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까마귀나무 빨간우체통 3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 박물관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책 읽는 삶 126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 소녀와 까마귀나무

 리타 얄로넨 글

 크리스티나 루이 그림

 전혜진 옮김

 박물관 펴냄, 2008.6.5. 8800원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는 어디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를 낳고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물어보고, 내가 낳아서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면서 물어봅니다. 먼저 우리 아버지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시느라 바빠서 이녁 아이들하고 얼굴을 마주할 겨를조차 몹시 적었습니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날이었으니까요. ‘아버지하고 논다’고 하는 일은 겪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떠오를 뿐 아니라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다’고 하는 일조차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내가 우리 아이들하고 보내는 나날을 헤아립니다. 나는 집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놉니다.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도맡고, 바깥일이 있으면 이 바깥일도 도맡습니다. 이러면서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몫도 도맡습니다. 솜씨 있거나 야무지기에 이렇게 온갖 일을 다 하지는 않아요. 함께 짓는 살림에서 아버지로서 맡는 몫이 좀 더 많다고 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이렇게 얘기할 만한데, 힘이 조금 더 센 사람이 짐을 더 많이 날라요. 두 어버이 가운데 힘이 조금 더 있는 쪽이 여러모로 집일이나 집살림을 더 많이 하는 셈입니다.


  아무튼, 나를 낳아 돌본 아버지를 헤아리면서,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를 헤아리니,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거의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 아이한테 새롭게 지어서 물려주려고 하는 길이라 할 만하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 거의 받지 못한 ‘아버지 사랑’이기에 ‘아버지로서 선 나’로서도 우리 아이들한테 ‘아버지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다고 할 만하지요. 그렇지만, 먼 옛날부터 이어졌을는지 모를 ‘사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지 못하거나 물려받기 어렵던 사랑’은 이제 끝나도록 마음을 쏟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까마귀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되니까 나무 꼭대기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잎사귀들 사이로 작고 동그란 까마귀 머리들이 까닥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9쪽)


첫 번째 까마귀가 날아오르면 다른 까마귀들이 따라 날아오릅니다. 이때 나무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 가지들은 흔들거리지요. (10쪽)



  리타 얄로넨 님이 글을 쓰고, 크리스티나 루이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박물관,2008)를 읽습니다. 책이름만 보아서는 소녀하고 까마귀나무가 도무지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알기 어려울 만합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문학 첫 쪽을 넘기니,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한테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사고로 일찍 죽었어요.



우리 보트를 닦을 때처럼 병든 나무도 깨끗이 씻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나무를 돌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씻어 주는 것은 비뿐이랍니다. (16쪽)


나는 벌써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앨범에 보트 사진들이 있는데,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엄마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도요. (27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에 나오는 소녀는 ‘까마귀나무’를 무척 애틋하게 여깁니다. 나무 가운데 ‘까마귀나무’라는 나무가 있지는 않아요. 까마귀가 무척 많이 내려앉는 나무이기에 ‘까마귀나무’라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나무는 바로 ‘소녀네 아버지’가 소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알려준 나무예요. 두 사람(아버지와 아이)이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나무입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티나, 키사 그리고 사라가 내게 와서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슬프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답니다. (37쪽)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마다 아빠와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지금도 무심결에 자전거를 준비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곧 아빠가 계시지 않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 (38쪽)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말아서 아버지하고 얽힌 이야기(추억)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아직 튼튼히 계시지만 아버지하고 말을 섞는 일이 드물거나 얼굴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기에 서로 나눌 만한 이야기(추억)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어도 ‘아버지가 사는 동안’ 서로 나눈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하고 한집에서 사는 데에도 막상 서로 마음을 열지 않아서 따사롭거나 너그럽거나 즐겁게 꽃피우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없기도 합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살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집 아이들은 으레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읊습니다. 나는 이제껏 우리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제대로 읊은 일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부장 사회에서 자란 터라 사내(아들)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좋아요. 아버지 사랑해요.” 같은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테지요. 그야말로 핑계이지요. 가부장 사회가 단단하건 말건,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아이라면, 아이로서 어버이한테 “아버지 사랑해요”이든 “어머니 사랑해요”이든 얼마든지 말할 만해요.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는 ‘이런 틀을 그대로 두라’고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가부장 사회나 권력이나 얼거리를 깨고 아름다운 삶자리가 일어서도록 바꿀 수 있어요.



엄마는 한 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자 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44쪽)



  어린이문학 《소녀와 까마귀나무》는 아주 차분하게 이야기를 잇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씩씩하게 하루를 새로 맞이하면서 어머니하고 지낼 뿐 아니라 동무하고 지내는 소녀 이야기를 곰곰이 들려줍니다. 어린 가시내는 무엇을 하든 이곳에서는 이곳에서 함께 지내던 아버지가 떠오르고, 저곳에서는 저곳에서 함께 놀던 아버지가 떠오르지만, 그야말로 씩씩하지요. 그러나, 남모르게 눈물에 젖는 날도 많을 테고, 남이 알도록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을 테지요. 다만, 눈물에 젖든 눈물을 흘리든, 아버지하고 함께 지내고 놀고 어울리고 복닥이던 나날을 기쁜 사랑이라는 씨앗으로 가슴에 심습니다. 아이로서는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로서는 짝꿍을 여의었어요. 아이는 어머니 마음까지 헤아리고, ‘까마귀나무’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무도 함께 헤아립니다. 어버이 한 사람이 곁을 떠나서 무척 슬플 텐데, 슬픔은 슬픔대로 맞아들이면서도 이 슬픔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요.



나는 이 아주머니와 봉은 잊어버리고 병에 걸린 나무의 움푹 패인 곳을 만져 보았습니다. 어쩌면 나무도 만져 주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무 옆에 서 있으면 내 생각을 듣겠죠. (60쪽)



  아침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을 깹니다. 저녁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 손길을 받으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아침저녁으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책상맡에 앉아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해요. 아침저녁으로 집 안팎에서 함께 뛰고 달리면서 놀고요.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낳은 아버지한테는 꼭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이녁 손자하고 스스럼없이 웃고 뛰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하고 말을 거의 안 섞으며 살았다는 생각은 내려놓고, 오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을 즐겁게 받을 적에 참말 즐겁게 자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랑도 기쁘게 받을 때에 그야말로 기쁘게 자라요.


  아이한테 아버지 자리란 ‘사랑자리’요 ‘꿈자리’입니다. 아이한테 어머니 자리도 ‘꿈자리’이고 ‘사랑자리’예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도 아이는 늘 ‘사랑자리’이면서 ‘꿈자리’일 테니까, 어버이랑 아이는 서로서로 ‘사랑꿈자리’이고 ‘꿈사랑자리’로 한집살이를 이루리라 봅니다. 4349.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기는 손님, 손사래치는 손님



  내가 시골에서 사진책도서관이라고 하는 곳을 꾸리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고 집에서 놀리는데 한국말사전을 엮는 일도 하고 작은책방을 북돋우는 일도 한다고 해서, 때때로 방송국에서 전화를 건다. 이래저래 방송으로 좀 찍어 보자고들 한다. 지난 2014년에는 여수 문화방송 사람들하고 한 차례 찍었고, 지난 2015년에는 광자 한국방송 사람들하고 한 차례 찍었다. 두 군데 방송국 사람들하고 방송을 찍은 까닭은 이분들이 우리 보금자리에 ‘이웃 손님’으로 찾아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웃 손님’으로 우리 보금자리와 도서관에 찾아오려고 한 이분들은 ‘우리 식구가 괜찮을 때’까지 기다린 끝에 ‘우리 식구한테 가장 좋을 날’로 잡아서 장비를 챙겨서 찾아왔다.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서 찾아오겠다고 하는 연락은 모두 손사래를 쳤다.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 있는 분들은 ‘이웃 손님’으로서 찾아오려는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아주 쉬운 일이다. ‘이웃 손님’이나 ‘동무’라 해도 우리 보금자리에 찾아올 적에 “그날 가도 괜찮니?” 하고 물어본다. 그래서 우리 식구가 ‘그날 안 괜찮으’면 그날 안 온다. 우리 식구한테 괜찮은 날을 살펴서 이웃 손님이나 동무가 우리 보금자리에 찾아온다. 우리 식구가 이웃이나 동무한테 찾아갈 적에도 이와 똑같다. 우리 이웃이나 동무한테 ‘괜찮은 날’을 살펴서 물은 뒤에 찾아간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분들은 으레 이 대목을 놓치거나 처음부터 생각을 못 하는구나 싶다. 우리 같은 사람을 ‘한낱 취잿거리’나 ‘고작 취재원’으로 여긴다면, 우리 식구는 그 방송국 일꾼들한테 방송으로 찍힐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웃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웃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마음을 열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멋진 방송’을 찍겠다는 생각은 좀 내려놓고 ‘반가운 이웃’으로 먼저 마음을 열 때에 뭔가 일을 해도 일이 될 테지. 4349.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전에 쓴 글을 새삼스레 손질합니다. 예전 글을 손질하다 보면, 참 부끄럽네 싶으면서도, 한결 씩씩하게 손질할 기운을 길어올립니다. 예전에는 그때만큼 배우고 알기에 그렇게 쓰고,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 배운 넋으로 기쁘게 손질할 수 있습니다.


..


잣방울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열립니다. 소나무 방울이라 솔방울입니다. 잣나무에는 잣방울이 맺힙니다. 잣나무 방울이기에 잣방울입니다. 오리나무에는 오리방울이 자랍니다. 오리나무 방울이니 오리방울이에요. 소나무에는 솔꽃이 핍니다. 소나무 꽃이라 솔꽃입니다. 잣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요? 잣나무 꽃은 잣꽃일까요? 오리나무에는 어떤 꽃이 필까요? 오리나무인 만큼 오리꽃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솔방울’ 하나만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은 ‘잣방울’이나 ‘잣꽃’을 다루지 않고, ‘오리방울’이나 ‘오리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소나무 꽃을 ‘솔꽃’이라 밝히지 못한 채 ‘송화’라는 한자말만 다뤄요. 그러나, 숲마다 잣방울과 오리방울이 맺습니다. 숲으로 들어가면 잣꽃과 오리꽃이 흐드러집니다. 솔꽃이 피면서 퍼지는 가루는 ‘송화가루’가 아니라 ‘솔꽃가루’입니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벌레는 ‘송충이’가 아니라 ‘솔벌레’입니다. 소나무숲에서 부는 바람은 솔바람입니다. 잣나무숲에서 부는 바람이라면 잣바람이 될 테지요.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솔내음을 맡고, 잣나무가 빼곡한 곳에서 잣내음을 맡아요.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


살펴 가셔요



  책이나 만화영화를 살피면 으레 “조심해!”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거나 달리면, 어른들이 곁에서 “조심해!”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이래저래 ‘조심’이라는 한자말을 어린 나날부터 익숙하게 듣고 씁니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보면, 내 둘레 어른들은 ‘조심’이라는 한자말도 더러 썼지만, 이보다는 ‘살피다’와 ‘마음 쓰다’ 같은 한국말을 한결 자주 썼어요. 그래서, 나는 어릴 적에 ‘조심·살피다·마음 쓰다’가 다 다른 말마디인 줄 여겼는데, 나중에 철이 들고 한국말사전을 읽다가, 이 세 말마디가 모두 같은 자리에서 같은 뜻을 가리킨다는 대목을 깨달았어요. 내 둘레 어른들은 이 대목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느 어르신이 “조심해서 들어가셔요.” 하고 들려주는 말마디를 몹시 얹짢게 여기셨어요. 그분은 “살펴 가셔요.” 하고 말을 하며 절을 해야 바른 인사말이라 여긴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조심’이라는 한자말을 좀 살펴보았더니, 이 한자말은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스며들었구나 싶더군요. 예전에는 아이들한테도 “잘 살펴야지.”라든지 “마음을 잘 써야지.” 하고 말했대요. 길을 살피고, 뜻을 살피며, 사랑을 살펴요. 둘레를 살피고, 동무를 살피며, 숲을 살펴요.


+


겹문·덧문



  기차역에는 없지만 전철역에는 있는 문이 있습니다. 기차역에도 때때로 사람들이 복닥거리지만 전철역은 언제나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터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적에 서로 다치지 않도록 하자면서 덧대어 붙인 문이 있습니다. 겹쳐서 붙인 문이 있어요. 처음에는 이 문을 가리키려고 영어로 ‘스크린도어’라는 말을 썼다고 하는데, 요즈음에는 ‘안전문’으로 고쳐서 쓰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 잘 고치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안전’이라는 한자말은 그냥 써도 될 만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안전하도록 이중으로 달아 놓은 문”이기에 ‘안전문’으로 고쳐서 쓴다고 하는데, 조금 더 살펴본다면 ‘안전문’이란 ‘겹’으로 달아 놓은 문입니다. 또는 문 하나 앞뒤로 다른 문을 하나 ‘더’ 달아 놓은 셈입니다. 이른바 ‘겹문’이거나 ‘덧문’입니다. 다치지 말자는 뜻을 살펴서 ‘안전문’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만, 다치지 말자는 뜻을 살펴서 ‘지킴문’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지킴겹문’이나 ‘지킴덧문’처럼 뜻이 한결 또렷하게 이름을 붙여도 될 테고요.


+


어린이 표



  나는 버스표를 끊을 적에 ‘어른 표’ 하나와 ‘어린이 표’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달라고 말합니다. 기차표를 끊을 적에도 ‘어른 표’랑 ‘어린이 표’를 달라고 말해요. 극장표를 끊든 다른 표를 끊든 늘 ‘어른 표’하고 ‘어린이 표’를 말합니다. 그런데 ‘표 파는 곳’을 살펴보면 ‘어른 표’나 ‘어린이 표’라는 이름을 거의 안 씁니다. 흔히 쓰는 이름은 ‘성인 표’하고 ‘학생 표’예요. 어린이라면 모두 학교를 다니기에 학생으로 여겨서 ‘학생 표’라고 써야 할까요? 학교를 안 다니는 어린이도 표를 끊을 적에는 ‘어린이 표’가 아닌 ‘학생 표’라고 말해야 할까요? 더 살펴보면, ‘푸름이 표(청소년 표)’는 아직 따로 없기 일쑤예요. 이때에는 ‘중학생 표’나 ‘고등학생 표’이기 일쑤이고, 때로는 ‘중·고등학생 표’라고 하지요. 더욱이 한국에는 ‘대학생 표’가 따로 있기까지 합니다. 배우는 사람인 학생을 섬기려는 마음에서 ‘어른이 아닌 사람’은 모두 ‘학생’으로 여길는지 모르지만, 어린이도 푸름이도 그저 어린이와 푸름이로 마주하며 아끼는 마음이 되어서 이름을 알맞고 사랑스레 붙이고 불러 줄 수 있기를 빌어요.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전에 쓴 '말이랑 놀자'를 손질한 글을 새로 올려 봅니다.


..


웃보



  작은 일에도 으레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울음이 많은 아이를 가리켜 ‘울보’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으레 웃는 아이가 있습니다. 웃음이 많은 아이를 가리켜 곧잘 ‘웃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울보’는 실어도 ‘웃보’를 안 싣습니다. 우는 아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만, 웃는 아이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예부터 누구나 흔히 웃으면서 살아가니 “잘 웃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을까요? 누구나 웃으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잘 웃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을 만하지 않을까요? 잘 웃어서 웃보이고, 잘 울어서 울보이니, 잘 먹어서 ‘먹보’입니다. 그러면 잘 노는 사람은 ‘놀보’라고 하면 어떠할까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샘을 잘 내는 사람은 ‘샘보’라 할 만하고, 미운 짓을 잘 하는 사람은 ‘밉보’라 할 만해요. 잠꾸러기는 ‘잠보’라고도 하고, 꾀를 잘 내기에 ‘꾀보’라 해요. 뚱뚱하기에 ‘뚱보’라면 마른 사람한테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요? 늘 툭탁거리거나 걸핏하면 싸우는 사람은 ‘싸움보’인데 언제나 따스한 사랑으로 동무나 이웃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사랑보’일 테지요.


+


첫물



  오월로 접어들어 드디어 들딸기를 땁니다. ‘첫물’ 들딸기입니다. 처음으로 익는 들딸기는 아직 통통하지 않습니다. 첫물이 지나고 나서 새로 돋는 들딸기는 차츰 통통하게 익으며, 새빨간 빛이 한결 곱습니다. 오이나 토마토를 심은 분이라면 첫물 오이와 토마토가 나온 뒤부터 꾸준히 새 오이와 토마토를 얻습니다. 씨앗을 받으려면 첫물 열매를 갈무리하곤 해요. 처음 맞이하기에 첫물입니다. 처음 누리기에 첫물입니다. 처음 얻으면서 처음으로 맛보기에 첫물입니다. 제철에 먹는 첫물 들딸기란 싱그러운 오월빛이 고스란히 녹아든 사랑스러운 숨결입니다. 제철에 먹는 숱한 ‘첫물 열매’는 그 철하고 달에 서린 따사로운 햇볕하고 바람하고 빗물 냄새랑 느낌이 골고루 깃든 숨결이에요. 처음으로 얻기에 첫물이고, 처음으로 내딛기에 ‘첫발’입니다. 아기는 첫발을 떼며 걸음마를 익히고, 우리는 무엇이든 처음으로 새롭게 배우려는 첫발을 떼며 씩씩하게 일어섭니다. 처음으로 먹기에 ‘첫술’이기에, 첫술에 배불러 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고도 차분하게 몸짓을 다스립니다. ‘첫손’으로 꼽을 만한 ‘첫길’로 나아가고, ‘첫마음’을 고이 건사하면서 ‘첫꿈’을 가슴에 살며시 담습니다.


+


고운소금



  나는 왜 언제부터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퍽 어릴 적이었지 싶은데, 불쑥 ‘굵은소금·가는소금’을 말하다가 동무가 놓은 퉁을 들었어요. “얘, ‘가는소금’이 어디 있니? ‘고운소금’이지!” 이러구러 몇 해 지나 어느 날 또 ‘가는소금’이라고 말했는데, 어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얼마 뒤 또 ‘가는소금’을 말하고, 이웃 아주머니가 ‘고운소금’으로 바로잡아 줍니다. 한참 여러 해가 흐르고 흐른 요즈음, 우리 집 곁님이 ‘고운소금’ 이야기를 꺼냅니다. 곰곰이 돌이키니, 나는 어릴 적부터 참 끈질기게 ‘가는소금’이라 말했구나 싶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곱다’라는 낱말을 ‘아름답다’라는 뜻으로만 써야 한다고 잘못 알기 때문일 수 있어요. 어쩌다 입에 한 번 붙은 말씨가 안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소금도 밀가루도 잘게 빻을 적에는 ‘곱다’라는 낱말로 가리킵니다. ‘가늘다’라는 낱말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굵은소금·가는소금’이 올림말로 나오고, ‘고운소금’은 올림말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 어릴 적 동무와 이웃을 비롯해 곁님과 어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고운소금’만 말합니다.


+


멈춤 손잡이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가는 길입니다. 누렇게 고운 가을 들녘을 달리는데 내리막을 만납니다. 빠르기를 줄이려고 자전거 손잡이에 붙은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가 이때 뒤에서 묻습니다. “아버지 뭘 잡았어요?” “응? 멈추는 손잡이 잡았어.” “멈추는 손잡이?” “응, 멈춤 손잡이.” “아, 그렇구나.” 0.0001초쯤 ‘브레이크’를 잡는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일곱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고쳐서 이야기해 줍니다.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거의 다 ‘브레이크 레버’라는 영어만 씁니다. ‘브레이크 손잡이’라 말하는 사람을 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멈춤 손잡이’나 ‘멈추개’라 말하는 사람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멈추개’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도 오르지만, 이 낱말을 제대로 살피거나 익혀서 알맞게 쓰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멈추개’ 같은 말을 안 가르치겠지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도 ‘멈춤 손잡이’ 같은 말을 안 쓰겠지요? 그렇지만 ‘멈추는 손잡이’라 하니 일곱 살 어린이도 알아들어요.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전에 쓴 글을 좀 손질해서 새로 써 보았다. 예전 글을 고칠까 하다가, 그 예전 글은 그대로 두고, 손질한 글을 모아서 올려 본다.


..


물빛그림



  ‘수채화’가 언제부터 수채화였을까 궁금합니다.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는 그림을 두고 언제부터 누가 왜 ‘수채화’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그냥 ‘수채화’라고 말하니까 어린이는 어른들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수채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가만히 헤아리면서 새로운 말을 써 보고 싶습니다. 아니, 물감을 물에 풀어서 즐기는 그림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바라보면서 가장 곱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보고 싶습니다. 하얀 종이를 바닥에 펼치고 물감판을 옆에 두고는 물감을 짭니다. 물을 받은 그릇도 한쪽에 놓지요. 이렇게 마룻바닥에 판을 벌인 뒤에 붓을 듭니다. 붓에 물감을 묻히고 물을 알맞게 섞어서 종이에 처음으로 척 갖다 댑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스으으윽, 슥슥, 삭삭, 사사삭 신나게 손을 놀립니다. 내 손놀림에 따라 물감 빛깔이 종이에 스며듭니다. 물을 탄 물감 빛깔은 새로운 숨결로 거듭납니다. 아하, 그렇구나. 수채화란 ‘물감 빛깔 그림’이로구나, 그러니까 ‘물빛그림’이네. 붓놀림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물빛그림에는 물결이 흐르고 물노래가 번집니다.


+


찻삯



  시외버스를 탑니다. 고흥부터 서울까지 달리는 시외버스에 네 식구가 타니, 네 사람 몫 표를 끊습니다. 어른 두 장을 끊고 어린이 두 장을 끊습니다. 버스에 손님이 거의 없으면 버스 일꾼은 “아이 표는 안 끊어도 되는데.”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버스에 손님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습니다. 네 식구가 움직이면 표를 넉 장 끊으니 버스삯을 만만하지 않게 쓴다고 할 만하기에 버스 일꾼이 걱정해 주는구나 싶은데, 그러면 우리가 끊은 차표를 돌려주거나 물려주면 될 테지요. 아무튼 우리 네 식구가 기차를 타면 기찻삯을 냅니다. 배를 탄다면 뱃삯을 치르고, 비행기를 탄다면 비행기삯을 뭅니다. 택시를 타면 택시삯을 내요. 여러 가지 탈거리에 몸을 실으면서 찻‘삯’을 치릅니다. 함께 나들이를 다니면서 바깥에서 밥을 사서 먹으면 밥‘값’을 치르지요. 자가용을 모는 분이라면 다른 사람이 모는 차를 얻어타지 않으니 삯을 치르지는 않되, 자가용에 기름을 넣어야 할 테니 기름‘값’을 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들은 아버지를 말로 삼아서 타고 놀기를 즐기는데, ‘아버지 말’을 타는 아이들은 웃음이랑 노래를 ‘아버지 말삯’으로 재미나게 치릅니다.


+


마늘빵



  마늘을 넣어 밥을 지으면 마늘밥이 됩니다. 고구마를 넣어 밥을 지으면 고구마밥이 됩니다. 쑥을 넣으면 쑥밥이요, 팥을 넣으면 팥밭이며, 콩을 넣으면 콩밥입니다. 보리로 지으면 보리밥이고, 쌀로 지으면 쌀밥이에요. 이리하여, 마늘을 써서 빵을 구으면 마늘빵이 될 테지요. 한국사람도 오늘날에는 빵을 널리 먹으니, 마늘로 얼마든지 빵을 구울 만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마늘’이 아닌 ‘갈릭’이라는 낱말을 쓸 테니 ‘갈릭 브레드’라 해요. 한국말에서는 ‘빵’이지만 영어에서는 ‘브레드’이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바게트’ 같은 서양말도 한국에서는 그냥저냥 쓰기 일쑤입니다. 한국말로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막대빵’이라 해도 될 텐데 말이지요. 마늘을 써서 구운 빵이기에 ‘마늘빵’이라 하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만하고, 막대기처럼 길게 구운 빵이기에 ‘막대빵’이라 하면 참말 누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요. 팥빵도 한국말로 ‘팥빵’이라 해야 알아듣기에 좋아요. 일본말로 ‘앙꼬빵’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본말로 쓰는 ‘소보로빵(소보루빵)’도 ‘곰보빵’이나 ‘오돌빵’이나 ‘못난이빵’ 같은 한국말로 고쳐서 쓰면 한결 낫습니다.


+


셋길



  네 식구가 서울마실을 하며 전철을 탈 적입니다. 우리 집 큰아이가 전철 길그림을 읽습니다. “저기는 노란 줄로 셋이라고 적혔네. 셋길이야, 셋길! 어, 저기는 다섯이라고 적혔네. 다섯길이야!” 나는 큰아이한테 ‘삼호선’이나 ‘오호선’이라는 말로 바로잡아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한 말 그대로 “그래, 셋길이네. 저기는 다섯길이네.” 하고 이야기합니다. 전철을 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인천이든 큰도시에 놓은 전철이나 지하철에는 모두 ‘일호선·이호선’처럼 이름을 붙입니다. 나이 어린 아이가 문득 떠오르는 대로 말하듯이 ‘한길·두길·셋길·네길·다섯길’처럼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조차 어른들은 못 했으리라 싶습니다. 이런 이름을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런 이름을 즐겁게 널리 쓰자는 데까지 생각을 뻗지 못했으리라 싶습니다. 그렇다고 지하철 이름을 ‘삼호선’이나 ‘오호선’이라 하지 말고 ‘셋길’이나 ‘다섯길’로 고치자는 얘기는 아니에요. “한길 지하철·셋길 지하철·다섯길 지하철”이라든지 “하나 지하철·셋 지하철·다섯 지하철”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6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