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79 : 이야기를 읽는 책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독일사람을 모릅니다. 이녁이 어떤 삶을 꾸렸고, 어떤 넋을 펼쳤으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했는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이가 쓴 책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2012)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 하나를 읽으며 어느 한 사람이 걸어간 삶과 누리던 넋과 나누던 사랑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누군가한테 묻듯, 또는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는 듯, 혼자말로 “왜 스승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준비 작업을 경험 있는 제자에게 맡기지 않는가 … 무엇 때문에 그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엄격하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하며, 또 제자들에게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가(88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어머니도 이와 같아요.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 언제나 똑같은 몸짓입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며 늘 똑같은 매무새입니다. 아이들 밥을 차리며 노상 똑같은 몸가짐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해서 심어 돌보아 거두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 심어 돌보아 거둔 곡식을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물로 헹구고 밥으로 짓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되풀이해요. 아이들한테 옷을 입히려 하면, 더러워진 옷을 벗겨 새로 빨래하고 말리고 개고 건사합니다. 목을 넣고 팔을 넣으며 단추를 채웁니다. 어느 때라도 어느 한 가지 어긋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가만가만 모든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어느 재주나 솜씨와 얽힌 자리에서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되풀이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으레 수저를 들어 밥이든 반찬이든 하나하나 집고 알맞게 입에 넣어 찬찬히 씹어서 삼켜요. 주걱으로 입에 퍼넣는대서 밥먹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상 앞에 멀뚱멀뚱 앉는대서 내 배가 그득 차거나 부르지 않아요. 여든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섯 살이든,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야 합니다. 날마다 끼니자리에서 이 일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똑같이 똥을 눕니다. 똑같이 숨을 쉽니다. 똑같이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늘 같은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집밖일이라 하는 회사일 또한 노상 같은 일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같은 출근길입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자동차나 버스를 탑니다. 언제나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책상에 앉거나 같은 일터에 서요. 기계를 놀리든 책상맡 셈틀을 붙잡든 종이와 펜대를 붙잡든, 집밖일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곧, 사람이 살아가며 빚거나 누리는 새로운 생각과 꿈이란, 어디에서나 싱그럽고 슬기롭게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사진기를 들고 싸움터를 누비거나 집회 현장에 달려가야 ‘빛나거나 놀라운’ 보도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내 집에서 아이들 놀며 웃음짓는 모습을 마주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빛나거나 놀라운’ 사진이에요.


  빛나거나 놀라운 삶이기에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책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똑같이 누립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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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 - 사진생태에세이 2
김태균 지음 / 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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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86] 김태균,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지성사,2008)

 


  “우리 주변에서 새들을 더욱 가깝게 만날 수 있기를, 우리가 모쪼록 다른 생물에 대한 배려와 함께 살아가기를 마음 가득히 바랍니다(머리말).” 하는 마음으로 내놓은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지성사,2008)일 테지만,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새를 비롯한 뭇목숨이 제 보금자리를 곱게 건사하도록 삶터를 돌보지 않습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고,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들새와 들짐승이 느긋하게 쉴 곳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람 손길이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따로 나무를 솎는다든지 심는다든지 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숲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헬리콥터로 온갖 농약을 뿌리지 않는 숲을 보기 어렵습니다. 조그마한 멧등성이마저 나들이길이 놓입니다. 높직한 멧자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고속도로나 고속철도가 놓입니다. 새들이 쉴 만한 숲이 나날이 사라집니다. 새들이 쉴 만한 숲이 사라지는 나라에서는 사람들도 느긋하게 숨쉴 만한 터전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농약을 치지 않으면 돈벌이가 되기 힘들다 하는 만큼, 시골자락에서조차 사람들이 마음 놓고 맨발로 밟을 만한 흙이나 아이들하고 뒹굴 만한 흙땅이 사라집니다. 새한테도 사람한테도 기쁘게 누릴 만한 터전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아파트이건 소우리나 돼지우리이건 고속도로나 고속철도이건, 이런저런 물질문명이 숲이나 멧자락까지 치고 들어가지 않을 때에 비로소 새들 보금자리를 곱게 지킵니다. 새들이 곱고 보금자리를 지키는 숲이라 하면, 사람들이 가끔 드나든다 하더라도 발자국이 남지 않습니다. 이때 들새나 멧새는 사람들한테 곱고 맑은 노랫소리를 들려줍니다. 이때 들새와 멧새는 사람들한테 곱고 빛나는 몸빛과 날갯짓을 보여줍니다.


  톱을 들고 숲속 나무를 베거나 가지를 쳐야 숲이나 멧자락을 예쁘게 보듬는다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돈을 들여 멋들어진 나무를 심는대서 도시 둘레 좋은 쉼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먼저 풀씨 한 알이 흙땅을 돌봅니다. 다음으로 나무씨 한 알이 흙땅을 지킵니다. 한 해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에 걸쳐 숱한 풀씨와 나무씨가 흙땅을 보듬습니다. 이동안 흙땅이 살아나고, 흙땅이 살아나는 동안 벌레들이 살아나며, 벌레들이 살아난 숲자리와 멧자리에 들새랑 멧새가 둥지를 틀고, 작은 들짐승이랑 멧짐승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요.

 

 


  오늘날 새들은 숲을 빼앗기고 들을 빼앗기며 멧자락을 빼앗깁니다. 들새이건 멧새이건 도시 한복판에서 과자부스러기나 밥쓰레기를 주워서 끼니를 때울밖에 없기도 합니다. 새들이 깃들 나무가 있던 데에 전봇대가 서는걸요. 새들이 깃들 숲이 있던 데에 아파트랑 높은 건물이 들어차는걸요. 그야말로 안간힘을 내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더없이 용을 쓰며 살아가자고 합니다.


  김태균 님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이름 그대로 목숨 곁에서 거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싶고, 사람들 누구나 이웃 목숨을 곱게 아끼면 얼마나 기쁜 일이랴 싶어요.


  가만히 보면, 사람들 스스로 이웃사람을 아낄 때에 다른 이웃 목숨이라 할 새나 벌레나 들짐승을 아낄 수 있겠지요. 이웃사람과 알뜰히 어깨동무할 때에 들고양이나 들개하고 알뜰히 어깨동무할 테고, 이웃사람과 살가이 손잡을 때에 들새나 멧새가 느긋하게 둥우리를 틀도록 지켜볼 수 있을 테지요.

 

 

 


  도시 한복판에서도 비둘기나 참새나 직박구리나 까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 한복판 새들은 너무 아슬아슬합니다. 먹이도 아슬아슬하고 보금자리도 아슬아슬합니다.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는 시골자락에서 마주한 새들을 담습니다. 시골자락이 아니고서는 새들 스스로 느긋하게 살아갈 수 없어요. 시골자락이 아니고서는 사람 또한 몸을 살찌우는 밥이랑 마음을 빛내는 숨을 맞아들일 수 없어요. 아스팔트 바닥에서 자라나는 쌀이나 보리가 아니에요. 시멘트 바닥에서 자라나는 콩이나 옥수수가 아니에요. 흙바닥에서 자라나는 풀과 나무요, 흙바닥에서 자라난 풀과 나무 둘레에 깃을 들이는 새들입니다.


  사진책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에는 모두 마흔일곱 가지 새를 담았다고 합니다. 조금 더 담으면 더 좋았으리라 싶기도 하지만, 서른일곱 가지 새나 스물일곱 가지 새를 담아도 좋아요. 다만, 몇 가지 새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더 많은 모습과 더 다른 모습을 골고루 보여주었으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새라 하더라도 다 다른 삶이고 다 다른 모습이에요.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다른 삶이며 다 다른 모습이잖아요. 알이랑 둥우리랑 새끼 모습까지 골고루 보여주어도 좋고, 아직 어린 새인 모습까지 나란히 보여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 한 마리가 봄부터 겨울까지 하루하루 살아내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더 너르고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더 어여쁘고 더 살갑게 얼싸안은 이야기로 보여줄 수 있으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런 새 저런 새를 보여주고,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책이름마따나 “생명 곁에서 거닐다”와 걸맞을 만한 ‘사람이 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하는 대목을 찬찬히 들려주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어떤 숲에서 이들 새를 만났을까요. 어떤 시골에서 이들 새와 사귀었을까요. 어떤 길에서, 어떤 누리에서, 어떤 냇가에서, 어떤 하늘을 올려다보고, 어떤 땅을 밟으며 이들 새와 즐거이 어깨동무하고픈 꿈이요 사랑일까요.


  새를 찍든 나비를 찍든 벌레를 찍든 늘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가 어떤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어떻게 이웃 목숨과 마주하는 나날인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를 바라보며 사진기를 쥔 나이기 앞서, 예쁜 목숨으로 삶을 누리는 내 손길과 눈길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은 벌레 한 마리 사랑하는 사진과 같습니다. 새 한 마리 아끼는 사진은 나무 한 그루 아끼는 사진과 같습니다. 새 한 마리 마주하는 사진은 내 반가운 이웃들 살아가는 마을과 살가이 마주하는 사진과 같습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 생명 곁에서 거닐다, 새 (김태균 사진·글,지성사 펴냄,2008.8.28./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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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하나 쓰기란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하나 있으면, 글 하나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내 마음껏 홀가분하게 쓸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사랑이 아무것 없다면, 아무리 고즈넉하거나 한갓진 데에서라도 글 한 줄조차 쓸 수 없습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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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읽던 책

 


  앤소니 드 멜로 님 삶을 그러모은 이야기책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132쪽에,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깨어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때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를 알 것입니다.” 하고 읊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함께 지내는 옆지기를 바라볼 때이든, 두 사람 사랑으로 낳은 아이들하고 여러 해째 같이 얼크러지내며 서로서로 마주할 때이든, 꾸밈없이 서로를 느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싶어요. 더 오래 함께 있대서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아주 살짝 눈을 마주치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읽으며 보듬을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더라도 사랑이 곱게 꽃송이처럼 피어난다고 느껴요.


  우니타 유미 님이 빚은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8) 둘째 권 65쪽에, “우선은 장래보다 코우키의 현재를 지켜봐 주고 싶어요. 한 2년 정도 지나면 같이 있고 싶어도 자기들이 피해 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고 외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예쁘게 긋습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사랑스레 돌보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가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랑 오늘 하루 더 즐거이 어울리며 놀고 웃으며 떠들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바로 오늘 사랑을 꽃송이처럼 피우고 싶을 뿐이라는 넋을 느끼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생각을 담은 책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사랑을 들려주는 책을 읽으며 기쁩니다. 삶을 곱게 누리면서 이야기 한 자락 어여삐 보듬는 책을 읽으며 흐뭇합니다.


  나는 어떠한 책이든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읽고 싶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지식을 얻거나 저런 정보를 쌓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한껏 잘 버는 솜씨를 굳이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을 널리 드러내는 재주를 애써 북돋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을 나들이 할 수 있으면 퍽 좋더라 하는 말마디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느 논둑길을 걷더라도 즐겁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들새 소리를 듣습니다. 휘파람새인가, 직박구리인가, 노랑할미새인가, 찌르레기인가, 어떤 새인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갓난쟁이는 품에 안고 다섯 살 개구진 아이는 앞세워 걸리며 봄나무를 바라봅니다. 막 꽃송이 터뜨린 매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직 새눈 조그마한 모과나무를 바라봅니다. 천천히 꽃송이 터뜨리는 동백나무랑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네 식구 나란히 시골마을 곳곳을 두 다리로 걷는 나날을 즐깁니다. 면 소재지까지 사십 분 남짓 천천히 걸어갑니다.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 부치고는 다른 길로 에돌아 오십 분 남짓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멧골짝 안쪽에 깃든 절집 언저리까지 한 시간 반 남짓 걸어 오르다가는 풀숲에 깃듭니다. 네 식구 모두 벌러덩 드러누워 풀과 가랑잎과 흙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한창 뒹굴며 노는 동안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골짝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들이를 하는 동안, 우리 집 마당에 드리운 빨랫줄에 넌 갓난쟁이 기저귀며 식구들 옷가지며 따순 봄햇살 마음껏 들이마시며 보송보송 마를 테지요.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다시 천천히 멧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흙길은 흙길대로 즐겁고, 시멘트길은 시멘트길대로 즐겁습니다. 마늘밭 풀 매는 이웃 할머님한테 인사합니다. 시골집 두루 도는 우체국 일꾼한테 인사합니다. 나와 온 식구한테는 종이에 아로새긴 책도 사랑스럽고, 저마다 얼굴에 아로새긴 웃음도 사랑스럽습니다. 까무잡잡 싱싱한 빛 구수한 흙땅 곳곳에 새로 돋는 봄풀과 봄꽃 모두 사랑스럽게 읽는 책입니다. 봄까지꽃, 별꽃, 광대나물꽃, 냉이꽃, 제비꽃 모두 귀엽게 맞이하는 책입니다. 먼 멧등성이 따라 노랗다가 발갛다가 하얗다가 파랗게 빛나는 아침녘 햇살과 하늘 모두 고맙게 마주하는 책입니다.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아로새기는 책은 바로 좋은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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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희낙락


장마철의 습기며 삼복의 무더위가 작은 산중이라고 어디 피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안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의 한철을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박남준-꽃이 진다 꽃이 핀다》(호미,2002) 90쪽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약탈한다면 그건 괜찮을까요? 그때도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반길까요
《아룬다티 로이-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2004) 139쪽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짝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희희낙락하면서 지나갔다고 호소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미우라 아야코/박기동 옮김-여인의 사연들》(부림출판사,1984) 157쪽

 

  “장마철의 습기(濕氣)며”는 “장마철 축축함이며”로 다듬고, “삼복(三伏)의 무더위가”는 “삼복 무더위가”나 “여름철 무더위가”로 다듬으며, ‘산중(山中)’은 ‘산속’이나 ‘멧골짝’으로 다듬습니다. ‘피(避)해’는 ‘비껴’나 ‘돌아’로 손보고, “방 안의 구석구석”은 “방 안 구석구석”으로 손보며, “저마다의 한철을”은 “저마다 한철을”이나 “저마다 맞이한 한철을”로 손봅니다. “이미 충분(充分)히”는 “이미”나 “이미 아주”나 “이미 옴팡”이나 “이미 몹시”로 손질해 줍니다. “지쳐 있다”는 “지쳤다”로 고쳐야 올발라요.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는 “미국 할렘에 사는 가난뱅이가”나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로 다듬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다듬어 줍니다. ‘약탈(掠奪)한다면’은 ‘유물을 턴다면’이나 ‘유물을 훔친다면’이나 ‘유물을 빼앗는다면’으로 손보고, ‘그건’은 ‘이는’이나 ‘이러한 일은’으로 손봅니다.


  ‘자기(自己)가’는 ‘당신이’로 다듬고, “비탄(悲歎)에 빠져 있는”은 “슬픔에 빠진”으로 다듬으며, ‘호소(呼訴)할는지도’는 ‘하소연할는지도’로 다듬어 줍니다.


  ‘희희낙락(喜喜樂樂)’은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뜻한다고 해요.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 기뻐할 테지만
→ 기뻐 웃을 테지만
→ 기뻐서 히히거릴 테지만
→ 좋아하며 즐길 테지만
→ 반기며 즐길 테지만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 똑같이 기뻐하며
→ 똑같이 즐거워하며
→ 똑같이 좋아서 웃으며
 희희낙락하면서
→ 웃고 떠들면서
→ 즐겁게 시시덕거리면서
→ 하하호호 웃으면서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뜯어 살피면, ‘기쁘다’를 뜻하는 한자 ‘희(喜)’와 ‘즐겁다’를 뜻하는 한자 ‘락(樂)’을 둘씩 붙였습니다. 말뜻 그대로 돌아본다면, “기쁘고 기쁘며 즐겁고 즐겁다”입니다.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그러니까, 한문을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한테는 ‘喜喜樂樂’일 터이나,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한테는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꼭 중국사람이 아닐지라도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쓰고 싶다면 얼마든지 쓸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고맙다’라 안 하고 ‘땡큐’라 말하고, ‘잘 가’라 안 하며 ‘바이바이’라 흔히 말하듯, ‘희희낙락’ 또한 얼마든지 쓰고프면 쓸 일입니다.


  그런데, ‘고맙다’를 안 써 버릇하는 동안 참말 이 한국말은 하루하루 우리한테서 잊혀지거나 멀어집니다. ‘잘 가’를 말하지 않고 ‘바이바이(byebye)’나 ‘안녕(安寧)’만 말하면, 참으로 ‘잘 가’라는 한국말은 어느덧 우리 입에서 낯선 말투가 되고 맙니다. 갓난쟁이나 어린이 앞에서 “잘 가, 또 보자, 잘 지내. 살펴 가.” 하고 말하는 어르신이 얼마나 있는가요. 아이들은 서로서로 손을 흔들며 무슨 말을 하는지요.

 

 즐겁고 즐겁다 / 즐겁디즐겁다
 기쁘고 기쁘다 / 기쁘디기쁘다
 기쁘고 즐겁다 / 즐겁고 기쁘다
 즐겁게 웃다 / 기쁘게 웃다
 웃음꽃이 활짝 피다
 (기뻐서 /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다
 (기뻐 / 즐거워) 죽으려고 하다
 (기쁨이 / 즐거움이) (넘치다 / 가득하다)
 …

 

  우리 말글을 돌아보면 느낌을 담는 말마디가 무척 많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 말글은 우리 느낌을 거의 끝없이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온누리 다른 어느 나라말이나 겨레말을 살펴보더라도 우리 말글처럼 우리가 나타내고픈 숱한 느낌을 알뜰살뜰 담을 만한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고등학교이든, 또 대학교이든 어디에서든 우리 말글이 아름답게 빛나도록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빛나는 우리 말글을 물려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대목을 잘 가르치면서, 어딘가 허전하다 싶은 대목 또한 꾸밈없이 가르치고 북돋우는 한편, 우리 뒷사람이 스스로 갈고닦거나 가다듬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고인 말글이 아닌 움직이는 말글이라면, 먼 옛날 어른들이 닦은 틀로만 쓸 말글이 아니라 앞으로 새 삶을 일굴 어린이와 푸름이가 새롭게 갈고닦으며 빛낼 말글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웃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기쁨을 나타내거나 슬픔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또 울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갖가지 느낌말 가운데 우리가 쓰는 낱말은 몇쯤 될까요. 우리는 한겨레 느낌말을 제대로 아는가요. 우리 말소리가 노래가 되도록 가꾸는 손품은 어느 만큼 들이는가요.  글월 한 자락이 시 한 자락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구는 마음품은 어느 만큼 쏟는가요.


  말은 곧 노래이고, 글은 바로 시입니다. 말은 곧 삶이며, 글은 바로 넋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메마르거나 팍팍하게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내놓는 말마디마다 메마르거나 팍팍하고 말아 노래하고 동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거칠거나 차갑게 지내니, 저마다 펼치는 글월마다 거칠거나 차갑고 말아 시하고 등돌리는지 모릅니다.

 

 똑같이 웃음을 머금으며
 똑같이 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웃음을 띄우며
 똑같이 웃으며
 …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멋을 부리거나 치레를 한다면서 바깥말을 끌어들여 쓸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아, 맛있어!”라 하지 않고 “딜리셔스!”라 하거나 “굿!”이라 말할 수 있다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하고 그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꾸자꾸 다른 얄딱구리한 말투가 뒤따르며 우리 넋을 잃습니다. 처음부터 소도둑은 없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바뀝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지, 여든 살에 갑작스러운 버릇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섣불리 영어를 배우고 한자 지식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아이들이 올바르고 알맞으며 곱게 우리 말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자면, 어른들부터 스스로 참되고 착하며 곱게 우리 말글을 알뜰살뜰 살려서 써야 합니다.


  즐겁게 쓰는 우리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고, 기쁘게 나누는 우리 글이 되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혼자만 신이 나서
 저희끼리만 즐거워 하면서
 아주 좋아 죽겠다면서
 깨가 쏟아지면서

 …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좋은 우리 삶이라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번 선물받은 고운 삶을 즐겁게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돈이 모자라 팍팍하게 살아간다 해서 슬프거나 괴롭기만 하지 않습니다. 돈이 넘쳐 펑펑 쓰며 살아간다 해서 기쁘거나 넉넉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소담스레 살필 대목은 내 즐거움이고 내 사랑이며 내 믿음입니다. 나 스스로 즐거울 여러 가지를 찾을 노릇이고 나부터 사랑할 사람을 찾을 노릇이며 나부터 내 둘레 삶터를 믿음으로 섬길 노릇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말합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즐겁게 말하지 못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홀가분하게 받아들이며 홀가분하게 헤아리는 한편, 홀가분하게 말과 글을 다룰 수 있습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며 넋이며 말이며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거나 다루지 못합니다.


  그예 웃는 삶에서 웃는 넋이고 웃는 말입니다. 내 삶에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씌울 까닭이 없다면, 내 넋이나 말에도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덮을 까닭이 없습니다. 꾸밈없이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즐기고, 꾸밈없이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나누면 됩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사랑스레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북돋우면 됩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때에는 ‘즐겁다’고 말합니다. ‘희희낙락’하는 내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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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축축함이며 삼복 무더위가 작은 멧골짝이라고 어디 비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 한철을 누리며 킥킥 웃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벌써 많이 지쳤다
-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깡그리 턴다면 이런 일은 괜찮을까요? 이때에도 똑같이 웃고 떠들며 반길까요
- 또 어떤 사람은 이녁이 짝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면서 지나갔다고 하소연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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