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떠한 낱말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  《김우창-궁핍한 시대의 詩人》(민음사,1977) 379쪽

 ‘단어(單語)’가 아닌 ‘낱말’이라고 적으니 반갑지만, “그 자체(自體)로서”와 “고정(固定)된 의미(意味)”라고 적은 대목에서는 서글픕니다. “그 낱말로서”와 “굳어진 뜻”으로 고쳐 줍니다. “갖고 있지는 않다”는 “담고 있지는 않다”로 손보거나 앞말과 이어 “뜻이 굳어져 있지 않다”로 손봅니다.

 ┌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
 │→ 하나로 붙박힌 뜻을
 │→ 하나로 굳어버린 뜻을
 │→ 한 가지 뜻만을
 │→ 한 가지 뜻으로 굳어져
 └ …


 세상 모든 분들이 훌륭한 이론과 논리만 펼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훌륭한 이론과 논리를 펼치는 분들이 모두 자기가 펼치는 이론과 논리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말만 하지는 말아 주셔요. 훌륭해 보이는 말만 들려주지는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부터 손쉽게 몸으로 옮겨내지 못할 말은 섣불리 펼치지 말아 주셔요. 말하는 분께서 가슴속 깊이 곰삭여서 받아들인 이야기까지 아니라면 되도록 삼가 주셔요.

 세상 모든 말은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말은 없습니다. 따로 보기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computer’가 언제부터 우리가 익히 쓰는 ‘컴퓨터’ 뜻이었을까요. ‘car’가 언제부터 우리가 즐겨쓰는 ‘자동차’ 뜻이었을까요.

 요즈음은 ‘다리’라는 말도 거의 안 쓰입니다. 한강에 수두룩히 놓인 저 다리뿐 아니라 부산에 놓인 다리, 또 인천시에서 빚까지 뒤집어쓰면서 지으려고 하는 어마어마한 다리도 ‘다리’인데, 이 다리가 짧으면 ‘橋梁’이라고 적고, 길면 ‘大橋’라고 적더군요. 우리 말 ‘다리’가 쓰이는 자리는 ‘돌다리’나 ‘출렁다리’쯤입니다. 그나마 ‘출렁다리’조차 쓰기 싫다며 ‘懸垂橋’를 쓰는 우리 나라 공무원입니다.

 우리는 왜 ‘긴다리’와 ‘짧은다리’라는 말을 빚어내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큰다리’와 ‘작은다리’라는 말을 지어내지 못할까요. 우리 말로 가리키면 어설픈가요. 우리 말로 나타내면 모자란가요. 우리 말로 이름을 붙이면 알맞지 않은가요. 우리 말로 이야기하면 ‘form’이 안 나는지요.

 책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북’도 아닌 ‘book’을 쓰는 일, 나라살림이나 집살림을 이야기하는 신문자리에 ‘경제’나 ‘이코노미’도 아닌 ‘money’를 쓰는 일은 워낙 오래된 일입니다. 아예 이대로 굳어버린 듯합니다. 운동경기 핸드볼에서는 퍽 옛날부터 ‘도움주기’라고 써 왔으나, 농구나 축구에서 ‘도움주기’라고 쓰면 마치 ‘북녘사람들처럼 말하는 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핸드볼 경기를 하는 사람은 뭐지요.

 배구 경기가 ‘프로’가 아닌 ‘아마’였을 때는, 경기를 알려주는 방송 사회자나 경기 소식을 담는 신문기자 모두 ‘가로막기’만을 말했으나, 이제는 ‘블로킹(blocking)’이라고만 말합니다. 또한, ‘아마’배구였을 때에는 없던 기록이 새로 생기면서, 지난날에는 ‘건져올렸습니다’ 하던 말을 ‘디그(dig)’라는 말로만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로막기’를 살려놓지 못하고 ‘블로킹’만 북돋우는가요. 왜 우리는 ‘건져올림’은 내팽개치고 ‘디그’만 끌어당길까요.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말뜻으로만 붙박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에만 매여 있지 않는다
 └ 어떠한 낱말도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일 수 없다


 거짓말 같아요. 아니, 우리 말만 울타리 밖인 듯해요. 우리 말만 쏙 빼야 하는가 봐요. (지식인들이 입이 닳도록 외치고 있는 말로 하자면) ‘한글처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글’ 한 가지만큼은 “한 가지 낱말이 한 가지 뜻으로만 매인 채 다른 뜻으로는 쓰일 수 없다”는 ‘이론’이나 ‘논리’로는 살피면 안 되는가 봐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잣대’라는 말을 키우지 않고 ‘무게’라는 말을 북돋우지 않고 ‘생각’이라는 말을 살찌우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말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사랑’이라는 말조차 다독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말쓰임새를 넓히지 않습니다. 그저 ‘담론(談論)’뿐이에요. ‘대화’요 ‘토론’이요 ‘토의’요 ‘논의’뿐이에요. ‘담론’ 한 가지로도 모자란지 ‘거대 담론’이라는 말까지 꺼내요. 우리 동네, 그러니까 인천시 공무원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분께서는 우리한테 ‘디스커션’을 하자고 말씀을 하더군요. 잠깐 벙쪘으나,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문화잔치를 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데, 저 혼자만 ‘잔치’를 이야기하고, 다른 모두는 ‘축제(祝祭)’와 ‘축전(祝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나마, ‘비엔날레(이biennale)’라고 하지 않으니 나은 편인가요. ‘생일파티’를 한다는 자리에서 “‘생일잔치’를 하는가 보지요?” 하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네니 조용해집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예 주둥아리 꾹 다물고 살아야 하는가요.

 저는 동네에서 도서관을 조그맣게 열어서 꾸리고 있습니다. 그냥 ‘도서관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도서관지기’라고 말하는데, ‘관’에서 나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도서관장’이라고 말해서 듣기에 거북합니다. 기자 분들도 ‘도서관장’이라는 말을 꺼내니 떨떠름합니다. 왜 ‘지기’는 안 쓰고 ‘長’이라는 말만 써야 할까요.

 해마다 달력을 보내주는 분한테, ‘새해 달력을 만드실 때에는 부디 요일을 한글로라도 적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여쭙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일월화수……’는 한 글자도 안 들어가고 ‘s m t w ……’만 들어간 달력을 받습니다. 게다가 ‘1월 2월 3월 ……’도 없어요. 알파벳으로 쏼라쏼라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밖 사람한테 선물할 달력이 아니라 나라안 사람, 그러니까 우리들 한국말을 하며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볼 달력인데, 정작 ‘한국’ 달력에는 명절 이름조차 한자로 적기 일쑤입니다. 한글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달력입니다. 달력을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한자 공부를 하라는 소리인가요.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이 담기는 법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롭게 쓰이기 마련이다
 └ 어떠한 낱말도 새로운 뜻으로 쓰이게 된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을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지식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모르겠고, 책과 논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어디로 걸어가려고 하는 걸음인지,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 움직임인지, 무엇을 하려는 매무새인지, 누구와 함께 살고픈 어깨동무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와 살고 싶다고요? 가난한 이를 돕고 싶다고요? 어려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겠다고요? 어려운 겨레한테 사랑을 나누겠다고요?

 참말 가난이 무엇이고 어려움이 무엇인지 머리로만 아는 테두리를 넘어서 몸으로 부대껴 보고서야 하시는 말씀인지요. 참말 가난한 삶이 무엇이고 가난이라는 굴레가 왜 되풀이되고 가난이라는 틀거리가 어떻게 짜여지는가를 뿌리깊이 파헤쳐서 알아내면서 거드는 손길인지요. 모르기에 여쭙습니다. 믿지 못하겠기에 믿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4341.4.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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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절망공장
가마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우리일터기획 / 1995년 10월
평점 :
품절


먼저 짤막하게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을 써 본다. <시민사회신문>과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띄우려고 적었다. 나는 조촐한 이름이 좋아서, "돈만 밝히는 세상에서"쯤으로 기사이름을 붙였는데, <오마이뉴스>에서는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이름을 고쳐 버렸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 나는 이건희 씨를 '회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이한테는 그게 자기 직책일지라도. 이건희든 이명박이든 그냥 '씨'나 '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자연인일 뿐이다.




《자동차 절망공장》

 살림 몇 해 만에 재산을 몇 곱절 불렸다는 이야기가 신문 큰 자리를 채웁니다. 많은 이들이 이이를 취재하고 더 많은 이들이 이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1억을 얼마 만에 버느냐 이야기를 하던 때는 아스라한 옛날입니다. 이제는 10억이나 100억을 이야기합니다. ‘서민’이든 ‘부자’이든 ‘권력자’이든 ‘더 많이 거두어들이는 돈’에 눈길이 촘촘히 박힙니다. 우리 주머니에 넣고 자랑하는 돈이 어디를 거쳐서 왔는지, 누구 주머니에서 옮겨 왔는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 아무개 씨 재산은 말썽거리가 됩니다. 새 정부 사람들 재산도 말밥에 오릅니다. 그러면 지나간 정부 사람들 주머니는 어떠했을까요.

 돈굴리기를 자랑하고 돈모으기를 소리 높이 외치는 가운데, 정작 이 사람들이 지난 세월에 누구와 무슨 일을 했는가는 도마에 오르지 않습니다. 책을 몇 권쯤 읽었고, 영화와 연극을 몇 편 보았고, 어떤 사람과 어떤 일을 해서 어떤 보람을 얻었는가는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 밝힐 만한 이야기가 없을지 모릅니다. 금리ㆍ주식ㆍ투자ㆍ자동차ㆍ외국여행ㆍ아파트 값 들에는 빠삭하지만, 우리 사는 동네에 어떤 이웃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는 젬병입니다. 책 많이 읽을 사람도 책 지식에 묻혀서 세상 훌륭한 책을 펼쳐낸 사람들 속뜻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거나 곰삭이거나 나누는 데에는 어줍잖습니다.

 “이 노동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부착’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을 15살 소년이 내 대신 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와 나의 인생 경험, 지식의 차이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76쪽)” ‘계절노동자’로 도요타자동차 일꾼으로 들어간 사람이 남긴 일기가 《자동차 절망공장》(우리일터기획,1995)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때는 1973년. 일찍이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를 보여주었고, 2000년대 우리들은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높이는 톱니바퀴마냥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톱니로 구르고 있는 줄 모릅니다. 1억을 벌거나 10억을 벌었다고 ‘만세!’ 하고 외칩니다.번 돈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 벌어들인 돈은 누구와 나눌 마음인지, 돈을 버는 동안 이웃과 동무하고는 어떤 사이로 지냈는지에는 눈길 한 번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는 내 노동으로 자동차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트랜스미션을 만들고 있는 것인데도, 이것에 의해 차가 움직이고 그 차 안에 인간이 타며 그 차가 달리는 앞뒤를 인간이 걷고 있는 등의 상상을 한 적이 없다. 오로지 이 한 대를 때맞춰 작업하여 다음에 오는 한 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만, 오로지 늦지 않기 위해서만 손을 움직이고 있다 …… 기계적인 움직임을 강요당한 인간이며, 기계보다 싸고 대치하기가 쉬운 부품이며, 더 간단히 말하자면 한 번 쓰고 버리는 전지인 셈이다.(101쪽)” 연봉 5천을 받거나 연봉 1억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재산을 100억으로 불린 다음에는 남은 자기 삶을 어떻게 보낼 생각일까요. 삼성그룹 이건희 님한테 《자동차 절망공장》을 헌책방에서 2천 원에 사서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4341.4.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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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 세계 명작 속에 숨은 보물찾기 1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정회성 옮김, 원유성 그림 / 서강books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아이한테 자기 삶을 사랑하는 길 일러주기
 ― 러드야드 키플링,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



 (이달에 추천하는 어린이책)


 책이야기를 하는 잡지 《북새통》에서 다달이 ‘이달에 추천하는 책’을 뽑고 있습니다. 추천책 후보는 모두 다섯 가지이고, 저는 후보에 오른 다섯 가지 책을 하나하나 살피며 이 가운데 한 작품만 뽑아서 알리는 심사위원 노릇을 맡고 있습니다. 지지난해부터 했지 싶습니다. 후보에 오른 다섯 권을 하나씩 살피면서, 제 나름대로 책마다 어떤 대목에서 반갑고 얄궂었는지, 또 좋았고 아쉬웠는가를 밝혀 보는 가운데, 마지막 한 작품을 추려 봅니다.


후보 1 : 치킨 마스크 (우쓰기 미호/장지현 옮김/책읽는곰/2008.3.3.)
후보 2 : 변기엔 누가 앉을까? (안드레아 웨인 폰 쾨닉스뢰브/고우리 옮김/키득키득/2008.2.29.)
후보 3 : 꼴찌가 받은 상 (김용인/영림카디널/2008.3.31.)
후보 4 : 꼬물꼬물 일과 놀이 사전 (윤구병 글,김미혜 글,이형진 그림/보리/2008.3.5.)
후보 5 :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원유성 그림,정회성 옮김/서강출판사/2008.2.28.)



 - 1 -

 다섯 가지 책만 보면서 추천할 만한 작품을 고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아이한테 선물해 준다고, 또는 읽어 준다고 했을 때, 또는 함께 본다고 할 때 어느 책이 제 마음에 가장 와닿는가 하고 헤아려 보니, 후보 1∼3은 덜어내게 됩니다. 후보 1∼3이 줄거리가 모자라거나 형편없는 책이기 때문에 덜어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수많은 책에서 너무 뻔하게 되풀이되고 있어서, 굳이 어슷비슷한 이야기책을 또 하나 만들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후보 3인 《꼴찌가 받은 상》을 살피면서, 우리 나라에서 동화를 쓰는 분들 글감은 어이하여 하나같이 똑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나라 교육 문제는 1950년대와 2008년하고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1950년대에는 국민학교 들어가는 일부터 시험을 치러야 할 만큼 빡빡했습니다. 이제는 초등학교 시험은 없어요. 그런데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인 대목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자유로이 뛰어놀기도 하고 부모나 이웃사람 일을 거들면서 사회를 배우고 자기를 알아가는 흐름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아예 막혔습니다. 어른이라고 하는 우리들은 아이들한테 마음길을 터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막혀 있는 길을 뚫어 달라고 바라기는 하지만 이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어른들 귀에는 들리지 않을 뿐더러, 어른들 손찌검과 따돌림과 괴롭힘이 무서워서 말을 못하기도 합니다. 꼴찌한테 좀더 따스한 눈길 보내는 일은 틀림없이 값어치가 있습니다만, 꼴찌만이 아닌 19등도 29등도 39등도 따스한 눈길을 받아야 하는 한편, 한 걸음 나아가 아무런 등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적 하나만을 놓고 매기는 등수란 사라져야 합니다.

 후보 2 《변기엔 누가 앉을까?》는 남다른 생각힘으로 잘 엮어낸 그림책으로 여겨지고 책꾸밈도 남다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시고 시골이고 죄다 아파트 판이며,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부엌이나 집안에 갖추는 살림은 서양 문명대로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과 반찬은 ‘유기농 곡식’이기를 바라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도 사료와 항생제가 아닌 풀과 좋은 먹이를 먹던 고기이기를 바라는 우리들이면서도, 정작 우리가 누는 똥과 오줌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콧털만큼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똥누기 연습’을 시키는 일도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면, 똥누기와 함께 이어져야 할 다른 삶은, 다름 앎은, 다른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책 하나에서 한 가지를 넘어서는 수만 가지 이야기를 속속들이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놓치는 대목은 없는 가운데, 책 하나에 담으려는 한 가지 이야기를 잘 잡아채야 한다고 느낍니다. 서양 물질문명 그대로 살아가는 우리 형편으로는 《변기엔 누가 앉을까?》는 재미있게 볼 만한 그림책이라고 느껴지지만, 재미있게 보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하는 생각을 이어 본다면, 글쎄요. 이만한 이야기는 책으로 안 만들어도 되지 싶은데. 그냥 말로 이야기해도 넉넉하지 싶은데. 또한, 똥닦이 휴지 씀씀이도 생각할 문제입니다.

 후보 1 《치킨 마스크》는 아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찾아나가는 마음앓이를 잘 담아내는 이야기책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 못지않게 일본은 돌림뱅이와 괴롭힘이 끊이지 않습니다. 절름발이라고 해서 좀 어리숙하다고 해서 좀 굼뜬다고 해서 좀 못생겼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가 머리숱이 좀 적다 한들, 우리 아이가 좀 키가 작은 편이라 한들, 우리 아이가 좀 토실토실하다 한들, 아무 거리낌이란 없습니다. 저마다 소중한 마음씨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네 아이들이 의무로 다녀야 하는 학교교육 틀거리에서는 아이마다 간직하고 있는 마음씨를 살리거나 북돋우기 어렵습니다. 학교교육은 ‘어찌 되었든 한 해 동안 여러 과목 교과서 진도를 마쳐야’ 하거든요. 교과서 진도는 못 마칠 수도 있고, 조금 일찍 마칠 수도 있고 늦게 마칠 수도 있는데, 꼭 그만큼만 마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교과서 아닌 책은 못 보게 합니다. 한 가지 책만 모두한테 똑같은 시간에 걸쳐서 가르치고, 똑같은 책걸상에 앉아서 하염없이 교사 입만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학교에 보내는 우리 어버이들은 아이가 받을 고단함을 깊이 헤아리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동무들을 만나서 사귄다고 할 때에도, 어떤 동무를 사귀느냐를 찬찬히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이와 이웃 아이가 ‘오로지 대학교에 붙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서로서로 동무가 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재미있을 만한 놀거리, 공부거리, 일거리를 스스로 찾기 어려운 학교 틀거리인데, 집에 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야기책 《치킨 마스크》는 이런 여러 가지 사회 짜임새와 교육 틀거리 때문에 시달리는 아이를 그려냅니다. 그렇지만 좀더 안쪽까지 파고들지는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이 또한 너무 겉핥기로 그쳐 버린다고 할까요. 자기 모습을 찾아나가는 길찾기는 틀림없이 소중한 일입니다만, 자기 혼자서만 바뀐다고 해서 나와 이웃 모두가 함께 나아질 수는 없는 터. 곁가지이지만, ‘치킨’ 탈(마스크)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튀김닭이 ‘치킨’입니다.

 후보 4 《꼬물꼬물 일과 놀이 사전》은 우리네 아이들한테 ‘놀이’만이 아닌 ‘일’도 보여주고, 서양 문화만이 아닌 우리 문화도 일러 주는 이야기그림책입니다. 책이름에 사전이라고 했듯이, 《꼬물꼬물 일과 놀이 사전》은 ‘일 사전’과 ‘놀이 사전’, 그리고 ‘사물 이름 사전’ 노릇을 합니다. 모듬으로 그려진 큰 그림은 달에 따라서 한 장씩 들어가는데, 싱싱함과 시원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싱싱함이 ‘사물 이름 보여주기’에서 제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모듬그림 다음에는 ‘죽어 있는 박제’ 그림이 뒤따르고 맙니다. 나무 그림을 죽 늘어놓는다고, 물고기 그림을 죽 늘어놓는다고, 아이들이 이 나무와 물고리를 얼마나 잘 헤아릴 수 있을는지요. 놀이와 명절과 문화 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입말을 살렸다고 하지만, ‘-요’만 붙인다고 하여 입말이 될 수 없고, 아이한테 살짝 반말 느낌이 나는 말투가 입말이라고 하기에는 힘들다고 봅니다. 가락에 맞추어서 넣은 글은 어느 한편으로는 ‘말놀이’인 셈이, 또는 ‘말장난’인 셈이 아니냐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이와 같은 모듬그림을 보여주거나 나눈다고 할 때에는 ‘교육 효과(EQ)’를 노리는 대목도 어김없이 있을 터이나, 이보다는 이와 같은 모듬그림이 우리 ‘삶’이요,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느끼던 ‘발자취(역사)’이며,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자기 꿈(앞날)을 키워 나가는 길잡이가 되면 한결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사전’이라는 말을 붙이자면 속살을 좀더 알뜰히 채워 넣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만한 책은 그냥 ‘이야기그림’일 뿐입니다. 이야기그림 얼거리도 퍽 엉성궂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넣으려고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모으기보다는 알맞춤한 정보를 엮어내고, 책끝에 실은 풀이말은 좀더 꼼꼼히, 좀더 넉넉히 실어서 ‘사전 노릇’을 하도록 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후보 5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을 펼치는 동안, 그림을 그린 분이 무척 땀흘려서 그렸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사람 몸 어울림’이 깨진 대목이 있고, 우리 나라 역사연속극에서 보듯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옷차림과 몸차림’으로만 나와 낯설게 느껴지는 ‘옛사람(원시인)’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키플링 님이 엮어낸 상상동화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은 당신이 당신 딸아이한테 보여주거나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엮었구나 싶어서 흐뭇합니다. 다만, 이만한 이야기라면 우리 나라 수많은 부모 가운데 한두 사람쯤은 자기 딸아들한테 들려줄 이야기로 지어낼 수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가 4000해를 넘는다고 말들은 많으나, 이 긴 역사에 걸맞는 ‘옛사람 슬기를 이어받아 펼쳐 나가는 이야기책’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글자인 한글은 세계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훌륭하다고 입에 침이 바르도록 칭찬들 하지만, 정작 ‘한글을 빚어낸 바탕을 아이들도 재미나게 익히도록 새롭게 엮어낸’ 이야기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먼 옛날 낙동강가에서 생긴 일”이나 “먼 옛날 두만강가에서 생긴 일”은 살가운 그림책 하나로 태어날 수 없을까 궁금합니다.


 - 2 -

 다섯 가지 책을 펼치고 살피고 덮으면서,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책을 뽑으면 좋을까 하는 망설임은 풀어내지 못합니다. 적잖이 답답합니다. 흔히 평점을 매기곤 하는데, 평점을 매긴다고 해도 어떻게 점수를 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점수를 주는 일은 달갑지 않기도 하지만, 구태여 점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 권을 뽑아야 하는 판. 다시금 책을 하나씩 넘겨 봅니다. 후보 1와 후보 2과 후보 3은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고 가서 선물로 드립니다. 후보 4과 후보 5이 남습니다. 후보 4은 책꽂이 아래쪽 안쪽에 집어넣습니다. 후보 5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후보 4과 후보 5 모두 그림을 그리신 분 땀방울이 고이 배어 있음을 또렷이 느낍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땀방울을 많이 흘렸다고 하여도, 살 속 깊이 파고들도록 흘려야 한다고 느끼고, 이야기 얼거리와 책 짜임새에서,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와 어떤 삶을 들려줄 수 있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후보 5이 조금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라도 후보 4인 《꼬물꼬물 일과 그림 사전》이 고침판을 펴내어, 첫판에 깃든 아쉬움을 털어내고 새롭게 태어나 준다면, 후보 4 손을 들어 주겠습니다.

 후보 5인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을 한 번 읽는 동안, 번역글에 꽤 말썽거리가 많음을 봅니다. ‘것’을 지나치게 많이 붙이는 대목, 주인공 타피네 어머니를 가리켜 ‘그녀’라고 쓰는 대목, ‘가끔씩’으로 잘못 적은 대목, ‘본격적-미소-수선-너의-광경-공손-현명-표정-실수’ 같은 낱말은 살포시 걸러낼 수 있었다는 대목, 이를테면 ‘잘못’과 ‘실수’라는 낱말을 겹치기로 쓰고, ‘웃음’과 ‘미소’가 어떻게 다른가 헤아리지 못하고, ‘수선’과 ‘고치기’도 겹으로 쓰이는 대목들은, 옮긴이와 출판사 편집부가 ‘어린이책에 담아낼 낱말 씀씀이’를 차근차근 돌아보지 못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 말은 ‘네’이지 ‘너의’가 아니나, 이런 대목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어린이책 편집지와 번역자 눈썰미가 얕았습니다. 또한, 타피네 부족 아주머니와 언니 들을 가리켜 ‘숙녀’라고 적은 대목도 아쉽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주머니고, 언니는 언니입니다.

 《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은, 출판사에서 책겉에 적은 대로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닌 천재적인 이야기꾼, 영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정글북》의 작가 ‘러드야드 키플링’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보다는, “어린아이한테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땅에서 누리거나 느낄 문화와 삶이란 무엇일까, 어린아이 스스로 부대끼는 삶 하나하나가 작은 듯해도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속깊은가를 스스로 살피거나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런 이야기책은 상상힘이 조금 떨어져도 나쁘지 않습니다. 작품에 담는 애틋한 마음과 사랑스러운 믿음이 얼마나 야무지고 아름다우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4341.4.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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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장면을 맨 처음 만든 집은 ‘썩어’ 간다
 [배다리 골목길 이야기 23] 중국사람 거리 ‘공화춘’



 그대로 두면 퍽 멋들어진 옛 ‘중국사람 거리 중국집’으로 남을 텐데, 이러한 집들이 얄딱구리한 페인트 떡발림에 시달리면서 ‘차이나타운 관광지 짜장면집’으로 바뀌고 있다. 엊그제 모처럼 ‘중국사람 거리’로 나들이를 갔다. 옆지기가 해바라기씨를 먹고 싶다고 해서 부러 나들이를 갔다. 중국사람들은 해바라기씨를 참 좋아해서 이곳에는 중국에서 바로 들여온 해바라기씨를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판다. 우리는 이 가운데 가장 큰 놈으로 샀다. 그래 보아야 3000원. 껍질째 먹어도 되지만 너무 짜다. 껍질을 벗겨 먹으면 알맹이는 아주 작다.

 중국사람 거리에 들른 김에 중국 보리술도 두 병 산다. 한 병에 1500원이 안팎인데, 630들이 보리술을 이만한 값으로 사마시는 값은 무척 싼 편. 그러면 이 보리술을 중국에서 들여올 때는 얼마라는 소리일까.

 새 고무신을 신은 탓에 뒷꿈치가 다 까지고 발등도 빨갛게 부어오른다. 신던 고무신이 아주 닳아서 새 고무신으로 옮겨신는데, 이때마다 늘 발앓이를 한다.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아까 지나온 길을 다시 걷고 싶지 않아 안쪽 골목으로 걷는다. 이 골목까지는 관광지 개발을 하지 않아서 조용하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왁자지껄 시끄럽고 한쪽은 아주 한갓지다. 지금 우리 동네 재개발로 다 쓸려나가면 차라리 이리로라도 옮겨올까? 그런데 여기는 재개발 안 하나? 에휴.

 수풀이 우거진 어느 중국집 앞을 지난다. 이곳은 그예 조용히 있네, 하는 생각으로 지나가다가 이 집에 붙어 있는 빛바랜 간판에 눈길이 쏠린다. 앗, 아니, 여기는 ‘공화춘(共和春)’ 아닌가? 1905년에 세워진,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짜장면을 빚어서 팔던 그 가게!

 그런데 어이하여 이렇게 수풀이 우거진 빈집, 썩어가는 집, 쓰러져가는 집이 되었지? 이곳 공화춘을 인천시에서는 2006년 4월 14일에 등록문화재 246호로 지정해 놓기도 했다는데, 등록문화재로 지정은 해 놓고 이렇게 내버려 두어도 되는가? 이게 무슨 문화재라고? 중국사람 거리에서 1번지라고 할 공화춘을 이렇게 엉망으로 다 쓰러져 가게 해 놓고 무슨 ‘차이나타운 관광특구’ 따위를 만든다고?

 이곳 공화춘은 1984년에 문을 닫고, 지금은 인천역에서 올라오는 가운데길 세거리 한복판에 새 건물을 지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들어서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옛자리 공화춘은 틀림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옛자리 공화춘은 중국사람 거리를 대표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이렇게 버려두고서 무슨 역사를 말하고 문화를 말하고 관광을 말할 수 있겠는가. 문화재임을 알리는 빗돌 하나 없고, 이 앞을 또는 이 옆을 지나다니는 어느 누구도 이곳이 ‘공화춘’ 옛자리임을 알지를 못한다.

 돈으로 처바를 수 없는 역사요 문화재이다. 돈으로 다시 세울 수 없는 문화요 살림집이다. 돈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없는 관광지이고, 돈으로 사람들 눈길을 받을 수 없는 관광상품이다.

 엊그제 지역신문(인천일보 2008.4.16.)을 보고 인천연대(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보도자료(2008.4.15.)를 보니, 인천시는 ‘2009인천세계도시엑스포’를 하려다가, 중국에서 세계공인을 받아 하는 행사와 겹치게 되어서, 이름도 ‘2009인천세계축전’으로 바꾸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행사를 한다면서 그동안 128억이라는 예산을 썼는데 이 가운데 65억을 조직위 147명한테 인건비를 주느라고 썼다고 나온다. 2009년 9월에 한다는 ‘인천세계축전’에서 무엇을 할는지 아직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며칠 동안 할는지도 잡히지 않은 가운데, 또 어디에서 어떻게 한다는지 틀거리도 없다고 한다. 오로지 돈만 썼다. 돈을 쓸 곳이 없어서 이곳에 퍼붓는가? 인천이라는 곳을 세계에 알리고, 아니 세계에 알리기 앞서 나라안에 알리고, 아니 나라안에 알리기 앞서 인천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무언가 알리거나 나누려고 하는 데에는 돈을 얼마나 쓰고 있을까. 품은 얼마나 들이고 있을까. 마음은 얼마나 쏟고 있을까.

 어쩌면, 문화며 삶이며 역사며 집이며 예술이며를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공화춘에 어줍잖게 손을 대지 않고 수풀만 우거져 있도록 내버려 둔 편이 나은지 모른다. 괜히 돈쟁이들이 돈으로 처바른답시고 잘못 건드렸다가 첫모습마저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면 더욱 큰일이다.

 쓸쓸해 보이지만, 쓸쓸하지 않은 옛 공화춘인지 모른다. 조용히 해바라기를 하면서 가게 앞 푸나무하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면서 그 자리에서 흙이 되어 가는 옛 공화춘인지 모른다. 이제는 주차장처럼 쓰이고 있어,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옛 공화춘임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형편.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꿉벅 숙여 인사를 한다. (4341.4.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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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미나마타
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4 ― “죽으면 나도 해부되겠지요.”
 : 이시무레 미치코, 《슬픈 미나마타》



- 책이름 : 슬픈 미나마타
- 글 : 이시무레 미치코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2007.6.5.)
- 책값 : 12000원



 (1) 영화 한 편 보려고


 황윤 감독이 찍은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가 인천을 뺀 나라안 큰도시 모두에서 지난 3월부터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걸렸는데, 그때는 충주에 살고 있었기에 좀처럼 짬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전국 개봉관에서 건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러면 우리 동네에서도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인천만 빠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에서만 걸더군요.

 그러다가 엊그제 4월 15일부터 드디어 인천에서도 자리 하나 얻어서 겁니다. 황윤 감독 인터넷방에서 소식을 보고는 부랴부랴 인천 개봉관 인터넷방에 들어가 봅니다. 그러나 상영 소식이 없습니다. 아침 아홉 시 반에 전화를 겁니다. 받지 않습니다. 하루 지나 16일 낮에 다시 겁니다. 인천 개봉관에 걸린 지 이틀이 되도록 인터넷방에는 소식이 없기에 “황윤 감독님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인터넷방에는 올라오지 않아서요. 지금 상영하고 있나요?” “네, 그런데 상영 주최가 달라서 인터넷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응? 상영 주최? 상영 주최가 다르든 말든,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으면 알림글 한 줄이라도 달아 놓아야 하지 않나? 주최가 달라도 자기 극장에 걸고 있으면, 시간표라도 적어 놓아야 사람들이 찾아가지, 시간표도 없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알고서 이 영화를 본다고. 더우기, 영화를 틀어 주는 시간은 낮 두 시와 저녁 여섯 시. 회사원들이 일 마치고 찾아가서 보기에도 뻘쭘한 때. 살림하는 분들이 밥차리다가 찾아가서 보기에도 어중간한 때.


.. 아이들은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유기수은에 중독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 생선이라곤 먹어 본 적도 없는 젖먹이 아기가 미나마타병일 거라고는 엄마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진단이 내려질 때까지, 시내 병원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고,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배며 어구들을 내다 팔아야만 했다 ..  (23쪽)


 히유, 그래도 먼 데까지 비싼 찻삯과 품과 시간을 안 들이고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영화를 볼 수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 테지요. 며칠까지 영화를 걸어 주느냐고 여쭙니다. “아마 4월 말일까지는 걸 거예요.” “그러면 4월 30일까지는 사람들이 찾아가서 볼 수 있지요?” “그럴 겁니다.”

 뜨뜻미지근하다 못해 쌀쌀맞다 싶은 안내전화를 끊습니다. 오늘(16일)은 늦었고 내일(17일) 짬을 내어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먼저 큐헤이가 죽을 줄 알았지. 나도 한숨도 못 자고. 눈도 안 보여, 귀도 안 들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인간 같지도 않은 소리로 울어대면서 날뛰는 거예요. 아이고, 이제 제발 죽자,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뭐냐, 우리가 있는 여기가 지옥이지……. 우물을 조사하고, 된장단지를 검사하고, 심지어는 단무지까지. 소독을 한답시고 몇 명이나 다녀갔는지 몰라요 … 물건을 살 수 있기를 하나, 물도 받으러 안 가면 안 되지. 가게에 가도 겁먹은 가게 주인은 동전도 제 손으로 안 받아요 … 다시 태어나고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못 잊지. 물도 못 얻어먹던 그 한을” ..  (42∼43쪽)


 17일 낮 한 시. 이제 가방을 챙겨 극장으로 가야 할 때. 도서관에서 하던 일을 마치고 살림집으로 올라갑니다. 옆지기는 누워 있습니다. 흔들어 보지만 꿈쩍을 않습니다. 요사이는 밤새 배속 아기가 꿈지럭거려서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몸이 고단하여 못 일어나는 듯. 그렇다면 어떡하나. 내일과 모레와 글피는 꼼짝없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다음주에? 다음주에는 아무 일 없으려나?


.. 선생님은 노인을 위로하며, “할아버지 안 추우세요?” 하고 묻는다. 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 퉁명스럽게 “어나”라고 대답한다. 미나마타병에 걸린 일흔네 살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그는 병에 걸려 본 적이 없었고, ‘의사선생님’에 몸을 맡겨 본 적도 없었다 ..  (54쪽)


 고이 잠든 옆지기를 그대로 둔 채 옥상마당으로 나옵니다. 눈부신 햇볕을 눈을 안 찡그리며 쬐며 섭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다고, 이불빨래 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널찍한 뒷간으로 들어갑니다. 뒷간이자 씻는방. 이 집은 겨울에 몹시 추운 대목이 얄궂지만, 씻는방이 넓어서 이불빨래하기에는 매우 좋습니다. 따순 물 쓰자면 보일러 돌리는 기름값에 땀이 비질비질 나지만, 그래도 집에서 걱정없이 씻을 수 있는 대목은 그지없이 즐겁습니다. 처음 이 집을 계약할 때에도 겨울추위가 걱정이었으나, 빨래할 때 바닥에 죽죽 펼쳐놓고 할 수 있다는 대목과 이불빨래 신나게 할 수 있다는 대목이 아주 좋았어요.


.. “그 당시 바다색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 나빠. 바다가 저리 된 줄도 모르고 참 잘도 고기잡이를 나갔네 그려. 뭐랄까, 바다가 걸쭉해졌다고나 할까……. 도대체 그때, 회사는 뭘 만들고 있었던 걸까요? 이물질이 질펀하게 떠 있는 바다를 가르고 나가면 배도 끈적끈적한 이물질로 묵직해져 오죠. 기분 나쁜 물질을 흘려보낸 게 분명해. 우리같이 머리 나쁜 사람들이야 뭐가 뭔지 모르지만, 그런 물질은 빨리 대학교 선생님들한테 가져가서 봐달라고 했어야 옳았어요” ..  (76∼77쪽)


 밟고 비빕니다. 꾹꾹 밟는 만큼 비눗물이 넘실거립니다. 깨끗한 물을 틀어서 새로 받고 또 밟고 비비고, 다시 헹구고 또 물을 받고, 또 밟고 …… 이불을 헹군 물은 씻는방 바닥에 널찍하게 뿌리면서 바닥솔로 신나게 쓱쓱싹싹 합니다. 이불을 빨 때는 씻는방 바닥 닦기도 함께 하는 셈.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면 아기를 씻기면서 이불을 빨 생각이고, 이불을 헹구면서 아이한테 솔을 쥐어주고 바닥 닦이를 시킬 생각입니다. 그러자면 적어도 너덧 해는 지나야 하겠지만.


.. “시집와서 3년도 안 돼 이런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애석타. 나 혼자서는 단추도 못 채워 … 나 다시 한 번,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부모님이 일해서 먹고 살라고 주신 몸인데. 병 같은 거 앓아 본 적이 없었는데. 난, 전에는 손이고 발이고, 어디가 됐든 끄떡없었는데 … 지금쯤이면 보리 갈 땐데. 보리도 갈아야 하고 거름도 내야 하는데 … 일 생각만 하면 맘이 맘이 아니네. 그러고 또 숭어철인데. 이렇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도, 안절부절 애가 타서 죽겄네 … 일하고 싶어라, 내 이 손발로 … 나는 세 살 적부터 배 위에서 커서, 바다는 우리 집 앞마당이나 진배없어요 … 바다에 가고 싶네 … 우리는 처음에 폐병환자 옆 병동으로 보내졌는데, 그 폐병환자들조차도 우리를 싫어했어. 미나마타에서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이 왔다, 옮는다더라 하면서. 그러더니 우리가 있는 병동 앞을, 그 폐병환자들이 입을 손으로 막고 숨도 안 쉬고 내빼듯 지나가는 거야. 자기네가 진짜 전염병인 주제에” ..  (126∼137쪽)


 어느덧 이불빨래는 끝납니다. 물은 다 짜지 않고 고무대야에 담은 채로 밖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담벼락에 널어야 하니, 이불이 머금은 물기를 조금씩 담벼락에 쏟습니다. 담벼락을 얼추 물로 닦아낸 뒤 이불을 넙니다. 조금 뒤 이불 아래쪽을 쭉쭉 잡아당겨 물을 쪽 뺍니다. 자, 이제 제 몫은 다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오로지 햇볕한테 맡기면 됩니다.

 기지개를 켭니다. 덜컹덜컹 전철 소리를 듣다가는 아래층으로 내려옵니다. 젖은 고무신은 창턱에 올려놓아 말립니다.


..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까? 나 역시, 다른 것으로 말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원이 없겠네. 다시 한 번 영감하고, 배를 저어 바다에 나가고 싶어. 내가 측면 노를 젓고 영감은 앞 노를 젓고. 어부의 아내가 되려고 아마쿠사에서 시집왔는데” ..  (154쪽)


 책상 앞에 앉습니다. 쓰다가 만 글을 다시 쓸 생각입니다. 너저분한 책상에 쌓인 책도 좀 갈무리를 해 봅니다. 보내야 할 편지도 마무리를 짓습니다. 오늘은 책방 나들이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아차,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다 빠졌다는 동무네 집에도 찾아가서 바람도 넣고 자전거 손질도 좀 해 주어야겠습니다. 햇볕도 좋은데, 슬금슬금 걸어가며 찾아가 볼까 싶습니다.


.. “여보, 새댁, 미나마타병은 가난한 어부가 걸린다, 그러니까 쌀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걸린다고들 하는데, 난 정말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요, 나처럼 평생을 고기 낚는 배 한 척, 아내 한 사람, 나는 집사람 하나만을 내 여자라고 믿고 … 도쿄에는 사람 수보다 차가 더 많아서 어디 다니지도 못한다더구먼. 집도 사람도 너무 많아져서 햇빛도 제대로 안 든다면서. 그래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다 가늘디가는 버섯같이 된다대. 도쿄사람들은 그러니까 불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 들으니까 도쿄 어묵은 썩은 생선으로 만든다는데, 새댁 그거 알어? 익혀서 먹어도 식중독에 걸린다더라고. 그러고 보니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평생 신선한 생선 맛도 모르고 햇빛도 제대로 못 쐬고, 불쌍하게 살다 가겄네. 우리가 봐도 도쿄사람들은 정말 불쌍해. 도미도 청어도 물들여서 팔고 있다잖어? … 새댁, 그거 알아요? 물고기는 하늘이 주신 거라고. 하늘이 내려주신 것을 공짜로 우리가 필요한 만큼 잡아서 그날 하루를 사는 거여” ..  (179∼181쪽)


 이러는 동안 옆지기가 부시시 일어나서 ‘왜 안 깨웠느냐’고 한 마디 합니다. 그러다가 ‘깨웠어도 못 일어났을 거’라고, 몸이 많이 무겁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함께 옥상마당으로 올라갑니다. 말리고 있는 이불을 뒤집습니다. 햇볕이 아주 좋아서 저녁이 되기 앞서 다 마를 듯합니다.

 다시 전철 소리를 듣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전철 소리가 너무 큽니다. 전철 회사에 이 끔찍한 소음 공해를 따질 수 없을까 옆지기한테 이야기를 하니, 옆지기는 전철보다 아래층 도매상에서 자동도르레를 쓰면서 내는 소리가 더 크다고, 저 소리를 이 집 임자한테 따지고 싶다고 대꾸를 합니다.

 앞에서는 차 소리, 옆에서는 전철 소리, 아래에서는 도매상 도르래 소리. 여기에다가 머잖아 인천에 아시안 게임을 치른다며 온 동네를 재개발지구로 삼아서 파헤치려고 하는 쇠삽날 소리까지 하면.


.. 신문기자나 잡지사 기자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정말 많은 것들에 대해 묻는다. 그들은 메모지와 펜을 먼저 꺼내든다. ‘저, 생활수준은?’ ‘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밭은 몇 평이고 배는 몇 톤짜립니까?’ ..  (201쪽)


 아침나절에 날카로운 고양이 소리를 들었는데, 요즈막이 고양이들 발정기가 아니냐 싶습니다. 엊그제 옆동네를 거닐며 발정난 고양이를 한 마리 보았습니다. 몹시몹시 괴로워하며 날카롭게 니앙니앙니앙 하더군요.

 동네 비둘기는 우리 집과 이웃집 창턱이나 옥상 담벼락에 앉아서 구우구우 웁니다. 옛날 집 창턱은 들새가 앉기에 넉넉합니다. 빈집 창턱은 들새가 사람 걱정 없이 해바라기를 하면서 쉴 만한 터입니다. 겨울에는 힘들지만 여름에는 요 창턱에서 새근새근 잠들 수 있어요.


.. “나무에도 풀 한 포기에도 영혼은 있다고 나는 믿어요. 물고기에게도 지렁이에게도 영혼은 있다고 믿는데. 우리 유리한테는 그것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요?” “하아∼ 세상에 없던 병이라잖어.” “병하고는 달라요. 대여섯 살 한창 예쁠 나이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빼앗겼는데 … 유리는 이미 빈껍데기라고, 영혼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이라고, 신문기자가 그렇게 썼데요. 아마도 대학 선생님 소견이겠지요. 그렇담 여보, 유리가 뱉어내고 있는 저 숨은 대체 뭐지요? 풀이 뱉어내는 숨인가? ……” “그만 좀 해, 여보.” “안 할게요, 안 할게요. 영혼이 없는 아이라면, 유리는 무엇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  (219∼220쪽)


 저와 옆지기가 보려고 하는 황윤 감독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치여 죽은 짐승(영어로 하면 ‘로드킬’)’ 삶터를 담아낸 97분짜리 작품입니다. 영화 본 사람들 이야기와 소개를 살피면,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 나라 ‘국도’에서 치여 죽은 수천 마리에 이르는 짐승들을 몸소 찾아나서며 담아냈습니다. 자가용으로만 움직이는 분들은 잘 못 느끼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다녀도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시골에서 살거나 시골길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면 날마다 ‘치여 죽은 짐승 주검’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납니다. 제가 충주에서 살며 서울로 자전거로 오갈 때에는, 날마다 열셋∼스물둘에 이르는 ‘새로운 주검’을 늘 보았습니다.

 국도를 달리는 차는 빠르기를 줄이지 않아요. 100킬로미터도 아닌 120킬로미터나 140킬로미터 빠르기로 내처 달리기만 합니다. 길가에 자전거가 달리건 할매 할배가 걷건 그예 빵빵질을 하거나 위협운전을 합니다. 사뿐사뿐 다니는 운전자도 많지만, 아슬아슬 달리는 몇몇 운전자 때문에 많은 사람들 간이 콩알만해지고 옆마을 마실을 느긋하게 다니지 못해요. 그나마 짐승들은 씽씽 달리는 차에 치이면 어떻게 되는 줄 하나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치이고 밟히고 죽고. 이렇게 죽어서도 또 밟히고 자꾸 밟혀서 아예 떡이 되어 버리고.


.. 햐쿠켄 배수구가 있는 코이지섬 근처에 멸치나 미역이 이상번식해서, 채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은 우리 마을까지 금세 전해지게 마련이다. 미나마타병 미역이라도 봄의 미각. 그렇게 믿는 나는 그 미역으로 된장국을 끓인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된장이 응고되어 미역 된장무침이 만들어진 것이다. 입에 넣으면 그 된장이 걸쭉하니 기분 나쁘게 잇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미역은 뽀득뽀득 마찰음을 낸다. ‘회사는 밤이 되면 냄새나는 기름 같은 것을 바다에 흘려보내. 밤낚시 나가서 물속에서 팔을 집어넣으면 그놈의 것이 살에 딱 들러붙는데, 끈적끈적한 것이 꼭 살갗이 벗겨지는 것 같다니까!’ 어민들이 희귀병 발생 당시에 주고받았던 말을, 나는 멍청히 입을 벌린 채 기억해 낸다 ..  (235쪽)


 국도를 자전거로 달리면서 짐승 주검을 볼 때마다, 이 짐승들은 온몸을 내던져서 ‘빠르기에 목매다는 사람들’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느꼈습니다. 짐승들은 ‘우리는 이렇게 죽지만, 우리를 죽이는 너희들은 목숨 값어치를 아느냐’고 자꾸자꾸 되묻는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없이 죽어 가지만, 우리를 죽이는 너희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시간을 아끼고 큰차를 즐기면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고 캐묻는다고 느꼈습니다.


 (2) 삶과 전통


.. 젊은이들이 마을에, 그러니까 어부로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  (15쪽)


 가만히 생각하면, 저는 굳이 〈어느 날 그 길에서〉 같은 영화를 안 보아도 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치여 죽는 짐승’ 이야기를 여태껏 줄기차게 보면서 사람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요. 막개발 삽날이 아닌 사랑스러운 동네 문화를 북돋우려고 일손을 거드는 움직임이라면,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이야기를 온몸으로 살고 있는 셈이라고도 느낍니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 우리 이웃들하고 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지금 우리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동네 문화를 꺾으려고 하는 인천시장 마음 씀씀이를 좀더 깊이 헤아려야겠다고 느낍니다. 머리로 아는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인 영화 이야기를 이웃 아주머니와 할머니들한테 해 주면서,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이끌 수 있습니다. 영화 전단지라도 몇 장 챙겨 보여드리면서 시간 날 때 영화 보러 가시라고 이끌 수 있습니다.


.. “위로금 인상이라……, 그게 없으면 목에 풀칠하기도 어렵지요. 우리 큐헤이는 병에만 안 걸렸어도 이제 어엿한 어른인데. 남자애들은 중학교만 올라가도 이 근방에선 어엿한 어부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위로금은 아직 아이라고 고작 일 년에 3만 엔 ..  (29쪽)


 그동안 치여 죽은 이들은 들짐승이요 산짐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길에서만 들짐승과 산짐승, 때때로 시골 아지매와 할배였습니다. 한국사람 거의 모두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개발(뉴타운) 바람에 밀려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과 마찬가지’인 더 아래인 밑바닥으로 나동그라집니다.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서민들 사는 집터는 ‘낡고 허름하니 빨리 없애야 할 나쁜 것’이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 판입니다. ‘재개발 이익을 동네 주민한테 돌려 주겠다’고 한들, 우리 삶이 돈 몇 푼으로 무엇이 나아집니까. 어느 날 갑자기 천만 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만큼, 그 천만 원에 값하도록 우리는 살림터에서 떠나야 합니다. 천만 원을 냉큼 챙기는 그때 우리 집터 임자는 우리가 아니라 개발업자와 시청 공무원입니다. 천만 원에 눈이 돌아가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앞날은 오로지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젖어듭니다. 그런데 기껏 그 천만 원으로 어디 가서 집 얻고 사나요.


.. “그런데 후생성이라고 찾아가 봤자 아무도 몰라요. 미나마타에서 왔다고 해도, 미나마타라는 데가 어디 있는 동네냐고. 규슈에 있는 벽촌으로, 지도를 꺼내서 어디 있는 데냐며 짚어 보라고 하고. 게다가 그 미나마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있는 츠키노우라니 유도니 모도니 아무리 말해도, 상대도 안 해 주는 거라. 전혀 듣지를 않아요. 들어줘도, 도쿄사람 특유의 콧소리로, 아, 그래, 그래요? 하면서 흘려듣기만 하더라 이거예요” ..  (91쪽)


 우리 나라 ‘온산병’이나 ‘원진병’, 이웃 일본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그리고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려서 생긴 ‘원폭병’, 우리 나라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걸리고 연탄공장 옆에 살던 사람이 걸리던 ‘진폐증’, 더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기름배 사고 들은 하나같이 우리들이 돈에 매이고 돈만 바라보면서 터져나옵니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는 일, 무기를 끊임없이 만드는 일, 무기 팔아먹는 일 또한 제 배만 불리고 이웃 배는 굶어도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정작 참다운 삶과 아름다운 삶에 눈을 두고 있다면, 무기개발과 군대거느리기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지 말고, 사회문화와 보건복지에 아낌없이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 “바다 속 풍경도 육지하고 똑같이, 봄도 가을도 여름도 겨울도 있다우. 나는 바다 속에는 반드시 용궁이 있다고 믿어. 꿈처럼 아름다울 거야. 바다에 질리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없어” ..  (140쪽)


 무지개를 볼 수 없다고 푸념을 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우리가 날마다 타고다니는 자동차(대중교통까지) 문제를 먼저 풀 생각을 해야 합니다. 흰구름과 뭉게구름을 볼 수 없는 하늘을 탓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과 종이잔부터 해서, 온갖 쓰레기를 어떻게 줄이거나 안 나오도록 살아갈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빗물을 그릇에 받아서 먹던 지난날이 그립다고 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전기제품을 돌리면서 꾸리는 살림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면서 꾸리는 살림이어야 합니다.

 벼농사를 지어야만 땅살리기가 아닙니다. 텃밭농사를 지어야만 땅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에 눈길을 두고, 우리가 함께할 만한 일에 어깨동무를 해야지요.


.. “여보 새댁, 우리 부부는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찢어진 것은 기워 입고, 하늘이 먹여주신 것을 먹고, 조상을 섬기고, 신들을 믿음으로 받들고, 다른 사람 원망하지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살아왔다오” ..  (182쪽)


 새 대통령 이명박 씨가 벌이는 ‘서울-부산 물길’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아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명박 씨가 놓으려는 ‘서울-부산 물길’ 막기에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이명박 씨한테서 ‘서울-부산 물길’을 앗아가 버리면, 이이는 그 다음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할까요. 여태껏 돈을 들여서 공사를 벌여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분인데, 이분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나오게 될까요.

 이명박 씨뿐 아니라, 이명박 씨가 거느리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이명박 씨와 이명박 씨 둘레사람뿐 아니라, 우리 나라 공무원과 개발업자들도 그렇습니다. 대한주택공사가 해 온 일이 무엇이며, 산업자원부가 해 온 일이 무엇이고, 건설교통부가 해 온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땅장사 집장사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한결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를 꾸준하게 말하는 가운데 ‘서울-부산 물길’이 터무니없는 생각임을 깨닫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바보스럽게 살면서 바보인 줄 모르는 바보한테 우리 모두 즐거울 길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함께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미나마타병이었다고, 죽어도 말 안 할 생각이여. 벌써 옛날에 거기를 떠나왔고, 우리 고향 미나마타라고 하면 갈 곳이 없어진다고” ..  (254쪽)


 제주 물맛이 좋아 ‘삼다수’라는 먹는샘물을 팔려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제주 물맛이 좋으면, 우리 사는 이곳에서 마시는 물도 제주섬 물맛 못지않게 시원하고 싱그러울 수 있도록 동네 삶터를 가꾸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정수기를 들여놓고 즐기는 물맛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먹으면서 싱긋 웃을 수 있는 맛을 느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삶터를 찍으려고 멀리멀리 ‘깨끗한 나라’로 비행기 타고 떠나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우리 삶터가 오래오래 아름다운 자연 삶터가 되도록 ‘돈을 이 나라 이 땅에서 쓰면서 우리 삶터를 가꾸어야’ 할 노릇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심정으로, 시민들은 골목골목이며 사거리며 텔레비전 앞에서 열을 올려가며 말하고 있었다. 미나마타병 환자 111명과 미나마타시민 4만5천 명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말들이 들불처럼 확산되더니, 갈수록 대합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 ‘질소공장을 지켜라! 회사를 지켜라!’와 같은 구호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  (275, 278쪽)


 (3) 덮을 수 없는 책, 《슬픈 미나마타》


 어른들이 읽을 만한 ‘미나마타병’ 이야기책은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병》(한울,2006)과 《하라다 마사즈미-끝나지 않은 수은의 공포》(대학서림,2006) 두 권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으로는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의 붉은 바다》(우리교육,1995)가 있습니다. 세 권 모두 한 사람이 쓴 책입니다. 여기에 1927년 쿠마모토현 아마쿠사군에서 태어난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아주머니로 집안살림을 꾸리는 가운데 1969년에 펴냈던 《슬픈 미나마타》(우리 나라에는 2007년에 옮겨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에 앞서 ‘미나마타병’을 다룬 책이 더 있는가 헤아려 보면, 《구와바라 시세이/구와바라 가즈꼬 옮김-미나마타의 아픔》(을지서적,1990) 한 권이 있습니다. 제 다리품이 모자란 탓이 있을 텐데, 여태까지 제가 알아본 ‘미나마타병 이야기’를 다룬 책은 이 다섯 권이 모두입니다.


.. 미나마타병을 잊어버려야 한다면서, 결국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과거 속으로 묻어버려야 한다는 풍조, 지금도 알게 모르게 매몰되어 가고 있는 그 암흑 속에 소년만이 우두커니 혼자 남겨져 있다 ..  (31쪽)


 이 다섯 권 가운데 꾸준하게 읽히는 책은, 어린이책으로 나온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 한 가지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보도사진으로 담아낸 《미나마타의 아픔》은 일본 사회에서나 큰 울림을 이루어냈을 뿐, 한국 사회에서는 터럭만한 울림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하라다 마사즈미 님 두 가지 번역책은 적잖이 전문책이라 할 만하지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조차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 어민들은 상처입고 지치고,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는 더없이 고독해 보였다 ..  (110쪽)


 그래도 아이들을 믿어 볼 수 있을까요. 어린 날부터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을 아이 가운데 하나라도 뒤엉킨 우리 세상과 뒤틀린 우리 사회를 깨달아서, 차근차근 고쳐 나가는 데에 힘을 쏟으리라 믿어 볼 수 있을까요.


.. “죽으면 나도 해부되겠지요.” 어부의 아내 사카가미 유키의 목소리 ..  (151쪽)


 교수님도 하지 않고 지식인도 하지 않으며 의사들은 등을 돌리는 가운데 기자 또한 하지 않던 ‘미나마타병 참모습 캐기’를,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온몸으로 다부지게 부딪히면서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 한 권을 여미어 놓았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병든 몸으로 혼자 살아갈 힘도 벅찬 할아버지가 옥구실 같은 동화를 수없이 남겼습니다(권정생). 동화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이 땅과 이웃 땅 들풀 같은 아주머니들이, 우리 가슴을 시리게 하는 알뜰한 이야기책을 꾸준하게 엮어내고 있습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평교사 한 사람이 우리 말과 글을 올곧게 추스르는 이야기책을 수없이 남겼습니다(이오덕). 평교사 한 분만큼은 아니지만 이 땅과 이웃 땅 들꽃 같은 헌책방 일꾼들이, 먼지구덩이를 파헤치고 뒤지면서 오래도록 빛이 나는 고운 책들을 꾸준하게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댁의 할머니도 미나마타병이 아닌가요?” 이렇게 묻기는 쉽다. 하지만 미나마타병은 문명과 인간의 존재의 의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  (205쪽)


 수은공장(질소공장)에서는 미나마타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수은공장 사장은 끝까지 ‘우리는 지역발전에 힘을 썼을 뿐이다’면서 핑계를 대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아무 책임을 안 지려고 발뺌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수은공장이 있습니다. 수은공장 못지않게 다른 온갖 공장에서는 우리 공기와 물과 흙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쏟아냅니다. 제대로 걸러내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돌아가는 공장이 수두룩합니다. 쇠붙이 다루는 공장 옆에 1분만 서 있어 보십시오. 숨이 막히고 코가 뚫어질 듯 아픕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공장보다 더하다고 할 만한 공해물질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추 하나로 텔레비전을 켜고 세탁기와 전자레인지와 청소기와 에어컨을 돌리고 겨울을 여름같이 살고 있습니다. (4341.4.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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