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1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나라를 생각해서 ‘당신은 죽으시’오
 [만화책 즐겨읽기 137] 오제 아키라, 《우리 마을 이야기 (1)》

 


  시골 면사무소는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큰물이 진다든지 가뭄이 든다면 여러모로 일거리가 늘어날 테지만, 여느 때에는 참 일거리가 없다 여길 수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동사무소는 일거리가 많을까요. 서울이라면 많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동사무소이든 다른 공공기관이든 일거리가 늘 철철 넘칠 만큼 될까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라는 자리에 앉아 일하는 이들이 건물 안쪽 책상맡에 앉아서 씨름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내야 할까 모르겠어요.


- 26년 전(1966년), 나는 그저 놀기 좋아하는 소학교 5학년이었다. (11쪽)
- “이 부락에도 예전부터 농사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어서 관두고 싶어 했던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다오. 공항을 계기로 결심이 섰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 심정 나도 뼈저리게 압니다. 역시 가장 괴로운 건, 사이좋게 잘 지냈던 이 마을이 두 무리로 분열된 것이라오.” (215쪽)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한 삼월 첫무렵부터 사월로 접어들기 앞서까지, 시골마을 곳곳에 ‘면사무소 안내방송’이 날마다 여러 차례 울려퍼졌습니다. 경운기 소리마저 거의 못 듣는 우리 시골마을인데, 이른아침 낮 저녁, 또 사이사이, 면사무소에서 ‘산불 나지 않게 불을 함부로 피우지 말자’는 이야기를 녹음테이프로 자꾸자꾸 틀어놓습니다. 어쩜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날마다 여러 차례 똑같은 이야기를 틀어놓는가 싶지만, 이렇게 해야 산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테지요. 시골에서는 쓰레기를 집집마다 ‘알아서’ 태우니, 자칫 바람에 불씨가 날려 멧자락 하나 홀랑 태울까 걱정할 만해요. 우리 시골마을은 해가 바뀔수록 풀약 치는 집이 줄어, 차츰 농약 없이 손으로 김매는 시골이 되는 만큼, 논둑이나 밭둑 풀을 잡자면서 불을 퍽 자주 놓아요. 약을 안 치자니 풀을 잡아야 하고, 풀을 잡자니 일흔이나 여든 살 몸뚱이로 너무 고단하니, 불을 놓는 일이 가장 수월합니다.


  면사무소에서 때맞춰 방송을 하는 일이 마땅하리라 느끼면서, 여러모로 아쉽고 서운하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삼월 한 달 ‘산불 안 나게 하자’는 방송을 끝없이 내보내면서, 막상 면사무소 일꾼이 시골마을을 두루 돌며 시골 흙일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한 차례조차 못 보았거든요.


  예전 같으면, 그러니까 스피커라는 시설이 없던 예전 같으면, 아주 마땅히 면사무소 일꾼이 마을을 두루 돌았겠지요. 면사무소 일꾼이 모둠을 짜서 날마다 온갖 마을을 두 다리로 돌았겠지요. 스피커 시설이 변변하지 않던 때에는 자동차 또한 변변하지 않을 뿐더러, 시골길마저 흙길에다가 자동차 들어서기 힘들었을 테니, 다들 자전거를 몰며 큰길까지 달린 뒤, 자전거를 천천히 끌며 온갖 마을을 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을이 어떠한 생김새인가를 두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온몸으로 느끼면서, 참말 공무원다운 공무원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오늘날은 시골에도 길이 잘 뚫리고, 면사무소 일꾼이라면 으레 자가용이 있는데다가 면사무소 짐차가 있으니, 어디라도 차를 타고 다닐 만하고, 한나절 달리면 면사무소 테두리 모든 마을을 돌 수 있기도 합니다.

 

 


- “도쿄에 가서 뭘 할 건데?” “아직 몰라. 하지만, 어쨌거나 내 앞길은 내가 정할 거야. 고등학생 때부터 그렇게 마음먹었어. 농사꾼은 나한테 맞지 않아.” “농사일은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땅을 버릴 수는 없잖아?” “뭐냐, 시게루. 너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을 나가겠다고 소란 피웠잖아.” “그, 그랬지만, 이걸 봐, 히로시.” “아, 그때 말했던, 실크단지 구상인가?” (22∼23쪽)
- “정부가 도미사토의 반대운동에 막혀서 공항 건설을 포기한 건 사실이야. 근데 그들이 또다시 같은 실패를 반복할까?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죽을 각오로 쳐들어올 거다. 이웃 산리즈카로.” (74쪽)
- “여기 부락 모두가 얼마나 많은 뽕밭을 일구었는지 알아? 농림성의 부추김에 3년 공들여서 45만 평이다. 그런데 이번엔 공항 만든다고 뽕밭은 그만두라니. 전부 끝났어.” (92쪽)


  네 식구가 마실 삼아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걷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면 5분이면 넉넉하고, 두 다리로 걸으면 삼십 분 남짓 걸립니다. 우리는 이 길에서 이야기를 그리 많이 나누지는 않으나, 이야기가 될 수많은 삶과 모습을 느낍니다. 대문을 열고 논밭으로 나서도 논둑 밭둑에 갖은 풀포기가 인사합니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이 날마다 새롭게 인사합니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더라도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쉼없이 지저귀며 노래합니다.


  소리를 듣습니다. 귀를 맑게 트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들이 찧고 까불며 놉니다. 개구진 소리를 듣습니다. 귀를 맑게 트는 소리를 듣는 사이사이, 밥이 끓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이 나뭇잎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지렁이가 흙속을 누비며 흙똥 누는 소리를 듣습니다. 고운 봄볕을 받으며 아주 천천히 꽃잎을 벌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어릴 적 내가 형이랑 찧고 까불던 소리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내 어릴 적 내가 뛰놀던 골목 언저리에서 나도 모르게 피고 졌을 숱한 골목꽃을 헤아립니다. 수많은 목숨이 조용히 태어나서 조용히 죽습니다. 수많은 넋이 고요히 온누리를 떠돌며 지구별을 보듬습니다.


  나는 어떤 목숨일까요. 나는 어떤 넋일까요.


  밤에는 달과 별을 느낍니다. 낮에는 해와 구름을 느낍니다. 냇물이 흐르며 소리를 냅니다. 별이 움직이며 소리를 냅니다. 마늘포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냅니다. 씨앗들이 흙속에서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소리를 냅니다.

 

 


- “하지만, 결국 공항이 세워지겠지? 각료회의에서 결정했다던데.” “그야 위에서 하는 일이니까.” “우리 아버지는 오히려 좋아하더라고. 도미사토 마을에 큰 공항이 생기면 우리 농작물이 비싸게 팔릴 거라고.” “바보, 그쪽 농민 처지도 생각해야지.” (25쪽)
- “그럼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신문 따위 거짓말투성이잖아!” “이 녀석들! 웬 소란이냐? 곧 수업 시작한다!” “선생님! 정말 여기에 비행장이 생기나요? 선생님!” (47쪽)
- “아버지 말이야. 전에는 공항이 지역발전에 도움될 거라고, 도미사토 마을의 공항 반대 서명을 거절했잖아.” “그, 그거야.” “남의 땅이라면 찬성해도 우리 땅엔 안 된다, 라니. 좀 그렇잖아?” (59쪽)


  이제 시골사람 되어 살아가니, 내 고향이 도시인 인천인 줄 잊을 때가 잦습니다. 이제 시골사람인 터라, 내 고향이 어디였다고 떠올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인천서 사는 동무가 늦은 나이에 장가 간다며 편지를 띄우니, 비로소 인천에 남은 동무들 살림살이를 가만히 그립니다. 내 동무들은 나처럼 아이들 낳아 이래저래 찧고 까불 텐데, 내 동무들 아이들은 내 동무들 어릴 적처럼 흙을 모르고 흙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야만 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문득, 인천공항이 떠오릅니다. 어떤 인천사람은 인천에 공항이 생긴다니 좋아했습니다. 아니, 참 많은 인천사람은 인천에 새로 생기는 공항을 몹시 반겼습니다. 내 오랜 벗 가운데 하나는 인천에서 ‘인천이지만 인천 아니라 하는’ 영종섬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동사무소 공무원이 된 벗인데, 이 벗도 아이를 낳고 꾸준히 일하는지, 아니면 일터를 그만두었는지까지는 모릅니다. 오랜 벗이지만, 서로 어찌 지내는가를 오래도록 모릅니다. 내 벗도 영종섬에 공항이 들어서는 일을 반겼을까 궁금합니다. 내 벗하고 영종섬에서 살아온 숱한 사람들도 영종섬 공항을 좋아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집과 밭과 멧자락 모두 나라에 팔아야 하면서 고향을 떠나 고향을 잊어야 했을 영종섬 사람들은, 인천이지만 인천 아닌 영종섬 사람들은, 인천에 새로 짓는 공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 “시장님, 국제적인 공항이 필요하단 것은 잘 알겠소. 하지만, 정부는 우리에게 아직 그 어떤 양해도 구한 바 없소. 그런데도 신문에 마치 이미 정해진 일인 것마냥 기사가 나는 건 어째서요? 국가적 대형 공공사업이면, 이렇게 우리들의 승낙 없이 추진해도 되는 거요?” (52쪽)
-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어. 마유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지킬 거랬어.” “그, 그런 걸 주민 이기주의라고 하는 거다.” “뭐라고? 배신자 녀석!” “시끄러! 이기주의자!” “외국에 못 나가도 좋냐?” “그딴 데 가고 싶지 않다, 뭐!” “조용히! 웬 소란이냐! 예비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아야지! 2학기 시작부터 말썽이냐?” …… “선생님, 저, 산리즈카에 공항이 들어서면 소음 때문에 수업이 불가능해진다고, 그래서 이 학교도 폐교될지 모른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정말인가요? 그리고 이 부근의 소학교나 중학교들 전부 방음 건물로 새로 짓는다는데 그것도 사실인가요? 방음 건물은 창문이 좁고 어둡고, 1년 내내 문을 꼭 닫아걸고 형광등을 켜고 공부한다던데 정말인가요? 선생님은 공항 건설에 반대인가요, 찬성인가요? 학교가 폐교돼도 상관없으세요?” (113, 115∼116쪽)
- “헤헤헤,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고요? 바보같이!” “겐지.” “태평스럽게 그런 말 하고 있을 때, 불도저가 와서 학교를 싹 쓸어버릴걸요! 어때요, 선생님. 그렇게 돼도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고 할 거예요? 이런 학교 부서져 버리라지!” (154∼155쪽)

 

 


  인천에 공항을 짓겠다 하는 중앙정부 공무원 외침말이 신문에 실리던 그날, 나는 몹시 못마땅하고 슬펐습니다. 김포에 있는 공항을 처음 지을 때, 김포에서 나고 자라며 흙을 일구던 사람들이 어떻게 쫓겨나고 어떻게 고향을 빼앗겼으며 어떻게 뒷삶을 꾸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익히 들은 터라, 이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려는 중앙정부 개발정책이 그지없이 못마땅할 뿐 아니라 더없이 슬펐어요.


  참말 공항을 지어야 한다면, 서울 종로 한복판에 지어야 하지 않나요. 공항을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헤아려, 서울 강남 압구정동 명동에 닦아야 하지 않나요.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데가 서울인 만큼, 핵발전소는 서울 한복판에 지어야 마땅해요. 화력발전소도 서울 한복판에 세워야 마땅해요. 제철소도 제강소도 정유공장도 자동차공장도 서울 한복판에 세워야지요. 서울사람은 발전소 곁에서 살아 보아야 해요. 서울사람은 제철소 곁에서 바람을 마시고 빨래를 널어 보아야 해요. 유리공장 둘레에서 아이들이 뛰놀아 보아야 해요. 식품공장 우유공장 언저리에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보아야 해요.


  나는 인천제철이 어떠한가를 겪어 보았어요. 나는 인천발전소가 어떠한가를 느껴 보았어요. 나는 연탄공장, 식품공장, 시멘트공장, 화학공장, 자동차공장 언저리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를 보내는 일이 어떠한가를 두 눈으로 지켜보았어요. 그래서 이 모든 슬픈 굴레를 내 옆지기와 아이들이 똑같이 느끼거나 고스란히 겪기를 바라지 않아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사람답게 사랑하고 싶어요. 좋은 목숨을 좋은 꿈으로 누리며 어깨동무하고 싶어요.


- “우리가 땅을 파는 게 그리 나쁜 일일까? 땅을 팔고 빚을 갚는 게. 애들 좋은 학교에 보내주는 게 말이여.” (83쪽)
- “뎃페이. 도모노 지사는 말이다, 여기를 공항으로 만들어도 좋겠습니까, 라고 우리에게 물어 보러 오는 게 아니여. 이미 결정된 것이니까 이해해라, 협력해라, 땅을 팔아라, 이거여.” (160쪽)
- “히로시. 땅은 말이여,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란다. 이 땅은 우리의 것도 공단 것도 아니여. 옛날부터 그저 여기에 있었을 뿐. 그것을 인간이 제멋대로 선을 긋고 제것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거여. 우리도 마찬가지여. 하지만 말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땅을 일구고 갈고 씨앗을 뿌려서 비옥한 흙으로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여.” (184쪽)

 

 


  인천 앞바다에 있던 용유섬이 사라졌습니다. 용유섬과 영종섬 사이 갯벌은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영종섬에 넓게 드리우던 소금밭은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영종섬을 둘러싸던 갯벌은 몽땅 죽었습니다. 흙밭과 소금밭과 낮은 멧등성이와 갯벌과 숲으로 이루어졌던 영종섬은 온통 시멘트·아스팔트 덩어리로 바뀌었습니다. 한 시간에 한 번 다니는 버스를 타려고 달리기를 하던 사람들은 자가용을 몰고 길쭉한 다리를 건넙니다.


  인천 영종섬을 알던 사람들한테 영종섬은 이제 없습니다. 인천 용유섬을 모르던 사람들한테 용유섬은 예나 이제나 없습니다. 중앙정부 공무원과 건설업자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조차 집과 길과 삶터를 종이에 그려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집과 길과 삶터를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어깨동무하지 않았습니다. 공항버스 타고 새근새근 잠들면 어느새 비행기 타는 데까지 느긋하게 닿습니다. 표를 끊고 비행기를 타고 나라밖 어디로라도 오가면 그만입니다.


  더 값싼 미국 쌀을 사다 먹으면 됩니다. 더 값싼 칠레 포도를 사다 먹으면 됩니다. 더 값싼 중국 곡식을 사다 먹으면 됩니다. 더 값싼 호주 소고기를 사다 먹으면 됩니다. 이러면서 한국 자동차와 손전화와 셈틀을 더 값싸게 나라밖에 팔면 됩니다.


  돈을 벌어 돈을 쓰는 삶자락인데, 돈을 생각하고 돈을 나누는 오늘날인데, 영종섬 고기잡이와 흙일꾼 몇몇이 고향을 잃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들, 하나도 대수롭지 않을 뿐더러, 이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이웃 한국사람’도 없습니다.


- “내가 농사꾼을 싫어했던 건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8쪽)
- “뒷일은 너에게 맡긴다, 뎃페이. 할 수 있지? 너 혼자 남는다 해도 싸워야 한다. 네가 지키는 건 이 목장이나 집, 밭뿐만이 아니야.” “네?” “네가 지키는 건, 민주주의다.” “민주, 주의?” (223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첫째 권을 읽습니다. 책 앞머리에 문정현 신부님 추천글이 실리는데, 나는 이 추천글이나 책끝에 붙은 어느 대학교수 소개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1992년에 나온 만화책이 스무 해만에 한국에서 나온 일을 기리며 오제 아키라 님이 새로 붙인 머리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제 아키라 님은, “때린 사람은 자기가 때렸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고 말합니다.


  그래요, 때린 사람은 얼마나 세게 얼마나 아프게 얼마나 슬프게 때린 줄 몰라요. 어떤 이는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를 읽으면 ‘제주 강정마을’이 떠오른다 말하지만, 나는 제주 강정마을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나는 《우리 마을 이야기》를 읽으면서 ‘서울 김포’가 아닌 ‘경기 김포 시골마을’과 ‘인천 영종 섬마을’이 떠오르던걸요. 삶과 삶터와 사랑과 사람 모두 잃거나 빼앗긴 이 나라 ‘공항 부지 피난민’이 떠오르던걸요.


  충청북도 청주에 공항을 지을 때에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전라남도 여수에 공항을 닦을 때에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이 나라 곳곳에 공항을 새로 세운다면서 시골마을 흙일꾼을 내몬다 할 때에, 지역 지식인과 언론인과 교사와 학생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왜, 바로 이 한 마디 아니겠습니까. 나라를 생각해서 ‘당신은 죽으시’오, 하는 한 마디가 아니겠습니까. 나라살림을 북돋우고자 하니, ‘당신은 고향을 버리시’오, 하는 한 마디가 아니겠습니까. 나라사랑을 하자니, ‘당신은 당신 어버이들이 먼 옛날부터 이어오던 흙사랑을 내팽개치시’오, 하는 한 마디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둘째 권을 읽을 차례입니다. (4345.4.1.해.ㅎㄲㅅㄱ)


― 우리 마을 이야기 1 (오제 아키라 글·그림,이기진 옮김,길찾기 펴냄,2012.3.3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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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도감 책읽기

 


  맨 처음 구름을 올려다본 날부터 두 아이하고 구름을 올려다보는 오늘까지, 똑같이 생긴 구름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다른 구름이고 늘 새로운 구름입니다. 매화나무 한 그루에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달립니다. 수백 아닌 수천 송이가 나무 한 그루에 달려요. 이 가운데 매실은 얼마쯤 맺힐까요. 멀리서 바라보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든 똑같이 생긴 꽃송이는 없습니다. 아주 닮았구나 싶어도 서로 다른 꽃송이예요. 참 비슷하구나 싶어도 모두 다른 꽃잎이에요. 좋은 푸성귀 나는 흙땅에 쟁기를 폭 찍어 갈아엎는 흙알갱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면, 수만 수십만 수백만 알갱이는 모두 달리 생겼습니다. 수천만 수억만 흙알갱이는 저마다 다른 크기와 생김새로 얼크러지며 밭을 이루고 논을 이룹니다. 결 곱고 내음 좋은 흙을 만지작거리다가는, 내 몸뚱이도 나중에 이처럼 곱고 좋은 흙으로 바뀌어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과 뒷사람한테까지 고운 결과 좋은 내음 물려줄 수 있을까 어림해 봅니다.


  우리 집 동백꽃 붉은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마을 집집마다 한 그루쯤 으레 건사하는 동백나무 꽃송이 붉은 빛깔을 어디에서나 바라봅니다. 집마다 다 다른 때에 피어나고 다 다른 짙기로 붉게 물드는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크기도 모양도 빛깔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마당이든 이웃집 마당이든, 흔히 얘기하는 동백꽃 모양보다 꽃도감에 안 실리는 모양이 훨씬 많다고 깨닫습니다. 꽃도감에는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에 이르는 꽃송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담겠지요. 꽃도감에 담긴 꽃송이 하나는 ‘꽃 갈래 하나’를 얼마나 잘 보여줄 만할까요.


  누군가 ‘지구별 겨레 사전’이나 ‘지구별 나라 사전’이라며 엮는다 하면서, 겨레와 나라마다 사내랑 가시내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 싣는다 할 때에, 이 ‘지구별 겨레 사전’에 실린 사람들 얼굴은 ‘겨레 하나’를 얼마나 잘 보여줄 만할까요. ‘지구별 겨레 사전’에서 ‘한국’ 이야기에서는 가장 잘생겼다는 사내랑 가시내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가장 못생겼다 하는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하다는 얼굴을 담아야 할까요. 아무나 골라잡아 사진을 찍어 담으면 될까요.


  도감을 살피며 꽃이름을 알 수는 없어요. 도감을 살피며 꽃이름을 맞춘다 하더라도 꽃을 알 수는 없어요. 꽃이름을 알자면 내 마음을 가만히 기울이고 내 생각을 찬찬히 쏟으며 꽃을 바라보아야 해요. 꽃을 알자면 꽃이랑 함께 흙땅을 밟고 흙내음을 맡으며 살며시 눈을 감고 느껴야 해요. (4345.4.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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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아닌 길을 걷다

 


  처음에는 첫째를 걸리고 둘째를 안으며 마을 언저리를 한 바퀴 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마실을 하기로 한다. 두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면소재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봄비 갠 이듬날 저녁 멧등성이 너머로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는다. 좀 늦게 나왔나 싶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도 해 기운 뒤에 걸어 돌아오더라도 좋으리라 느낀다. 날이 퍽 포근하다.


  자동차 거의 볼 수 없는 시골길을 걷자니, 들새 지저귀는 소리뿐 아니라, 바람이 부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풀잎 서걱거리는 소리, 구름 없는 하늘에 해 지고 달 뜨는 소리, 옆지기 노랫소리, 아이들 조잘조잘 소리 찬찬히 들을 수 있다. 더 귀를 기울인다면 지구별이 돌아가는 소리와 우리들 발자국이 찬찬히 울려퍼지는 소리까지 듣겠지. 봄비를 머금은 마늘이 한결 싱그러이 풀포기 빛깔을 뽐내는 소리를 들을 만하고, 일찌감치 갈아엎은 밭뙈기 흙이 거름을 머금으며 잘 익는 소리 또한 들을 만하다.


  면소재지까지 2.1킬로미터, 다시 집으로 2.1킬로미터. 나가는 데 34분, 들어오는 데 42분.


  우리 네 식구 오늘 걸은 길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 우리 네 식구는 길그림, 곧 지도를 걷지 않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걸은 겨를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걸은 나날이다. 저녁을 보고 해거름을 보며 차츰 까무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을 본다. 집에 닿으니 초롱초롱 빛나는 별이 하나둘 또렷하다. 밤하늘 별을 가리켜 초롱초롱이라는 이름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밤하늘 별빛이 초롱초롱하며, 새 아침 햇살 머금는 꽃잎과 풀잎이 초롱초롱하다. (4345.4.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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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yanBen님의 "어떤 뿌리가 깊은가"

 

'한글'과 '우리말'부터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있어도, 느낌글을 쓰신 분께서는 애써 사서 읽지 못하기도 할 테지만, 애써 읽어도 받아들일 알맹이가 없구나 싶어요.

 

님이 쓰신 이 글은 온통 '한글'입니다. '우리말(한국말)'이란 껍데기만 한글인 글이 아니라, 말투와 낱말과 말법과 말씨 모두 '제대로 다스린 말'입니다.

 

영국사람과 미국사람이 쓰는 말이기에 '영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모르는 채 영어를 쓰는 일을 열 몇 해에 걸쳐서 쓴 글을 갈무리하면서 틀을 하나로 세웠을 뿐입니다. 아무리 신간평가단 마감에 맞추어 느낌글을 쓴다 하더라도, 글쓴이가 이 책을 어떻게 썼는가 하는 대목을 '일러두기'나 '머리말' 또는 '알라딘서재' 같은 곳에서라도 살펴보고 나서 쓸 수 있어야, 신간평가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님 스스로 '한글 사용'을 하는 글을 쓰면서, 곧 '우리 말글을 제대로 쓰는 글'이 아닌 '한글을 쓴' 글이면서 '한글 사용 확대' 같은 말을 마지막에 붙이는 일도 슬프구나 싶어요.

 

너무 마땅한 노릇이지만, '개탄'을 한들 스스로 삶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한국말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쓰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를 생각하며 글을 써서 책으로 묶어요. 이 모두를 다 '똑같이 받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살찌우고, 삶을 착하게 다스리는 길을 찾으'라는 뜻이에요.

 

부디, 님이 가진 책을 알라딘중고샵에 내놓아, 다른 분이 제대로 즐겨읽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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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4-01 01:08   좋아요 0 | URL
신간평가단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제대로 안 읽으면서
아무렇게나 느낌글을
숙제 내듯 마감하는 일이라면
글을 쓰고 책을 낸 사람더러
어쩌라는 소리인가 모르겠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거나
돈 주고 사서 안 읽는다는
'한국말 배우는 책' 이야기라면,
알라딘 회사에 책을 반납하고
느낌글도 안 써야 올바를 텐데.

왜 공짜로 책을 받고
왜 스스로 바보스럽게 글을 쓸까.

..

'별 다섯'을 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 줄,
내 서재 이웃은 잘 헤아려 주리라 믿는다.
'별 하나'를 주든 '별 빵'을 주든,
스스로 삶을 볼 줄 모르면
백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는들
무슨 쓸모가 있을까.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열아홉 시인의 아름다운 생태시 선집
정현종 외 지음 / 호미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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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삶자리
[시를 노래하는 시 14] 정현종과 열여덟 시인,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책이름 :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글 : 정현종과 열여덟 시인
- 펴낸곳 : 호미 (2010.9.3.)
- 책값 : 9000원

 


  옛사람은 나무로 불을 때며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오리털이나 닭털을 가득 채운 옷이 없었다지만, 오늘날보다 훨씬 추운 겨을날 고작 창호종이 한 장 바르거나 이마저 없는 흙집에서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은 추위가 얼마나 모진가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더운 여름은 더위가 어느 만큼 매서운가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여름에도 나무를 해서 불을 땝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밥을 지어야 하니까요. 밥지을 쌀이 떨어지면 풀죽을 쑤었다고 하는데, 어느 집은 풀죽을 쑤자며 땔 나무마저 모자랐겠지요. 왜냐하면 나라에서는 가난한 집 사내를 군인으로 끌고 가거나 성곽 또는 궁궐 짓는 일꾼으로 끌고 갔으니까요. 옛날 옛적 조선이나 고려 적 군대는 한창 일할 만한 사내를 열 몇 살 적부터 끌고 가서 마흔이나 쉰까지 붙잡고는 안 돌려보내기 일쑤였다고 해요. 돈이 있는 집안은 돈을 내놓고 군인으로 끌려가지 않았다지만, 돈이 없고 가난하며 ‘권력과 돈 있는 집이 거느린 땅’을 일구며 곡식을 어마어마하게 세금으로 치러야 한 흙일꾼 사내들은 좀처럼 고향마을 고향집에 붙어서 흙을 일구기 힘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참 용하게 모두들 살아갔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들판과 멧자락 풀을 뜯어 날로 씹어먹거나 멧돌로 갈아서 물을 마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느 흙일꾼 살림집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딸아이만 남아 늘 풀만 먹으며 살아남지 않았을까 싶어요. 식구들 먹여살릴 만한 밭뙈기는 그리 넓지 않아도 풀은 넉넉히 나오고, 이 풀을 봄부터 가을까지 먹는 틈틈이 ‘마른나물’을 마련해, 겨울에는 마른나물로 풀죽을 쑤며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집안을 따스히 지키지 않았을까 싶어요.


.. 나무들은 /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  (정현종-나무에 깃들어)


  고작 백 해쯤 앞서라 할 1910년대 시골 흙일꾼 살림살이 이야기를 책으로나 글로나 읽을 수 없는 한국입니다. 어느 지식인이나 학자나 글쟁이도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살이를 살피지 않습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나 학자나 글쟁이라 하더라도, 2010년대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살이를 찬찬히 돌아보며 적바림하지는 않아요. 역사로도, 문화로도, 인류학으로도, 사회학이나 복지학으로도, 또 ‘농업학’이나 ‘농사학’으로도 둘러보지 않아요.


  기껏 이백 해쯤 앞서라 할 1810년대 시골 흙일꾼 살림살이는 어떠했을까요. 풀약이건 비료이건 하나도 없었을 그무렵, 능금이든 멋이든, 살구이든 배이든, 포도이든 복숭아이든, 어떻게 열매나무를 돌보며 열매 한 알 얻었을까요. 한국사람이라면 마땅히 ‘보리밥’이든 ‘쌀밥’이든 ‘조밥’이든 먹어야 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참말 지난날 한국사람 누구나 ‘밥’을 먹으며 살림을 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지난날 한겨레 옛님 가운데 거의 모든 이들은 ‘밥’ 아닌 ‘풀’과 ‘열매’만 먹으면서 살림을 잇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떠한 책으로든 글로든 읽지 못하니, 사람들 앞에서 또렷하게 밝혀 말하지 못합니다. 그저,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1800년대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집에서 딸아이로 태어나 자랐다 한다면, 그무렵 나는 무엇을 보고 겪고 치르고 배우고 살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더듬습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18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담습니다. 내 몸을 이룬 뼈마디는 1700년대 사람들이나 16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깃듭니다. 내 머리카락이나 내 손발톱은 1500년대나 14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싣습니다.


  살갗 한 조각, 세포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눈썹 한 가닥 낱낱이 되새깁니다. 내 오늘과 내 어제와 내 글피를 헤아립니다. 내 몸을 이루는 밥을 떠올리고, 내 마음을 빛내는 넋을 곱씹습니다.


.. 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 /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 / 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 / 노랗게 달궈놓은 길옆에 앉아 / 꽃 피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  (고두현-20분)


  새벽부터 밤까지 봄비가 퍽 많이 내렸습니다. 하루 내내 빗소리를 들으며 집에서만 지냈습니다. 사람은 집에만 깃들어도 집에서 먹을거리를 뚝딱뚝딱 짓는데, 들새나 멧짐승은 이런 빗날 어떻게 먹이를 얻을까요. 그저 굶기만 할까요. 비가 얼른 그쳐 먹이를 찾을 수 있기를 빌까요.


  풀 먹는 짐승은 이슬이나 비에 젖은 풀잎을 뜯어먹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기나긴 장마철에도 풀짐승은 풀잎 하나 안 뜯고 배를 곯으며 기다리기만 할까요. 내가 풀짐승이라 하더라도 빗물에 젖은 풀잎은 안 뜯고 축축한 보금자리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하늘바라기만 할까요.


  내가 풀짐승 잡아먹는 고기짐승이라 한다면 기나긴 장마철에 사냥을 않고 얌전히 때를 노릴는지, 장마철에는 풀짐승이 어디에 숨는가를 찾아나설는지 궁금합니다. 퍼붓는 빗줄기는 모든 냄새를 씻을 테니, 제아무리 코 밝고 눈 밝은 고기짐승이라 하더라도 풀짐승이 깃든 보금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려나요. 괜히 돌아다니다가 털만 축축히 적시며 힘들일 까닭이 없을까요. 내가 여우라면, 여우굴이 장마비에 잠기지 않을까 걱정할 노릇일까요. 내가 두더쥐라면 땅속으로 끝없이 스미는 빗물을 어찌저찌 못하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안절부절 못하려나요.


.. 포도송이를 만지면 / 살짝 안은 / 들바람 ..  (문태준-포도송이를 만지면)


  사람이기에 생각을 한다고 느끼지만, 사람이 아닌 다른 목숨이어도 생각을 한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생각한다고 보아야 알맞겠지요. 늑대는 늑대라는 목숨붙이로서 생각을 하리라 봅니다. 동박새는 동박새대로 생각을 할 테고, 지렁이는 지렁이대로 생각을 할 테지요.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대로 생각을 합니다. 광대나물은 광대나물대로 생각을 하고, 제비꽃은 제비꽃대로 생각을 해요.


  땅바닥에 얕게 몸을 붙여 보라빛 꽃송이 올리는 제비꽃이 되어 생각을 합니다. 이제 막 싹을 틔워 땅위로 나온 제비꽃은 천천히 꽃잎을 벌립니다. 꽃잎을 벌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제비꽃 둘레에는 겨우내 말라죽은 키큰 한해살이 풀이 노랗게 섭니다. 제비꽃은 노랗게 말라죽은 풀포기 사이에서 아주 조그마한 햇살조각 받아먹습니다. 제비꽃 둘레에는 제비꽃마냥 흙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봄까지꽃이며 별꽃이며 흐드러집니다. 냉이꽃은 봄꽃이면서 꽃대를 꽤 높이 올립니다. 제비꽃이 올려다보는 냉이꽃은 어떠할까요. 냉이꽃이 내려다보는 제비꽃은 어떠할까요. 이 꽃들한테 흙알갱이는 얼마나 크며 보드라운 이불과 같을까요. 꽃이나 풀은 모두 흙알갱이하고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지 않을까요. 가늘고 작은 뿌리로 흙알갱이를 붙잡으면서, 곁에서 새 풀포기가 올라와 다른 흙알갱이 붙잡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서로 이야기꽃 조잘조잘 나누지 않을까요.


..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았습니다 ..  (김행숙-화분의 둘레)


  정현종 님을 비롯해 열여덟 시인이 적바림한 싯말을 그러모은 작은 시집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호미,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열아홉 시인은 포도농사 짓는 포도밭 둘레에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예쁘게 자라고 소담스레 익는 포도알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고 해요.


  고개를 끄덕입니다. 포도밭 포도나무 포도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써요. 글을 모르는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도 시를 써요. 입으로 시를 쓰고 마음으로 시를 써요. 포도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포도꽃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에서 시가 생겨납니다. 잘 영근 포도송이 톡 따서 아이들한테 먹으라 내미는 웃음꽃에서 시가 거듭납니다. 다 먹고 빈 송이를 거름더미에 던지면서 시가 하나 새롭게 옷을 입습니다.


  언제나 붕붕 씽씽 내달리는 자동차로 물결을 이룬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자동차가 시를 낳습니다. 높고낮은 건물이 끝없이 줄지은 도시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스팔트길 높고낮은 건물이 시를 빚습니다. 지하철과 버스가 시를 엮습니다. 승강기와 지하상가와 백화점이 시를 일굽니다. 손전화와 텔레비전과 신문과 잡지가 시를 내놓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와 까만양복 공무원이 시를 뱉습니다.


  나는 옆지기랑 두 아이하고 얼크러지는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시를 씁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내 시를 낳는 밭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과 내가 늘 먹는 밥과 내가 언제나 듣는 들새 소리가 온통 시를 이룹니다. 봄비 그치며 파랗게 갠 하늘이 시를 뿌립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멧새가 시를 눕니다. 도랑을 흐르는 냇물이 시를 들려줍니다. 이웃집보다 늦게 꽃이 피는 우리 집 나무들이 시를 베풉니다. 아이들 웃음과 옆지기 눈빛이 시를 보여줍니다. 시나브로 나 또한 시를 씁니다. 이 모두 천천히 맞아들이며 내 눈과 손과 발가락이 꼼틀꿈틀 춤을 추면서 시 한 줄 즐겁게 씁니다.


  시 한 줄에는 사랑도 담기고 꿈도 담기지만, 시 한 줄에는 슬픔도 담기고 겉치레도 담깁니다. 시 한 줄에는 이야기도 담고 웃음도 담지만, 시 한 줄에는 지식도 담고 겉멋도 담습니다. 나는 제비꽃이 야무지게 붙잡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흙알갱이가 좋아, 제비꽃 뿌리랑 어깨동무하는 흙알갱이 삶을 시로 쓰고 싶다고 꿈을 꿉니다. (4345.3.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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