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테마다 - 곽윤섭 기자가 제안하는 나만의 사진 찍기
곽윤섭 지음 / 동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4] 곽윤섭, 《이제는 테마다》



- 책이름 : 이제는 테마다
- 글·사진 : 곽윤섭
- 펴낸곳 : 동녘 (2010.6.5.)
- 책값 : 13800원


 (1) 사진을 하는 마음


 집살림을 쉰 해나 예순 해나 일흔 해를 해 온 할머니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꾸려 온 삶이 대단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으레 꾸려야 하는 집살림이기에, 당신 또한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집살림 한길만을 걸어야 했다고 느낄 뿐입니다.

 집살림을 놓고 ‘가사노동’이라 일컫기는 하지만, 정작 집살림을 하는 살림꾼한테 돈값을 치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집식구가 집살림을 할 때에는 ‘거저로 도맡아 해 줄 일’로 여기고, 밖에서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 비로소 돈값을 치릅니다. 집안에 있으면 벌이를 하나도 안 한다 여기고, 집밖에 있어야 비로소 벌이를 한다고 여깁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던 할머니와 살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수수하고 조촐하게 즐기는 사람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줍잖게 ‘전문 사진작가 흉내’를 내느라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한편, ‘다른 어느 누구 흉내를 내지 않고 스스로 제멋을 살리며’ 더없이 싱그럽고 재미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입니다.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으레 으쓱으쓱거리면서 마치 당신이 언제라도 ‘전문 사진작가’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뻐기곤 합니다. 제멋을 사랑하며 살리는 사람은 으레 ‘아유, 이런 사진이 뭐가 좋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 찍은 사진인데요.’ 하면서 당신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낮추곤 합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내세운다든지 전문 사진작가 시늉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읽거나 들은 ‘전문 지식’이라 일컫는 이론을 들려줍니다.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당신들이 겪거나 부대낀 ‘삶’을 웃음이나 눈물을 담아 들려줍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해서 사진이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전문 사진작가이기에 사진이 대단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라고 해서 사진이 안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이기 때문에 사진이 어설프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가장 크게 돌아볼 대목은 ‘사진하는 마음’이 어떠하느냐입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가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봅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에 어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사진하는 길’이 어느 구비를 거쳤는가를 살핍니다.

 한 사람을 돌아볼 때에 이이가 어떤 일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벌거나 이름값을 얼마나 높였는가는 하나도 돌아볼 만한 대목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이가 당신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어 즐거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했느냐를 돌아볼 뿐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집살림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집살림을 무슨무슨 요리학원이나 문화센터 같은 데에서 익히지 않습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당신 스스로 집안에서 부대끼고 복닥이면서 차근차근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한테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있을 때에 가장 가까우면서 고마운 스승으로 삼으며 드문드문 하나씩 살가이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당신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전문 살림꾼’은 아닙니다. 그저 ‘여느 살림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살림꾼들이 일구는 집살림은 살림집 숫자만큼 많습니다. 사람마다 살림하는 모양이 다르고, 사람마다 살림하는 틀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장맛과 김치맛이 다르다고 하듯, 사람마다 살아가는 얼거리가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듯 모두 다른 삶결대로 모두 다른 살림을 꾸려 온 이들이 바로 우리네 살림꾼인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소리요, 오늘날까지 가장 막대접이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알뜰히 당신 길을 걸어온 어른이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건사하려 한다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집살림하는 할머니가 걷던 길이나 어머니가 걷는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손꼽히는 요리강사나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혀야 살림을 잘하겠습니까. 손꼽히는 요리강사한테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도 어떤 이야기를 듣기는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내 삶은 내 가슴으로 내 나름대로 느끼면서 내 결대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일굴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모습을 흉내낸다든지 남을 엿보면서 시늉을 한다고 내 삶을 일굴 수 없습니다. 내 살림은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깜냥껏 일구어야 합니다. 곧, 내 사진은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 배워서 하는 사진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좋고 나쁨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전문 사진강사한테서 좋은 구도를 배운다든지 괜찮은 빛느낌을 익힌다든지 쓸 만한 사진감(소재나 주제 모두)을 받아들인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내 깜냥껏 반갑고 아쉬움을 헤아리며 담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눈을 믿고 내 손을 믿으며 내 사랑과 믿음을 믿으며 즐기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머나먼 나날까지, 집살림하는 분들이 꾸린 삶자락이란 바깥사람 눈길로 보기에 ‘아무 모양새(주제)’가 없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집살림하는 당신들처럼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집안에서 당신 곁에 머물며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기에 ‘참 고우며 좋은 모양새(주제)’였다 할 만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 때에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엊그제, 마침 충주에서 인천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에, 장례식장에 들렀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마구 뛰고 휘저으며 노는 딸아이를 붙잡느라 정작 돌아가신 분한테 ‘고이 저승길을 걸어가소서’ 하고 비손할 겨를조차 없이 바빴습니다. 고단해 하며 시나브로 잠들 듯한 아이를 안고 잠자리로 가는 길에서야 겨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 어떠했는지를 여쭙지 못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때에도 어디에선가 할머니들은 한 분 두 분 숨을 거두고 있을 텐데, 숨을 거두는 할머니들 궂긴 소식은 신문에든 방송에든 나오지 않습니다. 여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 당신들 삶을 다루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궂긴 소식은 이름난 사람들이나 연예인이나 정치꾼이나 회사 간부나 높은자리 공직자들뿐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름난 사람들한테서 얻거나 느낄 마음이란 무엇일는지요? 하나같이 양복을 쫙 빼입고 있는 그 이름난 분들 궂긴 소식 사진을 바라보면서 무슨 울렁거림이 있을는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는 바로 그때부터 ‘내 사진감(사진 주제)’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식구들 모습을 찍든, 꽃 사진을 찍든, 동네에서 동무나 이웃 사진을 찍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찍든 ‘내 사진감(사진 주제)’을 알뜰살뜰 즐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동안에 언제나 내 사진감이 하나둘 새록새록 쌓이고 있달까요.

 따로 사진감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넓고 깊은 숱한 사진감으로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찍자’고 해야 사진감이 되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 하나만 찍자고 해서 ‘주제가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과 바다만을 찍자고 해서 ‘주제가 서린 사진’을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다만, 한 가지 틀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진에는 저마다 사진감(주제)이 있습니다만, ‘이야기’까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래저래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에도 이야기를 우겨넣을 수 있기는 할 테지요. 이야기란 우겨넣든 꾸겨넣든 쑤셔넣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거나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달가이 반길 사람은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 앞서, 나 스스로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은 이야기가 즐거웁겠습니까.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나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방송 연속극에 나오는 ‘억지로 지어내거나 짜낸 웃음눈물’하고 견줄 수 없이 산뜻하고 너르며 풋풋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곤 합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나 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한테서나 살가우며 재미난 한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인 까닭에, 여느 사람들 삶이야기야말로 눈물나거나 웃음납니다. 그래도 여느 사람들은 당신들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방송 연속극을 들여다보기 좋아하시는데, 그저 당신들 할머니나 어머니 삶을 찬찬히 들으며 당신들 삶을 책으로 쓰거나 연속극으로 담은 일이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붙잡고 부둥켜안으면서 보내 온 삶에는 늘 ‘주제’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나, 당신들부터 이러한 삶에 깃든 주제와 이야기를 내세운 적이 없는 가운데 우리 또한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보듬지 않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하고 싶은 분들은 굳이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사진하는 마음’을 잘 다스리시면 됩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를 알차게 돌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을 보살피면서 ‘사진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면 돼요. 이 모든 줄기와 구비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다른 이 손을 빌 일이란 없습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면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남한테 맡겨서는 이룰 수 없는 우리 집 살림이요 내 사진밭입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다 할지라도 바로 이렇게 ‘벅찬 배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내 사진을 더 튼튼하고 힘차게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혔을 때에 누군가 등받이를 해 주어 밟고 올라설 수 있습니다만, 이 벽을 내 자그마한 두 주먹으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벽을 멀리 에돌아 갈 수 있는 한편, 내 손으로 사다리 하나 만들어서 벽을 살며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벽 앞에 선 나는 내 깜냥껏 이 벽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내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도 똑같고, 그림그리기를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때, 춤을 추거나 어떤 공연을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남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남한테서 배워 글쓰기를 할 수 없고 좋은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그림그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교사나 강사나 스승이나 교수나 전문가라는 분들한테서 몇 가지 자잘한 솜씨는 받아들이거나 물려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 한 줄에 담는 넋은 내 넋을 담을 노릇입니다. 그림 한 장에 싣는 얼은 내 얼을 실을 노릇입니다. 내 스승 넋을 내 사진에 담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 스승 넋은 내 스승이 당신 스스로 찍는 사진에 당신 나름대로 담을 뿐입니다.


 (2) 사진은 억지로 가르칠 수 없는데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일을 하는 곽윤섭 님이 《이제는 테마다》라는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놓습니다.

 사진강좌를 열기도 하고,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길잡이말을 찬찬히 일러 주기도 하는 곽윤섭 님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곽윤섭님한테서 도움을 받은 사진쟁이가 꽤 많지 싶고, 곽윤섭 님이 도와준 사람들 숫자 또한 무척 많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으니까요. 곽윤섭 님 사진은 곽윤섭 님 스스로 깨달으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당신한테 사진을 가르쳐 준 교수님이나 작가님이 있다 할지라도, 곽윤섭 님 당신 사진은 당신 나름대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이루는 사진입니다. 곽윤섭 님한테서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도 매한가지예요.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은 사진강사한테서 훌륭하거나 알뜰하다 싶은 이야기를 엿듣거나 받아들여야 당신 사진을 훌륭하게 끌어올리거나 일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듣든 안 듣든 당신 스스로 당신 사진길을 당신이 몸소 부대끼면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당신 사진길을 걸으면서 당신 사진을 훌륭히 끌어올리거나 일굽니다.


.. 사진에 선이 들어 있으면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바닷가나 사막의 모래밭을 떠올려 봅시다 … 이 모래밭 사진을 찍었을 때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래의 질감과 색일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사막 사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도시에서 사진을 찍으면 삭막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숱하게 등장하는 사각형들 때문입니다. 어디서 카메라를 들여다봐도 사각형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다고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  (13, 25쪽)


 곽윤섭 님은 《이제는 테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책이름부터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주제(테마)가 없는 사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사진에는 늘 주제가 있으나 이야기가 꼭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하는 사람이 ‘이제 막 사진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진길을 걷다가 망설이거나 헤매는 사람’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자면, “이제는 테마다!” 하고 외칠 노릇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어디에나 주제가 있음을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고 있답니다.” 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가운데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기는 한데, 이야기를 싣지 못할 때에는 영 맛이 없거나 멋이 없답니다.” 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토닥이며 딱 한 가지 모자람만 짚으면 됩니다.


.. 모르는 사람을 모델 삼아 찍기가 어렵다면 주변 인물, 즉 가족, 친구, 동료들을 미리 점찍어 둔 공간에 데리고 가서 찍어 봅시다 … 사진은 그림과 달라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을 다르게 찍기가 어렵습니다. 사진은 발견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지런한 발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것을 찍을지 보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긴 두 개의 꽃병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진입니다 ..  (39, 41쪽)


 이야기가 없으니 맛도 멋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으면 흔들린 사진이든 초점이 어긋난 사진이든 좀 어둡거나 밝게 나온 사진이든 재미가 있습니다. 신이 나고 기쁨이 묻어 나기 마련입니다. 놀랍도록 훌륭하다 하는 사진쟁이들이 마련한 사진잔치에 가 보면 으레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 몇 점씩 끼어 있곤 한데, 당신들은 틀림없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을 다시금 찍고 새로 더 찍었을 텐데, 사진잔치 자리에서는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을 어김없이 내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이든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든 “주제는 다 같이 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안 흔들리거나 초점은 잘 맞았어도 “이야기 하나 제대로 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진은 쓰지 못합니다.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하나 살뜰히 실어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씁니다.

 한 달에 오백만 원을 벌어야 좋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한 달에 사백구십오만 원을 벌어도 좋은 돈벌이요, 사백오십만 원을 벌든 삼백오십만 원을 벌든 이백오십만 원을 벌든 오십만 원을 벌든 좋은 돈벌이입니다. 오로지 돈벌이만 하느라 내 삶을 놓치고 있다면 끔찍한 돈벌이입니다. 벌어들이는 돈 숫자가 낮을지라도 내 삶을 가꿀 겨를이 있는 가운데, 보람찬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나한테 좋은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주제다”가 아닌 “이제는 이야기다” 하고 외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막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한테든, 오래도록 사진길을 걸은 즐김이한테든, 꼭 한 가지 말마디, “여러분 당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살포시 사진 한 장에 담아 주셔요. 이뿐이랍니다.” 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소재를 시험 삼아 찍어 보라고 일러 주어 보았자 부질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이런 구도로 찍어 보고 저럴 때에는 저런 느낌을 담아 보라고 해 보았자 덧없습니다. 만듦사진이 부질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야기 하나 없는데 만듦사진이든 스냅사진이든 스트레이트이든 무어이든 해 보았자 “사진이 될” 수 없어요.

 마구 휘갈겨 쓴 글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글쓴이나 그린이 나름대로 이야기 한 자락 담고 있으면 놀랍도록 눈물나거나 웃음나는 글이나 그림으로 남습니다. 세발이를 받치고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찰칵 한 장 찍었다고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도와 빛과 그림자를 맞추어 황금분할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멋있는 사진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를 찍을 때 옆에 있는 다른 놀이기구의 테두리를 이용해 찍는 것. 이것도 프레임 속 프레임입니다 … 회화에서는 화가 특유의 터치로 시각에 따라 대상을 표현하는 선이나 면을 일그러지게, 때로는 더 과장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다른 사람의 해바라기와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셔터를 눌러서 찍는 사진에서는 사진가 임의대로 터치를 바꾸는 것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59, 69쪽)


 우러나오는 사진이 되도록 ‘사진하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넉넉히 사랑하고 아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글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아니면 여느 교사로서 초중고등학교나 대안학교나 대학교나 뭐 이런저런 배움터에 있든 똑같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물려줄 수 없어요. 지식이란 책에 적바림해 놓고 ‘한번 읽으셔요’ 하고 내밀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만 물려줍니다. 삶에 서린 눈물을 물려주고, 삶에 깃든 웃음을 남깁니다.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잇는 가운데, 삶을 돌아보는 눈길과 손길을 나눕니다.


.. 사진을 찍어서 예쁘게 나올 만한 길들을 찾아봅시다. 우선 한강을 따라가 봅시다. 한강 주변에는 멋진 산책로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선유도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무지개다리는 낮이나 밤이 모두 아름다운 곳입니다 ..  (163쪽)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사진 지식’을 펼쳐 보이는 《이제는 테마다》라는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진 지식’이 아닌 ‘사진 삶’을 펼쳐 보였어야 할 곽윤섭 님이 아닌가 싶은데, 이제까지 퍽 오랫동안 전문 사진기자 길을 걸어오셨으나 정작 사람들한테 ‘사진 삶’은 펼쳐 보이지 못하고 책머리부터 책끝까지 온통 ‘사진 지식’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구태여 《이제는 테마다》 같은 책을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은 《이제는 테마다》를 비롯해 그 어떤 책조차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출 사진책이라면 사진하는 삶을 다루는 책이어야 합니다. 사진하는 삶을 ‘사진책을 쓴 사진쟁이’ 스스로 먼저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당신 뒷사람들한테 사진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우며 멋진가를 깨닫도록 한손을 내미는 책을 들추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하는 분들은 당신 집안에서 톡톡히 살림꾼입니다. 사진을 하는 분들은 당신 두 다리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나 톡톡히 ‘사진 살림꾼’일 노릇입니다.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다시 서고,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새로 서며,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튼튼히 설 노릇입니다.


.. 자전거를 테마로 삼으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변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거리, 공원, 광장 등에서 수시로 자전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에 동그란 바퀴가 있다는 것도 사진을 찍는 데 흥미로운 점입니다. 사진 속에 무엇인가를 담을 때는 특이한 소재가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데, 자전거의 바퀴는 모양 덕에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명랑하고 원만하며 희망적인 느낌을 줍니다 ..  (191쪽)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은 종이 한 장과 같습니다. 종이를 앞으로 뒤집으면 사진을 살리고, 종이를 뒤로 뒤집으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눈을 믿고 내 가슴을 사랑하며 내 삶을 좋아하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눈이 아닌 남 눈에 기대거나 내 가슴이 아닌 다른 이 가슴을 눈치 보듯 살피거나 내 삶이 아닌 딴 사람들 삶에 홀리고 있다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사진기가 값싼 녀석이든 비싼 녀석이든, 이 하나를 내 몸통으로 여기며 언제나 고이 아낄 수 있으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사진기 하나를 아끼기보다 더 값있고 괜찮다는 기계에 자꾸 눈이 멀다 보면 사진을 죽입니다. 척 보기에 눈물나거나 웃음나도록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사진에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해야 사진을 살립니다. 남 앞에서 내보이거나 무슨 기록을 만든다거나 어떤 일거리에 따라 찍으려고 하는 사진이라면 저절로 사진을 죽입니다.

 내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두 다리가 단단해지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찌웁니다. 손수 꾸리고 몸소 일구는 삶이라면 사진이 살아납니다. 사진이란 ‘손수’ 하는 일이고, 내가 ‘몸소’ 즐기는 놀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진을 막 배우려는’ 분들이나 ‘사진을 오랫동안 했으나 갈팡질팡하는’ 분들이라면 제발 사진강의는 듣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뿌리는 바로 내 삶에 있으니까요. 사진을 곱게 여미는 잎사귀는 먼나라가 아닌 내 고향마을 어디에나 곱다시 있으니까요. (4343.7.16.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길과 글쓰기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돌아보았을 때에 빨래를 하고 빨래를 털고 짜며 빨래를 널었다가 빨래를 걷어서 빨래를 개는 데에 들이는 품이란 참 많다. 쌀을 씻어서 불리고 밥을 안치고 밥상을 차린 다음에 치우는 품 또한 많다. 아이랑 부대낀다든지 집일을 하며 들이는 품이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글쓰는 사람이라 하지만 정작 글쓰기를 하는 데에 들일 품이란 얼마나 적은가. 그러나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고 옆지기 어머니를 헤아리면, 내가 집살림에 들이는 품이란 참 적다. 우리 어머니이든 옆지기 어머니이든 당신 온삶을 집살림에 바치고 있다. 두 분 어머니한테서 맛난 밥상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이라든지, 두 분 어머니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넉넉함이란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다. 두 분 어머니가 이제까지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두어지며 저절로 느끼는 고마움이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내 살림살이에 제대로 손길을 바치지 못하는 주제에 살림이 어떠하다느니 살림이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고 떠벌일 수 없다. ‘그나마’가 아니라 ‘꽤 많이’ 품과 틈을 들여 글쓰기를 하고 있는 내 삶이다. 집살림을 하느라, 또 자전거를 타느라, 여기에 사진기를 쥐느라 내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히기는 했지만, 내 글쓰기는 다름아닌 굳은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가. 앞으로 내 손에는 굳은살이 더 많이 박힐 테며, 이에 따라 글쓰기에 쏟을 겨를은 훨씬 줄어들 텐데, 이렇게 글쓰기에 쏟을 겨를이 훨씬 줄어들면서 외려 ‘글쓰기 삶’은 더 길어지겠지. (4343.7.14.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포토 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지음, 구자호.이기명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7] 케네스 코브레, 《포토저널리즘 (5판)》



 사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 또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마저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가르칠 수 있는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나 지식인이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익히는 사진찍기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사진읽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이든 사진찍기이든 사진읽기이든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듣는다든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사진이나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강좌나 이론 또한 사진이며 사진찍기이며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곰곰이 살피면, 사진뿐 아니라 사랑 또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사랑이 된다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라느니, 만나면 어디를 가라느니 하고 도움말을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이 맞는 두 짝꿍이 이루는 사랑은 두 사람 스스로 두 사람 깜냥껏 이룰 뿐입니다.

 사랑만 스스로 깜냥껏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어머니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어머니들 스스로 어머니 손맛을 이루어지기까지 누구한테서 살림살이 비법을 배운 적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어머니이지 않았고, 누구도 처음부터 어머니 손맛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내면서 차츰차츰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손맛을 익힐 뿐입니다.

 학자가 되는 길이든 교사가 되는 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놓아야 학자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다녀야 학자로 설 수 있지 않아요. 내 배움길을 스스로 갈고닦으며 살피고 가다듬으며 비로소 학자가 됩니다. 교대를 나와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교사이지 않습니다. 배움터에서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교사다움을 익히고 받아들이면서 아주 천천히 교사가 됩니다.

 《포토저널리즘 (5판)》이라고 하는 ‘사진 길잡이책’은 사진과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살짝이나마 사진밭을 맛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전문 사진기자가 되려는 사람한테 도움말을 건네는 책’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 사진기자이든 아마추어이든, 또는 집에서 꽃이나 강아지나 식구들을 찍으며 사진을 즐기든, 사진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좋아하고자 하는 이들한테 사진말을 나누어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읽는 책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에 ‘사진을 배우는 길’이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익히는 책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계속 촬영을 한다. 아마추어들은 몇 장의 스냅사진을 찍고 최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 많은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다 쓰기 전에 촬영을 멈춘다. 필름을 남겨 두는 이유는 누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28, 3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와 아마추어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나라밖에서 훌륭하며 알뜰히 사진기자로 뛰는 사람하고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사진기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진을 얻고자 쉬지 않고 찍는’ 사람은 퍽 드물거든요. 한국땅 사진기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취재현장에 오래 있지 않을 뿐더러(아예 취재현장에 안 오기 일쑤입니다), 미리 와서 살펴보지 않고, 행사나 사건이 끝난 다음까지 더 남아서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빨리 찍고 떠나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그림 될 만한 모습을 찍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예식장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진기자는 예식장 사진기사하고 닮았습니다. 주문받은 사진첩 하나에 넣을 사진만 착착 찍을 뿐, 혼인을 치르는 다 다른 짝꿍들한테서 느낄 다 다를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식장에 미리 찾아와 온갖 모습을 두루 찍는다든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갖가지 모습을 골고루 담는다든지, 예식을 마치고 나서 어우러지는 숱한 모습을 적바림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포토저널리즘 (5판)》에 나오는 “최고의 렌즈 테크닉과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도, 사진기자는 여전히 세금 인상을 위해 소집된 시의회와 지역구의 학교 수를 줄이기 위해 열린 회의의 차이를 독자를 위해 구별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72쪽).” 같은 대목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 사진기자들일수록 더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전문 사진기자라 하는 분들이 사진강좌를 곧잘 열곤 하지만,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다고 한다면, 아마추어이든 그저 ‘사진 즐김이’이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진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할 자리를 찾고 깨닫고 느끼면서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으며 좋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요, 우리 삶에서 사랑스런 살붙이와 이웃을 살피고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이들 삶자락을 알뜰살뜰 담으며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자들한테만 “만약 촬영 대상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포토저널리즘적으로 뛰어난 기술도 내면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124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집에서 내 식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된 우리들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아이가 ‘아이 참, 싫다는데 왜 자꾸 찍어요?’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면 어떤 사진이 나오겠습니까. 꽃이나 나무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꽃이나 나무가 어떠한 터전을 좋아하고 반기는가를 살피지 않고 찍는다면 고운 꽃 사진 하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문기자 사진이든 여느 생활사진이든 사진 한 장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믿음과 가장 따순 손길을 담을 노릇입니다.

 마땅한 일이 마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초중고등학교다운 적이란 없고, 언제나 입시지옥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대학교가 대학교다운 날이란 없으며, 늘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싸움터로만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배움터 모습이 언론에 옳고 바르게 나타나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말하든, 참다운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우리 터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꽤 드뭅니다. “매체로서의 사진은 당연히 우리의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편집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은근한 무시를 통해 전체 인구 구성에서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중남미인, 아시아인, 모든 종족의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242쪽).”는 대목을 읽으며, 이 땅 진보나 보수가 얼마나 이 땅 너른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가를 살펴봅니다. 좌파가 진보이거나 우파가 보수이지 않습니다. 좌파는 좌파이고 우파는 우파이며, 진보는 진보이고 보수는 보수입니다. 저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쪽으로 이끌어 갈 물줄기입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물줄기가 아니에요. 사진이란, 또 사진찍기란, 그리고 사진읽기란 어떻게 해야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르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걷는 가운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길어올리는 몸짓이 사진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누구나 나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담습니다. 나 스스로 아끼거나 돌보고픈 터전을 적바림합니다. “사진기자는 사진 콘테스트나 편집자 혹은 동료 사진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슬픈 순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385쪽).”는 말마따나, 사진이란 내 모든 삶을 곱다시 담으며 즐기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이며, 삶을 즐기는 예술인 사진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를 어디 다른 데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삶을 즐기는 예술을 학교를 오래 다닌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다고 깨닫겠습니까.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즐길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좀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책을 찾아 읽을 뿐이요, 나 스스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면, 내 사진은 아주 저절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알차게 일구고 있으면,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게 일구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찍기를 제대로 하고 싶으면 스스로 내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를 똑바로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진 배움길이란 오직 이 하나입니다. (4343.7.14.물.ㅎㄲㅅㄱ)


― 포토저널리즘,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씀, 구자호·이기명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5.2.20./39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잡지


 지난주에 살짝 서울마실을 하며 헌책방에 들렀을 때에 《PHOTO 291》이라는 사진잡지를 두 권 장만했다. 살 때에는 몰랐는데, 사고 나서 집에 와서 들여다보니 이날 장만한 두 권은 창간 2호와 3호였다. 1988년에 처음 나온 잡지라고 하는데, 좀더 눈여겨보며 들여다보고 살폈다면 창간호라든지 이 뒤에 나온 다른 잡지도 알아보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나 《PHOTO 291》이라는 사진잡지에서 읽을거리는 몇 가지 찾아내기 어렵다. 나로서는 이 사진잡지가 ‘사진을 말하고 사진을 다루는 잡지’로서만 뜻이 있을 뿐, 이 잡지가 오늘까지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리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사진을 즐기는 사람을 더욱 넓히면서 사진 즐김이 스스로 사진이라고 하는 아름다움 하나를 붙잡도록 이끌지 못한다고 느끼는 《PHOTO 291》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을 골고루 알아채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사진잡지 또한 즐겁게 우리 누리에 나오며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달 2010년 7월을 끝으로 사진잡지 《PHOTONET》이 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나올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사진잡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으며 잡지사 살림이 어렵기 때문에 더는 못 낸다고 한다. 이 사진잡지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뽑는 훌륭한 잡지이기도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그럴싸한 훈장은 붙일지언정, 이러한 훈장이 붙는 잡지가 튼튼하고 즐거이 꾸준하게 나오도록 뒷배를 하지는 못하는 셈이라고도 하겠다.

 그런데 《PHOTONET》이라는 사진잡지가 나오지 못하는 대목 또한 아쉽지만, 이 사진잡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이 사진잡지를 아끼기도 하는 내 눈길로 들여다볼 때에는 이 사진잡지가 못하거나 모자란 대목이 많이 보인 만큼, 이와 같이 숨을 거두는 일을 그리 슬프다고 느끼지 않는다. 잡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늘지 못한 일은 틀림없이 안타까운 노릇이요, 제아무리 이 사진잡지가 깊이와 너비를 고루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사랑받지 못할 까닭이란 없다.

 다만, 살림이 참 힘들어 더는 내기 어려워진 오늘 모습이라 한다면, 살림이 참 힘들었던 까닭을 스스로 더 캐고 뉘우치며 슬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잡지 《PHOTONET》에서 다루는 사진은 어떤 사진이었으며, 잡지 《PHOTONET》이 일구려는 사진밭이란 어떤 모습이었고, 잡지 《PHOTONET》이 사랑하고 껴안으려는 사진삶이란 무엇이었는가를 가만히 되씹으면 좋겠다. 꽤나 비싼 사진기를 선뜻 장만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잡지까지 선뜻 정기구독하지 못한 오늘 우리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는지를 잡지 《PHOTONET》은 어느 만큼 헤아렸는지 깨달으면 좋겠다. 왜 사진잡지여야 하며, 사진잡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려야 하고, 사진이란 무엇이며, 사진이 걷는 길과 사진으로 이루는 일과 놀이란 또 무엇인지를 낱낱이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잡지라 하더라도 살아남기 어려운 판인데, 생각하는 잡지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한동안 돈을 벌는지 몰라도 생각하는 잡지가 아니라면 오래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빛이 바래고 만다. 돈은 잔뜩 벌었으나 엉뚱하고 멍청한 길을 걷는 잡지사와 출판사가 한둘인가? 돈은 못 벌지만 아름답고 빛나는 길을 걷는 잡지사와 출판사가 아예 없는가? 돈은 돈대로 알맞게 벌면서 잡지는 잡지대로 아름다울 수 있도록, 《PHOTONET》이라는 사진잡지가 참답고 착하며 고운 길을 슬기롭게 새삼 찾아내거나 느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사진이란 삶이고 책 또한 삶이며 사람은 살아야 사람이다. (4343.7.13.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49 ― 살아숨쉬는 사람만이 쓰는 글
 : 마루야마 겐지, 《산 자의 길》



- 책이름 : 산 자의 길
- 글 : 마루야마 겐지
- 옮긴이 : 조양욱
- 펴낸곳 : 현대문학북스 (2001.3.30.)
- 책값 : 8000원



 (1) 글쓰는 사람이 걷는 길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송두리째 담아내어 보여주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란 잘나거나 못나거나 가리지 않고 내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이 담긴 책이란 즐겁거나 슬프거나 따지기 앞서 먼저 내 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글을 쓰든 겪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담아내는 글을 쓰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쪽 글이 되든 내 삶이 글에 묻어납니다. 어떠한 글로 나아가고자 하든 내 넋이 글에 스며듭니다. 스스로 벌거벗는 삶이요 스스로 벌거벗으면서 거리끼지 않아야 할 삶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나 만만하지 않은 삶입니다. 믿음을 섬기는 삶이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이든, 법이나 의료를 다루는 삶이든, 행정이나 기계를 다루는 삶이든 한결같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 일을 어떤 마음결로 붙잡든 일하는 사람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는 글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행정을 하는 사람은 행정서류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따로 글을 쓴다고 해서 더 벌거벗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은 내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낄 뿐이지, 우리는 내 삶을 둘레에 보여주고 둘레 삶을 고스란히 바라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찻길을 달리다 보면 어김없이 길가마다 서 있는 자동차하고 부대낍니다. 자동차들은 찻길만 차지하지 않습니다. 찻길에다가 길가에다가 사람들 거님길까지 차지할 뿐 아니라, 사람들 살림집 앞이나 가게 앞자리까지 차지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은 어디로든 움직이지 못합니다. 늘 가로막힙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 가운데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을 헤아리는 이를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자동차에 탄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얼마나 더 빨리 길이 덜 막히면서 달릴 수 있는가에 마음을 기울일 뿐입니다. 이러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시나브로 책읽기하고는 동떨어지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할지라도 내 둘레에 이웃과 동무가 있음을 깨닫는다든지 내 둘레 사랑스럽고 따스한 살붙이가 있음을 헤아린다든지 하기란 힘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찻길을 달리고 있으면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를 만나지 못합니다.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들은 시골길에서 차를 세워 둘 곳이 없음을 뻔히 알기 때문에 길가에 차를 대지 않습니다. 길 안쪽 쉴 자리라든지 나무 그늘 자리를 찾아가서 차를 세웁니다. 아무 데나 차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골길에서 자전거로 달릴 때에는 자동차하고 똑같이 찻길 한복판을 달려야 합니다. 시골길에서는 길섶이란 거의 없어 사람이 거닐 길이든 자전거가 다닐 길이든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이런 길이지만 시골 자동차는 무시무시하게 내달립니다. 어르신과 어린이가 느릿느릿 거니는 시골길에서 팔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는 드뭅니다. 으레 백 킬로미터나 백이십 킬로미터를 밟습니다. 도시처럼 차가 많지 않아 막힐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다들 ‘자동차 최고성능’을 낼 생각인 듯 마구마구 달립니다. 이러는 삶에 길들면서 아주 마땅히 책읽기하고는 등을 돌리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해 보았자 내 둘레 이웃과 동무 삶을 곱씹을 책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자동차를 몰 수 없습니다. 운전면허조차 딸 수 없습니다. 나중에 내 주머니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할지라도 운전사를 하나 두며 자동차에 내 몸을 실을 수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삶을 일구는 동안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탈밖에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쓸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삶을 꾸리는 동안 드문드문 버스를 타거나 다른 이 차를 얻어 탈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내 손으로 차를 몰거나 장만할 꿈은 꾸지 못하겠다고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삼 곱씹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 몰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말재주만 피우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두 다리로 걷지 않거나 자전거를 탈 마음이 아니라면 도무지 내 이웃과 동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쓰기란 다름아닌 삶쓰기입니다. 글나부랭이를 종이에 이냥저냥 끄적이면 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온몸으로 내 삶을 껴안고 복닥이면서 땀흘리고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가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 또한 글쓰기가 아니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고 싶은 글쓰기는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 한 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면서 나 스스로 고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은 글쓰기 한길을 가고 싶습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글을 써서 돈만 벌고 돈으로 내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나쁘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를 찾아내어 읽는 가운데 내 삶을 나부터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좋게 일구고 싶은 매무새일 때에는, 아주 마땅하면서 부드러이 내 삶을 나 스스로 글 하나로 담아내자는 꿈을 품습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 읽기, 곧 책읽기란 줄거리를 머리속에 집어넣는다든지 갖은 지식과 정보로 내 온마음을 감싸려고 하는 뻘짓거리하고 사뭇 다릅니다. 책읽기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나 스스로 고르고 살펴 장만하여 읽고 집안에 건사해 놓는 책으로 내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장만하거나 갖춘 책으로 내 삶을 다시 보며 내 삶을 새로 읽어 내 삶을 올바로 돌보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책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무슨 베스트셀러를 읽었다던지 어떤어떤 스테디셀러를 얼마나 알아보고 읽었다 할지라도 책읽기가 아닙니다. 몇 만 권이나 몇 천 권에 이르는 책을 읽었다 해서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나를 내세우는 이름값이 아니고, 책읽기는 내 몸값을 부풀리는 돈값이 아니며, 책읽기는 우쭐우쭐 어슬렁거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글쓰기가 삶쓰기라면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글쓰기가 삶쓰기인 만큼 사진찍기는 삶찍기입니다. 사진찍기가 삶찍기인 터라 그림그리기는 삶그리기입니다. 그림그리기란 삶그리기인 까닭에 노래부르기란 삶부르기요, 춤추기란 삶추기입니다.

 살아가기에 글을 씁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기에 책을 읽습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고 책을 읽기에 사진 하나 찍고, 그림 하나 그리거나 즐기며, 노래 하나 부르거나 듣고, 춤을 추거나 바라봅니다. 삶이 온통 글이고 책이며 그림이고 사진인 가운데 춤과 노래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에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립니다. 살아내고 싶어 글을 쓰고, 살아숨쉬는 넋으로 책을 읽습니다. 삶결이 글결로 묻어나고, 삶마디가 사진마디로 이어지며, 삶무늬가 그림무늬로 새겨집니다.


 (2) 살아 있기에 글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일본사람 마루야마 겐지 님이 쓴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마루야마 겐지 님이 말하는 “산 사람이 걷는 길”이란, 당신 스스로 살아 있어서 글을 쓰고 있는 길이라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똑바로 살았건 그릇되이 살았건, 당신이 아름다이 살았건 엉터리로 살았건, 당신이 착하게 살았건 짓궂게 살았건, 당신이 참다이 살았건 바보스레 살았건, 당신은 오늘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디고 있음을 잘 느끼고 있기에 이렇게 글조각을 푼푼이 그러모아 책 하나로 가만히 내놓는구나 싶습니다.

 《산 자의 길》을 읽은 사람 가운데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분이라면, 마루야마 겐지 님과는 또다른 길을 걷는 당신 삶을 책 하나로 가만히 여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산 자의 길》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어디에서 살아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한편, 나 스스로 내 삶을 엮어 책 하나로 일구는 길을 보지 못합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은 참으로 살고 싶어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먼바다를 누비는 배를 타는 일꾼이 되고 싶었든, 소설 《모비딕》에 흠뻑 빠진 사람으로 지냈든, 혼인은 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고 지내든,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미친 듯이 빠져 지낸 적이 있든, 마루야마 겐지 님은 당신 삶을 하나도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조금도 덧바르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보기 좋게 꾸민다든지, 그럴싸하게 허울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 몸뚱이가 살아숨쉬는 그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일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뿐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글은 온통 꾸밈없이 숨쉬고 사랑하며 생각하는 삶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하나입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모습을 새삼스레 찾아볼 수 있는 그림 한 장입니다.

 한국땅 어느 소설쟁이는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이야기했는데, 마루야마 겐지 님은 따로 슬픔이건 기쁨이건 밝히거나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아 있음만 밝히거나 다룹니다. 살아내는 동안 느끼는 슬픔은 언제까지나 슬픔이기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가운데 받아들일 기쁨은 노상 기쁨이기만 하지 않으니까요. 슬픔은 그예 슬픔이고 기쁨은 그저 기쁨입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든지 기쁨이 슬픔으로 달라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거나 새로 샘솟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이야기가 골고루 있으며,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내 몸뚱이로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님이니,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무대에 풀어놓습니다. 이 무대에는 당신이 보낸 삶이 알알이 묻어나 있는 한편, 당신이 바라보는 삶이 소록소록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가운데, 당신이 꿈꾸는 삶이 새록새록 깃듭니다. 딱히 수수하다거나 투박하다 할 대목이란 없습니다. 무언가 한결 곱다거나 멋있다 할 대목 또한 없습니다. 어딘가 남다르다거나 돋보인다 할 대목은 없습니다. 새삼스레 따스하다거나 넉넉하다 할 대목도 없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소설은 오로지 마루야마 겐지 님 삶이기에 좋은 소설이고 문학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당신 삶만큼 소설을 쓰며 즐기고 있기에 좋은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기에 글을 쓰고, 살아가는 만큼 글을 쓰며, 살아숨쉬는 그대로 글을 씁니다. 글 하나 쓰는 밑바탕이란 오직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로 글을 쓸 뿐이고, 이 세 가지로 책을 읽을 뿐이며, 이 세 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사랑을 나누며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길 뿐입니다.

 살아 있지 않다면 글을 쓰지 못하고, 살아 있지 못한데 글을 쓸 까닭이 없으며, 살아 있지 않은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소설을 놓고 으레 ‘꾸미는 이야기’라 하지만, 더욱이 글쓴이 스스로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쓸 뿐이라고도 하나, 아직 겪어 보지 못했다기보다 느껴 보지 못한 삶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쓴다고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뭇사람 삶이기에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글쟁이 한 사람은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일 때에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책쟁이 한 사람은 글쟁이 한 사람이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을 담아낸 글을 또다른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가슴’이 되고 ‘살아 있는 목숨’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책읽기가 이루어집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동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한동아리입니다.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은 분이라면 적어도 이만한 느낌을 선물로 받으면서 내 글쓰기와 삶쓰기와 책읽기와 삶읽기를 고이 모두어 내리라 믿습니다. 이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섣부른 생각이나 치우친 마음이 없었다면.


 (3) 살아숨쉬는 글월 새롭게 읽기


 나온 지 제법 되기는 했지만 아쉽게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산 자의 길》입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는 이 같은 문학이 옳게 읽히기는 힘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사람들 스스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니까요. 손꼽히는 몇몇 대학 졸업장을 따려 하고,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으려 하며, 자동차 굴리기에 허덕이는 가운데, 더 크고 값나가는 아파트를 장만하는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한국땅에서 《산 자의 길》이란 꿈 같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숨쉬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어느 구석도 읽히기 힘든 《산 자의 길》인데, 이렇게 살아숨쉬지 않는 한국사람들한테 더욱 읽힐 《산 자의 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다시 그은 대목을 곰곰이 되읽습니다. (4343.7.13.불.ㅎㄲㅅㄱ)


[9∼10쪽]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어떠한 집단에도 의지하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사람의 부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에 코웃음을 날리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과 권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야말로 참된 창작자이며, 참된 산 자이다.

[24, 58, 88, 91∼92쪽] 국가 권력에 의해 잔혹한 대변화를 강요당한, 저 전쟁(태평양전쟁)의 시대를 용케 헤쳐나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른들로서는, 필경 그처럼 아무런 자극도 없는 안정이야말로 다시없는 보물이었으리라 …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도회의 번잡함이 아니라 우주에 직결되어 있는 광대한 바다였다 … 주변에는 샐러리맨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인간이 수두룩했다. 적응력이 풍부하다고 할까, 순종하는 체질이랄까, 전형적인 현실파라고나 할까 … 왜 그들은 돌과 화염병과 쇠파이프밖에 손에 쥐려고 하지 않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아예 무기류에도 들어가지 않을 소도구를 휘두르는 것이 어떻게 과격파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43, 44, 125, 145쪽] 이토록 많은 책을 읽어도 고작 이 정도 사내밖에 못 되는가. 분수도 모르는 꿈을 주책없이 쫓아가다가는 결국 어떻게 되어 버리는가 하는, 그런 간단한 일마저 자신의 아내에게 이해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자식이 헤매고 괴로워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여기에 있노라고 가르쳐 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런 사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다는 말인가 …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도저히 현명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부모를 가짐으로써, 나는 확실히 자립과 독립의 길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던 것이다 … 나는 소위 지식인은 아니었다. 또한 지식인 사이에 끼워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식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들의 대다수가 도저히 올바른 지식인으로는 비치지 않았던 탓이다. 만약 그들이 참된 지식인이라면 제 발로 신문사를 찾아가거나,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어하거나, 마음대로 먹고 마신 외상값을 출판사에 떠넘기거나, 직책에 연연해 하거나, 권위에 추파를 던지거나 할 리가 없다 … 술냄새가 풀풀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묘하게 차원 높은 이론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작품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도 않았다.

[52, 108쪽] 나는 《백경》을 탐독했다. 거듭 되풀이해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과 감동이 솟았으며, 더군다나 그것은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 일본문학에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커다란 스케일과 높은 질. 너무나도 리얼한 대모험의 이야기. 철학적이자 박물학적이면서도 일직선으로 혼에까지 도달하는 깊은 감동. 파워, 볼륨, 기품의 3박자가 갖추어진 대걸작 … 외국의 걸작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시간을 허비한 경우가 많았다. 5년, 10년이라는 세월을 아낌없이 썼으며, 그것이 예사였다. 그 중에는 한 작품에 일생을 공들인 작가마저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외국문학과 일본문학의 극심한 수준 차이는, 소비한 시간의 차이가 크게 연관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영화이건 문학이건, 그런 짧은 시간에 해치우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뻔한 일이 아닐까.

[63, 77쪽] 위험한 이상을 뒤집어쓴 자본주의가 너무나도 일본적인 해석과 일본적인 활용에 의해 사회와 개인의 자유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공산주의 국가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개미나 벌들의 사회를 빼다 박은 듯한 국민 통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 빈부의 차가 아무리 벌어져도, 그럭저럭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진심으로 몸을 던져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과격한 노동조합이더라도 무장봉기가 되면 즉각 넙죽 엎드리고 말 것이다.

[126, 127, 131, 163쪽] 예술의 핵심이 아니라 예술의 분위기만을 즐기는 듯한 무리들의 혼은 출발점부터 이미 썩은 것이 아닌가 … 내가 열성적인 문학 독자였더라도 그런 야단법석은 혐오했을 것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은 스스로 찾지, 문학상이나 광고 문구에 이끌려 사는 것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 그러나 많은 문학 팬들은 헤밍웨이와 파장이 딱 들어맞았다. 헤밍웨이가 꾸며 보이는 그런 세계에 왜 자신이 도취되는가 하는 것은 거의 따지지 않고, 도리어 그런 것에서는 얼굴을 돌리고 천진스럽게 빨려들어 갔다 … 발표 무대가 늘어남에 따라 작품의 질은 점차 떨어졌고, 그렇게 하는 사이에 무엇보다 팔리는 작가를 발굴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진 편집자들도 눈에 듸게 변해 갔다. 사무적인 업무에 쫓겨 감성을 연마할 시간이 없어졌고, 시야가 좁아졌으며, 편집자의 생명과도 같은 ‘모든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얕아지고 말았다.

[156, 204, 208, 220쪽] 시대나 세대에 장단을 맞추어 일시적인 총아가 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중후한 테마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활자 중독자들의 싸구려 자기 현시욕에서 나오는 경박한 문학론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진짜 안목을 갖춘 참된 독자가 탄성을 지르도록 만드는 작가를 지향할 수 있다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을 의의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 오랜 세월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앞으로도 그들의 기분에 맞춰 줄 소설은, 그들로서는 틀림없는 문학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진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참된 미란 현실의 진흙탕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어야 했다 … 나만은 독자적인 문학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읽어 줄 독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157쪽] 학교 공부를 지독하게 싫어한 이유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러 지식을 일방적으로 퍼부으며,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납득되지 않는 교육이었던 탓이다.

[227쪽]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즉시 나의 생활로 돌아갔다. 나로서는 장편소설을 마무리짓는 일 쪽이 더 중요했다. 꺼져 버리는 촛불처럼 깨끗한 마지막을 맞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소설을 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튿날에는 아버지의 일은 이미 내 머리에 없었다. 몇 십 년이나 전에 죽은 친구와 마찬가지의 희미한 인상이 되고 말았다. 필경 아버지 역시 몇 십 년 전부터 가족의 일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