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깊이 애지시선 45
한양명 지음 / 애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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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9



시와 빈 그릇

― 허공의 깊이

 한양명 글

 애지 펴냄, 2012.11.15. 9000원



  기름기 있는 그릇을 수세미에 비누를 묻혀서 씻으려면 잘 안 닦입니다. 괜히 손자국이 더 묻을 뿐 아니라 미끌미끌한 기운이 벗겨지지 않습니다. 기름기 있는 그릇을 잘 부시려면 뜨거운 물이나 끓는 물을 부어 주어야 합니다. 고기를 구운 부침판도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두꺼운 종이로 살살 문지르면 기름기가 말끔히 닦입니다.


  두 아이를 돌보면서 처음에 기저귀를 댈 적에도 이러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오줌기저귀뿐 아니라 똥기저귀도 비누질만으로는 오줌 기운이나 똥 기운을 빼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비누를 많이 써도 똥오줌 기운을 말끔히 털지 못해요. 물을 펄펄 끓여서 이 물에 담근 뒤 나뭇가지로 잘 저으면 비누를 안 써도 똥오줌 기운이 잘 빠집니다. 이렇게 삶은 기저귀를 찬물로 잘 헹군 뒤 마당에 널어서 해바라기를 시키면 마치 새 천처럼 돌아가서 보송보송하고 냄새마저 향긋합니다.



겨우 토끼 한 마리 지날 정도의 / 좁디좁은 벼랑길 / 나이 스물, 아직 가진 게 없을 때 /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 성큼성큼 걸어갔다 (토끼벼리길)


꽃을 꽃으로만 보고 싶다 / 색깔이니 향기니 자태니 / 허튼 생각 않고 / 그냥 꽃으로만 보고 싶다 (그냥 보고 싶다)



  겨울 저녁에 방바닥을 덥힙니다. 아이들을 자리에 눕히고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두 아이를 잘 재우고 나서 부엌으로 갑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겠네 싶어서 기름기 있는 그릇을 뒤늦게 설거지합니다. 아이들을 재우기 앞서 이를 닦이고 손발을 씻기면서 설거지를 한 빈 그릇은 벌써 물기가 말랐습니다.


  밥찌꺼기는 고양이밥이 되도록 마당 한쪽에 붓습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밤별을 올려다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춥니다. 딱히 춤을 출 일이 없을 수 있지만,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즐거이 삶을 누렸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별밤에 혼자 마당에서 가볍게 춤을 추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한양명 님 시집 《허공의 깊이》(애지,2012)를 호젓하게 촛불맡에서 읽습니다.



과음을 할 때 또는 / 내가 나란 걸 잊을 때 /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어쩌다 활짝 핀 소년들 보면 / 부러울 때가 있다 / 내가 다시 저 나이라면 /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을 텐데 (소년들 보면)



  한자말 ‘허공’은 “텅 빈 공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공중’이라는 한자말은 “하늘과 땅 사이에 빈 곳”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뜻을 살피면, ‘허공’을 풀이한 한국말사전은 좀 엉뚱합니다. “텅 빈 빈 하늘”로 풀이한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헤아리면, “빈 하늘”이라는 한국말을 쓰면 이 같은 겹말풀이를 안 했을 터이나,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이 너무 드뭅니다. 왜 “빈 하늘”이나 “하늘”이라 말하지 않고 ‘허공·공중’ 같은 한자말을 빌어야 할까요? ‘하늘’이라 말하기보다 ‘스카이’라 말할 적에 어쩐지 남다르거나 새롭다고 느끼는 마음일까요?



농사짓는 일을 / 시적 대상으로 보기 일쑤인 / 삼류시인 지아비를 믿을 수 없어 / 과수원집 넷째 따님, 아내는 홀로 / 늦봄을 뒤적이고 또 뒤적이며 / 두 마지기 반, 작지 않은 산밭에 / 고추며 참깨, 콩팥을 심는다 (아내는 시인이다)



  시집을 읽다가 사전을 읽던 손길을 살짝 멈춥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십니다. 우리 마을 뒤쪽에 있는 멧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입니다. 우리 집은 시골집이요, 흐르는 냇물을 마실 수 있는 보금자리입니다. 도시에서 살 적에는 먹는샘물을 사다가 마셔야 하면서 으레 빈 페트병이 잔뜩 나와야 했고, 시골에서 사는 동안 흐르는 골짝물을 마시기에 빈 페트병을 걱정할 일이 없을 뿐더러, 언제나 싱그러운 물맛을 누립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 이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마셨습니다. 빗물을 마셨고, 냇물을 마셨어요. 우물물을 마셨고, 골짝물을 마셨지요. 샘물을 마셨고, 깨끗하며 정갈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어요. 옛날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나 싱그러운 물로 싱그러운 몸이 되도록 북돋았어요.



외가에서 자라던 일곱 살의 어느 날 / 낯선 사내가 불현듯 찾아와 / 내가 네 아비란다, 뜬금없이 말하고는 / 읍내 반점으로 데려가 비벼줬던 자장면 / 그때의 아릿한 추억까지 올올이 배인 / 수타면이 나는 좋다 (수타면, 안동 청반점에서)



  씨앗 한 톨을 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별을 노래하고 해님을 반기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풀잎을 훑고 나무를 돌보는 사람은 누구나 시입니다.


  그러면, 대형마트를 찾는 사람은 시인일까요, 아닐까요.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시인일까요, 아닐까요. 큰 회사 대표라든지, 대통령이라든지, 의사나 판사 같은 사람은 시인일까요, 아닐까요.


  시골에서 맑은 냇물을 마시는 삶을 짓는 사람만 시인일 수 없습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시인이지요. 시골에서 씨앗을 심는 사람만 시인이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변호사도 택시 일꾼도 시인이에요.



풀도 꽃도 바람도 그네들끼리 / 뭐라 뭐라고 얘기들 하지만 / 나는 통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 하릴없이 눈만 끔적일 뿐이다 (마침내 그들이 나를 버렸다)



  삶을 노래하는 마음이기에 시인입니다. 삶을 노래할 줄 모르는 텅 빈 그릇이라면 시인이 되지 못합니다. 삶을 노래하면서 넉넉한 밥그릇을 넉넉하게 이웃하고 나누는 숨결이라면 시인입니다. 삶을 노래할 마음이 없이 제 밥그릇만 단단히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은 시인이 되지 못하지요.



내가 돌아오자 그대가 진다 / 가장 아름다운 날 봄볕에 목을 매어 / 툭 하고 미련 없이 붉은 마음 진다 (동백 지다)



  시집 《허공의 깊이》를 생각합니다. 한밤에 시골자락 뭇별을 생각합니다. 시 한 줄이 태어나는 곳을 돌아봅니다. 이 시골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늘 마시는 싱그러운 물 한 모금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 겨울 십이월에 어느 고장은 눈이 펑펑 내려서 길도 집도 하얗게 바뀝니다. 이 겨울 십이월에 어느 고장은 눈송이 하나 내리지 않는 포근한 바람이 불면서 동백나무에 새빨간 봉오리가 터질 듯 말 듯 춤을 춥니다.


  우리 집 동백나무는 아직 붉은 꽃송이를 안 터뜨리지만, 이웃집이나 다른 마을에서는 어느새 동백꽃이 핀 십이월입니다. 새파란 하늘을 온 가슴으로 담으면서 찬바람을 씩씩하게 맞아들이는 십이월입니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털모자를 쓰면서 자전거를 달리는 십이월입니다. 밥그릇에 따순 밥을 소복하게 채워서 아이들한테 내미는 십이월이요, 마음그릇에 너른 사랑을 알뜰히 심어서 이웃하고 나누는 십이월입니다. 4348.12.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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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



아이는 저 스스로

갖고픈 장난감을 집어요.

값 적힌 종이를 보지 않아요.

남이 저것을 어찌 여기느냐도

안 따져요.


아이는 오직 저 스스로

제 마음을 읽고

이 마음소리를 살려서

기쁘게 노래해요.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고이 서도록 이끄는 책은

책값이 대수롭지 않아요.

삶을 사랑하는 눈길을 틔우고

사랑을 사랑하는 손길을 보듬으니

스스럼없이 고르지요.


책을 고르며 따질 대목은

늘 하나

바로 마음으로 퍼지는 노랫소리.



2015.11.28.흙.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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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쓰고 노래하려는가



  두 아이를 재우면서 자장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오늘은 새 노랫말로 읊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부르는 자장노래 가락이지만, 말마디를 새롭게 넣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자장노래를 부르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말마디만 새로 넣은 노래일 뿐인데 노래에 흐르는 숨결이 몹시 새롭기 때문이다.


  두 아이가 먼저 잠들었는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만,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자리에 누워서 노랫말을 되새긴다. 아이들한테 들려준 노랫소리를 차근차근 헤아린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촛불을 켜고 연필을 쥔다. 오늘 새롭게 부른 노래를 천천히 옮겨 적는다. 2분쯤 걸려서 새 이야기를 하나 마무리짓는다.


  연필을 내려놓고 촛불 앞에 앉아서 한참 생각에 잠긴다. 무엇을 쓰려는가? 삶을 쓰지. 무엇을 노래하려는가? 사랑을 노래하지. 무엇을 나누려는가? 꿈을 나누지. 어떤 글을 써서 누구한테 읽히려 하는가? 삶을 사랑하는 꿈을 써서 나랑 너랑 함께 읽지. 4348.12.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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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노래 89. 놀면서 걷는 논둑길



  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이제 이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나들이를 다닐 적에 힘이 부쩍 듭니다. 큰아이는 샛자전거에서 함께 발판을 구르니 자전거가 한결 달 달리도록 도와주지만, 그래도 두 아이 몸무게는 묵직합니다. 자전거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으레 헉헉거리면서 논둑길에서 서기 마련이요, 두 아이더러 “우리 좀 걸을까?” 하고 묻습니다. 두 아이는 자전거에서도 즐겁고, 논둑길을 달리거나 걸을 적에도 즐겁습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다가 뒤돌아보며 “아버지 얼른 와요!” 하고 부릅니다. 땀을 옴팡 쏟으며 아이들 꽁무니를 좇다가 이렇게 부르는 소리에 기운을 차리면서 사진 한 장을 고마이 얻습니다. 4348.12.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말/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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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구름이 (이해진) 반달 펴냄, 2015.11.20. 13000원



  아이들한테 선물하고 싶은 예쁜 한국 그림책은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달치 ‘아침독서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커다란 구름이》가 눈에 뜨였다. 속그림을 알 수 없어도 척 보니 예쁜 그림결이 흐르리라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구름이 짙게 깔린 십이월 첫 주 토요일에 이 그림책이 우리 집에 왔고, 두 아이는 “뭔데? 뭔데?” 하면서 무릎에 올려놓고 책을 넘긴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양장이다 보니 ‘책넘김’이 그리 안 좋다. 여덟 살 큰아이가 책을 넘기기 힘들어 하기에, 내가 먼저 책을 벌려서 조금 눌러서 편 뒤에 건넸다. 옆으로 길쭉한 그림책인 만큼 책을 넘길 적에 잘 넘어갈 수 있도록 실묶음이나 제본을 더 살피면 한결 나았으리라 느낀다. 차라리 조금 두꺼운 종이로 꾸며도 좋았을 테지. 예쁜 그림책인데 제본이 그림결을 잘 살리지 못한 대목이 여러모로 아쉽다. 그러나, 아이도 어른도 저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쁨을 노래하고, 바로 이 하늘을 함께 누리면서 삶을 짓는 이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두고두고 읽다 보면 손때를 타면서 책넘김도 앞으로는 한결 부드러워지리라 본다. 4348.12.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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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구름이
이해진 글.그림 / 반달(킨더랜드) / 2015년 11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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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5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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