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 늙다리 보리피리 이야기 5
이호철 지음, 강우근 그림 / 보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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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소’와 얽힌 추억에 젖는 일은 좋지만
 [그림책이 좋다 56] 이호철, 강우근 《우리 소 늙다리》



- 책이름 : 우리 소 늙다리
- 글 : 이호철
- 그림 : 강우근
- 펴낸곳 : 보리 (2008.12.29.)
- 책값 : 8500원


 (1) ‘소’를 모르는 우리 삶


 둘레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러 가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이 으레 말씀하시는데, 마음은 영화관에 가 있어도 몸은 집에서 아기와 복닥입니다. 더욱이 인천에서는 딱 한 곳에서 영화를 올린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우리 동네에서 퍽 떨어진 곳임만 알고 있어서 섣불리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찾아간다 한들 저 혼자 먼저 보고 옆지기 나중에 보고 하지 않으면 볼 수도 없습니다.

 너무 많이 바란다고 할는지 모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극장 가운데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서 걱정없이 볼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기가 으앙으앙 울면 시끄러워 다른 이가 못 보게 된다고만 말할 뿐, 아이키우기로 밤잠 이룰 길 없는 수많은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헤아리는 극장 시설이란 꿈을 꾸지 못합니다. 하기는,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 나들이를 요즈음만큼이라도 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많은 이들 목소리와 땀방울이 있어야 했는지요.

 우리 둘레를 살피면, 책방도 도서관도 영화관도, 또 여느 밥집조차도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기에는 아주 안 좋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돈을 많이 들여 시설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만큼 장사하는 이한테 돈이 떨어지지 않으니 마음은 먹어도 선뜻 옮기지 못합니다.

 장애인편의시설이란 전철역에 리프트 놓거나 에스컬레이터 까는 일만이 아닐 테지만, 우리들 생각과 눈길은 ‘장애인 복지와 문화’뿐 아니라, ‘장애인 아닌 비장애인 복지와 문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남 이야기할 까닭 없이, 저부터 아이키우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목까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아이키우기를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채, 아이키우기를 하는 엄마 아빠가 얼마나 ‘세상 복지와 문화’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갈밖에 없는지, 그러면서도 오히려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게다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지치면서 미치게 되는지 알 길이 없었겠지요. 동네에서 성당을 다니는 서른일곱 아주머니는 집에서 애 보다가 미칠 듯하면 포대기에 아기 똘똘 싸매고 업어서 바깥으로 바람 쐬러 나온다고 하시더군요. 혼자서 애를 보는 일이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거든요. 더구나 아이만 보아야 하나요. 집안일 해야지, 남편 뒷바라지 해 주어야지, 시부모 계시면 또 시부모도 모셔야지, 아기 말고 다른 형제가 있으면 하나하나 따로 돌보아야지, 일이란 끝이 없습니다.


.. 늙다리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여물만 맛나게 먹습니다. 망나니도 제 어미 옆에서 날름날름 마른 풀을 골라 먹고요. 뒤꼍에 쟁여 둔 검불나무를 한 아름 가져와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풍구로 바람을 불어 넣어 가면서 왕등겨를 한 움큼씩 아궁이 속에 던져 넣으니까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이제 아궁이 앞에 쌓아 둔 마른 솔가지를 ‘똑똑’ 부러뜨려 넣습니다. 잔솔가지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 타오릅니다. 소죽이 끓는지 솥에서 김이 ‘피이’ 솟아오릅니다. 늙다리는 더 못 참겠는지 빗장 밑으로 목을 쑤욱 빼고 코를 식식거립니다 ..  (17∼18쪽)


 영화 〈워낭소리〉는 못 보았지만, 지난 설날, 옆지기 식구들 사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그곳 식구들하고 ‘일소 부리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큐멘타리로 보았습니다. 영화만큼 가슴을 적신 이야기인지는 영화를 못 보아 모르겠지만, 영화 〈워낭소리〉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는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마을에서도 꼭 한 집, 당신만 수십 해에 걸쳐서 소를 부려 농사를 지으시는데, 송아지 한 마리를 일소로 부리기까지 어떻게 애를 먹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합니다. 처음 코뚜레를 뚫어 아픈 나머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송아지 모습을 보면서 코끝이 찡하거나 눈물이 안 날 사람이 있을까요. 소를 부리는 할아버지도 미안해 하면서 송아지 등을 어루만져 주는데.

 농사짓는 늙은 가시버시는 ‘지을수록 빚잔치’를 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그 아끼고 사랑하던 일소를 팔려고 내놓습니다. 고추를 팔아도 큼직한 한 상자에 고작 2500원밖에 못 받는데, 빚을 안 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나라밖으로 판다는 그 큰 고추상자는 상자값만 해도 1500원. 우리가 저잣거리 나들이를 가서 그 상자만큼 고추를 사려면 아마 10만 원은 치러야 할 듯하건만, 농사짓는 사람은 이렇게밖에 일삯을 못 건지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소시장에 간 할아버지는 쓰겁게 웃으면서 소를 도로 데려옵니다. 일소 값을 고작 150만 원 쳐 주기 때문입니다. 고기소로만 소를 사고파는 요즈음이니, 일소로 소를 사고팔려 할 때 어느 누가 사 가려 하겠습니까. 할머니는 빚 250만 원을 갚으려면 소를 팔아야 한다고 채근댔고, 할아버지는 어쩌는 수 없이 소를 팔려 했는데, 소를 팔아도 빚이 100만 원 남게 되면, 아예 소를 못 팔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착하게, 아니 고맙게 일을 잘해 준 소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서, 문득문득, 전민조 님 사진책 《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눈빛,2005)이 생각납니다. 이 사진책 겉에는 섬마을 빡빡머리 아이가 일소를 부리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는 나이가 얼마 안 되었으나 지게를 지고 있는데 지겟다리가 땅에 끌릴 듯합니다. 아이나 소나 배불리 먹지는 못하는 듯 몸집이 여위었습니다. 소는 갈비뼈가 드러나고 등날이 날카롭다고 할 만큼 등뼈가 불거져 있습니다.

 지난날은 이 나라 어디인들 배불리 먹으며 살았겠습니까만, 섬마을은 좀더 힘들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런 삶자락은 섬마을 모습을 담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담기고, 이렇게 담긴 모습은 그 뒤로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가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가 살아온 모습’으로 또렷하게 새겨집니다.


..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등불을 늙다리 주둥이 앞에 바짝 갖다 대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막 소리를 질렀습니다. “언놈이 때렸구나! 우리 늙다리가 우쨌길래 이래 놨노! 헤헤이, 늙다리 코가 이기 뭐꼬! 말 몬하는 짐승을 우예 이래 때리겠노, 으이!” 우리 집 힘든 농사일을 다 하는 일꾼, 아버지가 그리 아끼는 늙다리를 저리 해 놓았으니 펄쩍 뛸 수밖에요 ..  (44쪽)


 인천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저보다 두어 살 또는 서너 살 어린데, 송도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가운데무렵, 이이가 다닌 학교 건너편 논에서 일소를 부리며 논갈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송도고등학교 둘레는 온통 아파트로 바뀌었기에, 그 둘레가 시골 논밭이었음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아파트로 갈아엎히기 앞서까지, ‘똑같은 인천’이었다고 하여도, 더욱이 1990년대임에도 기계가 아닌 소를 부리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렇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고, 또 몸소 겪지 않았어도 영화며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다고 할 때에는 ‘움직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 삶을 안다고 한다면, 철거민을 만들어서는 안 되며, 철거가 되려는 집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한테 우악스러운 용역깡패나 특공경찰을 선물로 갖다 안기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찰총장이나 대통령 부모님이나 동무가 그 ‘철거 대상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그처럼 몰아세울 수 있었을까요. 자기 부모나 동무가 안 산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런 가난과 고단함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그와 같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소방차 물을 뿜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경찰총장이나 대통령만 모르지 않습니다. 용역깡패 일을 하는 젊은이와 특공경찰 노릇을 하는 젊은이 또한 ‘철거민 이웃’을 모릅니다. 철거민 이웃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모릅니다. 그리고, ‘일하는 소’ 삶을 모를 테지요. ‘아이키우는 아줌마 아저씨’ 삶 또한 모를 테지요. ‘입시지옥이 무너뜨리는 아이들’ 삶을 모를 테며, ‘일제 식민지 찌꺼기’가 어떻게 우리 삶 구석구석 남아서 힘을 내는지도 모르리라 봅니다.


 (2) 아쉬운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


 지나온 우리 삶을 찬찬히 돌아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로 풀어내는 《우리 소 늙다리》를 읽습니다. 구수한 글과 푸진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이 책을 펼치는 분들마다 ‘참 좋구나, 참 따뜻하네’ 하고 생각하리라 봅니다. 오로지 돈벌기에 매이는 현대물질문명으로 치닫는 한국땅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를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으니,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읽히며 보여주면 퍽 괜찮으리라 봅니다.


.. 늙다리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더니,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아직도 늙다리 주둥이 밑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늙다리는 순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늙다리 두 눈 밑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늙다리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  (52쪽)


 그런데 그림 몇 대목이 껄끄럽습니다. 무엇보다 ‘소’ 그림이 마음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 그림’인데, 소가 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미소 젖을 무는 송아지는 더더구나 송아지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릴 적 집에서 소를 키우셨다는 분이 글을 썼는데, 게다가 이분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보리,1997)라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책’을 엮어낸 분인데, 어찌 《우리 소 늙다리》 겉에 그려진 소 그림이 이렇게 엉터리가 되고 마는지 궁금해집니다.

 갓 태어난 송아지도 키가 꽤 큽니다. 제법 자란 송아지는 더더욱 큽니다. 그러나,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보면 송아지가 목이 아파라 고개를 치켜들고 젖을 물고 있습니다. 글을 쓴 이호철 선생님이 엮은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에 실린 아이들 그림을 살피면, ‘젖 무는 송아지’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소 모습’만 보더라도 송아지 등짝이 어미소 배에 닿는 가운데 송아지가 고개를 모로 돌려서 옆으로 젖을 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필을 잡으면 그리고 싶어요》와 그림이야기 《우리 소 늙다리》를 낸 출판사는 같은 곳입니다.


.. 내가 어릴 때 농촌에서는 소가 집안의 큰 일꾼이었습니다. 논밭 갈고 무거운 짐 나르는 일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도 다 했으니까요. 어지간한 일꾼 몇 몫의 일을 했습니다 ..  (58쪽)


 오늘날 아이들이 모르는 우리 삶 소담스러운 한구석을 밝히면서 빛내는 일은 큰뜻이 있습니다. 소를 소답게 알아야 소고기를 먹든 소를 부려 일을 하든, 소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엔 그랬지’ 하는 투로 섣불리 아이들한테 ‘지식 + 교훈’만 떠안기려고 하는 우리 어른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우리 어른들도 ‘소 삶과 매무새’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설피 치우쳐지거나 비뚤어진 지식과 교훈을 떠먹이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설 무렵 일산 옆지기네에서 텔레비전을 보니, ‘청량음료가 나쁘고 치약 샴푸 나쁘며 과자 라면 나쁘다’ 하는 풀그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송사에서 ‘화학첨가물 집어넣은 공산 식료품’이 우리 몸에 나쁘다고 한들, 이런 공산 식료품에 길들어 있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먹이게 됩니다. 제대로 농사지은 먹을거리를 먹이지 않습니다. 값싼 공산품을 ㅇ마트나 ㄹ마트 같은 데 가서 한꾸러미 사들여 자가용 짐칸에 싣고 아파트로 돌아올 테지요. 그리고 집에서 맥주깡통을 따면서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나쁜가’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으로 봅니다. 때때로 《우리 소 늙다리》 같은 ‘옛생각(추억) 불러일으키는 애틋한 이야기’에 눈가를 적십니다. (4342.2.7.흙.ㅎㄲㅅㄱ)
 

 

[동영상] 엄마 젖 먹는 송아지 "예쁘다"

글을 다 읽은 분은 동영상을 보십시오. 이 그림책은 반드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잘못된 그림으로 정보를 건네는 일은 아이한테 불량식품 먹이는 일보다 더 나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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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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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군대는 아들을 머저리로 만들고, 딸한테 생채기를 남긴다
 [잠깐 읽기 24]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책이름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글ㆍ사진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펴낸곳 : 삼인 (2008.12.5.)
- 책값 : 12000원



 (1) 내가 겪은 군대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이 아기가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반가운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내였으면 기저귀를 갈다가 갑자기 오줌을 찍 사면 얼굴에 맞잖아요’ 하고 말하지만, 그런 아기 오줌질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내로 태어날 때 가장 걱정스러운 ‘군대’ 문제는 아직도 풀릴 길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 현재 국방부 훈령인 전공사상자 처리 규정엔 ‘자살’ 규정만 있고 ‘구타나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한 자살의 경우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공무 수행 중 자살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  (64∼65쪽)


 그렇다고 계집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군대’ 문제 때문에 피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사귀는 남자아이가 군대에 갈 때라든지, 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랑하여 혼인할 남자아이가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에 걸쳐 몸과 마음에 받은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에는 똑같이 ‘군대’ 때문에 피를 보게 됩니다.

 저처럼, 군대에서 바보 멍텅이 돌대가리가 되어 버릴 뿐더러, 군대를 거치면서 입이 걸어지고 마음이 메말라 버리는 사람들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지만, 저하고 함께 사는 옆지기도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 장인 장모 모두 ‘군대’ 때문에 피를 보는 셈입니다.


..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국가에서 데려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 원인조차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함께 배를 타고 먹고 잤다는 부함장이라는 사람은 20여 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 식음 전폐하기를 몇 날 며칠. 부모는 생업도 접고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아들의 속옷이 제대로 인계되지 않고 심지어 일부 품목은 부모의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세탁돼 있었다. 자꾸 감추려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76쪽)
 

 나날이 군대 가는 사내 숫자가 줄어, 이제는 중졸자도 군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중졸자까지는 군대에 안 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간 1995년에는 ‘고퇴자(= 중졸자)’도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중졸이면서 군대에 온 녀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군대에서 “야, 넌 어떻게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데 군대에 왔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한민국 군대에 너희들이 잘못 들어왔어도 국방부 시계가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어!” 하면서 까닭없는 주먹질과 얼차려를 덤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무렵 제 후임병으로 ‘다른 형제와 친척 없는 외동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생활보호대상자’ 집안 아이도 여럿 들어왔는데, 도무지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이 아이들이 어찌 군대에 들어왔던가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곰곰이 살피니,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북파간첩 키우는 부대’로 끌려갔다가(징집) ‘북파간첩 대상자 부적격 판정’을 받고 ‘일반 군대, 이 가운데 강원도 산골짝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육군 보병’으로 흘러든 셈이더군요.

 요즈음도 북파간첩을 키우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1997년에 전역을 하는 그때까지, 한국군에서는 틀림없이 북파간첩을 키웠고, 그 부적격자는 우리 부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연고자가 더 없는 외로운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군대면제자였음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 왔으며, 전역하는 날까지도 이런 일은 1급비밀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이웃집 아저씨도 북파간첩 출신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키 크고 덩치 우람해 또래 동무들 모두가 무서워했지만, 우리들보고 ‘남자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해!’ 하고 으르렁댈 때를 빼놓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은 아버지한테 얻어맞으면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집에서도 매섭게 체력단련을 해야 했습니다. 북파간첩 출신 아저씨는 5층짜리 아파트 마당에 샌드백과 평행봉을 손수 용접하고 시멘트 부어서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도 체력단련을 하라고 시켰고, 아저씨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체력단련은 재미있는 놀이라서 곧잘 즐겼습니다.

 아저씨네(라기보다는 이웃집 형네) 놀러가면 때때로 아저씨가 임진강이며 북한강이며 물속으로 헤엄쳐 북녘으로 넘어 들어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당신이 군대에서 일찍 나온 까닭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통이 나서 자기 동료가 바로 옆에서 온몸에 총알구멍이 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주검이라도 건지고 싶었지만 자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혼자 빠져나왔다는데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답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5분 동안 물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훈련을 받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물속에서 자기들이 숨을 못 참고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고참들이 군화발로 머리를 까고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꼭 5분 동안 물속에서 물을 마시면서라도 버티게 했다고 했는데, 소름이 돋는 한편, 나도 5분 동안 물속에서 참을 수 있을까 하고 집에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아 보곤 했습니다.


..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지만, 늙은 아비와 어미는 여전히 답답함이 남았다. 아들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국방부가 군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 가족들은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에 동의했다.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부검 결과는 대부분의 의문사가 그렇듯 자살이었다. 심한 모욕과 얼차려, 구타를 자행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병사와 간부들은 제대로 된 징계 한 번 받지 않았다 ..  (81, 94쪽)


 어릴 때에는, 저 또한 군대라는 곳에 들어가기 앞서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군대에서 지역차별을 받으면서 얼차려와 주먹다짐으로 시달리다 못해 고향 동무들하고 같이 실장갑에 대못을 박고 “썅, 서로 죽어 보자!”고 싸움박질을 했다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이나 뻥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군대에 들어가고는, 그리고 그 군대가 남녘땅 군대에서는 가장 외지고 춥고 고되다는 곳으로 용케(?) 들어가서 스물두 달을 채우고 나오는 동안에는 생각이 아주 뒤바뀌었습니다. 왜 부잣집 사람들이, 정치꾼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하는지를 온몸으로 깊디깊이 깨달았습니다. 훈련소와 자대에서는 ‘신상명세서 쓰기’ 종이를 나누어 주며 한쪽에 ‘내 식구나 친척 가운데에 국회의원, 시도 지사 따위가 있는지 적으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간부 가운데 식구나 친척이 있으면 적으라 했는데, 이렇게 적은 동기들은 모두 ‘좋은’ 데로 빠져나갔고, ‘줄 닿는 뒷배’가 없는 저 같은 떨거지는 기차와 배와 군짐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강원도 양구 산골로 엉덩이가 걷어차이며 들어갔습니다.

 자대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눈이 얼마나 오지게 오던지, 사단휴양소에서 이틀이나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눈밭을 헤치고 겨우 자대에 들어가니 더블백을 풀기 앞서 빗자루와 눈삽과 흙삽을 하나씩 받고는 한 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올라가서 보급로 눈치우기를 해야 했습니다. 훈련소와 자대를 거치며 ‘이놈(고참)들 눈에 밉보이면 그대로 죽어 버릴 수 있구나(이때는 ‘의문사’를 몰랐고, 그냥 ‘개죽음’만 알았습니다)’ 하고 느꼈기에 죽자 사자 고참 꽁무니에서 1미터 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붙어 겨우 ‘눈치우기 산타기’에서 낙오를 안 했는데, 고참은 자기 뒤에 1미터 넘게 떨어진 모든 후임병을 눈밭에 머리박기를 시키며 발로 뻥뻥 걷어찼습니다. 등과 배와 얼굴을. 낙오를 안 해 옆에서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저로서는 ‘안 맞아서 다행’이 아니라, ‘나만 안 맞으니 이따 돌아가서 지금 맞은 사람(다른 고참)들한테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어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등병 때,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며 저녁점호를 받던 동기는 ‘치약뚜껑에 머리박기를 하는 채’로 고참한테 발길질을 받아서 이마가 쭉 찢어져서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고, 제가 전역할 무렵 스물여섯 나이로 고시에 실패해서 들어온 ㄱ대 공부벌레 늦깎이는 날마다 뒷간에서 대여섯 살 아래 동생(고참)들한테 얻어맞고 우느라 늘 눈이 부어 쳐다보기에 언제나 안쓰럽기에, 제 앞으로 나오는 담배를 몇 갑씩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주곤 했습니다. 이 녀석(형)은 이때부터 담배를 배웠습니다.


.. 경찰들은 또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먼저 현덕의 동료 부대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혹시 부대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살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부대원과의 개별 면담은 허락하지 않았다 … 부모는 아무리 애간장이 끊어져도 죽은 아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찾아간 군부대에서는 오히려 “아들이 나약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부대에 피해를 주었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적반하장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과 맞서기에 늙은 부모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  (146, 156쪽)


 그렇지만 모든 군대가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로 얼룩져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나왔던 그 양구 골짜기 부대만(민통선 안쪽에서 이북 군인과 마주하고 있는) 더 모질었는지 모릅니다. 해병대 전적비가 있는(도솔산) 그 산골짜기 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만 해를 볼 수 있는 비와 안개와 눈으로 덮인 곳이었고, 주둔지 대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중대에서도 소대가 따로 지내기도 했던 만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무시함이 더 깊었는지 모릅니다.

 사단장이나 별 달고 무궁화 단 분들께서 우리 부대에 나들이하실 때마다 모든 중대원이 하루 내내 ‘취나물 뜯기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선물로 앵겨 드리지 않으면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은 괜찮았습니다. 한 해에 한 번씩 사단장님께서 헬기가 아닌 지프를 타고 가칠봉전망대로 헤엄을 치러(가칠봉gop 꼭대기에는 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별 단 분들께서 헤엄치러 놀러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지오피 꼭대기에 마련된 수영장은 우리 같은 땅개들이 자갈과 시멘트와 모래와 물을 주둔지부터 한 사람씩 등짐 지고 날라서 만들었습니다) 가시는데, 사단장님 지프가 작은 돌멩이 하나에라도 바퀴가 통! 하고 흔들리다가는 연대장 지시사항으로 우리 중대에 불벼락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뭐 이런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혹한기훈련을 앞두고 사격훈련을 하는데 그 추위에 총기고장도 잦고 손이 떨려 제대로 맞추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형편은 아랑곳 않고 제대로 못 쏜다고 몇 시간 동안 ‘뒤로 포복’으로 눈밭을 밀며 자대복귀 시키다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무전병 헬멧에 총질을 해대어 구멍을 내고 다음에는 우리들 대갈통에 구멍을 내겠다던 중대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도 그리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관물검사를 하며 ‘불온서적 색출’을 하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불온서적이라고 스무 권 남짓 찾아내어 태우게 하는 일이 저한테 떨어져, 어찌 책을 태우나 속이 아파서 안 태우고 소각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 놓았으나 들키고 말아, “너 빨갱이 아냐? 간첩 아냐? 너희 같은 새끼들은 총으로 쏴죽여서 저기(철책) 안쪽에 갖다 던지면 월북했다고 신고하면 그만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갖은 징계와 구박과 주먹질을 받던 일도 있었는데, 여느 날 늘 벌어지는 주먹다짐과 욕설과 얼차려를 돌아보면 새발바닥 피 같은 장난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똥물먹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 앞서 우리 부대에서도 푸세식 뒷간을 혀로 핥아서 닦기를 시키는 고참이나 중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이 있었고, 삽날과 곡괭이자루로 맞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으며, 소총 소염기에 머리박느라 머리에 구멍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2) 군대에서 살아남으면 용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참 많이 맞았지만, 저는 적게 맞은 셈이고, 저 또한 후임병을 아주 적게 때렸습니다. 저는 꼭 세 번 때렸는데 세 번 때릴 때 거의 반죽음으로 때려 놓았으며, 웬만하면 주먹이 아닌 입으로 후임병을 들볶았습니다. 저를 때렸던 고참은 전역 뒤에 어느 한 사람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저한테 맞은 후임병 셋도 두 번 다시 연락이 안 됩니다. 때린 분한테는 왜 때렸는지 묻고프고, 맞은 동생한테는 너무 미안하다고 빌고 싶으나,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나거나 알고 지낼 수 없습니다.

 그저 다들 그 끔찍한 데에서 살아남았으니, 그 일로 다 잊자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한테 욕 많이 먹던 어느 분은 예닐곱 해 앞서인가 길거리에서 두어 번 마주쳤는데, 술이나 마시자며 연락처 좀 주고받자고 했으나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 마시지’ 하면서 끝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르지만, 모두들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군대에서 보냈던 일은 훌훌 털어버렸는지 모를 노릇이고, 털어낸다 해도 털어지지 않아 그때 생채기가 오늘날 자기 모습으로 굳은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우리 애를 제일 괴롭혔던 그 군인이, 아주 부대 안에서 소문이 났더라고. 부산역 TMO에서 그 자를 조사하는데, 난 좀 늦게 갔어. 헌병 조사관이 추궁을 하니까, ‘어, 그럼 진술 거부하겠다’ 그러더군. 그러니 헌병이 또 달래서 진술을 시키는데……. 그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날보고 힐책을 하더라고. ‘왜 아들을 그리 약하게 키웠습니까’라고. 바로 조사관들 앞에서, 허허허 ……. 허허허, 우리 애를또 많이 괴롭혔던 자들 중에 전주에 있는 한 명은 그래도 가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쥐어박아도 살살거리고 살아남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뜻이겠지.” ..  (250쪽)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라는 책을 읽으며, 어느 한편으로는 ‘군대에서 죽은 이 사람들은 그나마 자기들 목숨을 내려놓았을 때’ ‘그래, 이제 더는 안 맞아도 되고 더 욕을 안 먹어도 되며 더 속으로 눈물 안 흘려도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군대 적 때 일이 그러했으니까요. 이등병 때 수없이 얻어맞고 불쌍하게 있던 동생들이 일병이 되고 후임병이 생기니 자기가 받은 그대로 후임병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는 모습을 보며, “야, 너도 이등병 때 그렇게 겪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고 불러세워 따끔히 한 마디 하면 “네, 죄송합니다! 안 그러겠습니다!” 하면서도 눈빛에는 ‘씨, 씨, 그동안 맞은 만큼 돌려줘야지!’ 하는 불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뼛속 깊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맞는다. 맞다가 죽을 수 있다. 맞다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박혀 있으니 우리들 여느 사람 여린 힘으로는 어쩔 길이 없는가 싶곤 합니다. 그냥저냥 이등병 일병 때는 죽지 안을 만큼 맞고 버티자고 하다가, 상병 병장이 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면서 속풀이 하자고 생각하게 되는가 싶곤 합니다. 안 맞고 크면 이상하고, 안 때리며 고참질 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가 싶습니다. 제가 상병이 되어도 동생들을 한 번도 안 때리니 동기들이 “야, 너만 안 때리면 우리가 어떻게 되냐. 너 때문에 우리가 상병이 되도 병장들한테 맞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자꾸 그래서, 상병 6호봉에 이르러 처음으로 동생들한테 욕을 했고,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서 비로소 주먹다짐을 했습니다. 이때에는 “얌마, 병장이 되어서도 그러면 우리 밑에 있는 애들이 함부로 날뛰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 조직 질서가 남자들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또아리를 틀고, 사회에 돌아와서도 이 버릇이 씻기지 않아, 한국땅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리 몸소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옷을 개고 내무반 쓸고 닦고 이부자리 치우고’ 했어도, 군대에서 벗어나는 그때부터 모든 집안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로 넘기고, 무슨 일만 있으면 쉽게 주먹을 들고 손찌검을 하고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푸름이들이 ‘제도권 교과서’가 아닌 ‘마음밭 살찌우는 진짜 책’을 찾아나서지 못하듯, 군대지옥에서 풀려난 젊은 사내가 ‘폭력으로 얼룩진 위계 질서’를 떨구지 못하고 자기 또한 ‘밥그릇 서열과 주먹힘’ 따위로 사람을 깔보거나 얕보거나 푸대접하지 않느냐 싶어요.


.. “텔레비전을 보면 매번 군대가 좋아졌다, 군대가 변했다는 얘기를 떠들잖아. 난 그거 하나도 안 믿어. 군대 깊숙이 자리잡은 폐쇄성과 폭력성이 사라지기 전에는 변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  (98∼99쪽)


 2006년 여름이던가, 서울 어느 미술관에서 ‘이름난 어느 서양 그림책 작가’ 원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분 이름을 잊었지만, 온나라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사랑받는 분인데, 이분은 미국사람이면서 ‘군대에 안 가고 산림보호원 공익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총을 드는 일은 자기 마음을 다치게 할 뿐 아니라, 내 이웃을 다치게 하기에 군대에 안 가겠다고 하여, ‘대체 복무’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연을 들이마시면서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고 밝히더군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군대라는 조직을 키워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키울 노릇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돈-이름-힘이 있는 사람은 다 빼돌릴 수 있는데다가, 군대라는 곳부터 ‘좋고 나쁜’ 곳으로 갈리는 한편, ‘사람 죽이는 훈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우리 스스로 이 땅 젊은 넋을 살인기계이자 바보로 만드는 틀거리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대체복무제’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 나라 앞날이 어찌 될는지 걱정과 근심일 뿐입니다. 권력자한테는 젊은 넋이 모두 깨어 ‘권력이 썩지 않도록 일어서는’ 일이 걱정과 근심일는지 모르나, 이 나라와 삶터를 돌아본다면, 젊은 넋은 ‘살인기계 훈련’이 되도록 할 일이 아니라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몸을 기르고 다스리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는 외로운 어르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손이 모자란 공장과 농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넋이 세상을 더 알뜰하고 애틋하게 껴안거나 부대끼도록 하자면, 이 젊은 넋들 손을 ‘참다운 땀방울 흘리는 곳’으로 돌려놓아야지 싶습니다. 젊은 넋이 총칼 훈련 받을 시간에, 시골 논밭에서 손농사를 짓도록 하면, 우리 나라 농업은 100% 유기농으로 바꾸는 한편, 나라밖에서 곡식과 푸성귀를 사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젊은날, 공장에서 일하면서 ‘물건 하나 만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이 젊은이들이 새벽녘 길거리 청소를 해 보면서 ‘우리가 술주정을 하면서 길을 마구 더럽히거나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이 동네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땅 모든 아들들은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편, 또래 동무들뿐 아니라,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는 딸들한테 사랑스러운 벗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군대 틀거리로는 이 땅 모든 아들들은 이태 동안 영 글러먹은 머저리나 깡패가 되어 갈 뿐입니다. (4342.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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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의 상수리 나무집 사람들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공선옥 지음, 이형진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81 ― 아픔을 먹고 사랑으로 나눈 ‘정신대’ 할머니
 : 공선옥,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책이름 : 상수리나무집 사람들
- 글 : 공선옥
- 그림 : 이형진
- 펴낸곳 : 어린이중앙 (2005.5.31.)
- 책값 : 8500원



 (1) 아픔을 먹고 살아가는 할머님들


 한국땅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으로 살았던, 그러나 한국 여자였기에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국 정부에 등록한 ‘성노예 피해자’는 이백서른네 분이라 하고, 이 가운데 백 사람이 채 못 되게 살아 있다고 합니다. 성노예 피해자는 공식 집계로 잡히지 않았고, 또 나라에서 소매 걷고 찾아나서거나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는 강제징용자와 강제징병자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원폭피해자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빼앗긴 사람들 아픔을 고이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농사꾼들 쌀을 빼앗아갈 때 굶어죽거나 굶주린 사람들 슬픔을 두루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또 그 만주와 일본에서 다른 데로 보내진 사람들을 하나도 어루만지지 않았습니다.

 참을 숨기고 거짓을 드러낸다는 새 교과서가 나오는 까닭은 먼 데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우리가 몸소 겪은 아픔과 슬픔을 아픔과 슬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껴안지 못했는데, 어찌 참다운 교과서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예 거짓스런 교과서가 나오고 아이들한테는 거짓된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가르치게 되며, 아이들 스스로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알아보고자 책방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해 보았자, 참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일러 줄 마땅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도서관 가운데 책을 알뜰히 갖춘 곳이 드물 뿐더러, 이런 도서관까지 갈 겨를조차 없이 입시에 매이고 돈벌이 회사일에 얽히는 우리들입니다. 학교를 다니건 학교를 안 다니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발자국과 참모습을 알고 느끼고 새기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 옥주가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을 때, 길거리로 젊은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관계를 끊고 살았던 일본하고 다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협정을 맺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 일본에서 돈을 받았다고 했다. 소문에는 그 돈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조선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키고,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해서 주는 돈이라고도 했다. 일본에서 받은 돈 중에 얼마를 일본군에 끌려가 전쟁을 치르다가 죽었거나 다친 사람들을 조사하여 위로비로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도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자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옥주는 동사무소에 가서 물었다. “혹시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온 사람들에게도 나라에서 돈을 주나요?” 동사무소 사람은 옥주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말했다. “아줌마가 정신대 갔다 왔소?” “…….” 옥주는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동사무소 사람이 마치 나무라듯이 물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조사를 한다 해도 정신대 갔다 왔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소? 정신대는 솔직히 일본 군인의 노리개가 아니었소. 누가 알까 부끄럽지도 않소?” 옥주는 그만 동사무소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 옥주가 뭘 잘못했다고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옥주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일본 군인한테 속아서 따라간 것뿐이다 … 동사무소 사람은 제 어머니나, 누나나, 여동생이나, 딸이 정신대로 끌려갔어도 노리개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  (42∼45쪽)


 곰곰이 되새겨 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1982∼1993년 사이에,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쳐 준 분들 가운데 ‘정신대’든 ‘종군위안부’든 ‘성노예’든 한두 마디라도 올바르게 일러 주면서 깨닫도록 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있었는지.

 글쎄, 저로서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고 떠올립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마디로는 들은 적 있으나 ‘시험문제에 안 나오는 이야기’라서 그랬는지, 또 우리가 그리 재미있어 하지 않을(?) 듯하다고 그랬는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운 적은 없습니다. 학교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에서도 못 찾고 인천에서 크고 책 많다고 내로라하는 새책방 어디에서도 정신대 할머니를 다룬 책은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비로소 정신대 할머니들 다룬 책이 흘러나왔을 때 알아보고 깜짝 놀랐고, 그 뒤로 하나하나 살펴보고 알아가면서 읽어 나갔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부터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또 《정신대실록》부터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까지, 또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부터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까지, 또 《일본군 군대위안부》부터 《위안부 리포트》까지, 샅샅이 찾고 보면 고작 열 권 남짓밖에 되지 않는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다룬 책들입니다. 제 깜냥껏 찾고 살피며 읽고 간직하고 있는 책으로, 이밖에 《증언, 여자 정신대 8만 명의 고찰》(센다 가꼬오), 《위안부》(조지 힉스), 《실록 여자정신대 그 진상》(한백흥), 《자료집, 종군위안부》(吉見義明),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강용권), 《봉선화에 부치는 고백》(히노 순조, 쯔즈끼 쯔토무), 《종군위안부》(千田夏光), 《나, 내일 데모 간데이》(혜진),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한국정신대연구소), 《종군위안부》(이토 다카시), 《종군위안부》(노라 옥자 켈러) 들이 있습니다.


.. 옥주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겼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옥주는 안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나쁘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 옥주는 그런 사람을 보면 분노가 일었다 ..  (92쪽)


 우리 스스로 돌아보자니 너무 괴로워 묻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되새기자니 참으로 부끄러워 덮어 버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알아보자니 자료가 턱없이 모자라 두 손 드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가르치자니 성교육조차 제대로 안 되는 가운데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하는 탓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태일을 추모하고 떠올리듯, 백범을 떠올리고 되새기듯, 우리들은 우리 땅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한 가슴을 읽고 슬퍼한 마음을 헤아리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잊지 않을 수 있어야 우리 세상과 삶을 아름다이 가꿀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잊으면서 잘못되거나 뒤틀린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고, 되새길 일을 되새기지 않으면서 엉뚱하거나 비뚤어진 샛길로 눈길이 쏠리게 되지 않느냐 싶어요.


.. “히로시마랍니다. 원자탄이 떨어졌지요. 차라리 그때 다른 사람처럼 죽어 버렸다면…….” 옥주는 혹시 아낙의 입에서 정신대라는 말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원자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라고 했다. 정신대 갔다 온 사람이건 원자탄을 맞은 사람이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정신대 갔다 온 옥주와 아낙이 다른 건, 그래도 이 아낙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비록 건강하지 못한 아이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본 아낙이 옥주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123쪽)


 정신대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군대위안부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노예란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이 나라 우리들과 이웃들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내 이웃과 동무가 겪은 일이고, 내 이웃과 동무가 아니라면 내 식구와 살붙이가 겪은 일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고 우리 옆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못하던 때 어이없이 짓밟히면서 겪어야 한 일입니다.


.. “팔자도 내림이라, 듣자 하니 떡장수 할멈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하더니 그 딸은 또 미군 위안부라. 모녀가 팔자도 기구하네.” 그러면서 사람들은 또다시 왁자하게 웃어댔다. 시장 사람들은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라서 더럽다고 한다. 한국사람과 다른 새까만 아이를 낳아서 영희는 사람들에게 더 손가락질을 받는다. 옥주도 안다. 영희가 말 안 해도 옥주는 이미 영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다 안다. 영희가 미군 부대 여자였다는 것을 옥주도 알고 용화도 알고 길수도 안다. 알아도 모른 척했다. 아니, 아니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희가 왜 더러운가. 영희는 절대로 남한테 못살게 굴거나,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남을 욕하거나, 남을 속여먹거나 하지 않았다. 영희는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송희를 낳았고, 송이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송이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  (139∼140쪽)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하루아침에 터져나오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나 4대 강 정비라는 토목일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한다는 역사왜곡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역사왜곡은 몇몇 사람 손으로 일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어지지 않은 일이란 없으며, 얽히지 않은 일이란 없습니다.

 성노예 피해자를 지켜 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원폭피해자 1세뿐 아니라 피해 2세와 3세도 끌어안지 못합니다. 원폭피해자를 끌어안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재일조선인과 재러조선인과 재중조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재외국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라는 이 나라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며, 이주노동자를 돌보지 못하는 나라는 노동자를 보살피지 못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 보금자리를 흔들리게 합니다.

 나라를 일구는 노동자(와 농사꾼 모두)를 땀흘리는 보람으로 갚음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이고, 교육이 교육답게 이루어지지 않는 마당에 정치가 정치답거나 경제가 경제다울 리 없습니다. 정치가 정치답지 않은데 신문이 신문다울 턱 없으며, 방송이 방송다울 턱 없습니다. 신문방송이 옳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사람 삶터에다가 자연 삶터는 제다움을 잃고 무너지게 되고, 사람과 자연이 사람 그대로 자연 그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판에 책이 책다울 바탕은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성노예 피해 여성 이야기를 살피지 못하는 뿌리는, 또 이와 같은 이야기책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바탕은, 또한 이런 책이 가까스로 한두 권 나와도 거의 알려지지 못할 뿐더러 읽히지도 못하는 흐름은, 오늘날 우리 나라를 아주 단단히 휘어감고 있습니다. 정신대 할머님들이 85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고 900번째 수요집회를 넘기며 1000번째 수요집회에 이르도록 목숨을 다부지게 이어나가면서 목소리를 낸다 하여도, 우리 사회 틀거리는 이분들과 우리들 모든 밑바닥 사람들 목소리를 귀담아듣거나 받아들일 만한 매무새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이런 매무새를 갖추고자 애쓰지 않습니다.


 (2) 어린이책으로 읽는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


 소설쓰는 공선옥 님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책 하나 써냈습니다. 써낸 지 벌써 네 해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는 아픔이란 아픔은 빠짐없이 온몸으로 겪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상수리나무집 이야기입니다.

 상수리나무집 임자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된 점쟁이 할머니입니다. 점쟁이 할머니는 참으로 오랫동안 혼자 차려 먹는 밥상이 외로워, 자기마냥 외로운 정신대 할머니인 옥주 할머니를 받아들입니다. 점쟁이 할머니와 정신대 할머니 두 분은, 아프고 힘든 나날을 함께 겪어내다가 자기들과는 사뭇 다른 아픔을 안고 살던 장님 아버지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고, 또 떠돌이 개를 받아들인 다음, 양공주 노릇을 했던 아줌마와 살갗 까만 어린아이를 마지막으로 받아들입니다.


.. 아이 엄마는 마음이 많이 다쳐서 이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다친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친 사람 스스로 열기 전에는, 다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 다른 사람은 그저 도와줄 수 있을 뿐 ..  (67쪽)


 있이 살아도 모자란 판에 없이 살면서 밥숟가락 하나 더 얹으며 꾸리는 상수리나무집 살림살이입니다. 없이 사니 맨손으로 세상과 부딪히면서 저마다 다 다른 밥벌이를 제 깜냥껏 하는 가운데 서로서로 돕습니다. 이웃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 손가락질이지만, 이런 손가락질은 ‘더는 흐르지 않는 눈물’로 삭이면서, 당신들보다 마음이 더 다친 또다른 이웃을 걱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옆에 가까이 있으면 이웃이라 할 수는 있을 테지만, 눈물나는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없다면 이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상수리나무집’ 이웃이라는 사람들은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 속여먹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달삯을 너무 높게 올려받으려는 집임자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휙휙 던져 버리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고, 아는 체 모르는 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이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이웃을 사귀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옆집 사람한테 이웃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쇳덩어리로 되고 빈틈없는 열쇠로 잠긴 문을 빠꼼히 열고 승강기로 씽하고 내려가 자동차에 열쇠를 꽂고 부릉 하고 내달리면서 집과 일터, 또는 놀 곳으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우리들입니다. 승강기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이기는 하겠지만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이름은 어찌 되며 나이는 얼마인지 식구는 누가 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서로서로 가슴에 품은 기쁨과 슬픔을 하나도 함께 나누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 모르는 채 따로 떨어져 지내니 서로를 더 모르게 되고, 서로를 더 모르게 되니, 이웃사람 삶에도 눈길을 안 두고, 우리 둘레 사람 모두한테 눈길을 못 둡니다.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건 말건, 정치꾼이 무슨 공약을 내놓다가 무슨 일을 하건 눈길을 안 보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고, 시험문제가 어떤 지식을 다루고 있거나 말거나 마음을 안 씁니다. 그예 아이들이 시험점수 잘 받으면 그만이고, 그저 내 은행계좌에 일삯이 많이 들어오면 장땡입니다.


.. 일어나서 미음을 한 숟갈 떠먹으려는데, 눈에서 뭔가 핑글 돌면서 죽그릇 위에 투둑, 하고 떨어졌다. 눈물이다. 지금껏 마음껏 흘리고 싶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 영희가 끓여 준 죽그릇에 투둑, 보석처럼 떨어지고 있다. 사실 옥주도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만들어 준 음식을 너무도 오랜만에 먹어 보는 것이다 … 어느새 영희는 울음을 멈추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옥주의 말에 수줍게 웃는 영희는 지난봄 처음 봤던 그 영희가 아니다. 옥주는 서서히 변하는 영희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슬픈 사람에게는 오히려 슬픔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옥주는 생각했다. ‘내 얘기를 하면 영희가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랬던 것처럼.’ ..  (107, 110쪽)


 우리 모양새를 돌아볼라치면,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은 퍽 지루하달지, 뭔 소리인지 모른달지, 구태여 이런 책까지 왜 읽어야 하느냘지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 이웃뿐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개나리이고, 별이는 별이입니다. 잘한 일은 잘한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나,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면 할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옳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이나, 얼굴이 잘생겼다든지 이름값이 높다든지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 “별이야, 지금만 울고 나중에는 울지 마라. 별이가 울면 송이도 운단다.” “할머니, 내가 왜 우냐면요,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분해서 울어요.” “별이가 강해지면 분하지도 않단다. 별이는 강해져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다 강해지면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괜찮단다. 저기 예쁜 개나리꽃이 피었구나. 개나리꽃이 예쁜 건 추운 겨울을 이겨내서 그렇단다. 강해지면 꽃처럼 예뻐진단다. 예쁜 것들은 모두 강하단다. 예쁜 사람을 보고 누가 뭐라고 하겠니. 개나리를 보고 아무리 개나리가 아니라고 해도 개나리는 개나리란다. 별이는 별이가 되어라.” “알았어요, 할머니.” ..  (173쪽)


 그런데 한 가지, 이야기책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을 읽으면서 아쉬움 한 가지가 걸립니다. 이야기 끝에, 상수리나무집이 헐리며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는데, 상수리나무집에 살던 정신대 할머니와 ‘장님 아저씨와 양공주 아주머니네’가 따로따로 임대아파트를 얻어 이웃집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돼요. 그렇지만 참말 오늘날 우리네 임대아파트란 집이 이렇게 쉽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군말없이 주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이제까지 고되고 고달프게 살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빛을 구경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쩐지 우리 세상살이하고는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학생 나이임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끝을 맺는 일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자꾸자꾸 이야기 마무리가 아쉽고 허전하고 어딘가 바람이 피식 빠져 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지만. (4342.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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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을 걸다 - 백성현 포토 에세이
백성현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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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삶’인 줄 알면, 사진은 저절로 예술이 된다
 [잠깐 읽기 23] 백성현, 《당신에게 말을 걸다》


- 책이름 : 당신에게 말을 걸다
- 글ㆍ사진 : 백성현
- 펴낸곳 : 북하우스 (2008.12.19.)
- 책값 : 15000원



 (1) 사진, 사진기, 사진쟁이


 사진 찍는 사람 많고 사진 즐기는 모임 많습니다. 이제는 사진이 따라붙지 않는 신문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사진이 함께하지 않으면 재미없어 하거나 지루해 하기까지 합니다. 글로만 이야기를 건네는 문학책에도 사이사이 사진(또는 그림)이 끼어들기 일쑤이고, 과자봉지며 길거리에 붙거나 흩날리는 광고전단지에도 사진이 박혀 있습니다.

 초상권이란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으나, 오늘날 최민식 님처럼 《인간》 사진을 찍으면 틀림없이 멱살잡이가 나오거나 법원에 서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필름사진만 있던 때, 35미리 필름 쓰는 사람을 바라보는 중형 필름 쓰는 사람은 ‘저걸로는 사진이 안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형 필름 쓰는 사람은 중형 필름으로는 사진이 나올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5미리 필름을 써도, 완전수동 기계식을 쓰는 사람은 완전자동 전자식을 쓰는 사람을 ‘사진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 eos5, eos1 ……. 그건 선배들이 사용하는 까맣고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였는데, 그냥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선배들은 보도반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보여지는 것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듯했다 … 요즘이야 디지털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수동 필름카메라를 보면 괜히 예뻐 보이고 무언가 특별한 듯 시선을 주곤 하지만, 그때는 단지 한물 간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인상을 쓰고 툴툴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새 카메라를 구경하자고 하셨는데, 나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게 왜 기분이 그리 안 좋은지 물어 보셨다. 나는 철없는 소리만 해댔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모두 좋은 카메라 쓰는데 나만 싸구려 옛날 카메라 쓰는 게 창피해요!” 나의 철없는 투정을 다 들으시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펜을 쓴다고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날 보도반 선배들이 한 명씩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보자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선배들이 추천해 준 좋은 카메라를 자랑하듯 꺼냈다. 나는 풀이 죽은 채 가방 안에 숨겨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 카메라를 본 순간 보도반 안에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선배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다들 카메라를 새로 샀으니 열심히 하자며 교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어깨에, 목에, 카메라를 자랑하듯 걸었고,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  (33∼34쪽)
 





 저는 1998년부터 사진을 배우고 찍었습니다. 그무렵 제 한 달 벌이는 16만 원이었고, 이 가운데 9만 6천 원을 적금으로 붓던 터라 사진기를 장만하는 일이란 꿈처럼 아득했습니다. 어렵사리 후배한테 미놀타 x-700을 빌려 썼는데, 제가 일하며 머물던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두어 달 만에 이 녀석을 잃어버렸습니다. 후배한테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하고, 저도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그때 우체국에서 이십만 원 빚을 얻어 미놀타 x-700을 재활용매장에서 13만 원을 주고 겨우 다시 장만했습니다. 저로서는 없는 돈을 털어 장만한 사진기였고, 이 사진기로도 제가 바라는 모습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었기에 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고, 집식구나 동무나 선후배들 사진을 즐겨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두 해 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들어간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새해 선물이라면서 저한테 캐논 이오에스 5번을 덜컥 장만해 주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필름 사진기에서 이오에스 5번은 프로와 아마가 두루 쓰던 ‘값싼’ 장비라고 했는데, 그렇더라도 백만 원을 치러야 하는 녀석이었습니다(요즈음 이 녀석은 25만 원밖에 안 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한 달 일삯 62만 원을 받았고, 신문배달 할 때와 견주어 여러 곱이 되었기에 푼푼이 돈을 모아, 미놀타 사진기는 후배한테 돌려주고, 저는 캐논 AE-1로 기종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나 예전이나, 또 요즈음이나, 미놀타 x-700이나 x-300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캐논 AE-1을 쓰는 사람도 퍽 드물었습니다. 예전 35미리 수동사진기를 쓰는 이들은 으레 니콘 FM-2나 콘탁스나 펜탁스를 썼지, 미놀타나 캐논은 ‘쓸 만한 녀석’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저는, 13만 원짜리 미놀타에서 28만 원짜리 캐논으로 한 계단 올라선(?) 일만으로도 주머니가 홀쪽해졌고, 홀쪽해지는 주머니에도 ‘이제는 함부로 기계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진쟁이도 비슷할 텐데(《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쓴 백성현 님도 이천만 원이 넘는 사진장비를 도둑맞았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캐논 이오에스 5번과 AE-1에다가 애써 찍은 필름이 든 사진가방을 두어 차례 도둑맞았고, 눈물을 쪽 빼면서 새롭게 사진장비를 장만할 때, ‘아예 더 낫다고 하는 장비를 써 보자. 또 도둑맞아도 나중 일이고, 어쨌든 쓰고픈 장비를 써 보자’고 하면서, 48만 원 하던 FM-2를 장만했습니다. 전자식 이오에스 5번은 중고 C급으로 70만 원을 치러 새로 장만하면서.


..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카메라(1회용카메라)를 맡긴 것이었다. 다음날 사진을 찾아 연습실에 들고 갔다. 사진을 찾아왔다는 말에 모두들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며 다들 말도 많고 웃음이 흐르는 즐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모두들 자기 사진을 보며 웃고 떠드는데, 나는 혼자 흐뭇함과 복잡함에 휩싸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거구나 ..  (91쪽)
 





 처음 사진을 배우며 찍을 때 부럽게 바라보았던 FM-2를 손에 쥐니 살짝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사진관 분은 ‘니콘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써서 오히려 잔고장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캐논이나 미놀타가 값도 싸고 사진도 잘 나온다’고 값싼 녀석을 써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찍는 사진감인 ‘헌책방’을 무지개빛 필름으로 담아낼 때에는, 미놀타와 캐논보다는 니콘이 한결 잘 나왔습니다. 헌책방 사진은 늘 실내에서 찍어야 하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렌즈에 FL-W 필터를 꼭 끼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햇볕을 받으며 사람이나 풍경을 찍는다고 한다면 미놀타와 캐논도 훌륭하지만, 제 사진감을 헤아릴 때에는 달랐습니다.

 라이카 사진기만 쓰는 한 분이 ‘책’을 사진감으로 삼아 우리 동네 헌책방에서 사진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이분 사진기를 몇 초쯤 빌려 ‘라이카에 눈을 박고 헌책방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웬걸,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할 때에, 니콘보다 라이카가 느낌과 화각이 한결 뛰어납니다. 라이카 쓰시는 분은 ‘단추를 눌러서 한 번 찍으셔도 돼요’ 했지만, 단추까지 누르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눈물이 났거든요. 사진은 ‘돈으로 장만하는 장비로 찍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런 장비가 있으면 어마어마한 구석을 채워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이구나 싶고, 며칠쯤 사진기앓이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비를 쓰시는 분은 그분대로 푼푼이 돈을 모아서 장만하셨을 테고, 멋이 아닌 발바닥으로 찍으시는 만큼, 나는 나대로 내 발바닥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내 장비가 많이 뒤떨어지면 뒤떨어지는 만큼 더 부지런히 땀흘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좀더 헤아리면, 저보다 주머니가 홀쭉한 분은, 제가 쓰는 장비만큼도 못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진찍기를 하고 싶어도 사진기 살 돈조차 없을 뿐더러,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을 겨를 없는 분도 있을 테고요.


.. 런던의 한 노천카페 앞. 열 살 남짓 한 꼬마가 대낮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어이없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나는 카메라의 노출을 적정으로 맞춘 뒤, 아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순간, 셔터 소리를 들은 아이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힌 아이는 내게 맥주캔을 집어던지더니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 아직도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나도 맥주 한 캔을 들고 그 옆에 앉아 시원하게 한잔 마시며 말동무나 되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177쪽)
 





 늘 느끼고 있는데, 사진을 못 찍는 바보 같은 마음일 때 장비 탓을 합니다. 또, 자기가 다른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찍든, 자기 마음에 찰 때까지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거듭거듭 찾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그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김영갑 님이 찍은 제주섬 오름 사진은 제주섬에서 오름 곁에, 아니 오름과 함께 먹고살았기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김영갑 님 앞이나 뒤에 제주섬 오름을 찍는 분이 제법 많은데, 이분들은 한결같이 구경꾼 사진만 찍었습니다. 요즈음도 오름을 구경꾼 사진으로만 멋들어지게 담아낼 뿐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멋있다 말하고 훌륭하다 말하는 분이 꽤 많지만, 제 눈으로는 한낱 겉멋과 겉치레로만 느껴집니다. 제주 두모악갤러리에서 본 김영갑 님 오름 사진은 저를 그 자리에 못박히도록 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게 이끌었지만, 김영갑 님을 뺀 다른 분들 오름 사진은 ‘이 따위를 사진이라고 찍었나?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자기 사진감하고 먹고살면서 일궈낸 작품으로 안승일 님이 빚은 《굴피집》이 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산 사진만 찍던 분인데, 자기 사진감으로 지루해 하던 어느 날 중국으로 사진여행을 하다가 문득 깨달아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한국다운 한국땅과 한국사람이 무엇인가’를 헤아린 끝에 강원도 산골짝 굴피집 한 채를 찾았고, 이 굴피집을 열 해에 걸쳐 뻔질나게 찾아가고, 때로는 두어 달씩 굴피집 두 늙은 식구와 한솥밥을 먹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굴피집 딸아들보다 더 살가이 지내며 사진을 찍은’ 안승일 님은 ‘다른 사진은 다 찍었지만 한 장을 아직 못 찍어’ 열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 한 장은 가을날 산자락 논에 누런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담는 사진입니다. 둘레 산꼭대기에 올라서 굴피집 앞으로 펼쳐진 다랑이야 어찌 보면 흔한 사진인데, 아주 맑고 구름 몇 점 살짝 흩뿌려진 날씨에 누렇게 일렁이는 나락 물결을 담을 수 있는 날은 한 해에 며칠이 안 됩니다. 한 해 가운데 하루도 없을 수 있습니다. 있더라도 때를 놓치면 못 찍습니다.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이웃사촌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길에서 살지 않았습니다만, 골목길이 훌륭한 사진감이 되는 줄 깨달으면서, 오래도록 골목길을 두 다리로 거닐고 골목집 사람하고 이웃이자 동무이자 말벗으로 사귀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 삶터를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던 1980∼90년대에 부지런함 하나와 수수함 하나를 모아 눈물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진 사진 열매를 맺었습니다. 골목길은 있는 그대로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됨을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사진을 즐겼습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는 이들이 꽤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구경꾼 곁다리 사진’ 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구경꾼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머물고 자주 찾아오면서 골목을 마음으로 품어야 비로소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눈길이 틉니다. 그렇지만 빨리빨리 얼른얼른 예술작품 얻어내려는 싸구려 생각에 젖은 채, 자기 머리를 깨지 않으니 골목길을 골목길 그대로 담지 못해요.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마찬가지인데, 헌책방도 골목길도 ‘꾀죄죄하거나 퀴퀴한’ 곳이 아닙니다. ‘마냥 어둡기만 한’ 곳이 아니며, ‘추억이 묻은’ 곳 또한 아니에요. 무슨 얼어죽을 추억입니까. 당신들이 언제 헌책방을 열 해 스무 해 단골로 날마다 찾아다녔기에 추억이고, 당신들이 언제 골목집에서 태어나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살아 보았기에 추억입니까. 달콤쌉싸름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한다면, 헌책방과 골목길을 비롯한 모든 사진감은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녹여내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라야만 사진기를 든 우리한테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 니콘에서 나온 필름 수동카메라인 FM2는 사실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요즘에는 콤팩트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카메라를 거의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고생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필름으로 사진교육을 받았던 세대의 사람들이나 필름 특유의 색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단점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사진가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조금 무거운 카메라라는 이유는 눈꼽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 법. 마치 사랑하는 이의 단점이 문제되지 않듯 말이다 ..  (347쪽)


 우리한테 ‘아직’ 문을 활짝 열어 주지 않은 사진감한테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주먹다짐이나 칼부림입니다. 어려운 말로 ‘폭력’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이고 소름돋는 칼부림입니다. 얼핏 보거나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할는지 모릅니다. 손뼉칠 만한 예술이라고, 돈이 되는 예술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이를테면 배병우 님 사진처럼). 그러나, 사진쟁이로서는 더 뻗어나갈 예술을 이루면서 사진에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버리고 섣부른 눈요기에 머문 셈일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기다리면서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곰삭이면서 다시 태어나기 마련인데, 날짜를 못박고 이때까지 뭘뭘뭘 찍어대자고 한다면, 어줍잖은 틀로는 마무리될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담아낼 사람 삶터나 자연 삶터를 스며들게 하지 못해요.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진쟁이 많고, 사진잔치 끊임없이 전국 곳곳(거의 모두 서울입니다만)에서 다달이 수백 가지씩 펼쳐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아직 ‘사진문화를 즐기는 나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진기 든 손은 많으나 사진기를 배우는 손은 적고, 사진기를 휘두르는 주먹은 많으나 사진기를 쓰다듬는 손길은 드뭅니다. 사진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늘지만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적고, 사진으로 이름값 높이는 사람이 생기지만 사진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은 드뭅니다.
 



 (2) 아직 설익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이지만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건네는 《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읽습니다. ‘코요태 래퍼 빽가’로 방송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하는 백성현 님은, 연예인으로 뛰기 앞서 사진길을 걷고픈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사진길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지만 사진길을 놓고 싶지 않았고, ‘사진 = 삶’임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섰구나 싶습니다.


.. 아버지는 아주 검소하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지 않으시고 대중교통만을 이용하신다. 그리고 3년 전부터는 자전거만 타고 다니신다. 부모님 집은 일산이고 내가 사는 곳은 강남인데, 일산에서 강남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다 ..  (278∼280쪽)


 ‘사진 = 삶’인 까닭을 고개 끄덕이며 읽어내지 못하면 사진을 즐기지 못합니다. ‘삶 = 일’이자 ‘삶 = 놀이’인데, ‘일 = 놀이’입니다. 억지로 힘겹게 돈벌이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놀이 또한 돈만 펑펑 쓰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억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남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그릇이라면, 자기가 즐기는 놀이도 돈하고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가슴벅참과 가슴뜀을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진을 자기 일감이나 놀이감으로 삼을 때 시나브로 ‘사진 = 삶’이 이루어지면서, 자기가 펼치는 사진 하나마다 저절로 예술이 되고 바야흐로 문화가 되어요.


.. 많이 찍고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남들이 좋아하는 구도와 당신이 좋아하는 구도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구도가 될 것이다 ..  (357쪽)
 





 그런데 백성현 님이 빚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는 스스로 ‘말을 건다’고 하면서, 백성현 님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은 듯합니다. 좀더 남김없이 털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아직 자기 나름대로 사진길을 마무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고 있으니 ‘이것이 백성현 사진이다’ 하고 말할 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앞으로 더 힘차게 사진길을 걷고, 더 바지런히 사진나라를 열며, 더 널리 사진밭을 일구면서 “당신에게 말을 걸다”가 아닌 “나(백성현)한테 말을 걸다”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땅을 디디고 땅냄새를 맡은 뒤 “당신한테 말걸기”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한테 말걸기를 할 만한 이야기가 넉넉하지 않은데 섣불리 말걸기부터 하고 나면 백성현 님 두 손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진길 걷는 수많은 분들이 소리와 이름 없이 열 해나 스무 해씩 자기 사진작품을 고이 모셔 두고 갈고닦으면서 기다리는 까닭을 백성현 님 스스로 더욱 곱새길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달라, 누구는 오래 곰삭이는 사진을 빚고 누구는 금세 짠하고 보여줄 사진을 빚기도 하지만, 곰삭이든 짠하고 보여주든 ‘똑같은 사진’입니다.

 백성현 님 스스로 다부지게 사진길을 걷노라 말하려 한다면, 사진작품 귀퉁이에 ‘백성현 것’이라고 이름을 안 적어 놓아도 ‘이 사진은 백성현이 사진이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게 사진기와 살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사진길을 걷노라 당차게 밝히신 만큼,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말고 꼿꼿하게 길닦기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4342.1.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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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일본 최초의 시각장애 변호사 다케시타
고바야시 데루유키 지음, 여영학 옮김 / 강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잠깐 읽기 22] 고바야시 데루유키,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책이름 :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글 : 고바야시 데루유키
- 옮긴이 : 여영학
- 펴낸곳 : 강 (2008.11.28.)
- 책값 : 12000원



 (1) ‘루이 브라이’ 우표와 ‘박두성’ 기념관


 올 1월 2일, 2009년 첫 우표가 나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즐겨하던 우표모으기를 이제는 거의 못하지만, 이날만큼은 우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우체국에 달려가 전지 두 장을 삽니다. 우체국 아저씨는 언제나 그러하듯, 우표 설명쪽지와 함께 전지 두 장을 건네주고, 어떤 기념우표인지는 딱히 살피지 않습니다. 전지 두 장을 받아들고 들떠 있던 저는, “아저씨, 이번에 나온 우표는 아주 대단한 우표예요.” 하고 말을 겁니다. “그래요? 어떤 우표인데요?” “이번 우표는 점자를 만든 사람이 나왔거든요.” “아, 그래요? 어디 한 번 봐야겠네.”


.. 다케시타는 대학 시절에 현재의 아내인 도시코와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신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그때까지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에 응시한 전례조차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다케시타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났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다케시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안마 아르바이트까지 해 가며 가정을 꾸려 나가야 했다. 병원에서 신생아 안마도 하고 여관의 호출을 받고 노인들을 상대로 마사지도 했다. 되돌아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안마하며 나눈 소통의 경험이 후에 변호사 활동을 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병원에서 안마를 할 때는 ‘선생’으로 불렸지만 여관에 가면 ‘안마사’가 되었다. 사회라는 게 이런 곳인가 싶었다 ..  (26∼27쪽)


 1월 2일 우표는 ‘루이 브라유 탄생 200주년’을 기립니다. 이름을 보고는 ‘응? 루이 브라유?’ 하고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습니다. 1999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다산기획/마가렛 데이비슨 씀)라는 책과 2007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보물창고/데이비드 애들러 씀)라는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8년 5월에 나온 《세상 밖으로》(큰북작은북/러셀 프리드먼 씀)라는 책에서는 ‘루이 브라유’로 적습니다. 이제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고 잘 말하고 있던 사람이름이 하루아침에 슬그머니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으로 바꿔 적도록 되었듯, ‘루이 브라이’로 오래도록 알려지고 사랑받은 사람이름 또한 하루아침에 살며시 ‘루이 브라유’가 된 듯합니다.

 아무래도 정부에서 내놓는 외래어적기법에 따라서 바꾸었구나 싶습니다. 하루아침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며 이처럼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사람이름을 쉽게 고쳐 버리는 일이 얼마나 옳으냐 싶은 한편, 이렇게 사람이름을 고치면서 ‘이름 고친 그 사람’이 한 일과 발자취는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람이름을 올바르게 고치자면, 누구보다도 ‘반 고흐’라는 그림쟁이 이름도 고쳐야 합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원음주의’에 따르면, 네덜란드사람인 ‘Van Gogh’는 ‘퐌 호흐’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히딩크’라 말하는 네덜란드사람 또한 ‘히딩끄’입니다. 이준 열사가 죽은 곳은 ‘헤이그’가 아닌 ‘덴 하흐(Den Haag)’이고요.

 외래어적기법에 따르도록 한다면 꼼꼼히 살피며 제대로 추스를 노릇입니다.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나라밖 사람들 이름을 고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루이 브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왜 했는지를 가만히 살피면서 이이 이름을 고쳐쓰도록 하려는 국어학자 매무새인지, 그저 이름만 뚝딱하고 고치라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정부 관리 움직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다케시타, 힘들 텐데 졸업식에는 안 와도 된단다.” 그제서야 다케시타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귀로 수업을 들을 수는 있지만 시험을 볼 수 없었고, 선생님들은 수업을 빠져도 된다, 졸업식에 안 나와도 된다, 하는 말을 예사로 했다. 하지만 다케시타는 되받을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  (48쪽)
 





 서양에 루이 브라이 님이 있으면, 우리 나라에는 박두성 님이 있습니다. 루이 브라이 님은 알파벳 점글을 만들었고, 박두성 님은 한글 점글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2008년은 박두성 님이 태어난 120돌이 된 해였습니다. 이해를 기리며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여러모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박두성 님이 한글 점글을 내놓은(‘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때는 1926년 11월 4일이라고 합니다. 까마득한 일제강점기 때에,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빛줄기 하나를 나누고픈 마음으로 일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문화인물로 뽑아 주고 박두성 님 기리는 위인전 몇 권 나오기도 하는 오늘날이라 하여도, 정작 인천에서 박두성 님 발자취를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강화섬에 기념관이 마련되었으나, 정작 인천 율목동에 있던 집은 허물려 없어졌고, 박두성 님이 점글을 만들어 점글책을 만들 때 고되게 점글찍기를 돕던 따님(박정희) 사는 집(인천 화평동/평안수채화의 집) 둘레도 아파트 세우는 재개발을 한다면서 말이 많습니다. 박두성 님 따님인 박정희 님은 나라와 인천시를 믿을 수 없어 당신 스스로 그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와 당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러모아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하늘나라로 떠날 마지막꿈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 대학은 시각장애인의 입학을 허가해 주기는 했지만 수업 시간에 쓰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시각장애인용 점자 책으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점자 교과서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 다케시타는 어떻게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말겠다는 의욕은 강했지만, 막상 공부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점자 시험 도입을 추진하기 위한 교섭과 회의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법무성과 교섭을 하면서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을 볼 수 없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이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  (71∼72, 96쪽)


 올 2009년은 인천시에서 ‘인천관광의 해’이자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벌어지는 해라면서 적잖은 돈과 품을 들이고 있습니다. 시에서 말하는 ‘관광’과 ‘도시축전’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유인물을 살피고 인터넷방에 들어가면, 오로지 상품만 있습니다. 돈을 들여서 쓰고 버리는 상품 아니고는 없습니다. 무엇 하나 즐겨도 돈을 들여야 하고, 무엇 하나 보려 해도 돈을 바쳐야 합니다.

 관광이 문화가 아닌 산업이 된 지 오래라,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잔치판을 벌여도 마찬가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 없는 상업(또는 산업)만 있다면, 더욱이 문화를 ‘문화산업’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뒤집어씌운다면, 이러는 가운데 인천이라는 곳에서 뿌리내리며 살았고 뿌리내리며 힘썼고 뿌리내리며 어깨동무했던 숱한 사람들 발자취를 톺아볼 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할는지요.

 박두성 님뿐 아니라, 조봉암 님이나 함세덕 님이나 현덕 님이나 이승엽 님이나 김동석 님 같은 사람들을 기릴 만한 마땅한 집 한 채 없는 인천입니다(어쩌면 이런 이름이 한국사람들한테는, 무엇보다 인천사람 스스로한테 너무 낯선 이름일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야구선수 이승엽만 알 테지요). 한국을 식민지로 삼거나 짓누르려 했던 일본사람과 서양사람들 쓰던 건물과 집과 별장 들을 수십 억을 들여 되살리는 일을 ‘역사복원’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독립을 이루려 애쓸 뿐더러, 여느 사람들 삶과 문화를 북돋우고자 땀흘린 이들은 내팽개치거나 모르쇠를 하거나 아예 ‘있던 생가마저 허물’기까지 한다면, 무슨 관광이 즐거우며 어떤 축전이 보람찰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사고 쓰고 먹고 마시고 버리고 하는 일이 관광이고 문화라고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스스로 품지 않습니다.
 





.. “나는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야.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을 그저 눈이 안 보인다, 귀가 안 들린다, 다리를 못 움직인다고만 생각하지.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어떤 고생을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 변호사가 장애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을 거야.” ..  (109, 142쪽)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면서, 이 버스와 전철에 앞 못 보는 사람이 얼마나 탈 수 있을까 늘 궁금합니다. 앞을 보는 저조차, 거칠게 달리며 흔들리는 버스에서 선 채로 몸을 버티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기를 안고 타도 자리 얻기가 어려운데, 앞 못 보는 사람임을 여느 사람이 알아본다 한들 거친 버스에서 걱정없이 다니라며 자리를 내어줄 마음그릇 되는 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지만, 이보다, 버스역이 비장애인한테도 버스 잡아 타기에 퍽 나쁩니다. 버스역 길이가 짧기도 하지만, 택시와 짐차를 비롯한 다른 승용차가 으레 버스역에 버티고 서 있기 일쑤이고,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뒤에 들어오는 버스를 알아보기 힘들고 놓치기 쉽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우루루 몰려들어 새치기하느라 다투는 사람은, 힘여린 사람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를 모시지 않습니다. 바퀴걸상을 타고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오르내리는 리프트를 기다리느라 애먼 시간을 길에서 버려야 합니다. 요즘 지하철이 오죽 땅속 깊이 들어가 있으며, 리프트는 얼마나 느릿느릿 움직입니까.

 문득, ‘관광의 해’니 ‘세계도시축전’이니 외치면서, 비장애인 아닌 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데에 얼마나 마음을 쏟는지 궁금해집니다. 행사 안내글을 앞 못 보는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점글로도 찍어서 나누거나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테이프가 있는지, 나라 안팎에서 장애인들이 나들이를 와 즐긴다고 할 때에 얼마나 수월하고 거뜬하도록 시설을 마련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따지고 보면, 관보와 신문기사도 점글로 함께 내놓아 주어야 합니다. 방송은 스물네 시간 모든 풀그림에서(하다 못해 새소식 알리는 때라도) 화면 아래쪽에 손말 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또는 모든 말을 자막으로 함께 보여주거나. 승강기에만 층수 단추에 점글을 새길 노릇이 아니라, 아파트 들머리에 ‘이곳이 몇 동으로 가는 길목이고 이 앞은 몇 동인지’ 알 수 있도록 똑같은 자리에 어린이와 어른 키높이에 맞추어 점글로 된 알림판을 세워 놓아야 하고, 비장애인이 다니는 모든 길목에 ‘지금 이 자리는 무슨 구 무슨 동 몇 번지이며 갈래에 따라 어디로 갈 수 있다’고 밝히는 알림판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 도쿄에서 다케시타 외에도 두 명의 시각장애인 수험생이 사법시험에 응시했는데 다 같이 낙방하고 말았다. 몇 안 되는 시각장애인 수험생들은 쉽게 가까워졌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문제지에 오자와 탈자가 많다는 게 공통된 화제였다. 법무성에 문의했더니 오탈자 때문에 정정해야 할 문항이 열세 군데나 되었다고 시인했다. ‘잘못된 문제가 열세 개나 됐다면 당락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잖아! 일반 대학시험에서 틀린 문제가 열세 문항이었다면 재시험을 보든지 무효로 처리했을 거야! 시각장애인이니까 열세 군데나 틀렸어도 그대로 두는 거 아냐!’ ..  (183쪽)


 우리가 장애 있는 사람한테 마음쏟는 일은, 몸 어디가 다치거나 아픈 사람한테만 마음쏟는 일로 그치지 않습니다. 힘(권력)이 없거나 여린 이한테 마음쏟는 데로 이어지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뻗치며, 가방끈 짧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옮아갑니다.

 서울 용산 철거민을 비롯해 전국 모든 곳 철거민과 ‘재개발대상지역 주민’ 모두 자기한테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자기 주머니에 알맞게 살림을 꾸릴 권리가 있습니다. 길은 자동차가 달릴 권리만이 아닌 자전거가 함께 달릴 권리가 마땅히 있을 뿐더러, 걷는 사람한테도 권리가 있습니다. 걷는 사람에는 몸 튼튼한 어른뿐 아니라 몸 여린 어른과 키 작은 어린이와 늙은 어른이 함께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길알림판에 알파벳을 적어 넣을 뿐 아니라 한자까지 적어 넣느라 수 조에 이르는 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길알림판에 점글을 함께 적으면서 앞 못 보는 이들이 알아보기 좋도록 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적 없습니다. 전국 동사무소가 ‘동주민센터’로 이름을 바꾸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기는 해도, 동사무소에 ‘점글로 된 안내책자’ 하나 번듯하게 놓인 모습은 이제까지 못 보았습니다. 건널목 가운데 띄엄띄엄 ‘소리가 나서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도움 주는 곳’이 있습니다만,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비장애인이 건너기에도 짧습니다. 이런 일을 모르는 분보다 아는 분이 훨씬 많을 텐데, 우리네 뒤틀리거나 엇나간 모습이 쉬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익히 아는 분들이 새로 공무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지만, 정작 우리 사회 아쉬움과 모자람은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일본에서 ‘앞 못 보는 사람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변호사가 된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사람을 다룬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문화와 복지가 훨씬 앞서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점글로 된 법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일본은 이런 점글 법전이 있으며,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이는 ‘사법고시를 점글로 칠 수 있도록’ 시험제도를 고쳤고, 다케시타 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는 ‘앞 못 보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다케시타에게는 점자와 맺은 인연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법률 공부를 한 것은 일본에서는 다케시타가 처음이었다 … 그러면 점자 육법전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일반 서점에서는 점자 육법전서를 취급하지 않는다. 재단법인 일본점자협회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한 권짜리 책으로는 나와 있지도 않다. A4 크기의 종이 50쪽 분량으로 된 책이 51권이나 되며 책값도 12만 엔에 달한다. 일반 가정집의 안방을 꽉 채울 만한 분량이다 … 다케시타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본에는 점자 육법전서는커녕 점자로 된 법률 서적조차 없었다. 시각장애인용으로 나온 육법전서나 법률서적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도 물론 없었다. 수요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각장애인은 사법시험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  (27∼30쪽)


 우리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에는 점글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녹음테이프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법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갖 안내글 가운데 점글로도 된 서류는 얼마나 될까요. 그 흔한 ‘손전화 가입신청서’ 가운데 점글로 만들어진 안내글은 있기나 한지 모를 노릇입니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신용카드를 만들 때, 점글로 읽을 안내글이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읽고 배울 수 있게끔, 우리 나라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 이야기를 다룬 점글책은 몇 권쯤 도서관에서 갖추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나라밖 말을 배울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점글 교재는, 또 점글로 된 영한사전이나 일한사전은 한 권이나마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선생님, 전 대학에 가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과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를 할 겁니다.” 다케시타는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래, 대학에서 무얼 공부하기로 결정했니?” “법학부에 가서 법률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법학부? 법학부를 나와서 무슨 일을 하려고?” 다케시타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전 변호사가 될 겁니다.” 담임선생님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비슷한 표정을 지어ㅏ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멍청한 녀석!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그건 허공에 집을 짓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선 웅변부에서 말솜씨를 연마한 다케시타가 한 수 위였다. “선생님, 저는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  (58∼59쪽)


 ‘장애인’이라 하면, 으레 ‘비장애인이 도와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깁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이런 생각에 길들여지고, 학교에서도 이처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데가 오로지 비장애인만 다니도록 짜인 가운데,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도 비장애인이 배우는 데에만 맞춰져 있고, 교사들은 비장애인을 가르치는 솜씨만을 교대와 사대에서 익힙니다. 장애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는 언제라도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도록 찬찬히 이끌어 주는 책이나 이웃은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울타리를 높이기만 하는 우리 사회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팍팍하면 비장애인도 살기 팍팍한 줄 깨닫지 못합니다. 적게 배운 이가 살기 팍팍하면 많이 배운 이도 살기 팍팍한 줄 느끼지 못합니다. 힘여린 이와 돈없는 이가 살기 팍팍하면 힘있고 돈있는 이 또한 살기 팍팍한 줄 알지 못합니다.

 비정규직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정규직이라고 살기 좋을까요? 이주노동자가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한국노동자가 살기 좋을까요?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책이름마따나,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또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장애인은커녕 비장애인도 살기 나쁜 나라라고. 한국은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고. 정치꾼만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도 올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4342.1.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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