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 비무장지대와 군사문화 한치규 사진집 3
한치규 지음 / 눈빛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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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4



‘평화 이후’를 바라는 ‘분단 이후’ 이야기

― 분단 이후, 비무장지대와 군사문화

 한치규 사진

 눈빛 펴냄, 2016.2.25. 3만 원



1929년 함경남도 정평 출신으로, 1·4 후퇴 때 어선을 이용해 월남했다. 그 후 군에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1979년 보안사 기조처장(대령)을 마지막으로 예편하기까지 30여 년간 군생활을 하였다. 전쟁 이후 군생활을 사실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이라고 판단해 일본에서 발행하는 사진실기 강좌를 어렵게 구독하여 사진술을 독학으로 익혔다. (사진가 한치규 님 해적이)




사진책 《분단 이후, 비무장지대와 군사문화》(눈빛,2016)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책 《분단 이후》는 ‘한치규 사진집’ 셋째 권입니다. 한치규라는 분은 직업군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또 수수한 서울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가라는 이름보다는 ‘사진 즐김이’로서 사진을 한 장 두 장 찬찬히 찍어서 남겼다고 느낍니다.


문화를 이루려는 사진이 아니라 삶을 적으려고 하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예술을 펼치려는 사진이 아니라 살림을 아로새기려고 하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지난 2012년 5월에 《한씨네 삼남매》가 사진책으로 태어났습니다. 2016년 2월에 《변모하는 서울》과 《분단 이후》가 나란히 사진책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진책 《분단 이후》를 넘기면, 한치규 님이 마주한 비무장지대와 군대 모습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한치규 님은 사병이 아닌 간부(장교)였기에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다고 봅니다. 사병이 군대나 비무장지대에서 사진기를 손에 쥐면 군사법에 걸려서 옥살이를 해야 하거든요. 간부(장교)는 얼마든지 홀가분하게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온갖 모습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진책 《분단 이후》를 넘깁니다. 한치규 님은 어떤 멋들어진 제식훈련(전국대학교련 실기대회)이나 군사행렬(월남 파병 환송국민대회)도 사진으로 담곤 했지만, 비무장지대나 철책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아름다운 이 나라 숲과 골짜기가 아스라이 펼쳐진 모습을 꽤 많이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참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얼핏설핏 철조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금수강산’을 찍은 사진이네 하고 느낄 만합니다. 이곳저곳에 길다랗게 철책이 늘어진 모습이 드러나기에 남녘하고 북녘이 갈린 생채기가 사진마다 도사린다고 할 만합니다.


문득 예전 어떤 일을 떠올립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입니다. 나는 1990년대에 강원도 양구에서 육군 보병으로 있었고, 이무렵 경계근무를 서든 그냥 지오피에 있든 언제나 ‘맨눈으로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안개가 짙게 덮이거나 구름이 두껍게 깔린 날이 아니라면 으레 금강산 봉우리를 보며 지냈어요.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있던 부대나 철책 둘레에 흐르는 냇물이 어떤 냇물인지 몰랐습니다. ‘두타연’이라는 이름은 전역하고 한참 뒤에 알았고 ‘용늪’이라는 이름도 참으로 한참 뒤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두타연이라는 골짝물을 마음껏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가 연어인 줄도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사진책 《분단 이후》에 나오는 ‘성명을 알 수 없는 적군묘’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싸합니다. 나는 군대에서 수색이나 정찰을 해야 하던 때에 ‘아군 무덤’인지 ‘적군 무덤’인지 알 길이 없는 무덤을 제법 보았습니다. 나뭇가지를 십자가처럼 얽어서 땅에 박은 무덤이에요. 덩굴이 우거진 수풀에 이런 나무십자가 무덤이 꽤 있었어요. 이런 무덤을 볼 적마다 그저 철모를 벗고 고개를 숙입니다. 두 손을 모아서 절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교통호를 판다든지 철조망을 새로 치는 일을 할 적마다 땅을 파야 하는데, 이렇게 땅을 파다 보면 뼈다귀도 나오고, 예전 부대에서 파묻은 쓰레기가 썩지도 않은 채 나오기도 했습니다.


‘땅굴 시추 현장’ 사진에서 김이 솔솔 나는 밥 한 그릇 먹으려고 모인 군인을 보며 가슴이 찡합니다. 한겨울에 따끈따끈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이라니. 얼마나 따뜻하고 반가울까요. 나는 군대에서 한겨울(혹한기) 훈련을 하다가 숟가락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안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날 수은주로 영하 18도였는데, 언손으로 겨우 숟가락을 쥐어 국물을 떠서 입에 넣고 빼다가 숟가락이 붙었지요. 누군가 뜨거운 물을 얻어 와서 입에 들이부어 주었기에 ‘뜨거운 기운’보다는 ‘숟가락이 떨어졌다’며 마음을 놓던 일이 떠오릅니다. 한겨울에 훈련을 할 적에는 눈밭에 천막을 치고 자면서 누구나 군화를 품에 안고 자요. 그런데 군화를 품에 안고 자도 얼어서 쪼그라드니, 새벽에 다시 군화를 발에 끼우려면 용을 써야 합니다. 그래도 군화가 안 들어가서 발이 다 안 들어간 채 엉성하게 한 시간쯤 걸어서 ‘발에서 나는 땀’으로 군화를 녹이면 비로소 끝까지 다 들어갑니다.


‘파월 장병을 면회하는 가족’ 사진을 보면, 비무장지대에 있던 터라 아무도 면회를 올 수 없는 곳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듭니다. 참으로 그래요. 전쟁훈련을 시키는 군대에 아이를 보내야 하는 어버이는 늘 걱정하고 근심이 가득합니다. 총을 두 손에 쥔 젊은이는 죽음을 늘 코앞에서 맞닥뜨려야 합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 하는 군대입니다.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웃나라 멀쩡한 젊은이’를 죽이도록 훈련을 시키는 군대예요.


분단은 한겨레를 두 나라가 되도록 갈랐습니다. 흔히 ‘군사문화’라 하지만, 아무래도 ‘문화’라 할 수 없는 이 ‘군대신분계급질서’는 두 나라에 아주 깊이 박혔지 싶습니다. 군대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군대 같은 신분이나 계급으로 위아래가 갈리기 일쑤입니다. ‘위에서 시키’면 ‘아래에서는 고스란히 따라’야 합니다. 밥그릇을 비운 숫자(나이값)로도 신분이나 계급이 갈립니다. 전쟁무기도 군부대 크기도 좀처럼 줄어들 낌새가 안 보입니다.


한치규 님이 1960∼70년대에 사진으로 남긴 모습은 스물 몇 해가 지난 1990년대 군부대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마흔 몇 해가 지난 오늘날 군부대에서는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아니, 이제는 남녘이나 북녘 모든 자리에서 군대가 사라지고 평화가 새롭게 태어날 노릇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철조망을 걷고 지뢰를 치울 수 있기를 빕니다. 낡은 탱크와 소총은 녹여서 낫과 호미와 쟁기로 바꿀 수 있기를 빕니다. 금수강산이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천연보호구역’마다 군부대가 어김없이 있는데, 천연보호구역을 앞으로도 천연보호구역이 되도록 지킬 수 있기를 빕니다. 군대와 전쟁무기를 앞세운 평화가 아니라, 참말 평화로운 삶과 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가꾸는 평화가 남북녘에 함께 뿌리내릴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책 《분단 이후》를 가만히 덮으면서 다시금 생각합니다. “분단 이후” 어느새 일흔 해나 됩니다. 앞으로는 분단이 아닌 “평화 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글로 담으며 그림으로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삶자리를 일구는 하루가 되기를 꿈꿉니다. 남녘에서는 금강산도 묘향산도 백두산도 마음껏 드나들고, 북녘에서는 지리산도 북한산도 한라산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2016.3.24.니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사진책 읽기/사진비평)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눈빛 출판사'에서 고맙게 보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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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용 책? 초등 용 명작도서?



  어느 나라에서나 ‘어린이 용’이나 ‘초등 용’이나 ‘청소년 용’ 같은 이름을 앞에 붙이는 책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이름이 붙는 책이 좀 지나치도록 많다고 느낍니다. 어른문학을 간추리거나 손질해서 ‘초등학생도 읽는’ 이런저런 세계문학이나 명작소설이 꽤 많이 자주 나오는구나 싶어요. 어린이한테는 걸맞지 않다 싶거나 어렵구나 싶은 대목을 덜거나 자르는 ‘어린이 용’인 셈일 텐데, 처음부터 ‘문학’을 쓴 어른이 따로 ‘어린이 용’으로 글을 고쳤을까요? 아니면 한국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가 ‘문학을 요리조리 손질하거나 고쳐’서 선보이는 ‘어린이 용’일까요?


  쥘 베른이나 허먼 멜빌이나 찰스 디킨스를 구태여 ‘어린이 용’으로 손질해서 어린이한테 읽혀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이 문학을 혼자 스스로 읽기 어렵다면, 앞으로 어린이가 이 문학을 혼자 스스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문학을 어린이한테 건네지 않아야 할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문학을 구태여 어린이한테 주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가 기쁘게 알아들으면서 재미나게 읽을 책’이 대단히 많아요. 아이가 책읽기를 즐겁게 누리도록 곁에서 돕거나 이끌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어린이 눈높이하고 숨결을 헤아린 글(문학)을 어버이부터 즐겁게 읽은 뒤에 이 글(문학)을 아이한테 사랑으로 건넬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린이 용’ 책을 아이한테 주지 말고, ‘어린이도 어른도 함께 읽는 책’을 아이하고 함께 읽을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는 처음부터 어린이 눈높이로 썼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른 용’으로 고쳐서 어른한테 읽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문학이면서 어른도 마음에 기쁨이 샘솟도록 북돋우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문학을 ‘어른 용’으로 고치기에 어른이 어린이문학을 읽지 않습니다.


  어른도 어른 스스로 배우고 생각을 넓혀야 비로소 어린이문학을 기쁨으로 읽을 수 있어요. 어린이는 어린이 스스로 새롭게 배우고 생각을 넓히면서 차근차근 어른문학도 기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한테 ‘어린이 용 간추린 책’을 건네려 하지 마셔요.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용 간추린 책’이 아니라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을 건네 주시기를 바라요.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리기를 바라요. 2016.3.2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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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수업 (페터 볼레벤) 이마 펴냄, 2016.3.10. 13500원



  ‘우리 집 마당’을 누리고 나서야 나무를 제대로 바라본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이기에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날마다 바라보며, 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그리고 해마다 어느 만큼 자라는가를 새삼스레 바라본다. 예전에는 ‘나무’라 하면 그냥 다 같은 나무로만 여겼다고 한다면, 이제는 ‘나무’라 할 적에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나무’를 생각하고, ‘우리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를 생각한다. 이러면서 ‘우리를 둘러싼 나무’하고 ‘이 지구별에 있는 나무’를 차근차근 헤아린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나무부터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적에 마을나무를 찬찬히 헤아릴 만하고, 지구에 있는 수많은 나무를 헤아릴 만하다고 느낀다. 《나무수업》을 읽는 동안 내가 우리 집 나무한테서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무엇을 즐겁게 배울 만한가 하는 대목을 돌아본다. 풀 한 포기도 삶을 보여주고, 나무 한 그루도 살림을 보여준다. 오늘은 아침부터 뒤꼍 매화나무에 꿀벌이 얼추 이삼백 마리쯤 모여들어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었다. 꿀벌은 꿀하고 꽃가루를 모으러 왔을 테지만, 매화나무에 잔뜩 핀 꽃마다 수백 마리 꿀벌이 춤추면서 낮에는 매화꽃잎이 눈부시게 흩날렸다. 꽃가루받이를 마친 꽃송이는 눈송이처럼 잎이 떨어지네. 《나무수업》이 퍽 재미있어서 이 밤에 졸음이 가볍게 사라진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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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수업- 따로 또 같이 살기를 배우다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16,800원 → 15,120원(10%할인) / 마일리지 8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6년 03월 1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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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양해남) 눈빛 펴냄, 2016.3.10. 13000원



  양해남 님이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가 깃든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를 읽는다. 양해남 님은 금산에서 살며 금산 이야기를 사진으로 꾸준히 담아내는데, 금산뿐 아니라 일본도 한국 곳곳도 사진으로 살몃살몃 담아서 살가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진은 잘 찍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끼는데, 양해남 님은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보다는 ‘사진으로 만나는 이웃’하고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사이좋은 살림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넉넉하구나 하고 느낀다. 다시 말하자면, 사진으로 만나는 이웃하고 살가이 어우러지면 사진도 저절로 잘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은 사진으로도 만날 만하지만 그냥 만나도 좋다. 허물없이 어우러지는 이웃일 때에는 연필을 쥐면 ‘이웃 이야기를 글로 술술 풀어낼’ 만하고, 사진기를 쥐면 ‘이웃 이야기를 사진으로 솔솔 풀어낼’ 만하다고 느낀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분이라면, 또 사진을 잘 못 찍는다고 여기는 분이라면,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를 조용히 읽어 보으며 즐거운 길동무로 삼을 만하리라 생각한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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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어느 다큐 사진가의 사진강의 노트
양해남 지음 / 눈빛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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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입이 크다 - 교사 시인 박일환의 청소년시,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2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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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0



똑같은 교복 입혀도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 학교는 입이 크다

 박일환 글

 한티재 펴냄, 2014.7.14. 80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닙니다. 학교를 안 다녀도 얼마든지 삶을 배우고 살림을 익힐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치고, 주어진 틀에 맞추어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또래를 만날 수 있고, 선배와 후배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마음껏 뛰거나 놀거나 달리거나 웃거나 노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수험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수업 시간에 수업을 받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하거나 논다면 딴짓을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도 다른 교과서를 펼쳐야 하고, 한창 숫자와 글씨에 푹 빠지다가도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나가야 하며, 운동장에서 뛰놀며 흐른 땀이 식지 않았는데 다시 옷을 갈아입으면서 온몸이 다시 땀으로 푹 절면서 얌전히 칠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사람한테 그리 걸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아이들이 사회에 잘 길들도록 돕는 구실을 한다고 느낍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는 사회에서 시키는 일을 말없이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길어올려서 새로운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곳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학교라 할 만해요.



선생님! / 시험 문제가 왜 그래요? / 시험지를 막 씹어 먹고 싶었어요! (어린 염소의 등극)


예나는 예쁘다 / 생각만 했을 뿐인데 / 입이 벙싯거려지는 것도 / 조건반사 때문일까? (조건반사)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일환 님이 쓴 ‘청소년시’를 모은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2014)를 읽습니다. 박일환 님은 ‘어른시’도 ‘어린이시’도 아닌 ‘청소년시’를 일부러 썼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중·고등학교 푸름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삶을 노래한 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문학인 어른시는 여러 출판사에서 수없이 나오고, 어린이문학인 어린이시(동시)도 제법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지만, 막상 ‘어린이에서 푸름이 자리에 들어선 숨결’ 눈높이를 살피는 ‘청소년문학·청소년시’는 매우 드물어요.



별이 안 보인다고 투덜대자 별이 조용히 속삭였다 / 눈을 감아봐, 그러면 내가 보일 거야 (별은 숨어 있는 게 아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 여자가 말했다. / 예쁜 것도 죄가 되나요? // 텔레비전에 나오지 못하는 / 여자 친구가 말했다 / 나도 예뻐지고 싶어! (괜찮은 인간)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 사이인 아이들한테 따로 ‘푸름이(청소년)’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오늘날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푸름이’나 ‘청소년’이라는 이름보다는 ‘학생’이나 ‘수험생’이나 ‘입시생’이라는 이름을 훨씬 자주 듣습니다. ‘중1’부터 ‘고3’에 이르는 이름을 더더욱 자주 듣고요.


  이리하여, 학생이요 입시생이자 중1이거나 고3인 푸름이는 ‘시’나 ‘문학’이나 ‘책’보다 자습서와 문제집과 교과서가 가깝습니다.


  책방을 한번 둘러보셔요. 책방마다 아주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책’은 바로 자습서와 문제집과 참고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인기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예요. 오늘날 한국 푸름이는 자습서랑 문제집이랑 참고서하고 씨름을 해야 해요. 이러다 보니 중학교 교사 박일환 님은 따로 청소년시를 써서 이 아이들 넋에 고운 바람 한 줄기를 베풀어 주고 싶습니다.



할머니만 무릎이 시린 게 아녜요 / 겨울에 교실에 앉아 있어 봐요 / 무릎이 얼마나 시리다고요 (무릎담요)


엄마는 늘 /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는데 / 쓸 데 있는 생각은 어ㄸ너 걸까? (어느 날의 일기)



  청소년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는 책이름처럼 ‘입이 큰’ 학교를 다룹니다. 자, 입이 큰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입이 큰 개구리 같은 곳일까요? 아니면 입이 큰 괴물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감옥 같은 곳일까요? 입이 큰 신나는 놀이터 같은 곳일까요?


  학교도 학교 나름이기 때문에, 슬기로운 교사가 아름다운 아이를 가르치는 배움터가 있습니다. 슬기롭지 못한 교사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모질게 다루는 감옥 비슷한 곳도 있어요. 오직 입시에 치우친 채 아이들이 햇볕 한 줌 못 쬐면서 책상맡에서 온 하루를 고분고분 보내야 하는 곳이 있지요.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혁신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학교에는 ‘혁신 대학교’가 없습니다. 공공기관이나 회사나 공장에서도 ‘혁신 공공기관’이 없지요. 부속품이 아닌 오롯한 한 사람으로 서서 즐겁게 일하는 보람을 누리면서 살림을 기쁘게 짓도록 북돋우는 배움터나 일터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까요.



똑같은 교복을 입혀 놓아도 우린 결코 똑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 선생님들도 잘 아시잖아요 (찔리실 겁니다)


책은 안 보고 거울만 보는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 선생님도 거울을 들여다보세요 / 거기 선생님 얼굴 비치죠? / 그래서 보는 거예요 /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신 / 선생님 말씀처럼 / 소중한 내가 잘 있는지 살펴보는 중이에요 (책보다 거울)



  아이들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혀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꾸며야 해도 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교과서를 손에 쥐도록 해도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마음속에 다 다른 꿈을 키웁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예쁜 아이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만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른들 스스로 예쁜 눈썰미와 눈매와 눈길이 될 때에 비로소 아이들하고도 예쁜 삶과 살림과 사랑을 가르치면서 배울 만하지 않으랴 하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도록 채찍질해야 하는 학교가 아니라, 서로 돕고 아끼면서 고운 동무님이나 이웃님이 되도록 이끄는 배움자리요 살림자리요 사랑자리요 꿈자리가 될 학교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 7교시에 방과후수업에 야자까지 / 정해진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 어른들이 제일 먼저 달아난 선장을 욕하고 / 어른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며 탄식하고 / 어른들이 대한민국이 함께 침몰했다며 분노하는 동안 / 우리는 교실 안에 잘 갇혀 있었다 (열일곱 나의 친구에게)


미확인 비행물체가 떴다 // 남들은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 나는 분명히 보았다 (UFO)



  배 한 척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마다 교실마다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아이들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상맡에 붙들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똑같은 제복’을 벗어던질 틈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하고 달리고 뒹굴고 웃고 떠들면서 놀이를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왜 열네 살이 중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세 살에 낫질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에 가야 할까요? 왜 열여섯 살에 등짐을 익힐 수 없을까요? 왜 열아홉 살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할까요? 왜 열여덟 살에 아기를 돌보며 아끼는 손길을 익힐 수 없을까요?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몸과 마음이요, 다 다른 꿈과 사랑입니다. 똑같은 나이에 똑같이 뭘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학교만 ‘입이 크지’ 않습니다. 나라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모두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고 모든 가르침(교육)을 교사한테 맡기는 어버이(학부모)도 ‘입이 크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꿈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온누리에 아름다움이 넉넉히 퍼지면서 사랑스러움이 따사로이 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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