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서명’을 ‘낙서’로 여겨 지우기


  헌책방이 문방구처럼 동네마다 여러 곳씩 있을 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앞에서 한 군데씩 있던 지난날, 책은 참으로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무렵 책을 참 잘 읽고 잘 내놓았으며 잘 샀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책을 소유한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나눈다’는 생각이 짙었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책을 사는 분들은 책에 ‘글쓴이 서명’이 들어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헌책방지기도 ‘글쓴이 서명’이 들어간 책을 웃돈을 얹어서 팔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고서 수집’을 하는 이들이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고 ‘대단한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흐름이 살짝 바뀝니다. ‘고서 수집가’는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글쓴이 서명이 없는 책’보다 두 곱이나 세 곱, 때로는 열 곱까지 비싸게 사고팔았습니다.

  헌책방지기는 글쓴이 서명이 있건 없건 그냥 팔았지만, 이런 소문이 헌책방지기 귀에도 들어오면서, 어느 헌책방은 글쓴이 서명이 깃든 책을 곱배기로 값을 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일 뿐’이라고 여겨, 서명이 없는 책하고 똑같이 파는 헌책방도 꽤 많습니다.

  학교 앞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서는 글쓴이 서명을 썩 달갑잖게 여겨 버릇했습니다. 학교 앞 헌책방은 참고서와 교과서를 많이 다룹니다. 참고서와 교과서를 찾는 학생이나 손님은 ‘낙서가 없는 책’을 바랍니다. 그러니, 학교 앞 헌책방지기는 책에 있는 낙서를 지우느라 팔이 빠져요. 헌책방마다 지우개를 잔뜩 쌓아 놓는데, 참고서와 교과서에 있는 낙서를 지우려고 둡니다.

  그런데, 학교 앞 헌책방 일꾼은 인문책이나 시집에 있는 ‘글쓴이 서명’도 지웁니다. 예전에는 지우개로 지웠고, 지우개로 안 되면 사인펜으로 새까맣게 발라요. 수정액이 나온 뒤로는 수정액으로 지우지요. 그리고, 사인이 너무 지저분하다(?) 싶으면 아예 북 찢습니다.

  헌책방 일꾼이 찢어서 버린 ‘글쓴이 서명’ 가운데 여러모로 눈에 띄는 작가로는 도올 김용옥 님 서명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도올 서명’인 줄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끔찍한(?) 낙서로 여길 만합니다. 걸레 스님 중광이 남긴 서명도 헌책방지기 눈에는 ‘낙서’일 뿐입니다. 가볍게 북 찢어서 버리지요.

  예전에 저는 헌책방에서 책손이 스스로 ‘글쓴이 서명’을 찢어서 버리는 모습을 보았어요. 한 분은 ‘책이 지저분해서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분은 ‘글쓴이 서명 때문에 이 책을 사지 않기 때문에 찢는다’고 말씀합니다. 두 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말 우리는 책을 읽으려고 책을 삽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해서, 나중에 이 책을 비싼값에 되팔려고 사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 즐김이’이지 ‘책 장사꾼’이 아닙니다.

  책에 글쓴이 서명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운 글을 나한테 선물한 이웃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면서, 그분 손글씨 자국에서 빛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굳이 글쓴이 서명을 안 받으려는 사람은, 그분이 쓴 글로 엮은 책에 그분 넋과 숨결이 고이 깃들었으니, 굳이 서명을 더 받아야 할 까닭이 없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해쯤 지난 예전 일인데, 언젠가 제가 고른 책 가운데 ‘글쓴이 서명’이 남은 책이 있었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그 책을 살피면서 책값을 셈하다가 “아이고, 손님 미안해요. 여기 낙서를 안 지웠네.”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수정액으로 글쓴이 서명을 지우십니다.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또 한 번은 다른 헌책방에서 “책이 지저분하게 낙서가 뭐람.” 하면서 제 앞에서 글쓴이 서명을 북 찢어서 건네더니 “낙서가 있는 책이니 그냥 천 원에 가져가세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헌책방지기가 북 찢은 ‘낙서라 하는 글쓴이 서명’을 주워서 책에 끼웁니다. 헌책방지기가 묻습니다. “그거 주워서 뭐 하려고요?” “이것도 이 책 가운데 하나인데, 그냥 끼워두려고요.”

  지난 2005년 서울 용산에서 김기찬이라는 분 이름과 도장이 찍힌 책을 잔뜩 보았습니다. 김기찬이라는 분이 죽으면서 그분이 건사했던 책이 아주 많이 헌책방에 나왔습니다. 왜 이 책들이 헌책방에 나왔을까 궁금하게 여기다가 슬픈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김기찬 님 서명과 도장이 깃든 책을 두 권 골랐습니다. 글쓴이 서명을 건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기증한 책이 버려지는 한국 도서관 역사와 문화를 자료로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appletreeje 2014-07-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쓴이 서명'을 이러한 이유로 '낙서'로 여겼군요.
저는 몰랐는데 함께살기님의 고마우신 글로 또 헤아려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파란놀 2014-07-09 01:12   좋아요 0 | URL
깊은 밤에 즐겁게 마음과 몸을 쉬시고
새 아침에도 새로운 웃음과 노래로
하루를 여셔요~ ^^
 
나대로 살아라
정송희 만화 / 씨네21북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350



오늘 이곳에서 누가 살아가는가

― 나대로 살아라

 정송희 글·그림

 씨네21북스 펴냄, 2013.12.31.



  정송희 님이 그린 만화책 《나대로 살아라》(씨네21북스,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은 ‘소로, 스콧·헬렌, 타샤 튜더’ 네 사람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등학교 아이들 눈높이에서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책을 살펴서 읽으며 느낀 이야기를 간추리듯이 들려줍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넘기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정송희 님은 왜 굳이 이 네 사람을 골라서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그리고,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네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기 일쑤입니다. 정송희 님 나름대로 삭히면서 새로운 넋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네 사람 이야기를 네 사람이 쓴 책을 바탕으로 ‘만화대사를 꾸며 이야기를 엮는다’면, 굳이 이 만화책을 읽을 까닭은 없지 싶습니다. 애써 만화책으로 네 사람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만한 까닭을 만화로 담아야 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 “에머슨은 가까운 친구였지만 소로를 잘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아.” “글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것 같은데.” (51쪽)



  만화책 《나대로 살아라》에서 주인공은 고등학교 아이 둘입니다. 소로도, 스콧이나 헬렌도, 타샤 튜더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아이 둘이 주인공이 되어,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려 합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아이 둘은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눈을 뜨면서 삶을 짓고 싶거든요. 고등학교 아이 둘은 스스로 삶을 다시 만나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만화책은 ‘네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넘어서, 고등학교 아이 둘이 ‘네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마음과 품은 생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 ‘스콧은 깔끔하고 소박한 생활. 훌륭한 농장 운영. 차곡차곡 쌓은 땔감과 퇴비 더미. 반짝반짝 빛나는 연장들. 꼼꼼하게 정리된 노트. 정성 들여 읽기 쉽게 쓴 원고에서 예술가였어. 난 스콧이 생활 자체를 예술 작업처럼 하고 있다고 느꼈어. 스콧은 내 독특한 성격을 잘 배려해 줬어.’ (81쪽)

- ‘스콧은 생활 속으로 라디오가 끼어드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했어. 라디오는 기껏해야 뉴스 제목만 들을 정도로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보았지. 우리는 운 좋게도 ‘소음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살아왔어. 저녁이나 낮이나 모두 조용했지. 아침 뉴스도 없었어.’ (96쪽)



  오늘 이곳에서 누가 살아가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오늘 이곳에서 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 되어 살아가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입시지옥에서 홀가분한 고등학교 아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자살로 중·고등학교를 마치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대학교에 들어갔어도 마음을 못 놓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대학교에 못 들어간 탓에 마음이 찢어지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만화책 《나대로 살아라》는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 나라 푸름이한테 어떤 빛이 될 만한지 궁금합니다. 이 만화책이 모자라거나 아쉽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 만화책이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들여다보아야 할 곳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이 찬찬히 마음을 쏟아서 바라보아야 할 곳이 있으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 ‘나는 틈틈이 침실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 ‘햇빛, 새소리, 눈송이, 나무’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이름을 새겼어.’ (99쪽)

- ‘나는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렸지.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하리라’’ (113∼114쪽)



  소로 님이 쓴 책은 언제 읽어도 아름답습니다. 스콧 님이나 헬렌 님이 쓴 책도, 타샤 튜더 님이 쓴 책도 더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러한 책들로 나아가는 길동무가 되는 《나대로 살아라》도 여러모로 뜻이 있으리라 느껴요. 아름다운 길동무를 알려주는 책이 있어도 우리 삶은 한결 넉넉할 테니까요.


  그러면, 소로를 만난 고등학교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요. 스콧과 헬렌을 만난 고등학교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어떻게 가꾸는가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저 ‘옛사람’한테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지식을 쌓기는 하지만, 무언가 달라지는 낌새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새로운 사람을 찾아나서기만 합니다. 생각이 자라거나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노래하는 빛으로 흐르는 데까지 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나대로 살아야지요. 쳇바퀴를 도는 삶이 아닌, 나대로 가꾸는 삶으로 나아가야지요. 도시 물질문명에 갇혀 허덕이는 삶이 아닌, 나대로 사랑하면서 보듬는 하루를 누려야지요.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은 놀이, 나는 글쓰기



  아이들은 논다. 아이들은 아버지하고 함께 놀고 싶다. 살짝 쉬면서 아이들과 논다. 한여름에도 살을 부비며 놀고 싶은 아이들이다. 한손에 부채를 쥐며 아이들 땀을 식히면서 논다. 한참 놀다가 고단해서 방바닥에 눕는다. 누운 채 놀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아버지가 잠이 드니 아이들은 저희끼리 논다. 문득 눈을 뜨고는 아이들이 저희끼리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살며시 자리를 옮겨 글쓰기를 더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고흥집을 나선다. 두 아이 이를 고치려고 멀리 일산까지 간다. 고흥집을 나서기 앞서 마감글을 모두 마쳐야 하겠기에 엊그제부터 바쁘게 글을 쓴다. 이제 막 한 가지를 마쳤고, 곧 다른 한 가지를 마치려 한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는 새로 한 가지를 마칠 수 있을까. 즐겁게 생각하며 씩씩하게 기운을 내면 모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이렇게 저희끼리 대견하게 노는데, 아버지인 나도 새롭게 기지개를 켜면서 손가락춤을 추자.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립 Bleep - 일상의 현실을 바꾸는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
윌리암 안츠 외 지음, 박인재 옮김 / 지혜의나무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까 (양자물리학과 마음)
What The Bleep Do We Know!?, 2004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면서 생각한다. 오늘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번 보는데, 앞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여러모로 생각을 건드리는 대목이 나오지만, 생각을 건드리는 이야기보다는 뭐라고 할까, ‘영화 보는 재미’를 돋울 만한 대목이 더 자주 나오는구나 싶다. 그래도 거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여자가 깃들려 하는 깊은 숲속 아름다운 풀빛과 하늘빛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어쩌면,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서는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모습 하나를 빼고는 내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없을 수 있구나 싶다. 누구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숲에 깃들면 ‘사랑을 생각해서 삶을 사랑스레 지으며 웃’지, 이웃을 해코지하거나 동무를 밟고 올라서려는 생각을 터럭만큼도 안 하겠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사람들은 영화 〈다빈치 코드〉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 아름답고 멋진 숲에 깃들지 못한다. 쳇바퀴처럼 회사원 노릇을 하고, 쳇바퀴처럼 은행계좌 월급을 받는다. 쳇바퀴처럼 자가용을 몰거나 버스·전철로 회사와 집을 오갈 뿐이며, 쳇바퀴처럼 아파트에 기대어 살아갈 뿐이다.

  영화 〈What The Bleep Do We Know!?〉는 한국에서 디브이디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2010년에 책으로 나왔다. 디브이디로 이 영화를 찾기는 어렵지만, 유투브에서는 이 영화를 손쉽게 찾아서 볼 수 있다.

  양자물리학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야기란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떤 학교와 회사와 공공기관과 언론과 논문에서도 이러한 대목을 밝히지 않는다. 마음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있는가? 삶을 노래하는 학교가 있는가? 사랑을 밝히는 회사가 있는가? 꿈을 꾸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언론이나 논문이 있는가?

  생각이 삶을 짓지만, 생각을 하자면 먼저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가려는 길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느끼고, 바라보면서 느낄 때에 비로소 천천히 알아차릴 수 있으며, 보고 느끼며 알아차릴 때에 삶으로 지을 생각을 마음에 심을 수 있다.

  영화 〈What The Bleep Do We Know!?〉는 여러 차례 본다. 틈틈이 새롭게 본다. 내 생각을 찬찬히 다스리려고 본다. 아이들과 함께 시골에서 누리는 빛을 슬기롭게 가다듬어 즐거운 노래가 되면서 푸른 숲을 가꾸는 산들바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본다. 4347.7.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영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라도닷컴> 2014년 7월호에 싣는 '고흥 사진책도서관 시골일기'입니다. 시골에서 네 식구가 누리는 빛을, 도시에 있는 이웃과 나누려는 뜻으로 글과 사진으로 이야기 한 자락 엮었습니다.






시골도서관 풀내음

―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저녁에 빨래를 하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 빨래기계가 들어온 지 이태째인데, 이불을 빨 적을 빼고는 거의 안 씁니다. 으레 손으로 모든 빨래를 합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마흔 살인 오늘까지 손빨래로 살아갑니다. 손으로 하지 말고 기계로 하면 품을 아끼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분이 많지만, 손으로 빨래를 하더라도 품과 겨를을 얼마든지 누립니다. 왜냐하면, 빨래는 밥하기와 청소처럼 집살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조물조물 옷가지를 주므르면서 네 식구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봅니다. 쭉쭉 물을 짜면서 네 식구가 새로 맞이할 하루를 그립니다. 물짜기까지 마친 옷가지를 마당에 널면서 내 마음을 얼마나 말끔하게 갈무리했는지 헤아립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손빨래를 하니, 마을 어귀 샘터에서 옷을 다 벗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빨래놀이를 합니다. 저희 옷가지를 샘터 옆 빨래터 바닥에 놓고 비비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곳에 담가서 헹구는 시늉을 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세 살 적부터 설거지를 흉내내고 싶어 애쓴 끝에 곧잘 설거지를 도와줍니다. 이 아이는 갓난쟁이일 적에 단추 꿰기를 스스로 하고 싶다면서 날마다 단추에 매달리더니 돌이 될 무렵 혼자서 단추를 꿰거나 풀 수 있었어요.


  아이 곁에서 어버이가 호미질을 한다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호미를 장난감으로 삼아서 땅을 쪼면서 놉니다. 아이 곁에서 어버이가 베틀을 밟거나 물레를 자으면, 아이들도 베틀과 물레를 놀잇감으로 여기면서 실짜기와 천짜기를 퍽 일찍부터 익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적잖은 어버이는 아이들이 서너 살밖에 안 되었어도 골프를 시키거나 영어를 가르치거나 테니스를 물려주거나 바이올린을 켜도록 이끌어요. 그렇지요. 어릴 적부터 익숙하면 나중에 한결 잘 할 테니까요.





  누구나 쉬 알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손전화를 갖고 노는 아이는 손전화를 일찍부터 빈틈없이 다룹니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으레 타고 다니던 아이는 누구보다 자동차를 일찍 살피고 헤아리면서 몰 수 있어요. 예전에도 그랬어요.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경운기를 늘 바라보던 아이들은 열 살 언저리에도 경운기를 씩씩하게 몰 수 있습니다. 더 먼 옛날에 시골에서 나고 자라던 아이들은 열 살 언저리에도 혼자 멧골로 들어가서 나무를 하고는 지게로 장작을 날랐지요.


  유월 한복판이 되니 온 나라에서 세계축구대회 이야기로 들썩입니다. 시골에서 축구 이야기를 하는 이웃은 없지만, 셈틀을 켜면 인터넷에는 온통 축구 이야기입니다. 밀양에서 송전탑 때문에 시름시름 앓거나 고단한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몹시 어렵고, 바닷물에 잠긴 가녀린 아이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도 뚝 끊어집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축구를 좋아한다면 세계축구대회를 얼마든지 즐길 만하지만, 어른으로서 아이와 함께 무엇을 보고 누리며 사랑할 때에 아름다울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브라질에서는 세계축구대회를 열려고 ‘경기장 지을 터’를 둘러싼 마을에서 살던 사람을 20만이나 쫓아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토막소식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철거민 20만을 억누르려고 경찰과 군인을 20만이나 들인다고도 해요. 오늘날 브라질을 떠나, 우리 한국을 되새겨 봅니다. 한국에서 1988년에 올림픽을 치른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빼앗겼던가요. 올림픽에 앞서 전국체전을 벌일 적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터를 잃어야 했던가요. 댐을 짓는다거나 고속도로를 놓는다거나 발전소나 공장을 들인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가요.


  전북 진안에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꾸리던 김지연 님이 엮은 《용담 위로 나는 새》(아카이브북스,2010)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진안 조림초등학교 교장이던 전형무 님이 용담댐 때문에 사라지는 마을을 샅샅이 돌면서 찍은 사진과 남긴 글을 바탕으로 새로 엮었습니다. 그런데, 아파야 하거나 떠나야 하던 사람들 이야기를 담거나 들려주는 책이 참 없어요. 이러한 책이 나와도 찬찬히 살피거나 즐겁게 읽는 이웃이 몹시 드물어요. 지구별에서 까마득히 먼 데에서 터지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곁에서 생기는 슬픈 이야기를 담아 《밀양을 살다》(오월의봄,2014) 같은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러한 책을 우리들은 얼마나 읽고 얼마나 새기면서 스스로 삶을 고칠는지 궁금해요.


  오월에 들딸기를 훑으면서 생각합니다. 유월 어귀에 감꽃을 주으면서, 또 유월에 오디를 따면서 생각합니다. 들딸기는 오뉴월에 실컷 즐기는 선물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식구가 아이들 이를 고치려고 큰도시에 있는 치과를 다녀오느라 며칠 도서관을 비운 사이, 누군가 우리 도서관 들딸기를 모조리 훑었습니다. 참 얄궂은 이웃입니다. 예전에는 한가위에 여러 날 시골집을 비우고 아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찾아뵈러 다녀온 사이에 우리 집 무화과나무를 모조리 베어 죽인 이웃이 있었어요. 이와 같은 이웃은 참 어떤 넋일까 아리송해요. 왜 이웃나무를 죽일까요.


  풀을 뜯습니다. 우리 집 마당과 옆밭과 뒤꼍에서 풀을 뜯고, 도서관 둘레에서 풀을 뜯습니다. 그동안 그러려니 여기던 풀 가운데 멸나물(어성초)이 있는 줄 올해에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몇 해 동안 쳐다보고 뜯기만 하다가 올해 처음 사진으로 찍어 둘레에 여쭈어 이름을 알았습니다. 우리 식구는 돌미나리도 뜯고, 젓가락나물과 갯기름나물도 뜯습니다. 방가지똥과 고들빼기도 뜯으며, 이름을 아직 모르는 여러 가지 풀도 뜯습니다. 아이들은 내 곁에 달라붙어 “어떤 풀 뜯어?” 하고 묻다가 저희도 풀을 같이 뜯고, 내가 풀잎을 입에 넣으면 “나도 줘.” 하면서 손을 내밉니다. 함께 풀을 먹고, 함께 바람을 마십니다. 함께 햇볕을 쬐고,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서로 가슴을 토닥이다가 밤에 잠들고, 서로 이불깃 여미면서 밤마다 개구리 노래잔치를 누리면서 꿈나라로 갑니다. 하루는 언제나 새롭게 즐겁습니다. 4347.6.1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