUL을 누르고 들어오세요. 방 한가운데 둥근 탁자가 있을 거예요. 그 위에 피자를 올려놔 주세요.” “그냥 현관 앞에 놓고 갈게요.” (28∼30쪽)



  그림책 《높이 더 높이》에 나오는 차곡부자가 시킨 피자 한 판을 들고 높다란 집 문간에 닿은 피자집 일꾼은 물끄러미 저 높은 꼭대기를 올려다보다가, 차곡부자가 시키는 말을 듣다가, 피자를 조용히 문간에 내려놓습니다. “그냥 현관 앞에 놓고 갈게요.” 하고 말합니다.


  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차곡부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저 저 밑바닥에 있는 피자를 바라봅니다. 이때에 어디에선가 멧돼지가 나타나요. 멧돼지는 1227미터짜리 집 문간에 놓인 피자를 집습니다. 그러고는 ‘무너진 다른 1227미터짜리 집’ 부스러기를 사뿐사뿐 뛰어넘습니다. 그러고는 높다란 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멧돼지 식구’한테 가고, 멧돼지 식구는 ‘차곡부자네 피자’를 맛나게 먹습니다.


  여러모로 보자면 우스갯소리 같은, 아니 우스개놀이 같은 이야기가 흐르는 그림책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을 크게 지어도 1227미터짜리로까지 짓겠느냐 싶지만, 참말 바보스러운 삶만 생각하는 부자는 이런 우스개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작품을 보면 ‘초콜릿으로 성을 지어 달라고 하는 인도 왕자’ 이야기가 나와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초콜릿 성’은 무너질 텐데, 이런 생각도 못 하면서 초콜릿으로 성을 지어 달라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요.


  돈을 어떻게 쓸 때에 즐거운가를 모르는 부자요, 삶을 어떻게 가꿀 때에 기쁜가를 모르는 부자라고 할까요. 돈을 긁어모으는 데에서는 훌륭했기에 부자가 되었을는지 모르나, 이 돈으로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는 데에서는 아주 젬병이고 만 부자입니다.


  삶을 삶답게 지을 때에 웃고, 삶을 삶답게 가꾸면서 이웃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할 적에 노래가 흐릅니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시골 할배 말씀처럼 혼자만 높이 더 높이 올라서야 참답거나 착하거나 아름다운 재미란 그야말로 없기 마련이지 싶습니다. 높이 더 높이 올릴 집이 아니라, 서로 오순도순 어우러질 집살림을 가꿀 일이요, 서로 따스하면서 넉넉하게, 또 서로 웃고 노래하는 즐거움이 넘실거리도록 이웃하고 손을 맞잡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4348.11.2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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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한 켤레 1000원



  올겨울에 신을 내 양말이 집에 한 켤레도 없기에 서울마실을 하는 김에 양말을 한두 켤레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외버스를 내린 뒤 서울에서 처음 본 양말집에서는 한 켤레에 3500원이었기에 움찔했다. 한 켤레에 3500원짜리에는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 3500원은 비싼가? 3500원짜리 양말을 신으면 안 될 노릇일까? 나한테는 3500원이나 5000원짜리 양말은 안 어울리는가?


  서울에서 이틀 동안 구멍난 양말을 신고 다니다가 고흥으로 돌아가려고 고속버스역으로 가는데, 강남지하상가에서 ‘한 켤레 1000원’ 하는 알림글을 붙인 양말집을 본다. 아, 하는 소리가 나면서 걸음을 멈춘다. 양말이면 다 같은 양말이니 3500원이건 1000원이건 장만할 노릇인데, 나는 나 스스로 내 몸이 1000원짜리 양말을 신어야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이제 막 가게 문을 여는 양말집 안쪽에 대고 “사장님!” 하고 부른다. 1000원짜리 양말을 두 켤레 고른다. 하나는 눈사람 무늬가 작게 들어간 짙푸른 양말이고, 다른 하나는 배롱꽃빛 돼지가 춤추는 양말이다. 한 켤레만 사려다가, 내가 아무래도 마수인 듯해서 두 켤레를 산다. 서울에서 양말을 사자고 생각한 대로, 양말을 사기는 샀다. 막상 이틀 걸어다니는 동안 신을 양말은 못 사고, 시외버스를 타기 앞서 비로소 샀다. 4348.11.2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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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11-25 20:23   좋아요 0 | URL
그게 그렇더라구요.
가끔 남포동 길에서 천원짜리 몆개 골라담는데 그 절반은 또 내것이 아닌 날이 대부분이죠.

파란놀 2015-11-26 03:0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
늘 아이들 양말만 사고
제 양말을 사는 일은
한 해에 한 번쯤... 입니다 ^^;;;
 

말·넋·삶 90 밥끊기, 단식



  때가 되어 밥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밥을 넣어 주어야 몸에 기운이 새롭게 돈다고 하지만, 애써 밥을 몸에 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단식(斷食)’을 한다고 합니다. 이 한자말은 “일정 기간 동안 의식적으로 음식을 먹지 아니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밥끊기’ 또는 ‘단식’은 왜 할까요? 몸에 밥을 더 넣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바꾸고, 몸에 따라 마음도 가볍게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이 밥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고, 몸에 쌓였을 찌꺼기를 찬찬히 내보내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줄 느끼려는 뜻입니다.


  밥을 끊는 사람은 밥을 안 먹습니다. 이때에 물을 마실 수 있고, 국을 마실 수 있으며, 어떤 단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밥끊기란 밥을 끊는 일입니다.


  밥끊기는 하루를 할 수 있고, 이레를 할 수 있습니다. 보름이라든지 달포 동안 밥을 끊을 수 있고, 때로는 온날(백일)을 끊거나 몇 해 동안 밥을 끊어도 됩니다. 사람은 밥을 끊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물을 마셔도 죽지 않으며, 밥이 아닌 풀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국만 끓여서 먹어도 죽지 않아요.


  밥을 한동안 끊으려 하는 사람은, 내 삶에서 내가 대수롭게 여기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동안 나 스스로 내 삶에서 무엇이 대수로운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밥을 끊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이 산다고 하는 생각을 끊고, 밥이 아니면 몸에 기운이 돌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을 끊으려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똑같은데, 목숨 있는 것은 밥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풀과 꽃과 나무도 밥(양분)을 먹어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뭇목숨은 ‘숨을 살리’려면 무엇을 먹을까요?


  바로 ‘바람’을 먹습니다. 밥끊기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먹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늘 마시지만 늘 마시는 줄 제대로 못 느낀 탓에 제대로 못 보고 제대로 모르던 ‘바람’을 제대로 알아내려고 밥을 끊습니다.


  밥은 온날이나 여러 해를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밥은 얼마든지 끊을 만합니다. 그런데, 밥을 오랫동안 끊으면 ‘몸 많이 쓰는 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왜 못 할까요?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짓는 일이라면, ‘밥을 안 먹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일을 종(노예)이 되어서 해야 한다면 ‘밥을 많이 먹어야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요. 이리하여,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이 밥끊기를 못 하게 막으려 합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사람들한테 도시락조차 못 먹이게 하려 듭니다. 왜냐하면, 도시락은 ‘내 몸을 생각해서 스스로 지은 밥’이거든요. 학교나 회사나 감옥이나 군대에서 왜 ‘도시락’을 못 먹게 하고 집단급식만 시키려 하는가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집단급식은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몸을 죽여서 마음도 몸을 따라서 죽도록 길들입니다. 사회의식에서는 집단급식을 사람들이 먹도록 내몹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밥을 먹으면서 똑같은 몸이 되고 똑같은 생각만 물려받으면서 똑같은 일을 하는 톱니바퀴(부속품)가 되도록 내몹니다.


  밥끊기는 바로 이 같은 사회의식을 끊는 몸짓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남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바로 내 삶을 짓는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밥을 끊을 줄 아는 사람은, 바람을 맛봅니다. 바람맛을 처음으로 보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기릅니다. 이리하여, 밥을 끊은 뒤 다시 밥을 마주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밥한테 휘둘리지 않’고, ‘밥을 내가 다스리는’ 손길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밥끊기를 제대로 해서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회의식에서 집단급식을 시켜도, 이 집단급식을 ‘새롭게 바꾸’는 기운이 생깁니다.


  밥은 많이 먹거나 적게 먹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으면 됩니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는 밥일 때에는 언제나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스스로 짓지 않고 스스로 먹지 않는 밥이라면 언제나 괴롭고 고단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바람이 없’으면 바로 죽습니다. 바람이 없는 지구별은 아무런 목숨(생명)이 없는 죽음터입니다. 그래서, 사회의식에서는 자꾸 공장을 지으려 하고, 자꾸 지하자원을 캐내어 바람을 더럽히려 합니다. 아무리 ‘무공해 에너지’가 있고 ‘무한동력 장치’가 있더라도 사회의식은 이를 안 받아들입니다. 돈을 벌려는 권력자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의식이 시키는 짓대로 따르기를 바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회 제도’에 길들면서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내몰려 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끊으려 하는 사람은 밥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다 잊고, 오직 바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끊는 까닭은, 오직 바람을 나한테 제대로 맞아들이려 하는 몸짓인 만큼, 나를 둘러싼 바람이 어떠한 결인가 하고 느껴야 합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바람을 어떤 숨결로 녹여서 내 몸으로 태우려는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람결이 나한테 깃들면서 숨결이 되고, 이 숨결은 살결로 나타납니다. 바람결은 ‘너’이고, 숨결은 ‘나’입니다. 숨결은 ‘마음’이 되고, 살결은 ‘몸’이 됩니다. 이제, 내가 받아들인 바람은 내 몸에 새로운 씨앗으로 드리워서 내 마음에 새삼스레 깃듭니다. 바람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삭일 수 있는 넋이라면, 새로운 생각을 마음에 심을 수 있습니다. 바람결은 숨결을 거쳐 마음결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마음결이 될 수 있으면, 내 눈은 바람결을 언제 어디에서나 늘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빛결을 헤아리는 눈결이 되어요. 이때부터 나는 귓결로 흘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노래인 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을 바람결에 새롭게 실어서 날립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으려고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는 몸이 되도록 밥을 끊습니다. 바람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몸으로 거듭나면, 이제 어떤 밥을 어디에서 어느 만큼 먹더라도, 나는 내 몸을 따사롭게 보살피면서, 내 마음을 언제나 넉넉하게 돌봅니다.


  바람이 있어야 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불이 탑니다. 바람이 있어야 숲이 푸릅니다. 바람이 있어야 하늘이 파랗습니다. 바람이 있어야 지구별에서 온 목숨이 깨어납니다. 바람이 있어야 온별누리(모든 은하계)에 이야기가 자랍니다. 바람을 바람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씻습니다. 바람이 우리 몸과 마음을 고루 씻어 주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바람을 들이켜서 내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씻는 동안 내 넋은 기쁘게 웃고 노래합니다. 4348.3.11.물.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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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 정치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찾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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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7



정치사상을 뿌리치는 영화가 가는 길이란

―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박종성 글

 인간사랑 펴냄, 2015.10.30. 2만 원



  아이들하고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는 아예 처음부터 볼 생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일 때에 비로소 나도 이 영화를 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이면서 아름다운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를 보려고 한밤에 잠을 쫓아야 하는데,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비로소 밤에 영화를 보노라면 이튿날 아침에 잠이 모자라서 허덕이기 일쑤입니다.


  모든 영화를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로 찍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나오는 영화를 가만히 돌아보면 ‘아이하고 어른이 함께 볼 만한 영화’는 뜻밖에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어른끼리만 볼 만한 영화’가 무척 많으며, ‘아이하고 함께 보도록 하는 영화’는 좀처럼 나오지 못하지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한자리에서 모여 앉아서 함께 마음을 달래거나 적실 만한 영화가 드물다고 할까요.



영화는 사람을 움직인다. 때로는 눈물과 웃음으로 사로잡고 행위의 미래마저 단호히 이끈다. 덕분에 영화는 즐거움의 방편이거나 교육의 도구이며 정치수단까지 되었다. (19쪽)


사람들은 자꾸 잊는다. 생각보다 복잡한 영화의 역할을. 그것이 역사의 전달수단이자 정치의 교화도구이며 대표적인 사회교육 매체이자 국가의 문화발전 수준을 가늠하는 예술지표인 것을. (25쪽)



  박종성 님이 쓴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인간사랑,2015)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박종성 님은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영화에 깃든 정치’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짚으려 합니다. 영화는 예술이 되기도 하고 상품이 되기도 하지만, 정치를 사람들한테 입히거나 씌우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들려줍니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 삼아서 영화를 볼는지 모르나, 영화마다 사람들을 어느 한쪽으로 넌지시 이끌려고 하는 속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가 ‘정치를 따돌리는 몸짓’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제껏 세상의 어느 영화도 마르크스의 삶에 주목했다든지, 적어도 아시아 필름이 모택동이나 전봉준 같은 존재에 깊은 애정을 퍼부었다는 얘길 들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인물 좋고 대중적 인기를 동원했던 체 게바라 정도였다. (43쪽)


가장 뜨겁던 시절을, 그것도 야유와 조롱으로 유난스레 넘쳐나던 시기에 극단의 사례를 마무리하는 감독의 마음 역시 복잡하였을 것이다. 그것도 하필 확신에 가득 찬 자기변론이나 새로운 이론의 등장을 암시하기보다 작품을 관통한 악의 논리와 그 평범성을 갈무리해야 할 대목에서 무엇을 따로 강조할 수 있었으랴. (89쪽)



  가만히 보면, 천만 사람이 보았다느니, 오백만 사람이 보았다느니 하면서 여론몰이를 하는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다고 하는 영화가 꽤 있습니다. 이와 달리 거의 눈길을 못 받는 영화가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한테서 살짝살짝 눈길을 받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영화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꼭 보아야 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아주 훌륭한 영화이기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보고 반드시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삶을 짓는 사람들은 다 다른 영화를 즐기면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사랑할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우면서 재미난 영화일 때에는 이 영화를 두고두고 다시 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래요. 본 영화이지만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디브이디를 다시 돌리고 또 돌립니다. 여덟 살 큰아이는 어느 영화를 벌써 백 번이 넘게 보기도 합니다. 보고 다시 보고 새로 보아도 언제나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샘솟으니 자꾸자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또 보고 싶다’고 말하는 영화는 으레 ‘어른인 나도 즐겁게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영화 한 편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삶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북돋우는 밑거름 같다고 느껴요.



고다르의 출구 찾기도 뜬금없는 인종주의나 은근한 반미주의로 기우는 건 영화적 무능의 면피용 핑계일까. 아니면 소외와 무력감에 젖어 있는 집단적 자화상을 가리기 위해서일까. (115쪽)


정치적 이익을 한껏 채우고도 또 다른 반대급부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이를 왜곡·확장하면서 국가 내부의 분노와 증오 혹은 충성심을 자극하는 건 오랜 여론조작을 위해 사용해 온 술책 가운데 하나다. (150쪽)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은 ‘정치 이야기를 드러내는 영화’ 몇 가지를 놓고서, 우리 사회와 정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맞물려 놓습니다. 민주란 무엇인지, 독재란 무엇인지, 평화란 무엇인지, 전쟁이란 무엇인지, 영화 하나를 앞에 놓고서 이 대목을 곰곰이 짚으려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걸어온 길을 짚는 영화에서도 틀림없이 ‘정치란 무엇인가’ 같은 대목을 건드립니다. 셸키를 다루는 만화영화에는 따로 ‘정치란 무엇인가’ 같은 대목을 건드리지 않지만, 이 같은 만화영화는 삶과 사랑과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가를 밝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로 ‘정치를 새롭게 읽는 슬기’를 어린이 눈높이에서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다르 영화에서도 정치를 어떻게 볼 만한가를 헤아릴 수 있고, 메리 포핀스가 나오는 영화에서도 아이들이 어버이와 어우러지는 삶을 살피면서 정치가 여느 살림집에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어른들은 정치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한다고 느낄 만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길로 간다면 어려울 일이 없지만 참말 이러한 대목을 헤아리려는 어른이 드물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감독은 끝내 자폭 순간을 스크린으로 끌어내지 않는다. 액션도 딕션도 아닌 단순한 기다림으로 자이드의 결행 의지와 거사의 순간을 대체한다. 그것만으로도 긴장하는 관객과 자이드 자신을 달래는 일은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184쪽)


관객에게 길을 물어 상황을 바꿀 수도 없고 그대로 놔둔들 그 다툼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사태의 방임도 따지고 보면 감독의 계략이다. 분명한 건 상상의 남은 몫이 관객들 것이 된다는 점이다. (217쪽)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만할까요? 더 놀라운 액션이 나와야 볼 만한 영화가 될까요? 아무런 액션이 없이도 사람들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건드리거나 마음을 바꿀 만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요? 영화에 나오는 여러 액션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영화에서 액션만 보면 될까요, 아니면 여러 사람이 치고 박고 맞물리는 몸짓 사이에 숨은 이야기를 읽을 때에 영화가 즐거울까요? 영화에는 왜 사람들이 치고 박고 다투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까요? 사람들이 서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모습이 굳이 영화에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지구라는 별에서 서로 다투어야 밥그릇을 지키거나 챙길 수 있을까요? 전쟁이 아닌 평화로 가고, 전쟁무기가 아닌 살림살이를 북돋우는 길로 가면서 영화를 찍는다면 영화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실어서 보여줄 만할까요? 더 놀라운 액션을 찍으려고 하는 영화는 사람들을 어떻게 길들일까요?



오래도록 머무는 ‘울림’은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도 없고 난삽하기만 한 추상의 메시지도 아니란 자각은 아렌트가 영화로 일깨워 준 또 다른 ‘놀라움’이다. 악마도 곁에 두면 한없이 익숙해지고 천사의 자유로움마저 시늉하게 만드는 아둔한 나날들 역시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226쪽)



  아름다움을 그리려 하기에 영화에 아름다움을 살포시 실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아닌 어떤 정치 목적을 담으려 하기에 영화에 아름다움이 아닌 정치 목적이 깃듭니다.


  역사 교과서를 정부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에서는 영화도 이러한 흐름을 타기 마련이고, 이러한 흐름을 타고 싶지 않아서 정치권력하고 맞서는 영화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권력은 언론도 교과서도 영화도 거머쥐려고 애쓸 뿐 아니라, 권력에 빌붙어서 언론이나 교과서나 영화를 엉망으로 망가뜨리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리고 권력이나 정치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이들하고 함께 삶을 누리는 기쁨’을 영화에 담으려고 하는 사람도 나오지요.


  어떤 영화를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사랑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을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삶하고 등돌린 채 오로지 예술이나 상업으로만 흐르는 영화는 짐짓 ‘정치 목적이 없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영화는 ‘무서운 정치 목적이 숨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치 나팔수가 되고 마는 영화가 있고, 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새롭게 비추어 보이려는 영화가 있어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영화를 즐길 때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봤다’는 영화를 보아야 할는지요, 아니면 ‘내 삶을 기쁘게 가꾸는 밑거름’이 될 만한 영화를 보아야 할는지요?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을 덮으며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정치사상을 뿌리쳤다고 하는 영화일수록 오히려 ‘어떤 정치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에 눈감도록 이끄는 영화일수록 도리어 ‘어떤 정치 꿍꿍이’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영화도 책도 교과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도,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를 때에 비로소 빛이 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영화를 함께 보면서 다 같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4348.11.24.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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