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스미다 - 그대에게 띄우는 50장의 그림엽서
민봄내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삶으로 스며야 할 그림읽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9] 민봄내, 《그림에 스미다》


 잘 놀던 아이가 잠이 듭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쉴새없이 뛰고 놀고 노래하고 말하고 하던 아이가 까무룩 잠이 듭니다. 더운 날씨에 물놀이를 시키니 한 시간이 넘도록 물에서 나오지 않고 놀려고 하더니, 물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옷을 입히니 이 더운 날씨에 양말 신겨 달라며 칭얼거리다가 한쪽 발에 꿰어 주니 어느새 큰 베개에 제 몸을 넙죽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아이를 삼십 분 즈음 그대로 둡니다. 삼십 분이 지나고서야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는 살짜이나마 깨어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채 두 시간 반이 넘도록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이맘때는 애 아빠가 비로소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동네마실을 다니든 할 만한 말미인데, 그렇다고 애 아빠 스스로 뭔가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른 새벽에 아이가 깨어나기 앞서 일어나 주섬주섬 이 살림 저 살림 하는 가운데 하루 내내 아이랑 씨름하며 지내다 보니, 아이가 늦은 낮잠을 자는 이때에는 애 아빠도 고단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드러누운 아이 옆에 함께 드러누워 늦은 낮잠을 함께 자고 싶습니다.


.. 나의 아빠 또한 딸에게 처음이고 싶은 게 많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에티켓, 정찬을 먹는 순서, 두 발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셨고, 막걸리 넣은 밀반죽을 아랫목에 묻었다가 찐빵이 돼 가는 과정도 보여주셨다. 그네를 탈 때 뒤로 나뒹굴지 않는 요령과 어린 동생을 돌보는 법, 어른들에게 꼭 인사해야 하는 이유와 동물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울지 않는 뚝심까지. 하지만 공식적인 어른이 될 때까지 난 그것들을 스스로 익혀 왔다고 여겼다 ..  (55쪽)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잠든 아이가 쉬를 했습니다. 날이 더워 낮잠 잘 때에는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더니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천으로 오줌자리를 훔칩니다. 아이한테 새 바지를 입힙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기계빨래를 하는 분들은 빨랫감을 모아서 할 텐데, 손빨래를 하는 사람도 하루치 빨래를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날도 있으나, 으레 그때그때 빨래를 해서 널어 놓습니다. 요사이처럼 더운 날은 일부러 손빨래를 자주 하며 몸을 식힙니다.

 다 한 빨래를 빨랫대에 널어 놓습니다. 아이 오줌으로 젖어 아침에 널어 놓은 담요가 언제쯤 마를까 모르겠습니다. 다 안 마르면 아빠가 안 젖은 자리 쪽으로 해서 바닥에 깔고 자야지요.

 요즈음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는데,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기에 아이 이야기를 나눈다 할 테지만, 하루 내내 아이랑 붙어서 복닥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축구 경기에 하루 내내 마음을 파는 분들이라면 으레 축구 얘기가 터져나올 테고, 정치 소식에 늘 눈길 두는 분들이라면 저절로 정치 얘기가 흘러나올 테지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지난날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책 얘기만 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헌책방 얘기를 신나게 했구나 싶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안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책을 쉼없이 사 읽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바지런히 글을 썼으니까요. 이래도 책 저래도 책 그래도 책인 삶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피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좋아할 책을 찾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반가운 짝을 사귑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몸에 맞는 밥을 먹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흐뭇해 하는 일거리를 붙잡습니다.


.. 내가 아는 노래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다. 장르나 시대상을 몰라도 물의 하류처럼 고여 드는 기분. 귀에 콕 박혀서 버스 노선같이 외워지는 가사들. 꼭 그만큼의 흡입력이면 됐다 ..  (82쪽)


 사진을 읽을 때에, 사진을 꼭 잘 알아야 사진을 잘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느낌에 따라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꾸리는 삶이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지 못한다면,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사진이라든지 ‘널리 이름났다는’ 사진에 매달립니다.

 그림을 읽을 때에, 그림을 잘 안다든지 그림쟁이를 잘 알아야 그림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림읽기란, 그러니까 ‘그림 감상을 하며 감동하기’란 그림 지식을 불리거나 뽐내는 일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을 찾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본다든지 오래도록 마주 바라보면서 마음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뭉클함을 사랑하는 일이 그림읽기입니다.

 민봄내라는 분이 쓴 《그림에 스미다》라는 이야기책 하나는 바로 이렇게 그림을 읽은 삶을 담은 책입니다. 민봄내 님 책 《그림에 스미다》라는 책에서는 민봄내 님 스스로 좋아하고 아끼는 그림을 놓고 ‘기교가 어떻고 유파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다’ 하고 밝히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지식조각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읽기를 하며 우리가 따질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거든요. 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나 스스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띄우면서 즐거웠느냐입니다.


..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건 커다란 이불 홑청 아래 만들어지는 약간의 응달이었다. 그 자그마한 빨래 그림자가 태양의 뒤뜰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한번 앉으면 오래 노는 걸 알고 있던 엄마는, 가끔 빨래줄 장대를 옮겨 달라고 명하셨다 ..  (164쪽)


 책읽기란 그림읽기하고 같습니다. 책 하나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또는 셈틀을 켜고 누리집을 뒤적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을 펼치고 줄거리를 살피며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실천으로 받아들일는’지 ‘머리에 지식으로 채울는’지를 가름합니다.

 책읽기를 마친 뒤 ‘책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그림읽기를 마친 다음 ‘그림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책이나 그림이란, 우리 가슴으로 스며든 책이나 그림 이야기이지, 이 책이나 그림에 얽힌 지식조각이 아닙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어찌저찌하고는 하나도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책 하나가 내 품에 고이 안겼느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림 하나가 내 가슴에 푸근히 기대었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언젠가 열대 나라를 여행하면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그러나 몹시 아끼는) 책을, 베개로 삼은 적이 있다. 지치고 목이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응달진 회랑을 찾아가 책 모서리에 머리를 걸치고 누워 버렸다. 돌아올 때까지 완독은 못했지만, 좋았다. 아끼는 제목과 문구들을 배낭에 지고 걷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신이 났으니까. 읽고 난 후에도 마음 밖에서 겉도는 문장들. 책의 백양백색을 따지다 보면, 늘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책은 세상살이에 있어, 참 괜찮은 친구라는 것 ..  (232쪽)


 민봄내 님 《그림으로 스미다》는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겉멋 들린 그림읽기에서 살짝살짝 홀가분해지는 매무새를 언뜻선뜻 보여줍니다. 지난날에는 갖가지 어렵고 딱딱한 말로 겉치레를 해대는 ‘예술비평’만 있었는데, 민봄내 님 책은 이런 겉치레 딱딱함하고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좋은 그림읽기란 좋은 삶에서 비롯하는 만큼, 잘나거나 못나거나 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 나한테 좋으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좋은 삶인가를 곱씹으면서 그림을 읽고 그림을 말하며 그림을 나누면 됩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은 아직 마무리가 슬기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그림읽기를 겉멋으로 하지 않고 당신 삶자락으로 하고 있는 민봄내 님인데, 민봄내 님이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낸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에서 민봄내 님 넋은 아쉽게도 착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맑은 곳으로 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자 나이 서른이면 세 가지 틀을 완성시키라고 했다. 돈과 일과 사랑. 혹시 혼자여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서른은 ‘나홀로 세상에’라고 말해 주고 싶다(19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떨굽니다. 왜 ‘돈과 일과 사랑’이어야 할는지 안타까워 고개를 떨굽니다. 그나마 ‘사랑’이 있으나 민봄내 님이 밝히는 사랑은 남녀 사이에 맺는 살섞기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숱하고 너른 사랑 가운데 아주 작은 귀퉁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이라고 하여도 도시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하는 일이지, 나 스스로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뭇목숨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돈’은 두말할 까닭이 없겠지요. 더없이 빛나는 나이인 서른에 한낱 돈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 넋인지요.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우리는 ‘돈-일-사랑’이라는 겉발린 허울에서 홀가분할 수 없을까요.

 어설픈 틀에 매이지 않는 그림읽기요, 어줍잖은 틀에 갇히지 않는 그림읽기이며, 어리석은 틀을 내세우지 않는 그림읽기인 《그림에 스미다》이지만, 어설픈 돈과 어줍잖은 일과 어리석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맙니다. 아무쪼록 ‘참-착함-고움(진선미)’을 찾으며 깨닫고 곰삭이는 싱그럽고 푸르디푸른 봄볕으로 빛나는 냇물 한 줄기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랑어린 빗물 같은 《그림에 스미다》로 다시 태어나 주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 《그림에 스미다》(아트북스,2010)
 ├ 글 : 민봄내
 └ 책값 : 13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을 생뚱맞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라는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놓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모르는 분일 테지요. 〈우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http://cafe.naver.com/saveuriedu〉이라는 자리가 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이라도 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육〉이라고 하는 배움책


 대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은 꽤 많습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기도 하고, 대학교는 배움터가 아님을 깨달아 그만두기도 합니다. 돈벌이를 일찍부터 하고자 그만두기도 하며, 대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를 다른 곳에서 찾았기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김예슬 님이 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쪽글을 하나 적바림했고, 이 쪽글에 살을 입혀 자그마한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김예슬 님 이야기와 생각이 담긴 책은 참 자그맣고 가벼우며 값이 쌌습니다.

 김예슬 님은 대학교를 그만두기는 했으나, 아직 당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옳고 바르고 착하며 참된 가운데 곱게 깨닫거나 붙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느낌을 버리지 않고 생각을 붙잡아 대학교를 떨칠 수는 있었으나, 아직은 대학교 떨치기만 했을 뿐, 아름다우며 참되고 바른 삶을 붙잡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예슬 님 생각을 담은 책이 꽤 사랑을 받으며 팔립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 여러모로 알려졌기에 사랑받을 만하고 팔릴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생각(주의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삶(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들여다본다면 이런저런 부스러기 생각이 모여 있을 뿐, 부스러기로 있는 생각을 어떻게 왜 누구하고 언제 어디에서 그러모으고자 하는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는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지를 이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일꾼들은 어느 만큼 고개숙이면서 삶을 다부지게 붙잡으며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우리교육〉에 몸담고 있던 그대로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쫓겨난 사람들이 모인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그동안 〈옛 우리교육〉에서는 제대로 담아내거나 나타내지 못했던 삶자락을 차곡차곡 담아내어 배움터 안팎에서 땀흘리고 눈물흘리며 피흘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웃음과 눈물이 되고자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옛 우리교육〉은 아마 ‘(주) 우리교육’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내놓으리라 봅니다. 〈새 우리교육〉을 ‘(주) 우리교육에서 쫓겨난 일꾼’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옷만 새로 갈아입을 뿐, 줄거리와 고갱이와 삶은 예전 그대로는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이 아니라면 어떡하느냐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잡지를 낸다고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글쟁이들이 새로운 글을 써서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새로운 이름이 붙는다고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김예슬 님이 낸 책을 읽으며 ‘이 젊은 넋은 아주 마땅하게도 옳고 바르며 고운 삶을 아직 모를 뿐 아니라, 옳고 바르며 고운 삶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옳고 바르며 고운 삶자락 한 귀퉁이라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새 우리교육〉은 어느 무엇보다도 (1) 참됨(올바름) (2) 착함(사랑과 믿음) (3) 고움(아름다움), 이렇게 세 가지를 제대로 깨닫고 찾으면서 담아내는 잡지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 세 가지를 담아낼 수 있으면 어떠한 잡지이든 괜찮습니다.

 반드시 교육잡지라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교사와 학부모 중심으로 읽힐 잡지여야 하지 않습니다. 교육이란 교사만 하는 일이 아니요, 학부모만 마음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 아닌 누구나 교사여야 하고, 학부모 아닌 누구나 학부모로서 우리 마을 아이들을 살피고 사랑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교사 아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지식이 아닌 삶으로 아이들 앞에서 좋은 스승으로 보여지도록 참다이 살아가야 합니다.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알맹이가 참되고 착하며 고와야 하는데, 올바르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배움터뿐 아니라 책마을까지 슬기로운 넋을 일깨우는 책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새 우리교육〉이라 한다면 《김예슬 선언》처럼 자그맣고 값싸며 가벼운 종이를 쓴 잡지가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진이 들어가도 되고 그림이 들어가도 되지만, 사진과 그림이 한 장조차 없어도 됩니다. 100쪽짜리 잡지여도 좋고 200쪽짜리 잡지여도 좋은데,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은 책이 되기를 꿈꿉니다. 아니면 한손으로 가벼이 들고 다니며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물하기에 좋은 판짜임이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참배움(‘참교육’이 아닌)이라 한다면,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만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모든 몸짓과 넋이 참배움이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자면 무엇을 알고 느끼며 생각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바로, 무엇보다도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참다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뿐 아니라 아이들 누구나 내 힘으로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돈만 벌면 되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교실 안쪽이든 집 안쪽이든 꽃그릇 하나 마련하여 콩을 심어 거둘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서로 바느질을 하고 손빨래를 하며 청소와 밥하기를 제대로 슬기로이 배우고 가르치는 틀이 〈새 우리교육〉에 담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본질)’을 캐내고 밝혀야 비로소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 우리교육〉이라는 잡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얼마 앞서까지 다달이 나왔던 〈옛 우리교육〉을 보면서 ‘이렇게 지식조각만 가득한 잡지라 한다면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잡지’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아이들한테 ‘다양한 직업을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람이 마땅히 찾아서 즐길 일거리를 저마다 제 몸과 마음에 맞도록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제도권 교육 얼거리를 스스로 떨쳐내고 당신 삶자리에서 조용하게 당신 삶부터 옳고 바르고 착하게 돌보신 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지식은 다루지 않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제발 지식이 아닌 땀방울과 굳은살을 다루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다달이 내야 할 까닭이 없는 〈새 우리교육〉입니다. 한 해에 두어 번 내는 ‘무크’가 되더라도, 한 권 한 권 알뜰하고 사랑스러워, 이 잡지를 만드는 일꾼들부터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사람과 땅과 목숨 모두를 사랑하고 믿고 껴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무슨무슨 꼭지가 있어야 하느냐를 생각하기 앞서, 무슨무슨 마음가짐이어야 하느냐를 생각할 〈새 우리교육〉입니다. 잡지는 한 사람이 만들어도 되고, 열 사람이 만들어도 됩니다. 그냥 ‘갱지에 문고판으로 만들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참배움이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요, 껍데기에 눈이 팔리는 사람이 아닌 알맹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끄는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라 하여 허술하게 할 까닭이 없으나, 정작 우리가 살필 모습이란 사람들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 속마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속마음을 살피고 아끼려는 사람이라 한다면, 잡지를 만들 때에도 속알맹이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참되고 착하도록 짜고 엮어야 하는 데에 온마음을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저는 이 잡지를 즐겁게 받아볼 생각인 한편, 저 스스로 내 삶을 곱게 일구려고 애쓰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글이든 사진으로든 갈무리해서 자원봉사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갈 뜻이 아니라 한다면, 저는 〈헌 우리교육〉이든 〈새 우리교육〉이든 그리 생각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 살아가는 데에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란 더없이 빠듯하고 고됩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눈물


 지난 2002년 한국땅에서 벌어진 축구대회 때에는 나 또한 길거리에서 뜀박질을 하며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무렵은 나 스스로 참 철이 없기도 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을 누비면서 뜀박질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 더없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드넓은 찻길에 차가 못 다니도록 가로막고 사람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퍼질러 있을 수 있는 대목이 기뻤다. 비록 ‘운동-사랑놀이-영화’ 세 가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며 바보스레 깎아내린다 하지만, 어쩌면 정치권력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세 가지를 잘 살리면서 우리 나름대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꿈을 꾸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는 가운데 지난날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으며 어설픈가를 뼛속 깊이 느낀다. 모든 사람이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접어들려 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않음을 느끼거나 깨달으면서 바보는 바보일 수밖에 없으니 덧없는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딱 한 번 주어진 아름답고 멋지며 사랑스러운 내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며 야무지게 기쁘게 붙잡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축구대회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도 하며, 아이와 옆지기와 바쁘고 힘겨이 살아가는 살림살이에서 이런 데까지 둘 눈길이란 처음부터 있지 않다. 지난 6월 며칠이더라, 축구대회가 벌어진다고 하는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만석동이었나 어느 골목을 세 식구가 나란히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옆지기가 어느 가게에서 받아 온 전단지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 이거 축구대회 편성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에 비로소 올해 2010년에 축구대회가 또 있음을 알았고,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나란히 축구대회 본선에 올라 있음을 알았다.

 지난밤이겠지. 우리 시간으로 새벽에 북녘나라하고 브라질이 축구 한 판을 치렀다. 이런 새벽에 축구대회를 보자고 일어날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애 아빠와 애 엄마 모두 텔레비전을 키울 마음이 없다. 아무튼 경기를 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으나, 북녘나라 선수들이 1966년 뒤로 처음으로 축구대회 본선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함께 올라 있다는 대목은 놀랍다고 느낀다. 북녘나라가 치른 축구 경기는 뒷소식이 궁금했다. 어떻게 되었나 알아보려고 누리그물을 들여다본다. 북녘나라는 브라질한테 1대 2로 졌단다. 그런데 이런 소식보다 ‘북녘 나라노래가 흐를 때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렇구나. 눈물이구나. 그래. 눈물이지.

 엊저녁, 수원 칠보산 기슭에 자리한 칠보산자유학교라는 곳 선생님들하고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느즈막하게 막차꼬리를 붙잡으며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 하나를 읽었다. 이날 수원 팔달문 앞 헌책방 〈오복서점〉에서 찾아낸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라는 책을.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일본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소설쟁이가 되었다는데, 한때 이분 책이 우리 말로 곧잘 옮겨지곤 했으나, 이제는 이분 책은 모조리 판이 끊어졌다. 어느 한 가지조차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헌책방에서도 만나기 힘든 이분 책인데, 다문 한 가지라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터에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만났다.

 이 책은 일본사람도 조선사람도 한국사람도 재일조선인도 재일한국인도 아닌 한 사람이 쓴 소설이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모른 채 살았을 뿐 아니라 아무도 이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당신 삶을 소설에 담으려고 당신 집안 뿌리를 알아보다가 아주 우연하게 할머니가 평안도사람임을 알았다지.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아니 그냥 일본사람이었을, 이러면서 아무런 걱정이나 푸대접을 받을 일조차 없으며, 당신 몸에 한겨레 피가 1/4이 흐르는 줄 알았다 하더라도 당신 이름이며 국적이며 그냥 ‘일본사람’인데,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소설쓰기를 붙잡다가 뒤늦게 알아 버리고야 만 당신 뿌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짊어졌다. 이 짐을 지다가 그만 고꾸라졌다. 몹시 꽃과 같은 나이에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른여섯,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나이에 눈을 감은 사기사와 메구무 님인데, 사람들은 서른여섯이면 꽃과 같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려나. 열둘은 어린 싹이고 스물넷은 푸른 잎이며 서른여섯이 꽃다운 아름다움이고 마흔여덟에 무르익다가는 예순에 씨앗을 남기고 일흔둘에 우람한 나무가 되다가는 여든넷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아흔여섯에 마지막 잎새를 피우는 줄을 살피는 사람은 없으려나.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를 누리그물을 들여다보며 만나는데, 이이 눈물에서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홀로 조용히 흘렸을 눈물이 떠올랐다. 이러면서 나 또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모든 운동경기는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란 운동이 아니다. 이기려고 바둥거리는 운동경기란 전쟁하고 똑같으며,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엉터리 삶하고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우리 한삶을 꾸린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즐거움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삶을 꾸린다. 한삶을 꾸리는 가운데 운동경기를 치르는 선수들 또한 ‘이기는’ 데에 큰뜻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운동선수한테는 꿈과 같다는 무대에 서는 일이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니까, 이러한 무대에 서는 날까지 피와 눈물을 바칠 수 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이라면 당신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릴 테고, 교사라면 당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북받치는 눈물을 흘릴 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신부님이라면 거짓 신부님이요, 눈물을 쏟지 않는 교사라면 거짓 교사라고 느낀다. 맨 처음 들어서는 때에만 눈물이 솟을 수 없다. 맨 처음뿐 아니라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눈물은 샘솟으며, 마지막이 되든 언제가 되든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입을 맞출 때에 맨 처음에만 기쁘겠는가.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기쁘며 언제라도 기쁘다. 노상 눈물이 흐르고, 한결같이 웃음을 머금는다.

 축구를 하는 정대세 선수가 흘리는 눈물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구지레하게 덧붙이거나 덧달 이야기란 한 가지도 없다. 눈물은 그저 눈물이다. 정대세 선수는 가없는 북받침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름다우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고, 눈물을 흘리는 몸뚱이로 온누리를 부대끼는 사람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4343.6.16.물.ㅎㄲㅅㄱ)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3   좋아요 0 | URL
정대세 선수의 눈물을 보면서 저는 외국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머무는 타국적인 분들 생각도 나구요.

파란놀 2010-06-16 11:1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쓸 마음은 없었는데, 문득 궁금해서 '조선일보는 어떤 기사를 썼을까?' 하고 들여다보다가 더없이 슬픈 마음이 들었답니다. 왜 그렇게들 '비틀기'를 하려고 안달일까요... 불쌍한 사람들...

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7   좋아요 0 | URL
참 시사인에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사는 곳을 옮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럽고 한편으로는 아쉽고 그랬습니다.

파란놀 2010-06-16 11:46   좋아요 0 | URL
인터뷰는 아니고 전화로 몇 가지 물어 본 다음에 나온 기사예요 ^^;;;
사진도 지난해에 <책방 이음>에서 사진잔치 할 때에 찍었던 녀석을
다시 실었구요 ^^;;;;;

그래도, 제 모자란 책에 눈길을 보내 주는 분들은 누구나 고맙답니다~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인천골목 사진 찍기 많이 어렵지만,
식구들이 튼튼하게 지낼 수 있어 좋답니다~
 


 엉터리 사진, 엉터리 책, 엉터리 말


 엉터리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다. 이들이 찍는 사진을 본다든지 이들이 읊는 사진말을 듣다 보면 참으로 갑갑하며 슬프다. 아니, 이들이 더없이 딱하고 안쓰럽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길을 걸어가면서 엉터리 사진을 찍거나 엉터리 사진을 말하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헤아리지 못하는데다가, 바로잡지 못한다. 이리하여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는 불쌍할 뿐 아니라 슬프다.

 나는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들을 으레 부대끼거나 마주해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길을 걷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옆에서 보기에 뻔히 어설플 뿐 아니라 볼썽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와 같은 길을 걸어가겠는가. 사진을 삶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며, 사진에 깃든 빛과 그림자를 읽을 줄 모르고, 사진으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백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백 장에 이르는 사진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사진을 내 온힘을 바쳐 찍을 노릇이요, 사진을 밝히는 글을 내 온마음을 들여 적바림할 노릇이다.

 엉터리 책을 쓰거나 내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다. 게다가 많다. 이들이 쓴 책이나 내놓은 책을 살핀다든지 이들이 떠벌이는 광고 글월을 살피다 보면 속이 메스꺼울 뿐 아니라 참말 어이없으며 괴롭다. 아니, 이들이 가없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이름놀이를 하면서 엉터리 책을 퍼뜨리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는데다가, 거듭나지 못한다. 이러니까 이들 엉터리 책쟁이는 우악스러울 뿐 아니라 무시무시하다.

 나는 이들 엉터리 책쟁이들을 늘 만나거나 쳐다보아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삶을 꾸리지 않아야겠다고 되뇐다. 곁에서 바라보면 어엿하게 어리석을 뿐 아니라 볼꼴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책쟁이와 같은 삶을 꾸려야 하겠는가. 책을 삶으로 녹일 줄 모르며, 책에 담긴 알맹이란 밥처럼 날마다 즐겨먹으며 내 아름다운 일을 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줄 모르고, 책으로 따스함과 넉넉함을 펼치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즈믄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즈믄 권에 이르는 책을 건네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이 펄떡펄떡 뛰도록 하는 책을 온땀 들여 쓸 노릇이요, 책을 밝히는 글을 내 온피를 쏟아 적어내릴 노릇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죄 엉터리로 살아간다. 죄 엉터리로 학교를 다니고 죄 엉터리로 밥을 먹으며 죄 엉터리로 텔레비전에 파묻혀 있다. 죄 엉터리 가득한 신문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죄 엉터리 아파트에서 엉터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하나 자가용한테서 홀가분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두 다리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돈이 아닌 사랑을 믿고, 이름값이 아닌 믿음을 섬기며, 주먹힘이 아닌 꿈을 건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삶이 엉터리이니 넋이 엉터리이다. 넋이 엉터리인데 말이 엉터리 아닐 수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면 넋이 아름답고, 넋이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말이 아름답다.

 그지없이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를 쉽고 마땅히 새기거나 품는 사람이란 왜 이렇게 드물까. 지저분한 온누리이니까 예방접종을 다 맞추어야 하고, 더러운 이 땅이니까 농약과 비료 펑펑 써대야 하며, 먹고살기 팍팍한 이 나라이니까 돈벌이만 하면 될까.

 아무래도 이모저모 핑계거리가 있는 우리들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일 저 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든지 학교를 다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서 얼마나 고단한 하루하루일까. 그런데 이 모두는 집어치울 핑계거리이고, 우리가 돌아볼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다. 누구한테든 저마다 주어진 삶은 딱 한 번뿐이요, 이 한 번 주어진 삶은 다른 어떤 사람 삶하고 견줄 수 없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즐거운 나날이다. 남하고 나를 견줄 까닭이 없이 나는 나대로 내가 걷는 이 길을 가장 신나게 걸어가면 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거움이 있고, 가멸찬 살림일 때에는 가멸찬 살림인 대로 즐거움이 있다. 두 다리가 튼튼하여 힘차게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힘차게 걷는 길에서 즐거움을 맛보고, 두 다리가 아파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라면 바퀴걸상을 탄다든지 다른 사람 힘을 빌어 다닌다든지 하며 또다른 즐거움을 맛본다. 밥을 해서 스스로 먹어도 즐겁고, 밥을 차려 먹여도 즐거우며, 밥을 차려 준 분한테서 얻어먹어도 즐겁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엉터리 사진을 찍고 엉터리 책을 쓰거나 읽으며 엉터리 말을 일삼는 까닭은 오로지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며 즐겁고 소담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자꾸자꾸 엉터리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싶다.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내 넋을 사랑하고 내 말을 사랑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랑이 안 묻어날 수 있겠는가.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쓴 책에 사랑이 안 담길 수 있겠는가.

 돈에 파묻힌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돈내음이 폴폴 난다. 권력을 좇는 사람이 쓰는 책에는 권력내음이 구리게 난다.

 꿈을 품을 노릇이지 검은 속셈을 키울 노릇이 아니다. 꿈을 이루고자 땀을 흘릴 노릇이지 돈을 벌고자 땀을 쏟을 노릇이 아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꿈을 살피고, 책으로 이루는 꿈을 곱씹으며, 내 땀을 알뜰살뜰 곱게 들이며 이루는 꿈을 찾을 노릇이다. 성적표는 숫자가 아닌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데, 참말 사랑으로 성적표를 쓰고자 하는 스승이라면 아예 성적표란 집어치우고 아이들한테 편지를 써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쓰는’ 성적표라고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 아니란 얘기다.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란 ‘사랑으로 쓰는’ ‘편지’ 한 가지이다.

 옳게 살고 착하게 살며 곱게 살면 된다. 옳은 마음을 깨닫고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고운 마음을 보듬으면 된다. 옳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즐기며 고운 일을 나누면 된다. 옳은 사진을 찍고 착한 사진을 나누며 고운 사진을 펼치면 된다. 밑바탕을 차리고 밑틀을 세우며 밑돌을 닦으면 된다. 갈래는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다 다르게 나아가면 된다. 맨 먼저 밑자리를 슬기롭게 뿌리내리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면 된다. (4343.6.14.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쪽빛문고 5
다케타쓰 미노루 글.사진, 안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온누리와 사람을 살리는 힘
 다케타쓰 미노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책이름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글ㆍ사진 : 다케타쓰 미노루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07.2.20.)
- 책값 : 8500원


 (1) 4대강 사업에 얽힌 두 사람


 지율 스님은 ‘초록의 공명(http://www.chorok.org)’이라는 누리집 한켠에 당신이 거닐고 있는 삶터 한 자락을 글과 사진으로 띄엄띄엄 올려놓고 있습니다. 지율 스님이 띄엄띄엄 올리는 글과 사진을 ‘초록의 공간’이라는 곳으로 띄엄띄엄 찾아가 하나하나 읽고 살피노라면, 지율 스님이 바라보고 있는 낙동강 줄기란 참 수수하고 정갈하구나 싶습니다.

 돈을 바라보는 개발주의에 따라 나무를 자르고 모래를 파내며 땅을 뒤엎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일지라도 지율 스님 사진은 더없이 차분하면서 정갈합니다. 윽박지르는 사진이 아니라 포근히 감싸는 사진입니다.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진이 아니라 슬퍼 울고 있는 사진입니다. 아직 돈바라기 개발주의 삽날이 닿지 않은 곳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그지없이 따스하면서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구나 싶습니다.

 숱한 글과 사진으로 4대강 사업을 아름다운 개발이라고 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다른 숱한 글과 사진은 4대강 사업이야말로 끔찍한 막개발이라고 까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당신들 스스로 가장 옳고 바르다 여기는 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당신들 생각을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이들 숱한 목소리와 생각을 글과 사진으로 마주할 때마다 참으로 팍팍하고 메마르구나 싶습니다. 옳고 바른 목소리이기에 따사롭고 맑게 생각을 펼친다든지, 맞고 틀림없는 외침이니까 넉넉하고 밝게 마음을 나누려 하는 글과 사진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멍청한 짓이나 바보스러운 짓을 얄궂게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따끔하게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청하거나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참을 참으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착한 일을 모르고 고운 삶을 모릅니다. 알면서 못한다 할 수 있지만, 모르기에 못할 뿐더러, 느끼려 하지 않으니 안 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따끔한 꾸지람조차 소 귀에 읽는 불경이 되리라 봅니다. 소 귀에 읽는 경인데 꼼꼼하며 올바른 비판이라 할지라도 먹힐 리 없습니다.

 《신갈나무 투쟁기》를 쓰고 《숲의 생활사》와 《숲 생태학 강의》 같은 책을 쓰면서 숲과 자연을 살리는 길을 살펴 왔다는 차윤정 님은 지난 2010년 5월 17일에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환경부본부장’이라고 하는 1급 공무원 자리를 꿰찼습니다. 당신은 ‘생명의숲’이라는 모임에서 문화교육위원으로 일하기까지 했는데, ‘생명의숲’이라는 곳은 4대강 사업이 우리 땅에 좋지 않은 막개발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차윤정 님은 당신 스스로 ‘4대강 사업은 옳지 않다’고 밝히는 일을 하고 글을 써 왔으나(한국일보 칼럼), 어떤 까닭에서인지 둘레에서 환경사랑을 이루고자 힘쓰는 사람들을 힘겹게 하면서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저런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 집 책꽂이에 꽂힌 차윤정 님 책들을 길바닥에 내팽겨쳐야 할는지, 아니면 헌책방에 갖다 주어야 할는지 망설이다가 그냥 집에 두기로 합니다. 차윤정 님은 어느 신문사하고 만난 자리에서 당신 ‘소신이 바뀌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자연을 파헤치는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연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도록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갈나무 투쟁기》이든 《숲 생태학 강의》이든, 나무와 숲과 풀 모두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목숨이 아닌 사람한테 이바지를 할 때에 아름다울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신문에 실린 길디긴 만나보기 글을 읽으며 뒷통수를 쳤습니다. 차윤정 님은 흔히 말하는 변절을 한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옳고 바른 삶하고는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 줄거리만 읽을 노릇이 아니라, 글줄마다 깊디깊이 실린 속내를 헤아릴 노릇이었는데, 저를 비롯하여 숱한 사람들은 책 하나 똑바로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차윤정 님은 사랑과 믿음으로 글을 쓰거나 숲 해설을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개발 편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연 개발’을 하되, 지나치게 편의주의를 내세우거나 개발을 앞세우면 사람한테 도움될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당신 책에 알알이 담아 왔던 셈입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삶결에 따라 우리들한테 맑고 밝으며 따스한 손길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며, 1급 공무원이라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나쁜 놈이요, 4대강 사업 참모습을 밝히고자 온몸을 바치는 사람은 좋은 분이라고 금긋기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거나 어느 길을 걷든지 부디 사랑을 찾고 믿음을 섬길 수 있기를 비손할 뿐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아닌 ‘사랑으로 어루만지자’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뿐입니다. 넉넉하거나 따스한 마음이 아닌 이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팬다고 넉넉함이나 따스함을 느끼거나 되찾겠습니까. 아름답거나 훌륭한 넋이 아닌 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고 찬찬히 타이른다고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을 고맙게 맞아들이겠습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왔으니 명예와 돈과 권력에 끄달립니다. 믿음을 섬기지 못하며 지내왔기에 스스로 참되거나 착하거나 곱게 살아갈 매무새가 안 됩니다.

 지율 스님 글과 사진을 꾸준히 되읽고 곰삭이면서 생각합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노동운동을 하든 문화운동을 하든 어찌 되었든 ‘운동’을 하면서, 이 낱말마따나 ‘움직이기’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 내기’에 앞서 내 삶으로 ‘따순 품과 너른 눈’을 북돋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은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거나 떠벌이는 사람들을 나무라고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낙동강 마실을 하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한테까지 함께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또다른 4대강 사업’을 깨달으면서, 우리 스스로 참된 길을 찾기를 바라면서 글을 씁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4대강 사업은 반대하면서 입시지옥과 학벌주의를 깨지 않으면 부질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나쁜 짓이라 꾸짖으면서 영어만능에 세계화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젖어 있으면 덧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반대한다면서 더 빠른 자가용하고 더 큰 아파트랑 헤어지지 못한다면 쓸모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착하게 반대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 일은 이 일대로 제대로 나무라거나 꾸짖을 줄 아는 가운데 우리 삶을 착하게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고운 몸짓으로 우리 삶을 보듬으며 우리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2) 사진으로 보여주는 들짐승 삶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어린이들한테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일깨우고자 엮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골고루 즐길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라고 하는 일본땅 북쪽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마주하면서 고마운 사랑을 나누어 받는 나날인가를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는 씨가 마른 여우인데, 훗카이도 동물병원에서는 들여우를 어렵잖이 만나 보살피고 돌보며 자연에 돌아가 머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동물병원 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함께 ‘다친 짐승을 돕는 일꾼’이 되어 여우를 비롯해 토끼와 딱따구리와 오소리와 참새와 솔개하고 다람쥐랑 좋은 놀이동무로 사귑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동물병원을 꾸리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따로 자연사랑이니 환경사랑이니 동물사랑이니 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으리라 봅니다. 따로 자연사랑을 가르칠 일이 없으리라 봅니다. 자연 품에 안겨 자연스레 살아가며 자연을 느끼고 있으니, 무슨무슨 책을 읽힌다거나 어떤어떤 가르침을 베풀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훗카이도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 식구들은 당신들 삶으로 조용히 자연사랑을 맞아들이고 환경사랑을 일구며 동물사랑을 이룹니다.

 그나저나 이토록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를 담은 책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처럼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이니 머쓱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다케타쓰 미노루 님은 스스로 이런 낯간지러운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을 텐데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쓴 일본책에는 으레 ‘북쪽나라’라는 말이 보이는데, 동물병원 의사로 꾸리는 삶이라 더 남다르거나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동물병원 의사일 뿐입니다. 좀더 가까이에서 아픈 짐승을 돌볼 뿐,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느니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하다느니 하는 꾸밈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수수한 벗이고 조촐한 이웃이며 살가운 일꾼입니다.

 무엇보다도 북쪽나라 동물병원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지 못합니다. 아니, 돈벌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맡는 아픈 짐승이란 ‘어떤 집짐승을 키우는 임자라는 사람’이 돈을 치르며 맡기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토끼가 돈을 알겠습니까. 노루가 돈을 갖고 있겠습니까. 큰곰한테 은행계좌가 있겠습니까. 고니한테 지갑이 달려 있겠습니까.

 들짐승을 돌보고 건사하고 먹이를 마련하는 동물병원 식구들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책을 써내어 살림돈을 마련하고 들짐승들이 동물병원에서 아픈 곳을 다스리는 동안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한다고 합니다. 병원장 아저씨는 말 그대로 당신이 동물병원을 꾸리며 만나는 들짐승이랑 당신하고 함께 짐승들을 어루만지는 집식구들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이 일이 고스란히 당신들 돈벌이가 됩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동물병원장 아저씨를 비롯해서 동물병원 식구들이 더 많이 벌거나 더 이름이 나거나 하는 데에 마음을 내주었다면, 아마 당신들 삶이 담긴 책은 안 팔렸거나 책으로조차 못 나왔으리라고. 당신들은 무슨 대단한 이름으로 동물사랑이니 자연사랑을 외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훗카이도 들짐승하고 어우러지는 자연 품에 안겨 똑같은 자연붙이 하나로 살아내고 있기에, 이러한 당신들 삶을 담은 책을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고.

 동물병원 식구들이 꾸리는 삶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입니다.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이 먹고살 뿐 아니라 아픈 짐승들을 돌보는 데에 보탬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보내 주는 손길 또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자연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입바른 ‘자연사랑 구호 외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짐승들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겉치레 ‘동물사랑 선전 활동’을 할 노릇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나와 내 이웃과 내 둘레 모든 목숨붙이와 보금자리를 사랑하며 아끼는 숨결을 간직하면 됩니다.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은 책이름하고는 다르게 ‘온누리에서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은 가장 어리석기 때문에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한테 늘 웃음꽃이 피고 눈물꽃이 돋는 즐거우며 빛접은 삶을 베풀어 줍니다. 꾸미는 삶이 아니라 즐기는 삶이요, 겉바르는 삶이 아니라 부대끼는 삶입니다.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내놓는 삶이요, 뽐내는 삶이 아니라 손잡는 삶입니다.

 온누리를 살리는 힘이란 다름아닌 사랑에 있음을 알뜰살뜰 보여줍니다. 온누리를 빛내는 슬기란 다름아닌 믿음에 있음을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3) 살뜰히 되읽는 생각줄기


 글은 적고 사진이 많이 실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입니다. 얼마 안 실린 글이지만 한 줄 두 줄 되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사진 또한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기쁨이 꽤 큽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글을 읽어 주다가는, 사진에 함께 실린 숱한 짐승들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는 즐거움 또한 새삼스럽습니다.

 우리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거나 자취를 감추기까지 한 짐승들 모습을 참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책 하나인데, 그예 지식덩어리 책이 아닌 사랑하고 눈물과 울음이 고루 섞인 살가운 이야기 하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6.13.해.ㅎㄲㅅㄱ)


[11쪽] 숲속 동물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 훈련소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야생동물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진료비나 입원비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료진은 모두 급여를 받지 않는 저의 가족이 맡았습니다. 저와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이 이 병원의 의료진들이지요. 보통 병언이라면 환자가 많을수록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게 되는데 이곳은 정반대랍니다.

[16쪽] 어느 날 아침, 우리 집 아이가 콩새를 안고 들어왔어요. 그 콩새는 울고 있었어요. 눈에 하나 가득 눈물을 머금고 말이에요. 인간이 아닌 동물은 울거나 웃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눈앞의 콩새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열심히 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게 되었어요. ‘틀림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거지요.

[16∼17쪽] 일본 훗카이도는 풍부한 자연에 에워싸여 있고, 사람들도 그 속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 생활의 변화가 곧바로 자연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싼 것이 좋다고 말하면, 농부는 어쩔 수 없이 화학비료를 자주 사용해 작물을 많이 생산하려고 합니다. 농약도 많이 사용하게 되고요. 그렇게 되면 동물 중에 농약 중독 환자가 늘게 됩니다.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비 생활이 일상화되어, 여기저기 쓰레기더미가 산을 이루고, 또 버려진 물건에 상처를 입는 동물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82쪽] 새끼 사슴은 우유를 하루에 4리터나 마셔요. 덕분에 병원은 더욱 가난해졌지요.

[85쪽] 여우와 너구리, 참새와 까마귀처럼 사람 곁에서 생활하는 동물에게는, 사람 또한 위협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난을 칠 때면 가끔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고는 해요. 또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 기계의 위험성도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습득하면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102쪽] 퇴원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환자는 자유로워지고, 의료진은 일이 줄어 한숨 돌릴 수 있지요. 그렇다고 퇴원이 가까워지면 모두 기쁜 얼굴을 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기뻐하는 것은 원장인 나뿐, 모두 서운한 표정들이지요. 자기 자식이나 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 거예요. 환자 중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는 동물이 있는 것 같아요.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착각에 불과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125쪽] 생물들의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숲속 동물병원도 하나 둘씩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