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맞이해 우리 말 이야기를 한 꼭지 걸쳐 본다.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52) 시작 37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


.. 단원이 삼 년간 현감으로 재직한 연풍현 관아는 오래 전에 답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20쪽

 “삼 년간(三 年間)”은 “세 해 동안”이나 “세 해”나 “세 해를”로 다듬고, ‘재직(在職)한’은 ‘있던’이나 ‘일한’이나 ‘지낸’으로 다듬습니다. “오래 전(前)에 답사(踏査)한”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퍽 예전에 다녀 본”이나 “꽤 옛날에 밟아 본”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여행(旅行)’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이라 하기보다는 우리 말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고, ‘마실’이나 ‘나들이’나 ‘길’로 손질해 볼 수 있습니다.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x)
 └ 여행은 옥순봉부터 하기로 (o)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 해에 한 차례 ‘한글 난 날’을 맞이합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이날을 기리는 사람이 있으나, 이날이 한글날인지 아닌지 못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했기에 조금 더 내 말과 글을 돌아보며 아끼고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글날이건 말건 엉터리 말글을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는 사람이 있어요.

 한글날이라 해서 더 아름답거나 알차게 말글을 북돋우려는 사람이 있지만, 한글날조차 내 말글을 멍청하고 미련스레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한 아침 책을 한 권 꺼내어 읽다가 씁쓸하게 웃습니다. 굳이 한글날이기에 우리 말글을 헤아리는 책을 찾아 읽고 싶지 않을 뿐더러, 한글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한결 알차며 곱게 여민 말글로 이루어진 책을 읽을 마음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이 한글날이다 보니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글월에 자꾸 마음을 쓰고야 맙니다. 이분은 왜 이런 글로 이렇게 당신 삶을 이야기해야 하나 싶고, 이분 글을 책으로 낸 책마을 일꾼은 이분 글을 찬찬히 어루만지거나 보듬을 수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한자말 ‘시작’을 생각합니다. 이 낱말을 한자말로 여긴다거나 이 낱말을 다듬어 보고자 마음을 쏟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시작’과 같은 낱말을 알뜰살뜰 털어내거나 씻어내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이와 같은 낱말 하나 털어내지 못한들 한글이 크게 망가진다든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이 낱말 하나마저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이 나라 말글을 비롯해 이 나라 넋이 튼튼히 서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시작’과 같은 숱한 한자말이 우리 삶에 스며든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뗄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참말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떼어 보고자 애쓴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참다이 말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한국사람입니다. 착하게 말글 가꾸기를 해 보려 땀흘리지 않는 한겨레입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돌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오르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어린 날, “준비, 시이작!” 하는 말을 곧잘 듣고 으레 꺼냈습니다. 그러나 “준비, 땅!” 하는 말을 나란히 듣고 흔히 주고받았습니다. 따로 우리 말글을 더 아끼려고 하면서 ‘시작’을 ‘땅’으로 고쳐쓰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낱말이 썩 내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은데, ‘준비’라는 낱말도 ‘시작’이라는 낱말과 함께 한자말이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낱말들을 곰곰이 되씹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 살펴보았고, 책에는 이런 말을 꺼내야 할 자리에 어떻게 적혀 있는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자, 해 보자!”나 “하나, 둘, 셋!” 같은 말마디는 이무렵 느끼고 들으며 받아들입니다. 따로 말다듬기나 글다듬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저한테 더 알맞거나 살가울 말마디를 찾고 싶었습니다. 말을 사랑하거나 글을 아끼려는 마음까지는 아니고, 더 쉬우며 포근한 말이나 글을 맞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머나먼 옛날 농사짓던 여느 할매와 할배가 쓰던 말을 나 또한 쓰고 싶었고, 까마득한 지난날 산골과 들판과 바닷가에서 살아가며 뛰노는 아이들이 쓰던 말을 나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다니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보기로 했다

 시골집에서 고무신을 신고 흙을 밟으며 나무를 쓰다듬는 가운데 생각합니다. 나무를 쓰다듬어 보지 않고서야, 흙을 밟아 보지 않고서야, 텃밭에서 풀을 뽑거나 무를 뽑아 보지 않고서야, 내 삶을 어루만질 만한 말마디를 얻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을 할 말미를 마련하는구나 싶지만, 이만큼으로는 모자랍니다. 두 다리로 어디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어디를 오가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무엇이며, 내 삶자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알아채야 합니다.

 “한글사랑 나라사랑” 같은 푯말을 아무리 드높인다 하더라도 이 나라 사람들이 두루두루 한글과 우리 말을 사랑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바꾸어야 하고, 삶터를 스스로 일구어야 하며, 삶사랑으로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을 사귀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외침말이라 할지라도 한낱 외침말에 그칩니다. 우리 말 살리기이든 우리 강 살리기이든 우리 땅 살리기이든, 입으로 할 수 없고 글쓰기로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내 하루로 할 뿐입니다.

 한글날을 기리며 한글과 우리 말을 다루는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살뜰히 말사랑 글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아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지식입니다. 나와 너는 머리에 담는 지식이 아닌 날마다 살아내며 나누는 이야기를 가누어 빛깔 고운 슬기를 살포시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며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보내는 나라면, 내가 세우는 일터에 ‘무슨무슨 주니어’나 ‘무슨무슨 닷컴’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지 못하며 오늘도 어제도 글피도 달력에 적힌 날짜로 바라보는 나이기에, 내가 다니는 일터 이름이 적힌 이름쪽 하나에 갖가지 자잘한 영어나 한자를 새겨 놓습니다.

 처음 그대로 살고 처음처럼 죽습니다. ‘시작’과 끝이 아닌 ‘처음’과 끝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지만, 세 살뿐 아니라 어머니 배에 깃들어 있을 때부터 내 삶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어머니가 살아온 바탕을 내가 받아먹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는 그대로 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으려면 내 어머니가 당신 쓰던 말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는다면 내 아이가 쓰는 말 또한 내 아이 스스로 사랑으로 보듬습니다.

 첫머리를 옳고 착하며 곱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머리를 바르며 맑고 밝게 다잡아야 합니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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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09 23:3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순수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어로 바꾼 경우에 그 말을 살릴 필요도 있지만 오랜기간 사용한 한자어를 굳이 한글로 억지로 고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보다는 요즘에 10~20대 층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오히려 한글을 더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0-10-10 06:17   좋아요 0 | URL
어린이와 청소년이 쓰는 말은 모두 '어른이 쓰는 말'을 따라하고,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 말은 달라집니다. 어른들이 '말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만큼' 아이들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안 쓰지요.

4대강 같은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말과 글을 '한 나라 사람 누구나(학력이 짧든 아는 것이 적든) 손쉽고 즐거이 나누는 테두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한글로 억지로 고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제자리로 가도록 바로잡는' 일입니다.
 


 전철에서 책읽기 2


 송명규 님이 쓴 산문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다가 126쪽에서 멈춘다. “가방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차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렌즈 한켠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아른가렸다.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초점을 맞췄다. …….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에 걸린 채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까만 비닐봉지였다. 나는 무엇에 얻어맞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를 착각했다. 나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미루나무에 부엉이 대신 비닐봉지가 앉아 있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라는 대목을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되읽는다. 고개를 그리 끄덕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 모습이다. 틀림없이 우리 삶자락 이야기이다.

 오늘 이대 앞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코를 찌르고 살을 후벼파는 냄새가 잔뜩 나서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 바깥은 그지없이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데,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니 온통 불빛이요, 눈이 어두워지고 만다. 새삼스레 이 도시 서울을 생각한다. 우리는 왜 땅밑으로 내려가야 하는가. 왜 이 땅밑 기차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한테 얼마나 넓은 땅이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나다니며 사람을 사귀거나 다른 마을 구경을 해야 하는가. 내 조그마한 보금자리와 삶터를 조촐히 사랑하며 아낄 수는 없는가. 지하철을 타며 책을 읽으면 ‘시간 살리기’라 여겨 왔는데, 굳이 지하철까지 타야 하거나 책까지 챙겨 읽어야 하느냐 싶다.

 맑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빨래를 해서 널고, 이 햇살을 아이와 옆지기랑 느끼며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릴 때에 한결 기쁘며 뿌듯하겠구나. 얼굴과 손발이 푸석해지고 목이 마르다. 오늘이 한글날이라고 한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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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레와 글쓰기

 걸레를 손으로 빨아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훔치면, 내가 얼마만 한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 좋을까를 알 수 있다. 연필을 손으로 깎아 조그마한 쪽종이 하나, 이를테면 껌종이라든지 부동산에서 골목마다 붙이는 전세방 알림종이를 길에서 주워 여기에 몇 줄 글월을 적바림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써서 나누어야 좋을까를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번 돈을, 그러니까 텃밭농사를 지어 배추 몇 포기나 무 몇 뿌리를 저잣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얻어 길장사를 해서 번 돈을 손에 쥐고 다리품을 팔아 책방마실을 하는 가운데 책 하나를 장만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 내 삶을 일구어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4343.10.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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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걷는 골목


 내 눈에만 어여삐 보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어여쁘기 때문에 동네 골목 마실을 꾸준하게 오래오래 이어가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지저분하게 바라보거나 아무것 아니라고 얕잡아 보더라도 내가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골목길 삶자락은 가없이 아름다우니까 내가 느낀 이 아름다움을 글과 사진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한다.

 내 마음에만 알차게 보일 수 있으나, 내가 읽기에는 노상 알차기 때문에 판이 끊어진 책이건 나라밖 책이건 거의 안 알려진 채 조용히 묻힌 책이건 기쁘게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뭐 그런 책을 굳이 읽느냐고 묻는다. 잘 팔리거나 널리 사랑받는 책도 많은데 애써 뻘밭에 묻힌 책을 캐려 할 까닭이 있느냐고 말한다.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는 책도 좋아할 만하지만, 누구보다 내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으면서 내 눈과 마음과 손으로 고이 껴안을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 (4343.10.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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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39 : 내 삶만큼 읽는 책


 어린이책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던 지난날, 제가 몸담은 일터가 아주 휼륭한 책을 몹시 훌륭한 매무새로 일군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무렵 해마다 장만하여 읽는 책이 천 권이 넘고, 따로 장만하지 않으며 읽는 책 또한 꽤 많았습니다만, 한 해 동안 읽는 책이 제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스물다섯 살 젊은이가 알 수 있는 책은 온누리에 쏟아져나온 책 숫자에 대면 매우 보잘것없습니다.

 2000년 6월 10일 낮, 서울 홍대 앞에 자리한 헌책방 〈온고당〉에서 《北邊の原野を驅ける キタキツネ》(平凡社,1974)라는 사진책 하나를 만납니다. 일본 사진쟁이 ‘竹田津 實’ 님이 내놓은 책으로, 이분 책은 이맘때까지 아직 나라안에 한 권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2005년에 비로소 이분이 글을 쓴 그림책 하나가 옮겨지고, 2007년부터 이분 사진책이 하나둘 옮겨집니다. 바로 ‘다케타쓰 미노루’ 님입니다. 제가 일하던 출판사 자료실에도 《北邊の原野を驅ける キタキツネ》라는 사진책 하나 꽂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자연 그림책을 많이 냈는데, ‘한국에는 없는 여우’를 그리자니 어쩔 수 없이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일본 들짐승 여우를 담은 사진책을 들여다볼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한국땅에 없는 들짐승은 여우만이 아닙니다. 늑대도 없고 범도 없습니다. 곰도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러한 들짐승들 자취와 모습과 삶을 그림책으로 그려내자면 동물원에 가거나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새책방과 헌책방을 꾸준히 돌아다니며 나라 안팎 온갖 책을 바지런히 살피면서 하나둘 깨닫습니다. 나라안 적잖은 창작그림책에 실린 들짐승 모습은 나라밖 적잖은 사진책에 실린 모습을 들여다보며 베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제아무리 돈 많다는 출판사에서 큰돈을 들여 그림쟁이 한 분한테 힘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들짐승 모습 하나’를 잡아채어 그리도록 아프리카로 보내 주어 몇 달쯤 묵도록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범이나 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람쥐나 토끼를 그릴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 가두어 놓고 지켜보는 짐승이 아니라, 들판과 산자락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들풀과 산열매를 먹고 자라는 짐승을 오래도록 가까이하는 가운데 ‘한국 자연 터전 들짐승 모습’을 살가이 담아내도록 이끄는 출판사가 한 군데나마 있을까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돈을 대지 못한다면 그림쟁이 스스로 돈과 품과 긴 나날을 땀흘리고 바칠 분이 몇이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나 스스로 살아가는 만큼 쓰고 그리며 찍습니다. 내 삶만큼 글을 씁니다. 내 삶을 넘어서는 만큼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내 삶 테두리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책 만드는 일꾼 매무새도 매한가지입니다. 책 하나 마주하여 읽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만큼 쓰고 내 삶만큼 엮으며 내 삶만큼 읽습니다. 한결 아름다운 넋을 돌보며 사랑하고자 할 때에는 나날이 조금씩 거듭나는 빛깔과 내음과 소리가 글월 한 자락에 담깁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아름다이 거듭나는 만큼 알맹이와 속살을 한껏 깊고 넓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글 쓰기’나 ‘좋은 책 읽기’를 하지 못합니다. 오직 ‘좋은 삶 일구기’에 마음과 몸을 쏟습니다. (4343.10.7.나무.ㅎㄲㅅㄱ)
 

(일본 사진책을 베껴서 내놓은 그림책 이야기는 좀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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