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가볍게
사흘 만에 저잣마실을 나온다. 싱싱칸(냉장고) 없이 스무 해 남짓 살던 무렵에는 날마다 저잣마실을 했다. 집에 싱싱칸을 두더라도 두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에는 거의 날마다 저잣마실을 했다. 나를 빼더라도 세 사람이 누릴 밥살림이라면 그야말로 끝없이 장만하고 차리고 치우고 살펴야 한다. 오늘은 혼자 읍내로 가자니 두 아이는 “가볍게 지고 오셔요.” 하고 얘기한다.
나래터에 들러서 글월을 두 자락 보내고서 가게에 간다. 등짐에 이모저모 챙겨서 담는다. 천천히 걸으며 책을 읽다가, 다리를 쉴 잎물집에 간다. 할배 한 분이 그림(유튜브)을 큰소리로 본다. 목을 가다듬고 이맛살을 부드러이 푼다. “할아버지, 밖에서는 귀에 꽂고서 듣거나, 소리를 줄이셔야지요.” 할배는 아마 다른 거의 모든 시골내기처럼 시골집에 혼자일 듯싶다. 또래나 동무나 동생도 거의 흙으로 떠났으리라 느낀다. 이 할배를 고흥읍에서 스친 지 벌써 열일곱 해이니 그새 얼마나 많이 떠났을까.
시골할배는 글붓집(다이소)에서 고작 5000원이면 좋은 귓소리(이어폰)를 파는지 모를 수 있다. 이제는 면사무소나 읍사무소에서 어르신한테 하나씩 사주어야겠다고 느낀다. 어린이와 푸름이도 배움터에서 귓소리를 하나씩 사주기도 해야겠고. 숱한 할매할배에 어린이에 푸름이가 길이며 열린터(공공장소)이며 버스이며, 소리를 마구 키워서 듣거나 쳐다보거나 놀기 일쑤이다. 서울·큰고장에서는 이런 얼뜨기가 퍽 줄었지만, 서울·큰고장에도 아직 많고, 시골에는 철철 흘러넘친다.
우리는 열 살이나 열다섯 살뿐 아니라, 스물다섯과 서른다섯과 마흔다섯과 쉰다섯과 예순다섯과 일흔다섯과 여든다섯도, 또한 온다섯 살도 새배움(재교육)을 즐겁고 푸르고 가볍고 사랑스레 펼 수 있어야지 싶다. 사이(세대차)는 마땅히 있을 수밖에 없다. 다 다른 나이가 함께 모여서 도란도란 읽고 쓸 수 있기를 빈다. 다 다른 순이돌이가 한자리에 모여서 오순도순 책을 읽고서 글을 쓰는 살림길을 열어야지 싶다. 다 다른 갈래에 선 사람들이 나란히 모여서 곰곰이 이야기하고 차분히 뜻을 나누고 새롭게 길을 열 노릇이라고 본다.
서로 스스럼없이 만나고 말을 섞을 적에 집과 마을부터 살아난다. 목소리(주의주장)가 아닌,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길을 그리기에 즐겁다. 목소리만 내면서 안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곱씹어야 한다. ‘우리쪽(아군)’이 아니라면 아예 얼씬조차 않을 뿐 아니라, ‘한목소리(통제·강요)’만 있어야 한다고 여기느라 온나라가 갈가리 찢기고 싸우고 다투면서 삿대질이 춤춘다.
오직 사랑으로 만나는 순이돌이여야, 순이하고 돌이는 엄마랑 아빠란 이름을 새로 받으면서, 나란히 ‘어버이(어머니 + 아버지)’라는 새빛으로 일어서서 아기를 품는다. 사랑이 아닐 적에는 아기를 못 품고, ‘낳지’ 않는 마음이라서 ‘어른’이 아닌 ‘어른흉내’이다. 혼살림(비혼)이라면 이웃아이를 ‘낳은아이’로 바라보고 마주할 수 있을 적에 어른이다. 아이곁에 설 줄 모른다면, 이웃아이를 ‘우리집 아이’로 헤아릴 줄 모른다면, ‘엄마아빠(어버이)’란 자리에 있어도 철없기만 하다.
철들기에 사람이다. 철들지 않으면 ‘아직 사람이 아니’다. ‘아직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적에는 ‘날개돋이’를 못 한 채 밥그릇에 붙들린다는 뜻이다. 밥그릇을 놓을 줄 알아야, 내 밥그릇을 너한테 가만히 내밀면서 빙그레 웃음지을 줄 알아야, 비로소 철든 몸으로 일어서고, ‘철든 몸으로 일어서는 사람’한테만 ‘어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른으로 선 둘(순이돌이)이 만나서 아기를 품으면, 이때에 둘은 새롭게 ‘어버이’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갈수록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철없는 늙은이’만 늘어난다.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에 나오는 ‘럼피우스 할머니’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고, 짝을 맺은 바도 없지만, 마을 아이들이 모두 ‘할머니(한어미)’라고 부른다. ‘할머니·할아버지’라는 오랜 우리말은 ‘하늘엄마·하늘아빠’란 뜻인 줄 잊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다. 왜 영어에서도 ‘grand’를 붙여서 할매할배를 부르는지 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낳든 안 낳든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라야 “눈뜨고 깨달아 철든 사람”인 ‘어른’이다. 가볍게 함께 즐겁게 하늘을 날 수 있기를 빈다. 2026.1.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