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어버이가 늘어난다. 그렇지만,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아버지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아버지 자리에 선 사람들은 으레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 집 바깥에서 돈을 벌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운이 쪽 빠진다. 아이와 살을 부비면서 노는 데에도 버겁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그림책 놀이를 하기에도 만만하지 않다. 텔레비전을 보는 어버이라면, 아이들한테도 텔레비전을 보여줄밖에 없다. 마땅한 노릇이다. 자가용이 아닌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탄다면, 가방에 그림책 한두 권쯤 챙겨서 아이와 즐길 수 있으나, 자가용을 내려놓고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타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 또한, 아이들이 그림책에 이어 만화책에 눈길을 둘 적에, 함께 만화책을 읽는 어버이는 얼마나 있을까. 나아가, 아이와 함께 동화책을 읽으면서 크는 어버이는 얼마나 된다고 할 만할까. 책을 꼭 읽어야 하지는 않는다. 책만 읽고 사랑이 없다면 아이키우기도 아니요 살림살이가 아니며 삶이 아니다. 책을 함께 읽으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하루가 될 때에, 아름다운 아이키우기와 살림살이와 삶이 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이 대목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그림책을 읽으며 놀 수 있기를 빈다.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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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이루리 지음 / 북극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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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호즈미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47



사랑받기

― 결혼식 전날

 호즈미 글·그림

 조은하 옮김

 애니북스 펴냄, 2013.11.8.



  직박구리가 후박나무에 내려앉습니다. 여름에 무르익은 후박알을 따먹으려고 내려앉습니다. 직박구리는 아침 낮 저녁으로 우리 집에 찾아들어 후박알을 따먹으면서 노래를 들려줍니다. 후박알을 먹은 값이라고 할까요.


  참새와 딱새도 후박나무에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여러 멧새가 후박나무에 내려앉습니다. 후박나무는 온갖 새들이 날마다 수없이 찾아들어도 넉넉히 밥을 나누어 줍니다. 온갖 새들은 우리 집 후박나무에서 후박알을 먹은 뒤 이곳저곳 날아다니다가 똥을 뽀직 누면서 작은 씨앗을 퍼뜨리겠지요.



- “내일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신부니까. 드레스 입은 거 보면 아버지 우실 거야.” (9쪽)

- ‘일도 이제 익숙해졌다. 부모님은 내가 열한 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을 대신해 날 키워 준, 여덟 살 위의 누나가, 오늘 결혼을 한다.’ (18∼20쪽)






  올해에도 우리 집 헛간에서 마을고양이가 새끼를 낳습니다. 새끼를 낳은 줄 모르다가, 어린 고양이 두세 마리가 마당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는 비로소 알아챕니다. 이 녀석들, 우리 집 헛간이 너희 집인 줄 아니.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면 새끼 고양이와 어미 고양이는 조용히 숨을 죽입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살금살금 둘레를 살피면서 풀밭에 고개를 빼꼼 내민 뒤, 아무도 없구나 싶으면 마당으로 나와서 콩콩 뛰면서 놉니다.


  지난해에 우리 집에서 태어난 고양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께에 우리 집에서 태어난 고양이는 또 어디에 있을까요. 다들 잘 살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퍼졌을까요. 이웃 할매 집에서 밥을 나누어 먹을까요.


  처마 밑 제비집에서 새끼는 모두 잘 자라서 어른 제비가 되었습니다. 새끼 제비가 어른이 되니 이른아침에 둥지를 떠나 저녁에 해가 기울고서야 돌아오는데, 새로운 목숨인 새끼 고양이가 볼볼 아장걸음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 “전 남편이 그렇게나 못 믿을 사람인가?” “그거야, 아빠가 ‘담배 사올게’ 해 놓고선 그대로 집에 안 돌아왔으니까.” (27쪽)

- “너, 언니 되는 거냐?” “응?” “네 엄마, 재혼 하냐?” “어?” “아니, 방금 네가 언니가 된다고.” “아. 이제 그런 나이가 됐다, 이런 말이었는데?” (33∼34쪽)





  호즈미 님 만화책 《결혼식 전날》(애니북스,2013)을 읽습니다. 작고 가녀린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보듬은 나날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사랑이 흐르는 만화입니다.


  사랑은 살섞기가 아니지요. 사랑은 사랑이지요. 누나와 동생 사이에도 사랑이 흐릅니다. 나와 까마귀 사이에도 사랑이 흐릅니다. 나그네와 토박이 사이에도 사랑이 흐릅니다. 아이와 허수아비 사이에도 사랑이 흐릅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흐릅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나 따스합니다. 사랑이 있기에 새롭게 힘을 냅니다. 사랑이 있으니 즐겁게 잠자리에 들고는, 기쁘게 아침에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납니다.



-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얘기들. 리버풀 출신의 4인조 그룹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리고,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고, 반전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이 광활한 세상 속에, 우리가 맘 편히 있을 곳은 여기뿐이었다.’ (97쪽)

- ‘베티를 보호하는 내 역할은 이미 끝났다. 아니, 애초부터, 처음부터 그런 역할은 있지도 않았던 거다. 다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문득 떠올린 적은 있었다. 그 허수아비는 지금도 고향을 떠나버린 오빠를 대신해 여동생을 지켜봐 주고 있을까?’ (120쪽)





  사랑이 없다면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사랑은 없는 채 돈만 많이 번다면, 이러한 삶은 어떤 빛깔이 될까요? 사랑은 없으면서 이름값이 높거나 권력을 거머쥐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삶은 어떤 무늬를 드리울까요?


  사랑이 없는 정치는 덧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경제개발이나 문화행정은 부질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끔찍합니다. 사랑이 없는 책은 알맹이가 없습니다. 사랑이 흐르지 않는 노래는 무섭습니다. 사랑이 감돌지 않는 그림은 예술도 문화도 되지 못합니다.


  사랑을 담아 지은 밥을 맛있게 먹습니다. 사랑을 담아 한 땀 두 땀 바느질을 한 옷이 포근합니다. 사랑을 담아 내미는 손길이 즐거우면서 반갑습니다.



-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먼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돼.” (174쪽)



  아이들은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랑하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 사랑을 베풀고, 동무와 동생과 이웃한테 사랑을 베풉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베푸는 숨결’로 태어났어요. 우리는 늘 ‘사랑을 베푸는 넋’으로서 자랐어요. 우리는 앞으로도 ‘사랑을 베푸는 빛’이 되면서 살아갑니다.


  건네는 사랑이 받는 사랑입니다. 나누는 사랑이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선물하는 사랑이 선물받는 사랑입니다.


  하늘처럼, 흙처럼, 구름처럼, 풀처럼, 새처럼, 개구리처럼, 여기에 비와 냇물처럼, 서로 아끼는 싱그러우면서 푸른 손길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은 서로를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환하게 빛납니다.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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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경제신문>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


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날마다 먹는 밥



  우리들은 누구나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밥은 쌀밥일 수 있고 보리밥일 수 있습니다. 죽을 밥으로 삼을 수 있고, 풀물(풀을 짜서 얻은 물)을 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고기를 밥으로 삼거나, 막걸리를 밥으로 삼기도 합니다. 빵이나 과자나 케익이나 피자나 햄버거를 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입으로 이것저것 넣어서 기운을 얻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으로 날마다 새롭게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 날마다 먹는 밥은 날마다 새롭게 내 몸을 이룹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한테서는 고기 냄새가 납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한테서는 술 냄새가 납니다. 밥을 먹는 사람한테서는 밥 냄새가 나고, 풀을 먹는 사람한테서는 풀 냄새가 나요. 먹는 대로 몸을 이루니, 먹는 대로 몸내음이 됩니다. 그리고, 먹는 대로 똥과 오줌이 되어 밖으로 나와요.


  어떤 밥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집니다. 몸이 달라지는 만큼 마음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지는 만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습니다. 먹는 대로 스스로 몸과 마음과 생각과 삶을 이루니까,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대로 밥을 찾아서 먹습니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지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골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면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둥지둥 밥을 먹거나, 왁자지껄 어수선한 데에서 얼이 빠지면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순 손길로 지은 밥을 고맙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즐겁게 지은 밥을 노래하며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쁘게 지은 밥을 도란도란 어울리면서 깔깔 호호 이야기꽃 피우면서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밥은 우리 몸을 이룹니다. 그리고, 밥을 짓는 손길이 우리 마음을 이룹니다. 여기에, 밥을 먹는 매무새가 우리 생각을 이룹니다.


  일본에서 만화상을 받은 《동물의 왕국》(학산문화사 옮김)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모두 열네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라이쿠 마코토라는 분이 그린 만화책입니다. 《동물의 왕국》 12권을 보면 여러모로 재미난 말이 나옵니다. ‘밥’과 ‘삶’이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있어요. 이를테면, “난 새끼 죽이기가 왜 있는 걸까 고민하다, 깨달았어. 먹이 수가 제한되어 있으니, 살 수 있는 새끼 수도 제한되고, 결국 사자끼리 서로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된 거야(78∼79쪽).”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자가 서로 죽여야 하는 까닭은 먹이(밥)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렇겠네요. 그러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도 서로 죽이고 죽어요. 아무래도, 사람이든 사자이든 밥(먹이)이 모자라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밥이 넉넉하다면 사람이나 사자가 싸우거나 서로 죽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밥이 넉넉하니, 나라와 나라가 서로 밥을 나누면 돼요. 굳이 국경선을 쇠가시울타리로 세워야 하지 않습니다. 정치나 사회나 경제 얼거리가 다르대서 남북녘처럼 총부리를 맞대고 다투어야 하지 않아요. 나누거나 주고받으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나누려고 하는 나라나 사회나 문화라 한다면 싸움이 없고 전쟁무기가 없습니다. 서로 나누려고 하는 곳에서는 죽임이 없습니다. 서로 나누려고 하는 곳에서는 늘 ‘삶’이 있어요. 삶을 아끼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꽃피우려는 ‘마음’이 있어요.


  만화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친구라 여겼던 주위 녀석들은 모두 텅 빈 껍데기였고, 마음이 담긴 대화라곤 할 수 없었어. 풀이며 나무, 탑 외의 동물들은, 모두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빛나는데(119쪽).” 이러한 이야기는 만화책에서만 나옴직한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이웃이요 동무라고 하지만, ‘지구별 이웃’이나 ‘지구별 동무’라고 하지만, 정작 서로를 겨누는 전쟁무기를 거두지 않아요. 자꾸 더 많은 전쟁무기를 과학자가 만듭니다. 자꾸 더 새로운 전쟁무기를 기술자가 만듭니다. 우리들도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거리를 얻고, 젊은이를 군대로 보내어 ‘사람 죽이는 훈련’을 시킵니다.


  군대에서 전쟁무기를 손에 쥔 젊은이가 배우는 것은 오직 ‘전쟁 훈련’입니다. 군대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도 삶이나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요. 한국에서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입시지옥입니다. 그냥 입시학원이 아닌 입시‘지옥’이에요. 동무끼리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학교 얼거리입니다.


  한국은 지구별에서 ‘학생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학생 자살률 1위’인 곳이 한국입니다. 브라질에서 벌어진 축구잔치에 마음을 쏟을 한국이 아니라, 입시지옥 때문에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할 한국입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나라로 가꾸어야 하고, 아이들이 전쟁무기에 시달리지 않을 사회로 일구어야 하며, 아이들이 꿈과 사랑으로 삶을 짓도록 이끌어야 해요.


  만화책에서 흐르는 “죽음을 주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너희는 생물을 죽이고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잖아? 식물을 포함해 너희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며 살아왔지? 생명을 빼앗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몸으로 어째서 나의 대량학살이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163쪽)?”와 같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되읽습니다. 우리는 늘 밥을 먹습니다. 밥은 언제나 목숨입니다. 쌀과 보리도 목숨입니다. 능금과 배와 수박과 포도도 목숨입니다. 배추와 무와 당근도 목숨입니다. 소와 돼지와 닭도 목숨이에요. 빵이 되는 밀가루도, 밀알이요 목숨입니다.


  목숨 아닌 밥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목숨을 먹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목숨을 먹으면서 내 목숨을 지킬까요. 언제나 다른 목숨을 먹어야 하다 보니,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보다는 서로 괴롭히거나 다투거나 빼앗는 길로 나아갈밖에 없을까요. 다른 목숨을 먹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마음을 지킬 수는 없는가요.


  날마다 먹는 밥으로 날마다 새 하루를 짓습니다. 날마다 밥을 비롯해서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물을 마십니다. 새롭게 흐르는 바람이 있기에 바람을 먹으면서 숨을 쉽니다. 새롭게 흐르는 물이 있어 물을 먹으면서 몸을 싱그럽게 움직입니다.


  밥 한 숟가락을 나누면 밥 한 그릇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밥 한 술을 덜어 이웃과 나누면 서로 배부릅니다. 그러나, 이웃 밥그릇에서 밥 한 술을 가로챈다면? 이웃은 굶지만 나는 두 그릇을 먹는다면? 사랑과 평화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전쟁과 지옥 또한 늘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아름다운 목숨이 될까요.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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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아이 46. 2014.6.27. 사름빛을 알겠니



  시골마을에서 지내니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논을 본다. 첫여름 논은 모내기를 마친 볏포기가 무럭무럭 올라온다. 갓 모를 심을 무렵에는 논물이 찰랑찰랑 보였다면, 차츰 사름빛이 짙어지면서 볏잎 푸른 빛깔이 넘실거린다. 사름벼리는 제 이름을 이룬 ‘사름’이 무엇인지 느끼면서 논앞에 설까. 아직 모를 수 있고, 어렴풋하게 알 수 있으며, 즐겁게 맞아들일 수 있다. 사름빛은 지난 볏포기라 할 테지만, 일곱 살 사름벼리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볏잎은 반짝반짝 푸르게 빛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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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집을 처음으로 사서 읽은 사람 자국이 맨 뒤에 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처음으로 책방마실을 했던 아이가 그날 겪은 일을 애틋하게 적었다. 아마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한테 ‘학교 앞 책방’에 가서 책을 사는 ‘체험 교육’을 시킨 듯하다. ‘체험 교육’ 뒷이야기를 적었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은 어쩌면 ‘숙제’일는지 모르는데, 숙제이건 아니건 퍽 상큼하다. 빨간 색연필로 빈 종이에 네모난 테두리를 그린 뒤 정갈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은 글이다.


  처음 시집을 살 적에는 이런 글이 적힌 줄 몰랐다. 예전에 읽은 시집이지만 다시 읽어 보자는 생각으로 아예 책을 새로 장만했을 뿐이다. 삼현여고라는 학교는 어디에 있을까. 2003년에 4쇄를 찍은 시집이니 이 아이는 2003년에 여고 1학년 학생으로서 이 시집을 사서 읽었을까.



.. 처음 서점으로 들어갈 때, 정신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간 터라, 삼현여고 학생들로 북적댔다. 원래 나는 도서관의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원했었지만, 학교 앞 서점인지라 무지 시끄러웠다. 좀 크고 조용한 서점으로 가서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며 여유롭게 책을 사려고 했는데, 책을 사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여유로울 시간이 없었다. 처음 책을 사려고 교실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놓았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제목이 진짜 맘에 들었다. 서점에 들어가면서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앞 서점이라서 그런지 추천도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둘러볼 틈도 없이 《아내에게 미안하다》라는 책을 잡았다. 아주 얇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속을 보니 시집이었다. 난 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책을 살려고 고민을 시작했다. 긴 고민 끝에,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잡았다. 왠지 감동스러울 것 같은 제목!! 그런데 지갑을 보니, 돈이 없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난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갔다. 그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역시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사려고 했는데, 책이 다 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긴 고민 끝에 《아내에게 미안하다》를 잡았다. 왠지 시집이 읽고 싶어졌기 때문에. 난 계산을 하고 나니 기분이 가뿐해졌다. 이 책을 꼭 다 읽고 싶다. 꼭! 다 읽을 것이다! ..  (1학년 ㅎㅎㅈ)



  고등학생이 스스로 책방에 가도록 이끌고, 책방에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같은 시집을 골라서 읽도록 하는 학교는 몇 군데쯤 있을까. 중학생이, 또 초등학생이 ‘학교 앞 책방’을 드나들도록 이끌면서,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게끔 책을 이야기해 주는 교사는 몇 사람쯤 있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에 학교에서는 ‘우체국 가기’라든지 ‘은행 가기’라든지, 여러 가지를 시켰다. 그런데, 그때에 ‘책방 가기’를 시켰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안 시켰지 싶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책방 가기’를 시킨 일은 없다. 더욱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보내면서 학교에서 우리한테 ‘어떤 책을 책방에서 찾고, 책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르친 교사를 만나지 못했다.


  마음이 푸르게 빛나는 아이들이 책방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 푸른 숨결 깃든 책을 사랑스레 고르면서 삶을 밝히는 길을 스스로 찾는다면 참 아름답겠다고 생각한다.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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