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더스의 개 - 산하명작만화 3
위더 원작, 이향원 글 그림 / 산하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만화로 다시 태어나는 예쁜 이야기
 [만화책 즐겨읽기 31] 이향원, 《플랜더스의 개》(산하,2002)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에 나오는 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한식구로 지내며 우유수레를 끄는 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향원 님 그림에 나오는 개라든지 사람은 ‘서양사람을 그려도 서양사람 아닌 이향원 님이 그리는 한국사람’으로만 보입니다. 아마 다른 분이 《플랜더스의 개》를 그리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 보면 재미있으나 어찌 보면 모두들 ‘내 그림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내 그림틀이 있는데 내 그림틀을 벗어던지고 어수룩하게 ‘서양사람 모습을 잘 드러내는 모습’으로 그리려 하면 외려 어줍잖기 일쑤입니다. 그림이든 만화이든 정물그림이 아니요 판박이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한국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하고 서양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에는 느낌이 달라요. 서양사람이더라도 네덜란드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덴마크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미국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벨기에사람은 벨기에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빚으면 되고,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일구면 돼요.

 명작을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할 때에 으레 ‘명작 느낌을 살린다’는 테두리에 갇혀 그만 ‘내 그림틀’을 잊거나 잃곤 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명작 느낌을 살리려 해 보았자 명작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작은 명작 그대로 둘 때에만 명작 느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명작을 누군가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한다면, ‘만화로 다시 그리는 사람 숨결’에 따라서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명작을 다시 그린 만화’는 ‘명작을 다시 그려서 좋은 만화’가 되어야지 ‘명작 느낌 살아나도록 하는 만화’가 되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명작도 만화도 ‘명작 닮은 만화’도 되지 못합니다.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는 다른 사람 아닌 이향원 님 빛깔과 숨결과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난 ‘이향원 만화’여야 비로소 아름다우면서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 “할아버지, 모두들 루뱅 쪽으로 가는데 우리만 반대쪽으로 가고 있네요.” “저 사람들은 루뱅 축제에 가고 우린 집으로 가니까.” (19쪽)
- “파트라슈, 잘 알려줘.” “멍멍.” “넌 영리하니까 배달할 집을 모두 알고 있겠지?” “멍멍.” “새벽 바람이 이렇게 매서운 줄은 몰랐네.” “멍멍.” “호, 호. 추워. 아! 호, 호. 얼어붙는 것 같구나. 이렇게 추울 수가. 그동안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42∼43쪽)


 늘 바지만 입던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가 모처럼 치마를 입고 나온 《플랜더스의 개》를 보니 좀처럼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 예쁘지는 않으나,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싶습니다. 이향원 님이 가끔은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한테 치마를 입혀 주었다면 《플랜더스의 개》에서도 조금은 어울린다 느낄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을 생각하면서 치마를 입힐 수밖에 없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치마 아닌 바지 입은 알로아’가 나오는 새로운 만화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고, 치마 아닌 바지를 입은 살짝 왈가닥이거나 말괄량이 알로아가 나오도록 그렸어도 퍽 재미났거나 아름답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아직 만화영화로 〈플랜더스의 개〉를 보지 않은 어린이라면 이 만화책 줄거리를 모르겠지만,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장만하여 읽을 어른이라든지 이 만화책을 아이들한테 읽히려 하는 어른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만화로 새로 마주하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원작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새롭게 만화영화로 담곤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우주소년 아톰》이나 《블랙잭》은 데즈카 오사무 님이 살던 때에 손수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 님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새로운 느낌과 그림으로 새롭게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합니다.

 어느 작품이든 원작이 있되, 원작 멋과 맛을 살리면서 ‘새로 그리는 사람 손길과 이야기’가 살며시 깃듭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다시금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새로운 만화영화는 새로운 만화영화로 거듭 마주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 (네로 할아버지는 정직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우유 배달을 맡겼다. 그러나 일이 힘든 만큼 보수는 많지 않았다. 두 식구는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다.) (26쪽)
- (네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굶는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악물었다. 우유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46쪽)
- (두 폭의 그림은 루벤스의 대표작이었다. 그 그림엔 휘장이 늘 처져 있었다. 많은 돈을 내지 않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다.) (61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에서는 네로와 알로아가 있으며, 네로네 할아버지와 알로아네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이에 파트라슈라는 개가 있습니다. 네로와 알로아는 오랜 소꿉동무요 사랑을 꽃피우는 단짝이며, 네로네 할아버지는 착하며 바지런한 분이고 알로아네 아버지는 돈은 많으나 마음이 메마른 분입니다. 파트라슈는 이 사람들 사이에서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고, 네로네 할아버지처럼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기운이 줄어듭니다. 네로와 알로아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파트라슈는 늙은 개가 되니까요.

 네로는 어버이를 여의고 할아버지하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가난합니다. 가난하면서 굶주리고, 굶주리지만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습니다. 굶주리며 지내니 착한 파트라슈한테 줄 먹이도 모자라는데, 그래도 셋은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결을 예쁘게 잇습니다. 아무것 없는 살림이기에 집삯조차 내기 빠듯하고, 집삯조차 못 낼 뿐 아니라 밑천 하나 없으니 흙을 일군다든지 다른 어떤 일을 한다든지 꿈꾸지 못합니다.

 할아버지 뒤를 이어 우유배달 일을 하는 네로는 어느 때부터인가 ‘그림’을 봅니다. 배고픔을 잊게 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을 물끄러미 보면서, 네로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아름다운 터전을 그림으로 아름답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밥과 따뜻한 집과 좋은 일자리보다, 힘들며 고단한 삶에 가느다랗지만 어여쁜 빛줄기처럼 스며든 착한 그림을 꿈꿉니다.

 마음이 절로 움직이고 손이 절로 움직이기에 그리는 착한 그림입니다. 돈을 받고 파는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와 하늘과 들판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가난한 살림이어도 밝으며 씩씩한 네로 그대로, 누구한테든 따사로우며 애틋한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 “그림물감이 없으면 숯으로 그려도 되고요.” “숯은 금방 지워져 버릴 텐데. 화가는 돈을 벌지 못해. 늘 가난해.” “헤헷, 할아버지도. 돈은 일을 해서 벌면 되잖아요. 두고 보세요. 전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말 거예요.” (51쪽)
- “출렁이는 저 파도를 색으로 칠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텐데. 파트라슈, 나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 아! 그림물감만 있으면 저 고동 소리도 그림 속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56∼57쪽)
- (네로는 틈만 있으면 숯부스러기로 눈에 띄는 것을 모두 그렸다. 하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색깔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63쪽)
- ‘알로아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그냥 보고 말 수는 없어.’ “알로아, 그대로 가만 있어.” “나를 그리려고?” “아주 아름다워. 멋지게 그려 볼게.” (65쪽)
- (정성 들여 그린 알로아의 그림을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그렇지?” (68∼69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는 네로가 네로네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착한 마음에다가 파트라슈라는 개를 아끼는 사랑스러운 마음과 그림 하나에 담는 고운 마음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하는 말처럼, 언제나 돈에 쪼들려 그림을 배운다든지 훌륭한 그림을 구경한다든지 엄두를 못 내는 네로인데, 정작 네로는 네로가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 엄두 또한 내지 않습니다. 네로한테는 네로라는 아이가 살아가며 익히거나 받아들인 사랑을 네로가 그리려는 그림에 살포시 담을 수 있으면 기쁩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면 넉넉합니다. 남한테 내보이려는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저절로 스며나오도록 온힘을 쏟아서 이루는 그림이면 됩니다.


- ‘나의 그림 솜씨는 알로아 아버지의 재산에 비길 수 없는 숭고한 거야. 나는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만다.’(82쪽)
- (그림을 접수시키고 난 네로는 힘이 쭉 빠졌다.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한 수많은 그림 속에서 송판 위에 그린 목탄 그림은 너무 초라했다.) ‘난 글도 모르고 겨울에 양말도 신을 수 없는 가난뱅이야. 이 주제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맞지 않는 건지도 몰라.’ (89쪽)



 ‘위다(Ouida/Marie Louise de la Ramee)’ 님은 1872년에 《A Dog of Flanders》를 쓰고, 일본사람은 1975년에 만화영화로 만들며, 이향원 님은 2002년에 만화책 한 권으로 《플랜더스의 개》를 내놓습니다. 소설과 만화영화와 만화책은 다 같은 이야기이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흐름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네로와 파트라슈가 얼마나 애틋하게 서로를 아끼며 보살폈는가를 보여주면서, 저마다 다 다른 빛깔과 흐름으로 둘 사이가 어떻게 따스한가를 밝힙니다.

 네로한테 젖을 얻을 소나 염소가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을 테고,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다면 할아버지이든 네로이든 파트라슈이든 끼니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어 보고 숨을 거두었겠지요. 아니, 추운 겨울날 양말 한 켤레라도 신어 보았겠지요.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추위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시달린 네로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손길로 따스한 그림결과 사랑스러운 그림무늬를 베풉니다. 물감 한 번 써 보지 못한 네로인 만큼 나무판대기에 숯으로 그렸을 뿐이지만, 눈부신 그림빛을 길어올립니다. 네로가 물감을 쓸 수 있었다면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처럼 무지개빛 아름다운 그림을 빚었을는지 모르지만, 네로는 네로대로 숯그림만 그릴 수 있었기에 ‘흑백 빛깔’로 이룰 수 있는 눈물겨운 그림꽃을 피웁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결로 그림을 빛내지 못합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씨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살림이 쪼들리는 이들은 힘겨이 쪼들리는 마음결로 그림 하나에 사랑을 담고 매무새와 말씨 하나에 사랑을 싣습니다.


- (사람들은 지금 네로에게 모두 베풀어 주려 한다. 네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로와 파트라슈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진실되게 살았다.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에도 둘은 꼭 끌어안았다. 둘은 마치 한몸처럼 꼭 붙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152∼153쪽)


 만화책을 그린 이향원 님은 책머리에 “책을 보고 운다는 것은 삶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당신 만화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기를 꿈꿉니다.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라면 만화영화나 소설 《플랜더스의 개》를 마주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요. 책 아닌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마주할 때에 눈물이 샘솟을 수 있을 테고요.

 한 사람이 살아가자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고 사랑은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예쁘게 태어난 이야기가 백서른 해 만에 한국에서 만화옷을 새로 입으며 우리한테 예쁜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4344.3.12.흙.ㅎㄲㅅㄱ)


― 플랜더스의 개 (이향원 그림·글,위다 원작,산하 펴냄,2002.2.27./8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1.3.11. 

충북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월세방 있는 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덤가에서 책읽기


 무덤자리는 으레 볕이 잘 들고 바람 살랑살랑 부는 자리에 씁니다. 무덤자리는 살림집 얻어 지내기에도 퍽 좋은 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덤자리는 풀이 알맞게 자라도록 돌보기 마련이고, 꽤 이름난 분들 무덤자리는 꽤 크기 마련이라, 이 너른 무덤자리 잔디밭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기에 괜찮겠구나 싶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이랄는지 철 덜 든 아이들이랄는지 ‘신채호’가 누구인지 아는가 모르는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무덤자리 언덕받이에서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풀밭미끄럼놀이 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한테 신채호라고 하는 한 사람은 ‘풀밭미끄럼놀이 재미나게 하는 무덤자리 어르신’으로 자리잡을까요. 아니, 이런 어르신 이름조차 모르고 오늘 하루 또 신나게 놀았다며 가끔 떠올릴 만할까요.

 어른한테 무덤가란 식구들이 함께 찾아들어 절 몇 번 하고 나서 도시락 펼쳐 젯밥이랑 술 한잔 나누기에 좋은 자리이면서, 한동안 드러누워 낮잠 자기에 좋은 자리요, 낮잠에서 깨어났다면 책 한 권 펼쳐 읽기에 좋은 자리입니다. 어쩌면, 무덤자리를 퍽 좋은 볕자리에 마련하는 까닭은, 여느 때에는 쉬 만나지 못하던 살붙이들이 도란도란 어울리면서 이야기꽃 피울 좋은 만남터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4344.3.1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잠자리에서 아이 머리 쓰다듬기


 날이면 날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가 울먹이면서 잠자리에 든다. 아이는 틀림없이 더 놀고 싶으니까 졸립거나 힘들면서도 꾹꾹 참을 테지. 더 놀겠다는 아이를 나무라거나 꾸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버이로서 조금 더 따스히 보듬으면서 안거나 달래거나 타일러야 옳다. 아이로서는 가슴이 후련하도록 놀지 못했으니까 어버이 되는 사람이 아이 가슴을 후련하게 뻥뻥 뚫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버이 스스로 몸이 힘들거나 지친다면서 먼저 뻗어 드러눕는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어버이 되는 사람은 몸이 힘들면서도 아이를 생각하며 다시금 기운을 내거나 새롭게 기운을 차리며 한 번 더 따스히 껴안을 사람이 아닌가.

 날마다 아이를 꾸짖는 말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버이 되는 사람부터 더 쓸쓸하고 메마른 마음이 가득 차고 만다고 느낀다. 아이를 조금 더 따스히 바라보면서 보드라운 말씨로 타이르도록 이끌며 살아야겠고, 한 번 더 따사로우면서 사랑어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도록 내 매무새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다짐한다.

 잠자리에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몸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면서 한손으로 아이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을 천천히 토닥이면서 말을 건넨다. 벼리야, 미운 벼리나 나쁜 벼리 아닌 착한 벼리는 어디로 갔니. 벼리 너도 힘들고 졸릴 때에는 포근히 잠자야지. 힘들면서 더 놀려고 하니 너 스스로 자꾸 악이 받치잖니. 힘드니까 자고 졸리니까 자야지. 즐겁게 일찍 자고 즐겁게 일찍 일어나서 또 놀면 되잖아. 자꾸 억지하고 땡깡만 부리면 너도 힘들고 어머니랑 아버지도 힘들잖아. 놀 때에는 신나게 놀고, 밥먹을 때에는 맛있게 밥먹으며, 졸릴 때에는 그냥 새근새근 자면 되잖아. 이제 그만 울고 예쁘게 잘 자렴.

 아이한테 하는 말은 고스란히 나한테 하는 말이다. 아이한테 말을 건네면서 토씨 하나 낱말 하나 엉터리로 나오지 않도록 가다듬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어느덧 슬슬 곯아떨어질 즈음, 밀려드는 졸음을 한 번 더 참으면서 생각한다. 토씨와 낱말 하나 바르게 다독이며 예쁜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듯이 사랑도 손길도 살림도 어느 하나 모자라거나 빠지거나 어수룩한 데가 없도록 더 힘을 쏟으며 추슬러야 한다. 힘이 닿지 못하는 곳은 틀림없이 있다. 힘이 닿지 못하는 곳은 틀림없이 있으니까, 다시금 새롭게 생각하고 살피며 힘을 또 내야 한다. (4344.3.1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 임영균의 사진과 삶의 대한 단상
임영균 지음 / 브리즈(토네이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사진학과에 사진교재는 부질없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24] 임영균,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임영균 님이 사진학과 학생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읽는다. 이 책은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교재라 할 만하다. 글쓴이 스스로 머리말이나 꼬리말에서 밝히기도 하지만,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온 젊은이한테 ‘사진을 익히는 첫걸음’쯤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그러모은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만 한 ‘사진 밑지식’조차 사진학과 학생들은 갖추지 못했는가 하고. 대학교 사진학과쯤 들어가려 하는 새내기 대학생들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만 한 이야기조차 스스로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가 하고. 이리하여,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고작 이런 밑지식을 한 해에 걸쳐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하고.

 사진학과 교수 임영균 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17쪽).” 하고 말한다. 이 말은 더없이 마땅하다. 다만,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을 끌어내기까지 너무 많은 길을 거쳐야 하는구나 싶다. 게다가 더없이 마땅한 이 말은 굳이 사진학교에서 가르칠 이야기가 아닐 텐데 하고 느낀다. “좋은 카메라를 선택하는 기준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카메라를 만나는 것이다(29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몹시 마땅한 대목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깊이가 얕다고 느낀다. 대학교 사진학과라면 누구나 사진기를 다룰 텐데,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장비를 다루려는 학생이 있을 수 있는가. 사진학과 교수이든 전문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잘 다루지 못하는 사진기를 쓸 수 있는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타고 다닐 수 있는가. 밥을 먹는 사람이 내 손에 안 맞는 수저로 밥을 먹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내 몸에 안 맞는 수저일지라도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안 맞는 자전거라 하더라도 타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던 사진기라 하지만 오래오래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임영균 님은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 하나 내놓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임영균 님 스스로 사진학교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배웠기 때문에, 다시금 사진학교 젊은이한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임영균 님이 다른 사진을 배웠다면 다른 사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테지. 틀림없이 임영균 님도 ‘사진 = 삶’인 줄을 어느 만큼 헤아리기는 하지만, 아직 온몸으로 깊숙하게 느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스스로 가장 고민하고 느꼈던 삶이 그대로 배어난 것이다”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거나 사랑할 사진이란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이라는 소리이고, 한 마디로 간추리면 ‘내가 좋아할 사진은 내가 좋아할 삶’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이라는 소리이다. 곧,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그대로 내 사진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진으로 담고, 내 사랑이 내 삶이 되며, 내 사랑하는 사람하고 내 삶을 함께 일구는데, 내 사진은 이러한 삶흐름을 고스란히 담는 이야기보따리인 셈이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날 고등학교 아이들은 꿈이나 삶이나 넋을 품을 수 없다.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해야 한다.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 한다 해서 고등학생 때이든 중학생 때이든 초등학생 때이든 푸른 꿈이나 푸른 사랑이나 푸른 삶을 일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입시 성적에 따라 대학교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어떤 꿈과 삶과 사랑을 품느냐에 따라 ‘하고픈 공부’를 하든 ‘하고픈 일’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대학교 사진학과에서는 아이들한테 ‘사진은 바로 네 삶이란다’ 하고 들려줄밖에 없다. 아이들 스스로 ‘사진은 바로 내 삶이야’ 하고 느끼면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 삶을 어떠한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내 손길을 가다듬으면 좋을까’ 하고 돌이키도록 이끌지 못한다. 이럴 겨를이 없는 대학교 사진학과가 되고 만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너무도 슬픈 시험기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이 갇히고 마음이 닫히며 삶이 쪼그라들었으니까, 이 갇히고 닫히며 쪼그라든 넋을 천천히 풀어내야 할 테니,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긴 아주 가벼운 밑지식을 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가르칠밖에 없다 하리라.

 그래도 이 책은 여러모로 아쉽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백 가지 다른 사진이 태어나야 할 텐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사진길을 걷도록 얼마나 잘 타이르면서 북돋우는지는 모르겠다.

 임영균 님은 말한다. “미술의 역사가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금, 서양사진사와 동양사진사의 구분은커녕 동양사진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사진사 도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161쪽).”고. 그러면, 임영균 님 스스로 말하면 된다.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조차 서양 사진쟁이 이야기로 그득하다. 고작 일본 사진쟁이 한두 사람 이름이 얼핏 나올 뿐이다. 일본 사진밭조차 더 넓거나 깊게 다루지 못한다. 베트남 사진이라든지 버마 사진이라든지 인도네시아 사진은 아예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 사진이나 대만 사진이나 재일조선인 사진은 조금도 다루지 못한다.

 조금 더 바지런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진책을 사서 모으고 읽히면서 임영균 님 사진넋과 사진학과 대학생 사진얼을 끌어올려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말로만 ‘동양사진사’ 걱정을 하지 말고, 아름다우며 재미나고 즐거운 동양사진사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말로만 앞세우는 걱정을 넘어야 하고, 말부터 ‘임영균 님 스스로 사랑하며 아끼는 숱한 한국·일본·아시아 사진 이야기’를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담으면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면 이 사진교재는 교재로서도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아니, 그저 교재로 그치고 만다.

 대학생한테 교재란 부질없다. 대학교 미술학과에 교재가 쓸모있을까.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교재가 쓸데있을까.

 문화를 말하건 예술을 다루건 교재가 있을 수 없다. 문화나 예술을 이야기하는 학과에서 ‘교재 = 삶’일 뿐이다. 문화쟁이나 예술쟁이가 되려는 학생은 학생 스스로 학생 삶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학생 몸뚱아리와 마음밭을 교재로 삼아야 한다. 학생 스스로 부대끼거나 부딪히는 하루하루가 송두리째 교재가 되며 책이 되고 삶이 된다. 학생들이 만나거나 사귀는 모든 사람이나 짝꿍이나 이웃이 교재가 되고 책이 되며 삶이 된다.

 살림하는 사람한테는 요리책이나 육아책이란 부질없다. 살림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온갖 일거리가 곧바로 교재 노릇을 하고 책 구실을 한다. 그저 몸으로 부둥켜안는 삶이다. 아이랑 노는 법을 책을 읽어 배울 수 있겠는가. 그냥 아이 손을 잡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된다. 구슬치기를 할 때이든 고무줄놀이를 할 때이든 놀이책을 옆에 놓고 구슬을 치거나 고무줄을 넘겠는가.

 사진하는 사람 가운데 사진교재를 곁에 끼면서 사진을 찍는 바보란 없다. 사진하는 사람은 ‘늘 들고 다니기에 알맞을 사진기’를 하나 옆구리이든 어깨이든 손에 끼거나 쥐거나 걸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꽃으로 맺으면 된다. 굳이 교재가 있어야 한다면 이 나라가 교재이고 내 동네가 교재이며 내 어버이가 교재이다.

 교과서나 교재는 한 시간쯤 들여 가볍게 읽어서 치우는 심심풀이 땅콩일 뿐이다. 교과서나 교재 하나를 한 해나 들여 가르치려 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슬프다. 굳이 어느 책 하나를 교재처럼 삼으려면 강의를 하는 한 시간에 사진책 두어 가지를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한 해를 통틀어 사진책 이삼백 권은 보여주면서 가르칠 때에 비로소 ‘교재를 써서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을 배우거나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대학교 사진학과 같은 데에는 들어갈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시험기계가 되고 만 아이들로서는 대학교밖에 갈 데가 없다고 잘못 안다. 이 어리숙한 철부지들한테 철이 들도록 할 몫이 대학교 교수한테 있다. 사진학과 교수라면 어리숙한 철부지한테 교재를 버리고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면서 ‘아이들아, 너희는 너희 삶을 찾아야지.’ 하고 가르칠 줄 알아야지 싶다. ‘교재 읽히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을 수많은 교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힘으로 알아내도록 이끄는 길동무이자 이슬떨이 몫’을 할 수 있는 임영균 님으로 거듭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4344.3.11.쇠.ㅎㄲㅅㄱ)


― 사진학교에서 배운 것들 (임영균 글·사진,토네이도미디어그룹,2010.1.5./1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