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마음


 잘난 사람이 쓴 잘난 책을 읽으면 잘난 마음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느낀다. 못난 사람이 쓴 못난 책을 읽으면 못난 마음으로 어줍잖게 우쭐거리는 얼굴이 어떤 빛인가를 느낀다. 고운 사람이 쓴 고운 책을 읽으면 고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느낀다. 착한 사람이 쓴 착한 책을 읽으면 내 낯이 붉어지기보다 내가 걸어갈 착한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느낀다. 큰소리치는 겉치레 사람이 쓴 큰소리에 물든 겉치레 책을 읽으면 이런 겉치레와 큰소리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느낀다.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고 투박하게 엮은 책을 읽으면 내 삶이 어느 만큼 수수하거나 투박한가를 돌아보며 내가 가꿀 내 삶이 어떤 결일 때에 즐거울까 하고 곱새긴다.

 이름있는 아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더 잘나거나 더 못나지 않다. 이름없는 저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덜 여물지 않다. 이름있는 출판사 책보다는 뜻있는 출판사 책을 고를 때가 한결 아름답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뜻있는 출판사가 품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는 눈이 퍽 얕다. 스스로 뜻있게 살림을 꾸리지 않는다면 겉껍데기 뜻인지 속차림 뜻인지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부터 뜻있게 살아가고 있어야 뜻있는 출판사에서 땀으로 일군 뜻있는 책을 알아보며 기쁘게 장만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사람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옆지기와 짝을 짓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온누리를 살피고 책을 알아보며 고갱이를 받아먹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한껏 깊다면 한껏 깊은 책에 서린 넋을 읽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몹시 얕다면 몹시 얕은 책에 덧발라 놓은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간다.

 우리는 신영복 님 책을 읽을 노릇이 아니라 신영복 님 삶을 받아들일 노릇이다. 법정 스님 책을 찾아 읽으려고 아둥바둥거릴 노릇이 아니라 법정 스님 삶을 살펴 받아안을 노릇이다. 이 땅에는 신영복 님이나 법정 스님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한편, 이분들처럼 이름이 높지 않으면서 거룩하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도록 조용히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많다. 다만, 우리들은 이름을 스스로 낮추어 사람들 앞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당신 둘레 삶자리를 아름다이 여미는 몸짓을 제대로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용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찾자면 우리부터 조용하고 아름다이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자가용 제발 버리라고 그토록 외친 권정생 할아버지인데, 권정생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에 시외버스나 기차로 안동역에 내려서 걸어걸어 고개를 넘어간 이는 몇 사람이었을까. 당신하고 마음벗이었던 이오덕 할아버지를 빼고 꾸준하게 낮은걸음으로 찾아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북돋운 사람은 누가 있을까. 자가용을 단단히 붙잡을 뿐 아니라 크고 빠르고 비싼 차에다가 아파트 열쇠까지 주렁주렁 매달면서 권정생 할아버지 책, 이를테면 《몽실 언니》이든 《하느님의 눈물》이든 《우리들의 하느님》이든 떠받든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으랴. 덧없는 몸부림이고 돌아오지 않는 산울림이다.

 반 고흐 책을 읽으면 반 고흐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미우라 아야코 책을 읽으면 미우라 아야코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류영모를 읽으면 류영모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반 고흐와 미우라 아야코와 류영모를 지식조각으로 머리에 집어넣는다고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신영복 님 책이든 법정 스님 책이든 그토록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지만 이 나라에 아름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책을 읽는 마음이 처음부터 그릇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마음을 참되고 착하고 곱게 추스르지 않고, 너무 일찍 책을 장만해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쿠리 영감은 네 주제를 알라고 했다는데,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들 주제를 알고 당신들 주제를 빛낼 길을 걸으며 책을 삼키는 사람은 더없이 드물다. 책을 읽으려면 가난해야 하고, 가난해지면 내 이웃이 보이며, 내 이웃이 보인 다음에는 내가 서 있는 터전과 자연을 알아챈다. (4343.5.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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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5-03 20:57   좋아요 0 | URL
찬찬한 글, 찬찬히 읽고 싶어 별찜하고 갑니다.

파란놀 2010-05-04 14:4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빨래하는 마음


 이 옷을 누가 입는가 헤아리며 손빨래를 한다. 이 옷을 입는 사람이 사는 터전은 어떠해야 좋을까 곱씹으며 비빔질을 한다. 빨래할 때뿐 아니라 밥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밥을 누가 먹는가 생각한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어떻게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면 좋은가 돌아본다. 내가 쓰는 글은 누가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되뇌어 본다. 내 어줍잖은 글 하나를 읽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어떤 생각으로 펼쳐 나가면 좋은가를 가만히 톺아본다. 빨래하는 마음은 밥하는 마음이고, 밥하는 마음은 걸레질하는 마음이며, 걸레질하는 마음은 아이를 안고 동네마실을 하는 마음이요, 아기수레 아닌 어버이 품으로 아이를 보듬는 마음은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이다.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은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이고,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은 호미질 하는 마음이다. 호미질 하는 마음은 바느질 하는 마음이고, 바느질 하는 마음은 설거지를 하고 내 어버이 등과 허리를 부드러이 주무르는 마음이다. (4343.5.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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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야기 - 사진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전민조 엮음 / 눈빛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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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꾸몄다고 다 책이 되지 않는다
 [다들 잘 모르는 사진책 1] 전민조 엮음, 《사진 이야기》(눈빛,2007)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올 2010년 5월 19일부터 새로운 사진잔치를 엽니다. 이번 사진잔치는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이름을 내겁니다. 나이가 들어 저절로 신문사 사진기자 일을 그만둔 뒤로 해마다 다른 사진감을 선보이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으신데, 여섯 해째 꾸준히 마련하는 새로운 사진잔치를 하나씩 들여다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랍고 반갑습니다. 전민조 님은 ‘새 사진감을 찾아 사진을 만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바쁜 틈을 쪼개어 ‘당신한테 가장 아름답고 좋을 사진을 찍어서 갈무리한’ 끝에 이렇게 해마다 당신 사진곳간에서 알찬 보배를 하나씩 꺼내어 우리들한테 선물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무언가 톡톡 튀거나 남다르거나 뜻깊을 사진감’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괜찮다 싶은 사진감이 나오면 몇 해에 걸쳐 신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고는 사진잔치를 한 번 열거나 사진책을 하나 내놓고는 이 사진감 또한 슬며시 내려놓습니다. 꾸준히 이어가며 당신 마음밭을 일구는 사진찍기가 아니라 ‘작품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 사진찍기입니다.

 전민조 님은 지난 2007년에 엮은 책 《사진 이야기》에서 “셔터만 누른다고 모두 작품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정직하다. 벽에 걸어 놓기 좋은 아름다운 사진만 찾는 사람들, 또 그런 사진만 찍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진의 발전은 어둡다(머리말).”고 이야기합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고 모두 사진이 되지 않으나,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모두 사진이 됩니다. 찍은 사진을 그러모아 책을 묶는다고 모두 사진책이라 할 수 없으나, 찍은 사진을 그러모으면 모두 사진책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쏟아 아끼는 사이가 모두 사랑하는 사이라 할 수 없으나, 마음을 쏟아 아끼는 사이란 모두 사랑하는 사이일 때하고 매한가지인데, 이 대목을 곱다시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퍽 드뭅니다. 전민조 님이 “카메라는 정직하다”고 읊은 이야기를 속깊이 읽어내는 사진쟁이란 몇 안 됩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모두 사진쟁이는 아니나 사진을 찍으니 모두 사진쟁이요,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 우리 삶을 종이에 담아내기는 하나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 우리 삶을 종이에 담아내지 않기도 한데, 이를 우리들 가운데 몇몇이나 곱씹고 있으려나요.

 《사진 이야기》라는 사진책은 사진일을 하거나 사진밭에 몸담은 사람들이 쓴 글에서 ‘사진을 읽는’ 고갱이가 되는 넋을 담은 글을 간추려서 묶었습니다. 1994년에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오동명 님은 대낮에 술에 절어 있는 전두환 씨를 사진으로 찍던 일을 되돌아보며, 전두환 씨가 당신을 바라보며 “필름 아껴 쓰라우” 하고 큰소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남겨 놓습니다. 월간조선에서 사진팀장을 하던 이오봉 님은 당신 후배들한테 “취재현장에서 예의를 갖춘 사진기자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몽각 님은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었다”고 말하면서 당신 아이를 사진으로 담은 까닭을 밝히고,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만일 한국이 남태평양의 산호초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섬나라였다면 굳이 내가 취재하고자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얼마 앞서 《황천의 개》라는 사진책이 옮겨진 후지와라 신야 님 1993년판 《인도방랑》이라는 사진책에는 “보잘것없는 여행을 하고 있을 때는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만난다”는 말마디가 적혀 있고, 1926년에 태어나 1967년에 《포토그라피》라는 잡지에 글을 쓴 조중 님은 “사진이 예술이냐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왜 찍었느냐에 따라 분간될 성질의 것이며, 한 장의 사진이 예술사진이냐 하는 것은 그 사진에 담겨 있는 내용이 문제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펼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꾸리며 다 다른 사진을 찍는 한편 다 다르게 사진을 바라봅니다. 《사진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백 사람이면 백 가지 사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고, 백 사람으로 백 가지뿐 아니라 즈믄 가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사람에 따라 다른 삶이니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거든요. 사람에 따라 다른 눈길이니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양으로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을 일굽니다. 다 다른 이야기가 다 다른 아름다움과 눈물웃음을 자아내면서 다 다른 문화나 예술로 자리매깁니다.

 다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다 다른 내 목숨이요 넋임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슷비슷하거나 그냥저냥 ‘벽에 걸어 둘 만한’ 작품만 태어납니다. 이래저래 ‘꽤 볼 만한 사진책’이 태어나거나 ‘세계 사진 역사’에 이름 하나 걸칠 작품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아름다운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진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삶에서 비롯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넋을 보듬는 가운데 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란 사진기 단추를 누르며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글이란 연필을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그림이란 붓을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그러니까, 살림이란 걸레 칼 도마 비누 따위를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이겠지요. 아이 하나란 어버이 손길과 마음길로 보듬으며 일구는 고운 목숨이면서 스스로 문화이며 예술일 테지요. 자연이란 풀과 나무와 짐승들이 골고루 어우러지면서 스스로 이루는 문화이며 예술이고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바로 우리 살림과 우리 목숨과 우리 자연을 어루만지는 가운데 샘솟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진 이야기》는 우리들 누구나 다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 대목을 건드리는 작은 사진책입니다. (4343.4.30.쇠.ㅎㄲㅅㄱ)


― 사진 이야기 (전민조 엮음,눈빛 펴냄,2007.8.20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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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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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다섯 붙였지만, 장석봉 번역이 엉터리라서 내 점수는 9점이다) 

 
 이 책 하나 136 ― 묻힌 삶, 묻힌 사람, 묻힌 터
 : 팔리 모왓, 《잊혀진 미래》


- 책이름 : 잊혀진 미래
- 글쓴이 : 팔리 모왓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달팽이 (2009.11.12.)
- 책값 : 15000원


 (1) 아이를 키우는 힘든 삶이란


 아이와 함께 마실을 다니면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때때로 만납니다. 어르신들은 아이한테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탕이나 과자를 쥐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둘레 어른들한테서 사탕이나 과자를 곧잘 얻어먹었지 싶습니다. 이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안 좋아하셨고, 둘레 어르신들한테 아이한테 사탕이나 과자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집에서 먹지 못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고 싶었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가 아이였을 나이에서 서른 해가 훌쩍 지난 오늘날은 지난날과 뒤집어진 일이 나타납니다. 우리 아이가 둘레 어르신한테서 사탕과 과자를 받아먹고, 저는 아버지 된 몸으로 이런 사탕 선물과 과자 선물이 못마땅하고 힘겹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사탕 하나 준다고 뭐 어때서?’이고 ‘사탕 때문에 이가 썩을까 봐 걱정하나?’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깥에 나와 사람들한테서 자꾸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어 버릇하면 무엇보다 ‘밥을 잘 안 먹으려’ 합니다. 다음으로, 바깥에 나오면 으레 누군가 무엇을 먹으라고 준다고 생각합니다. 밥때에 맞추어 한창 밥을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할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아이가 얼마나 땡깡을 부리는지를 사람들이 옳게 느껴야 하고, 선물받는 고마움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면서 무언가를 쥐어 주든 해야 할 줄을 어른들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깟 사탕 하나인데 뭐?’ 하고 생각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아니거든요. 당신 같은 어르신을 한 사람만 만나지 않거든요. 어느 날은 사탕만 자그마치 열 알이나 받아야 한 적이 있거든요.’ 하고 대꾸를 하지만, 늘 이렇게 대꾸를 하자니 고단하고 지칩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짐을 꾸려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아픈 옆지기가 조용히 명상 수련을 다녀오고 속 다스리는 약을 먹을 수 있게끔 아이는 아빠가 데리고 아빠 볼일 보러 가는 자리에 갑니다. 계단만 보면 꼭 저 스스로 하나씩 디뎌야겠다는 아이는 아무리 힘들어도 계단 끝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다 오르거나 내려가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사탕 한 번 과자 한 번 받아먹은 아이는 밥때가 되어도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젠장 제기랄 하고 구시렁댑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이는 제 아빠가 사탕이나 과자가 아닌 밥을 주니까 고개를 도리질하거나 홱 돌리는데, 다른 사람이 밥술을 떠서 냠냠 하고 말하면 새끼 새들처럼 입을 쩍 벌립니다. 아주 말괄돼지인 녀석이 이때만큼은 고분고분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출판사 분들한테 말씀해서 한 숟갈씩 아이한테 내밀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먹을까요?’ 하고 궁금해 하던 분들이지만, 막상 숟갈을 아이한테 내미니 도리질 한 번 없이 곧바로 밥을 낼름낼름 먹으니 놀라 합니다.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어머니가 떠 주는 밥술은 잘 안 먹고, 둘레 다른 어른들이 떠 주는 밥술은 낼름낼름 받아먹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심통이지만 심통을 부리고, 둘레 어른들한테는 귀여운 척을 떨지 않았느냐 싶어요. 어머니가 골을 내거나 힘들어 할 만큼 미운 짓을 했달까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젓가락질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나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했을 테고요. 깔작깔작거리면서.

 낮잠을 넘기고 졸음을 참아 가며 놀던 아이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듭니다. 팔이 저릴 무렵 잠든 아이를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으려 하니 스르르 눈을 뜹니다. 좀 누워서 잠을 자 주면 아빠가 서울 마실 나와서 볼일을 마저 보고 얼른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쩌는 수 없구나 싶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빠가 아이한테 미안한 노릇이며, 이래저래 일을 얼추 마무리짓고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쯤에 서울 홍대앞에서 전철을 탑니다. 삼십 분쯤 일찍 일어설 수 있었으면 신도림역에서도 한결 느긋했을 터이나 이때를 놓쳐 꽤 북적이고 미어터집니다. 이런 ‘반쯤 지옥철’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린이한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아마 ‘뭐야, 이런 때에 왜 아이를 데리고 타고 법석이야?’ 하고들 여깁니다. 그렇지만 누군들 좋아서 미어터지는 때에 아이와 함께 전철을 타겠습니까. 제가 뭔 부자라고 인천까지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겠습니까.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 담은 가방은 겨우 짐칸에 올렸지만, 아빠 책과 다른 짐이 든 무거운 가방은 등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이한테 자리 하나 내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어르신 아닌 분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고, 여느 자리에 앉은 젊은 사람들은 손전화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저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 아이나 조카나 아는 사람 아이가 앞에 있다면 이렇게 모른 척하거나 남 일로 여기지 않았겠지요. 생각하기를 잊은 사람들이고, 마음쓰기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어른들도 지옥철이나 반쯤 지옥철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갓난아이나 어린이라면 훨씬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더구나 아이는 키가 작으니, 바닥에 서 있으면 캄캄한 우물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는 꼴입니다. 내내 안겨야 해서 더 답답한 아이가 바닥에 서고 싶다며 하도 찡얼거려 내려 주니, 바닥에 서 있기가 훨씬 괴롭다며 다시 안아 달라 해서 안습니다. 틀림없이 아이 찡얼거리는 소리를 아이 둘레에서 ‘밀치는’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 쪽으로 ‘안 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인 저한테 밀치면 그저 그럴 수밖에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이한테 밀치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만큼은 맨앞과 맨뒤가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여성 전용칸’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았다고 느끼는데,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 ‘여성 전용칸’이 생긴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전용칸’을 마련하는 움직임만큼 ‘어린이 칸’을 마련해야지 싶습니다. 자전거를 실을 칸을 마련한다 하고, 바퀴걸상 타는 자리는 일찌감치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이이든 어린이이든 아이를 데리고 타는 어버이가 아이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 오줌을 누이거나 잠든 아이를 눕히거나, 또는 힘든 아이를 안고 어버이 한 사람이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합니다. 고단한 두 사람은 먼저 잠들고 아빠는 좀더 깬 채 책 한 권을 읽고 잠자리에 듭니다. 잠자리에 누워 거듭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서울 마실을 나와 만난 책마을 일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말을 했지만, 아이키우기란 참 힘들고 참 힘든 하루하루가 보람입니다. 힘들게 아이를 키우며 늘 새롭게 배우고 늘 고맙게 고개를 숙입니다. 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기 때문에 지옥철이 아이한테 얼마나 안 좋은가를 새삼스레 깨닫는 한편, 허울좋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라고 하는 긴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몸으로 느낍니다. 이런 이름표를 붙인다 한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여느 도시사람들은 장애인한테든 노약자한테든 영유아한테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한테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이런 딱지를 붙지지 않고서는 이웃사람을 살피지 못하는 도시사람이란 소리입니다. 이런 딱지를 붙인다 한들 가난하거나 힘든 이웃을 헤아릴 줄 모르는 도시사람이란 뜻입니다. 도시란 삶터는 한 사람이 고운 목숨 선물받은 아름다운 삶임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셈입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바라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도시라면, 이웃에 앞서 나 스스로 내 목숨이 얼마나 고운지를 느끼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자연을 밀어내고 시멘트와 쇠붙이만 가득 채운 도시이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이 깃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 제아무리 자연이 어떠하고 생태가 어떠하며 환경이 어떻고 저떻고 떠든들, 도시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란 힘듭니다. 아니, 도시사람은 ‘자연스럽게(생태적으로)’ 살 수 없어요. 자연이 없는 곳에서 어찌 자연스레 살겠습니까. 자연이 있는 곳에서조차 숱한 공장과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얼룩져 있는걸요. 게다가 한국땅에 골프장이 좀 많습니까. 한국땅 국립공원에조차 하늘차와 주차장과 기차길 구멍과 고속도로 고가도로 따위가 오죽 많습니까.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는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용을 쓰는 꼴이고 몸부림을 치는 판입니다. 좀더 밝은 앞날을 생각하자고, 더욱 따뜻한 터전을 일구자고 애쓰는 흐름이 얕게나마 있습니다.

 다만, 일찍 눈을 뜬 분들 말마따나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는 분들마저 당신 아이들을 학원에 넣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일류대학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내몹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읽은 사람치고 이이를 우러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막상 권정생 할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자가용을 버려서 이라크 파병을 막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촛불만 든다고 이라크 파병을 막겠습니까.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지요. 우리들은 촛불은 들었어도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국가보안법이든 막지 못합니다. 더욱이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무어나 외치기 앞서 내 삶터에서 자가용을 버려야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가용을 버리고, 다음으로는 아파트를 버리며, 차근차근 졸업장과 명예와 권력과 은행계좌를 버려야 합니다. 자가용부터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파트를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좋은 책 읽는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졸업장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호미질하여 푸성귀 얻는 보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은행계좌를 놓지 못하는 사람한테 ‘아이 똥기저귀를 손빨래하는 재미’를 나눌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와 가까이 맞닿거나 도시 둘레에서 복닥이는 삶자리로서는 잃어버린 하루로 머뭅니다. 잃은 어제요 잃는 오늘이요 잃을 앞날입니다. 처음에는 잃지만 차츰차츰 잊는 어제가 되고 잊는 오늘이 되며 잊는 앞날이 됩니다.


 (2) 묻힌 삶을 아로새겨 놓은 《잊혀진 미래》


 1921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이곳저곳을 마실하면서 자랐다고 하는 팔리 모왓 님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두 번째 유럽전쟁에서 총을 들었고, 전쟁이 끝난 뒤 북극땅에 머물며 글쓰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무렵 처음 쓴 책이 《잊혀진 미래》입니다. 당신 스스로 흰둥이이면서 당신과 같은 흰둥이들이 북극땅을 비롯한 온누리 토박이 삶을 어떻게 헤집고 토박이 삶터를 얼마나 일그러뜨리거나 무너뜨리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팔리 모왓 님 책이 2003년에 《울지 않는 늑대》(돌베개)라는 이름으로 처음 옮겨졌습니다. 2005년에 《걸어다니는 부엉이들》(북하우스)과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북하우스)가 옮겨졌으며, 2009년에 《안 뜨려는 배》(양철북)가 옮겨졌습니다. 《잊혀진 미래》는 다섯 권째 옮겨진 팔리 모왓 님 책입니다.

 당신 책을 즐겨읽거나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한 권 두 권 꾸준히 우리 말로 옮겨집니다. 흔한 말로 잘 팔리는 책은 아닌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인데, 잘 팔리지는 못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많이 읽히지 못하는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이지만, 다문 천 사람이든 만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에 깃든 깊은 넋과 너른 얼을 고맙게 받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싶습니다.

 팔리 모왓 님이 태어난 1921년을 헤아려 봅니다. 이무렵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아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1921년이 아니라 2010년을 돌아보았을 때에도 ‘학교에 안 넣고’ 세상을 넓고 깊게 배우도록 이끌어 줄 어버이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2007년에 제 고향 인천에 돌아온 뒤로 가끔 학교(고등학교) 후배를 만납니다. 학교 후배들은 대학 입시를 걱정합니다.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 무슨 학과에 가야 좋을지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무슨 꿈을 이루고 싶은지는 제대로 걱정할 줄 모릅니다. 아주 드물게 한두 젊은 넋들은 ‘학교 아닌 꿈’을 이야기합니다. 거의 모든 젊은 넋들은 ‘꿈 아닌 학교’를 이야기합니다. 아니, 꿈이란 없이 학교에 매여 있다고 할까요. 젊은 넋 스스로 너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이요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 넋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스스로 못 깨닫기도 하고, 둘레에서 일깨우지 못하기도 한달까요.

 후배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가지 말며 꿈이 있으면 대학교에 가든 말든 네 길을 찾으라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어디에서든 알바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어 네 살림돈은 네 스스로 벌라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한 해쯤은 길게 휴학을 하며 한 해치 등록금만큼을 너희 어버이한테 얻어서 ‘나중에 갚을게요’ 하고 말씀드리며 한 해치 등록금 천만 원으로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한 해 동안 샅샅이 누벼 보라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학부모나 청소년이나, 누구라 할 것 없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바쁩니다. 참으로 바쁜 나머지 이웃이고 살붙이이고 동무이고 나 스스로이고 돌아보지 못합니다. 팔리 모왓 님은 당신 이름과 돈과 힘을 내려놓고는 추운 땅 사슴겨레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살았습니다만, 오늘 이 나라에서 내 이름과 돈과 힘을 이렇게 고이 내려놓고 지내고자 하는 분이란 거의 없습니다. 더 붙잡으려 하지 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거머쥐려 하지 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치를 때에 내 앎을 살핀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보다 나은 점수를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나한테 살기 좋은 집이면서 내 이웃하고 어우러지는 집을 찾지 않는 매무새입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자가용을 씽씽 내달리는 사람은 저 혼자만 살겠다는 몸짓입니다. 좁은 골목길에는 처음부터 자가용을 들이밀지 말았어야 했고, 어쩌는 수 없이 자가용을 들이밀었다면 골목사람 발걸음 빠르기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려야 합니다. 학교 앞에서는 30킬로미터 넘게 달리면 안 된다고 못박아 놓고 있는데 학교 앞에서 30킬로미터 밑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골목길에서는 30킬로미터가 아닌 15킬로미터쯤으로 달려야 옳습니다. 학교 앞에는 아이들만 있으나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못한다는 우리들이기 앞서 생각을 버린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생각을 잃은 우리들이요, 그예 생각을 잊고 마는 우리들이구나 싶습니다.

 생각을 못하는 동안 우리한테 아름다울 삶을 차츰 멀리합니다. 하루하루 멀리하다가는 이내 멀어지고, 이내 멀어지면서 저절로 등을 돌리며, 등돌린 채 지내다가는 아예 파묻습니다.

 착한 마음밭을 파묻습니다. 참된 마음결을 파묻습니다. 고운 마음씨를 파묻습니다.

 듣기 좋아 무슨무슨 공동체인데, 공동체이기 앞서 착한 사람 참된 사람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 해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이 되면 무슨무슨 정책이나 반대이다 무어다 하고 떠들썩한데, 스스로 얼마나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후보를 아직 본 적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착하게 살면 돈을 못 벌겠지요. 참되게 살면 이름을 못 얻겠지요. 곱게 살면 힘을 늘릴 수 없겠지요. 돈도 좀 벌고 이름도 좀 얻고 힘도 좀 키우고 싶으니, 우리 스스로 저절로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길을 걷겠지요.

 1940년대까지는 어찌저찌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슴겨레 사람들이 2010년대에 살아남아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한국땅에서는 이런 소식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조금은 살아남았을는지, 다시 살아났을는지, 그예 씨가 말라 버렸을는지, 아주 박물관 유물처럼 목숨만 가까스로 이으면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슴겨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당신들 살림살이를 그토록 추운 땅에서 수천 해에 걸쳐 이어왔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은 살아남았습니다. 도톰한 책 《잊혀진 미래》에 잊혀질 수밖에 없던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 이야기가 눈물겨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한국땅에서도 우리들 착하고 참되고 곱게 살아갈 이야기를 눈물겹거나 웃음짓도록 아로새길 만한 슬기로운 글쟁이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3) 못내 아쉬운 번역인 《잊혀진 미래》


 《잊혀진 미래》를 내놓은 ‘달팽이’ 출판사는 지난 2003년부터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바지런히 펴내고 있는 1인 출판사입니다. 요사이야 1인 출판사가 꽤 늘었지만, 2003년 즈음부터 1인 출판 외길을 걷는 곳은 드뭅니다. 이무렵 1인 출판사를 꾸린 달팽이 출판사는 책마을에서 ‘저러다 그만두겠지’라든지 ‘미친 짓이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출판사 이름 ‘달팽이’마냥 느릿느릿 책살림을 꾸리면서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한 권 두 권 내놓고 있습니다. 달팽이 걸음 출판사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달팽이 출판사 책은 꼭 달팽이 걸음만큼 팔리고 읽히며 받아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홀로 온갖 일을 다 해내야 하는 만큼 벅차기도 할 텐데, 이래저래 헤아린다 하여도 이번에 나온 《잊혀진 미래》는 번역이 몹시 엉성합니다. 아무래도 번역하신 분이 애벌 원고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넘기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틀림없이 한글로 된 책인데 앞뒤 흐름이 엉성한 글월이 대단히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이런 엉성한 번역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채 책을 내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와 함께 오탈자가 꽤 많습니다. 출판사 살림이 많이 힘들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될 텐데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힘들면 둘레에서 자원봉사를 받아 교정교열을 한 번쯤이라도 더 거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래도 워낙 줄거리가 탄탄하고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제 마음속으로는 ‘애벌 번역 책’을 ‘두벌 번역’ 하면서 읽습니다. 종이에 찍힌 글월 그대로 읽지 않고 이 글월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곱씹으면서 더욱 더디게 읽습니다.

 말끔하고 정갈하게 추스른 책이었다면 이 놀라운 이야기 《잊혀진 미래》를 금세 읽어치우고 덮었을 수 있겠다고 봅니다. 꽤 엉성궂은 애벌 번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탓에, 더욱 더디게 곱씹으며 읽고, 몇 번 읽은 글월을 다시금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면서 지난날 사슴겨레 사람들 슬기와 삶을 제 마음자리에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좋은 번역이었다면 좋은 번역대로 고맙고, 얄궂은 번역일 때에는 얄궂은 번역대로 고맙습니다. 그래도, 애써 읽는 책이라면 얄궂은 번역보다는 좋은 번역이기를 바랍니다. 책을 낸 출판사 사장님과 번역을 한 분께서 아무쪼록 우리 말과 글을 새삼스레 뒤돌아보며 새로 배우시면 기쁘겠습니다. 서툰 번역일지라도 이런 책 하나 묻히지 않고 우리 말로 나온 일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4343.4.29.나무.ㅎㄲㅅㄱ)


[12, 27, 56쪽] 대략 1960년대부터 우리는 에스키모들의 생존을 보증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정책을 추구해 버렸다. 옛날부터 내려온 에스키모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빼앗아 버리고는 우리의 근대적 기술사회의 틀로 억지로 끼워맞추는 데 가혹하고 획일적인 노력을 해 온 것이다 … 분명 이들은 배런스의 무자비한 자연에 대항하여 힘들게 투쟁하며 사는 데 온힘을 쏟아부어온 사람들이어서, 서로를 해치는 데 그 힘을 사용하려는 결심이나 바람은 가져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스쳤다 … 눈보라는 단지 하루 동안 불었지만, 스텔라가 캠프로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이 소녀가 거의 아무 음식도 없고 침구도 없이 2주 이상을 지내며 툰드라의 한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아이들이 이 땅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척도다.

[24, 67, 311쪽] 공부를 해 가면서, 북극이 얼어붙은 강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강과 호수의 세계여서 그곳의 푸르고 깊은 물 양 옆으로 여름철 꽃과 넓게 뻗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북극이 얼음 덮인 세계의 꼭대기이기도 하지만, 한여름 더위 속에서는 생명으로 우글거리고 수없이 많은 만개한 식물의 빛깔로 빛나는 거의 200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완만한 평원지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누이트’는 이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고유한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로써, 인디언들이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그제야 나는 배런스에서는 부식과 부패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기억했다. 깨끗한 태양과 바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돌무더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된 순간의 모습 그대로 수세기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도록, 나무와 뼈가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71, 93, 105∼106, 150쪽]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보장받는 기간에만 짧게 머물다가 이 땅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파괴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사슴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제 그 사슴 무리들을 보고 나니, 내가 사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이제는 그 거대했던 사슴강은 사라지고 졸졸 흐르는 작은 사슴 시내만 그 지역을 통과한다. 사슴이 그들의 길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 사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슴을 멸망시킨 소총은, 마치 자기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냥한 듯 그 소총을 사용했던 인디어들마저 멸망시켜 버렸다 … 이드텐 부족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기 무역을 위해 사슴을 살육하도록 부추겨졌고, 대규모로 살상되는 사슴은 필연적으로 버펄로에게 일어난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12, 115, 140, 216쪽] 이할미우트 부족은 가볍게 여행하기 때문에 그 부족 사람이 여름에 평원지대를 건널 때면 칼, 담배 파이프, 그리고 카미크라 불리는 가죽부츠 여벌만 챙긴다. 먹을 것은 찾아서 먹는다 … 기계에 대한 본능에 의해 조종되는 백인은 모터로 가는 배처럼 바람과 파도를 뚫고 나가지만, 자신이 타고 있는 복잡한 장비가 완벽하게 기능을 다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환경과 항상 불화하며 산다 … 이할미우트 부족은 사슴의 모든 부분을 먹어야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음식을 섭취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심장, 콩팥, 내장, 간, 그리고 다른 장기도 중요하다 여기며 종종 먹는다 … 그들의 삶 속에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물건을 창조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채우거나, 돌 위에 모양을 파 넣지도 않고, 돌이나 진흙에다 새겨 넣지도 않는다. 배런스 땅을 길고 힘들게 여행해야 할 때마다 아름다운 것을 내버려야 한다면, 그것을 창조하는 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118, 135, 163쪽] 그들을 보고 냄새를 맡은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역겨움이었다. 내 눈에 그들은 너무나 더럽게 보여, 도대체 왜 입을 옷 하나 깨끗한 걸로 찾지 못했는지 의아해 하며 속에서는 백인의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솟구쳐올랐다 … 내가 조금은 까다롭게 고기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그래서 나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내 두 손으로 고기를 잡아 이빨로 물어뜯어 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 이할미우트 부족의 언어에는 ‘사슴’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데 수십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가 지닌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차이를 내 충분치 못한 기억력에다 과도하게 집어넣는 것을 현명하게 자제한 우테크는 내가 사슴에 대해 말해야 할 때 가능한 모든 경우에 사슴의 총칭만을 사용하도록 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른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줬다.

[166, 200, 215쪽] 우테크의 설명으로, 영구적인 캠프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우선 세 가지 주요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의 생명인 사슴이 찬성할 것인가?’이다 … 그녀의 바느질은 바라보고 있으면 경이로운 작업이다. 여름용 부츠는 반드시 방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바느질 솜씨로 꿰맨 솔기 부분 틈에 완벽하게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렇게 꿰맨 부분이 너무나 섬세해서 육안으로는 전혀 바느질 땀수를 셀 수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호우미크가 이렇게 바느질을 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 그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창조의 노동이다. 새 카약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나이 많은 헤크와우는 자신의 일 속에 빠져 무아지경이 돼 버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창조해 낼 때 누리는 미묘한 즐거움을 그는 알고 있다.

[206∼208쪽] 이할미우트 아이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절대로 체벌을 받지 않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을 결코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듯 그는 격렬하게 응수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까?” … 그 아이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결코 배운 적이 없다. 그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관찰하고 흉내를 내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뿐이다 … 어떤 지배나 엄격한 일과도 아이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다. 졸리면 잔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있는 한 언제나 먹는다. 말이나 훈련으로 배우는 것보다 놀이를 통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놀고 싶어하면 아무도 막지 않고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준다 … 아이는 부모의 반대라는 그림자나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 없이 놀면서 배우는 것이다.

[245, 255, 368쪽]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내 어린애 같은 이기성의 폭발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나란 사람이 암컷 늑대가 자기 새끼를 소중히 지키듯 내 물건에 몹시 집착하는 불행한 미개인쯤으로 이해되었다 … 장로회도 경찰도 없다. 입법 기관 같은 것도 없으며, 엄밀히 말하면 이할미우트 부족은 무정부 상태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법이라는 경직된 규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족은 서로 사이좋게 사는데, 이것의 비결은 인간의 의지와 인내의 힘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협동이다 …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426, 428, 439쪽] 구호품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들이 직접 먹고살 수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만 한다.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원시 부족들에게도 자선은 파멸을 초래한다 … 우리는 반드시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줘야 한다 … 북쪽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식단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먼 지역에서 수입한 이상한 식품을 위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기초 생산품을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몰상식한 이야기다 … 우리의 극지방처럼, 그린란드 땅 대부분이 유럽인이 거주하기에는 불리한 자연 그대로의 땅이다. 그러나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 땅의 일부인 까닭은, 그 황폐한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번성하는지 오래 전 배웠던 에스키모의 육체적, 정신적 유산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백인의 경제적 욕심을 위한 농노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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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 - 2010년 칼데콧 상 수상작 별천지 제리 핑크니
제리 핑크니 글.그림, 윤한구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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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을 읽는 어른과 어린이
 [그림책이 좋다 78] 제리 핑크니, 《사자와 생쥐》



- 책이름 : 사자와 생쥐
- 그린이 : 제리 핑크니
- 옮긴이 : 윤한구
- 펴낸곳 : 별천지 (2010.3.10.)
- 책값 : 9000원



 (1)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이란


 엊그제부터 《이누야사(犬夜叉)》라는 만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일본 만화쟁이 타카하시 류미코 님이 1996년부터 그린 쉰다섯 권에 이르는 긴 만화인데, 1986년부터 그린 《란마 1/2》보다 훨씬 길고, 이보다 앞서 그린 《1파운드의 복음》이나 《도레미 하우스》보다 훨씬 긴 작품입니다. 《시끌별 녀석들》하고 견주어도 참 깁니다. 쉰 권이 넘는 만화로 예전에 《4번 타자 왕종훈》을 본 적이 있고, 처음 옮길 때 42권까지 나왔다가 뒷이야기로 새로 이어지는 《드래곤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만화 가운데에는 열 권이 넘어가는 만화가 퍽 드문데, 일본 만화에서는 스무 권은 아주 가벼운 셈이고, 마흔 권이나 쉰 권은 으레 찾아볼 수 있으며 백 권이 넘는 만화 또한 꽤 많습니다.

 일본은 만화나라라 하니 이렇게 긴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일본 못지않은 만화나라요, 만화를 즐기거나 그리는 사람 또한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짜임새있고 탄탄하며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만화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듭니다. 더욱이 우리 둘레 여느 삶에서 수수한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알뜰살뜰 만화감으로 잡아채거나 삭여내는 손끝을 만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용구슬 이야기이든 농구 이야기이든 야구 이야기이든, 또 요괴 이야기이든 격투나 무술 이야기이든, 길디길게 이으면서 빈틈이 엿보이지 않도록 그리는 만화결이란 손재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손재주 아닌 훌륭한 솜씨를 바탕으로 그린이부터 스스로 눈물과 웃음으로 젖어들도록 빚어낼 수 있는 생각밭이 있어야 합니다.

 환상이나 판타지 갈래라 해서 오래도록 이어 그릴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초원의 집”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큰 숲 작은 집》 같은 문학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빨간머리 앤》 같은 문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우리들 여느 삶에서 흔히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나 스스로 처음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은 고운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즐거이 살아가면서 뒤돌아본 발자국을 발판 삼아 신나고 멋지고 아름다우며 눈물겨운 이야기를 엮습니다. 하루하루 고단하고 복닥이는 삶을 웃음나는 이야기로 거듭나도록 이끕니다. 나날이 부둥켜안는 사랑스러운 식구와 동무와 이웃 삶자락을 싱그러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북돋웁니다.

 이제 21권째 읽고 있는 《이누야사》 18권 145쪽부터 152쪽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다시금 펼쳐 봅니다. “나는 키쿄에게 생명을 걸고 보답해야 해.” “응. 키쿄는 나와 비교할 수 없어. 그건, 난 살아 있으니까. 키쿄의 일도 많이 생각했어. 키쿄와 난 전혀 달라. 내가 키쿄의 환생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그렇다고 해도 난 키쿄가 아니야. 마음은 내 마음이야. 하지만 한 가지만은 키쿄의 마음을 알았어. 나와 같이, 한 번 더 이누야사를 만나고 싶다는. 키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을 거라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이누야사를 만나러 왔어.” ‘카고메, 나도 너를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나, 이누야사와 같이 있고 싶어. 잊을 수 없어.” ‘카고메,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지?’ “이누야사,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응.” “함께 있어도 좋아?”

 만화책 《이누야사》를 이루는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카고메는 중학교 3학년 아이입니다. 카고메는 1990년대 일본 도쿄에서 고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면서 집안에 있는 오래된 우물을 거쳐 일본 옛 전국시대를 드나드는 동안 새로운 사람과 삶을 만나며 새로운 넋과 몸으로 거듭납니다. 이러는 사이 차근차근 무르익는 마음밭은 ‘나는 이누야사와 살아가고 싶어. 즐거운 일이 있어도 좋아. 맘껏 웃고 싶어. 나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계속 옆에 있을 거야.’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이누야사 손을 꼬옥 잡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중학생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하느냐고 바라볼 만합니다. 열여섯 나이에 무슨 사랑을 아느냐고 비웃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풋사랑이든 깊이 익은 사랑이든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어린 사랑이든 늙은 사랑이든 똑같은 사랑입니다. 열여섯 나이에도 사랑이고 여든여섯 나이에도 사랑입니다.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 되어야 사랑을 알까요. 아니,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면서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노래패 한스밴드는 중학생 나이에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며 노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노래하는 한스밴드 세 사람으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나, 이들 노래를 듣는 사람은 중학생이 부르는 노래에 놀라워 했습니다. 한스밴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노래를 좋아하면 열너덧 살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쉰너덧이나 예순너덧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열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열너덧에도 사회를 나무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서 사회를 꾸짖는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대목은 얼마나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가입니다. 우리가 만화책 하나를 넘기며 헤아릴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얼거리로 아름답게 엮이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노래 하나를 귀기울여 들으며 살필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목소리를 타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입니다. 고갱이는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입니다. 사람마다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맞아들이는 테두리와 깊이는 다를 텐데,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에 따라 얼마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가를 느끼면서 어루만져야 합니다.

 스물한 달째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 노릇을 하는 동안 날마다 같은 그림책을 아이한테 수없이 되풀이하며 읽히고 보이고 쥐어 줍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같은 그림책을 날마다 수없이 되읽고 또 넘기고 새로 쥐어들곤 합니다. 인형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놀잇감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새로 만지고 새로 늘어놓으며 새로 쌓아 놓습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며 만나는 엄마 아빠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맞이하듯, 날마다 같은 책 하나를 놓고도 새로운 느낌과 마음으로 마주합니다. 어버이 된 저나 옆지기 또한 아이를 날마다 새로운 눈길과 손길로 마주합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힐 때에도 날마다 다른 목소리와 매무새로 읽힙니다. 날마다 해서 먹이는 밥이든 날마다 빨래해서 입히는 옷이든 겉보기로는 똑같은 흐름이요 물건이며 살림새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똑같은 살림새라 할지라도 이 살림새를 다루는 어버이 마음은 늘 똑같지는 않습니다. 늘 새로운 하루에 발맞추어 새로운 마음이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결 하나만큼은 늘 똑같을 뿐입니다.

 아이와 읽을 책이든 어른 혼자 스스로 읽을 책이든, 날마다 새롭게 쥐어들어 새 넋과 얼을 키울 만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알차야 비로소 좋은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아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 책이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우리 스스로 날마다 쥐어들 만해야 하며, 날마다 다시금 쥐어들면서 새삼스럽고 새로운 느낌을 선물받을 만한 얼거리야 한다고 느낍니다.
 





 (2) 이야기하는 그림책 《사자와 생쥐》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말 한 마디 나오지 않고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서울 혜화동 〈책방 이음〉 나들이를 하던 이달 첫머리에 옆지기가 이 그림책을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서 장만하여 읽습니다. 이 책은 비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속그림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속그림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장만했다가 ‘이런, 겉과 속이 다르잖아?’ 하면서 짜증스러웠던 책이 꽤 있던 만큼 못내 걱정스러웠으나, 책 겉장을 이룬 사자 그림과 생쥐 그림으로도 ‘이만한 책이라면 속그림이 우리를 짜증스레 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먼저 책방에서 책값을 셈한 다음 곧장 비닐을 뜯어 책을 펼칩니다. 겉장을 이룬 그림만큼 속을 채운 그림이 어여쁩니다.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사자가 사람이 친 그물에 걸려 버둥거릴 때에 생쥐가 이빨로 그물을 갉아서 살려내는 줄거리란 그림으로만 보여줄 때에 한결 걸맞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에 말로 이야기를 넣었다면 재미나 즐거움이 크게 줄었겠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훤히 알 만한 옛이야기이기에 굳이 글을 안 넣었다기보다, 이 옛이야기란 따로 글 없이 그림으로 넉넉히 보여줄 만합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글을 써서 이야기를 읽힌다 할 때에는 그림이나 사진 하나 없이 이 옛이야기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할 노릇이요, 그림으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할 때에는 오로지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느끼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그린이로서는 생각힘을 한껏 북돋우면서 펼치는 그림책이고, 읽는이로서는 생각힘을 찬찬히 가다듬으면서 즐기는 그림책입니다.


.. 고전을 읽기 책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 드물어진 이후, 고전을 글이 없는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까지도 이처럼 매력적인 고전의 등장인물들이 가족과 설정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 주고 나로 하여금 이야기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도록 하니까 ..  (그린이 말)


 《사자와 생쥐》를 그린 제리 핑크니 님은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제리 핑크니 님이 살아가는 동물원이란 쇠창살 우리에 짐승을 가두어 놓는 동물원이 아니라 ‘자연 동물원’입니다. 쇠가시울타리나 쇠창살이 있지 않은 자연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레 살아가는 짐승을 늘 바라보고 부대끼는 느낌 그대로 그림을 즐긴다고 합니다.

 책끝에 붙은 그린이 소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을 돌아보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연으로 스며들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는 분은 드물고, 도시에 뿌리를 내리거나 한 다리를 걸치거나 온몸을 내맡기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서는 자연다운 자연을 자연스럽게 건사하기 어렵습니다. 국립공원에 하늘차(케이블차)를 버젓이 놓는가 하면, 국립공원을 꿰뚫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아무렇지 않게 뚫습니다. 국립공원에서 고기잡이 밥장사 술장사 번듯하게 이루어지며, 국립공원 아닌 데에서는 아주 막 나갑니다. 시골 논밭을 갈아엎으며 아파트를 세우거나 공장을 짓습니다. 시골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거나 공장을 들입니다. 갯벌을 메워 아파트를 올리거나 공장을 키웁니다. 자연이 자연다울 수 없고, 자연이 자연스러울 수 없습니다. 자연이 조금도 자연다움을 보듬지 못하도록 나동그라지는 곳에서 자연을 싱그럽고 아름다이 펼치는 이야기를 엮기란 몹시 힘듭니다. 자연을 하나도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않는 우리들 터전에서 자연을 사랑스럽고 알차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 그림책을 그리기 힘듭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을 받아들이는 마음그릇 채우며 나라밖 그림책을 옮기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 있어도 지식으로 삼을 뿐입니다. 훌륭한 자연 그림책 하나 옮겼어도 초등학교 낮은학년 때까지만 읽히지,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고등학교 때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길이길이 이어갈 자연을 굽어살피지 않고, 오래오래 사랑할 자연을 껴안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즐긴다는 초등학교 낮은학년이라지만, 이때에도 영어와 한자와 갖가지 지식과 학원 교육에 휘둘립니다.

 애틋한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지만, 이 그림책 하나에 얼마나 애틋함이 묻어 있는지를 느낄 가슴이 자라날 겨를이 없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입니다. 살가운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고 느낍니다만, 이 그림책 하나를 기쁘게 장만하여 넉넉히 나눌 품이 없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한 번 보고 덮는 그림책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한 해에 걸쳐 천 번 넘게 살피는 그림책임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가끔 한 번 넘기면 될 그림책이 아니라, 책꽂이에 꽂힐 겨를이 없이 손길을 타면서 닳고 때가 타야 할 그림책임을 돌아보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만 닳고 낡으며,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좋은 그림책이나 고운 그림책이나 멋들어진 그림책이 닳고 낡지 못합니다. 그림책은 처음 이 책을 쥐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이어가는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희 아이가 다시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을 때에도 물려주는 책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 나는 자연보호구역 바로 옆에 살면서 주변의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에 매료되었다. 특히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면 동물들의 소리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과 함께 서사를 끌어가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  (그린이 말)


 스물한 달을 살아낸 우리 아이한테는 《사자와 생쥐》가 아직 재미난 이야기책이 되기는 힘듭니다. 아이 스스로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고, 엄마나 아빠가 아이 한손을 쥐어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생쥐!” “사자!” “밧줄!” “꽃!” “나무!” “새끼 쥐!” 하면 하나하나 알아듣습니다만, 이 그림책을 자주 펼쳐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 또한 스스로 이 그림책을 펼치는 일은 드뭅니다. 다만, 사자나 생쥐 꼬리를 가리키며 “꼬리!”라 할 때에는 잘 알아듣고, 요 며칠 사이 아이한테는 ‘꼬리’라는 낱말이 재미있는지 이 낱말을 곧잘 읊습니다.

 아이가 제 삶터에서 사자나 생쥐를 만나기란 힘들고, 나중에 시골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쥐 한 마리 만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흔하던 쥐마저 요즈음은 퍽 드문 목숨으로 바뀌었습니다. 귀엽다며 따로 키우는 몇 가지 개나 고양이를 빼놓고 여느 짐승을 도시나 시골 삶터에서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를 넉넉히 나눌 만하지 않고, 우리 자연 벗님을 살가이 담은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자연 벗님 살림살이와 한살이를 꾸밈없이 헤아릴 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도시 물질만능 문명 사회인 탓에 지식을 다루는 이야기책과 그림책만 넘치는지 모릅니다. 사람 또한 자연임을 느끼지 않는 사회인 까닭에 자연을 옳고 바르게 풀어내는 이야기책과 그림책이 제대로 사랑받기 힘드는지 모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서까지 처세를 다루고 경영을 밝히고 돈벌이를 말해야 팔립니다. 아름다운 삶과 착한 사람과 참된 넋을 다루거나 밝히거나 말하는 책인 시시하거나 지루하다고 여깁니다.

 애 엄마와 애 아빠가 이야기를 그때그때 새로 짜내어 읽어 줄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그때그때 늘 새롭게 읽어야 할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읽힐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2020년이 되고 2030년이 되어도 제리 핑크니 님 《사자와 생쥐》는 고이 목숨을 이을 수 있을는지, 우리 나라에서 이 그림책 넋을 깊이 되새기며 우리 땅과 사람한테 발맞춘 새로운 그림책 하나 그릴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4343.4.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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