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텍스트
[말사랑·글꽃·삶빛 21] 한국사람이 쓰는 ‘전문 낱말’

 


  신발 파는 가게는 ‘신집’입니다. 그러나 신발을 파는 어느 가게는 ‘신집’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제화점(製靴店)’이라는 한자를 써서 이름을 달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슈샵(shoe shop)’이나 ‘슈스토어(shoe store)’라는 영어를 써서 이름을 붙이는 곳이 꽤 많다 합니다.


  밥을 마련해 주기에 ‘밥집’입니다. 그러나 웬만한 여느 가게는 ‘식당(食堂)’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요리점(料理店)’이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어느 가게는 ‘레스토랑(restaurant)’이나 ‘패밀리 레스토랑(family restaurant)’이라는 영어를 씁니다. 구실은 밥을 파는 가게이지만, 애써 한자말이나 영어를 빌어 무언가 전문스럽다 하는 대목을 가르곤 합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라 하지만, 날쌔고 갸름하게 만들었다는 자동차는 ‘스포츠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자동차를 한국 아닌 서양에서 만들었으니, 어딘가 다른 자동차라 할 때에, 서양에서는 서양말로 다른 이름을 붙였겠지요. 그런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붙인 ‘스포츠카(sports car)’라는 이름은 하나도 전문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는 영국이든 미국이든 ‘스포츠’나 ‘카’라는 낱말은 아주 흔하며 너른 쉬운 낱말입니다.


  옷집에서 옷을 따로 맞춘다 할 때에는 내 몸 크기를 요리조리 줄자로 잽니다. 이른바 허리·가슴·엉덩이 크기를 잽니다. 그런데, 옷을 짓든 무언가 남다르다 하는 일을 하든, 스스로 전문 직업에 몸담았다 하는 이들은 ‘허리·가슴·엉덩이’ 같은 낱말을 안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waist·bust·hip)’라는 영어를 씁니다. ‘웨이스트·바스트·히프’는 전문 낱말이 아닌 그저 영어일 뿐이나, 이 영어 낱말을 쓰는 이들은 ‘웨이스트·바스트·히프’를 꼭 전문 낱말처럼 삼습니다. 한국말 ‘허리·가슴·엉덩이’는 전문 낱말로 여기지 않습니다.


  《손석춘-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라는 책을 읽다가 131쪽에서 “광고는 이미지와 글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행복 또는 이익을 약속하고”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을 한동안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글을 쓰신 분은 ‘이미지·글’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 가지 낱말은 영어로 ‘이미지(image)’로 적고, 다른 한 가지 낱말은 한국말로 ‘글’이라 적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같은 대목에 ‘텍스트(text)’라는 영어를 쓰곤 합니다.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으면서, 두 낱말은 영어라기보다 전문 낱말이기 때문에, 딱히 번역할 만한 낱말이 없기도 하고, 따로 번역할 수도 없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야 아주 스스럼없이 ‘이미지·텍스트’처럼 쓸 테지만, 러시아말을 쓰거나 독일말을 쓰거나 네덜란드말을 쓰는 나라에서는 어떤 낱말을 쓸까요. 이들 나라에서도 영어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낼까요.


  저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생각과 마음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림·글’이라는 한국말을 쓰고 싶습니다.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이 ‘이미지·텍스트’라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저는 ‘그림·글’로 옮겨서 받아들입니다. 제가 쓰는 ‘그림·글’이라는 낱말은 영어로 옮기며 ‘이미지·텍스트’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이라는 낱말이나 ‘글’이라는 낱말은 무척 쉽고 널리 쓰는 낱말이면서, 어느 한 가지를 깊고 넓게 담는 낱말이기도 해요.


  종이에 붓으로 무언가를 그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머리로 어떤 모습을 떠올릴 때에 그림이 됩니다. 앞으로 하고프거나 이루고픈 어떤 일을 가만히 살피면서 그림이 나타납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여러 가지 모습은 그림이라 할 만합니다. 더없이 보기 좋아 그림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적을 때에 글이 됩니다. 글이 모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이 모인 이야기꾸러미이기에, ‘책 = 글’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글은 글씨를 가리키기도 하고 글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말을 담아서 글이기도 하지만, 온누리에서 살아가며 배우거나 깨달은 여러 생각이나 슬기를 일컬어 글이라고도 합니다.


  무척 쉽게 쓰는 ‘그림·글’이지만, 영어 ‘이미지·텍스트’로는 이 한국말 두 가지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인데, 영어 ‘이미지·텍스트’가 나타내거나 가리키려는 테두리를 한국말 ‘그림·글’로는 살뜰히 담아내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과 외국사람이 서로 뜻과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번역’을 합니다. ‘그림’을 ‘이미지’로 옮기고, ‘텍스트’를 ‘글’로 옮깁니다. 서로서로 뜻을 나눕니다. 서로서로 가장 알맞고 바르게 쓸 낱말을 살펴 마음을 나눕니다. 어느 갈래에서만 쓴다는 전문 낱말이라 하더라도, 서로서로 뜻과 마음을 나누고 싶으니 번역을 합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나날을 글로 빚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를 말로 엮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번역(飜譯)’이라는 한자말하고 ‘옮기다’라는 한국말을 나란히 썼는데, 일찍이 생각있는 한겨레 옛사람은 ‘옮긴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책에 밝혀 적습니다. ‘지은이·글쓴이·그린이·엮은이·펴낸이’ 같은 새 낱말이 태어났어요. 이 결과 흐름에 맞추어 ‘꾸민이·도운이·만든이·힘쓴이(애쓴이)·부른이·찍은이’ 같은 낱말을 새롭게 지을 수 있어요. ‘밝힌이·찾은이·이룬이·멋진이·좋은이’처럼 말나무 가지를 쑥쑥 뻗을 수 있습니다.


  전문 낱말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문 낱말은 사람들이 여느 자리에서 흔히 쓰는 낱말을 알맞게 엮거나 짜거나 이어서 빚습니다. 무언가를 찾으면서 ‘찾기’라 하고, 더 깊이 찾고 싶을 때에는 ‘깊이찾기’나 ‘꼼꼼찾기’나 ‘낱낱찾기’를 할 수 있어요. 더 찾겠다 할 때에는 ‘더찾기’를 할 수 있겠지요. ‘다시찾기’도 있을 테며, 오늘날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즐겨찾기’도 있어요. 여럿이 힘을 모아서 찾는다면 ‘함께찾기’가 돼요. 비슷하게 ‘서로찾기’나 ‘나란히찾기’나 ‘여럿이찾기’처럼 쓸 수 있어요. 어느 때에는 ‘한꺼번에찾기’라든지 ‘모두찾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새로찾기’라든지 ‘모아찾기’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할 때에 전문 낱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북돋울 때에 여느 자리 살림말, 곧 삶말이 환하게 빛납니다. (4345.7.17.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이라는 이름

 


  정부통계로는 2011년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91.1퍼센트라던가 하는데, 나는 이 숫자가 그다지 놀랍다고 느끼지 않는다. 진작부터 시골사람 숫자는 아주 줄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랍다 싶은 대목은 왜 아직도 도시사람 숫자가 91퍼센트밖에 안 되나였다. 이제 한국에서 도시사람은 99퍼센트나 99.9퍼센트라고 해도 맞지 않을까.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온 우리 식구는 그예 시골사람이다. 시골로 주소와 주민등록을 옮기고 ‘내 집’을 마련하면서 마을 어르신들 말씀을 듣는데, 또 앞으로 몇 차례 더 나가야 끝나는 민방위훈련을 나가며 이런저런 말을 듣는데, 막상 도시에서 살지만 주소와 주민등록은 시골로 둔 사람이 꽤 있다. 더욱이, 대학생으로 지내는 젊은이는 주소나 주민등록은 시골이라지만, 살아가기로는 도시에서 살아간다. 이래저래 따지면, 참말 시골에서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매우 적다. 군대에 간 사내들 빼고, 부재자투표를 하는 사람은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인구통계에서는 시골사람 숫자로 잡히는’ 셈 아닌가.


  우리 마을 이웃집에 여름휴가로 찾아온 분들이 있다. 그 집 아들이 고흥사람으로 고흥에서 나고 자랐으나, 이제 서울에서 혼인하고 아이 둘을 낳아 살아간다. 올해에 경기도 의정부인가 집을 옮겨 지내신다고 들었는데, 이제 이분들은 시골사람 아닌 도시사람이다. 명절이나 휴가나 제사 때를 맞이해 시골로 찾아오지만, 말 그대로 ‘시골 나들이’를 할 뿐, 시골에서 일을 하거나 살지 않는다. 이 집 첫째 아이하고 우리 집 첫째 아이랑 동갑이라, 둘을 내 자전거수레에 함께 태우고 면소재지까지 한 바퀴 도는데, 수레에 앉아 둘이 조잘거리다가 이웃집 아이가 문득 읊는 ‘시골’이라는 낱말이 퍽 낯설다고 느낀다. 그래, 이 아이는 도시 아이야. 우리 아이는 시골 아이야.


  그런데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군이나 읍이나 면이라 해서 모두 시골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군에서 읍내나 면내는 도시하고 똑같다. 읍내와 면내는 도시를 닮으려 한다. 읍내와 면내에서 일하는 분들은 도시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똑같다. 곧, 시골로 치는 군·읍·면이라 하지만,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는 시골마을에 깃들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시골사람’이라 할 수 없겠구나 싶다. 읍내 피자집이나 통닭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시골사람인가? 면내 동사무소 아저씨와 면내 우체국 아줌마는 시골사람인가? 읍내 고등학교 교사는 시골사람인가? 면내 초등학교 교사는 시골사람인가?


  99.9퍼센트, 또는 99.99퍼센트는 도시나 ‘도시가 된 땅’에서 살아간달 수 있다. 도시나 ‘도시가 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사람’, 곧 ‘시민’이라 할 수 있다.


  도시사람과 시골사람을 나란히 놓고서, 누가 좋거나 누가 아름답다거나 하며 가리거나 따질 수 없다. 다만, 오늘날 이 나라 목소리를 곰곰이 살피자면, 99.9퍼센트나 99.99퍼센트는 참말 ‘도시사람 목소리’일 뿐이라고 느낀다. 아니, 99.999퍼센트나 99.9999퍼센트는 온통 ‘도시사람 목소리’로 가득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바야흐로 ‘시골’이라는 이름은 으레 등 굽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떠올리는 모습이 되고 보니, 우리 식구 같은 시골사람으로서는 ‘시골’이라는 낱말을 누군가 입에 올리면 귀가 참 간지럽다. 시골이 뭔데. (4345.7.17.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샨티출판사 뿌리회원(평생회원)이기에, 이 책을 출판사한테서 받는다. 이번에 나온 <히프노버딩>은 좀 어려운 영어로 보이는 이름이지만, '아기를 평화롭고 사랑스레 낳기'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곰곰이 돌이키면,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롭고 사랑스레 아기를 배었고 낳았으며 돌보았다. 이 흐름이 깨지면서 차별과 학대, 여기에 현대의학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약물중독과 강압수술이 태어났다. <히프노버딩>을 빚은 분은 '할머니' 나이일 때에 이 길을 열었다 한다. 당신 딸아이가 아이를 낳을 때에 이 길을 열었다 하는데, 오늘날 젊은 어머니들이 이 책을 읽어도 참 좋겠다 싶으면서, 젊은 어머니와 함께 늙은 할머니들도 함께 읽으면서, 당신 손자나 증손자가 평화롭고 사랑스레 아기를 낳는 길을 깨우치도록 이끌면 참 좋으리라 느낀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
메리 몽간 지음, 정환욱.심정섭 옮김 / 샨티 / 2012년 7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2년 07월 17일에 저장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77) 최근

 

최근 몇 년간 영국에서 사진을 못 찍었다. 무척 기대가 된다
《앤 셀린 제이거/박태희 옮김-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 69쪽

 

  “몇 년간(年間)”은 “몇 해”나 “몇 해 동안”으로 손볼 수 있고, “기대(期待)가 된다”는 “설렌다”나 “기다려진다”나 “손꼽아 기다린다”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근(最近)’은 “(1) 얼마 되지 않은 지나간 날부터 현재 또는 바로 직전까지의 기간 (2) 거리 따위가 가장 가까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최근 경제 동향 / 최근 유행곡 / 최근에 우리 사회에는 / 최근 거리” 같은 보기글이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뜻과 쓰임새를 헤아리면, 이러한 보기글은 “요즈음 경제 흐름 / 요사이 유행노래 / 요즈막 우리 사회에는 / 가장 가까운 거리”로 손질할 수 있어요. 아니, 이처럼 손질한다기보다, 한겨레는 먼먼 옛날부터 이와 같이 말하며 살았어요. 한겨레 낱말은 ‘요즈음-요즘-요사이-요즈막’입니다.

 

 최근 몇 년간
→ 요 몇 해
→ 지난 몇 해 동안
 …

 

  한겨레는 스스로 제 말을 잊습니다. 한국사람은 스스로 제 글을 잃습니다. 요 몇 해 일이 아니요, 요즈음 일이 아닙니다. 요사이에 불거지는 일이 아니라, 먼먼 옛날부터 차츰차츰 쌓이거나 깊어지는 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지식을 거머쥐던 이들은 이들대로 한겨레 말글을 갈고닦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은 생각을 맑게 빛내지 못하고 마음을 환하게 돌보지 못합니다.


  재주로 부리는 말이 아니고, 솜씨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말재주나 글솜씨는 부질없습니다. 사랑으로 빚는 말이고, 꿈으로 엮는 글입니다. 사랑할 때에 아름답게 쓰는 말이고, 꿈꿀 때에 곱게 쓰는 글이에요. (4345.7.16.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요 몇 해 영국에서 사진을 못 찍었다. 무척 설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 사진에 관한 특별한 대화
앤 셀린 제이거 지음, 박태희 옮김 / 미진사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삶을 찍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5] 앤 셀린 제이거,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

 


- 책이름 :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 글 : 앤 셀린 제이거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미진사 (2008.3.15.)
- 책값 : 3만 원

 


  (1) 사랑하는 삶


  여러 날 햇볕 한 줌 들지 않던 빗줄기가 그칩니다. 이듬날부터 다시 빗줄기가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햇볕 넓게 내리쬘 수 있고, 새삼스레 여러 날 햇볕 없이 비구름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빗줄기 그친 하늘 가장자리를 올려다봅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쪽 멧등성이를 바라봅니다. 해가 살짝 났다 들어갔다 하며 이우는데, 구름마다 짙붉게 타오릅니다. 꼭 불이 난 구름이 하늘을 흐르는 듯합니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오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푸른 들판과 하얀 구름, 여기에 살몃살몃 드러나는 새파란 하늘이 참 예쁘게 어우러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참 예쁘구나 싶어 자전거를 멈추고 아이하고 오래도록 들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선 바로 위쪽 하늘이랑 저 먼 멧자락 너머 하늘은 빛깔이 다릅니다. 같은 하늘빛이지만, 머리 위 하늘은 짙은 하늘빛이요, 저 먼 하늘은 옅은 하늘빛입니다.


.. 현재 우리는 가장 손쉬운 사진 촬영의 최고봉에 오른 것 같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의 즉각성과 자동성으로 인해 정작 사진의 심장부인 빛에 대해선 차츰 잊고 있는 중이다 … 실제로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만큼 시간을 보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 사진의 힘은 삶에 대한 물음 앞에 스스로를 서게 만드는 것이다.  (6, 9, 10쪽/앤 셀린 제이거)

 


  자동차 드나들지 않는 시골 들길 한복판에 서서 귀를 기울입니다. 온갖 새들이 저마다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는 자전거를 멈추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자동차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으나, 자전거를 달리는 동안에 새소리를 듣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들에서 일하는 시골 할매와 할배는 언제나 새소리를 듣겠지요. 새소리와 벌레소리와 개구리소리를 듣겠지요. 들에서 일하지 않는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새소리를 못 듣겠지요. 벌레소리도 못 듣고 개구리소리도 못 듣겠지요.


  늘 듣는 소리는 늘 품는 마음이 됩니다. 늘 보는 모습은 늘 빚는 생각이 됩니다. 맑은 소리를 들으면서 맑은 마음을 품습니다. 고운 모습을 보면서 고운 생각을 빚습니다. 맑은 마음을 품으면서 맑은 꿈을 키웁니다. 고운 생각을 빚으면서 고운 사랑을 북돋웁니다. 맑은 꿈에서 맑은 말을 길어올립니다. 고운 사랑에서 고운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 아름다움이란 우아한 붓놀림, 재료, 구도나 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개념예술은 명백하게 증명해 보인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매우 고상한 관념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건 거의 없다 … 충분히 혼자 즐기면서 작업을 하고 스스로 질문을 제기한다 ..  (20쪽/토마스 데만트)
.. 찍기 전엔 뭘 찍을지 절대 모른다. 촬영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 오래 전에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게 최고인지 끝내 골라낼 수 없었다 … 사진도 똑같다. 당신 안에 없으면 없다.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 남들이 내 사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사진들을 보며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  (24, 31, 32쪽/윌리엄 이글스턴)

 

 


  내가 좋아하는 삶은 내가 좋아하는 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사진이 있으면, 이들 그림이나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느끼기에 어떤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읽으면서 흐뭇하게 웃거나 시원하게 울 수 있습니다.


  글 한 줄은 글을 쓴 사람 넋을 담는 거울입니다. 그림 한 점은 그림을 그린 사람 얼을 담는 그릇입니다. 사진 한 장은 사진을 찍은 사람 뜻을 담는 주머니입니다. 좋아하는 삶을 누리면서 좋은 넋 빛나는 글을 빚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즐기면서 좋은 얼 눈부신 그림을 빚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나누면서 좋은 뜻 자라나는 사진을 빚습니다.


  마음에 앙금이 있으면, 글을 쓰면서 앙금이 스며듭니다. 마음에 생채기가 있으면, 그림을 그리면서 생채기가 배어듭니다. 마음에 얼룩이 있으면, 사진을 찍으면서 얼룩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앙금이 있대서 덜 좋거나 더 나쁜 글이 아니에요. 생채기가 있으니 볼 만하지 않거나 못마땅한 그림이 아니에요. 얼룩이 있대서 볼썽사납거나 아쉬운 사진이 아니에요.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라면 어떠한 글이라도 좋아요. 스스로 아끼는 삶이라면 어떠한 그림이라도 아낄 만해요. 스스로 사랑하는 삶이라면 어떠한 사진이라도 사랑스러워요.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는 글인 만큼, 나는 내가 읽으려고 글을 씁니다. 스스로 내 삶을 짚는 그림인 만큼, 나는 내가 읽으려고 그림을 그립니다. 스스로 내 삶을 아로새기는 사진인 만큼, 나는 내가 읽으려고 사진을 찍습니다.


.. 스스로 모든 것을 차근차근 실제로 해 보면서 ‘발견’해야 한다 … 그들의 사진 속에서 감지되는 강렬한 미적 감수성은 서구의 환경과 기술에 부응할 뿐이지 내가 살고 있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 연작의 장점은 좋든 싫든 전부 안고 가는 것이다 … 내 생각에 사진가가 되려면 먼저 인생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삶이 겪어내야 하는 상처들을 사진으로 포용해야 한다. 순수하고 따뜻한 영혼은 순수하고 따뜻한 작품을 만들게 된다 ..  (34, 37, 40쪽/보리스 미하일로프)
.. 예술대학이란 쓰레기로 가득 찬 곳 같았다 … 애정이 있다면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저 그들에게 다가서면 된다 ..  (146, 149쪽/랜킨)

 

 


  사랑하는 삶을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을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을 언제나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언제나 찍는 사진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늘부터 즐겁게 언제나 찍는 사진입니다.


  사진기를 쥔 손에는 고운 사랑이 감돕니다.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눈에는 고운 사랑이 맺힙니다. 사진기를 움직이는 마음에는 고운 사랑이 빛납니다.


  누군가 이런저런 모습을 찍어 달라고 바라기에 찍어 주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런저런 모습을 찍어 달라 바라기에 사진 한 장 찍어 주니 돈을 건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누군가 수박이나 오이가 먹고 싶다 하기에, 내 밭뙈기에서 수박이랑 오이를 길러 누군가한테 건네니까, 이녁이 나한테 값을 치러 줄 수 있어요. 그런데 나는 누군가한테 주려고 수박이랑 오이를 기를 수 있지만, 나부터 스스로 수박이랑 오이를 맛나게 먹고 싶으니 수박이랑 오이를 길러요. 남한테 주기 앞서 나부터 즐겁게 먹을 수박이랑 오이예요.


  처음부터 남한테만 팔려고 수박이랑 오이를 기를 때하고, 내가 먹으려고 수박이랑 오이를 기를 때에는 사뭇 다릅니다. 내가 먹고 내 아이들이 먹는다 할 때하고, 낯도 이름도 절도 모르는 사람이 먹는다 할 때에는, 기르는 매무새가 사뭇 달라져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키운 수박이나 오이’가 자그맣거나 겉모양이 못생겼다면 돈을 치러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살과 속맛이 아닌 겉모습으로 재거나 따질 뿐 아니라, 오직 돈값으로 살핍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내가 키운 수박이나 오이’가 커다랗든 자그맣든 속살과 속맛이 좋은 녀석을 살핍니다. 몸으로 받아들여 목숨을 잇는 먹을거리인 만큼, 돈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며 찍는 사진일 때에는 내 사진 한 장에 값이 얼마라고 붙이지 못합니다. 내 사진 한 장은 100원도 아니지만 100억도 아닙니다. 내 사진 한 장은 그저 ‘내 사진 한 장’이면서 ‘내 목숨 한 가지’예요.


.. 내 경우 고작 스물네 살의 나이에, 아무리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해도 곧바로 독자적인 자기 세계가 구축될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스스로 당대 사진가 그룹 선두에 속한다는 자만심이 생기더라 … 요즘 사진가들이 사진을 팔아서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긴 하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이는 시장 안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 스티븐 쇼어의 사진처럼 보이는 사진들을 계속 찍고 싶진 않다. 늘 내가 해 왔던 대로, 나한테 흥미로운 무언가를 찍을 거다 … 내가 찍은 미국의 공간들이 바로 내 모습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47, 48, 49쪽/스티븐 쇼어)
.. 누구나 필름 100통으로 사진을 찍으면 적어도 훌륭한 사진 한 장은 나오게 마련이지만 그 한 장만으로 예술가가 되지는 않는다 … 긴 안목으로 보자면, 사진이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쇼킹하면 지겨워진다. 겉모습보다 내면의 깊이가 중요하다 ..  (236쪽/루돌프 키켄)

 

 


  목숨을 살찌우는 밥을 키우는 일이기에, 내 밭뙈기에는 허튼 것이 깃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를테면,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나 공항이나 송전탑이나 발전소나 골프장이나 공장 따위가 내 밭뙈기 둘레에 깃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누군가 담배꽁초 하나라도 내 밭뙈기에 버린다면 아주 끔찍합니다. 나 또한 담배꽁초이든 비닐봉지 하나이든 아무 데나 버릴 수 없습니다. 나한테 내 밭뙈기가 대수롭듯, 남한테도 남들 밭뙈기가 대수롭습니다. 나는 내 사진을 가장 고운 사랑으로 아끼고, 남들은 남들대로 이녁 사진을 이녁 가장 고운 사랑으로 아끼기 마련이에요.


  사진을 찍는 한 사람으로 생각해 봅니다. 내 사진 한 장에는 내 온 꿈과 숨과 넋을 품습니다. 내 사진 한 장에는 내 온갖 생각이랑 사랑이랑 마음이랑 믿음을 담습니다.


  사랑을 찍는 사진이기에 내 사랑이 한결같이 어여삐 빛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랑을 찍는 사진인 터라 내 사랑이 어디에서나 아리땁게 따순 손길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내가 찍는 사진


  앤 셀린 제이거 님이 엮은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를 읽습니다. 군말이지만, 이 책에서 들려주는 ‘사진쟁이 스물여덟 사람’ 이야기 가운데 두 사람 이야기는 이름을 잘못 적었습니다. 네덜란드사람 ‘Anton Corbijn’과 ‘Rineke Dijkstra’는 ‘안톤 코빈’이 아니요 ‘리네코 다익스트라’가 아니에요. 네덜란드사람 이름은 ‘안똔 꼬르베인’과 ‘리네께 데익스뜨라’입니다. 네덜란드말에서 ‘ij’는 홀소리이고, 소리값은 [ei]입니다. 한글맞춤법대로 적자면 ‘안톤 코르베인’과 ‘리네케 데익스트라’로 적어야 할 테고요. 한글맞춤법에서 외래어적기법은 ‘ㄸ’나 ‘ㄲ’를 받아들이지 않고 ‘ㅌ’와 ‘ㅋ’로만 적게 해요. ‘빠리’ 아닌 ‘파리’로 적도록 하고, ‘꼬냑’ 아닌 ‘코냑’으로 적도록 해요.


  아무튼, 책이름은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하고 적바림하지만, 사진은 찍지도 않으며 만들지도 않습니다. 책이름으로 이러한 말을 적은 뜻은 사진은 찍는 일도 아니요 만드는 일도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사진은 그예 ‘사진기를 손에 쥐어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누리는 삶’이니까, 따로 찍는다거나 만든다고 할 수 없어요. ‘살아간다’고 할 사진이에요.

 

 


.. 세상을 보는 시각은 배워서 얻는 게 아니다. 시각은 자신의 정체성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며, 이미지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즘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대개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진가 자신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진가의 영리한 아이디어로 가득 찬 이미지들이다 … 사진 고유의 본질은 잊혀져 가고 있다 … 그 대상의 본성을 드러내려면 끈덕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난 생활공간에서 찍는 인물 사진이 좋다. 그들이 사는 집에서 찍는 게 최상이다 …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을 찍고 싶다 … 가난이든 장애든 역시 상처를 품고 있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들이다. 아름다움이 당당히 아름다움을 드러내듯, 그들도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을 나눌 권리가 있다 ..  (54, 56, 59, 60쪽/메리 엘렌 마크)
.. 사진가의 첫 번째 책은 대단히 훌륭한 경우가 많다. 보통 10년은 걸리니까 ..  (185쪽/알렉 소스)


  사진으로 살아갑니다. 사진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진으로서 살아갑니다. 사진처럼 살아갑니다. 사진하고 어깨동무하며 살아갑니다. 사진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사진하고 놀며 살아갑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합니다.


  마땅하겠지요. 삶이 고스란히 사진인데, 사진을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겠습니까. 삶은 누구도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해요. 스스로 살아가며 깨닫는 삶이에요. 삶이 그대로 사진인 만큼, 학교를 다니건 유학을 다녀오건 사진을 배우지 못해요.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가 사진인 터라, 스스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사진이에요. 스스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이요, 스스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꿈이고, 스스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대학교에는 사진학과가 있습니다. 문예창작학과가 있으며, 그림을 배우는 학과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가운데에도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과정을 두는 곳이 있어요. 사진은 배울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 하지만, 정작 사회를 들여다보면 ‘사진을 배우는’ 곳과 ‘사진을 가르치는’ 곳이 되게 많아요. 참말, 사진은 배울 수 있을까요? 참말, 사진은 가르칠 수 있을까요?

 


..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면 당신의 사진에 아무것도 담기질 않는다 … 수많은 젊은 사진가들이 형편없는 이유는, 생각을 충분히 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열정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사진이나 열심히 흉내내기 때문이다 ..  (67, 69쪽/마틴 파)
.. 패션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의지하는 신념을 표현하기에 좋은 도구다 … 나의 이야기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  (115쪽/엘렌 폰 운베르트)


  누가 가르쳐 주기에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가르쳤대서 사랑을 속삭이지 않습니다. 누가 가르친 대로 살을 섞거나 사랑을 꽃피우지 않아요. 스스로 이끄는 대로 사랑을 해요. 스스로 가장 꿈꾸거나 바라는 대로 사랑을 속삭여요.


  책에서 읽은 대로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없어요. 비디오에서 본 대로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는 없어요. 텔레비전에서 본 대로 비누를 묻혀 빨래를 비빔질하는 살림꾼은 없어요. 요리책이나 요리강좌에서 본 대로 밥을 하거나 반찬을 하는 살림꾼이 있을까요.


  젓가락질 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어요. 걸레질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어요. 걸음마를 가르칠 수 없어요. 한 발 두 발 떼도록 이끌 수는 있지만, 이렇게 걸으라느니 저렇게 걸으라느니, 이쪽으로 걸으라느니, 저쪽으로 걸으라느니, 하고 틀을 세워 가르칠 수 없어요. 걸음은 아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면서 스스로 익혀요.


  저기 하늘에 새가 날아간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켜야 비로소 ‘새가 날아가는구나’ 하고 깨닫지 않아요. 스스로 새를 바라보며 ‘새가 날아가네’ 하고 느낄 때에 비로소 깨달아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글·그림·사진은 글도 그림도 사진도 아니에요. 학교에서는 ‘돈을 버는 일자리’를 가르칠 뿐이에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 아닌 ‘돈을 버는 길’을 가르칠 뿐이에요. 연필을 놀리고 붓을 놀리며 사진기를 놀려서 ‘돈이 될 수 있는 길’이 어떠한가 하고 보여주면서 가르칠 뿐이에요. 대학교를 나와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가 되기도 하지만, 대학교를 나와 글쟁이도 그림쟁이도 사진쟁이도 못 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을 알아차려야 해요. 대학교를 안 나오고도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가 되는 사람들을 알아보아야 해요. 글쟁이는 어떻게 글을 쓸까요. 그림쟁이는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요. 사진쟁이는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요.


  운전면허증을 따야 자동차를 몰 수 있지 않아요. 처음부터 운전면허증 따위는 없었어요. 자전거를 탈 때에 자전거면허증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슬기롭게 익히고 아름답게 배우면서 탈 수 있어야 비로소 자전거예요. 스스로 즐거우면서 내가 디딘 이 땅 이웃과 동무가 나란히 즐거울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전거를 즐겁게 사랑하면서 타는 길이에요.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스스로한테’도 ‘이웃과 동무한테’도 즐겁게 얼크러지는 길을 헤아리려 하지 않으니까 면허증이 생기고 신호등이 생겨요. 그런데, 면허증이나 신호등이 생긴대서 즐겁게 누리는 길을 찾아가지 않아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떠한가요. 공모전에서 상장을 타서 점수를 높이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이런저런 사진모임에 회원으로 들어가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돈값으로 꽤 훌륭하다는 장비를 갖추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필름 천 통이나 만 통쯤 찍으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어느 스튜디오에 들어가거나 스스로 스튜디오를 만들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신문사나 잡지사에 들어가 기자가 되면 사진쟁이가 되나요.


  그러니까, 사진기자란 없어요. 기자만 있어요. 기자 가운데 사진기를 들고 취재하는 사람이기에 ‘사진기자’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사진’기자란 없어요. 사진기를 손에 쥔 ‘직업인’이 있을 뿐이에요.


  사진작가도 없어요. 작가만 있어요. 작가 가운데 사진기를 들고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사람이니까 ‘사진작가’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사진’작가란 없어요. 사진기를 손에 쥔 ‘작가’가 있을 뿐이에요.

 

 


.. 내 작업은 바로 내 삶의 모습이다. 나는 내 삶을 이루는 요소들, 고향같이 편안한 곳, 사상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의 현장을 촬영한다 … 그들의 삶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찍는 것이다 … 우리가 하는 일에 열중하고 애정을 가질수록 우리가 다가가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진다.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적용되는 얘기다. 어떤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대상에 대한 존중 없이 서둘러 일을 끝내면 사진 안에 거리감과 냉담함이 그대로 실린다. 하지만 당신이 대상을 섬세하게 배려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한다면 이미지의 품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 철학보다는 스스로 배우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사진가가 된다는 것은 그 일을 통해 배우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 사진가에게 가장 호화로운 생활은 자신의 촬영 대상과 하루 종일이든 일 주일 내내든 함께 있는 것이다 … 사진가들이 기껏 와서 두 시간 동안 찍고 가는 것을 보면 못마땅하다. 관점이 매우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  (78, 79, 80쪽/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은 만들지 못해요. 사진은 찍지 못해요. 사진은 스스로 태어나요.


  사진은 만든대서 빛나지 않아요. 사진은 찍는다고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진은 스스로 맑게 빛나고, 사진은 스스로 사랑스레 이루어져요.


  내 삶으로 빚는 사진이에요. 내 삶이 고스란히 사진이라는 옷을 입어요. 내 삶이 거듭나면서 이루어지는 사진이에요. 내 삶이 하나하나 알알이 빛나면서 사진이 되어요.


..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  (106쪽/마리오 소렌티)

 


  사진을 창작하는 길이나 사진을 비평하는 길이란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삶이거든요. 내 삶을 창작하거나 비평하는 길이 따로 없듯이, 사진을 창작하거나 비평하는 길이 따로 없어요. 내 삶은 내가 꿈꾸는 결과 무늬로 차근차근 이루면서 스스로 누려요. 내 사진이라 한다면, 내가 꿈꾸는 결과 무늬로 차근차근 이루면서 스스로 누리겠지요.


  이렇게 찍어야 사진이 되지 않아요. 저렇게 찍어야 예술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읽어야 비평이 되지 않아요. 저렇게 말해야 평론이 되지 않아요.


  사진에는 이론이 없어요. 역사에도, 정치에도, 문화에도, 그리고 삶에도 이론이 없어요.


  사랑에 이론이 없고, 사랑에 비평이 없어요. 오직 내 온몸으로 부딪히고 내 온마음으로 얼싸안는 사랑 하나만 있어요. 사진은, 사랑하는 삶을 찍으면서 태어나는 만큼, 내 온몸으로 노래하는 사랑과 내 온마음으로 춤추는 사랑이 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하든 모두 사진이 돼요. 내가 무엇을 하든 늘 사랑이고, 내가 무엇을 하든 늘 사진이에요.


  사진기라는 연장을 다뤄야 사진을 얻지 않아요. 사진은 그림으로도 나타낼 수 있어요. 사진은 글로도 보여줄 수 있어요. 사진은 노래나 춤으로도 드러낼 수 있어요. 사진을 영화나 연극으로 함께할 수 있어요.


  밥 한 그릇 먹으며 사진을 느껴요. 이야기꽃 피우며 사진을 맞아들여요. 파리 한 마리를 잡을 적에도, 풀 한 포기 뜯을 때에도, 늘 사진이에요. 내가 사진을 생각하면 모두 사진이 돼요. 파리가 벽에 붙은 모습을 사진기로 담아야 사진이 되지 않아요. 아이 볼에 살짝 내려앉은 파리를 가만히 바라보아도 사진이에요.


  빛을 보고 그림자를 봅니다. 빛과 그림자가 얼크러지는 흐름을 봅니다. 빛과 그림자가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빚는 삶을 봅니다. 내 삶을 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봅니다. 사진은 노상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잠자는 사진을 깨운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결같이 펄떡펄떡 숨쉬는 상큼하고 멋스러운 사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4345.7.16.달.ㅎㄲㅅㄱ)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최종규 . 2012)

 

 

덤. 한국 번역책과 외국책은 겉표지가 다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