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만 원 책읽기


  내가 맞돈으로 번 돈이 얼마쯤인가 돌아본다. 1998년 1월부터 1999년 7월까지 신문배달을 하면서 다달이 십만 원짜리 적금을 부었으니, 이무렵 이백만 원쯤 모았지 싶다. 1999년 8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출판사에서 일을 하면서 첫 해에는 다달이 육십이만 원 일삯을 받아 사십 만원을 적금으로 넣었으니, 한 해 동안 오백만 원 즈음 모았지 싶다. 2001년 1월부터는 다달이 백만 원을 받았고, 백만 원 받던 해에는 육십만 원을 적금으로 넣었으며, 일삯이 오를 적마다 적금도 늘려, 2003년에는 다달이 백팔십 만원 즈음 일삯을 받으면서 백이십만 원쯤 적금으로 넣었다.

  요즈음 도시에서는 전세를 사는 사람들한테 전세값으로 갑자기 오천만 원을 더 내라 하든지 일억 원을 더 내라 하든지, 이렇게 쉬 말한다고 한다. 곰곰이 돌아본다. 한 해 전세값으로 오천만 원을 더 내려면, 다달이 사백만 원쯤 모아야 하는 셈인가. 한 해 전세값으로 일억 원을 더 내려면, 다달이 팔백만 원쯤 모아야 하는 셈인가.

  도시에서 어떤 일을 하면 ‘한 해 전세값 오천만 원’에 이르는 ‘한 달 사백만 원 모으기’를 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돈을 얼마나 모아야 비로소 ‘느긋한 내 집’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 집 네 식구가 지내는 전남 고흥 시골집(97평)은 세 곱 바가지를 쓴 값이 ‘구백만 원’이었다. 지붕과 천장과 살림살이를 고치는 밑돈은 천오백만 원쯤 들어가지 싶다. 도시에서 집임자가 올리고 싶어하는 돈을 헤아린다면, 시골에서 ‘내 집’을 장만해서 살면 참 넉넉하리라 본다. 다만, 삶터를 시골로 옮기면 도시에서 누리던 일자리는 얻기 힘들겠지. 그러나, 더 생각해 보면, 삶터를 시골에 두면서, 여느 날에는 도시에서 ‘잠만 자는 작은 집’을 눅은 달삯방으로 얻어도 되리라 느낀다. 한 주에 닷새를 일한다면, 금요일에 일을 마치고 시외버스를 달려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금·토·일을 누린 다음, 월요일 새벽에 시외버스를 달려 도시에서 일하러 나올 수 있겠지.

  주말에라도 시골에서 삶을 가꾸는 이웃이 늘면 여러모로 재미있으리라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주말에라도 시골에서 천천히 삶을 가꾸다 보면, 애써 도시에 머물지 않아도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찾을 만하다. 시골에서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찾는다면, 아주 부드럽게 도시를 떠날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를 떠나서 시골에서 즐겁게 지내면, 도시에 있는 집임자는 ‘한 해 전세값 오천만 원 껑충 올리기’나 ‘한 해 전세값 일억 원 훌쩍 올리기’ 같은 짓을 섣불리 못하겠지.

  집임자가 세입자를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슬픈 굴레를 어떻게 바꿀까. 집임자가 돈바라기로만 흐르는 가녀린 수렁을 어떻게 고칠까. 세입자가 도시를 떠나면 된다. 집임자가 아무한테도 집을 내놓지 못해 집삯을 못 벌게 하면 된다. 참말 그렇다. 4347.6.3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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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911) 생물학적 1 : 생물학적인 성장을 거쳐서


즉, 결코 각자의 생물학적인 성장을 거쳐서 이 시설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김성오 옮김-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새물결,2003) 75쪽


 각자의 생물학적인 성장을 거쳐서

→ 저마다 어른으로 자라서

→ 저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 자기 나이를 먹어 가는 가운데

 …



  생물학이든 물리학이든 ‘-적’만 붙이면 ‘생물학적’도 되고 ‘물리학적’도 됩니다. ‘철학적’이나 ‘교육학적’이나 ‘문학적’도 되겠지요. 이처럼 ‘-적’은 한자로 이루어진 낱말 뒤에 아주 잘 들러붙습니다. 이런 쓰임새가 예부터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삶터에 이와 같이 두루 쓰인 때는 일제강점기부터이지 싶습니다. 이에 앞서는 우리 말글 어느 자리에도 ‘이런 적’이나 ‘저런 적’ 같은 말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적’을 붙이지 않고 생각과 뜻을 두루 펼쳤으며, ‘-적’이라는 씨끝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낌과 마음을 골고루 나누었습니다.


  한국말이나 한겨레 말씨가 아닌 ‘-적’붙이인 터라, 귀로 듣거나 글에서 읽는 ‘-적’붙이 말투는 우리 삶이나 발자취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깊이 뿌리를 내려 하지만, 이 말투는 앞으로도 한겨레 말씨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예부터 지식인이 지식을 자랑하면서 쓰던 말투요, 이제는 신문과 방송과 책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투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런 말투를 왜 신문과 방송과 책에서 아무렇지 않게 쓸까요? 신문과 방송과 책을 지식인이 거머쥐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교과서를 지식으로 가르칠 뿐, 삶이나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입시교육을 할 뿐, 삶을 가르치거나 꿈이나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에서 한국말을 슬기롭게 가르치지 않으며, 우리 둘레 어느 곳에서도 한국말을 아름답게 주고받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생물학적 이론을 이용해서

→ 생물학 이론으로

→ 생물학 이론을 펼쳐

 생물학적 산소요구량

→ 생물이 살며 마시는 산소

→ 생물이 마셔야 하는 산소

 전직 대통령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 죽은 옛 대통령이 아닌

→ 죽은 옛 대통령 이야기가 아닌

 12쌍둥이 임신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 열두 쌍둥이는 누구도 갖기 어렵다

→ 우리 몸으로는 열두 쌍둥이를 도무지 밸 수 없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생물학적’은 없습니다. ‘생물학(生物學)’만 올림말입니다. 이 낱말은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철학적’이나 ‘문학적’ 같은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실립니다.


  “생물학적인 성장을 거쳐서”와 비슷한 말꼴로 “철학적인 사유를 거쳐서”라고 말할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학적인 숙성을 거쳐서”라고 말할 분 또한 틀림없이 있을 테지요. “윤리학적인 반성을 거쳐서”라고 말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몸이 자라면서”나 “깊이 생각을 해서”나 “문학으로 곰삭혀서”나 “마음 깊이 뉘우쳐서”처럼 꾸밈없이 말을 하거나 쉽게 글을 쓰는 분들은 차츰 줄어듭니다. 지식인부터 지식을 자랑하듯이 글을 쓰고, 여느 사람은 지식자랑 말씨를 흉내냅니다.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하고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말을 나누지 못하며, 여느 어버이도 아이들과 고운 말을 좀처럼 못 나눕니다. 문학을 하건 철학을 하건 과학을 하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기자라고 해서 남다르지 않고, 조용히 글쓰기를 즐기는 숱한 사람들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이지만 한국사람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 한겨레 말투를 잊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글투를 내버립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말이 뿌리내리도록 힘쓰지 못할 뿐 아니라, 가로막기까지 합니다. 몸뚱이는 커지고 지식은 늘며 돈은 가득가득 넘치지만, 커진 몸뚱이를 다루는 마음결이 밑바닥입니다. 지식을 가누는 넋이 모자랍니다. 돈을 간수하는 손길이 차디찹니다. 4340.6.22.쇠/4342.8.22.흙/4347.6.30.달.ㅎㄲㅅㄱ.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곧, 저마다 나이를 먹고 자라서도 도무지 이 시설을 떠날 수가 없는 셈이다


‘즉(卽)’은 ‘곧’이나 ‘그러니까’로 손보고, ‘결(決)코’는 ‘조금도’나 ‘도무지’로 손봅니다. “성장(成長)을 거치며”는 ‘자라며’나 ‘크며’로 다듬고,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떠날 수가 없고 만다”나 “떠날 수가 없는 셈이다”나 “떠날 수가 없다”로 다듬어 줍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520) 생물학적 2 : 생물학적 아버지


물론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없겠지만 아이의 어머니에게 남편에 대해 물어도 확실한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노 아야코/오근영 옮김-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리수,2009) 36쪽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는 아이

→ 아버지가 없는 아이

→ 저를 낳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

→ 짝꿍이 된 아버지가 없는 아이

 …



  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퍽 많은 아이들은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지만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보기글입니다. 이리하여, 이 보기글에서는 이 대목을 더 뚜렷하게 말하려는 뜻에서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는”처럼 적었습니다.


 생물학으로 따지는 아버지

 생물학으로 나누는 아버지

 생물학에 따른 아버지


  그러니까, 생물학으로 보았을 때 남자와 여자로 나누니, “생물학으로 나누는 아버지”와 “생물학으로 나누는 어머니”가 있다는 소리로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누는 말마디는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이와 같이 나누어야만 “네 참 아버지가 누구”이고 “너를 낳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가리거나 밝히는 말마디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어나게 한 아버지

 씨를 준 아버지

 씨를 뿌린 아버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예부터 “씨를 준” 사람을 놓고 사내라 했으니, 이 자리에서도 “씨를 준 아버지”라 하면 알맞으리라 싶습니다. 또는 “씨를 뿌린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남긴 아버지”라 해도 됩니다. 이런저런 꾸밈말 하나 없이 ‘아버지’라고만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4342.8.22.흙/4347.6.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마 저를 낳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없겠지만, 아이 어머니한테 남편이 누구인지 물어도 뚜렷이 말을 못하는 때가 잦다


‘물론(勿論)’은 ‘뭐’나 ‘마땅한 소리이지만’이나 ‘아마’로 다듬고,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아이 어머니한테”로 다듬습니다. “남편에 대(對)해 물어도”는 “남편이 누구인지를 물어도”나 “남편은 무얼 하는지 물어도”로 손질하고, “확실(確實)한 대답을 못하는 경우(境遇)”는 “뚜렷이 대답을 못하는 때”나 “제대로 말을 못하는 때”로 손질해 줍니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1684) 생물학적 3 : 생물학적인 형식


생물학적인 형식은 개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생물학적인 형식을 뛰어넘어 영혼의 교감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루리-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북극곰,2014) 117쪽


 생물학적인 형식

→ 생물학에 따른 형식

→ 생물학 틀로 보면

→ 겉으로 보면

→ 겉모습으로는

→ 몸뚱이를 보면

 …



  이쪽은 개이고 저쪽은 사람이며 그쪽은 나무라 한다면, 이는 겉으로 바라보면서 나누는 틀입니다. 또는 눈으로 살피면서 가르는 모습입니다. 굳이 “생물학적인 형식”과 같이 어렵게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한 마디로 ‘겉모습’이나 ‘생김새’로 쓰면 됩니다. 쉽게 쓰면서 쉽게 생각을 나눕니다. 쉽게 쓰는 글에서 고운 빛이 흐릅니다. 4347.6.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겉으로 보면 개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과 믿음은 겉모습을 뛰어넘어 넋으로 사귀도록 이끕니다


‘형식()’은 ‘틀’이나 ‘모습’으로 다듬습니다. ‘하지만’은 ‘그러나’나 ‘그렇지만’으로 바로잡습니다. ‘진정(眞正)한’은 ‘참된’이나 ‘참다운’으로 손보고, “영혼(靈魂)의 교감(交感)을 가능(可能)하게 만듭니다”는 “넋으로 사귀도록 이끕니다”나 “마음으로 사귀도록 이끕니다”로 손봅니다. ‘우정(友情)’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믿음’으로 손질해도 잘 어울립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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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새로운 책을 선보입니다. 책은 지난주에 나온 듯하지만, 아직 책방에 들어가지 않은 듯하고, 나한테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오겠거니 하고 잔뜩 꿈꾸며 기다렸으나, 또 지난주에 받으면 곧바로 우체국으로 가져가서 하나하나 부치려 했으나, 한 주를 넘겨 새 월요일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꼭 올 테지요. 얼른 내 새로운 책을 받아쥐고 싶으며, 얼른 이 새로운 책을 내 아름다운 이웃과 고마운 분들한테 선물하고 싶습니다. 4347.6.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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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
- 펴낸곳 : 숲속여우비
- 글과 사진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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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1000권씩 팔아서 즐거이 읽힐 수 있도록 모두 힘을 모아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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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162) 지인 1


물론 몇몇 지인들이야 있었지만, 내가 옮기고자 한 지역은 아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125호(2006.10.) 59쪽


 몇몇 지인들이야 있었지만

→ 몇몇 아는 사람들이야 있었지만

→ 몇몇 사람을 알았지만

→ 아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



  한국말사전은 역사사전이 아닙니다. 인물사전도 아닙니다. 백과사전도 아닙니다. 백과사전은 백과사전다워야 하고 인물사전은 인물사전다워야 합니다. 역사사전 또한 역사사전다워야겠지요.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사전답게 올림말을 고르고 말풀이를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사전은 저마다 제구실을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 가운데 한국말사전처럼 제구실을 못하는 사전은 없다고 느낍니다. 정작 다루어야 할 낱말풀이와 보기글 쓰임새는 아무렇게나 달거나 돌림풀이(순환정의)가 되기 일쑤이고, 바탕 낱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갈피를 못 잡습니다.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낱은 업신여기고 한자말을 우러르는 데다가, 프랑스 역사학자와 영국 철학자 이름까지 실으니, 이 무슨 한국말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면, 모두 여덟 가지 한자말 ‘지인’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쓰는 지인은 몇 가지가 될까요? ‘至人’이나 ‘至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말을 우리가 알아야 할까요? 이런 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다루어야 할까요?


  “아는 사람”을 뜻하는 ‘知人’ 하나만큼은 한국말사전에 실을 수 있다고 할 분들이 있을 텐데, ‘知人’ 또한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사전에 이 낱말을 싣는다고 한다면 ‘외국말’로 실어야지 ‘한국말’로는 실을 수 없습니다.


 그 친척과 지인 관계까지도 (x)

 그 친척과 아는 사람까지도 (o)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한자말 ‘知人’을 받아들여서 쓰는 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한국말은 ‘아는 이’나 ‘아는 사람’일 뿐입니다. 또는, ‘이웃’이나 ‘동무’입니다.


  덕이 높으면 덕이 높다고 할 일이고, 마음이 어질면 어질다고 할 일이며, 마음이 따뜻하다면 따뜻하다고 할 일입니다. 우리한테는 ‘지인(遲引)’도 ‘지연(遲延)’도 아닙니다. ‘늦어지다’나 ‘질질 끌다’나 ‘더디어지다’입니다. 한국말사전이 한국말사전 구실을 제대로 못하니, 올림말이 엉망이면서 사람들 말씀씀이마저 엉망이 됩니다. 4339.10.26.나무/4341.8.1.쇠/4347.6.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무튼 몇몇 사람을 알았지만, 내가 옮기고자 한 곳은 아니었다


‘지역(地域)’은 ‘곳’으로 고쳐씁니다. ‘물론(勿論)’은 ‘뭐’나 ‘그럭저럭’이나 ‘이래저래’나 ‘두말할 것 없이’로 손볼 만한 낱말인데, 글흐름으로 본다면 ‘아무튼’이나 ‘그래서’나 ‘그러니까’를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지인(至人) : 더없이 덕(德)이 높은 사람

 지인(至仁) : 더없이 인자함

 지인(知人)

  (1) 아는 사람

   - 도현의 가족뿐 아니라 그 친척과 지인 관계까지도 세밀히 파악하고 

  (2)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아봄

 지인(知印) : [역사]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과 도평의사사에 속한 구실아치

 지인(指印) = 지장(指章)

 지인(智仁) : [역사] 통일 신라 시대의 중

 지인(智印) : [불교] 보살의 지혜(智慧)를 나타내는 표지인 인계(印契)를 통틀어 이르는 말

 지인(遲引) = 지연(遲延)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06) 지인 2


얼마 전 지인에게서 가정 폭력 문제가 있는 어느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루리-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북극곰,2014) 341쪽


 지인에게서

→ 아는 사람한테서

→ 어떤 사람한테서

→ 이웃한테서

→ 동무한테서

 …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말 그대로 “아는 사람”일 테지요. 그러면 ‘이웃’은 누구일까요. 말 그대로 ‘이웃’일 테지요. 이웃 가운데 아주 가까운 사이를 ‘이웃사촌’이라고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웃이라 해서 모두 가깝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와 가까운 곳에서 사는 사람을 이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는 사람”이란 ‘이웃’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아는 사람”일 때에는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꽤 많이 가까운 “아는 사람”일 적에는 ‘몸알리’라고 해요. 허물이 하나도 없이 매우 가까운 사이인 “아는 사람”이라면 ‘너나들이’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알까요. 그리고,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얼마나 아는가요. 4347.6.30.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얼마 앞서 이웃한테서 ‘식구한테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前)”은 “얼마 앞서”로 다듬습니다. “가정(家庭) 폭력(暴力)에 문제(問題)가 있는”은 그대로 둘 수 있을 테지만 “식구를 때리는”이나 “식구한테 주먹다짐을 하는”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어느 가족(家族)에 관(關)한 이야기”는 “어느 식구 이야기”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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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를 더 많이 얻는 길



  무화과알을 더 많이 얻는 길을 석 달쯤 앞서 배웠다. 아니, 아마 더 일찌감치 배웠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배웠다’고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다. 배웠다기보다는 ‘보았다’고 해야 옳지 싶다.


  무화과알을 더 많이 얻으려면 해마다 가지를 뭉텅뭉텅 자르면 된다. 능금알도 배알도 포도알도 이와 같다. 해마다 나뭇가지를 뭉텅뭉텅 잘라 주면 된다. 감알도 이와 같다. 감알을 더 많이 더 크게 얻고 싶다면, 가지를 뭉텅뭉텅 자르면 된다.


  그런데, 나뭇가지를 더 치고 자꾸 쳐야 열매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 열매를 더 많이 얻는 길은 오직 이 하나뿐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열매를 열 알 먹으면 배부른가, 배가 덜 부른가. 열매를 스무 알 먹으면 배부른가, 배가 덜 부른가. 열 알 거둔 열매 가운데 다섯 알을 이웃과 나눌 적하고, 여섯 알이나 일곱 알을 나눌 적하고, 어느 쪽이 배가 부를까. 꼭 스무 알이나 서른 알을 거두어서 열 알이나 스무 알쯤 이웃하고 나누어야 배가 부를까.


  해마다 가지를 끔찍하게 잘린 채 열매를 내놓아야 하는 나무는 오래 살지 못한다. 몇 해 못 살고 죽는다. 열매장사를 하는 이들은 으레 열 해쯤 이렇게 나무를 들볶다가 새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오늘날 열매장사는 나무 한 그루로 열 해 동안 엄청나게 열매를 뽑아내도록 들볶는단다.


  들볶인 나무가 내놓는 열매를 먹는 사람은 얼마나 즐거울 만할까 궁금하다. 들볶인 나무가 피처럼 내뱉은 열매를 먹는 사람은 얼마나 배부를 만할까 궁금하다. 들볶인 닭이 낳은 달걀은 우리한테 얼마나 맛있거나 즐거울까.


  나무 한 그루가 천 해쯤 살면서 나와 내 아이들과 내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길을 헤아려 본다. 나로서는 ‘무화과를 더 많이 얻는 길’은 나뭇가지를 해마다 뭉텅뭉텅 자르는 짓이 아니다. 무화과나무가 우람하게 자라서 푸르게 고운 그늘을 베풀고, 싱그러운 잎사귀를 선보이면서, 곧잘 열매를 맺는 길이라고 느낀다. 천 해에 걸쳐 누릴 열매를 고작 열 해 동안 울궈내고 싶지는 않다. 4347.6.3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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