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할머니 삯

 


  아이한테 영화 〈집으로〉를 다시 보여주며 이럭저럭 집안일을 하다가 이렁저렁 집안일을 마친 다음 나란히 앉아 조금 들여다본다. 영화에 나오는 할머니는 버스삯이 없어 먼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 시골에서는 여든 살 할머니이든 아흔 살 할아버지이든 버스삯을 낸다. 시골마을 시골버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버스삯을 내기 때문에 버스가 다닐 수 있다.


  도시에서는 어떠한가. 도시에서도 여든 살 할머니나 아흔 살 할아버지한테 버스삯을 내도록 하지 싶다. 다만, 도시에서는 버스를 삯을 치르고 타야 할 테지만, 지하철이나 전철은 거저로 탈 수 있도록 해 준다. 버스와 전철이 나란히 있는 도시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꼭 걸어서 먼길을 다녀야’ 하지는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버스회사는 개인회사일 테니까 삯을 치러야 하겠지. 버스회사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할머니 할아버지한테서 돈을 받아야겠지. 그런데, 버스회사야말로 공공회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사업자가 돈을 들여 버스를 마련하고 버스길을 살필 노릇이 아니라, 버스 일꾼은 모두 공무원이 되어, 마을 골골샅샅 알맞게 살펴 찬찬히 다닐 노릇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하면서 마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젊은이나 어린이 누구나 따로 버스삯 없이 버스를 타도록 해야지 싶다. 버스삯이나 버스 일꾼 일삯은 사람들이 여느 때에 내는 세금으로 대고.


  돈벌이 때문에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은 덜 다니려 하는 버스인데, ‘사람이 다니는 길’을 헤아려 한 시간이나 두 시간에 한 대라도 지나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 일꾼이 회사에서 달삯을 받지 않고 ‘이 나라 여느 사람이 내는 세금’에서 달삯을 받는다면 거칠게 몰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바삐 모는 일 또한 없으리라 본다. 이리 되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 버스길이 여럿 겹치는 일도 사라지겠지. 사람들 움직임에 맞추어 버스길을 알맞게 마련하고, 굳이 멀리멀리 돌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홀가분히 갈아타도록 하면서 버스가 자주 다니면 된다. 짐을 많이 들더라도, 버스 일꾼이 바삐 재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버스 일꾼이나 다른 손님이 짐을 들어 주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다니면 되니까, 외려 사람내음이 물씬 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즈음은 인터넷이 발돋움했으니까, 외진 곳 버스역에서 단추를 누르면 ‘이제 탈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알려져, 외진 곳 손님을 태우러 따로 버스가 움직일 수 있겠지. 그러니까, 외진 곳 버스역에서 단추를 눌러서 알리지 않는다면 여느 때에는 굳이 이곳까지 따로 안 와도 된다는 뜻으로 삼으면 되고.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좋은 마음으로 좋은 길을 좋은 버스가 다니기를 꿈꾼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버스들이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느긋하게 조금 더 예쁘게 달릴 수 있기를 꿈꾼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버스 일꾼이 싱긋빙긋 웃으면서 착하게 일하며 땀흘리는 보람을 누릴 수 있기를 꿈꾼다. (4345.7.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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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애지시선 16
김해자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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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하루를 꿈꾸고 싶어
[시를 노래하는 시 24] 김해자, 《축제》


 

- 책이름 : 축제
- 글 : 김해자
- 펴낸곳 : 애지 (2007.11.15.)
- 책값 : 8000원

 


  궂은 날씨에는 빨래가 안 마릅니다. 하루 내내 두어도 도무지 보송보송해지지 않습니다. 해님이 며칠 비치지 않아도 집안은 축축합니다. 해님이 따사로운 손길을 보내지 않을 때에는 지구별이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서로서로 알뜰히 아끼고 사랑하면서 즐거이 얼크러질 때에 비로소 예쁘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햇볕을 쬐면서 살아갑니다. 햇볕을 쬐지 못하면 얼굴이며 살갗이며 파리해집니다. 아픈 몸빛이 됩니다. 밥을 먹어 영양소를 몸에 넣더라도, 사람다운 넋을 북돋우는 햇볕을 못 먹을 때에는 자꾸자꾸 몸앓이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도시 사회는 사람들이 햇볕을 못 쬐도록 가로막습니다. 버스이든 지하철이든 햇볕하고 동떨어집니다. 시외버스이든 고속버스이든 통유리와 가리개로 햇볕을 막습니다. 건물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 건물이든 한낮에도 전기로 등불을 켭니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등불에 익숙해집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아니더라도 살림집부터 늘 등불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 입시지옥 굴레에 갇히면 시멘트 감옥과 같은 데에서 그저 형광등 불빛에 길들어야 합니다. 학교를 벗어나더라도 학원버스가 학교 문 앞에서 기다리고, 학원은 학교와 똑같이 시멘트 감옥과 같으면서 형광등 불빛만 환합니다.


..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 20년의 생애 ..  (인연)


  낮이 없는 도시입니다. 해가 멀쩡히 뜬 낮이라 하더라도 건물이 해를 가립니다. 건물 안쪽은 햇볕도 햇빛도 스미지 못합니다. 전기가 나간다면 건물은 온통 새까맣습니다. 죽음과 같은 어둠이 됩니다. 지하철도 지하상가도 모두 죽음과 같은 어둠입니다. 가게도 회사도 공공기관도 모두 전기를 먹는 형광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힐 뿐입니다.


  도시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따로 없습니다. 어디에나 시계가 붙고, 언제라도 시간을 볼 수 있으나, 도시에서는 시계나 시간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낮 열두 시라도 깜깜할 수 있는 도시요, 밤 열두 시라도 훤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밤에도 불빛으로 하얀 땅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문명이요 발전이라고 여기는 듯한데, 더구나 남녘과 달리 북녘은 온통 새까맣다며 비웃거나 불쌍히 여기는 듯한데, 외려 밤에도 낮처럼 환한 남녘땅이야말로 슬프거나 바보스러운 모습이리라 느껴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밤에 쉬지 못한다면, 밤을 밤처럼 누리지 못한다면, 사람들 살아가는 터전은 얼마나 제구실을 한다고 할 만할까요.


.. 양심을 철창에 집어넣는 한 조국이라 부르지 말자 ..  (겨울 편지)


  예쁜 하루를 꿈꾸고 싶습니다. 생각이 빛나고 사랑이 물결치는 하루를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열어, 좋은 사랑으로 밥을 짓고는, 살붙이하고 예쁘게 나눌 삶을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웃음으로 말문을 열고, 좋은 이야기로 마음을 북돋우며, 좋은 손길로 따스함을 나눌 삶을 꿈꾸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을 누리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은 햇볕에 내 몸이 알맞게 타고 싶으며, 좋은 햇볕에 빨래가 보송보송 마르기를 바랍니다. 좋은 햇볕에 나무와 풀과 꽃이 푸르게 자라기를 빕니다. 좋은 햇볕으로 좋은 나락이 익어 좋은 사람들 좋은 밥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햇볕을 누리는 사람들이 좋은 사랑을 나누면서 좋은 누리를 일군다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 살로 태어나 살 먹고 살 부벼 살 낳으신 어무이 / 당신이 빚어놓은 이 살로 이 삶 다하도록 살다 / 살 다 벗어던져 아픔 없는 세상에서 만냅시더 고마 ..  (살)


  여름 장마를 맞이합니다. 며칠이고 하늘이 찌부둥합니다. 볕이 들지 않으니 집안이 눅눅합니다. 집안이 눅눅할 뿐 아니라 마당에 내놓는 빨래가 제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해를 보지 못하는 빨래는 바람만으로는 말끔히 마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기계와 저런 장치를 쓰더라도 빨래가 싱그러이 마르도록 할 수는 없어요. 어떤 기계도 햇볕처럼 빨래를 말리지 못해요. 어떤 장치도 해님처럼 풀과 꽃과 나무를 살찌우지 못해요. 어떤 과학도 햇빛처럼 따사로우면서 맑은 빛을 흩뿌리지 못해요. 어떤 기술도 햇살처럼 상큼하면서 아름답지 못해요.


  여러 날 만에 저녁을 앞두고 해가 비춥니다. 아, 좋아라. 아, 고맙구나. 아, 기뻐라. 아, 예뻐라. 방에 두었던 빨래를 몽땅 밖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둘째 아이가 쉬를 누어 젖은 깔개랑 발닦개를 밖으로 들고 나옵니다. 마당에 죽 넙니다. 해를 바라봅니다. 두 시간쯤 해가 비출 듯합니다.


  둘째 아이가 오줌을 누어 빨래고 쌓은 빨래를 합니다. 신나게 빨래를 하고 신나게 빨랫줄에 넙니다. 다시 해를 바라봅니다. 해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부디 저녁에도 밤에도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로 우리 마을 예쁘게 보듬어 주렴, 하고 노래합니다. 밤에 별을 본 지도 오래된 듯한데, 별 좀 구경하게 해 주렴, 하고 속삭입니다.


.. 무덤처럼 컴컴한 골방에서 20년 / 게쉬타포에 쫓기는 안네처럼 살다 늙어간 여자 / 건물이 헐리고 타워팰리스가 들어선다는데 청계천엔 / 고기가 노는 맑은 물도 흐른다는데 손님 끊긴 지 / 오래인 다방 깨진 수족관엔 / 인조 물풀만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데 ..  (황학동 안네)


  집안에 널던 옷가지를 마당으로 내놓고, 아침부터 쌓인 빨래를 말끔히 하고 나니, 낮잠을 자던 첫째 아이가 일어납니다. 살짝 한갓지게 보낼 수 있을까 싶었으나, 이제부터 아이하고 놀아야지요. 그런데 아이는 잠이 덜 깬 모습입니다. 아이더러 졸리면 더 누워서 자도 되고, 다 잤으면 즐겁게 일어나서 놀면 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조금 더 방바닥에 비비며 뒹굴다가 일어납니다. 아이가 아침을 제대로 안 먹고 노느라 배고플 수 있겠다 싶어, 아버지는 네가 아침에 남긴 밥을 조금 먹었어, 너도 배고프면 네가 아침에 안 먹은 밥을 먹으면 돼,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슬금슬금 부엌으로 갑니다. 부엌에 가서 아이가 아침에 남긴 밥을 먹습니다. 아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이야 네가 아침에 밥을 차려서 함께 먹을 때에 이렇게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덜 배고프거나 무언가 다른 데에 마음이 있어 아침에 밥을 제대로 안 먹었을 수 있어요. 아이가 밥을 예쁘게 먹도록 어버이로서 예쁘게 이끌어야 했다 할 수 있고요. 더 헤아린다면, 아이가 즐겁게 먹을 만한 밥을 옳게 못 차렸으니 아이가 밥을 제대로 안 먹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먹을 만한 밥차림이 되도록 어버이부터 스스로 밥짓기와 삶짓기를 살가이 못했기에, 이 흐름이 아이한테 고스란히 이어졌을 수 있어요.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누릴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나눌 좋은 말을 생각하고, 아이한테 들려줄 좋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하루를 누린다면 내 입에서 흐르는 말은 저절로 좋은 말이 될 테고, 내가 좋은 하루를 빚는다면 내 몸사위는 저절로 좋은 몸짓이 될 테지요.


.. 한 집 건너 지하공장 /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 ..  (승천)


  시집 《축제》를 읽습니다. 시를 쓴 김해자 님은 “지난날 시는 내게 어렵고 황송한 손님이었다(시인의 말).” 하고 말합니다. ‘황송(惶悚)’은 어떤 뜻일까 싶어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 “분에 넘쳐 고맙고도 송구하다”를 뜻합니다. ‘송구(悚懼)’는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를 뜻한다는데 “‘미안하다’, ‘죄송하다’로 순화”할 말이라는 풀이말이 덧달립니다. ‘분(分)’은 ‘분수(分數)’를 뜻한다는데, ‘분수’는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뜻한답니다. 그러니까, ‘황송’이란 “주제에 넘쳐 고맙고도 거북스럽다”를 가리키는 셈입니다.


  시가 어떻게 어렵고 고마우면서도 거북스러운 손님일 수 있을까 싶으나, 스스로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참말 시는 이와 같이 찾아오는 손님이리라 느낍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시가 자리잡고 소설이 깃들며 수필이 스미겠지요. 기쁘게 여기면 기쁜 시요, 해맑게 여기면 해맑은 시이며, 재미나게 여기면 재미난 시입니다. 슬픔을 달래는 벗으로 여기면 슬픔을 달래는 시입니다. 웃음을 나누는 동무로 여기면 웃음을 나누는 시가 됩니다. 밥처럼 삼으면 밥과 같은 시이고, 노래처럼 삼으면 노래와 같은 시예요.


  삶은 시가 됩니다. 삶은 시로 드러납니다. 삶은 시로 갈무리합니다. 삶은 시로 태어나면서 내 새로운 숨을 불어넣습니다.


  시집 《축제》는 시를 쓴 김해자 님 삶입니다. 김해자 님이 살아온 나날을 적은 시요, 김해자 님 스스로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일기입니다. 일기에는 기쁜 웃음도 적으나 슬픈 눈물도 적습니다. 일기에는 흐뭇한 보람도 적으나 고단한 땀방울도 적습니다. 어느 날에는 연필 쥘 기운마저 없이 건너뛸 테고, 어느 날에는 모처럼 한갓지게 말미를 내어 밀린 이야기를 줄줄이 적겠지요.


  곧, 김해자 님으로서는 하루하루 어려우면서도 고맙고 다시금 거북스러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살아갔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하루이든 저런 하루이든 김해자 님은 당신 삶을 잔치라 받아들이며 ‘잔치(축제)’라는 싯말을 길어올렸으리라 느낍니다.


.. 선혈이 낭자한 조폭 영화를 보며 / 아름다울 미와 나라 국에 대해 제3자의 본분 내에서 / 진지하게 고찰하며 힘없는 나라의 죄와 / 힘 있는 나라의 정의에 대해 명상했다 ..  (먼 나라)


  나도 내 삶을 들여다본다면 내 하루는 잔치와 같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새벽녘은 잔치입니다. 환한 낮이든 구름이 가득한 장마철이든 잔치입니다. 구성진 들새 노랫소리이든 수다스러운 멧새 노랫소리이든 잔치입니다. 어린 아이들 놀음놀이도 잔치요, 이 아이들 치닥거리도 잔치입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이랑 걸레질을 하는 하루도 잔치예요.


  나는 밥잔치를 하고 빨래잔치를 합니다. 놀이잔치이든 노래잔치이든 내 깜냥껏 내 하루를 누리면서 벌입니다. 자전거잔치도 하고 걷기잔치도 합니다. 옆지기는 뜨개잔치를 하고, 서로서로 곧잘 책읽기잔치를 합니다. 읍내로 마실잔치를 다닙니다. 바닷가로 바닷놀이잔치를 떠납니다. 밭흙을 뒤집으며 흙잔치를 합니다. 노랗게 익는 매화나무 열매를 줍거나 따며 열매잔치를 합니다.


  즐거울 때에도 잔치이고, 슬플 때에도 잔치입니다. 홀가분할 때에도 잔치이며, 고단할 때에도 잔치입니다. 아이들 씻기는 하루도 잔치예요. 아이들 손발톱을 깎이는 하루도 잔치예요. 어느 하나 잔치이고, 어느 하나 잔치 아닐 수 없습니다.


.. 전봇대마다 취업공고판마다 기웃거리던 길 / 한 줄에 꿰인 호박꼬지처럼 줄줄이 앉아 작업하던 곳 / 손에 손으로 에이스와 새우깡 따뜻하게 건네지던 곳 / 점심시간 담벼락 아래로 종이에 싼 동전을 내려주면 / 꽈배기과자와 노릿노릿한 찹쌀도너츠가 올라오던 곳 / 야근시간 졸린 잠 쫓으려 커피믹스 가루째 털어넣던 곳 / 유인물 들고 자취방마다 문 두드리던 새벽길 / 머리에 고드름 매달린 채 함께 뛰던 길 / 머리채 잡혀 끌려가던 길 얻어터지다 피 흘리다 / 김포 쓰레기 매립장으로 실려가던 길 / 바람 들이치는 자취방 창문에 고이고이 스치로폼 대고 / 헐거운 부엌문에 이중자물쇠통 달아주던 / 내 어린 첫사랑 끝내 울며 떠나간 길 ..  (공단 길)


  예쁜 하루를 꿈꿉니다. 예쁜 잔치를 꿈꿉니다. 예쁜 이야기를 꿈꿉니다. 예쁜 노래를 꿈꿉니다. 신나게 빨아 신나게 말린 옷가지를 갭니다. 갠 옷가지는 제자리에 착착 얹습니다. 큰아이는 혼자서 저 입고픈 옷을 슥슥 골라 입습니다. 스스로 입고 스스로 벗습니다. 졸리더라도 더 참으며 더 놀고, 고단하더라도 곯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습니다. 참말 잔치일 테니까요. 잔치마당에서 조금 고단하다고 그만 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 신나게, 더 개구지게, 더 왁자하게 놀려 하겠지요.


  하루 몫 기운이 다할 때까지 노는 아이들은 고단하게 색색 잠들면서 새 기운을 얻습니다. 새 기운을 얻고는 다시금 새 하루 몫 기운이 다하도록 방방 뛰어놉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도 아이하고 같구나 싶어요. 하루 몫 기운이 다하도록 스스로 무언가를 합니다. 하루 몫 기운이 다하면 고단히 눈을 감습니다. 한밤을 지나 새벽이 찾아들면 천천히 새 기운을 차립니다. 새 하루에는 어떤 새 잔치를 활짝 열면서 맞이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꿈을 꾸며 누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 그대들 만나 행복했던 나는 그 기쁨만을 안고 갔으니 / 푸른 하늘 아래 우리 함께 했던 따스한 숨결 / 그 사랑만을 데리고 갔으니 ..  (대화)


  처마 밑이 조용합니다. 이른봄에 찾아든 제비들이 새끼를 까서 바지런히 먹이며 돌볼 때에는 처마 밑이 늘 부산했는데, 새끼들이 모두 자라 저희 날갯짓을 마음껏 뽐내며 하늘을 누비고 나서는 늘 조용합니다. 한동안 새끼 제비들이 처마 밑 보금자리로 찾아드나 싶었으나, 어미 제비 가끔 찾아들어 빨래줄에 앉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뽀로롱 날아갈 뿐입니다. 이제 새끼 제비들도, 어미 제비들도, 훨씬 너른 새 누리를 날아다니면서 몸을 살찌우고 마음을 북돋우겠지요. 가벼우며 힘찬 날갯짓으로 온 들판과 멧자락을 실컷 누비면서 좋은 하루를 누리겠지요. 따사로우며 좋은 날을 지나 천천히 찬바람 찾아들 무렵, 한국땅을 떠나는 기나긴 마실길에 나설 테고, 기나긴 마실길에 나서자면 하루 내내 끝없이 날갯짓하면서 이곳저곳 누비며 날개힘을 길러야겠지요.


  제비들은 어떤 잔치를 빚을까요. 제비들이 하늘에서 날갯짓하며 바라보는 이 땅은 어떠한 삶 어떠한 모습 어떠한 그림일까요. 하늘에서 날갯짓하는 제비가 바라보기에 고속도로나 아파트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발전소는 어떤 터가 될까요. 사람들이 자가용이나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하늘을 날며 살아간다 할 때에는 공장이나 기계나 물질문명이나 도시문화는 얼마나 값있거나 보람있을까요.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려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꿈을 꾸며 좋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꿈으로 아이를 보살피려는 어버이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사랑으로 태어나 꿈을 꾸며 하루하루 누리려는 아이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잔치입니다. 삶은 잔치입니다. 꿈은 잔치이고 사랑도 잔치입니다. 웃음도 눈물도 잔치입니다. 싱그럽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상큼하게 푸른 들판을 바라보는 내 몸뚱이 또한 잔치요, 스스로 좋은 숨결 되어 스스로 좋은 동무로 어깨동무하고픈 내 마음도 잔치예요. 사랑을 먹으며 사랑을 낳고, 꿈을 먹으며 꿈을 낳습니다. (4345.7.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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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7-08 13:15   좋아요 0 | URL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잔치입니다. 삶은 잔치입니다" -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 잔치 같은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의 삶도 살펴보니, 감사할 게 아주 많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잊고 살 때가 많아요. ^^

파란놀 2012-07-08 17:10   좋아요 0 | URL
아... 그러나 '작은 것'에 고마워 하는 마음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날마다 좋은 잔치라 할 때에는
내 삶은 '작지도 크지도' 않아요.
크기로 따지는 '잔치'가 아니라,
좋은 삶이자 사랑이기에 누리는 '잔치'라는 뜻이에요~~
 


 책을 던져 모기를 잡다

 


  모기 한 마리 윙 소리를 내며 내 옆을 날아간다. 얼른 잡아야지 생각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책을 집어 모기가 날아가는 쪽으로 휙 던진다. 모기는 책 끄트머리에 맞아 팍 터진다. 방바닥과 책 모서리에 모기 피가, 또는 내 피가, 또는 아이들 피가 벌겋게 묻는다. (4345.7.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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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하는 마음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합니다. 혼자 자전거를 달리면 무척 홀가분합니다. 아이 하나를 자전거수레에 태우니 꽤 힘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둘이 되어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니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자전거를 잘 몹니다. 혼자 달릴 때하고 견주면 무척 느리고 더딘 자전거이지만, 씩씩하게 잘 달립니다.


  수레에 탄 아이들은 끝없이 조잘거립니다. 졸릴 적에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다가 한쪽으로 픽 쓰러집니다. 서로서로 머리를 기대어 잠듭니다. 마실을 나갈 때에는 으레 종알종알 떠들고, 마실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으레 조용조용 잠듭니다.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뒷거울로 바라봅니다. 자전거 빠르기를 늦춥니다. 아니, 오늘은 마실을 나갈 적부터 빠르기를 늦추었습니다. 천천히 달렸습니다. 천천히 달린대서 땀이 안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빨리 달릴 때를 생각하면 땀이 하나도 안 난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마음이 일어나, 목청을 가다듬습니다. 천천히 자전거 발판을 밟고, 천천히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엊그제 자전거마실을 할 적에 첫째 아이가 〈미래소년 코난〉 노래를 불러 달라 해서 부르는데, 숨이 가쁘더군요. 여느 때처럼 자전거 발판을 밟으면 노래를 부르기 힘들어요. 발판을 조금 한갓지게 느긋하게 밟으면 노래를 부를 만하리라 생각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자동차는 지나가지 않습니다. 들바람이 붑니다. 멧자락마다 구름이 깔립니다. 나는 들바람을 쐬고 들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과 잠자리에 누워 부르던 자장노래를 자전거를 달리면서 똑같이 부릅니다. 바람에 따라 들풀이 눕고 논마다 볏포기가 눕습니다. 내 목소리는 들풀과 볏포기 사이로 흐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 노랫소리를 들으며 서로 고개를 기대어 새근새근 잡니다. 노래 여섯 가락쯤 부를 무렵 천천히 집에 닿습니다.


  이제 아이들을 방으로 옮기는 일이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둘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쳇, 수레에서는 잘만 자더니 집에 와서 깨네. 그래, 더 놀고 다시 자라. (4345.7.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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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873) -의 승리 1 : 독일군의 승리를

 

마르크스는 독일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 이유로 당시 그는 “독일군의 패배는 독일 사회주의운동을 20년 지연시키는 데 그치겠지만…” ..  《스즈키 주시치/김욱 옮김-엘리노어 마르크스》(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60 45쪽

 

  ‘승리(勝利)’나 ‘패배(敗北)’는 제법 흔히 쓰는 낱말입니다.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대로 둘 때에 한결 낫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보기글에서는 토씨 ‘-의’를 찰싹 붙인 채 쓰이니 찬찬히 살펴 알맞게 다듬어 줍니다.


  ‘기원(祈願)했다’는 ‘바랐다’로 손보고, “그 이유(理由)로”는 “그 까닭으로”나 “그러한 까닭으로”나 “왜냐하면”으로 손보며, ‘당시(當時)’는 ‘그때’로 손봅니다. ‘지연(遲延)시키는’은 ‘늦추는’이나 ‘미루는’으로 손질하고, ‘20년(二十年)’은 ‘스무 해’로 손질해 줍니다.

 

 독일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 독일군이 이기기를 바랐다
→ 독일군이 이겼으면 했다
 독일군의 패배는
→ 독일군이 지면
→ 독일군이 진다면
→ 독일군이 졌을 때는
 …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 ‘이기다’와 ‘지다’뿐 아니라, 한자말 ‘승리’나 ‘패배’를 안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들은 두 갈래 말을 나란히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투를 곁에서 들으면서 두 갈래 말투에 익숙해집니다. 이기니까 ‘이기다’라 할 뿐인데, 어른들은 이처럼 말하기보다 ‘승리’라는 한자말을 끌여들이기를 좋아합니다. 지니까 ‘지다’라 할 뿐이나, 어른들은 이 같이 말하기보다 ‘패배’라는 한자말을 애써 받아들이기를 즐깁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는 어른일 때에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푸름이로 살아가는 빛나는 넋한테 우리 어른들은 어떤 글을 써서 읽힐 때에 어여쁠까 헤아려 봅니다.


  ‘이기다’와 ‘지다’라는 한국말로는 어른들 넋이나 얼이나 뜻을 나타내기 힘들기에 ‘승리’와 ‘패배’라는 한자말을 끌여들여야 하나요. 한자말로도 모자라, 이제는 ‘윈(win)’과 ‘루즈(lose)’라는 영어까지 받아들여야 하나요.


  토씨 ‘-의’를 아무 곳에나 함부로 붙이는 일도 잘못이요, 알맞고 바르며 손쉽고 살가이 쓸 때에 넉넉하고 아름다울 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일도 잘못입니다. 삶을 살피며 말을 살핍니다. 삶을 가꾸며 말을 가꿉니다. 삶을 사랑하며 말을 사랑합니다. 삶을 이야기하며 말을 이야기합니다. (4340.1.2.불./4345.7.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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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독일군이 이기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독일군이 지면 독일 사회주의운동을 스무 해 늦추는 데에서 그치겠지만…”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0) -의 승리 2 : 노동자의 승리

 

공장주나 미술관의 이사보다 ‘내가 더 어엿한 남자다’, ‘남자답다’라고 사진을 보면서 말하는 거죠. 그래서 남자답다고 느낀다면, 노동자의 승리인 거죠
《아라키 노부요시/백창흠 옮김-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포토넷,2012) 134쪽

 

  “공장의 주”처럼 토씨 ‘-의’를 넣는 일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 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미술관의 이사”는 “미술관 이사”로 다듬을 수 있어요. “말하는 거죠”는 “말하는 셈이죠”나 “말하지요”로 손질하고, “승리인 거죠”는 “승리인 셈이죠”나 “승리이죠”로 손질합니다. ‘남자(男子)’는 그대로 두어도 되나, ‘사내’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낱말을 하나하나 살피고 나서 “노동자의 승리”에 드러나는 토씨 ‘-의’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한자말 ‘승리’를 넣으니 토씨 ‘-의’하고 잘 어울리고 마는데, 한자말 아닌 한국말 ‘이기다’를 넣을 때에도 토씨 ‘-의’하고 잘 어울릴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노동자의 승리인 거죠
→ 노동자가 이긴 셈이죠
→ 노동자가 이겼다 할 테죠
→ 노동자가 이겼다 하겠지요
 …

 

  어떤 이는 “노동자의 이김인 거죠”처럼 글을 쓰리라 봅니다. “노동자의 짐인 거죠”처럼 글을 쓸 이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면 알아보기 몹시 힘들며, 말투도 썩 알맞지 않아요. 애써 한국말을 썼다지만, 말투를 나란히 가다듬지 못하면 영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한 사람이 쓰는 말을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쓰는 말은 낱말과 낱말을 묶어 이루어집니다. 낱말과 낱말은 말투로 엮습니다. 말투는 말결로 드러나고, 말결은 말무늬로 빛납니다.


  하나하나 아리땁게 추스릅니다. 빈틈이 없도록 가다듬는 낱말이나 말투나 말결이나 말무늬가 아니라, 내 넋과 얼을 곱게 밝히는 낱말이나 말투나 말결이나 말무늬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맞춤법 때문에 말을 가다듬을 일이 없습니다. 띄어쓰기 때문에 글을 추스를 일이 없습니다. 우리 말글을 바로쓰거나 옳게 쓰는 일이란, 남 앞에서 자랑한다거나 겨레얼을 빛내는 일이 아닙니다. 내 가장 좋은 사랑을 빛내면서 내 가장 맑은 꿈을 나누는 삶이 바로 ‘내 말글을 바로쓰거나 옳게 쓰는’ 일이에요. (4345.7.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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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주나 미술관 이사보다 ‘내가 더 어엿한 사내다’, ‘사내답다’라고 사진을 보면서 말하지요. 그래서 사내답다고 느낀다면, 노동자가 이긴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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