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바라보면 흙을 배울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을 사랑할 수 있다. 해를 바라보면 해를 즐길 수 있다. 냇물을 바라보면 냇물과 놀 수 있다. 풀을 바라보면 풀과 사귈 수 있다. 그러나, 흙도 하늘도 해도 냇물도 풀도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 모든 숨결과 가까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배우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며 즐기지도 못하는데다가 놀지도 사귀지도 못한다. 보려면 알아야 한다. 알려면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려면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살려면 마음을 열고 어깨동무를 해야 한다. 파브르라는 분은 풀을 이녁 숨결과 같이 마주하였기에 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파브르라는 분이 풀을 바라보며 쓴 이야기를 오늘날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새로 갈무리한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라는 책이 나온다. 4347.4.3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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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이정모 감수, 바람하늘지기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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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30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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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31) 존재 131 : 오른팔 같은 존재


그런 시게 씨를 아버지도 귀여워해 주시고, 어느 순간 아버지의 오른팔 같은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탄 카와이(그림),로쿠로 쿠베(글)/김희정 옮김-라면 요리왕 (21)》(대원씨아이,2008) 59쪽


 아버지의 오른팔 같은 존재로

→ 아버지한테 오른팔 같은 사람으로

→ 아버지한테 오른팔 같은 기둥으로

→ 아버지한테 오른팔과 같이

→ 아버지한테 오른팔처럼

→ 아버지한테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 아버지한테 오른팔로

 …



  보기글에 나오는 ‘오른팔’은 빗댐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한테 있는 팔 하나로 빗댑니다. 그러니까, ‘오른팔’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한테 오른팔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빗대는 말이기에 그대로 빗댐말만 넣으면 됩니다. “아버지한테 오른팔”이라고 적으면 넉넉합니다. 4347.4.29.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런 시게 씨를 아버지도 귀여워해 주시고, 어느새 아버지한테 오른팔로 자랐습니다


 “어느 순간(瞬間)”은 “어느 때”나 “어느새”로 다듬고, ‘성장(成長)했습니다’는 ‘자랐습니다’나 ‘컸습니다’나 ‘되었습니다’로 다듬어 줍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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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8) 존재 128 : 사진가의 존재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존재

《이자와 고타로/고성미 옮김-사진을 즐기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2009) 41쪽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존재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자리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얼굴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모습

 …


  이 짧은 보기글을 살피면 한자말 ‘존재’를 넣으며 “사진가의 존재”라고 적지만, 첫 대목은 “사진 뒤에 있는”으로 적습니다. “사진 이면(裏面)에 위치(位置)하는”이나 “사진 배후(背後)를 점(占)하는”처럼 적지 않았습니다.


  짧은 글월 앞뒤를 모두 얄궂게 적바림하지 않았으니 반갑다고 해야 할는지, 또는 짧은 글월 한켠을 얄궂게 적바림했으니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마음을 기울였으면 알차고 싱그럽고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으리라 느낍니다만, 살짝이나마 마음을 쏟아서 한쪽은 알맞고 반갑고 고맙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이 짧은 보기글 앞에서는 ‘있는’을 말하고 뒤에서는 ‘존재’를 말합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을 앞뒤에 잇달아 넣은 셈입니다.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있음”이나 “사진 뒤에 존재하는 사진가의 존재”인 꼴입니다. 이 글을 적은 이는 뒤쪽에 ‘존재’를 넣었으나, 일본말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존재’가 아닌 ‘자리’나 ‘얼굴’이나 ‘모습’이어야 잘 어울립니다. 아니면, ‘이야기’나 ‘삶’이나 ‘발자국’이나 ‘발자취’나 ‘그림자’나 ‘그늘’을 넣어야 알맞습니다.


  어쩌면, “사진 뒤에 선 사진가”처럼 더 단출하게 끊어야 옳은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사진 뒤에 숨은 사진가”나 “사진 뒤에서 기다리는 사진가”나 “사진 뒤에 웅크리는 사진가”나 “사진 뒤에서 빙긋 웃는 사진가”처럼 느낌을 풀어내거나 알맞춤한 꾸밈말을 넣어야 바른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이야기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발자국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그림자

 …


  한자말 ‘존재’를 쓴 발자국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어느 낱말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동안 쓴 발자국이 짧다 하여도 사람들이 널리 쓰면 두루 받아들여 즐거이 쓰는 일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 낱말이 토박이말이든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딱히 금을 그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요 생각있는 사람이라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루두루 쓰는 낱말이라 할지라도 ‘나한테까지 이 낱말이 두루두루 쓸 만한가’를 살피는 눈길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루고루 쓴다고 해서 나까지 쓸 까닭이 없다’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씀씀이와 내 말매무새에 걸맞는가’를 짚어야 합니다.


  모든 말은 알맞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어설프거나 엉터리로 써야 할 말이 아닙니다. 모든 글은 슬기롭고 아름답게 써야 합니다. 얼렁뚱땅 쓰거나 짓궂게 쓸 글이 아닙니다.


  삶이 아름답고 알맞고 알차면서 생각이 아름답고 알맞고 알찬 길로 접어듭니다. 좋은 일도 싫은 일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삶입니다. 어느 하나 삶이 아닌 적이 없으며, 어떠한 좋은 일과 궂은 일도 내 삶자리에서 안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아름다움이요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아름다움입니다. 어떻게 보면 얄딱구리하게 적바림하고 마는 말마디조차 ‘내 깜냥껏 아름다이 쓴 말’이라 둘러댈 수 있을 텐데, 참말 이렇게 둘러대어야 하는지 조용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힘과 마음과 슬기와 깜냥을 빛내며 우리 삶을 일구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온갖 넋과 기운과 솜씨와 땀을 바치며 우리 생각을 가꾸는지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깊은 얼과 뜻과 사랑과 손길을 담아 우리 말글을 이루어 가는지 톺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만큼 애쓰는가요요. 우리는 얼마나 힘쓰는가요. 우리는 어찌어찌 마음쓰는지요.


 사진 뒤에 드리운 사진가 모습

 사진 뒤에 숨은 사진가 얼굴

 사진 뒤에 놓인 사진가 자리

 사진 뒤에 남긴 사진가 발자국

 사진 뒤에 묻힌 사진가 이야기

 …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옳게 정치를 해야 합니다. 골목동네 구멍가게 할배는 구멍가게 살림을 옳게 꾸려야 합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옳게 문학을 해야 합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은 버스를 옳게 몰아야 합니다. 지식을 다루는 교사나 교수나 기자나 지식인은 지식을 옳게 다루어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를 옳게 키워야 합니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제길을 아름답게 걸어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한 번 있는 삶은 아름답게 걸어야 아름답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누가 밀어붙여서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모든 얼굴과 매무새와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모두 아름답고, 곯아떨어진 몸뚱이와 땀흘리는 몸뚱이가 모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말은 삶입니다. 삶을 어지럽히는 얄딱구리한 걸림돌에 가로막히면 내 말 또한 얄딱구리한 걸림돌한테 늘 가로막히면서 내 뜻과 사랑을 내 말마디로 풀어내지 못할밖에 없습니다. 4342.12.12.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사진가 뒤에 있는 사진가 모습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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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9) 존재 129 :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바라보는 동안의 내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박태희 옮김-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2009) 42쪽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 필름에 있습니다

→ 필름에 깃듭니다

→ 필름에 담깁니다

→ 필름에 스밉니다

→ 필름에 녹아듭다

→ 필름에 갈무리됩니다

 …


  우리 나라에는 크게 두 가지 말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나는 책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거나 책이나 학교에서는 적게 배운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둘은 책이나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책이나 학교에서 적게 배운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일이 드뭅니다. 책이나 학교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은 으레 글을 씁니다. 이 땅에 쏟아지는 거의 모든 책들은 책이나 학교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쓴 글이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게 배운 사람들은 적게 배운 깜냥껏 말뭉치를 이루어 저마다 생각과 삶과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많이 배운 깜냥껏 말뭉치를 마련해 저희끼리 생각과 삶과 마음을 나눕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두 갈래 말뭉치가 하나로 모두어지는 일이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러면서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가 적게 배운 사람들 말뭉치를 내리누르거나 밀어내려고 합니다. 적게 배운 사람들 말뭉치는 아이들 말뭉치하고 엇비슷하며 눈높이가 나란하지만,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는 아이들 말뭉치하고 사뭇 다를 뿐 아니라, 아이들을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두 갈래 말뭉치 가운데 어느 한쪽이 더 훌륭하거나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두 갈래 말뭉치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만 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말뭉치이지만, 두 쪽으로 나누어 선 우리들은 맞은편 말뭉치로 이루어지는 말마디를 어느 만큼은 ‘알아듣’습니다. 서로 모르지 않습니다.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모순’을 알아듣습니다. ‘모순’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를 알아듣습니다. 그렇지만 ‘모순’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뜻은 알아들어도 ‘모순’하고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는 아주 달라, ‘모순’으로 나타내려고 한 이녁 뜻을 나타낼 수 없다고 여깁니다. “진지 자셨어요?”와 “밥은 먹었니?”라 말하는 사람들도 “식사하셨습니까?”와 “식사는 했니?”라는 말을 알아듣습니다. 거꾸로 보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식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진지’와 ‘밥’이라는 낱말로는 이녁 마음과 넋을 담아낼 수 없다고 여깁니다. ‘책’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서적’이라는 말까지는 알아들으나 ‘冊’이나 ‘書’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만, ‘冊’이나 ‘書’나 ‘書籍’은 바깥말입니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들은 ‘冊’이나 ‘書’나 ‘書籍’이라고 적어야 비로소 이녁 얼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책’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도서’와 ‘서적’이라는 말마디도 이런 흐름 때문에 자꾸 쓰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冊’을 넘어 ‘북’과 ‘book’까지 이야기하며, ‘책잔치’라는 말은 아예 안 쓸 뿐 아니라, ‘북페스티벌’과 ‘북쇼’ 같은 새 바깥말을 끌어들입니다. 모두 배운 사람들이 끌어들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필름에 서립니다

 모든 생각을 필름에 새깁니다

 모든 삶이 필름으로 남습니다

 모든 삶자락을 필름으로 보여줍니다

 …


  우리 삶에 ‘존재’라는 한자말이, 아니 ‘존재’라는 바깥말이 스며든 지는 백 해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백 해 앞서는 우리 깜냥껏 ‘있다’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말마디로 우리 넋과 얼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날 우리들이 쓰던 ‘있다’는 숱한 쓰임새가 있으며 숱한 느낌을 나타냈습니다. 바깥말 ‘존재’는 ‘있다’로 나타내는 숱한 쓰임새 가운데 하나를 또렷하게 나타낸다고 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로서는 ‘있다’ 한 마디로는 두루뭉술하다고 여겼고, 적게 배운 사람들하고 다른 말뭉치를 일구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존재’라는 말마디 쓰임새가 아주 넓어지면서 지난날 ‘있다’를 두루뭉술하게 여겼듯, ‘존재’가 더없이 두루뭉술한 낱말이 됩니다. 이 말마디를 쓰면, 이 자리에서는 이런 뜻과 느낌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뜻과 느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있다’라는 낱말은 “테두리가 넓고 쓰임새가 많은” 낱말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쓰는 테두리가 좁고 느낌을 담는 그릇이 작은 낱말이라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옳게 배운 적이 없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은 하나같이 배운 사람들인 까닭에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배운 말에 길들거나 익숙해지는” 흐름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운 사람들이 교과서를 엮고 교육과정을 꾸립니다. 배운 사람들이 신문을 내고 방송을 찍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인터넷을 휘젓고 배운 사람들이 책을 쏟아냅니다. 토론자리이든 강연자리이든 언제나 배운 사람들 말마디만 쏟아집니다. 동화를 읽는 어른들 모임에서도 배운 사람들이 적게 배운 사람을 가르칩니다. 책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가르치고 삶을 가르칩니다. 적게 배웠어도 착하고 바르고 맑게 살아온 사람들 땀방울과 매무새와 발자국을 ‘돌아보거나 헤아리거나 되짚거나 보듬으면서 내 말과 삶과 넋을 알뜰히 추스르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마음이 뱁니다. 모두 다 필름에 뱁니다

 내 마음이 뱁니다. 모두 다 필름에 들어갑니다

 내 마음에 뱁니다. 모두 필름에 아로새깁니다

 내 마음에 뱁니다. 모두 필름에 짙게 뱁니다

 …


  바깥말 ‘존재’를 쓰는 일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노릇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엉터리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는 한국말이 아닌 바깥말일 뿐입니다. 낱낱이 따지자면 한자로 이루어진 바깥말입니다.


  우리한테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바깥말과 한자로 이루어진 바깥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한국말과 한자로 이루어진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자라서 쓰지 말아야 하거나 알파벳으로 짰기에 나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삶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이 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스스럼없이 나누면서 즐겁게 넋과 얼을 가꿀 수 있느냐에 따라서 알맞거나 알맞지 않거나를 헤아립니다.


  어떠한 말이든, 삶으로 받아들이는 낱말이라 한다면, 밑말을 밝히지 않습니다. 밑말을 밝힐 때에는 한국말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를테면, ‘버스’는 한국말이지만 ‘bus’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같은 소리값이요 같은 말이라지만, ‘버스’일 때에만 우리 말입니다.


  ‘학교’는 한국말이지만 ‘學校’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다 같은 소리값이라지만, ‘학교’일 때에만 한국말입니다. 이는 ‘신문’과 ‘新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텔레비전’과 ‘TV’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지식을 자랑할 생각이 아니라면 구태여 “한국말이 아닌 바깥말을 바깥나라 글자를 빌어서 적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이면 ‘사진’입니다. 한글로 ‘포토’라 적어도 한국말이 아니며, 알파벳으로 ‘photo’라 적으면 더더구나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깥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 적바림하는 일기장이라면 쓰든 말든 내 마음입니다. 그러나 일기장이 아닌 공공기관과 공공매체라면, 또 책이나 신문이라면, 또 학교나 도서관이나 기차역이나 백화점이라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이 ‘어느 말뭉치로 살아가든’ 즐겁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써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더없이 마땅한 노릇인데, 많이 배운 사람들은 조금도 마땅히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도 깊이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들 많이 배운 그대로 이런 바깥말 저런 찌꺼기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스스로 ‘내 말을 죽이는 줄’을 깨닫지 않습니다.


  ‘존재’라는 말 한 마디 쓰고 싶다면, 이 낱말 하나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흘러왔으며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배워야 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한테는 마땅한 몫입니다. 4342.12.30.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이 뱁니다. 모든 것이 필름에 깃듭니다


 “바라보는 동안의 내 마음이”는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움직인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달라진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이루어진 내 마음이”로 다듬어 봅니다. “모든 것이”는 “모두”나 “모두 다”나 “모든 이야기가”나 “모든 생각이”나 “모든 삶이”로 손질해 줍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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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많은 이웃이 있어야 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동무가 있어야 하지는 않는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을 때에 즐겁다.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동무가 있을 때에 반갑다. 그림책 《이웃에 온 아이》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이웃에 온 아이는 이웃에 사는 아이가 궁금하고, 이웃에 온 아이가 궁금한 아이는 새롭게 동무를 사귈 수 있구나 싶어서 설렌다. 두 아이는 어떻게 만날까. 두 아이는 서로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두 아이는 저마다 어떤 꿈을 꿀까. 두 아이는 서로 어떤 눈빛과 마음이 되어 따사로운 몸짓으로 즐겁게 뛰놀 수 있을까.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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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온 아이- 치히로 아트북 2, 0세부터 100세까지 함께 읽는 그림책
이와사키 치히로 글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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