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강승숙 선생님의 그림책 수업 일기 살아있는 교육 21
강승숙 지음, 노익상 그림 / 보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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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한테 좋은 책 하나 읽히기 앞서
 [그림책이 좋다 80] 강승숙,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책이름 :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글 : 강승숙
- 사진 : 노익상
- 펴낸곳 : 보리 (2010.4.12.)
- 책값 : 15000원



 (1) 제도권 학교 교사들


 요즈음 초등학교는 한 반에 스물∼스물다섯 즈음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이런 숫자가 될 만큼 발돋움했으니까요. 그러나 담임교사 한 사람이 맡는 아이들 숫자는 줄었을지라도 교사 한 사람이 맡을 행정 일감은 그리 줄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맡아야 할 아이들 숫자가 줄었으면 그만큼 아이 하나하나한테 더 마음을 기울여 참되고 착하고 고운 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할 텐데, 예나 이제나 대학바라기 배움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끔찍한 대학바라기로 바뀌는 한편, 집과 마을이 학교와 함께 맡아야 할 몫을 놓거나 잃거나 잊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1982년부터 고등학교를 마친 1993년까지, 학교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어 준 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를 가르친 분 한 사람이 있었을 뿐, 열두 해에 걸쳐 시집이나 소설책이나 그림책이나 동화책 한 번 읽어 준 분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반에 예순 안팎이던 학교였고, 교과서 진도 나가기 바쁜 가운데, 날마다 쏟아내는 숙제를 살피어 몽둥이찜질로 열고 닫는 학교였던 만큼, 교과서 아닌 책을 들고 다니는 교사를 찾아보는 일부터 잘못일는지 모릅니다. 제도권 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교과서 아닌 책’은 ‘불온도서나 불온소지품’으로 여기던 학교였고, 국민학교 때이든 중고등학교 때이든 교과서와 참고서와 공책과 준비물 따위로 가방이 몹시 무거웠기에 ‘교과서 아닌 책’을 따로 챙겨 들고 다니는 동무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적에 한둘 고작 있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님과 서머셋 모옴 님 소설을 영어책으로 읽던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고, 신경림 님이나 신동엽 님이나 김현승 님이나 릴케 님 시집은 고등학교 때에 ‘불온도서 압수품’이 되곤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우리들을 닦달하고 숙제벼락 퍼부어 몽둥이찜질을 하며 ‘학교 밖 탈선을 막는다’는 큰일을 하시느라 몹시 바쁘고 힘에 겨워 가벼운 소설책 하나조차 손에 쥘 기운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에 걸쳐 우리들을 밤 열한 시까지 학교에 꽁꽁 가두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자니,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잠이나 텔레비전 보기나 고스톱이지, 조용히 책읽기를 하며 당신들 마음닦이를 하실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따로 불러 돈봉투를 내라 하지 않은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만,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또는 아침저녁 모임을 하면서, 때로는 골마루에서 큰소리로 외치듯 대놓고 돈봉투를 내라 하던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 스승날을 앞두고 반장과 부반장은 돈봉투에 넣을 돈을 얼마씩 모아야 한다며 닦달하듯 돈을 거두는 한편, 선물을 따로 챙겨서 교탁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선물을 챙기기 어려운 몹시 가난한 동무가 있을 때에는 마음 좋은 동무가 한 가지씩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따돌림을 받는 동무라든지 자존심이 있는 동무는 선물을 내지 않고 ‘스승날을 기리며 스승한테 선물을 내지 않은 값’으로 종아리나 엉덩이를 두들겨맞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떠올리는 국민학교 여섯 해 나날 가운데 수업시간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몇 대목이 떠오르지만, 국민학교 적 이야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운동장이나 골마루나 교실 뒤쪽에서 뛰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교실 안쪽 이야기 가운데에는 얻어맞거나 폐품 모으기하고 성금 내기하고 환경미화 하기에다가 날마다 한두 시간에 걸쳐 끔찍하게 해야 했던 청소가 떠오릅니다. 가뜩이나 날마다 ‘짧아야 한 시간’을 골마루며 창문이며 뒷간이며 책걸상이며 학교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빛을 내느라 ‘밖에서 동무하고 놀 겨를’이 모자라 입이 뿌루퉁하게 나오며 쑹얼쑹얼거렸는데,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면 한 주나 보름 동안 ‘한 시간 + 한 시간’ 청소를 했고, 교육감이 들이닥치는 때에는 아예 수업을 안 하고 청소만 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교육감이 찾아온다며 청소하던 일이 고마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숙제가 너무 많아 다 못했기 때문에 그냥 수업을 했다면 숙제 안 한 만큼 흠씬 두들겨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기뻤던 대목은 국민학생 때하고 견주어 학교에서 청소하는 시간이 1/3이나 1/2로 줄었던 한 가지입니다.

 담임교사가 우리들 집을 찾아다니는 때에는 동네가 들썩들썩합니다. 다들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인 터라 ‘가정방문 교사한테 돈봉투를 주고 밥과 술 대접’ 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 집 저 집 다니며 돈을 꾸느니 먹을거리를 얻느니 반찬을 나누느니 하느라 부산했습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담임교사가 집에 들렀다 가면 담임교사는 여러 집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좀 늦게 오면 다른 집에서 배불리 먹을 테니 우리 집에서는 잔칫상 같은 밥상을 얼마 손을 못 대고 남겨서 이 남은 좋은 먹을거리를 우리가 신나게 먹는 날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어머니가 옆집에서 돈을 꾸어 비싼 딸기를 한 소쿠리 내놓았으나 담임교사는 다른 집에서 벌써 잔뜩 먹었다며 거의 손을 안 대고 돌아갔습니다. 형하고 저는 이날 딸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 학교 어디에도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을 만한 구석진 자리는 없다. 아름드리나무도, 아담한 뒤뜰도 없다. 그러니 자연 여자아이들은 화장실을 아지트로 삼는다 … 아이들과 같이 이 그림책을 보면서 산도 들도 빼앗기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다시 생각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피시방에 간다고, 텔레비전에 매달려 산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 전에 둘레에 아이들이 바라는 공간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31, 37∼38쪽)


 국민학교 적 모든 교사가 나쁜 마음 몹쓸 마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이었을 때에 담임을 하셨던 분은 여느 교사들과 달리 (몽둥이 아닌) 회초리조차 거의 든 일이 없었고, 무슨 일 때문에 일찍 다른 학교로 떠났는지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하면서 예순이 넘는 우리들한테 선물을 하나씩 ‘저마다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한테 받은 ‘삼미슈퍼스타즈 야구수첩’하고 편지를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교과서 아닌 《세계사 수첩》(민맥)이라는 책을 교과서처럼 삼으며 수업을 했던 분하고는 편지나 소식을 가끔가끔 주고받습니다.


 (2) 그림책 읽어 주는 교사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강승숙 님이 낸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강승숙 님은 지난 2003년에 《행복한 교실》이라는 책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사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지만, 이 숱한 교사들 가운데 교사일기를 꾸준히 쓴다든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적바림하는 분은 아주 드뭅니다. 교사일기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쓴다 할지라도 가슴이 뭉클할 만한 삶자락을 보여주는 분은 다시금 손가락으로 꼽아야 합니다.

 좋은 교사가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좋은 교사로 일할 만한 터전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교사일기를 써야지, 갖가지 자질구레한 행정서류를 쓸 노릇이 아닙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학교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누어야지, 부동산이니 자가용이니 여행이니 뭐니 하며 다른 이야기에 마음이 푹 빠질 노릇이 아닙니다. 학교 바깥에서 여느 사람으로 지낼 때에는 무얼 하든 마음껏 하면 됩니다. 다만 학교 안쪽에서 일할 때에는 학교를 생각하고 학생을 헤아리며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이음고리를 살필 노릇입니다.

 “책 한 권으로 아이들 마음이나 행동이 크게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를 깊이 생각할 기회는 생길 것 같다(171쪽).”고 이야기하는 강승숙 님입니다. 틀림없이 책 한 권으로 아이들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과서를 제아무리 잘 가르친다 할지라도 아이들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동네에서 동네 어른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내보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집식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가까이에 마음을 달래 줄 자연조차 없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는 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 2008년에 4학년 아이들하고는 이 그림책을 재미있게 보았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는 내내 자기네가 사는 집과 식구들을 생각하는 듯했고, 불만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보통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은 멋진 아파트를 꿈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개들이 마중 나오고, 할머니가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할아버지가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는 ‘만희네 집’을 몹시 부러워했다 …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넉넉하지 못한 주영이네와 그림책 속에 나오는 부유한 집안 풍경이 대조가 되어 읽어 주기가 민망했다. 집에 대한 주영이의 아쉬움은 《돼지책》을 읽을 때도 강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나오는 피곳 씨 부인은 아들 둘과 남편의 도구 같은 존재였다. 밥해 주는 여자, 집안 정리해 주는 여자, 그 피곤함을 전반부에 잘 그리고 있다. 힘든 여자의 처지를 잘 이해했을 텐데도 주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좋겠다. 집이 좋잖아요.” ..  (63, 275, 296쪽)


 슬기롭고 아름다이 거듭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어리석고 짓궂게 굴러떨어질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착하고 참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되고 구지레하고 나뒹굴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삶이란 둘레 어른들 삶에 따라 다릅니다. 둘레 어른들 스스로 당신들 삶을 먼저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되이 가다듬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책 한 권 읽어 줄 겨를을 낸다면 더없이 고맙습니다만, 책 한 권 안 읽어 주거나 못 읽어 주어도 괜찮으니까, 부디 옳고 바르고 곱게 당신들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 옳은 삶이 아이들 옳은 삶으로 이어지니까요. 어른들 바른 넋이 아이들 바른 넋으로 옮아가니까요. 어른들 고운 말이 아니들 고운 말로 대물림하니까요.


.. 《새앙 쥐와 태엽 쥐》, 나는 이렇게 마음이 따스해지는 그림책이 좋다 …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권정생 선생님이 쓴 글은 꾸밈없는 시골 아저씨 이야기처럼 담담하다. 기교를 부리지도, 형식을 실험해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작품에 공감한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의 힘, 또는 삶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야기를 만들려고 애쓰는 데서 동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선생님을 둘러싼 삶의 아주 작은 구석부터 거대한 사회 흐름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  (80, 153쪽)


 교사 강승숙 님은 살아숨쉬는 배움터를 생각하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일인 ‘그림책 읽기’를 함께합니다. 먼저,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을 찾는다기보다 당신 스스로 좋아하거나 당신한테 반갑고 좋을 그림책을 찾습니다. 꼭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한다기보다, 학급문고로 그림책을 갖추어 놓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먼저 찾아 읽도록 하는 한편,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도록 그림책을 읽는 일을 거듭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그림책 읽기를 억지로 내세우거나 앞세운다면 이는 제도권 교과서 달달 털어내는 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제아무리 맛나고 좋은 밥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밥술을 들어 떠먹어야 하거든요. 수저질을 잘 못해서 밥알을 떨어뜨리더라도 아이들이 차근차근 손아귀힘과 손가락힘을 길러 스스로 밥을 떠먹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든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좋다는 책 하나를 읽든,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가장 기쁘고 신날 책 하나를 알아보고 찾아내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집에 가서 다시금 찬찬히 그림책을 보았다. 그리고 책 뒤표지에 붙어 있는 색종이를 접어서 고양이를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내가 감동하여 읽은 이 책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 열 번도 넘게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 오는 《까마귀 소년》. 좋아하는 그림책을 보여줄 때면 아무래도 읽어 줄 준비를 더 잘하게 되나 보다. 늦은 밤 이불에 엎드려 그림책을 다시 보았다. 동무들과 선생님을 무서워하던 주인공 땅꼬마 아이를 보니 어릴 적 동무들과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생각났다. 지저분하고 공부 못한다고 놀림받던 명자는 늘 혼자였다. 명자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동무들이 노는 모습을 한쪽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해마다 명자처럼 동무 없이 지내는 쓸쓸한 아이들이 한둘씩 꼭 있었다 ..  (106∼107, 123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강승숙 님네 아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강승숙 님이 읽어 주는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괜찮은 책이든 안 괜찮은 책이든 떠나, 아이들한테는 ‘숙제나 짐처럼 떠안기는 추천도서나 명작동화’가 아니라, 살과 숨과 목소리와 땀을 함께 느끼며 빠져드는 고운 이야기를 나누는 배움이거든요. 아이들은 저희하고 놀아 주는 교사가 좋지, 아이들한테 매섭거나 무서우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교사가 좋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딱딱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사로운 어깨동무가 좋은 아이들입니다. 무슨 지식조각이나 어떤 지식부스러기를 나누어 주지 못할지라도 함께 고무줄을 하고 같이 금긋기놀이를 하는 어른이 좋은 놀이동무요 일동무요 배움동무입니다.

 예부터 스승이란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배우는 사람이지만 배우기만 할 뿐 아니라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사이요, 어버이와 아이 또한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살붙이입니다.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은 교사 된 사람들이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이렁저렁 읽어 주어야 좋다는 생각을 펼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그림책을 꼭 읽히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아이들 앞에서 읽어 줄 때에 교육 효과가 크다고 떠벌이지 않습니다.

 한 학급 숫자가 예순이나 여든일 때에도 얼마든지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었으나, 한 학급 숫자가 고작 스물이나 서른인 오늘날에는 누구나 그림책 읽기를 어렵잖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렵잖이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이들 삶에 더 깊숙하게 스며들면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겯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으로 우리 매무새를 다독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승숙 님은 이처럼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 되기’를 그림책 읽기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저마다 다른 길과 흐름에 맞추어 아이들 앞에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이 될 삶을 찾아 주면 넉넉합니다.


.. 문장을 보니 2학년 아이들한테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지’를 얼른 ‘땅’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래도 이 문장을 들은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생명의 불꽃’이라니, 무슨 말인지 얼른 다가오지 않는 모양이다. 설명하려다 화면을 넘겼다 … 그림책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과감한 기법과 새로운 감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림책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엄마의 의자》같이 삶이 묻어난 그림책, 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처럼 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도 필요하다 ..  (130, 287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는 제대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줄거리나 모습을 섣불리 따라하면 안 되고, 이 책에 나오는 그림책들이 ‘모두 괜찮은 책’이라고는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책은 고작 백 가지가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 아주 많을 뿐 아니라, 이 책은 ‘좋은 책 추천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읽어 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먼저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림책 하나에 어떤 땀과 뜻이 서려 있는가를 헤아리자고 하는 목소리를 무엇보다 제대로 살펴야 할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입니다.

 아무래도 책 짜임이 이 대목을 더 헤아리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데, 딱딱한 책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강승숙 님 모습과 당신 반 아이들 모습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만, 외려 이 사진들은 책읽기에서 자꾸 걸립니다. 책에 담긴 줄거리하고는 어울리지 않고 ‘그림만 좋은’ 사진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일곱 갈래로 나눈 책이니 일곱 갈래를 새로 여는 데에만 사진을 넣고, 사이사이에는 강승숙 님과 아이들이 아주 아끼고 사랑한 ‘그림책 어느 한 대목’을 제대로 보여주었어야 이 책을 읽으며 눈과 숨이 부드러웠겠다고 느낍니다. 사이사이 그림책 한두 대목이 들어가 있기는 한데, 정작 ‘이 그림책을 이야기하며 바로 이 그림이 좋았다’고 하는 흐름에서 ‘이 그림’이 없기 일쑤였습니다. ‘그림책 교육 지도서’ 느낌이 안 나도록 하려고 이처럼 책을 엮었다 할 수 있는데,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은 ‘그림책 한 대목’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강승숙 님이 왜 아이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같은 눈높이에서 그림책을 즐기고 있는가를 좀더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109쪽에 ‘도둑고양이’라고 적바림한 낱말은 ‘골목고양이’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도둑개나 닭둘기가 아닌 골목개요 골목비둘기입니다. 어설픈 사람 눈길로 뭇짐승을 깎아내리는 말마디가 어설피 튀어나오지 않도록 끝마무리를 단단히 여미어 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4343.5.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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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과 반동
이갑철 사진, 강운구.김용택 글 / 포토넷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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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7] 이갑철, 《충돌과 반동》



- 책이름 : 충돌과 반동
- 사진 : 이갑철
- 펴낸곳 : 포토넷 (2010.4.1.)
- 책값 : 7만 원



 (1) ‘대가’와 ‘엉터리’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 사진밭에서 ‘대가(大家)’라는 이름이 붙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라밖에서 그리 알아주지 않으나, 나라안에서는 서로서로 추켜세우거나 부추기면서 ‘대가’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꼭 나라밖에서 알아주어야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나라안에서 몇몇이 알아준다 하여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입니다.

 크게 뜻을 이루었다는 분들이란 어떤 분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오랜 나날에 걸쳐 작품 하나 빚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작품 하나 빚기까지 오랜 나날을 보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다른 어느 문화밭이나 예술밭보다 사진밭에서 ‘대가’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팔리고 나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대가라는 이름이 붙거나 이 이름을 붙이는 분들 사진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분들 사진책이 덜 팔린다고 이분들이 대가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많이 팔리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대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무렵부터 사진을 꾸준히 찍고 사진책을 차근차근 즐기는 오늘날까지 “대가 = 엉터리”이고 “엉터리 = 대가”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대가라고 일컫거나 둘레에서 대가라고 일컫는 이름에 흐뭇해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사래치지 않는다면 그예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엉터리라 하든 스스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든 엉터리 소리를 흔히 듣거나 자주 듣거나 으레 듣는다면 이이야말로 대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작품 하나로 그치는 대가란 없습니다. 작품 하나로 마무른 대가라 한다면 새로운 작품 하나로 나아갈 노릇이요, 지난날 당신이 이룬 대가다운 작품은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작품 하나를 일군 대가라 한다면 하루하루 새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당신이 지난날 이룬 대가다운 작품을 깎고 보태고 다듬고 손질하면서 마지막 숨결을 잇는 그때까지 땀흘리기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자말로는 ‘대가’라지만, 우리 말로는 ‘큰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하든 글쓰기를 하든 그림그리기를 하든, 우리가 굳이 큰그릇만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그릇이면 어떠하고 작은그릇조차 못 되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은 그릇이 되고자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끼는 만큼, 내가 알아 가는 만큼, 내가 고개숙이는 만큼, 내가 부대끼는 만큼, 내가 껴안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내가 깨닫는 만큼, 내가 믿고 보듬는 만큼 일을 하고 놀이를 한다고 봅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딸아이 하나를 옆지기와 낳아 함께 복닥이고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아빠나 엄마보다 크고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이란 처음부터 큰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작은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인데, 아마 작은그릇이 되라고 작품을 빚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다들 당신들 삶을 고루 담아내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열매 하나를 생각하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억지로 짜맞추거나 끼워맞추거나 들어맞추도록 하려는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당신들 삶을 찬찬히 실어내며 따사로운 보람 하나를 헤아리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크고 높게 내세우거나 내놓으려고 하는 작품으로만 헤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대가’라는 옷에 휘감긴 채 ‘작품’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사진이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즐기며 함께하는 사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복닥이는 삶이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쉰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얽매일 사슬이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앞으로 백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악다구니를 쓰듯 붙잡으려는 힘-돈-이름이란 가없이 덧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사진으로 일거리를 찾고 이름값을 높이며 돈벌이를 하는 한편 큰배움터나 문화마당 같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분들 누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곱씹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왜 하고, 사진을 왜 찍고, 사진을 왜 가르치며, 사진을 왜 보여주고, 사진을 왜 돈 받고 파는지를 찬찬히 되새기면 반갑겠습니다. 사진을 책 하나로 엮는 까닭을 생각하고, 당신이 찍어서 엮은 사진책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까닭을 생각하면 기쁘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는데, 마땅히 글은 글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괜히 멋부리듯 읊지 말고, 그저 그대로 온몸과 온마음 고스란히 내맡겨 스스로 사진삶을 일구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도록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삶이 그대로 글이고 그림이듯,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뿐 아니라 사진쟁이 또한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자꾸자꾸 대가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당신 삶을 풀어 놓지 못한다면, 어설픈 이름 하나 얻을는지 몰라도 이러한 이름이 사진일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이름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권력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돈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이니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은 아직 엉터리’라고 여기며 늘 새롭게 거듭나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니까요.
 











 (2) 다시 나온 사진책 《충돌과 반동》


 2002년에 처음 나왔던 사진책 《충돌과 반동》이 새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예전 판은 보지 못했는데, 새옷을 입고 나온 책은 예전 판에 실린 사진하고 똑같다고 합니다. 예전 책에는 육명심 님 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 글을 덜고 강운구 님 글을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쟁이 이갑철 님으로서는 2002년이나 2010년이나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내놓은 셈입니다(2009년에 《RED》라는 작품을 내놓으셨데 ‘충돌과 반동’이라는 사진감으로는 여덟 해 동안 다른 발돋움이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충돌이 있고 반동이 있대서 책이름이 《충돌과 반동》이요, 이갑철 님이 일구어 온 사진밭은 다름아닌 충돌과 반동이라는 낱말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flict’와 ‘reaction’으로 적는데, 우리 말로는 ‘부딪힘’과 ‘거스름’ 또는 ‘부대낌’과 ‘튕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부딪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거스르거나 튕깁니다. 부대끼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밀어내거나 등을 돌립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이라 할지라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충돌과 반동이란 그치지 않는 흐름이요, 만남과 헤어짐이며, 잠과 깸입니다. 해와 함께 달이 있듯,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밥하고 똥은 다르지 않으며,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고운 목숨입니다.

 이갑철 님이 2002년에 보여주었던 《충돌과 반동》은 여덟 해가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고작 여덟 해로서는 달라지지 않는 탓입니다. 아니, 앞으로 열여덟 해나 여든 해가 흐르더라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는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여든 해조차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더 움켜쥐려고 할 뿐, 더 나누거나 더 베풀거나 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바빠지는 삶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슷비슷합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흐름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어떠할 때에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길이 어디로 이어질 때에 우리 스스로 신나고 맑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우리 스스로 반갑고 넉넉한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한국땅입니다. 같은 잘못이 이어지고 같은 슬픔이 잇달으며 같은 생채기가 자꾸 파이는 한국땅입니다. 이름과 때와 곳이 다를 뿐, 지난날과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이란 거의 한결같습니다.

 이러한 한국땅에서 《충돌과 반동》에 깃든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제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갑철 님으로서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일구어 새로 나오는 책에 보탤 까닭이 없습니다. 《충돌과 반동》은 2002년에든 2010년에든 2022년에든 2102년에든 똑같은 사진책이 되고, 똑같은 느낌이 되며, 똑같은 삶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나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나 어떠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스스로 ‘달라질 삶’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는 사람 또한 ‘달라질 삶’을 붙잡지 않습니다.

 좋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이어가는 삶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넉넉하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내놓는 사진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이 삶터는 새로운 흐름이란 없고 달라질 삶이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에는 한껏 넓고 깊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이 스며들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이런 틈바구니가 가부장제도이든 남녀 신분과 계급이든 마을과 고을이든 보수와 진보이든 시골과 도시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일까요. 이어온 대로 좋다면 무엇이 예부터 이어온 줄기일까요.

 2010년에 새옷을 입고 거듭 태어난 《충돌과 반동》이란 미식가한테 맛난 밥이 되듯 소장가치가 있어 집안에 모셔 둘 만한 사진책인지, 또는 2002년에는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한 깊은 얘기가 있어 2010년이 된 오늘날부터는 새롭게 받아들일 얘기를 건네려고 내놓은 사진책인지, 또는 사진쟁이 이갑철 님을 대가로 섬기고자 마련한 사진책인지, 또는 웅숭깊은 사진말이 없는 한국땅 사진밭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자 선보이는 사진책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에 담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는 고맙고 드물며 반가울 사진말로 다가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으로 담는 젊은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젊은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이루었다는 사진쟁이들한테 이 사진책 하나가 얼마나 말걸기로 파고들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열 만한 마음밭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걱정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는 어슬렁거리며 작은 방의 프린트들을 뜯어보며 고생많았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트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두운 상황에서 뭔가를 본 순간에 쏠려고,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심도를 깊게 하면서도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필름의 감도를 두 배나 네 배로 올려서 찍는다”고 이갑철은 나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다. 그래도 이갑철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과 초점이 나간 흐릿함에 귀신들이 깃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철 사진의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자동 카메라를 잘못 쓴 것 같은 엇나간 초점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윌리엄 클라인의 경우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다가 점차 귀신 잡는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기법은 머리의 얄미운 계산이 아니라 뛰는 가슴의 어쩔 수 없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130쪽/강운구 풀이말)


 2002년에 첫선을 보인 사진책 《충돌과 반동》에는 199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이갑철 님 눈길로 담겨 있습니다. 이갑철 님은 이갑철 님 눈썰미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았기에 《충돌과 반동》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데, 이갑철 님한테 당신한테만 남다른 눈길이 있기 앞서, 먼저 이갑철 님한테 보여지며 마주한 사람들이 오랜 나날을 당신들 터전에서 고이 살아내 왔기 때문에 이갑철 님 남다른 눈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 숱한 사진쟁이들이 흔히 놓치는 대목이란 바로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자락이 거쳐 온 발자국 하나하나입니다. 옛날 사람이란 없고 오늘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옛날 모습이란 따로 없고 오늘날 모습 또한 따로 없습니다. 옛날 결하고 오늘날 결은 있으나, 이 또한 사람들이 서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이루어 내는 삶을 돌아본다면 언제 적 모습이니 어쩌니 하는 갈래 나눔이란 덧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농사짓고, 낫질하는 사람은 똑같이 낫질하고, 절집 다니는 사람은 그예 절집을 다니고, 성모상에 절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성모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기나길며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사진쟁이 남다른 눈으로 잘라내거나 옮겨내거나 이어받아 한 가지 모습으로 선보이는 손짓입니다.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사람들 삶입니다. 섣불리 따지거나 잴 수 없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모습으로 찍혔다 한들 사람들 삶입니다. 조금 어둡게 찍히든 더욱 밝게 찍히든 사람들 삶입니다. 사람들 삶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느껴야 할 사진찍기이고, 사람들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맺고 사귀고 다가서며 스며들며 어우러지는가를 느껴야 할 사진읽기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어떤 필름을 쓰든, 어떤 디지털 장비를 쓰든, 어느 사진감을 붙잡든,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걷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눈길보다 바라보는 눈길에 서린 삶을 느낄 노릇입니다. 사진에 담길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만큼 내 사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자연 터전이나 물건들이 바로 나와 내 사진기를 어떻게 느끼며 마주하고 있느냐를 나란히 곰삭일 노릇입니다.

 그나저나, 2010년판 《충돌과 반동》은 곱게 여민 옷자락에 정갈하고 말끔하여 멋스럽지만, 책값 7만 원이란 지나치게 짐스럽습니다. 책꽂이에 박아 놓을 사진책이 아니라 한다면 좀더 단출하고 자그마한 그릇으로 여미어 한결 수수하며 너른 이야기자리가 되도록 매만질 때에 바야흐로 푸진 사진결이 빛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7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7만 원으로 이 사진책을 두어 권 장만할 수 있도록 여밀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4343.5.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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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나의 집 - 이언진 시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2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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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으로 번역한 시는 시가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4] 박희병 번역, 《이언진 시집 : 골목길 나의 집》



 18세기 천재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언진이라는 분 시를 우리 말로 옮긴 책이 나와 있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읽었습니다. 더없이 뜻깊은 책이요 그지없이 알찬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번역이라고 해야 할는지 뭐라고 해야 할는지 어지러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영 찜찜합니다. 도무지 이언진이라는 분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거실》이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박희병 님은 ‘호동()’이란 ‘골목길’과 같고, 이 골목길에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비천(卑賤)’이란 “지위가 낮고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나 이제나 잘나고 이름있고 돈있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법이란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예술쟁이가 골목동네로 나들이를 와서 얼핏설핏 담 너머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골목길’이라는 글월이 영 못마땅합니다. 아니, 가없이 슬픕니다. 골목길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러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애써 높이지 않고, 스스로를 괜히 낮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농사꾼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서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못 벌고 더 큰 이름을 못 누리며 더 센 힘을 뽐내지 못할 뿐, 골목길 사람은 여느 자리 사람이든 궁궐 안쪽 사람이든 다 매한가지로 애틋하고 알뜰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호동거실》을 우리 말로 옮겼다고 하는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은 골목동네 사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매무새가 엿보이지 않아 슬프고 씁쓸합니다.


.. ‘골목길’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사는 공간을 표상한다. 골목길의 집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시인의 집은 바로 이 골목길 속에 있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 《호동거실》에는 백화(중국의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  (6, 188쪽)


 더욱이, 이 책 《골목길 나의 집》은 번역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책을 읽은 저로서는 도무지 번역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6언시(글자수를 여섯으로 맞추어 넉 줄로 쓴 시)’를 옮긴 번역책 《골목길 나의 집》인데,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견주어 자유롭게 말하고 입말(그래 봤자 중국 한문입니다)을 살려서 쓰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골목길 나의 집》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에 옮겨진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에핌 에트킨드라는 분이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109쪽)”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언진 님 시를 우리 말로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은 틀림없이 뜻이 있고 아름다운 문학입니다. 그러나 번역이라 할 수 없는 번역을 선보이는 한편, 18세기 이언진 님이 살아가던 골목동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높’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눈썰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말로 옮길 때에 ‘6언시’처럼 여섯 글자로 맞추거나 어슷비슷한 짧은 글월로 맞추기란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 문학’이라는 꼴은 갖추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모두 170 꼭지 시를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에서 열세 꼭지를 가려내어, 저 또한 어설프고 어줍잖습니다만, 이언진 님이 골목동네에서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지내던 느낌을 헤아리면서 골목사람들 말투로 다시금 옮겨 봅니다. 책에는 우리 말로 옮긴 산문 밑에 이언진 님이 한문으로 적은 싯말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기에 저 같은 쥐대기도 어설프나마 번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문 원문까지 옮겨 적기란 너무 버겁고 부질없다고 느껴, 박희병 님 번역에 제 번역을 붙이기만 합니다. 박희병 님 번역은 넉 줄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두 줄로 붙입니다. 왜냐하면 이언진 님 6언시는 넉 줄이 아닌 두 줄로 나누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문학을 옮겨서 나누려 한다면 시 문학 짜임새와 얼거리와 글맛과 글흐름을 모두 살피어 오늘날 우리 말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4343.5.10.달.ㅎㄲㅅㄱ)
 





(1)
새벽종 울리자, 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
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 만인의 마음 나는 앉아서 안다.
(새벽종 울리자 / 골목사람 바쁘다 /
 밥 빌고 벼슬 얻으려는 / 이 마음 난 앉아서 안다)


(5)
치가(治家)하려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애 기를 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야지.
‘빈이락(貧而樂)’ 이 세 글자 비결을 알면 얼굴에 근심이 깃들 리 있나.
(살림 하며 눈귀 멀고 / 아이 보며 기저귀 간다 /
 가난이 즐거우면 / 얼굴에 근심 없지)


(9)
집 나가 노닐면 고생 또 고생 집에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
몸이 늙거나 약해지지 않고 식솔이 기한(飢寒)에 떨지도 않지.
(집 나가면 괴롭고 / 집에서는 즐겁다 /
 늙어도 튼튼하고 / 굶거나 추운 식구 없다)


(15)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는 건 범 안고 자고 뱀 품고 달리듯 위태하기 때문.
용퇴하면 화(禍) 적고 복 많을 텐데 뭣 땜에 사주 보고 점을 치는지.
(나라님 부름 싫다 / 범 안은 독뱀 방석 /
 물러서니 걱정 없다 / 내 팔자 그예 좋다)


(19)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골목 사람 거룩하다 / 가난하고 배고파도 /
 착하고 고운 마음 / 맹자님도 말했다)


(28)
아이 우는 소리 천뢰(天뢰)와 같아 피리와 거문고 소리보다 훨씬 낫지.
처마의 한적한 물소리 참 좋으니 똑, 똑, 똑 베개맡에서 듣고 있노라.
(아이 울음 하늘 소리 / 뭇 악기보다 좋다 /
 처맛물 조용한 소리 / 누워서 듣는 똑똑똑)


(43)
인정세태는 천만(千萬) 가지고 바다 속엔 온갖 고기가 있지.
선생의 마음은 터럭처럼 세밀해 저자사람 얼굴의 마마 자국까지 알지.
(사람 마음 갖가지 / 바다엔 숱한 고기 /
 내 마음 촘촘한 터럭 / 장사꾼 낯 다 알지)


(58)
저잣거리의 구운 떡 어린애는 그 값을 아네.
좋은 물건이면 그뿐 난 진짜 가짜 따위 가리지 않아.
(저잣거리 구운 떡 / 아이는 아는 제값 /
 좋으니 두루 좋아 / 참거짓 떠나 좋지)


(78)
밥은 하루 지나면 쉬었는가 싶고 옷은 해 지나면 낡았는가 싶지.
문장가의 난숙한 문투 한당(漢唐) 이래 어찌 안 썩을 리 있나?
(밥은 하루면 쉬고 / 옷은 한 해면 낡고 /
 어리숙한 글쟁이 / 예부터 썩을밖에)


(81)
가난한 집 식탁 썰렁하여서 반찬이란 꼴랑 된장뿐이네.
오늘 아침은 처자가 호강하누나 / 제사 지낸 서쪽 이웃 쇠고기 보내 줘.
(가난해 밥상 썰렁 / 된장 하나만 겨우 /
 오늘 아침 뜻밖에 / 젯상 고기 들어와)


(91)
진짜 보타산과 진짜 관음이 10보 옆에 있다 해도 나는 안 갈래.
내 엄마가 곧 부처 엄마니 / 집에 있으면서 엄마를 잘 공양할래.
(보살 관음 살아서 / 내 곁에 있다 해도 /
 울 엄마가 참 부처 / 울 집에서 섬기리)


(105)
손가락끝, 붓끝, 종이 사이에 하나의 부처 분명 생겨나지만
손가락끝 보고 붓끝 보고 종이를 봐도 부처는 없네.
(손붓이 빚은 부처 / 환히 그려진 모습 /
 손붓 종이 어디도 / 참 부처는 없는데)


(132)
천하엔 본래 일이 없는데 유식한 이가 만들어 내지.
책을 태워 버린 건 정말 큰 안목 그 죄도 으뜸이요, 그 공도 으뜸.
(처음부터 없던 일 / 글쟁이가 지어내 /
 책 불사름 훌륭해 / 엉터리요 멋진 일)



 ┌ 《골목길 나의 집》(돌베개,2009)
 ├ 글 : 이언진
 ├ 옮긴이 : 박희병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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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2 :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셔요? 



 저는 모르는 책이 참 많고, 못 읽은 책이 참 많으며, 못 읽을 책 또한 참 많습니다. 아직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님 책은 한 가지조차 읽지 않았거나 읽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거나 그리 안 좋아하거나 이분 책을 읽은 분 가운데 다른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골고루 샅샅이 읽은 분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책을 읽으면 다른 한 가지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 하여도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할지라도 골라서 읽을 뿐, 모두 읽을 수 없으며 모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저 나름대로 살아가듯, 우리들은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을 뿐입니다.

 잘난 책읽기이든 못난 책읽기이든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결에 따라 살아가며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마주하는 가운데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대로 내 몸과 마음을 가꿉니다. 내가 고른 책이 훌륭한 책이든 어설픈 책이든 우리로서는 좋은 알맹이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고른 책이 빼어난 책이든 멋진 책이든 우리로서는 나쁜 버릇에 물들 수 있습니다.

 어제 동네 헌책방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백암,1993)가 보이기에 집어들어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소설은 어떠한지 잘 모르나 수필은 참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충 같다(87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번역은 꽤 엉망이라고 느끼면서도 이 글월에 담긴 글쓴이 마음은 기쁘게 헤아렸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생각이자 삶은 “어떻게 쓰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얼추 같다”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내 삶부터 올바르고 아름답게 잘 꾸려야 한다는 소리랍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내 삶부터 좋은 삶이 되도록 잘 추스려야 한다는 소리이고요.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일 테지요? 그지없이 옳은 말씀일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마땅하고 옳은 글월을 마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옳게 새기지 못합니다. 그냥 책 한 귀퉁이에 실린 글줄로 읽고 잊습니다. 고운 삶이란 하루키 님 책에만 있지 않고 우리 둘레에 두루두루 있는데. 맑은 삶이란 하루키 님 소설에만 있지 않고 우리 터전에 구석구석 있는데. 참된 삶이란 하루키 님 수필에만 있지 않고 우리 이웃이나 살붙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어떤가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다룬 이야기나 바라본 사람들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꿈꾸며 가꾸는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문학을 읽는 내 삶과 내 몸뚱이와 내 손길과 내 삶터를 좋아하시나요?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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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골목길과 배다리를 팔아먹는 거짓말쟁이들


 인천 토박이 가운데 스스로 인천 토박이임을 내세우며 인천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천 토박이는 으레 더없이 조용하기 마련이다. 인천 토박이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일컫는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인천에서 일감을 찾아 인천땅 다른 토박이하고 어깨동무하며 지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인천사람이다. 이들이 모두 인천 토박이이지 않다. 그러나 인천에 살면서도 인천사람 아닌 서울사람이 있고 경기사람이 있으며 부천사람이 있다.

 누가 더 옳다는 소리가 아니다. 누가 더 아름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마다 제가 선 자리에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되는 가운데 아름다이 살아가면 된다.

 다만,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 이름값하고 돈과 지위와 일거리와 홍보 따위에 휘두르려고 인천과 배다리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인천 토박이만 인천을 말하란 법이란 없다. 아주 마땅한 소리이다. 그러나 인천을 말하고 싶으면 인천을 말해야지, 왜 인천을 팔아먹고 있을까? 배다리를 말하고 싶으면 배다리를 말해야지, 왜 배다리를 비틀면서 팔아먹는가?

 인천이란 인천 토박이와 인천에 깃든 사람들 삶터이다. 배다리란 인천땅에서 낮은 자리 여느 사람들이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오순도순 북적이던 골목동네요, 한국전쟁 무렵부터 헌책방거리로 자리잡은 곳이다. 인천을 인천 아닌 엉뚱한 곳인 양 떠드는 이들은 정치꾼만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을 내세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배다리를 배다리 아닌 얄딱구리한 곳으로 덮어씌우며 팔아치는 이들은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만이 아니다. 문화이니 예술이니 들먹이는 이들과 모임도 매한가지이다.

 제발 입 좀 다물면 좋겠다. 제발 다른 데에서 돈벌이를 하면 좋겠다. 인천은 인천 그대로 놓아 주고, 배다리는 배다리 그대로 살려 주면 좋겠다. 좋은 노래와 춤사위가 있으면서 책을 즐길 수도 있다만, 조용한 가운데 차분한 마음결이 되지 않고서는 책을 삭일 수 없다. 인천이 왜 인천이고, 배다리가 왜 배다리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인천이고, 어디에서 인천이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배다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며, 배다리가 왜 배다리이고,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얻었는지를 길디긴 흐름과 기나긴 삶자락과 여느 사람들 눈물 콧물 웃음 땀방울로 돌아보는 사람들 가슴에 쓰라린 생채기를 남기는 모든 지식인들은 당신들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부질없는 꿈일는지 모르나 하도 답답하고 갑갑해서 한 마디 적는다. (2010.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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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배다리'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모든 지식인을 두고 쓴 글이다만, 이들 배다리를 내세우는 지식인들과 문화인과 예술인과 운동가들은 이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느낀다. 그러나 배다리 주민으로서 더는 참고 지켜볼 수 없기에 글조각이나마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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