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살갗 흰 사람


 ‘살갗 누런 사람’들은 ‘살갗 흰 사람’이 모여 사는 나라를 높이 우러러 마지 않을 뿐더러, 가장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에서 조그마한 일 하나가 터져도 법석일 뿐더러, 신문과 방송에서 큼직큼직하게, 또 여러 번 다룹니다.

 ‘살갗 누런 사람’들은 ‘살갗 까만 사람’이 모여 사는 나라를 업신여길 뿐더러, 가장 못났다고 여깁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에서 커다란 일이 수없이 터져도 모르쇠일 뿐더러, 신문과 방송에 한 귀퉁이로나마 실리는 법이 없습니다.




.. (사루도들은 어디에나 다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무얼 하려는 걸까?) … 이시는 그들이 자기가 소중히 하는 것들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사루도는 투시가 만들다 만 바구니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저것이 사루도다. 여자의 집에까지 거침없이 들어가 멋대로 굴잖아. 저 악마들이 약탈한 뒤에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이다. 투시와 큰아버지는 재빨리 달아났고, 저들은 어머니에겐 손대지 않았다 …… 그러나 언제나 돌아갈 것인가?) ..  (182∼187쪽)


 여러 해 앞서 어느 술자리를 떠올립니다. 생각이 있으면서 좋다는 책을 펴낸다고 하는 사람하고 어울린 자리였습니다. 미국에 허리케인이 불고 토네이도가 어쩌고 땅이 갈라지고 눈보라가 치고 하는 이야기가 왜 한국땅 ‘아홉 시 새소식’으로 나오고 신문에서도 떠들썩하게 실어야 하느냐 하고 푸념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나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에다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어이하여 한 마디 안 실리느냐고 덧붙였습니다. 그러고는, 미국 대통령 뽑는 소식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자 뽑는다는 이야기가 왜 날마다 특종처럼 다뤄져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주앉은 나이 지긋한 분께서 ‘미국은 우리 나라한테 중요한 나라니까 그러지’ 하고 대꾸해 줍니다. ‘무엇이 중요한데요?’ 하고 여쭐까 하다가, ‘그깟 나라가 뭘 중요하다고’ 하는 혼잣말만 하고 술잔을 붙잡았습니다.




.. 바깥쪽 방은 마차를 따라온 사람들로 순식간에 꽉 찼다. 남자들은 창살에 기대어 신기한 듯이 이시를 지켜보았고, 이시가 알 수 없는 말로 뭔가를 자꾸만 물었다. “니제 바 야히(나는 야히 족이다).” 이시가 말하자 모두 한꺼번에 크게 웃어댔다. 보안관 조수가 커피와 수프와 빵을 담은 쟁반을 가져다 이시 앞에 놓았지만 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점점 더 많은 사루도가 바깥쪽 창에 와서 창살에 얼굴을 대고는 이시에게 말을 하게 하려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들은 바보처럼 헤픈 웃음을 연방 웃었고 담뱃내나는 침을 아무 데고 퉤퉤 뱉었다 ..  (221∼222쪽)


 집에서 일하다가 너무 더워서 혼자서 보리술 한 잔 꼴깍꼴깍 하다가 잠깐 인터넷편지를 열어 보려고 인터넷포털에 들어가 보면, 날마다 ‘살갗 흰 사람’ 나라인 미국에서 일어난 소식이 끊임없이 굵직굵직 다루어집니다. 보려고 하지 않으나 보이게 되고,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광고창을 지우다가 잘못 눌러서 억지로 보게 되기도 합니다.

 문득문득, ‘내가 저 미국이라는 나라 소식까지 들을 까닭이 없으니 텔레비전도 보기 싫고 신문도 보기 싫은데, 인터넷을 하면서 이런 소식을 보지 않을 수 없다면 인터넷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만 지나도 쓰레기처럼 쌓이다가 버려지는 미국이라는 나라 소식들인데, 이런 쓰레기 소식이 아니라, 참으로 내 삶을 북돋우고 내가 알아가면서 깨달아야 하는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을 찢고 책을 펼치지 않았나’ 하고 돌이켜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외워야 했던 세계사와 세계지리 지식쪼가리로는 다뤄지지 않던 이웃 아시아 나라들 발자취와 삶을 알아보고 싶어서, 똑같은 ‘살갗 흰 나라’이지만, 덴마크며 폴란드며 에스파냐며 헝가리며 체코며 오스트리아며 핀란드며 아일랜드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새책방과 도서관을 쑤시다가 마땅한 책을 만나지 못해 헌책방을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지 않았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어쩌면, 저로서는 그 ‘살갗 흰 사람’이 모여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제 삶하고는 아무런 이어짐이 없습니다. 이음고리가 없습니다. 잇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 삶과 생각과 터전하고, 우리 이웃 아시아 나라 사람들 삶이나 아프리카 나라 사람들 터전이나 남아메리카 나라 사람틀 생각은 조금도 안 이어져 있는지 모르겠어요. 굳이 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꾀죄죄하며 가난뱅이인 나라들하고는 남남이라고 여기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가 우러러 마지 않는 그 ‘살갗 흰 사람’들마냥 ‘살갗 하얗게’ 되고프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살갗 희다’는 사람들 모인 나라에서 밑바닥에서 일한 사람들, 쟁기와 삽을 들고 논밭을 일구던 사람들은 죄다 우리 ‘살갗 누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빛이 흙빛이었지만.





.. 이튿날 아침, 이시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보안관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속옷, 셔츠, 웃저고리와 바지, 넥타이, 양말, 구두. 옷을 다 갈아입자 이시는 자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쳇, 참! 절반은 사루도고 절반은 야히 족이구나!” 몇 번인가 왔다갔다 하며 방 안을 서성거린 뒤 이시는 결국 구두와 양말을 벗어서 보안관에게 돌려주었다. 마침 그때 마쟈파가 들어왔다. 이시가 말했다. “이제야 알았어요. 사루도의 발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이상한 것은 당신네들이 구두라고 부르는 바로 이거예요. 발이 직접 땅에 닿지 않았는데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  (232쪽)


 제아무리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서 사무직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며칠 동안 시골 논밭에서 땅을 만지며 흙을 돌보고 풀과 나무를 보듬으면서 일을 하면 어느새 살갗이 구리빛이 됩니다. 조금 더 일하면 까무잡잡해집니다. 느긋하게 여러 달 일하면 조금씩 흙빛에 가까워집니다.

 한국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벨기에사람이든 캐나다사람이든 멕시코사람이든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몽골사람이라고, 일본사람이라고, 러시아사람이라고, 독일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흙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 살갗은 흙빛입니다. 도시를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를 이루는 잿빛과 마찬가지로 잿빛입니다.

 다만, 도시는 ‘시멘트 잿빛’과 ‘아스팔트 죽은 빛’을 감추려고 합니다. 겉에 껍데기를 씌웁니다. 풀 한 포기도 없는 주제에 풀빛 페인트를 입힙니다. 이에 따라 도시사람들은 싱그러움을 스스로 내버린 잿빛을 가리고자, 또 죽음만 도사리는 아스팔트빛을 숨기고자, 화학약품으로 화학교배를 한 화장품과 약을 바르고 기계로 살을 뜯어고치며 돈을 들여서 요가와 헬스 따위를 합니다. 그러면서 꿈에도 그리운 ‘살갗 흰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비로소 ‘허여멀겋게 파리해진 얼굴빛’이 되어 버립니다.


.. “이 바구니는 우리 부족의 바구니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 박물관 와토구르와에 이 바구니가 있을까요?” … “이 두 개는 내 사촌동생이 만든 거예요. 워누포에서.” 이시는 곁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슴이 몹시 들먹이고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었다. (이것은 그 아이의, 투시의 바구니다. 그러나 이 친절한 사루도, 내 새 친구는 워누포에 왔던 놈들 가운데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목소리도 똑똑이 기억하고 있다. 이 사람은 그들 가운데는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 바구니가 여기 있단 말인가?) ..  (246쪽)





 흙을 밟지 않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을 이웃과 어울리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살갗 흰 사람’이 됩니다.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집에만 머무는 사람 ‘핼쑥한 빛’하고는 다릅니다.

 한국에 살든 일본에 살든 중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영국에 살든 프랑스에 살든 라오스에 살든, 흙을 안 밟고 땀을 안 흘리며 일다운 일을 내동댕이친 사람들 살갗은 한결같이 ‘허옇’습니다. 어디에 살더라도 흙을 밟거나 땀을 흘리거나 일다운 일을 제 손으로 찾아서 애써 살아가는 사람은 흙빛을 닮아서 누렇거나 까무잡잡한 살결이 됩니다.

 흙을 밟지 않으니 ‘흙 밟는 사람이 거둔 열매’를 낼름낼름 받아먹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으니 ‘땀흘리는 사람들이 이룬 보람’을 돈푼 치르며 집구석에서 얻어먹습니다. 일다운 일을 하지 않으니 ‘제 손으로 보람차게 일하는 사람들’ 등골이 빠지도록 괴롭히면서 자기 주머니에 돈이 철철 흘러넘쳐도 아직 적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이웃과 나눌 줄을 모릅니다.

 미국땅에 살지 않더라도 ‘살갗 희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들볶습니다. 미국땅에 살더라도 ‘살갗 안 희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6)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


 북아메리카 토박이로 살던 수많은 겨레 가운데 하나였던 ‘야히 겨레’는 이제 이 지구에 없습니다. 지구에서 사라진 수많은 목숨붙이마냥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지구에서 사라진 숱한 목숨붙이처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남고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야히 겨레’였던 ‘이시’는 틀림없이 자기 씨앗을 남겨서 자기가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지구에서 마지막 삶이 되었던 온갖 목숨붙이들도 어렵사리 자기 씨앗을 남겨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야히 겨레는 스스로 자연 품에 안기며 조용히 흙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더는 ‘들짐승’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깨달은 목숨붙이들도 ‘동물원 구경거리’나 ‘실험실 연구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이 지구를 떠나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우리를 찾아낼 때까지 끝까지 찾아다닐 거야. 야히 족의 마지막 마을 마지막 한 사람을 없애버릴 때까지 단념하지 않을 거다. 이제까지 다른 마을, 다른 야히 족에게 했듯이.” ..  (27쪽)


 한국이라는 나라에 미친 소고기를 팔려고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미친 소고기 하나로 끝내지 않습니다. 미친 소고기에 앞서 수많은 물건을 억척스럽게 한국에 팔아 왔습니다. 그동안 적잖은 한국사람들은 이에 맞서며 반대를 했지만, 여태껏 어떤 반대 움직임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뭘 팔아서 돈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이 생각이 죄 이루어집니다. 이런 장삿속이 한국사람과 한국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이런 장삿속에 따라서 콩고물을 얻는 한국사람 또한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도권 교육이 입시지옥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한다고 하지만 조금도 고쳐지지 않는 까닭은, 아무리 입시가 지옥이라고 해도 대학교가 졸업장 따서 대기업 면접 볼 때 적는 훈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나와 이웃이 모두 살아남자면, 아니 모두 오붓하게 살자면 입시지옥을 한칼에 걷어치우고 제도권교육도 한달음에 치워버리면 될 터이나, ‘내 앞가림이 우리 앞가림’보다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콩 한 알 함께 나누어 먹기보다는 혼자 먹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콩 한 알을 심어서 백 알을 거두어 더 즐겁게 나누어 먹자는 생각을 안 하고, 이 콩 한 알을 혼자 냠냠짭짭해서 혼자서 끝내고 싶기 때문이구나 싶습니다.





.. 그들은 망설임 없이 떠났다. 미련을 두고 아쉬워하고 눈물 흘리며, 남겨 두고 가는 모든 것의 슬프고 즐거운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  (151쪽)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국이든 두국이든 세국이든, 사람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니 한 번 죽습니다. 태어나서 사는 동안 1분 동안 숨을 못 쉬어도 꼴까닥 하고 뒈집니다. 며칠 물 안 마시면 말라비틀어 돌아가십니다. 햇볕 안 쬐고 살면 오래지 않아 병들어 몸이 망가집니다. 우리는 돈이 중요한 곳에서 사는 한편, ‘똑같은 자연 목숨붙이’로 살아갑니다. 밥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물 안 마시고 살 수 있습니까. 말 안 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사람 도움 안 받고 혼자서 땅 파서 기름 뽑고 누에 키워서 실 뽑고 잣고 옷 해서 입을 수 있습니까, 뭐를 할 수 있습니까. 돈도 틀림없이 있어야 할 터이지만, 돈 아닌 다른 중요한 대목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돈만 아는 이 나라에서, 돈 아니면 딸아들한테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 이 나라에서, 돈 없으면 개떡도 아닌 똥떡도 아닌 빙신떡으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사람으로 얻은 고마운 목숨을 잘 간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고, 내 이웃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임을 깨닫는 이들이, 얼마나 애틋하고 곱게 제 뜻과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사루도의 신들, 사루도의 영웅들은 야히 족으로선 잘 모르겠어요. 사루도의 신들이나 영웅은 주프카 신이나 카르츠나 신이나 야히 족의 영웅보다 똑똑해요. 훨씬 똑똑해요. 사루도의 신들은 사루도에게 수레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장을 만드는 튼튼한 무쇠와 강철을 주었어요. 숱은 좋은 것들을 주었어요. 그렇지만 사루도의 신들은 사루도가 지혜롭게 살도록 바라지는 않았던 듯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사루도가 따라야 할 분명한 ‘생활 방법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  (289쪽)





 ‘살갗 흰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살갗 누런 사람’인 야히 겨레를 죄다 죽였습니다. 아주 끔찍하게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그이 ‘살갗 누런 사람’들이 쓰던 물건도 빼앗아서 기념품으로 삼고 유물로 삼고 박물관도 짓습니다.

 살갗이 처음부터 하얗지 않던 그네들이, 어느 때부터 살갗이 희게 되면서 누리는 단맛을 알게 된 뒤부터, 혀가 굳어서 단맛 아니고는 못 느끼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한국땅에서 살아간다는 ‘살갗 누렇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살갗 흰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세상 모든 힘과 이름과 돈을 ‘살갗 하얗게 된 사람’이 거머쥡니다. 처음부터 살갗이 누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흙과 같은 살빛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하얗게 안 되려는 놈들은 빨갱이로구만’ 하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저는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살고 싶습니다. 내 땅을 내 맨발로 밟으면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물로 목을 축이는 가운데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땅에서 난 곡식과 열매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4341.7.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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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랑


 사람들이 골목길을 찾아와서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저도 골목길 사진을 찍지만, 저는 ‘골목에 깃든 집에 살면서 내 삶터를 찍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로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은 ‘골목길에 안 살면서 골목길을 사진 작품으로 담아내는 사람’이곤 합니다. 어릴 적에 골목집에서 살아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으나, 골목길이라는 데를 처음 거닐고 처음 찍어 보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 사진을 찍거나 헌책방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예전에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헌책방 여러 곳을 꾸준히 찾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거의 처음으로 찾아와 본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 본 사람’이기 일쑤였습니다.


.. “투시는 단부사(귀여운)한 좋은 아이예요. 귀엽고 얌전하고.” “저보다 키가 큰 오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보시오, 뺨이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빨개졌소.” 투시가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생각했다. (할머니께서 보기 좋게 앉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이 아이는 마치 갈색 꽃잎이 펴진 것처럼 치맛자락을 잘 여미고 앉는구나.) ..  (21쪽)


 지난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낸 사람들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낯을 찌푸리기 일쑤였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습니다. 헌책방을 즐겨찾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진 찍는 사람도 제법 있는데, 이분들은 어인 일인지 그렇게 즐겨찾는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궁금함은 오래지 않아 풀렸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헌책방에 가면 책 보느라 바쁘지, 사진 찍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니, 언제 이렇게 사진을 다 찍었어요?’ 하는 책손님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헌책방 찍은 사진이나, 단골 아저씨 찍은 사진을 선물 삼아서 가끔 뽑아서 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은 헌책방에서 책 보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어느 틈을 내어 이런 사진을 다 찍었을까?’ 하고 물으셨구나 싶더군요.


.. “(팔찌를) 끼면 좋을 텐데.” “아니야, 끼는 건 싫어!” “어째서 싫지? 너희 둘은 진흙으로 단단히 바른 집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살기로 되어 있었는데…….” 투시는 마치 이시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그의 어머니처럼, 아니 할머니처럼 철들고 지혜에 가득 찬 눈길로 사촌오빠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노인네들의 꿈이야. 내 꿈은 그것과는 다르고, 이 헛된 세계와도 아무 상관이 없어. 우리는 영웅도 아니거니와 신들도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시작되던 때와는 달라. 우리는 텅 빈 이 세상을 메꿔 줄 만한, 사루도를 해치울 만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슈와, 슈와(그야 그렇지). 흰 조가비 아가씨! 그런데 네 꿈은 어떤 꿈이지?” “여자의 꿈이지 뭐.” “남자에게 말하면 안 되나?” “안 되지는 않아. 얘기할께요. 오빠가 나에게 ‘흰 조가비 아까시’라는 이름을 주었고, 내 꿈도 ‘흰 꿈’이니까요.” 따뜻한 봄햇살이 쏟아지는 토끼풀 위에 앉아서 투시는 이야기했다 ..  (142쪽)


 사진찍기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자기가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지없이 아끼는 대상이 아니라면 사진에 담을 수 없다고. 자기가 오래도록 몸담고 같이 살지 않고서는 속내를 읽어내는 사진을 얻을 수 없다고. ‘꾸준히’라는 말로만은 안 되고, ‘늘 같이 언제까지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진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작품이 저절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제가 사는 동네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 작품이 영 내키지 않던 까닭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갑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 이름을 내세울 작품’을 넘는 사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찍는 사람이나 대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진으로 뻗어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발디딘 땅’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함께하는 사진이 아니라, ‘여태껏 겪거나 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 재미있거나 놀라워서’ 그냥 한 번 찍어 본 사진이었습니다.


.. “그렇지. 작은 흰 조가비 아가씨. 우리는 마지막 야히 족이야.” 외사촌 남매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벙긋 웃었다. (나이로 보면 투시는 이미 젊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여동생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투시의 뺨은 지금도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붉다. 머리카락은 길고 반지르르 윤이 흐른다. 전에 할머니가 둘둘 감아서 빗어올렸던 것처럼. 투시는 야히 족 여자답게 의젓하고 반듯한 자세로 가볍게 걷는다. 지금도 투시는 메추라기 소리처럼 정겹게 시가가 시가가 하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가 워누포에서 나갈 때면 투시도 언제나 나를 따라온다. 내가 사냥할 때 투시는 언덕 너머에서 여자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함께 도토리며 땔나무를 모은다.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날마다 함께 계획을 세운다. 투시는 날마다의 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채워 준다.) 투시는 투시대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 사촌오빠 와나시는 야히 족의 사냥꾼 관습에 따라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감아올려 묶었던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겨우 뛸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이 오빠 뒤를 따라 어디든지 갔었지. 이 와나시가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내 나날은 이 와나시가 채워 준다. 요즈음에는 ‘흰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  (167∼168쪽)


 어제 서울 나들이를 자전거로 하면서, 용산역부터 종로거리와 서대문을 돌고 용산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시청 앞 너른터는 일찌감치 빽빽이 들어선 전경차들이 빙 두르고 있더군요. 한 겹으로 둘렀는데 이로도 모자라는지 더 두르려 하고, 길을 걷는 사람 모두를 막아섭니다. 시청 앞 너른터로 가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촛불모임을 하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못 가게 막아섭니다. 전경들은 사람들한테 아무런 대꾸도 않습니다. 그저 모두한테 길을 막을 뿐입니다. ‘군인정신’일까요. ‘시키니까 따를 뿐’일까요. 군인한테 웃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대장이나 소대장이나 중대장일까요, 군인이라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일까요.


.. (슈(물론), 나는 투시를 위해 팔찌를 만들 수는 없지. 투시는 진짜 내 누이동생과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투시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의 친구. 내 단부사 아가씨지!) ..  (181쪽)


 종로3가에서 볼일을 마친 다음, 독립문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렀다가 용산으로 가는 동안,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달렸습니다. 숙대입구역부터 용산역 앞까지는 거의 꼼짝도 못하는 자동차들입니다. 저는 평균빠르기 20킬로미터 안팎으로 자전거를 내처 달립니다. 자전거가 훨씬 빠를밖에 없지만, 걷는 사람이 버스나 자가용 탄 사람보다도 훨씬 빠르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막히는 서울 시내에서 자가용을 버리지 않습니다. 좀 멀리 가는 분은 어쩔 수 없을 터이나, 버스도 버리고 두 다리로 걸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울 시내는 걷기에도 그다지 안 좋다고 하지만, 걷기에 안 좋다고 해도 자꾸 안 걸으려고 하니까 더 나빠진다고 느낍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나쁜 찻길이라고 해도 자꾸자꾸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 주고, 또 ‘발바리’ 같은 자전거 행사를 꾸준히 하면서 우리 스스로 느껴야 비로소 ‘자전거로 다닐 터전’이 나아집니다.


.. (투시의 낮은 ‘풀숲의 속삭임’을 듣고 싶다.) 이시는 간절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와르가 한순간, 언뜻 투시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시는 풀숲 속을 걸어가는 자기의 바로 뒤에서 소리도 없이 따라오는 투시의 기척을 애타게 느끼고 싶었다. 잠깐 뒤돌아보았을 때 투시의 웃는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  (267쪽)


 촛불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뜻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촛불모임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이렇게 애쓰고 스스로 삶을 바꾸고 생각을 고치며 매무새를 조금씩 야무지게 다스리는 동안 자기부터 거듭납니다. 자기부터 거듭날 때 자기 삶이 거듭나고, 자기 삶이 거듭나면 자기와 이웃한 사람들한테 좋게 영향을 끼쳐서 서로서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몸에 좋은 밥을 찾아서 먹어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애써서 찾아 읽어요.


 (4) 죽음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들 사랑은 ‘우리 자신’도 아니요, ‘우리 삶터’도 아니요, ‘우리 삶’도 아닌 쪽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자꾸만 ‘돈 사랑’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 할아버지는, 앓지는 않았지만 그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이미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마디마디가 아파도 그러한 아픔을 없애 줄 만한 쿠이(의사)는 없었다 …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워누포로 오는 여행은 내 마지막 여행이었다. 다시 여행을 하기에는 나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 여름의 심한 더위가 골짜기를 덮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그다지 울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가 버린 뒤로는 아침마다 더욱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공기가 하루하루 무거워지는구나. 나는 이제 공기를 입까지 들어올릴 기운도 없는 것 같다. 용한 쿠이가 있어 가벼운 공기를 불어넣어 주면 좋겠다.”  … 바구니에 차를 담아 들여온 어머니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보고 할머니는 옛날처럼 그 머리에 손을 놓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 때문에 우는 걸 그만두어라, 내 딸아. 내가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은 이제 너도 아니고 투시도 아니지. 나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가 버린 할아범이야.” ..  (160∼161쪽)


 돈은 있어야 할 테지요. 돈은 벌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무엇을 하는 돈인가 생각해 보았습니까. 어디에 쓸 돈인가 헤아려 보았습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쓸 돈인가 살펴보셨습니까.

 자동차를 몰아야 할 돈입니까. 집을 사야 하는 돈입니까. 새 손전화를 사야 하는 돈입니까.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떠나야 하는 돈입니까. 사랑이한테 선물을 사 주어야 하는 돈입니까. 땅투기를 해야 하는 돈입니까. 멋스럽게 보일 옷을 살 돈입니까.

 기름값이 끝없이 치솟는 데에도 자동차를 굳이 몰아야 한다면, 또 값이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수억까지 하는 자동차를 굳이 사야 한다면, 그러면서 보험값 내고 뭐 치르고 해야 한다면, 돈이 꽤 많이 들겠지요. 집을 사야 한다면, 그런데 이 집도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여야 한다면, 넓이도 좀 되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십 억으로도 모자랄 테지요.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하는 쓰임새가 아니라 이 기능 저 기능 달린 수십만 원짜리 새 기계를 쓰고 싶어도 돈은 참 많이 듭니다. 멀리멀리 오래오래 나들이를 하고프니 돈이 퍽 들겠네요. 선물을 손수 안 만들고 백화점 같은 데에서 돈으로 사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요. 그리고 …….


..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워누포의 할머니 할아버지군요.” … 큰아버지는 그 지팡이를 쓰는 자신을 ‘늙다리 네발짐승’이니 ‘오소리’니 하고 불렀다. “할머니가 곧잘 그랬는데, 내게도 공기가 무거워졌구나.” ..  (173쪽)


 돈을 사랑하는 분들은, 언뜻 보기에 ‘사랑’ 같지만, 속을 보면 사랑이 아닌 ‘죽음’이라고 느껴집니다. 살려고 버는 돈이 아니라 죽으려고 버는 돈 같습니다. 즐겁게 살고자 찾는 일자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망가뜨리며 빨리빨리 늙어버리려는 일자리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삶을 아름답게 여미지 못할 뿐더러, 그 돈푼조각으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고, 써도 써도 시원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쓸 만큼 벌면 되는데, ‘쓸 만큼’이 어느 만큼인지 헤아리고들 있는가요. 가질 만큼 벌면 되는데, ‘가질 만큼’이 어디까지인지 느끼고 있는가요.

 더 많은 책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새로 나오는 책을 자꾸자꾸 읽어야 하겠어요? 아니지요. 읽으니 좋아서 자꾸 읽는 책이지요. 자꾸자꾸 벌어야 하는 돈은 무슨 뜻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벌어야 하는지요?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다 함께 살려고, 아름답게 살려고 버는 돈이 맞습니까.


.. “오늘은 강 건너에 가지 않느냐? 이제 곧 어둡겠구나.” 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겠어요. 가 봐야 찾지 못할 텐데요.” 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는 거겠지, 와나시. 그렇지 않다면 벌써 찾아냈을 테니까.” 이시가 옆으로 다가가자 어머니는 두 팔로 아들을 감싸안았다. 어머니와 아들은 얼싸안고 울었다. 여러 달 동안, 참고 참아 온 쓸쓸함과 슬픔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허물어져, 그들은 목놓아 울었다. 눈물 속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둘은 큰아버지에 대해, 투시에 대해, 또다시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다만 이름은 말하지 않고 ‘없어진 사람들’이라고만 했다 ..  (200쪽)


 누구나 한 번 태어났으니, 한 번 죽습니다. 삶과 매한가지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때, 자기한테 가장 좋으며 걸맞으며 마땅한 길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삶이 즐거워야 죽음이 즐겁고, 죽음을 넉넉히 받아들여야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까를 짚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이 일흔 여든 아흔이 되어도 ‘난 안 죽어’ 하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삶다울 수 없어요. 백 살에 죽을 수 있고 일흔 살에 죽을 수 있으며 쉰 살에 죽을 수 있는 한편, 서른이 못 되어 죽을 수 있습니다. 열다섯에도 죽고 일곱에도 죽습니다. 죽음이란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바로 오늘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 언제라도 ‘내 마지막 날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삶을 추스르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떠날 생각으로 허튼 아쉬움이나 궂긴 욕심이 아닌, 지금 내 삶을 가장 알뜰하게 돌보며 북돋울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기에 나 혼자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으면서, 나한테 한 조각 있는 콩마저도 반으로 갈라서 이웃하고 나눕니다.


..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는 않았지만 아궁이의 불이 눈둑에 반사되어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입술은 야히 족 여자답게 꼭 다물고 배시시 웃음짓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한 손을 뺨에 살짝 댄 채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그 손목에 어머니가 언제나 보물꾸러미 속에 소중하게 넣어 두는 낡아빠진 그 향모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잠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테헤나 이시에게 아무도 모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어머니는 이시의 아버지에게로 길을 떠난 것이었다 ..  (202쪽)


 돈을 내쳐야 하는 삶이 아니라, 돈에 매이는 마음을 내쳐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끌어들이는 삶이 아니라, 돈이 고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다스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돈에 밴 손때와 피땀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으뜸으로 삼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들이 손가락질하던 독재자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내 삶을 잃고 내 이웃을 잃고 내 동무와 살붙이 모두를 잃고 외돌토리가 됩니다. 돈에 넋이 나가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건 전쟁무기 만드는 과학기술을 키우건 전쟁무기 손에 들고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으로 일하건, 모두 다 똑같은 학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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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을 이야기하면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글을 나누어 올립니다. 짤막하게 소개글만 띄울 수 있습니다만, 이 책 《마지막 인디언》은 깊이깊이 살피면서 제 삶으로 받아들인 뒤, 이렇게 조금 긴 이야기로 풀어내어서 들려줄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느낍니다. 한국땅 비평가나 평론가 눈에는 그리 대단한 작품으로 눈에 뜨인 적이 없는 작품이었구나 싶지만, 여태껏 나온 어느 문학보다도 손꼽히면서 훌륭하다고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띄웁니다.)

①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못 배운 우리들
② 사랑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학살자’요 ‘독재자’
③ 평화로운 ‘야히 겨레’를 죽인 흰둥이


 이 책 하나 57 ― 평화로운 ‘야히 겨레’를 죽인 흰둥이
 : 디오도러 크로버, 《마지막 인디언》



- 책이름 : 마지막 인디언
- 글쓴이 : 디오도러 크로버(알프레드 루이 크로버)
- 옮긴이 : 김문해
- 펴낸곳 : 동서문화사(1982.9.1.)





 (1) 삶


 어제, 《수호의 하얀 말》(한림출판사,2001)이라는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에도 보았으나, 그때에는 시큰둥해 하면서 지나쳤습니다. 그러고서 일곱 해가 지난 뒤 다시 이 그림책을 넘겨보게 되면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일곱 해 사이에 내 마음에서 무엇인가 자라나서 이 책을 알아보게 된 셈인가? 아니면, 이제 내 마음도 무엇엔가 눈을 떴는가? 아니면, 내가 책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는가?

 그림책 《수호의 하얀 말》은 일본사람 아카바 수에키치 님이 그렸습니다. 그린이는 1910년에 태어나 1932년에 만주로 건너갔다가 1947년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1961년부터 그림책을 그렸으며, 《수호의 하얀 말》은 1967년에 그렸다고 합니다. 이 책이 2001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마흔한 해를 묵은 《수호의 하얀 말》이며, 이 그림책을 그린 분도 그때 쉰일곱이라는 나이였습니다.


.. “큰아버지, 어째서 우리에게는 사냥을 하기 위한 활밖에 없을까요? 어째서 적과 싸우기 위한 활, 적을 노리는 활이 없을까요?” … “주프카 신과 카르츠나 신은 의논하여 야히 족에게는 사냥하는 데 쓰는 무기만을 주기로 하고, 서로서로, 또는 이웃사람과도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로 했단다.” ..  (79∼81쪽)


 책 하나에 오롯이 삶을 담아내자면 이만한 세월이 걸릴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젊은 나이에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촛불처럼 금세 꺼져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오래오래 살아남으며 숱한 사람을 부대끼고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곰삭인 다음, 단출한 붓질로 책 하나 여미어 내게 되는가 싶기도 합니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아니, 나이보다는 철이 없으니까 주절주절 길디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느냐 싶습니다.

 듣는 사람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읽는 사람이 하품을 하지 않도록, 듣는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눈을 반짝일 수 있도록, 읽는 사람이 앉음새를 고치고 눈에 힘을 줄 수 있도록 엮어나가는 이야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이라는 시간보다도, 얼마나 땀을 바치고 마음을 쏟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 마침내 소리도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베어 낼 수 있었다. 그들이 쓴 도구라면 돌과 흑요석 줄, 그리고 칼뿐이었다. 도끼로 찍어 넘어뜨리는 편이 손쉽고 재빠르며 훨씬 편했겠지만, 할아버지가 언제나 말했듯이 나무를 베는 소리가 나는 곳에는 언제나 반드시 사람이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야히 족뿐만 아니라 사루도(백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저장용 튼튼한 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 뿌리를 캤고, 밧줄이나 끈으로 만들기 위해 삼이나 덩굴풀을 끊었고, 어머니가 죽을 끓이는 바구니 그릇에 담은 물이 새지 않도록 바구니 틈에 바를 송진을 모았다. 바삐 움직여 다니는 새도 짐승도 재잘거리는 소년과 소녀에게 조금도 마음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둘은 그대로 그 풀숲 세계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  (28∼29, 31쪽)


 예전에는 그냥저냥 책을 읽었습니다. 좋다고 하는 책이니 읽고,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책이니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몇 살이었고 그동안 무엇을 겪었는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책을 엮은 사람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해 왔는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책을 읽기 앞서, 글쓴이나 그린이나 찍은이 나이를 살피고 발자취를 훑고 배우거나 한 일을 알아봅니다. 어느 땅 어느 일터에 몸을 담았으며, 어느 곳 어느 사람하고 어울리고 있었는가를 헤아립니다. 집안에 들여서 키우는 꽃인지, 들판에서 자라는 꽃인지, 도심지 골목길에서 시멘트를 뚫고 자란 꽃인지, 꽃집에서 돈으로 사고파는 꽃인지를 찬찬히 곱씹습니다. 자란 터전과 겪어 온 모두가 고루 섞이면서 책 하나로 담기기 때문임을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 “야히 족 사냥꾼이 손에 잡는 무기는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큰아버지, 미치지 않은 참된 사루도는 어째서 미친 사람들의 잔인한 짓을 못하게 말리지 않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이시. 아무래도 나는 사루도를 이해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어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린 채로 있지는 않겠지. 아마도 사루도들은 노인들로부터 좋은 ‘삶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사막을 넘는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노인들의 가르침을 잊고 말았거나.” ..  (73∼74쪽)


 요즈음, 김수정 님 만화책을 하나하나 다시 끄집어내어 읽고 있습니다. 한 해에 한 번쯤 꼭 처음부터 끝까지 스무 권 남짓 되는 김수정 님 만화전집을 통째로 다시 보곤 하는데, 해마다 다시 넘기면서 해마다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보는 저부터 지난해와 올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그러께하고 지난해도 다릅니다. 제가 끄적인 글을 뒤적여 보아도, 2006년에 쓴 글하고 2007년에 쓴 글은 눈높이가 다릅니다. 2007년에 쓴 글과 2008년에 쓴 글도 높낮이가 다릅니다. 2005년이나 2004년에 쓴 글은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2009년이 되면 2008년에 쓰는 이 글도 남우세스럽다고 여길 테지요.

 그러나 이런 느낌은 자연스러움이라고 봅니다. 자기 삶이 한 자리에 머문다면 모르되, 자기 삶이 발돋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모르되, 자기 삶을 가꾸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모르되, 날마다 부지런히 부대끼고 읽고 느끼고 곰삭이고 되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과 내일이 다를 뿐더러 아침과 저녁도 다릅니다. 지난해에 읽은 책에서 본 대목을 올해 다시 읽으며 느끼는 일이란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께 읽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대목을, 이듬해에 새로 읽을 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일 또한 마땅한 노릇입니다.


.. 둘은 사슴의 염통과 내장을 파란 나뭇잎에 싸서 바구니에 넣었다. 살코기 조각과 뼈다귀는 벗긴 가죽에 싸서 밧줄로 묶었다. 작업이 완전히 끝나자 새로운 흙과 돌, 그리고 나뭇잎을 더러워진 땅에 흐트러뜨려 놓았다. 사슴을 죽여서 처치한 흔적은 이렇게 해서 깜쪽같이 감추어져 버렸다 ..  (94쪽)


 디오도러 크로버 님이 쓴 《마지막 인디언》을 올봄에 헌책방에서 만나며 집어들어 펼칠 때에도 이러한 ‘세월 냄새’를 느꼈습니다. 이분이 쓴 ‘인류학 보고서’인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창작과비평사,1981)라는 책은 진작부터 사서 가지고 있었으며, 처음 사서 읽던 1990년대에는 얼마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만. 또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처음 나올 때 퍽 눈길을 끌었고(예전 잡지 기사를 찾아 읽으며 알게 됨), 헌책방 나들이를 하노라면 이 책은 어김없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손을 뻗어 사들이지는 않아 왔습니다. 미국 흰둥이들 저희가 북미 토박이를 깡그리 끔찍하게 죽여 놓고서는, 무슨 ‘마지막’ 어쩌고 지랄을 하고, ‘석기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함부로 갖다 붙이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일찍 이 책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동서문화사 에이브문고’를 한 권도 사 주지 않았기에 어릴 적에 이 책을 읽을 수도 없을 테지만, ‘동서문화사 에이브문고’는 헌책방에 꽤나 많이 들어오고 나가는 책이었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또 조금만 더 마음을 기울여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펼치고, 어설픈 번역을 꾹 참아 가면서 읽었다면, 적어도 열 해쯤 앞서는 이 책 《마지막 인디언》을 헌책방에서 캐내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읽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투시는 키가 이시의 어깨까지밖에 닿지 않았고 가냘팠으며 손발도 이시의 어머니처럼 아주 작았다. 그러나 투시 또한 어머니를 닮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힘이 있었고, 어떻게 하면 무거운 짐을 잘 질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 “할머니가 투시에게 옛날 얘기를 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 그렇지만 투시는 어린 소나무하고 같아요. 큰나무 그늘에서 자랐지만 이제는 자기 둘레에 조금씩 넉넉한 땅을 만들어 버젓하게 혼자 서 있을 수 있어요.” ..  (149∼150쪽)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인류학 보고서’입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퍽 딱딱할 뿐더러 그다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펼치면 또 다른 맛과 느낌이 있을 테고, 《마지막 인디언》을 세 번 읽어냈기에, 마음으로 그려 가면서 이야기를 짜맞추어 나가리라 봅니다.

 《마지막 인디언》은 ‘이야기책’입니다. 동서문화사에서는 어린이책으로 펴냈습니다만, 이 책은 어린이책이라기보다는 ‘실제 이야기에 바탕을 둔 문학’이라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알프레드 루이 크로버’ 박사가 ‘야히 겨레’가 쓰는 말을 하나씩 익히면서 ‘테헤나 이시’라는, 마지막으로 남은 야히 겨레와 살가운 동무로 지내면서 얻고 듣고 배운 야히 겨레 문화를, 옆에서 남편을 지켜보며 함께 자료를 갈무리하던 ‘디오도러 크로버’ 님이, 한 번은 보고서로 한 번은 이야기책으로 묶은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이시는 살붙이도 사랑스러운 님도 없는 외톨이로 쓸쓸하게 죽어야 했지만, 자기 마음을 살붙이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감싸 주는 ‘사루도(흰둥이)’를 만나서 기꺼이 야히 겨레 삶과 발자취를 이야기해 주는 한편 몸으로 보여주었고, 이 모든 이야기와 자료와 사진이 모여서 한국땅에는 두 권으로 번역이 된(미국에는 더 많은 책이 있을지 모릅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가 1981년에, 《마지막 인디언》은 1982년에 소개되면서, 야히 겨레는 사라졌어도 책으로 목숨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2) 자연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옆지기가 묻습니다. “오늘 계속 비가 올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4층 옥탑집에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우리 집에서 30미터쯤 앞에 있는 8층짜리 건물에 막혀서 하늘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옥상마당으로 나가야 비로소 하늘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날씨가 어떤 줄 알려면, 먼저 바람결을 느끼며 바람 무게와 냄새와 맛 들을 살갗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늘가를 멀리 내다보면서 구름 움직임과 빛깔과 크기 들을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비죽비죽 솟은 높은 아파트에 막혀서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고, 하늘가는 구경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나마 우리 살림집이 옥탑방 집이니 다른 집보다는 낫다고 할 테지만.


.. “너는 내 비밀을 알겠구나. 그렇지 동생아. 너도 ‘괴물(기차)’을 보았니?” 카르츠나(도마뱀)는 이시가 풀잎 끝으로 녹색 머리에서부터 비늘에 덮인 등을 살살 간지르자 기분이 좋아서 눈을 스르르 감고 가만히 있었다 ..  (16쪽)


 엊저녁 잠깐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에 다녀왔습니다. 바람을 쐬려고. 헌책방에서 책을 보는 동안, 헌책방 한켠에 틀어져 있는 라디오에서는 ‘정부가 경기 부양을 한다면서 부동산 양도세를 완화하려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이야기로 대학교수 여러 분이 나와서 토론을 합니다. 부동산세를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분들은 한결같이 ‘거래가 활성화되어야 경제가 산다’는 말을 합니다. 어느 분은 ‘도시 미관상 보기 나쁜 집을 헐고, 또 요즘 사람들 높아진 생활수준에 맞게 최신 수준으로 다시 지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라디오 소리가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이 목소리 높여 싸우듯 주고받는 이야기를 한귀로 흘리면서, ‘최신식으로 새로 지은 아파트’라고 해 보아야, 열 해만 지나도 ‘낡은 집’이 되어 버리지 않겠느냐고 묻고픈 마음이 굴뚝처럼 솟았습니다. 디지털사진기도, 컴퓨터도, 손전화도, 한 해가 아니라 몇 달 만에 훨씬 나은 기종이 나오는 판에, ‘최신 시설을 갖춘 아파트’에서 ‘최신’이란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겁고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은, 그 물질과 물건밖에는 없는지. 기름값이 끝간 데 없이 치솟는다고 하는 걱정어린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 영향도 못 끼치는지.


.. 둘이서 풀밭 끝 나무 뒤에 몸을 숨기자 이시는 마도로냐잎을 한 잎 따서 입술에 대고 아기토끼처럼 끼익끼익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한편 투시는 ‘시가가 시가가’ 하고 부르고 있었다. 이시의 목소리가 아기토끼 소리에서 엄마여우를 찾는 아기여우의 응석부리는 소리로 바뀌자 투시도 지지 않고 ‘까욱 까욱’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풀밭은 한참 동안 조용해졌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아기토끼의 끼익끼익 소리, 아기여우의 울음소리, 메추라기와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 이시가 응석부리는 듯한 아기사슴의 울음소리를 되풀이하자 거기에 대답하는 것처럼 수사슴이 후후 후후 소리를 질렀다. 또 조금 지나자 사슴 세 마리와 토끼 네 마리가 나타나 아기토끼와 아기사슴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  (36∼37쪽)


 우리한테 집이란 뚝딱뚝딱 금세 짓고 금세 허무는 보금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집이며, 허물면 곧바로 흙으로 돌아가 썩어서 거름이 되는 집이었습니다. 집을 허물 때 나오는 부스러기 가운데 쓰레기란 없고, 모두 땅으로 돌아갔지요. 땅에서 와서 땅으로.

 오늘날 집은 조금도 땅에서 오지 않으며,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모두 쓰레기입니다. 박정희 씨가 ‘새마을운동’을 앞장세워서 ‘오랫동안 걱정없이 버티어 오던 집’을 ‘낡았다’는 까닭 하나만으로 죄 허물어뜨리고 시멘트로 올려세우고부터는 ‘집은 보금자리가 아닌 돈굴리기’가 되어 버렸지만. 더구나, 새마을운동 때부터 하나둘 늘어난 시멘트집들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며 살아갈 만한 터전이 못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 집이었습니다. 아파트라는 집도 ‘죽는 날까지 살며 딸아들한테 물려주어 살게 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몇 해 묵히면 부쩍 오른 집값을 챙기면서 ‘가만히 앉아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면서, 집이 없는 사람들 등골을 뽑아먹는 ‘집 있는 이들 투기판’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 이시는 토끼를 땅에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겠지. 사냥꾼에게는 잡을 수 있는 한, 어떤 짐승이든 집으로 가져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짐승을 살려 주어야겠다. 이 녀석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나에게로 왔다. 나에게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77쪽)


 ‘살’ 집이 아닌 ‘돈벌’ 집이니까, 이러한 집에서 사는 사람 스스로 자기 집을 가꾸지 않습니다. 가꿀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만큼 살다가 ‘새로 짓는 다른 아파트’로 옮기면 그만입니다. 옮기는 데 드는 돈은 ‘그동안 올라간 집값’ 가운데 얼마쯤 떼어내면 되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이삿짐 집에서 날라다 주니 근심조차 없습니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삶이며, 바람을 느끼지 않는 삶인 가운데, 물도 햇볕도 없는 삶입니다. 우리 몸에는 날씨를 느끼는 감각이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이 감각을 버리고는 텔레비전 날씨방송에 귀를 기울입니다. 두꺼비와 개미만 날씨 바뀜을 느끼지 않고 사람몸도 날씨 바뀜을 느끼건만, 우리한테는 ‘삶’이 아닌 ‘돈’이 맨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고부터는, 우리 스스로 ‘목숨붙이’임도 잊어버립니다.


.. 나무숲 깊숙한 곳에서 따온 버섯은 희고 야들야들했다. 하루 또 하루 따뜻해짐에 따라서 갖가지 풀 열매가 차례로 열리기 시작했다. 저마다 한창일 때 따다가 그대로 또는 말려서 먹는 것도 봄에 맛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 골짜기가 아궁이처럼 확확 달고, 밤새껏 바람도 없이 찌는 듯 더워도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무서운 더위 또한 산다는 것의 한 부분이었다 ..  (96∼97쪽)


 낯선 가게에 들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이분들은 으레 제 신발을 먼저 봅니다. 벌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차림을 다 훑었는지, “왜 고무신을 신어요? 그것도 깜장고무신을?” 하고 묻습니다. “흰고무신이 낫지 않아요? 깨끗하고?” 하고도 묻습니다.

 저는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빙그레 웃습니다. 폭신한 운동신에 발이 길들고, 딱딱한 구두에 발이 맞추어진 사람한테, 얇디얇은 고무 한 겹 밑으로 땅바닥을 느끼게 되는 고무신을 신는 까닭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들려준들 마음에 새겨 주지 않습니다.

 새 고무신을 신으면 보름쯤 뒷꿈치와 발등이 까집니다. 더운 날 골목을 걸으면 발바닥이 뜨겁습니다. 산을 타거나 들을 거닐 때는 느낌이 좋지만. 그러나 가장 좋을 때는 맨발입니다. 맨발로 걸어야 비로소 땅기운이 몸으로 스미고, 땅내음이 몸에 퍼집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맨발로는 다닐 수 없어서 고무신이라도 신을 뿐입니다.


.. 그 잣나무 밑 빈터에는 메추라기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오곤 했다. 솜톨이 보송보송한 새끼는 어머니의 다리 위를 겁도 없이 뛰어다녔다. 어머니가 뿌려 주는 도토리가루빵 부스러기를 쪼아먹으려고 검은방울새도 왔다. 어머니는 또 저장움막 지붕에서 1년 내내 둥우리를 짓고 있는 올빼미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  (172∼173쪽)


 오늘날 햇볕은 오존이 얇아지거나 없어지면서 바로 쐬면 나쁘다고 하지만, 형광등 불빛이나 셈틀 화면 불빛보다는 한결 좋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글을 쓰다가 잠깐 쉬면서 화면을 끄고 있으면 눈이며 몸이며 머리며 시원하다는 느낌이 드는 한편 차분해집니다. 어두워서 불을 켜고 있다가도 불을 끄면, 그때부터 몸이 아늑함을 찾습니다. 요 며칠 앞서 모처럼 해가 났기에 한낮에 두어 시간 골목마실을 했더니 살갗이 빨갛게 탔더군요. 내내 밖에서 일하는 분은 살갗이 타다가 익다가 까맣게 되겠구나 싶습니다.

 먼 옛날이 아닌 가까운 지난날까지, 한국사람은 누구나 까무잡잡한 얼굴이었습니다. 얼굴 허연 사람은 몹시 드물었습니다. 새벽부터 깊은밤까지 시멘트집에 갇혀서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던 사람만 빼고는. 그런데 지금 보면, 햇볕을 쬘 일도 거의 없어진 판인데, 이 허여멀겋다 못해 파리한 살결을 더 하얗게 한다면서 화장품을 바르고 뭐를 하고 그렇습니다. 자전거 타는 분들도 살이 안 타게 한다면서 뭐를 걸치고 뭐를 바르고 합니다.


.. (옛날에는 많은 야히 족과 사슴이 여기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루도와 사루도의 가축만이 살찌고 있다. 사루도는 어디에나 있다 …… 너무 많다!) ..  (234쪽)


 우리 집 두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여러모로 생각과 말이 많았습니다. 지금 세상에 아이를 내놓는 일은 아이를 ‘넌 죽어라’ 하는 짓하고 다를 바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목숨이자 이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푼이라도 더 세금을 뽑아낼까 하고 생각하는 나라 정책입니다. 애틋하고 고마운 목숨이자 어린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제도권 지식을 더 많이 쑤셔넣어서 스스로 생각하며 슬기를 키워 나가는 사람이 못 되게 만들어 톱니바퀴나 기계로 부릴 수 있을까 하고 내모는 교육입니다. 반갑고 기쁜 목숨이자 이웃이 아니라, 돈돈돈 명예명예명예 권력권력권력에 따라서 이리 휘두르고 저리 몰아세우는 세상 흐름, 아니 이 나라 흐름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세상이니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 빛줄기가 되면서 살고, 우리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빛줄기가 되어서 살도록 힘써야 하지 않느냐 싶어서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 이시는 유칼리나무잎을 뜯어서 씹어 보고는, 쓰고 기름내 나는 이 잎은 사슴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시나 사루도는 이곳의 일을 잊고 있다. 네발짐승이나 새는 나무를 자기들과 똑같은 풀숲 속의 생물로 받아들여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의 새나 짐승은 총소리를 들은 일이 없는 것이다. 여기는 좋은 곳이다. 나 말고는 사람이 들어온 일이 없었을 것이다.) ..  (268쪽)


 제아무리 사람들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처발라 놓아도 고개를 내미는 풀입니다. 조그마한 땅뙈기요 흙도 한 줌밖에 없으나 뿌리를 뻗어 제법 큰 나무로 우거질 뿐더러 좋은 열매까지 내놓아 주는 나무들입니다. 골목길을 거닐며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들을 만나는 동안, 사람이나 자연이나 앞으로 살아가는 데까지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곧이어 2부를 띄웁니다. 좀 쉬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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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3 : 김수정 ② 귀여운 쪼꼬미



 엊그제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라는 책을 덮었습니다. 원자폭탄 피해자 2세 환우로 살다가 2005년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만 김형률 씨를 기리는 자그마한 책입니다. ‘원폭 2세 환우’. 사할린에 남아서 고향나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만큼이나, 외국사람이니 지문을 찍어야 한다는 차별법에 시달리는 ‘일본에 남은 한겨레’만큼이나, 자치주에서 풀렸고 자치문화도 나날이 무너지고 있는 중국 연길시 한겨레만큼이나, 이 땅 곳곳에서 ‘일한 대가나 보람이 아닌 푸대접과 괴롭힘’에 들볶이면서도 한국땅에서 돈버는 꿈을 품고 있는 이주노동자 못지않게 푸대접과 괴롭힘에 들볶이는 비정규직노동자만큼이나, 몸 어느 한 곳이 아프다는 까닭으로 어린 날부터 늙어 죽는 날까지 외롭고 힘들어야 하는 장애인들만큼이나 팍팍하고 모진 삶을 꾸려야 했던 사람들이 ‘원폭 2세 환우’입니다. 그나마 다른 ‘아픈이’는 왜 아픈 줄이나 알지만, 원폭 2세 환우는 아픈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성노예로 시달린 할머님들을 도우면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여기에 한국 정부 잘못을 꾸짖는 손길과 눈길이 모자라나마 있기는 해도, 일본에 억지로 끌려가 징용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들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애꿎게 원자폭탄을 맞아서 자기뿐 아니라 딸아들과 그 딸아들이 낳는 딸아들한테도 피해가 이어지는 현실을 놓고 무어라 따질 길이 없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 따돌림받지 않은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푸대접받지 않은 사람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는지요. 아프지 않으니 즐거운가요. 따돌림받지 않으니 신나는가요. 외롭지 않으니 시원한가요. 푸대접받지 않으니 홀가분한가요.


 김수정 님 만화 《귀여운 쪼꼬미》(서울문화사,1990)를 펼칩니다. 1989년에 〈아이큐 점프〉라는 주간만화잡지에 싣던 ‘어린이 성교육’ 만화입니다. “아마 여성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거나,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거야.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란다(157쪽).”


 만화쟁이 황미나 님도 성교육 만화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2003년에 《루나레나의 비밀편지》(동아일보사)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황미나 님은 책끝에 “처음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내가 늘 그려 오던 꿈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고 밝힙니다. 당신은 글을 써 준 교수님한테 ‘먼저 교육을 받고’ 성교육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동안, “나이든 저도 모르는 것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그나마 황미나 님은 부탁을 받아 만화를 그리게 되어서, 여태껏 모르거나 잘못 알던 일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낳아서 기르는 아이들은? 우리 둘레에서 늘 얼굴을 부대끼는 아이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거나 읽어내면서 자기 길을 걷는 우리들이온지요. 이웃과 아이들이 제 길을 아름답게 걷도록 돕거나 이끄는 우리들이온지요. 김수정 님은 “아니란다. 사람은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을) 한단다(78쪽).” 하고 말합니다만. (4341.6.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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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52 : 김수정 ① 일곱 개의 숟가락

 전국이 촛불모임으로 들끓고 있으나, 제가 사는 인천에서는 촛불이 아주 조그맣게, 또 조용하게 타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나오는 신문들은 촛불모임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천 바로 옆에 붙은 서울은 날마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몰려듭니다. 인천에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분들조차 인천에서 모이지 않고 서울로 먼길을 떠납니다. 이리하여 서울 촛불모임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모일 터이나, 정작 인천 촛불모임은 외롭기만 합니다.

 지난 6월 10일, 인천시의회에서 ‘성공적인 도시관리를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살피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을 포함해 오는 2015년까지 추진되는 개발사업지구는 215곳이고 면적은 259㎢에 달한다. 시의 계획대로라면 분당신도시(1.65㎢) 만한 도시 157개가 10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서울도 곳곳에서 재개발 법석이지만, 인천에서 이루어지는 ‘재개발 + 재생사업’ 법석과 견주면 발가락 때만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천이라는 데가 토박이가 드문 곳이라고 합니다만, 그나마 있던 토박이마저 제 삶터에서 내쫓기게 되는 ‘옛 도심지 없애고 새 아파트 올리는’ 일이 몹시 끔찍하다고 할 만큼 밀어닥칩니다. 워낙 한꺼번에 온갖 곳에서 쇠삽날 바람이 불고 있으니, 걷잡을 수도 없지만 숨 한 번 느긋하게 쉴 수조차 없습니다.

 “명주야, 여기 저금통장과 도장 놓고 간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 찾아 쓰도록 해라.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만, 내일을 위해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하자. 오빠가.(6권 93쪽)” 김수정 님이 1990년 3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그렸던 만화 《일곱 개의 숟가락》(태영문화사,1994)을 꺼내어 봅니다. 서울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다섯 아이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이 만화책을, 한 해에 한두 번씩 꺼내어 몇 번씩 다시 보곤 합니다. 보고 또 보아 낡아버린 만화책이지만, 다시 보고 거듭 보는 동안, 1990년 앞뒤로 우리네 도시 서민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고누와 금긋기놀이를 하고, 고무줄과 긴줄넘기를 하며, 밥이 없으면 김치로만 배를 채웁니다. 따뜻한 부모와 걱정없이 살다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하나둘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스스로 헤쳐나가는 길을 찾고, 고등학생 일룡이와 중학생 명주는 둘 나름대로 홀로서기를 배우는 한편, 사랑스러운 식구들을 더욱 짙게 깨닫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밥상 위에 일곱 개의 숟가락이 놓였다. 늘 이렇게 일곱 개가 놓였으면 좋겠다.(7권 160쪽)” 아이들이 가난하면서도 서로 돕고 살던 달동네는 하나둘 사라집니다. 자가용은 없으나, 모두 똑같은 높이에서 똑같은 이웃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삶터가 사라집니다. 번듯한 장난감은 없으나, 돌멩이 하나와 나뭇가지 하나로도 놀잇감을 삼던 아이들 놀이터가 사라집니다. 큰돈은 못 벌지만, 누구나 조금씩 벌면서 살가이 어깨동무를 하던 일터가 사라집니다. 높은학교를 다니지 못했어도, 동네 언니와 아저씨가 길잡이요 스승이 되기도 하던 조촐한 배움터가 사라집니다. (4341.6.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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