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


 등불 하나 없는 고요한 멧길을 아이 손을 잡고 옆지기와 함께 내려옵니다. 보름달이 아니요 반달조차 아닌 날씬한 초승달인데, 이 초승달은 우리들 머리 위쪽에서 밝은 빛을 뿌리며 그림자를 베풀어 줍니다. 올망졸망 멧길을 걸어 내려오는 시골집 세 식구는 달그림자를 밟으며 노래노래 부릅니다. 달그림자 없이 살아가야 하는 서울사람들이 딱하다 싶지만, 서울사람한테는 달그림자가 없어도 돈그림자가 있겠지요. 달그림자 어리는 책을 알아보거나 느끼지 못할 테지만, 돈을 얻거나 이름을 드날리는 처세책과 경영책을 많이 만나거나 즐겁게 읽을 테지요. 도시사람은 달그림자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테니까요. 도시에 깃든 회사는 달그림자로 굴러가지 않을 테니까요. 도시에서 펴내어 도시에서 읽는 신문은 달그림자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 테니까요. 아파트에는 달그림자가 나타날 수 없을 테니까요.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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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거운 책가방 - 개정판 교육시선집 담쟁이 문고
조재도.최성수 엮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학교를 박차고 나오며 읽던 시
― 교육출판기획실 엮음, 《내 무거운 책가방》



- 책이름 : 내 무거운 책가방
- 엮은이 : 교육출판기획실
- 펴낸곳 : 실천문학사 (1987.4.20.)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교 앞 신문사지국 작은 방에서 대학생 형들이랑 먹고자면서 신문배달을 하던 때, 헌책방마실을 참 신나게 했습니다. 신문딸배 일을 한대서 학비벌이는 꿈조차 꾸지 못하고 술값벌이조차 안 되었으나, 새벽에는 신문 돌리고 낮에는 대학교 구내서점이랑 도서관에서 쉴새없이 일을 하며 푼푼이 돈을 모은 다음, 저녁나절 도서관 문닫을 즈음부터 신문배달 자전거를 몰아 헌책방마실을 했습니다. 가난할 뿐 아니라 똥구녕이 찢어지는 신문딸배 살림이지만 대학교 2학년이니 후배가 있다고 후배한테 술을 사 주어야 하는데, 신문딸배 달삯이나 근로장학금으로는 낮밥 한 끼니 사 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면 언제나 신문배달 짐자전거 바구니에 책을 싣고 싱싱 달리며 조그마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이곳저곳을 누볐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 강의실에 닿아 들어간 다음 1분이라도 아껴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낮밥 때가 되면 짐자전거를 부리나케 몰아 신문사지국으로 돌아옵니다. 동무들하고 낮밥을 사먹을 돈도 없으나 후배한테 낮밥 사 줄 돈 또한 없으니까요. 아침에 신문사지국 형들과 지국장님하고 먹다 남은 반찬이랑 찌개하고 밥을 후다닥 먹습니다. 후다닥 먹고는 지국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거나, 자전거를 몰아 학교 앞 헌책방에 찾아가 새로운 헌책을 살폈습니다. 하루에 오천 원이나 만 원어치만 새로운 헌책을 사서 읽자고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오천 원이나 만 원밖에 못 쓰니까, 이 돈으로 되도록 많이 사서 읽어야 하니까, 더 낡고 더 지저분한 책으로 골라서 사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눅은 값으로 한 권이나마 더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두툼한 책도 좋으나 퍽 묵은 예전 손바닥책이 훨씬 반갑습니다. 작고 낡으면 더 값이 눅으니까요. 그리 사랑받지 못하는 자그맣고 해묵은 시집은 한결 값이 쌉니다. 이제는 이런 책들이 옛책으로 떠받들리며 비싸구려 책으로 탈바꿈하지만, 1995∼1999년 사이에는 꽤 값싼 책이었습니다.


..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작품이 씌어진다는 것은 문학에 있어 보편적 진리이다 ..  (책머리에)


 고등학교 3학년이던 때에 《내 무거운 책가방》을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이때에도 《내 무거운 책가방》은 새책방에도 있었으나 꽤나 많이 팔리고 읽히며 버려졌기에 헌책방에서도 곧잘 눈에 뜨였습니다. 여러 사람들 시를 한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그러모아 엮은 시집이라서, 이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에 실린 시가 담긴 낱권 시집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읽으려고 애씁니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95년 봄께, 드디어 이 작은 시집에 실린 시가 담긴 낱권 시집을 모조리 찾아내어 읽었고, 이 가운데 〈우리들 소원〉이 실린 《우리들 소원》(풀빛,1985)을 만났을 때에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내 무거운 책가방》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우리들 소원》을 만났을 테지만, 《내 무거운 책가방》에 실린 〈우리들 소원〉 때문에 이 시가 실린 시집을 만나려고 무던히도 헌책방 책시렁을 훑고 살피며 뒤졌습니다.


.. 16세에 안내원 생활 시작해 벌써 2년 / 같은 또래 여학생 실었을 때 굴욕스럽고 / 되지 못한 손님 만나 욕도 많이 먹고 / 하루 17∼18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몸은 / 그저 소원이 실컷 잠자는 것이다 ..  (101∼102쪽/최명자-우리들 소원)


 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가 쓴 〈내 무거운 책가방〉이라는 이름 그대로 시집 이름이 되었는데, 지나온 나날을 돌이키면 나 또한 국민학생 때에 가방이 몹시 무거웠고, 중학생 때에는 더 무거웠으며, 고등학생 때에는 역기 하나보다 무거운 가방을 끙끙 짊어지면서 어깨가 무너지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이십 킬로그램쯤 되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면 몸이 기우뚱기우뚱합니다. 등에 메는 가방에는 다 넣기 힘들 만큼 교과서와 사전과 참고서와 문제집을 챙겨서 다녀야 하니까 언제나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래도 이런 가방에 교과서 아닌 책을 여러 권씩 챙기면서 틈틈이 읽었습니다. 대학생 때에는 터무니없다 싶은 강의를 구태여 들을 까닭이 없었지만, 전공 과목을 가르치는 분 가운데에는 어처구니없구나 싶은 강의를 하는 분이 있어서 이런 강의라면 차라리 안 들어야겠다 싶어 강의를 안 듣고, 이동안 골마루에서 다른 책을 꺼내어 읽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헌책방 책꽂이를 찬찬히 살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교과서 하나로 한 해를 때운다더라도 거의 날마다 수업이 있었다지만 대학생 때에는 얄팍한 교재 하나로 한 학기를 때우면서 한 주에 기껏 한두 시간 수업만 있으니, 이런 엉터리 수업은 받아들이기 퍽 힘들었습니다. 얄팍한 교재는 휘리릭 읽으면 그만인데, 이 교재를 외우다시피 해야 하면 대학교 수업이란 도무지 무슨 보람이 있나 궁금했습니다. 대학생쯤 되면 날마다 새로운 책을 스스로 먼저 읽어 와서 깊이 따지거나 파헤치거나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과서이든 교재이든 ‘가르치는 책’이라지만, 막상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가르치는 책이라기보다 주어진 틀대로 지식을 외우도록 하는 책인지 모를 노릇이요, 지식만 주워섬기면서 정작 한 사람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슬기는 보여주지 못하는 셈 아닌가 여겼습니다. 대학생으로 지내는 노릇 그만두자고 아주 자연스레 다짐합니다. 1998년 12월에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은 다음 휴학계를 내고는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 선생이 되고, 아비가 되어 / 아무 걱정도 없이 어느새 / 우리는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 뉘우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 가르치지 않아도 / 식민지 시인의 토혈 같은 싯구를 / 아이들은 곧잘 외워대는데 / 꽃이 피고 지는 참담함으로 / 오월은 오고 ..  (199∼200쪽/최동현-오월에)


 2010년 12월, 《내 무거운 책가방》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그예 헌책방 책시렁에서 고이 잠들려나 싶던 시집이 새삼스레 다시 태어납니다. 아마, 1987년이나 1997년이나 2007년이나 2017년이나 아이들 책가방은 무거울 뿐 아니라 갖은 짐덩어리만 가득 차니까, 이 시집이 읽혀야 한달 수 있습니다. 좋은 배움터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나라이니, 언제까지나 《내 무거운 책가방》 그대로 우리들 무거운 책가방이 되고 만다고 느낍니다.

 2010년 12월에 새로 나온 《내 무거운 책가방》은 1987년판하고 사뭇 다릅니다. 책이름은 똑같으나, 시집에 실린 시는 거의 모두 바뀝니다. 버스 차장 최명자 님 시는 빠집니다. 2010년대에 걸맞는다는 새로운 시들이 넘실넘실합니다. 아무래도 서른 해쯤 묵은 시들은 서른 해쯤 묵은 이야기를 다룰 테니까 오늘날하고는 걸맞지 않을 만합니다. 새로운 터전 새로운 나날에는 새로운 시집을 읽힐 노릇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집에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지 않나 하고 갸우뚱갸우뚱합니다. 《내 무거운 책가방》은 내 무거운 책가방이네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하던 1987년 앞뒤 이야기일 텐데, 새로 내놓을 새로운 시들로 엮인 새 시집이라면 새 이름을 붙이는 한편, 예전 시집은 예전 시집대로 고스란히 되살려야 알맞은 일 아닌가 갸웃갸웃합니다.

 이제 버스 차장이야 모조리 사라졌으니 버스 차장이 쓴 시쯤이야 읽거나 읽힐 값이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버스 차장은 없어졌어도 보충수업과 자율학습과 입시지옥은 그대로이니까, 이런 삶자락대로 시집을 새로 엮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2010년 《내 무거운 책가방》에는 대안학교 다니는 아이들이나 학교를 박차고 나온 아이들 모습도 몇 자락 담아야 할 텐데요. 아, 학교 문턱은 예나 이제나 몹시 높습니다. 시인이 되어 시를 쓰는 담벼락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참말 까마득합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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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아닌 삶으로 읽을 책과 말
― 정재도, 《국어의 갈 길》


- 책이름 : 국어의 갈 길
- 글 : 정재도
- 펴낸곳 : 문헌각 (1962.7.15.)


 오늘날 우리들 주고받는 말과 글은 퍽 엉터리라 할 만합니다. 저부터 아직 엉터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말을 한다고 느낍니다. 여태껏 꽤 많이 배우며 받아들였으나, 앞으로 새롭게 익히며 살필 대목이 몹시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쓰는 말과 글인데 이러한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보여주거나 이끌거나 가르치는 어른을 둘레에서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여보게 젊은이, 그런 말은 옳지 않아.’ 하면서 짚어 주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는 어른을 만나지 못합니다. 아니, 어른들부터 옳고 바른 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니까 서로서로 엉터리로 말하고 글을 읽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내 나이는 젊은이를 지나 늙은이하고 가깝다 할 만하기에 이제 나한테 내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어 줄 만한 어른이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내가 젊은이나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옳고 바르게 가눌 말을 이야기해야 한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몇 가지 말마디를 짚어 주다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발끈해 하거나 못마땅해 합니다. 당신들이 옳게 못 쓰거나 바르게 못 쓰던 말투를 깨닫지 않아요. 받아들이거나 살피거나 알아채거나 하지 않아요. 그동안 얼마나 부끄러이 말하고 글썼는가를 돌이키지 않습니다.

 누군가한테 ‘당신이 바로 이 자리에서 쓴 이 말마디는 올바르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에는 ‘넌 바보요. 넌 똥개야.’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말마디 하나를 옳게 아로새기면서 옳은 넋으로 일구어 옳은 삶으로 북돋우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이 살기를 안 바라니까, 말을 이렇게 잘못 쓰든 저렇게 엉터리로 망가뜨리든 아랑곳하지 않는달 수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쓰던 말투가 알맞지 않다 말해 주면 ‘당신은 이렇게 엉터리로 말을 하니까 입을 다물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은 적어도 이런 말투 하나라도 잘 새겨 주소서’ 하는 뜻인 줄을 헤아렸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헤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자말이든 고사성어이든 영어이든 번역투이든, 잘잘못을 낱낱이 짚어 밝히면 ‘마치 이 낱말이나 말투를 안 쓸 때에는 아무런 말을 못하기라도 할 듯’ 여기고 맙니다.


.. 같은 어학자 가운데서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도위치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고 또 자기 자신들도 내로란 듯이 제법 뻐기는 태도를 가지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모두들 대수롭잖게 생각할 뿐더러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업신여겨지다시피 하는 현상인 것을 본다 … 구미 각국의 외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마치 외국의 진귀한 상품을 교역하는 무역상과도 같아서 화려할 수밖에 없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저 시골에서 논 갈고 밭 갈고 하는 농부와도 같아서 아무래도 고즈넉할 수밖에 없다 ..  (추천글/이은상)


 책이란 삶이라,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습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는 동안 내 삶을 송두리째 아름답게 가다듬습니다.

 말이란 삶이라, 내 삶을 통째로 쏟으면서 주고받습니다. 내 삶을 통째로 쏟는 동안 내 넋이 거듭나고 내 얼이 다시 태어납니다.

 집에서 아이 기저귀를 빨든 집식구 옷가지를 빨든, 손빨래를 하는 동안 우리 살붙이 몸과 마음과 삶을 돌아봅니다.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얼어붙고 따순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틉니다.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구나 생각하다가도 웬만해서는 고무장갑을 안 씁니다. 내 손부터 내 몸으로 오랜 나날 걸쳐 빨래하던 옛사람들 마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삼스레 다시 겪거나 부대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잘하다 싶은 낱말이나 말투 하나를 더 알차고 알뜰히 추스를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해서 아주 조그마한 낱말 하나일지라도 사랑하며 보듬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거나 어슬프다고 잘못이 아닙니다. 생각이 없을 때에 잘못이요, 사랑하지 않을 때에 잘못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넋과 말을 골고루 사랑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제 얼과 글을 찬찬히 생각합니다.

 이제 이 나라 국어교사조차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은 더더욱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이든 정치꾼이든 공무원이든 대학생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하고 가장 동떨어졌다 싶은 ‘애 엄마’나 ‘밥하는 아줌마’들이 집에서 아이하고 복닥이면서 누구보다 말과 글을 가장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 우리 나라에는 ‘비니루 우산(비닐)’, ‘레루식 아궁이(레일)’, ‘비락 우유(빌락)’, ‘서울 빠다(버터)’, ‘피카디리 극장(피커딜리)’ 들이 익어 버린 것처럼 되어 아주 부끄러움도 없이 마구 쓰이고 있다. 모두 일본식 외래어 표기 방법에서 온 것이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 나라의 멀쩡한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우리식 표기는 모르고, 일본식 표기만 좋아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것이 뼈에 사무치게 고마와서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30여 년이나 일본의 법률에 익었으니까 우리 법률은 아랑곳없다고 할 것인가? … 그와 같은 것에 ‘코리아’가 있다. 영어로는 ‘코리어’, 불어로는 ‘코레’, 독어로는 ‘코레아’인데, 일본식이 ‘고리아’다. 아마 ‘코리아’가 이 일본식에서 나온 소린지 모른다. 그러나, 영어이니까 영어 발음대로 ‘코리어’로 할 것이지, 영어 발음 아닌 일본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 ..  (126∼128쪽)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간 다음 헌책방에서 《국어의 갈 길》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랑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내 말과 글을 어떻게 사랑하거나 생각해야 하는가를 한 번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똑같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구태여 비싼 등록금 바치며 학점과 졸업장을 따 보았자 내가 배울 알맹이는 없구나 싶어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인데, 어차피 고졸자로 내 가방끈을 맞춘달지라도 한동안 대학물 좀 먹은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답게 더 말을 살피고 더 글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국어의 갈 길》을 낱낱이 새기며 읽었습니다.

 《국어의 갈 길》은 빈틈없이 알차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이던 때에 돌아보더라도 서른두 해나 묵은 책이요, 둘째를 낳을 2011년에 헤아리자니 자그마치 마흔아홉 해나 묵은 책입니다. 좀 낡았다 싶거나 케케묵구나 싶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키니 낡거나 케케묵다 싶지, 지난날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 꼼꼼히 다루며 나누고 싸우며 다독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한껏 느긋하면서 즐거이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읽는 책이 아니라 삶을 읽는 책입니다. 지식을 뽐내는 말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말입니다. 지식으로만 읽으려 해도 대단히 도움이 될 만한 《국어의 갈 길》이었지만, 삶으로 맞아들이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한 작은 책 하나입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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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걸고 책읽기


 독재 때에도 목숨을 걸고 책을 읽지만, 민주 때에도 목숨을 걸고 책을 읽어야 한다. 식민지 때에도 목숨을 걸며 책을 읽지만, 평화 때에도 목숨을 걸며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목숨을 건다. 책을 읽기에 목숨을 고스란히 바친다. 목숨값을 하지 않는 책이라면 읽을 까닭이 없다. 목숨값이 있기에 책을 고이 손에 쥔다.

 책을 쓰는 사람은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제 목숨을 담는다. 제 목숨을 남김없이 바치지 않는다면 가짓말꾼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느낀다. 제 목숨을 송두리째 쏟지 않고서야 책 하나 가뜬히 태어나지 않으며 거뜬히 꽃피우지 못한다.

 책이란, 책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목숨을 바친다. 목숨을 고이 담아 책으로 일군다.

 누군가는 재미삼아 읽는다 하고 누군가는 말미를 때우려고 읽는다 하더라도, 책을 쓰거나 읽는 사람은 목숨을 걸기 마련이다. 아니, 목숨을 걸밖에 없다.

 하루이든 한 시간이든 한 분이든 온통 보배로운 목숨이다. 밥 한 그릇이든 밥 한 술이든 밥알 하나이든 몽땅 소담스러운 목숨이다. 책읽기가 왜 목숨읽기가 아니겠는가. 책쓰기가 왜 목숨쓰기가 아니겠는가. 재미삼아 읽든 말미 때우기로 읽든, 제 목숨을 들이지 않고서야 읽을 수 없다.

 그냥 흘려보내도 좋을 하루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마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수 있는데, 마냥 바라보며 하루를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셈이 아니다. 마냥 바라보며 하루를 오롯이 즐긴다. 하루를 고이 쏟으면서 마냥 바라볼 만큼 좋으며 사랑스럽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 피와 땀과 품이 깃든다. 잘 쓴 글이든 잘못 쓴 글이든, 빛나는 글이든 뚱딴지 글이든, 올바른 글이든 엉터리 글이든, 어떠한 글에도 글쓴이 뼈와 살과 꿈이 배어든다. 이러한 글을 읽는 사람도 피와 땀과 품이든 뼈와 살과 꿈이든 바치기 마련이다. 참말로 하루하루 아름다우며 몹시 거룩한데, 이 아름다우며 거룩한 하루하루 내 손에 쥘 책이란 어떤 책이 되어야 하고, 어떤 매무새로 읽어야 할까.

 아이들은 아주 조그맣다 싶은 놀이를 하더라도 온마음 쏟아 땀 뻘뻘 흘린다. 우리 어른들은 아주 어설프다 싶은 책을 읽더라도 온사랑 바쳐 알뜰살뜰 읽어 낼 줄 알아야 한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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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2.4. 

인천 동구 송림2동. 

골목마실을 할 때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모습을 새삼스레 되돌아보며 걷는다. 내가 모르는 모든 모습 또한 언제나 새삼스레 되새긴다. 햇볕이 우중충하던 겨울날, 골목 안쪽 시커먼 나무전봇대 빛깔이 외려 도드라지도록 밝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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