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집안에 빨래를 너는 철



  늦가을이 차츰 저물면서 겨울이 코앞이다. 이제 큰아이는 “겨울이야. 쉬 하러 살짝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도 손이 차.” 하고 말한다. 이런 날에는 볕이 곱게 내리쬐더라도 바람이 싱싱 불면 빨래가 영 안 마른다. 해가 떨어지기 앞서 마당에서 빨래를 걷어야 하고, 덜 마른 옷가지를 집안 곳곳에 걸거나 널거나 펼쳐야 한다. 바야흐로 집안에 빨래를 너는 철인데, 아버지가 혼자서 바삐 빨래 널 자리를 살펴서 옮기면, 어느새 큰아이가 일손을 거들겠다면서 나선다. 작은아이는 스스로 일손을 거들겠노라 먼저 나서는 일이 거의 없다. 작은아이는 마냥 놀기를 바라는데, 놀이에 온마음을 쏟으니 둘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거의 못 느낀다.


  바삐 일손을 놀리는 모습을 느끼고는 한손을 거들겠노라 하는 아이는 어떠한 숨결이요 넋이며 마음인가 하고 문득 헤아려 본다. 빨래를 곳곳에 걸다가 살짝 일손을 쉬면서 사진기를 잡으며 살림순이를 바라보면서 오늘 이곳에서 내가 누리는 삶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새삼스레 되새긴다. 의젓한 아이가 의젓한 어버이를 키운다. 씩씩하고 야무진 아이가 씩씩하고 야무진 어버이를 기른다. 4348.11.2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빨래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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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순이 36. 저기에 걸어요 (2013.12.5.)



  날이 추워서 낮에 마당에 널었어도 다 마르지 않은 옷가지를 방으로 옮길 적에 살림순이는 여러모로 도와준다. 옷걸이에 양말을 척척 얹어서 내민다. “자, 저기에 걸어요.” 하면서 어디에 걸라고까지 알려준다. 네, 네, 그래야지요, 살림순이가 시키는 대로 척척 움직인다. 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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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갈 사람 창비시선 388
김중일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106



시와 눈송이

―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글

 창비 펴냄, 2015.5.8. 8000원



  낮에 마당에서 톱질을 합니다. 두 아이가 아버지 곁에 달라붙어서 톱질을 지켜봅니다. 바람이 꽤 드세기에 늦가을 한낮이어도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렇지만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톱질을 재미나다는듯이 지켜봅니다. 한참 톱질을 하다가 빙그레 웃은 뒤 “도와줄래? 그 끝을 잡아 주라.” 하고 말합니다. 두 아이는 얼른 손을 내밀어 나무판 끝자락을 꼭 잡습니다. 추워서 장갑을 낀 손으로 붙잡습니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톱질을 합니다. 바람이 훅 불어서 톱밥을 날립니다. 톱밥이 날리니 두 아이는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래도 나무판을 잡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어쩜 이리 대견하고 씩씩할까 하고 생각하며 톱질을 잇습니다.


  한참 톱질을 하니 큰아이는 춥다며 먼저 안으로 들어갑니다. 작은아이는 찬바람이 휭휭 불어도 톱질 구경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혼자서 일을 더 할 수 있지만 작은아이를 꽁꽁 얼릴 수 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함께 안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해변에 떨어진 초록 샌들을 주워와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건넨 호박을 잘게 잘라 넣고 찌개를 끓였다. 곧 식탁 위에는 검은 물웅덩이 하나가 올라왔다. (평생)



  김중일 님이 빚은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2015)을 읽습니다. 시집에 붙은 이름처럼, 시인 김중일 님은 이녁이 살아갈 사람 이야기를 나긋나긋 들려줍니다. 이제껏 함께 살아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은 어떠한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이 아이들은 이제껏 저희 어버이하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저희 어버이하고 살아갈 테지요. 이 아이들은 어버이 살림하고 함께 시골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고, 앞으로도 이 시골에서 새 하루를 아침저녁으로 맞이할 테지요.


  큰아이가 세 살이던 때까지 지낸 고장에서는 눈이 많이 내렸지만, 그 뒤로는 눈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고장에서 지냅니다. 큰아이는 눈을 보고 싶고 눈사람을 굴리고 싶다는 노래를 부릅니다만, 우리 고장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장미처럼 새빨간 석양을 온통 주름투성이 얼굴로 모두 받으며 서 있다. 주름이 얼마나 깊어야 꽃잎이 되는가. (장미가 지자 장맛비가)



  십이월을 코앞에 둔 오늘 저녁, 우리 고장에도 처음으로 눈발이 날립니다. 다만 펑펑 쏟아붓는 눈송이는 아닙니다. 싸락눈이 가늘게 흩날립니다. 그래도 이 눈송이를 맞겠다면서 보름달이 환한 마당에서 두 아이는 춤을 춥니다.


  밤새 눈이 조금이나마 쌓일 만할까요. 전라남도 끝자락에 깃든 이 고장에 모처럼 눈이 소복히 쌓인 모습을 보여줄 만할까요.


  아이들은 눈을 바랍니다. 나는 눈보다는 빨래가 잘 마르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눈놀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가을비가 자꾸 내려서 빨래를 말리기 힘든 요즈막 날씨를 헤아리면서, 부디 햇볕이 쨍쨍 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뜰 적에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을 바랍니다. 나는 찬바람이 사그라들어 포근한 볕이 고운 하루를 바랍니다. 이러다가 생각을 좀 바꾸기로 합니다. 한낮까지 눈을 누릴 수 있은 뒤에는 빨래도 잘 마르도록 해가 잘 나 주면 고맙겠네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잃어버린 책이 있네. 그럴 때가 있네. 그런 밤이 있네. 책장을 한장 넘기면 벌써 그런 새벽, 또 한장 넘기면 이미 그런 아침이 있네. (사랑이라는 상실)


노래할 수 있다면. / 입 크게 벌리고 이마에 주름 깊이 잡아가며 / 노래할 수 있다면. (노래할 수 있다면)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꿈을 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적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지을 삶을 꿈으로 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모르거나 찾지 못했다면, 앞으로 만날 누군가를 그리면서 새롭게 일구고 싶은 삶을 꿈으로 꾸어요.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가려는 길을 꿈으로 지어서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나누려는 사랑을 바로 이 길에서 이루려는 꿈으로 가슴에 품으면서 노래로 부릅니다.



흐린 책을 읽고 나는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과연 밤낮은 무엇인가 흐린 책을 읽는 밤엔 고대하던 깊은 잠을 잘 수 있지 비는 밤새 이불로 조금씩 스며들어 대낮의 꿈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흐린 책)


단식하는 그와 과힉하는 나 사이. 굴뚝과 굴뚝 사이. 철탑과 철탑 사이. 무덤과 무덤 사이. 지구 저편 폭격과 폭격 사이에 내걸린 부재자의 잿빛 외투 속에서. 오늘은 우주선이 솟구쳐오르는 마술이 상연되었다. (성간 공간)



  차갑게 부는 바람이 창호종이로 댄 문을 흔듭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마을고양이 여러 마리는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웅크립니다. 자전거 밑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리고, 섬돌 옆에 쌓인 종이상자 귀퉁이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립니다. 광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리고, 손수레 밑에서 또 두어 마리가 웅크립니다.


  바람 찬 오늘은 빨래가 다 안 말라서 마루로 들였으나 마루에서도 마를 낌새가 보이지 않아 방으로 다시 들입니다. 밤새 잘 말라 주렴 하고 자꾸 만져 봅니다. 깊이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고, 이마를 쓸어넘기며, 볼에 쪽쪽 뽀뽀를 합니다. 부엌하고 방바닥을 치우고, 비질도 하다가는, 흩어진 장난감을 주섬주섬 모아서 갈무리합니다.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을 쓴 시인은 이녁한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님하고 이 겨울에 새로운 살림을 즐겁게 가꿀 테지요. 그리고 시인은 시인대로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님이 되어 이녁 둘레에 있는 사람한테 즐거운 웃음을 나누어 줄 테고요.


  이제 두 아이 사이로 파고들어 함께 잠들기 앞서 조용히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부터 내다볼 테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밥을 지어서 맛나게 함께 먹을까 하고 바지런을 떨 테지요. 4348.11.2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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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전혀 全-


 전혀 관계가 없다 → 도무지 관계가 없다 / 아무 사이가 아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 조금도 생각지 못한 일이 터졌다

 전혀 쓸모없는 물건 → 하나도 쓸모없는 물건 / 아주 쓸모없는 물건

 전혀 생소한 모습 → 참 낯선 모습 / 매우 낯선 모습

 고기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 고기를 조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전(全)혀’는 “(주로 부정하는 뜻을 나타내는 낱말과 함께 쓰여) ‘도무지’, ‘아주’, ‘완전히’의 뜻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전혀’는 ‘전연(全然)’하고 뜻이 같다고 하는데, “전혀 알지 못했다”나 “전연 알지 못했다”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로 손질하면 됩니다. 그리고, 한국말사전 말풀이에 나오듯이 한국말로 ‘도무지’나 ‘아주’를 쓰면 되고, 글흐름을 살펴서 ‘조금도’나 ‘하나도’를 넣을 만하고, ‘참’이나 ‘매우’나 ‘무척’을 넣을 수 있습니다. 4348.11.26.나무.ㅅㄴㄹ



나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 나와도 털끝만큼도 관계가 없지 않을 수도 있다

→ 나와도 얼마만큼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 나와도 아주 동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 나와도 아주 먼 일이 아닐 수도 있다

→ 나와도 조금은 이어졌을 수도 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밥 먹으며 시계 보고 시계 보며 또 먹고》(사계절,1989) 118쪽


전혀 다른

→ 아주 다른

→ 몹시 다른

《프란츠 알트/박진희 옮김-생태적 경제기적》(양문,2004) 15쪽


전혀 관심이 없었다

→ 조금도 눈길을 두지 않았다

→ 하나도 마음 쓰지 않았다

→ 눈꼽만큼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 터럭만큼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자비네 퀴글러/장혜경 옮김-정글 아이》(이가서,2005) 22쪽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 한 마디도 적지 않았다

→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 어느 곳에도 밝히지 않았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한철호 옮김-북한행 엑서더스》(책과함께,2008) 294쪽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요

→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니노미야 토모코/고현진 옮김-음주가무연구소》(애니북스,2008) 9쪽


이젠 전혀 겁쟁이가 아니구나

→ 이젠 조금도 무섬쟁이가 아니구나

→ 이젠 하나도 두렴쟁이가 아니구나

→ 이젠 그야말로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 이젠 씩씩해서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김둘-다람쥐 해돌이, 잘 먹고 잘 노기》(자연과생태,2015) 2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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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득 得


 득을 보다 → 얻다 / 차지하다 / 갖다 / 좋다

 배운 만큼 득이 된다 → 배운 만큼 도움이 된다

 득보다 손실이 많다 → 얻기보다 많이 잃다 / 얻기보다는 잃다

 득이 되는 말 → 도움이 되는 말 / 보탬이 되는 말


  ‘득(得)’은 “소득이나 이득”을 뜻한다는데, ‘소득(所得)’은 “1. 일한 결과로 얻은 정신적, 물질적 이익 2. 일정 기간 동안의 근로 사업이나 자산의 운영 따위에서 얻는 수입”을 가리키고, ‘이득(利得)’은 “이익을 얻음. 또는 그 이익”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득’을 “소득이나 이득”으로 풀이하면 “이익이나 이익”으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이익(利益)’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을 가리켜요. 그러니 ‘보탬’을 뜻하는 ‘이익’인 셈이요, ‘득·소득·이득’뿐 아니라 ‘이익’까지 ‘보탬’을 가리킨다고 할 만하고, ‘얻는 것’이나 ‘갖는 것’이나 ‘차지하는 것’이나 ‘거머쥐는 것’을 가리킵니다.


  ‘득남’이나 ‘득녀’라든지, ‘득도’나 ‘득템’이라든지, ‘득음’ 같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아들을 낳다(얻다)”나 “딸을 낳다(얻다)”나 “깨닫다”나 “(아이템을) 얻다/따다/갖다”나 “목이 트이다/소리를 얻다”로 손질해서 쓸 만합니다. 4348.11.26.나무.ㅅㄴㄹ



득도 없는 실랑이만 계속했다

→ 얻는 것도 없는 실랑이만 이어졌다

→ 건질 것도 없는 실랑이만 이어졌다

→ 보탬도 없는 실랑이만 이어졌다

→ 아무것도 못 얻는 실랑이만 했다

《이란주-말해요 찬드라》(삶이보이는창,2003) 116쪽


득이 되는 일이라도

→ 도움이 되는 일이라도

→ 보탬이 되는 일이라도

→ 얻을 것이 있는 일이라도

→ 좋은 일이라도

→ 괜찮은 일이라도

《기선-게임방 손님과 어머니 3》(서울문화사,2006) 47쪽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 보탬이 되지 않는다

→ 이바지를 하지 않는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권상희 옮김-과거의 죄》(시공사,2015) 70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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