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44] 글로 빚는 꽃인 문학

 


  시와 수필과 소설과 희곡을 일컬어 ‘네 갈래 큰 문학줄기’라고 일컫습니다. 이들 문학은 모두 글로 써서 이룹니다. 시는 으레 입으로 읊기 마련이고, 희곡은 무대에 올려 배우들이 공연을 하지만, 입으로 읊거나 무대에 올리기 앞서 누군가 글로 적바림하면서 문학으로 먼저 태어납니다.


  글이 있기에 문학이 있습니다. 글은 말이 있기에 있어요. 말은 곧 글이 되고, 글은 곧 문학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말은 삶이 있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삶과 말과 글과 문학은 언제나 한 흐름입니다.


  시골마을 작은학교 아이들을 가르친 삶을 톺아보면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눈 이오덕 님이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1989)라고 하는 책을 내놓으면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너무 엉터리로 쓰는 모습을 밝혔습니다. 《우리 글 바로쓰기》 1권을 읽다 보면, ‘소설쓰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3, 213, 214, 221쪽에 걸쳐 띄엄띄엄 나옵니다. 먼저 이 글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삶과 말을 헤아려 봅니다.


  “소설이고 동화고 수필이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글은 순수한 우리 말인 ‘웃는다’와 이 ‘웃는다’를 꾸미는 온갖 아름다운 어찌씨들을 다 쫓아내고, 대신 ‘미소짓다’한 가지만 쓰려고 하고 있다 …… 우리 말로 쓰는 소설에 꼭 남의 나라 말같이 남녀를 구분해서 ‘그’‘그녀’로 해야 할까 …… 다른 어떤 글보다도 소설은 입말에 가까운 말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등장인물을 가리키는 삼인칭의 말은 실제로 쓰는 말이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는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이어야 한다 …… 사라져 가는 순수한 우리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생겨나고 어떤 말이 남게 되는가? 도시 산업사회의 병든 소비문화는 판에 박힌 획일의 말과 삶에서 떠난 추상의 말에다가 천박한 기분을 나타내는 감각의 말만을 남겨 놓는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적습니다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그예 한국말입니다. 따로 ‘순수하거나 안 순수하거나’ 하는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날이 서양 문화와 문명을 더 넓게 많이 받아들이다 보니, 자꾸자꾸 영어나 한문이 섞여 들어와서 ‘순수한 우리 말’을 남달리 살피기도 할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잖아요. 한국사람이라면 ‘하양·희다·하얗다’ 같은 한국말을 쓰면 넉넉해요. 굳이 ‘百色’이라 쓸 까닭이 없어요. 어떤 이는 ‘純百色’ 같은 외국말(한자말)까지 쓰는데, 한국말로는 ‘새햐얗다’예요. 여기에 영어로 ‘white’가 끼어들지요. 그러니까, ‘百色’과 ‘white’가 어지러이 춤추는 드센 물결 사이에서 ‘순수한 우리 말’인 ‘하양·희다·하얗다’를 따로, 남달리, 새롭게 생각하면서 살피고 아끼지 않으면, 우리 한국말은 차츰 힘을 잃거나 사라집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이름짓기’를 으레 ‘네이밍(naming)’이라는 영어로 이야기해요. 아예 ‘브랜드 네이밍’이라 하기도 하고,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는 ‘베이비 네이밍’ 같은 말까지 퍼져요. ‘아이 이름 짓기’나 ‘아기 이름 짓기’처럼 말하면, 어딘가 시골스럽다며 깎아내리는 사람마저 있어요. 나라는 한국이고 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말은 한국말이 아니라 할까요. 나라도 사람도 말도 모두 ‘한국다움’을 벗어던져야 무언가 볼 만하거나 자랑할 만하다고 여긴달까요.


  이 흐름은 문학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시에도, 수필에도, 희곡에도, 또 소설에도, 자꾸자꾸 외국말로 이야기를 빚으려는 젊은이가 늘어나요. 일본제국주의가 이 겨레를 짓밟을 적에는 뜻있는 문학꾼들이 힘을 내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맑은 한겨레 말마디’로 문학을 했는데, 이제 일본제국주의도 중국사대주의도 없는 민주주의나라에서, 되레 중국 한자말과 일본 말투와 서양 말씨를 뒤섞는 얼치기 문학이 끝없이 쏟아져요.


  그런데, 어느 모로 보면 이 흐름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참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나 중국사대주의가 판치던 때에는, 문학하던 이들이 으레 시골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살더라도 흙을 밟고 나무를 만지며 풀을 먹으면서 살았어요. 오늘날에는 한국사람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요. 92%가 넘는 사람이 도시에 주민등록을 두었다고 하니까, 훨씬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산다는 뜻이에요. 이제 문학꾼들 가운데 흙을 만지는 이는 매우 적어요. 나무를 만지거나 바라보는 문학꾼은 아주 드물어요. 풀을 먹으면서 스스로 씨앗을 심는 문학꾼은 참말 몇 없어요. 모든 문학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퍼져요. 문학을 하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고, 문학을 읽는 이들도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시도 소설도 수필도 읽지 않아요. 아니, 책을 아예 안 읽는다고 할 만해요.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연속극만 쳐다봐요. 그나마,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책도 읽고 문학도 읽어요. 이제 한국문학은 시골하고는 동떨어졌다고 해야지 싶어요. 시골에서는 문학이 태어나지 못하고, 시골에서 태어나는 문학이 있더라도 비평을 못 받는 한편 독자도 못 얻어요.


  곧, 모든 문학이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제부터 한국말은 차츰 사라지면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도시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으로 움직이거든요. 도시에서는 말을 이루는 바탕인 삶이 없어요. 경제성장과 투자무역과 건설건축만 있어요. 도시에서는 새말이 태어나지 않아요. 도시에서는 ‘이웃나라에서 새 물질과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 외국말을 받아들이는 흐름’이 있을 뿐이에요.


  때때로, 도시에서도 새말이 태어나곤 해요. ‘즐겨찾기’라든지 ‘누리집’ 같은 낱말은 도시에서 만들지요.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쓴다는 손전화 기계 하나만 바라봐도, 도시가 어떤 얼거리요 어떤 말짜임인가를 알 만해요. 이래저래 글다듬기를 해서 ‘손전화’라 할 뿐, 도시사람이 쓰는 말마디는 끝모를 영어물결입니다. 기계이름부터 이 구석 저 구석 모두 영어바람입니다. 한국말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한국말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다움(글로벌)’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영어 아닌 지구별 여러 나라 다 다른 삶과 문화와 이야기는 숨을 죽여야 합니다. 한국말도, 필리핀말도, 스리랑카말도, 볼리비아말도, 노르웨이말도, 핀란드말도, 체코말도, 잠비아말도, 모두모두 숨을 죽여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영어동화를 읽힙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설라치면 영어소설을 읽힙니다. 노벨상을 타려면 영어로 소설쓰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며 문학을 누리는 즐거움보다는, ‘세계다움’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면서, 스스로 삶을 빛내는 길하고는 동떨어지는 모습입니다.


  이오덕 님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순수한 우리 말’이란 따로 없습니다만, 이 ‘순수한 우리 말’이란 무엇인고 하면,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말입니다. 비가 올 때에 ‘비’라 말하고, 눈이 올 때에 ‘눈’이라 말합니다. 흙을 일구며 ‘흙’이라 말하고, 풀을 뜯으며 ‘풀’이라 말해요. 풀내음 향긋하다고 느끼며 ‘풀빛’을 ‘푸르다’고 여깁니다. 멧골에서 지저귀는 새들이니 ‘멧새’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노랫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졸졸 흘러 냇물입니다. 밭이랑 밭고랑 김매기를 합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차립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빨래를 합니다. 이부자리를 여밉니다.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달빛을 바라보고 미리내를 즐깁니다. 별이 가뭇가뭇 스러지는 새벽에 천천히 동이 트며 노을빛 발갛고, 햇살은 온누리를 따숩게 감쌉니다.


  소설이란, 이와 같이 너른 삶자락을 담는 말그릇입니다. 지구별 저마다 다른 겨레가 서로서로 다 다르게 꾸리는 아름다운 삶자락을 겨레마다 다 다른 말마디로 알뜰살뜰 건사하며 갈무리하는 글이 바로 소설입니다.


  소설말은,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싱그러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겨레마다 가장 아름다운 말로,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옛이야기이든 ‘오늘이야기’이든, 소설말은 그때그때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야기를 살포시 고장마다 가장 아름답게 이어온 말마디로 담아서 뒷사람한테 곱디곱게 물려주는 말그릇 노릇을 해요. 말선물이랄 수 있고 말잔치랄 수 있으며 말꾸러미랄 수 있어요.


  한국은 한국 소설입니다. 경상도는 경상도 소설입니다. 전라도 전주는 전라도 전주 소설입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소설이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이라면,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서도 신호리 동백마을 소설이에요.


  삶터마다 다른 이야기가 삶터마다 다른 말빛으로 환하게 살아나도록 북돋우는 소설입니다. 소설이 글로 빚는 꽃인 문학인 까닭은, 삶을 아리땁게 바라보고 느껴 아리따운 글꽃으로 이루어서 나누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삶으로 씁니다. 소설이 아름답자면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삶이 아름답자면 말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말이 아름답자면, 넋과 꿈과 사랑이 아름다워야 할 테고, 우리가 보살피며 누리는 보금자리가 아름다워야겠지요. 마을도, 숲도, 흙도, 햇살도, 바람도, 냇물도, 나무도, 풀도, 모두모두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소설말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껴요.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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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21] 달려다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 하루를 누리며 새 삶을 빚습니다. 새 하루요 새 삶이기에, 아이들 말소리는 늘 새로운 말이고, 새로운 넋이며, 새로운 사랑입니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밥 차리고 먹이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방바닥 비질하고 이불 말리고 빨래 개고 부산스레 보내다가 기지개 크게 켜고 살짝 방바닥에 드러누웠더니, 아이들 마룻바닥 콩탕콩탕 울리며 달리는 소리 한가득. 어라, 이 아이들 늘 달리면서 살잖아. 뛰거나 달리거나. 어른들은 살몃살몃 ‘걸어다니’는데, 아이들은 집에서고 마당에서고 길에서고 들에서고 숲에서고 멧골에서고 늘 ‘날아다니’듯 ‘뛰어다니’고, ‘달려다니’는구나. 심부름을 시킬까 싶어 부르든, 예쁜 아이 까까 주려고 부르든, 마실 가자며 부르든, 참말 아이들은 쪼르르 ‘달려오니’까, 노상 ‘달려다니’는 아이들이네.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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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설거지

 


  넉 밤 자면 아이들 나이는 하나씩 는다. 큰아이는 곧 여섯, 작은아이는 이제 셋 된다. 작은아이 오줌가리기를 하느라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쓰는데, 작은아이 말문트기가 꽤 더디면서 오줌가리기 또한 퍽 더디다. 그래도 작은아이 몸과 움직임을 살피며 그때그때 오줌그릇에 앉히면 바지와 기저귀 버릴 일이 없다. 때로는 이틀이나 사흘 동안 오줌바지와 오줌기저귀 하나 안 나오도록 하기도 한다. 그래도 똥바지는 나오지만.


  작은아이 옷빨래가 줄면서 겨울빨래가 퍽 수월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제 겨울이다 보니 밤새 물이 얼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한다. 워낙 따스한 날씨인 전남 고흥이기는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라, 밤에 틈틈이 깨어 물을 틀곤 한다. 굳이 물 졸졸 흐르도록 물꼭지를 틀지 않아도 되는데, 여러 시간 안 쓰다가 다시 틀면, 땅밑에서 퍼올리는 물줄기가 처음에는 시원찮으니, 겨울날 자칫 물관에 얼음이라도 낄까 봐, 저녁에는 설거지를 다 안 하고 두었다가, 한두 시간에 두어 가지씩 설거지를 한다. 지난해까지는 밤에 두 시간마다 아이들 빨래를 하며 물을 썼다면, 올해에는 밤설거지로 물을 쓴달까. 아이들이 자라 작은아이가 네 살 되고 다섯 살 될 적에도 이렇게 밤설거지로 겨울밤을 지새우겠지. 큰아이가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되면, 또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면, 겨울밤 물쓰기를 살짝 나누어 맡을 수 있을까. 너희 아버지 가끔은 밤잠 느긋하게 잘 수 있게 말야.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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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글 익히기

 


  다섯 살 큰아이는 글씨 하나하나 꾹꾹 눌러서 쓴다. 연필이 이내 몽툭해진다. 큰아이는 ‘아버지 글씨’를 들여다본 다음 제 글씨를 쓸 수 있다. 아직 한글을 다 외우지 않았다. 굳이 일찍부터 다 외워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니, 아이는 하루 내내 온통 뛰노느라 바쁘다. 참말, 아이 하루를 돌아보면, 큰아이가 되든 작은아이가 되든, 이 아이들은 걸어다니지 않는다. 늘 뛰어다닌다. 달려다닌다. 아마 ‘달려다닌다’라는 한국말은 없을 듯한데, 아이들은 그냥 ‘걸어서 다니’지 않고, 뛰거나 달리면서 다니기에 이런 낱말을 써야 아이 걸음걸이를 나타낼 만하리라 느낀다.


  깊은 저녁, 두 아이 모두 잠들 낌새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작은 빈책을 꺼내고, 아이 몫으로 큰 빈책을 꺼낸다. 글씨 쓰기를 한다. 아버지가 여섯 칸 깍두기 빈책에 맞추어 글을 하나씩 짓는다. “깊은밤꽃노래, 고운꿈참사랑, 구르는돌구슬, 엄마야밥먹자, 싱그러운풀빛, 상큼한꽃내음.” 아이는 아버지 손글을 꼼꼼히 살피면서 제 글씨를 빚는다. 참 더디구나 하고 느끼면서, 내가 이 아이만 할 적, 내 어머니는 나한테 글씨를 가르치려고 얼마나 오래도록 가만가만 지켜보며 기다렸을까 하고 떠올린다. 나는 얼마나 오래오래 글씨 하나에 온땀 들여 적바림하며 내 글씨를 빚었을까 하고 떠올린다.


  어느 집이든 그러할 텐데, 한글교재 따위란 없어도 된다. 한글교재는 어버이가 사랑으로 그때그때 만들면 된다. 아이가 익힐 한글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사랑으로 하나하나 빚을 때에 아름답다. 그러니까, 시중에 나도는 책에 적힌 한글을 아이한테 가르치지 말자. 그런 책들은 그저 지식이 될 뿐이다. 아이는 어버이가 물려주는 사랑을 받아먹는 삶을 누리면서 글도 배우고 꿈도 배울 때에 활짝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아이하고 글씨 쓰기를 함께할 적에 언제나 새 글을 빚는다. 어쩌면, 새 시를 쓴달 수 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곱고 맑은 생각을 하나하나 빈칸에 맞추어 적어서 넣는다. 좀 수줍은 어른이라면, “사랑해아이야, 좋아해아이야.” 와 같이 여섯 칸에 적어서 넣을 수 있겠지. 먼먼 옛날부터 우리 옛 어버이는 말놀이를 즐기며 말잔치로 삶을 살찌웠으리라 느낀다.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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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의 술 애장판 9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04

 


농약 안 쓰기를 바라나요
― 나츠코의 술 9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11.12.25./9000원

 


  깊은 밤을 포근히 감싸는 눈이 소복소복 내립니다. 작은아이가 잘 자다가 칭얼거려서 살살 어르며 안습니다. 몇 시인가 살피니 새벽 두 시 사십사 분. 쉬를 누일까 싶어 오줌그릇에 앉힙니다. 쉬를 눌 생각은 않고 낑낑거리기만 합니다. 그래, 쉬는 안 누려니. 다시 살며시 안습니다.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선 채 마당을 내다봅니다. 눈 내리는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립니다. 눈이 제법 쌓이려 합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이지만 밤이라 조금 쌓이는구나 싶습니다. 이 눈이 언제까지 내릴까 모르겠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이내 녹을 테고, 해가 구름에 가려 좀 늦게 뜨거나 오늘 하루 안 비춘다면, 어쩌면 낮까지 꽤 하얀 시골마을 모습을 보여주겠구나 싶군요.


  그나저나 눈이 내리는 소리라니, 아주 오랜만입니다. 우리 식구 아직 도시에서 살던 무렵에는, 밤이나 새벽에 눈발이 날려도 골목이 시끄럽고 부산했어요. 도시에서는 눈이 내렸다 하면 ‘사람 다닐 생각’ 아닌 ‘자동차 다닐 걱정’ 때문에 밤이나 새벽에도 바쁘게 눈을 쓸거나 치우려 해요.


  나는 언제나 깊은 새벽에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곤 하기에,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눈 나풀나풀 내리는 밤을 누리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이렇게 내리는 하얗디하얀 눈이 온 시골과 도시를 곱게 안는 모습을 가만히 내버려 둘 텐데요.


- “괴짜를 넘어서 그 정도면 기인이지. 농작물은 파는 게 아니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기인 아니야, 그 사람.” “헤헤, 기인이 아니면 뭔데?” “너 같은 건 감히 흉내도 못 낼 만큼 훌륭한 농업인이야.” “뭐!” “지금의 농업은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뀌어서 원칙을 지키면 기인으로 보이는 것뿐이라고! 그 정도도 모르는 거야, 진키치?” (8∼9쪽)
- “어이, 조심해! 논이 온통 농약범벅이야. 탱크가 깨졌어!” “여기 벼는 전멸이군.” “이삭이 맺혀도 어디 먹을 수 있겠냐, 이런 걸.” (15쪽)

 


  자동차라곤 하나도 없던 지난날, 그러니까 얼추 백 해쯤 앞서를 떠올립니다. 그무렵에는 눈이 온대서 딱히 눈을 쓸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을 쓴다기보다 ‘사람 지나갈 자리’만 넉가래로 슥슥 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그냥 두면서 사람들 발자국으로 ‘눈밭 사이 지나갈 길’이 트였으리라 생각해요. 따로 어른들이 눈을 쓸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눈놀이를 하면서 눈을 제법 치울 테고, 눈사람 만들겠다며 눈을 굴리면 눈은 어느새 많이 사라져요.


  자동차가 넘실거리는 오늘날 이 지구별에서는 어디를 가나 ‘눈 걱정’을 합니다. ‘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들판과 멧자락에 눈이 소복소복 덮이면서 흙은 겨울잠을 포근히 잡니다. 눈이 사그락사그락 소리 내며 쌓이는 동안 들짐승이나 멧짐승이나 들새나 멧새는 먹이 찾느라 애먹을 테지만, 그동안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먹이를 건사했을 테니, 조용히 웅크리면서 눈을 바라볼 테지요.


  겨울 들머리에 말라죽은 풀은 눈을 맞으며 폭폭 쓰러집니다. 눈밭에 파묻히며 조금 더 빨리 흙으로 돌아갑니다. 나뭇가지는 눈을 찬찬히 안으면서 ‘자 자 춥다구, 더 단단히 껍질을 여미고 새봄을 기다리자구.’ 하면서 씩씩하게 우뚝 섭니다. 철이른 꽃 몇몇 피운 동백나무는 붉은 꽃잎에 하얀 눈발 안으면서 ‘아이 추워.’ 하고 오들오들 떨지만, 붉은 잎사귀는 꼿꼿하며 야무지게 빛납니다. 하얀 눈덩이를 안아도 붉은 꽃잎은 시들지 않아요. 되레 더 맑고 환하게 붉은 빛 뽐냅니다.


- “맛있다. 맛있어.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무가, 왜 남아돌아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읍내 아침시장에 내다 팔 거니까. 그래도 남으면 모두에게 나눠 주지. 그러니 걱정 마.” (20쪽)
- “아버지는 옛날부터 농사일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즐겁게 일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멍청한 것. 농사꾼한테 좋고 싫을 게 뭐 있냐!” “죄송해요.” “그럴 거 없다. 대신 행여 농사꾼 흉내 같은 건 내지 마라.” “더 이상 흉내는 내지 않겠어요. 진짜 농사꾼이 되겠어요.” (42∼43쪽)

 

 


  내 어릴 적부터 어른들은 겨울눈 바라보며 으레 한 마디씩 했습니다. ‘이렇게 눈이 펑펑 퍼부어야 시골에서는 흙이 살아 이듬해에 농사 잘 지을 수 있지.’ 도시사람은 눈이 많이 오면 길 막힌다고 아우성이지만, 가만히 살피면, 눈이 오는 아름다움이나 뜻이나 즐거움을 살피거나 느끼지 못하는 나머지, 스스로 삶을 갉아먹는 셈 아닌가 싶어요. 눈이 온대서 주식투자를 안 할 수 없다 하고, 눈이 오더라도 신문은 찍고 방송은 내보내야 한다지만, 눈이 오건 말건 은행을 열고 관공서 문도 열어야 한다지만, 사람살이에서 한복판에 놓일 가장 대수로운 대목은 바로 ‘흙’이요 ‘숲’이 아닐까 싶어요.


  어느 누구도 흙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숲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냇물과 골짝물과 바다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바람 없이 살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햇살 없이 살지 못해요.


  흙이 있어야 파인애플이든 바나나이든 망고이든 뭐든 거둬요. 흙이 있어야 겨울딸기이든 봄수박이든 가을능금이든 거둬요. 비닐집 농사짓기라 하더라도, 흙이 있어야 해요. 비닐집에서 물꼭지를 틀어 물을 주더라도 냇물과 골짝물이 흘러야 비로소 수도물 쓸 수 있어요. 댐에 가두는 물은 어디에서 갑자기 샘솟는 물이 아니에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이 싱그럽지 않으면, 제아무리 자동차와 공장과 발전소 들이 바람을 어지럽히더라도, 지구별 곳곳을 도는 바람이 숲에서 걸러지며 다시금 맑게 불지 않는다면, 도시이고 시골이고 사람은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아요. 햇볕이 사라지면, 지구별은 하루아침에 차갑게 식으며 모두 말라죽어요.


  어떤 물질이나 문명이나 문화나 기계나 진보나 혁명이라 하더라도, 흙 앞에서는 덧없어요. 물 앞에서는, 바람 앞에서는, 숲 앞에서는, 해 앞에서는, 어떠한 것들도 우쭐거릴 수 없어요.


  삶이 있고 난 다음에 문화입니다. 삶이 있고 난 자리에 정치입니다. 삶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경제이든 스포츠이든 역사이든 교육이든 철학이든 사상이든 환경이든 노동이든,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먹일 수 있습니다. 흙을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어요. 흙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서울대 합격’이나 ‘국가고시 합격’이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 흙을 모르는 채 대학생이 된다 한들, 흙을 등진 채 공무원이 된다 한들, 이들 지식인이나 관리들이 이 나라 이 땅을 얼마나 어떻게 아끼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 “농사일에는 원래 남자도 여자도 없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진맥진할 때까지 일을 하지. 당신 손은 부르트고 터져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칠어질 거야.” “그렇게 되고 싶어요. 한시라도 빨리 튼튼한 손과 무엇에도 지지 않는 의지를 갖고 싶어요.” (62쪽)
- “조합장 말이 맞아. 미래의 농사꾼에겐 자격이 필요하다고. 사람이 다 농사꾼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야. 농사꾼이 되어 가는 거지.” (73쪽)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비료나 풀약을 만든 지 얼마 안 됩니다. 한겨레 흙일꾼이 비료나 풀약을 사다가 흙에 뿌린 지 아직 얼마 안 됩니다. 비료농사와 풀약농사는 아직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수천 해 이어온 ‘땀농사’와 ‘손농사’, 그러니까 두레와 품앗이로 이루어진 마을살이 흙일은 어느새 송두리째 자취를 감추어요.


  우리 식구는 고흥 시골마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품앗이로 마늘 심고 마늘 캐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마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남아, 이렇게 마늘밭 일은 서로 거듭니다. 마을에 젊은이가 있으면 논일도 서로 두레와 품앗이로 돕겠지요. 기계힘을 빌어 논밭을 뒤집지 않겠지요. 사람이 손힘과 다리힘으로 흙을 만지고 보듬을 적에는, 이 흙알 하나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깊디깊이 느낄 테니, 섣불리 비료나 풀약을 뿌리지 않겠지요. 내 손이 닿는 흙인걸요. 내 다리가 폭폭 빠지는 흙인걸요. 내 손발에 비료 냄새나 풀약 냄새가 밴다면 내 몸이 남아날까요. 내가 먹을 내 밥에 스스로 비료나 풀약을 칠 수 있겠습니까. 내 아이한테 차려 줄 밥상에 반찬으로 비료나 풀약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습니까.


- “빼어난 술은 제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법이죠. 무엇이 일본 최고인지 따위로 경쟁하는 건 무의미해요.” (122쪽)
- “당신은 당신의 술을 만드세요. 오빠의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시켜, 당신 자신의 술을 만드는 겁니다.” (123쪽)
- “힘이 있으면서 깔끔하고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 술. 감탄하기보단 감동하게 만드는 술.” (140쪽)

 


  일본 전통술 빚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1) 아홉째 권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만화쟁이 오제 아키라 님은 열두 권에 이르는 만화책 《나츠코의 술》을 그리며 첫째 권이든 아홉째 권이든, 또 마지막권에서까지이든, ‘술 이야기’보다 ‘흙 이야기’를 훨씬 자주 더욱 깊이 들려줍니다. 틈틈이 ‘술 빚는 넋’과 ‘술 담그는 매무새’를 밝히기는 하지만, ‘흙 만지는 넋’과 ‘흙 일구는 매무새’를 더 낱낱이 드러내요.


- “농사꾼은 백 가지 일을 하고, 백 가지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래.” (218쪽)


  그러고 보면, 어느 인문책에서고 ‘흙’을 다루는 일이 매우 드뭅니다. 따로 흙을 밝히려 하는 책이 아니고서야 흙일을 다루는 적은 없다 할 만해요. 문학책이건 인문책이건 예술책이건 이런저런 자기계발책이나 처세책이건, 또 교과서나 참고서이건, ‘흙’도 ‘물’도 ‘숲’도 ‘바람’도 ‘해’도 말하지 않고 다루지 않으며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삶’을 안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책들은 삶하고 너무 동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흙일꾼은 백 가지 일을 하면서 백 가지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 한다는데, 하나하나 따지면, 흙일꾼 백 가지 아닌 천 가지나 만 가지 일을 하면서 천 가지나 만 가지 것을 빚어요.


  흙일꾼은 먹을거리만 짓지 않습니다. 예부터 흙일꾼은 입을거리도 짓습니다. 흙일꾼은 저희 보금자리, 곧 집을 스스로 짓습니다. 흙일꾼은 사람하고 이웃하는 들짐승이나 멧새한테도 먹이를 나누어 주고, 집을 따로 지어 주기도 합니다. 콩 석 알 심는 것이 바로 ‘들짐승과 먹이 나누는 넋’이에요. 처마 밑 제비집 그윽하게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곧 ‘멧새와 삶을 나누는 매무새’예요.


  농약 안 쓰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이 ‘도시로 떠나 보낸 딸아들’을 일깨워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런데 고향은 시골인 도시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눈길과 흙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슬기로우며 따사롭게 깨우치도록 하면 됩니다. 시골 어르신들 딸아들이 마음속에 따순 사랑을 심어야 해요.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골에 어버이 둔 이들’ 모두 당신 어버이가 어떤 흙일을 하는가를 제대로 느껴, 도시살이와 시골살이 모두 제자리를 찾도록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도시에서 아이들 낳아 돌보다 보면 하나같이 아토피에 천식에 폐렴에 온갖 아픔을 달고 산다지요. 시골집으로 와서 정갈한 밥과 물과 바람과 햇살 먹으면서 흙을 뒹굴며 살면 추운 겨울날 뛰놀아도 몸 아픈 데 하나 없다지요.


  도시로 떠난 시골 분들이 굳이 유기농 곡식 사다 먹지 않아도 돼요. 당신 어버이가 시골에서 유기농 곡식 일구도록 이끌면 돼요. 시골 늙은 어버이가 ‘도시 젊은 딸아들’한테뿐 아니라, 저잣거리에 내다 파는 여느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 모두 유기농으로 짓도록 ‘도시 젊은 딸아들’이 북돋우면 돼요. 서로서로 싱그럽게 살아갈 때에 흙이 살고 한겨레가 살며 지구별이 살아요. 4345.12.2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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