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식탁 7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손길이 닿아 사랑꽃이 핍니다
 [만화책 즐겨읽기 84] 시무라 시호코, 《여자의 식탁 (7)》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가만히 바라보면 참 커다랍니다. 커다란 손은 두툼합니다. 두툼한 손은 흙빛입니다. 흙빛인 손은 주름이 많이 졌고 곳곳이 갈라졌지만 참으로 따스하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일하고 살림하는 여느 어머니 손을 살며시 쓰다듬으면 꺼칠꺼칠합니다. 허여멀겋거나 누리끼리하기 일쑤입니다. 조물조물 주무르면 거칠거나 메마른 손에 천천히 피 기운이 돕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낳으며, 사람을 보살핀 손을 헤아립니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북돋우며, 사람을 어루만진 손을 떠올립니다.

 할머니 손을 일컬어 약손이라 합니다. 할아버지 손을 가리킬 때에도, 어머니 손을 바라볼 때에도 으레 약손이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손을 두고는 좀처럼 약손이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 “단신부임도 괜찮지 않아? 어렵게 들어간 고등학교인데 전학 가긴 싫단 말이야.” “나도! 지금의 멤버라면 현 대회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으이구. 한다는 소리가 고작. 아빠가 몇 년씩이나 집에 안 계시게 되는데도 서운하지도 않니?” “그치만, 지금도 집에는 거의 없잖아.” (5쪽)
- “아하하하. 왜 따라하고 난리야. 외모보다는 내면이 중요한 거 아니었어? 완전 웃겨. 그거, 전혀 안 어울리거든?” (59∼60쪽)
- “아, 앞으로 좋은 일도 많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제가 보증해요.” (142쪽)



 내 손을 바라봅니다. 내 손으로 얼굴을 슥슥 비빕니다. 하루 내내 고달팠을 발바닥과 발가락과 발목을 살몃살몃 주무릅니다. 등허리와 옆구리를 꾹꾹 누릅니다. 손가락을 세워 머리통을 콕콕 눌러 주무릅니다. 눈 둘레를 주무르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오른손으로는 왼손을 만지작만지작합니다.

 두 아이 가까스로 잠든 밤 열두 시에 밀린 빨래를 조금 합니다. 밤에 방바닥에 불을 넣으며 따순 물이 좀 나오니, 이 물이 아깝다 여겨 빨래를 합니다. 빨래는 다 하지 않습니다. 이따 새벽에 마저 하기로 합니다. 새벽에 다시 방바닥에 불을 넣을 테니, 그때에 생길 따순 물로 마저 빨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밤에 한 번 방에 빨래를 널고, 새벽에 다시 빨래를 널면 집안이 너무 메마르지 않아요. 집일을 하느라 몸이 좀 고단하다지만, 삼십 분쯤 몸을 움직이면 네 식구 즐거이 한밤을 누릴 만합니다.

 낮나절 면사무소 볼일을 보러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함께 다녀옵니다. 요사이는 새로운 길을 달리곤 합니다. 십일월 끝자락이니 낮이라 하더라도 바람이 조금 썰렁하지만, 전라남도 맨 밑자락 멧등성이 포근히 감싼 시골마을은 제법 따스합니다. 이웃 시골마을로 슬쩍 접어들어 우람한 느티나무 옆을 스칩니다. 시멘트로 바른 논둑길을 달립니다. 시멘트 아닌 흙길이나 풀길이면 더 좋으련만 하고 꿈꿉니다. 흙길이나 풀길이라면, 수레에 탄 아이가 아마 “나 내려 줘. 나 달릴래.” 하고 아버지를 불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흙길이나 풀길에서는 아이가 넘어질 때에 무릎이 안 깨집니다. 옷이나 무르팍에 흙이 좀 묻거나 풀잎 푸른 물이 살짝 뱁니다.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에서 아이가 넘어질 때에는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이 까집니다. 때로는 얼굴까지 갈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에서 숨을 얻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한테 둘러싸여야 숨을 쉽니다. 밥도 옷도 집도 흙에서 이루어집니다. 시멘트집 아닌 흙집에서 살아야 비로소 숨을 틉니다.


- ‘왜 다들 아빠가 있는 날의 전골을 하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곁에 있는 기분이 들어.’ (16∼17쪽)
- ‘괜찮은 걸까? 이대로 계속 모르는 체해도. 응, 괜찮을지도. 남친이 있다는 것도 얘기했으니까. 응.’ (41쪽)
- “그래. 용서받으려고 하는 건 비겁해. 그러고는 사과하러 와서 미안하다면서 자기가 엉엉 우는 거야. 난 ‘됐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 차인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동안 계속 뭔가 마음에 걸렸던 건, 그 친구가 나에게 화낼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93쪽)


 한 달을 더 지내면 다섯 살이 될 딸아이한테 ‘심순이’가 되어 주렴 하고 이야기합니다. 다섯 살을 코앞에 둔 딸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가 빨래 개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본 다음 아주 예쁘게 꼭 같이 따라합니다. 혼자서는 아직 엉성하지만, 곁에서 “이런 이런, 이렇게 개면 예쁘지 않아. 예쁘게 개지 않으면 애써 빨래한 옷이 다 구겨져.” 하고 말하면서 척척 갭니다. 옷가지마다 개는 법이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아이는 “아, 그렇구나. 내가 할래.” 하면서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옷을 갭니다. 아이는 심부름 잘하는 예쁜 아이로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아이한테 맞는 삽은 없습니다. 철물점이든 어디에서든 어린이 삽을 만들지 않습니다. 어린이한테 땅을 파라고 시키면 강제노동이라느니 유아노동착취라느니 하고 말하려나요.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 사내아이한테는 동생을 업을 만한 나이가 되면 제 몸에 맞는 지게를 제 어버이가 나무를 하고 깎으며 다듬어서 만들어 줍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아이들 나이에 걸맞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할 뿐 아니라. 아이들 몸과 마음과 삶에 발맞추어 호미이며 낫이며 삽이며 칼이며 도마이며 내어줄 만하다고.

 다만, 이런저런 연장을 아이한테 내주기 앞서, 아이들한테 내어줄 한 가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사랑할 넋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풀과 흙과 바람과 물과 햇살을 고루 사랑할 얼을 내어주는 어버이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날마다 새롭게 마시는 바람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목숨붙이를 예쁘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내어주는 어버이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 “뭐, 내가 코코아는 좀 맛있게 타는 편이지.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되거든.” “와, 나도 타는 법 가르쳐 줘.” “음, 먼저 이 순수 코코아 분말이 필요해.” “순수 코코아 분말?” “응, 설탕과 크림이 다 들어 있는 조제 코코아도 있지만, 이건 아무것도 안 들어 있어서 그냥 먹으면 쓴맛이 나. 하지만 그래서 취향에 맞게 단맛을 조절할 수 있어서 좋아.” (25∼26쪽)
- ‘우리를 잘라내는 것이 쿠니히로에게는 유일한 조절이었을지도 몰라.’ (81쪽)
- ‘분한 마음도 슬픔도, 아아, 버리기는 아까워.’ (114쪽)



 시무라 시호코 님 만화책 《여자의 식탁》(대원씨아이,2011) 7권을 읽습니다. 금세 뚝딱 읽은 다음 찬찬히 되넘기면서 곱씹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이 만화책 1권부터 7권까지 알뜰히 아낄 수 있으리라 바라며 이 만화책을 건사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서로서로 제 손길을 따사로이 돌보면서 저희 삶을 따사로이 일구리라 믿으며 이 만화책을 장만합니다.

 새해에는 8권이 나오겠지요. 이듬해에 9권이 나올는지 모릅니다. 10권에서 마무리될는지 20권까지 나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짧게 끝맺어 아쉬울 수 있고, 오래오래 나오면서 내 하루를 즐기는 길을 새삼스레 돌아보며 기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권이 나오면 새로운 권을 아끼겠지요. 짧게 마무리되면 처음 권부터 끝 권까지 가만히 되넘기면서 내 밥 내 옷 내 집 내 살붙이 내 보금자리 내 마을 내 일놀이 내 꿈을 하나하나 돌아보겠지요.


- “하지만, 주전이 못 되고도 별로 안 슬픈 게, 조금 슬프다는 생각은 했었어.” (109∼110쪽)
- ‘그때 분명히 태어났던 감정을 좀더 소중히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해.’ (129쪽)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 “뭐? 하고 싶은 일?” “그냥 궁금해서요.” “웬. 글쎄, 딱히.” “꿈은요?” “꿈?” (139쪽)



 손을 들어 밥을 집습니다. 손을 펼쳐 밥을 짓습니다. 손을 뻗어 밥을 풉니다. 손을 모아 밥을 담습니다.

 손길이 어리어 사랑입니다. 손길을 모두어 꿈입니다. 손길이 닿아 사랑꽃이 핍니다. 손길을 내밀어 꿈빛을 드리웁니다.

 별 하나에 사랑과 노래를 싣고, 밥 하나에 이야기와 눈물을 싣습니다. 별 하나에 꿈과 춤을 실으며, 밥 하나에 굳은살과 웃음을 싣습니다. (4344.11.25.쇠.ㅎㄲㅅㄱ)


― 여자의 식탁 7 (시무라 시호코 글·그림,장혜영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1.6.15./4200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1-11-26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손길...문득 저의 손을 한번 쳐다봤습니다. 아이 등 긁어줄 때 손끝만으로 긁어주어도 아이는 시원하다는 거칠어진 손이지만 이 글을
그리 미워보이지만은 않네요.
연탄을 때시나요? 가스 조심하시라고요.

파란놀 2011-11-26 08:07   좋아요 0 | URL
아, 저흰 기름보일러예요.
나무를 때는 시골집은 아니구요,
요새 시골도 다 기름보일러거든요.

제 책이 널리널리 사랑받아 글삯 2억 원이 모이면, 책을 놓은 옛 초등학교 하나를 통째로 사는 꿈을 꾸고, 제 책이 더더욱 사랑받아 글삯 2천만 원 모이면, 이 돈으로 햇볕전지판을 지붕에 달아 전기나 기름 안 때고 방에 불을 넣는 꿈을 꿔요 ^^;;;;;;;

그나저나 <여자의 식탁>은 1권부터 7권까지 아주 놀랍도록 대단한 작품이에요
 

2011년 12월 6일에 시간 되는 분 나들이해 보셔요. 류가헌 갤러리라는 곳에 전화로 예약하시면 된다고 하네요. 참가비는 없어요~~ ^^ 



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책잔치와 사진책



 ‘광장’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의 고건축” 가운데 1번인 사진책 《秘苑》이 있습니다. 커다란 판에 얇은 두께로 나온 《비원》은 사진쟁이 임응식 님이 찍은 사진으로 이루어집니다. 임응식 님은 “한국의 고건축” 묶음책으로 《비원》과 《경복궁》과 《종묘》와 《칠궁》을 내놓습니다. 이 책들은 1976년에 처음 나올 때에 4500원이요, 제가 이 사진책을 헌책방에서 2011년에 새로 장만하며 들인 돈은 25000원입니다. 몇 해 앞서 다른 헌책방에서 이 사진책들을 7000원에 장만한 적 있고, 또 다른 헌책방에서 15000원에 장만한 적 있으며, 또 다른 헌책방에서 20000원에 장만한 적 있어요. 워낙 예전에 판이 끊어졌기에 여러 헌책방에서 다리품을 팔아 싼값으로든 비싼값으로든 그때그때 장만합니다. 판 끊어진 사진책을 다시 만날 수 있기만 하다면 참으로 고마우면서 반갑습니다.

 1976년 책값 4500원이라면 오늘날 2010년대에는 25000원보다 훨씬 센 값이라고 느낍니다. 1976년 언저리에는 짜장면 한 그릇 값이 150원 안팎이었다니까, 이때에 사진책 《비원》이나 《경복궁》이나 《종묘》나 《칠궁》을 선뜻 장만할 만한 사람은 적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2010년대에 임응식 님 사진책 《비원》을 3만 원이나 4만 원 값에 다시 찍는다 할 때에, 요즈음 사람 가운데 이 사진책을 선뜻 장만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나라에서 사진책과 만화책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합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아도 사진책 사서 읽으며 나누는 사람이 적습니다. 만화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도 아름다운 만화책이 오래도록 새책방 책시렁에 놓이며 사랑받는 일이 드물어요. 저는 올 2011년에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를 겨우 장만했습니다. 2001년에 처음 나오던 때에는 《불새》가 정식 번역된 줄 몰랐기에, 데즈카 오사무 님 다른 만화책을 이때 장만하면서 《불새》는 놓쳤어요. 《불새》를 사야겠다고 깨달은 이듬해에는 이 책을 찾을 길이 없더군요. 열 해를 기다려 2011년에 드디어 ‘2쇄를 찍어 주었기’에 막바로 장만했어요.

 김기찬 님 사진책 《골목안 풍경》은 예전 판으로 되살아나지 못합니다. 《골목안 풍경 전집》이 새로 나옵니다. 예전 판짜임으로 다시 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지만, 새판으로 나온 일로도 흐뭇하며 고맙습니다.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은 ‘외국책 구매 대행’을 거쳐 웃돈을 얹어 한 권씩 장만했다가 올해에 처음으로 정식 번역된 판이 있어 눈물까지 흘리며 한글판을 장만했어요.

 그러나 유진 스미스 님 사진책이 한글판으로 나오지는 못합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이라든지 토몬 켄 님 사진책을 한글판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시노야마 기신 님이 1982년에 내놓은 《실크로드》 여덟 권 가운데 2권이 오직 한국 이야기만 다루지만, 이 사진책 하나조차 한글판으로 옮겨지지 못합니다. 어느 출판사에서든, 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든, 이 사진책 하나라도 한글판으로 옮긴다면 참 좋으련만, 이런 일은 꿈꿀 수조차 없다 싶은 한국 사진밭인 터라, 일본판 《シルクロ-ド》(集英社,1982) 여덟 권을 헌책방에서 육십만 원 가까운 돈을 치러 몽땅 장만해서 한국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시노야마 기신 같은 이름이라면 한국에도 제법 알려졌을 테지만, 시노야마 기신 님이 담은 ‘한국 문화 이야기 사진책’을 아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로버트 카파 이야기책은 두 가지 한글판으로 나옵니다. 다만, 로버트 카파 사진책은 앞으로 언제쯤 한글판이 나올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슬프지만, 저작권료를 안 물고 내놓던 ‘옛 열화당 사진문고’로 나라밖 사진삶과 사진밭 흐름을 어렵사리 한글판으로 읽을밖에 없던 이 나라 책마을입니다. 에드워드 스타이겐이 일군 《인간가족》마저 1986년에 월간사진사에서 해적판으로 내놓은 조그마한 책 하나만 한글판으로 나왔어요. 정식 번역판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 2010년에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 하나 내놓았습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800만 원을 받고 출판사에서 1500만 원쯤 보태어 빛을 보았습니다. 그나마 지역 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기금을 보태었으니 빛을 보았지, 이런 돈이 없다면 책으로 태어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유진 스미스도 기무라 이헤이도 로버트 카파도 토몬 켄도 ‘아름다이 엮은 사진책 하나로 한국 사진 즐김이한테 알려지지 못하는’ 흐름인 터라, 홀로 사진길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진책이 선뜻 나오리라 바라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진책은 하나둘 태어납니다. 아주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진책이든, 이게 무슨 사진이냐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진책이든, 돈을 참 많이 들인 그럴듯한 사진책이든, 아주 적은 돈으로 빠듯하게 꾸민 사진책이든, 이런 사진책 저런 사진책이 태어납니다.

 이름난 사진쟁이들은 이름난 사진쟁이대로 날마다 새 사진을 빚습니다. 이름 안 난 수수한 사진쟁이들은 이름 안 난 수수한 사진쟁이대로 나날이 새 사진을 이룹니다. 이 사진들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신문·잡지에 실리기도 하지만, 그저 개인컴퓨터 파일로 남기만 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조용히 꿈을 꿉니다. 시골자락 언저리에서 마땅한 사진잔치 이루어지는 일은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시골에서 흙 만지며 일하는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사진잔치에 마실 갈 겨를부터 없다 할 만합니다. 그래도, 시골 흙일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을회관이나 면사무소 너른터에서 벌어지는 사진잔치에 마실을 가는 일을 꿈꿉니다. 사진잔치까지 아니더라도 사진책 하나 예쁘고 조그맣게 태어나 전국 면사무소나 마을회관에 한 권씩 놓일 수 있는 날을 꿈꿉니다.

 낮에 면사무소에 들르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수교양도서로 뽑아 사들여 전국 시골 면사무소까지 보낸 좋다고 하는 인문책’이 이곳저곳에 놓여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가 읽을 수 있게끔 해 두더군요. 알뜰히 엮은 사진책을 전국 면 단위까지 한 권씩 놓도록 돕는 제도가 마련된다면, 사진길 걷는 젊고 늙은 모든 사진쟁이들 꿈과 사랑을 싣는 사진책을 넉넉히 펴내도록 뒷받침하는 정책이 나온다면, 이리하여 시골사람이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로 가지 않고서야 구경할 수 없는 사진잔치 사진작품을 사진책에 담긴 사진으로 누릴 수 있으면, 이 얼마나 즐거운 사진누리일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지자체나 중앙정부한테 기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여느 사람인 우리 스스로 저마다 좋아하는 사진책을 마음껏 장만해서 집안을 알차게 보살피는 길을 생각합니다. 내가 즐긴 사진책을 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습니다. 내가 즐긴 책을 뒷날 헌책방에 내놓아 앞으로 새로 태어나 살아갈 뒷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어요. 좋은 사진책 구경할 만한 ‘사진책 도서관’이 한 군데도 없는 한국이라, 저는 제가 1998년부터 그러모은 사진책을 바탕으로 2006년에 개인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저는 제가 새로 뿌리내린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자락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꾸리며 사진빛을 나눠요.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이 살아가는 고향마을에서든,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에서든, 꾸준히 장만해서 건사하는 좋은 사진책으로 벽 하나를 채우면서 자그마한 ‘사진책 도서관’을 이루는 꿈을 펼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대단하게 손꼽히는 사진책을 수천 수만 권 갖추어야 사진책 도서관이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며 사랑하는 사진책을 아끼면서 이웃하고 나눌 수 있다면, 어디에나 언제나 살가운 사진책 도서관이라 믿습니다. 사진책 도서관이 서면, 날마다 사진책잔치입니다. 날마다 사진책잔치이면, 이 사진책잔치를 누리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쯤 ‘바깥밥 한 끼 사먹을 돈을 아껴’ 아름다운 사진책 한 권씩 장만할 수 있어요. 작은 길은 어디에나 예쁘게 있습니다. (4344.11.25.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묶음표 미국말 34 : 감성(heart)

.. 자신을 야성에, 에로스에 활짝 열어 두면 감성(heart)이 있는 길에 접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  《데릭 젠슨/이한중 옮김-작고 위대한 소리들》(실천문학사,2010) 191쪽

 ‘자신(自身)’이나 ‘자기(自己)’ 같은 낱말은 한자말 아닌 한국말이라 여길 만합니다. 다만, ‘나’나 ‘스스로’를 알맞게 넣어서 쓰면 한결 낫습니다. ‘야성(野性)’은 ‘들기운’이나 ‘들사람 넋’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에로스(eros)’는 영어인데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풀어 적어야 올바를까요. 영어로 된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이 영어를 영어 그대로 둔다면, 이러한 영어로 적힌 글을 읽는 한국사람은 골치가 아픕니다. ‘에로스’를 알맞게 풀 한국말이 없기에 이렇게 적었을까요. ‘에로스’는 한국말로 풀어서는 안 되는 낱말이라 이처럼 적어야 하나요.

 “자신을 발견(發見)하게 될 겁니다”는 “나를 볼 수 있습니다”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heart
  1. 심장, 가슴
  2. (감정, 특히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
  3. 핵심
  4. 심장[중심]부
  5. (배추, 상추 등의) 속잎

 감성(heart)이 있는 길에
→ 가슴이 있는 길에
→ 따순 가슴이 있는 길에
→ 사랑이 있는 길에
→ 포근한 사랑이 있는 길에
 …

 영어를 한국말로 옮기는 자리에서 ‘감성(感性)’이라는 한자말을 적으면서 묶음표를 치고는 알파벳 ‘heart’를 적어 넣습니다. 한자말 ‘감성’으로 옮기기는 했어도 어딘가 아쉽다고 여겼으니 이렇게 영어 ‘heart’를 덧달아야 한다고 느꼈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에로스’라 적은 앞 대목처럼 이곳도 ‘하트’라 적을 노릇이 아닐까 궁금합니다. 어차피 번역다운 번역을 못하는 눈높이라면, ‘에로스’라 적든 ‘하트’라 적든,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으며 뜬구름을 잡도록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영어사전을 뒤적입니다. ‘하트’는 ‘심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슴’이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고 나옵니다. 그래요. 이 보기글에 나오는 ‘감성(heart)’이란 바로 ‘가슴’이겠지요. ‘마음’일 테지요. 이렇게 적을 때에 뜻이나 느낌이 살짝 얕다면 ‘따순 가슴’이나 ‘따순 마음’ 또는 ‘열린 가슴’이나 ‘열린 마음’ 또는 ‘살가운 가슴’이나 ‘포근한 마음’처럼 적을 수 있어요.

 ‘사랑’이라 적어도 좋습니다. ‘따순 사랑’이나 ‘따사로운 사랑’이라 적어도 좋아요.

 저마다 마음을 열어 말삶을 북돋우면 됩니다. 저마다 사랑을 쏟아 글삶을 일구면 돼요.

 사랑이 어리는 말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을 따사로이 기울이며 적바림한 글일 때에 즐겁습니다. 사랑을 포근히 싣는 말일 때에 참답습니다. 마음을 너그러이 다스리면서 나누는 글일 때에 흐뭇합니다. (4344.11.25.쇠.ㅎㄲㅅㄱ)
 



 묶음표 미국말 35 : 랜드마크(landmark)


.. 호남슈퍼는 중요한 랜드마크(landmark)로, 비교적 깊숙한 동네의 분기점에서 길을 안내한다 ..  《임석재-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2006) 32쪽

 ‘중요(重要)한’은 ‘눈에 띄는’이나 ‘빼놓을 수 없는’이나 ‘도드라진’이나 ‘모든 길과 이어지는’으로 다듬습니다. ‘비교적(比較的)’은 ‘퍽’이나 ‘매우’나 ‘제법’으로 손보고, “동네의 분기점(分岐點)에서”는 “동네 갈림길에서”나 “동네가 갈라지는 자리에서”로 손봅니다. “길을 안내(案內)한다”는 “길을 이끈다”로 손질합니다.

 landmark
  1. 주요 지형지물, 랜드마크(멀리서 보고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되는 대형 건물 같은 것)
  2. 획기적 사건[발견/발명품 등]
  3. (특히 美) (반드시 보존해야 할) 역사적인 건물[장소]

 중요한 랜드마크(landmark)
→ 눈에 띄는 길잡이/길라잡이
→ 빼놓을 수 없는 길돌
→ 도드라진 길상징
→ 모든 길과 이어지는 알림자리
 …

 건축을 하는 분들이 퍼뜨렸을는지 그냥저냥 숱한 지식인이 퍼뜨렸을는지 아리송한 영어 ‘랜드마크’입니다. 영어사전에서 이 낱말을 찾으면 ‘지형지물’이라고 뜻을 밝히면서 ‘랜드마크’라고도 적습니다. “landmark = 랜드마크”라니, 영어사전 뜻풀이 하나 달기 참 수월하구나 싶습니다. “bus = 버스”일 수밖에 없다지만, “landmark = 랜드마크”로 풀이하는 한국 영어사전이라면,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한국땅에서 쓰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한국사람은 왜 이웃 한국사람이랑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주고받는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영어로 된 사진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한국사진을 즐기는 길잡이가 되도록 알맞게 풀거나 옮겨야 합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은 ‘영어로 된 과학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한국과학을 나누는 길돌이나 징검돌이 되게끔 알맞춤하게 풀거나 옮겨야 해요. 건축을 하는 사람은 ‘영어로 된 건축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한국건축을 펼치는 아름다운 이음고리가 될 수 있게 알뜰살뜰 풀거나 옮겨야 합니다.

 새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새말을 빚는 말틀을 일굴 수 있습니다. 새말을 나누는 말사랑이나 말넋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낱말 하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친다면, 낱말 하나뿐 아니라 모든 삶과 꿈과 이야기마저 하찮게 여기는 매무새가 됩니다. 말투 하나 가벼이 여기며 지나친다면, 말투 하나를 비롯해 모든 사랑과 넋과 일놀이까지 보잘것없이 여기는 몸짓이 돼요.

 우리는 서로서로 좋은 이슬떨이가 되어야지요. 우리는 서로한테 반가운 이끎이가 되어야지요. 우리는 서로 슬기로운 빛줄기 비추는 씩씩한 길동무가 되어야지요. (4344.11.25.쇠.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1-11-26 06:54   좋아요 0 | URL
heart를 글쎄요, 우리말로 뭐라고 옮기면 좋을까 저도 생각해봅니다.
'머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가슴이 하는 말을 들어라' 이럴 때 '가슴'에 해당하는 말이 heart 이니, 한자어 '감성'보다 차라리 '가슴'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감성'에 해당하는 영어는 따로 있으니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이슬떨이'란 무엇일까요?

파란놀 2011-11-26 08:05   좋아요 0 | URL
'이슬떨이'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뜻 그대로 "= 이슬받이 4", '이슬이 내린 길을 맨 앞에서 가는 사람', 곧 어렵거나 힘들거나 아직 없는 길을 맨 먼저 씩씩하게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요.

한자말로 하면 '개척자'가 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좋은 뜻이 많이 담겼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기울여 주면, 우리 말이며 글은 잘 살아날 텐데, 참 힘듭니다
@.@
 


 빨래순이


 아버지가 빨래하는 삶을 지켜본 지 네 해째 되는 딸아이는 아버지가 다 마친 빨래를 바가지에 담아 마당으로 빨랫대랑 함께 들고 나와서 널 때에 뽀르르 달려나온다.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웃으면서 따라나온다. 아버지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빨래 한 점 집어서 내민다. 아버지가 빨래집게로 아직 집지 않은 빨래를 저 손 닿는 데까지는 빨래집게를 앙증맞게 집어 놓는다.

 아버지가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는 곁에서 사진기를 슬그머니 빼앗아 사진놀이를 즐길 때에는 사진순이. 아버지가 호미를 깨작거리는 둘레에서 호미 하나 얻어 호미놀이를 즐길 때에는 호미순이. 아버지가 빨래를 마치고 널 때에 빨래 널기 거들겠다며 다소곳하게 빨래를 널고 집을 때에는 빨래순이. (4344.11.25.쇠.ㅎㄲㅅㄱ)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잘잘라 2011-11-25 11:52   좋아요 0 | URL
오우~ 야무진 손! 하얀 고무신! 맨발!!!!!!!!

파란놀 2011-11-25 23:44   좋아요 0 | URL
참 예쁜 아이랍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11-25 13: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야무져라.

파란놀 2011-11-25 23:44   좋아요 0 | URL
그럼요 ㅠ.ㅜ

hnine 2011-11-26 06:55   좋아요 0 | URL
그리고 예쁜 반지...^^

파란놀 2011-11-26 08:03   좋아요 0 | URL
저 플라스틱 반지를 받고는 잘 때도 씻을 때도 빼지 않아요 ㅠ.ㅜ
 
서울, 골목길 풍경
임석재 지음 / 북하우스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골목길 사진과 골목건축 기록
 [찾아 읽는 사진책 47] 임석재,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2006)



 대학교에서 건축을 가르치면서 서울 시내 이곳저곳 다리품을 팔며 사진을 찍어 글을 쓴 다음 책으로 내놓는 임석재 님이 2006년에 선보인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을 읽었습니다. 2006년에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어쩌면 골목길과 골목사람과 골목동네 보는 눈썰미가 이토록 얕을 수 있나 싶어 슬펐습니다. 2010년에 다시금 살피고 올 2011년에 찬찬히 되읽으면서 찬찬히 헤아립니다. 임석재 님 《서울, 골목길 풍경》은 책이름에 ‘골목길 풍경’이라 적었으나, 어느 사진도 ‘골목길 풍경’이 아닙니다. 사진쟁이 김기찬 님이 내놓은 《골목안 풍경》은 책이름 그대로 김기찬 님 사진삶이 ‘골목 안쪽에 깃드는 풍경’을 사랑하는 넋이 고스란히 담겨요. 그러나, 건축쟁이 임석재 님 《서울, 골목길 풍경》은 책이름만 ‘풍경’이자 ‘골목길’일 뿐, 막상 이 책에 실은 이야기는 모조리 ‘골목건축 기록’입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서울, 골목길 풍경》을 쓴 임석재 님은 260쪽에 이르러 비로소 ‘골목건축 기록’이 아닌 ‘골목길 사진’ 한 장 보여줍니다. 이때부터 서너 장쯤 ‘골목길 사진’을 보여줘요. 건축 기록이 아닌 골목 사진을 보여주는 자리에서는 글도 남다릅니다. “이 길을 걸으면 기분이 참 좋다(262쪽).” 하고 말해요.

 《서울, 골목길 풍경》은 279쪽으로 끝납니다. 건축쟁이 임석재 님이 겨우 ‘골목길 사진’을 느낀다 싶을 때에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제부터 무언가 이야기가 피어날 만하다 싶더니 그만 끝장입니다.

 임석재 님은 “살아 있는 생명의 아름다운 소리다. 거슬리게 크지도 않고 힘없이 작지도 않은 알맞은 크기의 소리들이,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골목길에 듣기 좋게 메아리친다(201쪽).”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골목동네 사람들 소리란 어떤 소리인가를 또렷하게 밝히지는 못해요. 골목건축을 살피러 다리품을 파는 학자답게 바지런히 기록을 합니다. 기록을 하느라 바빠 여느 골목사람처럼 골목동네에서 깃들어 살아가는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아요.

 곧 《서울, 골목길 풍경》이라는 책은 “이 동네도 언젠가는 불도저로 밀리고 아파트 투기에 휩쓸 것이다. 단순히 내 개인사를 넘어, 기록을 해 두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95∼96쪽).”는 말마따나, ‘골목건축 기록’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임석재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시에 깃든 골목동네 가운데 몇 곳을 골라 ‘건축 기록’을 하자는 틀에서 골목동네를 살핍니다.

 왜 기록을 해야 할까요. 기록은 어떤 값을 하나요.

 두 아이를 낳아 옆지기와 살아가는 나는 네 식구 한삶을 기록해야 하나요. 네 식구 한삶을 사진이나 글로 적바림(기록)하는 일은 얼마나 값이 있나요.

 아니, 나는 내 아이들과 옆지기를 사진이나 글로 적바림해야 한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옆지기이기 때문에 저절로 사진을 찍고 아주 마땅히 글로 써요. 마음으로 새기는 아이들 삶과 옆지기 나날입니다. 마음으로 담는 아이들 목소리와 옆지기 노래예요.

 어느 누구도 이녁 아이들과 옆지기 삶을 적바림해 놓으려고 사진첩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이녁 아이들과 옆지기를 사랑하는 결과 무늬와 빛깔과 내음을 느끼기에 열 일을 젖히면서 사진첩을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임석재 님은 《서울, 골목길 풍경》 같은 책을 내놓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서울, 골목건축 기록”처럼 책이름을 붙여야지요. 골목길 삶과 사람과 이야기를 생각하던 사람이 《서울, 골목길 풍경》이라는 책이름을 보고 이 책을 골라 장만한다면 참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밖에 없습니다. 골목삶과 골목빛은 한 가지도 스미지 못하는걸요. 온통 건축 이야기인데, 책이름 어디에도 ‘건축 연구 보고서’인 줄 밝히지 않아요. ‘건축 논문’인 책인데, 책이름과 머리말과 맺음말에는 마치 논문이 아닌 듯 껍데기를 씌워요.

 이야기 아닌 논문인 《서울, 골목길 풍경》이기 때문에, 건축쟁이 임석재 님은 골목동네 삶자락을 잘못 읽고 맙니다.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온통 ‘골목사람 삶하고 동떨어진 눈길로 내려다보는 슬픈 몸짓’투성이입니다. 몇 가지만 짚습니다.

 ㉠ “골목길이란 무엇인가. 친숙하고 누구나 다 아는 단어인 동시에 아스라한 추억의 단어다 … 물리적 관점에서 ‘아늑함’은 휴먼 스케일의 개념을 내포한다(7쪽).” 하고 말하는데, 골목길이 왜 추억이지요? 임석재 님이 다닌 골목동네 사람들한테 골목길은 ‘오늘 삶’, 이른바 ‘현실’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추억을 들이밀어서는 어떠한 이야기 하나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골목길이 ‘친숙’하다고 말할 자유는 있습니다만, 무엇이 어떠할 때에 ‘친숙’인지 궁금합니다.

㉡ “우리는 골목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문화재이다(10쪽).” 하고 말하는데, ‘우리’라는 낱말을 덜어 주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나(임석재)’라고 밝혀야 옳습니다. 곰곰이 짚거나 찬찬히 헤아리지 않은 사람은 건축쟁이요 공무원이며 정치꾼이자 개발업자입니다. 골목사람은 늘 골목길을 생각합니다. 골목길은 삶터요 삶입니다.

㉢ “주의하라는 안전신호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읽히기도 한데, 아마 단순하게 반복되는 지루함을 덜어 주기 위한 배려인 듯하다(25쪽).” 하고 말하는데, 시멘트 계단에 형광페인트를 바른 까닭은 깊은 밤에 등불 빛살이 어둡거나 잘 안 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이든 젊은 사람이든 시멘트 계단에 무릎이 부딪히거나 넘어지기 쉬워, 부디 잘 다니라는 뜻입니다. 형광페인트를 바르며 숫자를 적는 뜻은 밤에는 집집이 비슷비슷 보이니 숫자를 덧적으면 알아보기 한결 수월합니다. 술 한잔 알딸딸히 마신 분이라면 엉뚱한 집에 잘못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런 숫자는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 “가게 앞에 평상을 깔아 놓고 테이블도 놓았지만 사람들은 물건만 사서 쌩하니 가 버릴 뿐 모이지 않는다(32쪽).” 하고 말하는데, 바쁜 사람은 그냥 지나칩니다. 아니, 다른 볼일 볼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모든 사람이 평상에 앉지 않아요. 평상에 앉는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임석재 님부터 평상에 앉으면 됩니다. 사람이 모이니 평상이 생기지, 평상이 있는데 사람이 안 모인다는 말은 앞뒤가 어긋날 뿐더러, 밑삶을 등지는 소리입니다.

㉤ “창과 문이 아무렇게나 뚫린 듯하면서도 구성미가 뛰어나다(39쪽).” 하고 말하는데, 사람들 살림집에 창과 문을 아무렇게나 뚫는 일은 없습니다.

㉥ “건축 전공자처럼 골목길의 공간적 우수함을 짚어내지는 못했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 앞에 모여 앉아 담소하는 다정스러운 모습이나 주고받는 이런저런 얘기 속에는 골목길의 의미를 정의해 줄 수 있는 키워드 같은 단서들이 있었다(146쪽).” 하고 말하는데, 학자들은 ‘골목길의 의미를 정의해 줄 수 있는 키워드’를 모르겠지요. 그리고, 이 열쇠말을 모르면서 ‘골목길의 공간적 우수함’을 짚는다고 해 보았자 무슨 훌륭함을 짚으려나요. 집과 삶과 사람과 길을 하나도 모르면서 무슨 건축 연구나 학문을 할 수 있나요.

㉦ “구성미는 문 몇 개가 어우러지면서 종합적 합으로 분할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구성 시리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문의 숫자는 많지도 않다 … 그러나 이것들이 내놓는 구성미는 절묘하다(184쪽).” 하고 말하는데, 골목집을 지은 사람은 몬드리안을 모르며 알 까닭이 없습니다. 몬드리안이 없어도 사람들은 골목집을 지어 골목동네를 이룹니다. 몬드리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예부터 사람들 살림집 나무문살 창호종이는 아름다운 무늬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르는 노릇인데, 몬드리안이 한국땅 살림집 나무문살을 보고 나서 ‘몬드리안 구성미’를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일, 골목길 사는 사람이 하루를 보내면서 한다고 하는 일은 분명히 시시한 것들이다. 이런 시시한 일 하나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무척 길다. 이러다 보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도 한두 시간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시간이 느리게 가다 보니 무료함과 권태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지고, 동네 경치를 즐길 여유도 생긴다. 느림의 미학이다(264쪽).” 하고 말하는데, 골목길이 시시한데 뭣 하러 다니는지 아리송합니다. 시시하니 심심하고, 심심하니 게으를까요. 학자들이 골목길 삶터를 가리켜 ‘느림의 미학’ 같은 그럴싸한 이름표를 갖다 붙이는 일은 참말 자유이기는 하나, 참말 골목길을 아름다이 바라보려는 뜻, 그러니까 ‘골목길 풍경’을 들려주고 싶으면, 제발 골목동네에 자그마한 살림집 하나 얻어서 열 해쯤은 살아 보셔요. 몸소 골목동네 사람, 그러니까 골목사람이 된 다음에 천천히 골목이웃으로 녹아들면서 골목길 빛살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셔요.

 학자나 학생 들은 으레 다리품(답사)을 팔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문화유적지를 다니고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다리품을 팝니다. 어떤 이는 한두 번 다리품을 팔고 나서 보고서나 연구서를 내놓습니다. 어떤 이는 수십 수백 차례 다리품을 팔고 나서 보고자료나 연구자료를 내놓아요. 그런데, 어떤 논문이나 책이라 하든 다리품을 천 번 만 번 판다 해서 제대로 바라본 이야기가 되지는 못해요. 왜냐하면, 천 번 다리품을 팔 때보다 한 번 살아갈 때 한결 깊고 넓게 느끼니까요.

 바라본대서 알 수 없습니다. 바라볼 때에는 내 지식에 따라 내가 받아들인 모습만 생각하고 맙니다. 살며 느껴야 비로소 속알맹이를 짚어요.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림을 꾸리면서 사랑하는 나날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알아채려 힘쓰지 않는다면, 임석재 님이 앞으로 내놓을 책이든, 다른 사진쟁이가 골목길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며 내놓을 책이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그칩니다. 유홍준 교수 답사기하고 다를 구석 없습니다. 답사기는 구경한 이야기로 끝나지, 살아가는 사랑이나 믿음이나 꿈으로 이어지지 못해요.

 잘 생각하고 깨달아 주기 바랍니다. 전쟁터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전쟁터를 답사해서 길을 잘 익히면 되겠습니까. 전쟁터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는 목숨을 내놓는 군인하고 똑같이 사진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아가 죽곤 합니다. 죽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골목건축 기록’이 아닌 ‘골목길 풍경’ 사진이라고 밝히려는 책이라 한다면, 아주 마땅히 골목동네 사람으로 살아가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다른 아무것도 쓸모없습니다. 학위도 학벌도 돈도 값진 장비도 덧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이라면 똑딱이로 찍든 1회용 필름사진기로 찍든, 그야말로 ‘골목을 말하고 밝히는 참답고 착한 사진’을 이룹니다.

 이 느낌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밝히는데, 2006년 봄에 이 사진책 《서울, 골목길 풍경》을 보고 나서 참말 속에서 불길이 치솟더군요. 이렇게 골목동네 터전을 깡그리 짓밟듯 얕잡을 수 있나 싶어 슬프더군요. 그래서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살아가는 인천 골목동네 삶자락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기로 다짐했습니다. 2010년 가을에 시골로 살림집을 옮기고 나서는 이제 인천 골목동네 사진을 더는 못 찍습니다만, 2006년 4월부터 2010년 가을까지 날마다 이백 장 남짓 인천 골목동네 사진을 빚었어요. 내 삶터요 내 보금자리이며 내 이야기터이자 내 사랑터를 느끼며 살을 섞은 빛느낌을 지난 2010년 여름에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았습니다. 가만히 돌이키자니, 임석재 님이 《서울, 골목길 풍경》을 내놓지 않았으면 나는 골목길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생각할 일이 없었을 테고, 인천 골목동네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일굴 일 또한 없었겠구나 싶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나한테는 고마운 책인 《서울, 골목길 풍경》입니다. (4344.11.25.쇠.ㅎㄲㅅㄱ)


― 서울, 골목길 풍경 (임석재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6.3.30./15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