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이끄는 글쓰기

 


  나는 늘 글을 새로 쓰려고 생각합니다. 누가 ‘왜?’라고 묻는다면, ‘나는 늘 새롭게 살아가니까’ 하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모레와 글피가 달라요. 오늘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다르며, 아침에서도 바로 이때와 바로 뒤가 달라요. 1분 1초가 다른 만큼, ‘글을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으며 연필을 쥐면 그때그때 새롭다 싶은 글을 씁니다.


  글쓰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윗몸일으키기는 힘들지 않습니다. 달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밥하기는 힘들지 않습니다. 숨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햇볕쬐기는 힘들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넋과 매무새 되어 마주하느냐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누구나 늘 하는 일이요, 누구라도 스스럼없이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야구선수라 할 적에, 나는 공을 잘 던질 수 있고 잘 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공을 잘 던진다 해서, 이른바 ‘방어율 0.1’이나 ‘방어율 2.0’이 될 만큼 던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던지고 싶은 만큼 즐겁게 던지면서 공놀이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공을 잘 친다 해서, 이른바 ‘타율 3할’이나 ‘타율 2할8푼’이 될 만큼 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치고 싶은 만큼 실컷 치면서 공놀이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기쁘게 글을 씁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대로 즐거이 삶을 누립니다. 삶 따라 글이 태어나고, 삶 따라 사랑이 싹틉니다. 삶 따라 말을 영글고, 삶 따라 꿈을 이룹니다. 4345.1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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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책이 되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책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책이고, 내 옆지기와 아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책입니다. 책이란 삶이고 슬기이며 꿈이요 사랑입니다. 곧, 책읽기라 할 때에는 삶읽기이고 슬기읽기이며 꿈읽기요 사랑읽기입니다. 책 한 권에서 앎조각이나 정보조각을 읽지는 않습니다. 앎조각이나 정보조각은 그때그때 스쳐 지나가듯 훑는 부스러기입니다. 이를테면 정치꾼 아무개 지지율이라든지, 경제성장율이라든지, 주식시세표라든지, 방송편성표라든지, 사람살이에 어떠한 이바지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앎조각 저런 정보조각이란 삶도 슬기도 꿈도 사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깃들며 오래도록 아로새길 만한 대목이란 오직 삶과 슬기와 꿈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는 까닭은 글을 쓰는 사람 스스로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반갑거나 기쁘거나 좋거나 흐뭇하기 때문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 스스로 삶을 곱게 누리거나 꿈을 아리답게 펼치거나 사랑을 따스히 나누거나 슬기를 멋스러이 북돋우기 때문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면서 서로를 아낍니다.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은 삶을 알뜰살뜰 여미면서 하루하루 빛냅니다. 하루하루 빛내는 동안 슬기가 자라고, 슬기가 자라면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밭에 씨앗을 심으면서, 밭에서 푸성귀를 거두면서, 밥상을 차리면서, 밥을 나누면서, 밥을 먹고 나서 하늘바라기를 하는 동안,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면서, 사람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빚습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쁜 삶이 되도록 가꾸고, 내 마음에 꿈이 자라도록 이끌며, 내 마음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하도록 살찌우다가는, 내 마음이 슬기롭게 환하도록 웃음꽃을 터뜨릴 적에, 바야흐로 책읽기입니다. 나는 스스로 책이고, 당신 또한 스스로 책입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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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오리떼

 


  일산집에서 나흘째 묵는다. 어제와 오늘 아침나절에 오리떼 소리를 듣는다. 웬 오리떼 소리가 나는가 하고 궁금해 바깥으로 나오면, 어디에선가 스물∼서른 마리쯤 되는 오리떼가 하늘을 훨훨 날며 논다.


  옆지기 어버이가 살아가는 일산집은 아파트숲하고 멀찍이 떨어진다. 변두리에서도 변두리라 할 일산 언저리인데, 이 둘레는 거의 논밭이다. 아마 논밭 사이를 흐르는 냇물에서 먹이를 찾는지 모르고, 조그마한 못물이 있어 그곳에서 먹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 오리한테는 먹이 있고 물이 있으면 쉴 자리가 될 테니, 이러저러한 데에서 날갯짓을 쉬면서 배를 채우겠지.


  큰아이한테 살그머니 묻는다. “벼리야,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니?” “음, 새소리요.” “오리야. 새는 새인데 오리야.” “오리요?”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마실을 나왔는데, 이렇게 아침나절에 오리떼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반갑다. 도시가 커지도 또 커진다 하더라도 도시 한복판에 논밭이 있고 냇물이 있으며 숲이 있으면 얼마나 어여쁠까. 사람만 돈을 버는 터전인 도시가 아니라, 사람도 푸르게 숨을 쉬고 들짐승과 날짐승도 곱게 깃을 들일 만한 예쁜 보금자리가 도시 한복판에도 넉넉히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4345.1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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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숲에서
신 벗고
해바라기 하는데

 

작은아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풀거미

 

내 고무신에
살짝 들어와
논다.

 

아서라,
예서
집 짓지는 말그라.

 


4345.10.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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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5] 나이읽기
― 사람을 보는 눈길, 허울을 보는 눈매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를 다니면 둘레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귀엽다고 말하다가도 으레 나이를 묻습니다. “너 몇 살이니?” 아이 앞에서 적어도 ‘-요’나마 붙여 “몇 살이에요?” 하고 묻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당신이 아이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처음부터 말을 놓고 들어옵니다.


  아이와 함께 다니는 다른 어른도, 아이 없이 혼자 다니는 다른 어른도, 으레 우리 아이더러 “몇 살”인가를 물을 뿐, 정작 이름을 묻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느 모임자리에서 조금 오래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이름을 묻기는 하되, 나이부터 먼저 묻고 나서 이름을 묻습니다.


  아이들 나이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는 어른일까요. 나이를 알아서 무엇을 할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이들 나이 하나만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렇다고 아이들 나이를 묻고 나서 잘 되새기지 않아요. 쉽게 묻고 쉽게 잊어요. 다시 쉽게 묻고 또 쉽게 잊어요.

  알고 싶어서 묻지는 않겠지요. 잘 되새기려고 묻지는 않겠지요. 버릇처럼 묻습니다. 서로 ‘높고 낮음(위계)’을 나누려고 묻습니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 다니는 어른들은 나이를 묻고 나서 저희 아이랑 ‘숫자 대기’를 합니다. 한쪽이 나이가 더 많으면 누나이니 오빠이니 형이니 동생이니 언니이니 하고 부름말을 틀짓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나 회사나 공공기관을 들여다보면, 이들 조직은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이른바 ‘호봉’이라고 해서, 얼마나 오래 조직에 몸을 담갔느냐를 놓고 ‘나이 매기기’를 합니다. 먼저 들어와서 조금 더 조직살이를 했으면 ‘어른(또는 선배)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학교에서는 ‘학년’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중학교 몇 학년, 고등학교 몇 학년, 이렇게 학년 나이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다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은 틀에 가두고는 줄을 세웁니다. 예전에는 일고여덟 살쯤 될 무렵에야 비로소 ‘같은 나이 줄세우기’를 했으나, 요즈음에는 갓난쟁이마저 보육원에 집어넣는 흐름이기에, 이 나라 아이들은 한두 살일 적부터 ‘같은 나이 줄세우기’에 들볶입니다. 키도 마음도 생각도 앎도 다른 아이들이요, 몸도 팔다리도 눈썰미도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이 생긴 교실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앉아야 할 적에는 ‘번호로 부르는 숫자’를 받고는 똑같은 틀로 다스려집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관리 대상’이 돼요.


  아이들은 키가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집이 커집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키와 몸무게와 가슴둘레와 이것저것 숫자로 꼬치꼬치 따지고 잽니다. 체력을 재고 시험을 치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무섭게 저희 이름을 잊고, ‘아이한테 주어진 번호에 따라 끝없이 따지고 재고 매기고 붙이는 숫자’에 따라 다스려집니다. 이를테면 몇 살에 몇 센티미터 몇 킬로그램, 몇 살에 달리기 몇 초 팔굽혀펴기 몇 차례, 몇 살에 산수 몇 점 국어 몇 점, 몇 살에 던지기 몇 미터 행동발달사항 몇 점, 몇 살에 봉사활동 몇 점 영어능력이나 한자능력 몇 급 …….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저희 이름을 잊고 숫자를 외웁니다. 저 먼 데 있는 푸른숲 잣나무에 앉은 꾀꼬리를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시력점수 2.0이라느니 1.0이라느니 0.1이라느니 또 얼마라느니 하는 숫자를 외웁니다. 책을 읽었으면 어떠한 책을 읽으며 가슴속에 어떤 꿈과 사랑이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 아름답겠지만, 몇 권을 읽었는지를 따지고 주인공과 줄거리 외우기에만 휩쓸립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푸름이한테 “너 몇 학년이니?” 하고 묻기보다는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을 때에 한결 사람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푸름이는 ‘중3’이나 ‘고2’가 아니라 ‘열여섯 살 푸름이’나 ‘열여덟 살 푸름이’라 할 때에 걸맞을 테니까요. 버스를 타거나 어느 시설을 쓸 적에 ‘학생 삯’ 아닌 ‘청소년 삯’을 따져야 알맞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대목도 차근차근 더 헤아린다면, ‘어린이 삯’과 ‘푸름이 삯’과 ‘어른 삯’과 ‘어르신 삯’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요. 다시금 더 헤아리면, 이런저런 나이나 모습으로 가르지 말고 누구나 똑같은 삯으로 나눈다든지 아예 삯을 없애면 훨씬 나아요.


  이제 대학생이 퍽 많이 늘어났기 때문인지, 어른들 사이에서는 “몇 학번이셔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어 보려면 차라리 ‘나이’를 물을 노릇이건만, 나이 아닌 ‘학력 신분’을 물어요. 스스로 학력 신분을 누리는 계급이기에 이처럼 물을 텐데, 삶을 즐거이 누리지 못하는 모습은 더없이 슬프구나 싶어요.


  한겨레 옛말에 ‘개밥에 도토리’가 있고, ‘따돌리다’나 ‘돌림뱅이’가 있습니다. 우리 겨레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들볶던 발자국이 있구나 싶은데,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 권력자와 권력자 아닌 사람, 땅임자와 땅임자 아닌 사람, 이렇게 틀이 갈린 나머지 ‘개밥에 도토리’ 같은 말마디가 생겼구나 싶어요.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이 갈리지 않고 서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아끼거나 사랑했다면 ‘따돌리다’나 ‘괴롭히다’라는 낱말조차 안 태어났겠지요. 그러니까, 한겨레가 서로를 믿고 아끼는 삶을 누렸으면 ‘싸움’이나 ‘미움’ 같은 낱말은 안 태어나요. 자꾸자꾸 슬픈 수렁으로 빠지니까 ‘전쟁’이나 ‘(전쟁)무기’ 같은 한자말을 끌어들입니다.


  해마다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철이 드는 일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살 나이가 들며 생각을 깊이 다스리고 꿈을 넓게 펼치는 일은 아리땁다고 느낍니다. 나이란, 밥그릇 숫자에 따라 금을 죽 긋고는 높고낮은 지위나 신분이나 계급을 나누라는 데에 쓰라고 생기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빛내는 한 살 두 살이 모여 ‘철’이 되고 ‘슬기’가 되기에, 먼먼 옛날부터 나이값을 말하면서 나잇살을 헤아렸으리라 느낍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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