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까치꽃 논둑
[고흥살이 8] 새봄 알리는 작은 들꽃

 


 며칠 몹시 따스한 저녁을 누렸습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고도 방 온도가 18도였어요. 이렇게 따스한 나날이라면 틀림없이 들판 어딘가에 꽃이 피었을 텐데 싶어 대문을 열고 집 앞 논둑에 섭니다. 참말 그러면 그렇지. 대문 앞 논둑에는 줄지어 봄까치꽃이 파랗고 작은 꽃잎을 터뜨렸어요.

 

 언제부터 꽃망울을 터뜨렸을까? 오늘 알아본 꽃망울이 이만큼이라면 훨씬 앞서 꽃망울 터뜨렸겠지. 아직 따스한 바람이 불기 앞서부터 꽃망울 터뜨리지 않았을까? 눈이 펑펑 쏟아지며 금세 녹던 며칠 앞서에도 이 꽃잎들은 눈을 맞으면서 맑은 파랑을 듬뿍 베풀지 않았을까?

 

 논둑에는 봄까치꽃이라면 멧자락에는 무슨 꽃이 피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따스한 나날이니까 집식구 모두 멧자락 마실을 가며 봄꽃 구경을 해야겠어요.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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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0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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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슴속 아름다운 별빛
 [만화책 즐겨읽기 120]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20)》

 


 밤하늘 별빛이 밝습니다. 다만, 밤이 되어 온누리가 조용히 어두운 데에서만 밤별이 빛납니다. 밤이 되었어도 밤 같지 않게 훤한 전깃불빛이 번쩍거린다면 밤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훤한 전깃불빛이 없더라도 찻길에 자동차들 줄줄이 늘어선다면 밤별은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낮에는 땅에서 아이들 눈빛이 밝습니다. 아이들 눈은 맑은 꿈과 밝은 사랑을 두루 나누면서 빛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른들은 어린 나날부터 고운 넋을 고스란히 건사한다면 아이들하고 나란히 빛나는 눈길로 온누리를 바라봅니다.

 

 온누리 어느 곳에나 빛이 있습니다.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습니다. 바다에도 있고 멧자락에도 있습니다. 빛은 아이와 어른을 골고루 살립니다. 빛은 풀과 나무와 꽃을 살립니다. 빛은 바람을 타고 마을을 두루 흐릅니다. 빛은 물결을 따라 골골샅샅 누빕니다. 빛은 고운 목숨이 되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빛은 예쁜 꿈이 되어 내 마음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 ‘자신의 피아노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화가 됐어. 그때 평소처럼 노미스로 쳤다면 탈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다. 아마도.’ (10∼11쪽)
- “그런,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난 승부에 진 거니까. 비웃는다고 해서 딱히.” “승부란 생각 안 해.” “응, 카이는 그렇겠지.” (25쪽)

 


 날마다 먹는 밥은 쌀알입니다. 쌀알은 겨를 벗긴 볍씨입니다. 볍씨는 벼가 맺은 열매입니다. 벼는 수백 볍씨를 맺으며 제 씨앗을 퍼뜨리려 합니다. 다른 풀도 벼처럼 수백 씨앗을 맺어요. 사람은 이 가운데 벼나 밀을 즐겨먹으며 목숨을 이어요. 곰곰이 살피면 ‘풀씨’를 먹으며 살아간다 할 텐데, 겨를 벗긴 볍씨 가운데 노란 씨눈까지 깎아내어 먹는다면 막상 목숨을 먹는다 하기 어려워요. 밥을 먹을 때에는 노란 씨눈이 싱그러이 살아숨쉬는 쌀을 먹어야 해요.

 

 시금치나 배추를 먹을 때에는 잎사귀를 먹습니다. 무나 당근을 먹을 때에는 뿌리를 먹습니다. 감자랑 고구마는 밭흙을 캐내어 먹습니다. 나무에 달린 능금이랑 배랑 복숭아랑 포도를 따서 먹습니다. 풀을 먹느냐 고기를 먹느냐는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제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쉽게 얻는 먹을거리로 목숨을 지킵니다. 들판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들판에서 쉽게 얻는 먹을거리로 목숨을 지켜요.

 

 그러면, 도시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은 무슨 먹을거리를 쉽게 얻나요? 과자? 케익? 햄버거? 피자? 라면? 세겹살? 돼지고기튀김? 닭튀김?

 

 아이들은 저마다 쉽게 얻는 먹을거리에 따라 숨결을 얻습니다. 바닷것을 얻어 목숨을 지키면 바다에서 살아숨쉬는 넋을 받아들이며 목숨을 북돋웁니다. 들것을 얻어 목숨을 지키면 들에서 살아숨쉬는 얼을 맞아들이며 목숨을 살찌워요. 그렇다면, 도시에서 살아가며 가게에서 과자랑 가공식품을 사다 먹는 아이들은 어떤 것에서 어떤 넋이나 얼을 받아먹는가요. 어떤 꿈을 키우고 어떤 사랑을 돌보는가요.

 


- “2차 때의 연주. 슈우헤이의 새로운 피아노였지. 최고로 멋진 연주였어.” “패배한 날 위로해 주는 거야? 동정받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아니야! 위로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 (27∼28쪽)
- ‘우리에겐 평생을 걸고 자신의 음악을 추구할 수 있다는 행복이 있는데도, 물론 평생을 추구해도 음악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건, 짧은 인간의 생애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둘 수 없는 성과겠지만.’ (87쪽)
- ‘아지노 선생님과 카이를 연결한 건 나였다고 분해 했지만, 그건 잘못된 거였어. 아지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카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거야. 카이가 무대에 서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까지 쫓아올 수도 없었을 테고, 이렇게 성장할 수도 없었을 거야.’ (120쪽)


 이시키 마코토 님 만화책 《피아노의 숲》 스무 권째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피아노의 숲》에 나오는 ‘카이’는 숲 아이입니다. 카이는 ‘숲 아이’답게 숲에서 자라난 넋을 피아노 가락으로 옮깁니다. 숲에서 스스로 사랑하고 믿으며 꿈꾸던 나날을 고스란히 들려주어요. 사람들이 카이 피아노 선율에 가슴이 저릿저릿 울린다면, 사람들은 ‘숲을 잃거나 잊은 꿈과 사랑’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숲에서 받아들이던 푸른 넋을 도시에서 지내며 오래도록 잊거나 뒤로 젖히느라 정작 사람들 가슴에 촉촉히 젖어들어야 하던 푸른 이야기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아노의 숲》 스무 권째에서 카이는 동무 슈우헤이한테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얘기해요. “2차 때의 연주. 슈우헤이의 새로운 피아노였지. 최고로 멋진 연주였어.” 하고요. 슈우헤이는 이제껏 ‘피아노 교본’에 실린 대로만 피아노를 두들겼어요. 울타리에 갇힌 슈우헤이였고, 틀에 사로잡힌 슈우헤이였어요. 그런데 이제 슈우헤이는 이녁 나름대로 사랑하면서 이녁 스스로 꿈꾸던 노래가락을 비로소 조금 선보여요. 카이는 이 노랫가락을 놓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도 이 노랫가락을 즐겼어요. 슈우헤이도 피아노를 치면서 이 가락에 깊이 젖어들었어요(19권에서).

 

 다만, 슈우헤이가 되든 카이가 되든 심사위원이 되든 관객이 되든, 이 새로우며 좋은 노랫가락이 다음 경선까지 올라갈 만한 노랫가락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피아노를 치지 않았거든요. 처음에는 온통 틀에 사로잡힌 피아노에 물들었거든요.

 


- “나는 소우스케의 방임주의엔 찬성이지만, 돌이키기 늦어질까 두려워.” “방임은 아닌데요. 지켜보는 겁니다. 잘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으니까.” “정말인가? 카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 “하하, 거기까지는 무리겠지만, 도움이 필요한 때인지는 거의 알죠.” (67쪽)
- “네 아버지가 아파트 입구를 점거하고 있어. 빨리 전화해서 어떻게든 해 봐. 너, 어른스럽게 결과를 받아들여. 시위하듯이 행방을 감추다니. 그렇게도 부모에게서 걱정받고 싶어? 난 너 같은 응석받이 울보가 너무 싫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108∼109쪽)


 쇼팽이든 슈베르트이든 베토벤이든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대단히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 노래를 좋아하며 즐긴 사람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제 노래결을 생각하고 제 노래꿈을 빚으며 제 노래사랑을 펼친 사람들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노래결을 생각할 때에 아름다운 노래가 태어나요. 제 노래꿈을 빚을 때에 나부터 둘레 사람 누구나 기쁘게 들을 노래가 샘솟아요. 제 노래사랑을 펼칠 때에 내 삶이 아름다이 빛나면서 참다이 뿌리내립니다.

 

 카이한테는 숲 피아노입니다. 슈우헤이한테는 도시 피아노일 테지요.

 

 숲 피아노라서 더 뛰어날 수 없습니다. 도시 피아노라서 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건 저마다 사랑하며 꿈꾸는 빛을 누릴 수 있으면 됩니다. 어느 때이건 스스로 아끼며 보살피는 빛을 나눌 수 있으면 돼요.


- “슈, 슈우헤이는 남의 재능은 알아차리면서, 왜 자신의 재능은 모르는 걸까. 왠지 화가 나.” (36∼37쪽)
- “나는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던 것뿐이야.” (113쪽)
- ‘이 곡은 내게 잘 어울리는 작품이야! 나는, 어떻게든 이 곡을 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올라온걸! …… 첫 주자로 치는 건 운이 없는 거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 나는 이 곡을 누구보다도 빨리 치고 싶었어!’ (210, 212쪽)

 


 콩쿨 때문에 피아노를 친다면 덧없습니다. 대회 때문에 피아노를 연습한다면 슬픕니다. 연주회 때문에 피아노를 갈고닦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지만, 내가 피아노를 칠 때에는 ‘남들이 들으라’는 뜻이 아니거든요.

 

 남들이 들어 주면 고맙습니다. 남들이 사랑해 주면 기쁩니다. 그러나, 남들이 들어 주거나 사랑해 주기 앞서, 내가 치면서 내가 듣는 피아노예요. 내가 사랑하면서 내가 즐기는 피아노예요.

 

 내가 쓴 글은 남한테 읽히려는 글에 앞서 나 스스로 되읽는 글입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남한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라 내 삶을 아름다이 빛내고픈 꿈을 싣는 글입니다.

 

 카이는 숲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좋은 어머니와 좋은 이웃을 사귀었고 좋은 자연을 누렸습니다. 슈우헤이한테는 좋은 터전이나 이웃이 많지 않았다 할 테지만, 카이라고 하는 좋은 동무가 있어요. 팡 웨이한테든 소피한테든 다들 매한가지입니다. 좋은 터전 좋은 이웃 좋은 살붙이 좋은 동무한테서 사랑을 받은 꿈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피아노 가락으로 옮깁니다. 삶이 피아노가 되고, 피아노가 삶이 됩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20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2.2.10./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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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길 사진잔치 엽서

 


 2011년 12월 1일부터 2012년 1월 29일까지 인천 남구 도화동에 자리한 수봉도서관에서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이라는 이름으로 조그맣게 사진잔치를 열었다. 내 인천 골목 사진으로 인천 공공기관 한 곳에서 사진잔치를 열었기에 참 기뻤다. 사진잔치를 마친 사진들은 도서관 한쪽에 남겠지. 마음에 드는 사진을 누군가 챙길는지 모르고, 어쩌면 창고에 쌓여 먼지를 먹을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골목동네 이야기 한 자락 남을 수 있다고 느껴 고맙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인 인천이지만, 옆지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광명이다. 옆지기가 태어나 자란 광명은 들판이 있고 흙길이 있던 아스라한 골목동네였으나, 이제 광명은 온통 아파트누리로 탈바꿈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에는 골목동네가 곳곳에 많이 남기는 했어도, 온통 아파트누리로 한창 바뀐다. 갯벌을 메워 공항을 짓고 발전소를 지으며 새도시를 짓는다. 호젓한 골목동네에서 어여쁜 꽃송이 피어나기 너무 벅차다.

 

 나랑 옆지기가 나고 자란 터하고는 사뭇 멀디먼 전라남도 고흥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살아간다. 우리 네 식구는 이곳 고흥에서 뿌리를 박으며 살아갈 꿈을 키운다. 어디 멀리 나갈 일 없도록 살아가고, 애써 도시로 마실을 나가지도 않는다. 이리하여, 내 사진으로 사진잔치가 고향에서 열렸으나, 나랑 옆지기랑 아이들은 찾아가서 구경을 하지 못한다. 사진잔치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진잔치 때에 쓴 엽서를 받아서 구경한다.

 

 인천 골목길 사진을 찍어 사진잔치를 열고 사진책도 하나 내놓았는데, 나는 막상 ‘골목길’이라는 낱말은 잘 안 쓴다. 틀림없이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내가 골목길에서 바라보고 느끼며 함께 살아내던 이야기는 ‘골목꽃’이기 때문이다. 곧, 내 사진은 ‘골목길 사진’이 아니라 ‘골목꽃 사진’이다. 나는 골목길에서 ‘길’도 ‘풍경’도 ‘어린이’도 ‘할머니’도 ‘집’도 보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골목동네 보금자리를 환하게 밝히며 싱그러이 보듬는 꽃송이 하나만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꽃이 있어 골목길이 환하다. 꽃이 있어 시골마을이 훤하다. 꽃이 피어 골목동네에 열매와 새로운 씨앗이 맺는다. 꽃이 피어 시골자락에 열매랑 새로운 씨앗이 흐드러진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골목꽃 이야기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들여다보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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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2-23 17:24   좋아요 0 | URL
정겨운 골목길 풍경이네요!
우리 대구엔 아주 꼬불꼬불하고 좁다란, 일제시대 때 지은 집들도 있는 그런 골목들이 있어요. 갑자기 그런 골목이 그립네요.

파란놀 2012-02-23 19:01   좋아요 0 | URL
아, 대구에 계시군요.
대구에는 시청역과 동대구역 사이던가,
그쪽에 <대륙서점>이라고 하는 훌륭한 헌책방이 있어요.
경북대 뒷문에도 무시무시하게 책이 쌓인 헌책방이 있고요.

대구 골목길도 어여쁘다고 생각해요~

2012-02-25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2-02-24 21:31   좋아요 0 | URL
인천은 뭐랄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같아요.송도 신도시같은 경우는 정말 테크노밸리같단 생각이 드는 반면 옛 공단 지역은 과거 70년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것 같더군요.

파란놀 2012-02-25 22:05   좋아요 0 | URL
어디나 옛날과 오늘날이 함께 있는데,
인천은 좀 이런 편차가 되게 커요..
 


 짝양말 책읽기

 


 짝양말을 신은 아이가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아이는 한동안 조용하다. 나도 이때에는 숨을 살며시 돌리며 책장 조금 넘길 만하다. 밀린 다른 집일을 할 수 있지만, 이때에는 나도 조금은 쉬고 싶다.

 

 나도 한 차례 쉬며 방바닥에 모로 누워 책을 읽는다. 그러나 자꾸 짝양말에 눈이 간다. 아이가 예쁘게 놀 때에는 예쁘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내 종이책을 읽지 못하고야 만다. 사진기를 손에 쥔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말끄러미 바라본다. 곰곰이 돌이킨다. 나도 어린 날 짝양말 신기를 즐겼을까. 내가 짝양말을 신으려 하면 내 어머니는 어떤 낯빛이었을까. 빨래거리 늘어난다고 싫어하셨을까. 보기 안 좋으니 얼른 벗으라 하셨을까. 재미나다며 웃으셨을까.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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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2-23 17:32   좋아요 0 | URL
저도 저렇게 신었는데, 문제는,
다 큰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러고 싶었다는 거 아닙니까 ㅠㅠ
오래토록 짝짝이 양말을 신고 싶었던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엄격한 부모님과 언니'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된다,라면서 자꾸 못하게 야단치니까
일찍감치 졸업할 일을 오래 질질 끓었던 거 같아요.
(중딩 때는 어쩔 수 없이 양말은 짝으로 반듯하게 신고
운동화 끈을 연두와 초록, 노랑과 연두 이런 식으로 다르게 꿰 신었지요.
학교 갈 적엔 흰색으로요 ㅋㅋ)

저는 애들이 자라면서 하는 행동은 웬만한 건 그냥 둬요.
손가락 빨기 같은거요. 이것도 성장하면서 거치는 과정이니까요.
애들이 하고 싶은 만큼 하고 나면 안 하게 되더라구요.


파란놀 2012-02-23 18:48   좋아요 0 | URL
잘 맞추어도 좋으나
잘 맞춘다는 일이란
틀에 박히는 일이
아닌 줄을
사람들 스스로 잊도록
내몰리지 않느냐 싶어요.

곰곰이 생각하면
짝양말이란
아이들일 때부터 누구나 좋아하는 멋이라 할 테고,
이 멋은
'삐삐'가 그야말로 아름답게 보여주었어요~

아이들 어머니가 되어
짝양말을 신어도 좋지요~
 


 느끼는 글쓰기

 


 봄에 새로 돋는 잎사귀는 아주 반딱반딱합니다. 얼마나 반드르르한지 빗물 한 방울 톡 떨어지면 또르르 굴러 땅으로 떨어질 만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 새 잎사귀에 남지 않을 만합니다.

 

 아이들 볼을 만지면 내 손이 부끄럽습니다. 거칠고 투박하며 못생긴 내 손이 이 곱고 보드라운 아이들 볼을 만지다니, 하며 내 나이와 삶을 헤아립니다. 아이들은 사랑어린 말 한 마디에 사랑을 느끼며 자라고, 아이들은 미움박힌 말 한 마디에 미움을 느끼며 웁니다.

 

 겨울을 견디는 잎사귀를 가리켜 ‘늘푸른잎’이라 할 텐데, 늘푸른잎도 푸른 빛깔이지만, 새봄에 돋는 잎사귀처럼 싱그러이 옅은 풀빛이 아닙니다. 추위와 눈과 바람을 견딘 거칠고 투박한 풀빛이에요.

 

 요즈음 도시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나오는 자연 그림책을 장만해서 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자연 그림책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되지만, 자연 그림책을 읽을 도시 아이들이 자연을 얼마나 잘 사귈 수 있도록 만드는가 궁금해서 꾸준히 장만합니다.

 

 요즈음 자연 그림책은 그야말로 번쩍번쩍 무지개 같습니다. 빛깔이 초롱초롱합니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빼어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오는 자연 그림책을 우리 아이들한테 읽히고 싶다는 생각은 좀처럼 안 듭니다. 나라밖 자연 그림책도 그리 다르지는 않아요. 나 혼자 넘기다가는 조용히 덮고 아이한테 안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이웃한 일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자연 그림책은 아주 훌륭해서 늘 곁에 두기는 하지만, 일본 자연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어딘가 어설프거나 서글픈 모습이 있기는 비슷비슷합니다.

 

 봄잎은 여름잎이랑 다릅니다. 여름잎은 가을잎이랑 다릅니다. 가을잎은 겨울잎이랑 다릅니다. 이 다 다른 잎빛과 잎결과 잎무늬는 눈으로 바라본대서 그림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 다 다른 잎빛이랑 잎결이랑 잎무늬는 눈으로 쳐다본대서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손으로 만지며 느껴야 합니다. 입으로 씹으며 냄새를 느껴야 합니다. 늘 곁에서 지켜보며 느껴야 합니다. 가만히 볼따구니로 쓰다듬으며 느껴야 합니다.

 

 반딱반딱한 봄잎을 봄잎대로 그리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린 겨울 이긴 겨울잎을 겨울잎대로 그리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잎마다 다 다른 빠르기로 다 달리 물들며 가랑잎으로 바뀌는 잎사귀를 찬찬히 살펴 가을잎 빛깔을 살릴 줄 아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여름잎을 눈이 부실 뿐 아니라 마음을 환히 틔우도록 담을 줄 아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림으로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글로도, 잎사귀 한삶 고이 그려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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