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40 : 책은 어떻게 읽는가

 유홍준 님이 쓴 책에서 따 널리 떠도는 말마디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아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 말은 맞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은 얼마나 알맞을까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 테두리에서 책을 살펴서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리송해요.

 곰곰이 헤아립니다.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찾아가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으레 ‘내가 아는 책’을 찾아서 사거나 읽고자 한답니다. 그럴 테지요. 그런데 ‘내가 아는 책을 읽는 맛’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누구나 ‘아는 책’을 ‘아는 테두리’에서 받아들이고자 책을 읽어야 하나요. ‘아는 책’을 ‘아는 만큼’ 받아들이면 책읽기가 즐거운가요.

 아는 사람을 만나 아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는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아는 대로 일감을 찾아 아는 대로 힘써서 아는 대로 돈을 벌어 아는 대로 돈굴리기까지 하는 도시사람입니다. 아는 길을 아는 솜씨대로 아는 자가용을 몰며 아는 밥집과 옷집과 술집을 찾아드는 요즈막 사람들입니다. 아는 배우가 나오는 아는 영화를 보고, 아는 연기인이 나오는 아는 방송을 즐기는 한국사람입니다.

 엊그제 라디오 방송국에서 헌책방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면서 취재 연락이 와서 녹음을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 마무리를 지을 때 사회자는 “아는 만큼 본다고 하는데 …….” 하고 말씀합니다. 마무리 말씀을 들으며 저 또한 마무리 말을 해야 하기에, “저는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을 아주 싫어해요. 제가 느끼기로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만큼 보거든요.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을 찾아서 읽고, 내가 살아가는 만큼 사람을 사귀며, 내가 살아가는 만큼 사랑을 해요.” 하고 대꾸합니다.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뿌린 대로’란 ‘아는 대로’가 아닌 ‘살아온 대로’입니다. 살아온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살아온 대로 내 짝꿍을 사귑니다. 살아온 대로 내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살아온 대로 대학교를 고르고 일터를 찾으며 밥을 먹습니다. 아는 대로 밥을 먹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아는 대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란 없어요. 아는 대로 어버이를 섬기거나 아는 대로 스승한테서 배우는 사람이란 없답니다. 모두들 살아온 대로 밥을 먹고, 살아온 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대로 어버이를 섬깁니다. 살아온 대로 스승한테서 배우고, 살아온 대로 내 몸과 마음에 걸맞을 책을 찾아나서며 곰삭여 받아들입니다.

 이제는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만 찾아 읽을 수 있는 《부부 이야기》(부림출판사,1984)를 읽습니다. 몇 번씩 거듭 읽으며 책상맡에 놓는 책이에요. 그러나, 요사이는 잘 안 읽힐 뿐더러 책소개 또한 찾을 수 없는 ‘미우라 아야코’ 님 글을 담은 책입니다. 어린 날부터 몸이 여렸던 미우라 아야코 님은 “우리들의 일생에 그러한 고통이나 슬픔은 정말 전혀 없는 편이 좋을까(3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당신 남편만 가난과 아픔을 겪고 당신은 가난과 아픔을 안 겪으면 당신 삶은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은 당신이 겪어야 했던 아프며 고단한 삶을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래, 이녁은 ‘아픈 삶을 하루하루 꾸리고 일군 대로’ 글을 썼고 사랑을 했으며 믿음을 섬겼습니다. 참 어여쁜 사람입니다. 살아온 모든 나날을 껴안고 어깨동무하며 좋아했어요. (4343.10.15.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일공일삼 10
피에르 루키 글, 퓌그 로사도 그림, 김화영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을는지 몰라
 [책읽기 삶읽기 17] 피에르 루키,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1991년에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열 번째로 나온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를 읽다. 아니, 읽다 읽다 끝내 못 읽고서는 덮고야 말다. 이 책은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던 다른 책하고 마찬가지로 비룡소 출판사로 이름을 바꾸어 새 판으로 다시 나왔다. 2000년에 새로 나온 판은 번역을 손질했을까. 나는 헌책방에서 1991년판을 만나서 읽는다. 120쪽이 채 안 되는 어린이책인데 70쪽까지 읽고는 더 읽지 못한다. 조금 더 읽으면 끝인데, 도무지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읽을 수 없다. 끝까지 읽고 나서 ‘이 책은 이렇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더 좋겠지. 그러나 이렇게까지 읽을 수 없게끔 쓴 작품이 있다니 슬프다.

 책날개에는 “최고의 샹송가수인 조르쥬 브라상스는 엉뚱하면서도 달콤한 세계를 펼쳐 주는 작가, 작사가, 작곡가로 피에르 루키를 극찬했다”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아마 나라밖 프랑스에서는 널리 사랑받을는지 모른다. 퍽 좋은 작품인데 번역이 좀 얄딱구리할는지 모른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썩 재미있게 못 즐긴다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같은 출판사에서 이무렵 함께 내놓은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라든지 《노랑 가방》이라든지 《아이와 강》이라든지 《내일은 맑을까요》 같은 작품은 참 신나게 잘 읽었다.

 섣불리 말할 수 없으나,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 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한테까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을 수는 없다. 거꾸로, 내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고 느끼는 작품을 다른 이들이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게 여길 수는 없다.


.. 아버지는 부족한 게 없을 만큼 행복하다. 그런데도 그게 아닌지 기어코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다! ..  (12쪽)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시계수리공 아빠 이야기를 적바림한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이다. 줄거리로만 살핀다면 갖가지 시끌벅적한 일을 일으키며 터무니없다 싶은 꿈을 꾸며 ‘조용하고 아늑한’ 집안에 큰 물결을 일으키는 못 말리는 아빠 삶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줄거리를 펼쳐 보이는 ‘말하는 이 눈높이(아이 눈높이로 이야기합니다)’가 어중간하고, 집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앙쥐 이야기는 좀 어설피 끼어들었다. 뭔가 아기자기한 맛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딘가 생뚱맞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아빠 몸짓과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번역 탓이라 해야 할까. 번역이 맛깔스럽거나 신바람이 난다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빼어나며 재미난 작품이라 할 만할까.

 김화영 님은 어린이책도 곧잘 우리 말로 옮겼는데, 이분이 옮긴 어린이책 글줄은 썩 내키지 않는다. 프랑스 어른문학은 모르겠으나 프랑스 어린이문학 번역은 ‘어른문학 번역과는 아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와 강》이라는 작품도 김화영 님이 옮겼는데, 이 작품 번역도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손꼽히는 숱한 번역쟁이들은 어른문학이 어린이문학보다 훌륭하거나 높다고 생각하는 굴레를 털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린다기보다 어른문학 번역쟁이는 아무도 못 말린다고 해야 할까.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어린이 마음이 되고, 어린이 눈높이에서 동무 어린이랑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뛰노는 몸가짐으로 어린이문학을 살갑고 따스하며 가만가만 어루만질 수 있는 ‘철이 퍽 없는’ 개구쟁이 번역쟁이를 만나고 싶다. (4343.10.15.쇠.ㅎㄲㅅㄱ)


―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피에르 루키 글,김화영 옮김,1991년:민음사+2000년:비룡소/6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와 글쓰기


 한국방송국에서 이틀을 사이에 두고 두 군데 취재 연락이 왔다. 먼저, 라디오방송에서 녹음 취재 연락이 오고, 이틀 지나 ‘북쇼’를 맡은 분한테서 연락이 온다. 북쇼를 맡은 분한테는 대꾸를 하지 않고, 라디오방송국 분한테도 따로 대꾸를 하지 않다가 느즈막히 ‘나갈게요.’ 하고 이야기한다. 집식구하고 “방송에 나갈까 말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식구는 내가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나로서는 집식구랑 집에서 조용히 지낼 때가 훨씬 좋다. 그러나 내가 뜻을 크게 두며 하는 일인 ‘우리 말’하고 ‘헌책방’ 이야기 나누기를 생각하며 퍽 망설였다. 나로서는 1992년 8월 28일에 헌책방 책맛을 느끼고 나서 오늘까지 헌책방 책맛을 늘 즐길 뿐 아니라 둘레에 나누면서 살아가지만, 헌책방 즐김이 모임이라든지 헌책방 이야기 나누기라든지 옛날부터 오늘까지 고이 이어가는 사람은 둘레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전문가라든지 권위자가 될 마음이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우리 말글 이야기를 글로 적바림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헌책방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엮는다. 좋은 헌책방을 나들이하고 나서 이 좋은 헌책방을 즐긴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엮어 사람들한테 보여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헌책방 삶터를 사진으로 처음 찍으면서 생각했다. 내 둘레에서 나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는 분들이 헌책방 삶터를 꾸밈없이 즐거이 사진으로 담아내어 준다면 난 언제든지 헌책방 삶터를 더는 사진으로 담지 않겠다고. 그러나 예나 이제나 헌책방 삶터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보이지 않으며, 어쩌다가 한두 번 찍었을지라도 꾸준히 찍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 혼자만 남는다. 방송 취재 연락을 손사래치고 싶어도, 방송사이든 신문사이든 잡지사이든 ‘헌책방 이야기를 예나 이제나 즐거이 나누며 살아가는 책쟁이나 글쟁이’란 소설쓰는 장정일 님 빼놓고는 거의 없는데, 장정일 님한테 이런 이야기를 여쭙지는 않는다. 장정일 님한테는 문학 이야기를 여쭈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간행물윤리위원회라든지 문화체육관광부라든지 독서진흥이 어쩌고 하는 숱한 ‘책읽기 모임과 시민단체’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지도 않는다.

 시골집에서 도시인 서울이나 인천으로 나오자면 대여섯 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한다. 우리 시골집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면내나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많지 않기에 아침 일찍 어수선을 떤다. 이렇게 어수선을 안 떨었다가는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야 하고, 이러다 보면 저녁 다섯 시 반 녹음 시간을 아주 가볍게 놓친다. 이렁저렁 빨래를 하고 도서관을 치운 다음 아이 엄마 아픈 몸을 쓰다듬고 아이 얼굴을 살살 꼬집는다. “아빠 다녀올게요. 벼리는 엄마 많이 아프니까 엄마 잘 돌봐 주고 엄마가 힘들어서 같이 못 놀아 주더라도 혼자 즐겁게 놀아 줘요. 아빠는 일 잘 마치고 돌아올게요.” 스물여섯 달을 꽉 채우고 이제 스물일곱 달째 접어드는 딸아이는 아직 모든 말을 마음껏 하지는 못하지만, 말투와 말느낌으로 아빠랑 엄마 이야기를 알아듣는다. “안녀엉, 안녀엉!” 하면서 손을 흔들어 아빠를 배웅한다. 시골버스 시간에 늦을까 싶어 논둑길을 헐레벌떡 달린다. 여느 때에는 이십 분 남짓 걸리는 길을 십사 분 만에 온다. 땀을 훔치며 시계를 본다. 꼭 10시. 생극면으로 가는 버스는 충주 시내에서 9시 53분에 떠난다. 이 버스는 언제쯤 들어올까. 부디 일찍 들어와서 서울 가는 버스를 붙잡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이제 오나 저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린 끝에 10시 29분에야 들어온다. 생극면 버스 타는 곳에는 10시 37분에 떨어진다. 후다닥 들어가 표 끊는 데에서 아저씨한테 여쭌다. “동서울 버스 갔어요?” “금방 갔는데.” 젠장. 여느 때에는 거의 10분쯤 늦게 들어오는 버스가 오늘 따라 1∼2분 일찍 들어왔나 보다. 또 코앞에서 놓친다. 하는 수 없다. 그런데 마침 10시 50분 성남 가는 버스가 있다. 성남 가는 버스는 10시 58분에 들어온다. 들어와야 할 때보다 8분 늦게 온다. 서울 가는 버스도 8분 늦게 왔으면 잡아탔을 텐데.

 고속버스를 탄다. 고속버스를 탈 때부터 버스에 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 이 냄새는 도시 냄새일 테지. 괴롭구나. 가뜩이나 요새 몸이 퍽 힘겨운데 자꾸 콧물이 나온다.

 버스는 도시와 가까와진다. 성남 버스역에 닿는다. 버스에서 내린다. 사람들 담배 피우는 냄새가 금세 내 코에 닿는다. 코가 나빠 냄새를 잘 못 맡는데, 시골에서 지내고 나서는 이런 도시 냄새가 내 코를 아주 세게 찌른다. 거의 숨을 못 쉬겠다. 야탑역으로 들어서려는데 나들목 옆에서 무슨 큰 교회 젊은이들이 부채춤을 추면서 ‘예수 믿고 천국 가셔요’ 하고 외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에서도 쇳가루 섞인 짙은 냄새가 난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내어 읽으려 하지만 머리가 띵하다. 몹시 괴롭다. 아이 엄마랑 아이랑 나왔으면 둘 모두 죽는다고 했겠지. 나부터 이렇게 힘겨운데.

 시간을 잡은 때까지 한 시간 반 남짓 남을 듯해서 천호동 헌책방으로 가 보기로 한다. 천호역에서 내린다. 어디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피시방을 찾아 들어간다. 피시방에서도 이곳에 깃든 사람들 담배 내음이며 여러 가지 내음이 내 몸으로 파고든다. 뒷간에 가서 똥을 눈다. 조금 시원하지만 속이 답답하다. 인터넷을 뒤지며 〈강동헌책방〉 자리를 눈에 익힌다. 〈강동헌책방〉 가는 길목에 있는 〈천호헌책방〉 길도 눈에 익힌다. 그런데 걸어가는 길에 〈천호헌책방〉 간판은 안 보인다. 아마 문을 닫았나 보구나. 〈강동헌책방〉은 고맙게 잘 남아 있다. 〈강동헌책방〉 할배는 “예전에는 이 둘레에도 헌책방이 열다섯 군데쯤 있었는데 이젠 다 없어지고 우리만 남았어요.” 하고 말씀한다. 책을 스무 권 남짓 고른다. 오두본 그림책 두툼한 녀석이 있는데, 집에 있는 책이랑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집에 있는 오두본 두툼한 녀석은 겉종이가 없으나, 이 책은 겉종이가 있으며 아주 깨끔하다. 8만 원. 사고 싶다. 그러나 집에 있는데 또 산다면 좀 그렇다. 오두본 그림책이 8만 원이면 대단히 눅은 값이다. 이 책은 10만 원뿐 아니라 15만 원을 받아도 싸다 할 만하니까.

 김밥집에 들러 김밥 석 줄을 주문한다. ‘석 줄’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으시기에 ‘세 줄’이라 고쳐 말한다. 숫자를 세며 말할 때에는 ‘석’과 ‘넉’이라 하고 “세 군데”에서는 ‘세’이지만, 이제는 이처럼 옳게 숫자를 세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바보가 되고 만다.

 천호역에서 내려 헌책방 오던 길과는 다른 길로 걷는다. 천호시장과 옆 골목을 걷는다. 태영아파트라는 곳 건너편에 〈현대헌책방〉 간판이 보이고, 헌책방 안쪽에 할배가 앉아 있다. ‘뭐야, 헌책방 또 있네?’ 이곳 〈현대헌책방〉도 들르고 싶으나 들를 겨를이 없다. 다음에 또 온다면 들러야지. 틀림없이 천호역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큰길로 나오니 강동역. 난 어느 골목을 거쳐 이렇게 왔을까.

 전철에서 김밥을 먹으며 여의도로 간다. 몸이 몹시 무겁다. 그래도 가야겠지. 집에서 집식구한테서 쪽글이 온다. 아주 힘들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떡하지. 애 아빠 된 사람으로서, 또 옆지기 된 사람으로서 아이가 아프거나 아이 엄마가 아프면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훌쩍 날아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나 또한 도시로 볼일 보러 나와 움직이며 눈알이 핑핑 돌며 쓰러질 듯하다. 가까스로 버티며 손에 책을 쥔다. 〈강동헌책방〉에서 장만한 《돈 까밀로와 빼뽀네》 백제출판사 판을 읽으며 겨우 숨을 돌린다. 좋은 책에 깃든 줄거리로 내 고된 몸을 다스린다.

 여의도역에서 내린다. 아, 여기에서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방송국 일꾼이 방송국 찾아오는 길을 알뜰히 적바림해서 편지로 띄워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방송국 일꾼들은 방송국을 찾아오는 사람이 으레 알아서 잘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방송국 갈 일이 거의 없는 나 같은 시골사람이 어떻게 방송국을 잘 찾아갈까. 택시를 잡을까 하다 그냥 걸어가며 길을 물어물어 찾아간다.

 25분쯤 녹음하면 된다는데 31분쯤 녹음을 한다. 아마 31분치를 다 내보내 줄 듯하다. 녹음을 하러 들어가며 휴지를 한 장도 못 챙겼다. 깜빡 잊었다. 말을 하는 내내 자꾸자꾸 콧물이 흐른다. 전철로 오고 걸어서 오는 동안에도 코를 훌쩍였지만 콧물이 흐르지는 않았는데 녹음실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른다. 코 훌쩍이는 소리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코가 질질 흘러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한다. 사회를 맡은 분은 이런 일은 으레 겪으니까 걱정없이 잘 넘겨 준다. 내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동안 왼손과 오른손으로 쉴새없이 코를 훔쳐 옷에 닦는다.

 녹음을 마치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홍대 앞으로 간다. 만화책집에 가서 만화책 몇 권을 산다. 좋은 벗님을 만나 밥을 먹고 나서 전철을 탄다. 동인천 가는 빠른전철 막차를 용케 탄다. 아주 고맙다. 큰 가방을 품에 안고 찡겨 탄다. 그나마 인천으로 가는 전철에서는 콧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주안역에서 내려 여관에 들어서니 다시금 콧물이 줄줄 흐른다. 코를 풀어도 자꾸 콧물이 난다. 새벽이 되니 몸마저 으슬으슬 떨린다. 고단하다. 몸이 비쩍 마르는 느낌이고 얼굴이 바싹 여위는 느낌이다. 얼른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틈틈이 찍으려 하는 인천 골목길 사진을 한두 장이라도 찍을 수 있나 모르겠다. 이런 몸으로는 아무것 못할 듯하다. 도시 골목동네에서 살다가 멧기슭 시골집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지 모르겠는데, 한 주나 두 주쯤 시골집에서만 머물다가 도시로 한번 나오면 참말 몸이 몹시 무겁다. 볼일을 마치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가는 동안 시골과 가까와지면 몸이 차츰 가벼워진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으로 콧물을 질질 흘리며 여관집 셈틀로 글 몇 줄 끄적이며 생각한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콧물을 흘리지 않는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무슨 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나. 이 도시에서 살아가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글에 담지? 도시사람이 쓰는 글이란 무엇을 다루는 글일까. 조금 누워 등허리를 편 다음 답동성당 앞에 있는 가톨릭생협 문 여는 때에 찾아가서 몇 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한 다음 시골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4343.10.15.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픈 사람과 책읽기


 아픈 사람과 안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 가운데에는 더 아픈 사람과 덜 아픈 사람이 있어요. 안 아픈 사람 가운데에는 아플 수 있는 사람하고 끝까지 안 아플 수 있는 사람이 있고요. 다 다른 사람한테 꼭 같이 말하며 몸을 다스리라 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튼튼한 사람을 쓰러뜨린 아픔을 다스려 씻는 길하고 몹시 여린 사람한테 찾아든 아픔을 다스려 씻는 길은 무척 다르겠지요. 아픔 씻는 길이 사람마다 다른데, 책을 읽는 길이 사람마다 비슷할 수조차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길이란, 여느 살림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재개발) 정책이 나아갈 길이란, 배움터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길이란, 얼마나 똑같이 헤아리며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책은 섣불리 ‘읽으라 시킬’ 수 없고 ‘읽으라 이끌’ 수 없으며 ‘읽으라 떠민’다든지 ‘읽으라 부추길’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다른 삶과 넋과 말을 헤아리며 책 하나 건네면 어느 만큼 책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요. (4343.10.1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3
수스 박사 글, 그림 | 김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운 그림책 오래오래 즐겨요
 [즐기는 그림책 20] 수스 박사,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시공사,1994)



 2002년에 나온(우리 나라 극장에) 〈아이 엠 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애 아빠가 딸아이한테 잠자리 맡에서 들려주는 그림책이 하나 있는데, 애 아빠로서는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책이라 언제나 이 그림책 하나만 읽어 주며 아이를 재웁니다. 딸아이는 부쩍부쩍 크고 애 아빠는 늘 제자리입니다. 딸아이는 아빠가 잠자리 맡에서 들려주는 그림책은 달달 외우고, 좀 다른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딸아이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아빠가 들려주는 그림책이 얼마나 뻔한가를 깨달아 버린 나이입니다만, 아빠가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림책을 읽어 주는 삶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일곱 살이 아닌 열다섯이 되고 스물일곱이 되어도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영화에 그림책 겉그림이 살짝 스쳐 지나갑니다. 그림책 이름은 이제는 잘 떠오르지 않으나 한 가지는 떠올립니다. 일곱 살 눈높이로 살아가는 애 아빠가 아주 좋아하는 그림책을 그린 이는 바로 ‘수스 박사(Dr. Seuss)’입니다.

 2003년 가을, 빛살이 좋은 어느 날 서울 노량진에 있는 헌책방 〈책방 진호〉를 찾아갑니다. 350쪽에 이르는 두툼한 《Six by Seuss》(Random house,1991)라는 책을 구경합니다. 수스 박사가 내놓은 숱한 그림책 가운데 널리 손꼽히는 작품 여섯 가지를 따로 한 자리에 엮은 판입니다. 헌책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350쪽을 차근차근 펼칩니다. 1937년, 1938년, 1940년, 1950년, 1957년, 1971년에 그린 작품 여섯 가지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데,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과 이야기가 참말 1937년 것인지 1950년 것인지 믿기 어렵습니다. 처음 그린 해를 밝히지 않는다면 언제 적 그림인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여섯 가지 그림책 가운데 하나는 1938년에 그렸다는 《The 500 HATS of Bartholomew Cubbins》입니다. 모자를 500개나 갖고 있다는 바솔러뮤 커빈즈라는 아이 이야기를 담습니다. 바솔러뮤 커빈즈는 아주 낮고 외진 시골에서 조용히 가난하게 살아가고, 이 아이가 살아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도시 한복판 높다른 곳에서 나라를 내려다보며 아주 가멸차게 떵떵거리고 살아갑니다. 장사를 하러 도시로 나온 바솔러뮤 커빈즈는 임금님이 지나가는 멋진 모습을 보다가 그만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지 못합니다. ‘임금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는데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합니다. 이에 임금님은 성이 불같이 나서 저 고얀 녀석을 보았느냐며 모자를 벗으라고 소리지릅니다. 바솔러뮤 커빈즈는 모자를 벗습니다. 손에 모자가 하나 들립니다. 그런데 머리에 또 모자가 하나 씌워져 있습니다. 다른 손으로 다시 모자를 벗기니 머리에 새 모자가 씌워져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병사들이 말을 달리며 모자를 나꿔채도, 화살로 모자를 떨구어도, 모자는, 바솔러뮤 커빈즈가 쓴 빨간 모자는 그대로 머리에 남습니다. 갯수만 자꾸자꾸 불어납니다. 바솔러뮤 커빈즈는 속임수를 쓸 줄 모를 뿐더러 속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더더 뿔이 나는 임금님은 바솔러뮤 커빈즈 목을 베라고, 죽이라고 윽박지릅니다. 불쌍한 바솔러뮤 커빈즈는 한낱 가난뱅이요 ‘임금님 앞에서 지켜야 한다는 법(우리로 치면 국가보안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을 모른다는 까닭으로 그예 이슬 한 방울이 되어 사라질 판입니다.

 한글판으로는 1994년에 옮겨진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라는 그림책을 안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너덧 해쯤 되었나. 영어로 된 그림책을 읽는데 글이 매우 쉬웠고, 그림만 보아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만했습니다. 낯선 낱말이 보이면 영어사전을 뒤적여 《The 500 HATS of Bartholomew Cubbins》를 읽었습니다. 몇 번이나 읽었으려나. 읽고 다시 읽으며, 읽고 또 읽으며 영화 〈아이 엠 샘〉에 나오는 애 아빠를 떠올립니다. 그렇지, 일곱 살 눈높이로 살아가는 애 아빠가 수스 박사 그림책을 좋아하며 이녁 그림책을 밤마다 아이한테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목소리로 들려줄 만하지.

 한글판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는 2005년에 장만합니다. 진작에 영어판으로 읽었기에 굳이 안 사 놓아도 되지만 번역이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해서 장만합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하고 함께 읽자면 영어판 말고 한글판이 같이 있어야 하니까 마땅히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바솔러뮤 커빈즈 이야기책을 살짝 덮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진책을 볼 때면 사진 밑에 무슨 말이 달려 있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한글로 무슨 얘기가 적혀 있어야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일본말로 적혔기에 알아볼 수 없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구나 하고 느끼면 넉넉합니다. 사진 한 장이 내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한다면 나라안 사진책이든 나라밖 사진책이든 부질없는 작품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이든 《The 500 HATS of Bartholomew Cubbins》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떤 어버이는 수스 박사님 그림책을 ‘쉬운 영어로 되어 있기에 영어를 가르칠 생각’으로 사서 읽힐 테지요. 오늘날 같은 한국땅에서는 무엇보다도 ‘영어 배우기’가 먼저이니까요. 그런데 수스 박사님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읽힐 때에 ‘영어를 가르치자’는 생각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아니, 좋은 그림책을 마주하면서 좋은 그림책 알맹이를 받아먹지 않고 영어만 배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토록 재미나고 남다른 얘기를 즐거이 맛보도록 하자’는 생각을 품을 수는 없는가요. 1938년에 내놓은 그림책 하나를 2010년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눈물나고 웃음나게 즐기는 삶을 읽어낼 수는 없나요.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이 나라 아이들한테 ‘2010년에 그렸으면 2100년이 되어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우며 빛나는 좋은 그림책’ 하나를 일구도록 땀흘릴 노릇이 아닌지요.

 그림책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거듭 책을 덮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한국사람이 1938년에 빚은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글책이 있다 할 때에도 이렇게 꾸준히 펴내 주어 오늘날 사람한테 널리 읽히도록 할 수 있느냐고. 나라밖에서 손꼽히는 책에 ‘명작’이나 ‘걸작’이나 ‘대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듯,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책을 차근차근 살피고 훑으며 ‘국내 명작’이나 ‘국내 걸작’이나 ‘국내 대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책을 얼마나 알아내고 있느냐고. 이 같은 책을 앞으로 언제까지 힘껏 펴내며 사랑받도록 땀흘릴 수 있느냐고.

 바솔러뮤 커빈즈는 목숨을 건사합니다. 욕심쟁이 임금님도 뜻을 이룹니다. 두 사람 모두 흐뭇하게 이야기가 끝맺습니다. 가난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바솔러뮤 커빈즈는 바솔러뮤 커빈즈다운 삶을 이어갈 만한 자리로 돌아가고, 욕심쟁이로 뽐내며 으스대는 임금님은 언제나처럼 욕심쟁이 짓을 하며 뽐내고 으스대는 삶자리로 돌아갑니다.

 둘은 어쩔 수 없겠(?)지요. 애써 뽐내거나 으스대거나 자랑할 삶이 아니라,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가고 싶은 바솔러뮤 커빈즈는 조용히 예쁘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어린 나날부터 뽐내거나 으스대거나 자랑하며 살아야 했던 임금님으로서는 으리으리한 자리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 생각하며 사람들 위에 올라서 있고 싶을 테지요. 삶은 말 그대로 삶일 수 있으나, 삶은 삶 아닌 굴레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과 마무리로 하루하루 즐길 수 있는 한편, 노상 이맛살 찌푸리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하루 바삐바삐 지나칠 수 있습니다.

 겨울을 앞둔 가을철 들녘과 멧기슭 꽃송이가 곱습니다. 봄은 봄대로 고운 들꽃이요 가을은 가을대로 예쁜 가을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가을다이 맞아들이며 가을빛을 가슴으로 살포시 껴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10.14.쇠.ㅎㄲㅅㄱ)


―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 (수스 박사 글·그림,김혜령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4.11.1./7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