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02 - 삶이 되지 못한 사진이라면 돈벌이나 겉멋일 뿐
 : 김영갑,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 책이름 :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 글 : 김영갑
- 펴낸곳 : 하날오름 (1996.9.10.)
- 1996년에 처음 나올 때에는 김영갑 님 글만 모아서 묶었습니다. 2004년에 ‘휴먼&북스’에서 사진을 넣어 새판으로 다시 펴냈고, 2007년에는 ‘김영갑 2주기 기림’판으로 새로 펴냅니다. 저는 이 가운데 1996년에 처음 나온 판으로 만나서 읽었습니다.



 (1) 만화에서 느끼는 사진


 준코 카루베라는 일본 만화쟁이가 그린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 열 권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이듬해 2001년에 뒷이야기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열두 권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가 나올 무렵에는 얼른 알아채고 열 권을 모두 장만해서 기쁘게 읽었는데, 뒷이야기까지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그만 놓치고 말았고,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는 금세 판이 끊어졌습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에 이 만화가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끝에 지난달 가까스로 열두 권을 장만했습니다. 마침 골목마실을 하며 지나는 길에 본 ‘문닫은 대여점’에서 값싸게 내놓은 책꾸러미 가운데 이 녀석이 있었어요. 이 만화책을 갖추어 놓은 대여점이 있었구나 싶어 놀라면서 즐겁게 장만했는데, 열두 권에 이르는 만화책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를 읽는 동안, ‘이 만화는 대여점에서 거의 안 읽힌 듯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느 책이든 사람들이 찾아서 읽으면 읽은 자국이 남습니다만, 이 만화책 열두 권은 아주 깨끗했습니다. 2001년에 나온 만화임에도 먼지가 그리 내려앉지 않았고요.

 참으로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만난 만큼 한 번 보고 그칠 수 없어 거듭 펼치고 다시 넘기고 합니다. 7권을 보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엄마’가 초등학생 딸아이를 앞에 놓고 “찌주루(딸아이 이름), 그 착한 마음은 어디에서 가져온 거니? 엄마는 뽐내고 있었단다. 찌주루의 모든 걸 엄마가 낳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찌주루가 가지고 와 준 거야.(25∼26쪽)” 하고 생각합니다. 꾀병을 부리던 딸아이가 참말로 몸이 아프지만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말 않고 꾹 참는데, 아이 어머니는 “숨겨도 소용없어. 엄마는 다 알고 있는걸. 찌주루의 일은 전부. 왜냐면 찌주루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 “며칠 동안 머물며 찍은 사진하고, 몇 년 기다려 찍은 사진하고는 다르겠죠. 취미로 사진하는 게 아니거든요.” … 한 장이라도 감동적인 사진을 찍어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동안, 정작 부모님의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했다 … 많은 이들을 사진으로 감동시킬 수 있으면 글로도 감동시킬 수 있다 ..  (13, 127, 204쪽)


 더없이 착하디착한 만화인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와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에는 마음씨 나쁜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엇비슷합니다. 어쩌면 모두 똑같다 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심통을 부린다 할지라도 금세 풀어지거나 누그러뜨립니다. 아프거나 괴롭게 하는 이야기란 나오지 않습니다. 슬프거나 힘겹게 하는 이야기 또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화책을 넘기는 내내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가슴속 깊은 자리까지 스며들면서 콕콕 찌르는 뭉클함이 있어, 눈물 없이 만화를 볼 수 없습니다.

 다 읽고 덮으면서도 뭉클뭉클함이 고이 남아서 책등을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사진기를 들고 골목마실을 나가면, 눈이 한결 맑아지고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집니다. 착한 만화를 보면서 제 마음이 착해지는 가운데 제가 담아내려는 사진 또한 착해진다고 할까요.

 저 스스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착한 이야기이고, 이처럼 착한 사람들 나오는 만화에 더욱 눈길이 쏠리는 한편, 저 스스로 즐기면서 이웃하고 나누고픈 사진이란 다름아닌 착한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골목동네와 헌책방동네라고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착한 이야기와 착한 그림과 착한 사진처럼, 저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제 삶터를 착한 마을로 일구는 일에 손을 거들고 싶다고 할까요.


..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의리나 배신, 명예나 권력, 돈, 이 모두는 나와 무관하다. 나의 삶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에서 제외됐다. 설명될 수도 없는 사생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삶, 움막에 틀어박혀 허구한 날 알을 품은 채 하품하는 일상들. 일 년 내내 혼자 지내며 흘린 눈물도, 웃음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랜 세월 열과 성으로 품었던 알에서 탄생된 생명인데도 나의 사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극적인 드라마를 원한다. 눈물겹고 재미있는 감동의 드라마만을 원한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행복한 드라마를 원한다. 성공했다 실패하고,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성공하는 영광의 드라마를 원한다. 나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내가 껴안은 드라마는 처음부터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  (45쪽)


 거의 모든 사진기자와 사진작가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찍는 사진을 보면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어수선하기 그지없습니다. 때로는 책을 몹시 거룩하게 드높이는 사진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주 천덕꾸러기처럼 다루고, 옛추억에 잠기게끔 하려는 모양새로 다룹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담아내지 못합니다. 지금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늘과 내일과 어제가 어떻게 달랐으며, 책이 살아온 오늘과 어제에다가 내일은 또 어떻게 다를는지를 헤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진기자와 사진작가가 골목마실을 하면서 찍는 사진은 헌책방을 찍는 사진하고 어슷비슷합니다. 꼭 닮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들 제 깜냥껏 바라보는 셈입니다. 제 깜냥껏 좋은 책을 알아보면서 고를 뿐입니다. 눈이 더 밝다면 더 많은 책이 좋음을 알아차리고 더 많이 읽고 장만하는 헌책방마실이 될 테지요. 눈과 생각이 한결 밝다면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사람 삶자락을 더욱 깊숙이 껴안으면서 녹아드는 가운데 사진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담아낼 테지요.

 무엇보다도, 헌책방이나 골목길에서 따로 사진 한 장 찍지 않더라도, 두 곳에서 우리한테 나누어 주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리라 봅니다. 사진이란 찍어도 좋지만 안 찍어도 좋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부지런히 단추질을 해도 즐겁지만, 사진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어깨에만 얌전히 걸치고 있어도 즐겁습니다. 사진에 우리 삶을 담는다 하면, 필름에 앉혀 종이로 찍어내는 사진이 되지 않고, 눈을 거쳐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언제나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는 우리 발자취’로 간직하고 있어도 사진이 됩니다.


.. 자연을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 일기예보는 참고나 할 뿐 그들 방식대로 하늘을 보고, 바람 부는 방향과 강약 그리고 느낌을, 바다의 물결이나 색감을 보고 내일을 준비한다 …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은 자연의 변화를 읽지 않고는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가 없다. 대가가 사용했던 명품의 카메라를 가졌다고 해도, 사진가가 원하는 상황을 맞이하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 없다 …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진가들과는 시대도, 환경도, 가치관도 다른데 그들을 흉내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다 … 누구도 나에게 사진에 대해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  (169∼170, 190∼191쪽)


 그러고 보면, 김수정 님 만화책을 해마다 한 번씩 통째로 되읽는 데에도 이와 비슷한 마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김수정 님 만화는 잡지에 이어실리는 대로 다 보았고, 학교(초중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낱권책을 장만해 놓고 거듭 보는데, 그무렵 일은 오늘날까지도 환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수정 님 만화에는 그무렵 198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단출한 줄이 이어지며 이루어진 만화이지만, 구석구석 꼼꼼하게 우리 동네 골목이 살아숨쉬고 이웃 동네 골목이 펄떡펄떡 뛰고 있습니다.


.. 어둠에 묻힌 정원은 어두운 대로 좋고, 달빛에 드러나는 정원은 그대로 좋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눈이나 안개에 묻히면 묻히는 대로, 나를 매혹시킨다 … 사진가들 중에 사진의 우연성에 필요 이상 과대포장을 하려 한다. 사진의 미학 중에서 우연성이 사진의 전부인 양 착각한다 … 마라도는 일 년에 십만 명 정도 관광객이 다녀간다. 그 중에 사진가들도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카메라 들이대다 보니 주민들은 카메라만 보면 고개를 돌린다 … 현실을 상대하여 작업하지만 사진가의 마음에 여과된 것이다. 사진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르다. 사진 속의 현실은 사진가의 마음에서 여과된 현실이지, 있는 그대로 복사된 현실이 아니기에 사진이 예술일 수가 있다 … 감동을 주는 사진은 우연히 만나 촬영할 수도 있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 … 잔재주를 피워 쉽게 작업을 마무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진을 기대할 수는 없다 ..  (57, 180, 182, 198쪽)


 오늘날 만화를 보면 ‘배경 잘 그려 주는 도움 만화가’가 꽤 많아, 거의 사진을 옮겨놓았다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 만화처럼 싱그럽지 않아요. 잘 그리기는 솜씨있게 잘 그렸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예전 만화는 배경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만화를 보았다고 느꼈으며, 다시 보고 또 보면 지난번에는 못 본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는데, 요새 만화는 배경까지 들여다보고픈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냥 사진 찾아보면 되지?’나 ‘내가 몸소 거기에 가면 되지?’ 같은 마음만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채우려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까요.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만화를 왜 즐기는가’를 헤아리지 않고 기술자가 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나라 사진작가 숫자가 대단히 늘어나기는 했어도 근심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모두들 사진‘작가’라기보다는 사진‘기술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찍는 솜씨’는 빼어난데, ‘찍는 마음’은 하나도 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착한’ 만화를 좀더 좋아해서 사진도 착한 사진을 더 좋아할는지 모릅니다만, 착하지 않은 만화라 하여도 ‘울림’이 있으면 반갑습니다. ‘찡함’이 있고 ‘움직임’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아무 맛이 없다면, 멋만 가득하고 예쁘게 보이기만 한다면 달갑지 않아요. 이런 만화는 만화가 아니요, 이런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만화가 되든 사진이 되든,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우리 눈길을 저절로 그곳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2) 책에서 느끼는 사진


 아침에 골목마실을 다녀왔습니다. 요즈음은 일산과 인천을 오가느라 몸이 고단하여 골목마실을 제대로 못 다니는데, 도서관 문을 열어 놓는 금토일 사흘에 걸쳐 아침저녁으로 틈을 쪼개어 사진마실을 나갑니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용현동이나 학익동으로 나가 보려고 했는데, 그만 도원동과 선화동에서 붙잡힙니다. 도원동과 선화동 골목길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가 몹시 싱그럽고 좋아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맙니다.

 다른 때에도 이와 같아서 아예 눈을 감듯 자전거로 씽하고 달려 다른 동네로 가야 비로소 그곳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어제도 찍고 그제도 찍었어도 그예 지나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본 모습과 그제 본 모습은 오늘 본 모습하고 같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제는 어제대로 좋고 그제는 그제대로 좋으며 오늘은 오늘대로 좋기 때문이에요.


.. 십 년을 줄곧 섬에서 생활했는데도 지금도 나는 뭍의 것들 속에 포함된다. 섬 것들 속에 포함되려면 삼대가 지난 뒤에야 자연스레 섬의 것들 속에 포함될 수 있단다. 나도 이제는 섬사람이라고 고개를 세우고 되물으면 섬의 토박이들은 고개를 흔들며 웃는다 …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변방이라 부르던 시절 토박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을 흘렸다. 인내와 희생만을 요구하던 시절을 살다 간 토박이들의 땀과 눈물을 채우고 있다 … 내가 작업하고 싶은 사진만을 작업하며 생활하는 그 자체로 만족한다. 사진작가로, 예술가로 인정받아야 할 이유도, 까닭도 없어졌다 ..  (166∼167쪽)


 요 몇 달에 걸쳐 《빅토르 하라》를 읽는데 아직 끝마치지 못합니다. 《말괄량이 삐삐》나 《국가는 폭력이다》나 《식민주의와 언어》나 《지로 이야기》 같은 책은 진작에 다 읽었으나 느낌글로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다 읽은 책이 책상맡에 한아름 쌓이고 두 아름 쌓입니다. 그렇게 한 해가 흐르고 두 해가 흐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얼른 이 책을 마치고(졸업) 다른 책으로 뻗어 가야지’ 하는 생각을 잇고 잇다가 ‘두 번 읽고 세 번 읽게’ 되는 이 책들을 만지작거리면서 늘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지난번에 읽으며 놓친 대목이 이번에 읽을 때 눈에 뜨입니다. 지난번에 읽으며 잡아챈 대목이지만 이번에 읽을 때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러는 동안 ‘어, 이 책 느낌글을 일찍 썼다면 너무 아쉬웠겠는걸’하고 생각합니다. ‘이 책 느낌글을 마무리짓지 못한 까닭은 따로 있었구나’ 하고 느끼고, ‘더디 읽어야 할 책은 더디 읽어야’ 하고 ‘더디 새겨야 할 책은 더디 새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적어도 열 해쯤은 해야’ 무언가를 한다는 시늉이라도 낸다고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기에 가끔은 방송사나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 어떤 기자는 그저 흥미 위주로 묻기도 하고 어떤 기자는 꽤 심각한 질문만을 골라 던진다 … 대부분 기자들이 나 같은 풋내기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 얻는 것은 없겠지만 성의없는 태도를 보이면 나도 하품이 난다. 아무리 풋내기 사진가라지만, 상대가 무성의하게 질문하면 나 또한 무성의한 대답을 할 뿐이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고 질문하면 나도 진지하게 임한다. 나에게도 나만의 가슴속에 묻어 둔 눈물, 한숨, 기쁨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이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공염불이다 … 내가 배고프면 남도 배고프고, 내가 슬프면 남도 슬픈 줄 안다. 모든 것을 내 자신의 눈높이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 늘 떠돌아다녀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가끔은 곤혹스럽고, 긴장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얼굴 마주하고 나의 깊은 곳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끔 인간적으로 나를 대한다. 진실에는 진실이 제격이다 … 여유있는 사람들의 서재에서 먼지가 쌓여 가는 값비싼 작품집이기보다는 손과 손에서 옮겨다니며 구겨지고 찢어지는 엽서와 카드이길 원했습니다 … 구한말 이 땅의 중요한 사건이나 사회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것은 외국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미 사진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집으로 묶여 나온 것들이 대부분 외국인이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서와 역사를 모르는 이들이 작업했기에 호기심에 의한 기념사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서와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직장을 가지게 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 언론이 보여주는 세상만을 보고 세상을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보여주는 세상에 의지해서 세상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찾아가 보고 난 후에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밝은 세상,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 내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깨닫고 나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그들을 닮아 보고, 흉내라도 내 보고 싶었습니다 ..  (81∼90쪽)


 오늘날 쏟아지는 책들을 살피면 글에 곁들이는 사진이 퍽 많습니다. 사진 없이 글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면서 ‘굳이 넣어야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사진을 넣는다고 책을 더 잘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합니다. 글은 글이고 그림은 그림이며 사진은 사진이거든요.

 글에 보태려고 그림이나 사진을 넣을 수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더 잘 알도록 한다며 글을 붙일 수 없습니다. 글은 글대로 홀로서야 하고, 그림과 사진은 그림과 사진대로 홀로서야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잘 알거나 깨달아서 이런 이야기를 끄적이지는 않아요. 그저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을 책과 함께 뒹굴다 보니 어느 결엔가 저도 모르게 툭툭 내뱉게 되는 말마디였을 뿐입니다. 사람들하고 술잔을 부딪히며 책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이런저런 말마디가 와르르 쏟아지곤 합니다. 집으로 비틀비틀 해롱해롱 돌아와 자빠진 이튿날, ‘어제 내가 뭔 소리를 지껄였지?’ 하며 머리가 아플 때가 있으나, ‘어제 내가 했던 이런 말은 섣부르거나 부끄럽지 않았나?’ 하며 머리가 맑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삶이 되면 알게 된다고 할까요. 삶이 되니 글을 쓸 수 있고, 삶이 되니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삶이 되니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할까요. 사진하고 함께 산 지는 아직 스무 해가 못 되었으나 책하고 함께 산 지는 스무 해쯤 되다 보니 ‘책이란 이렇구나’ 하고 혼자 싱긋 웃을 때가 잦습니다. 이런 느낌을 곧바로 사진으로 이어 ‘책이 이러하면 사진도 이러할까?’ 하고 생각하는데, 책과 그림과 사진이, 그러니까 글과 그림과 사진이 서로 다르지 않구나 싶어요. 모두 한 흐름이요 한 줄기요 한 뿌리이구나 싶어요.


.. “곱쌍헌게 여편네 같쑤다.” 인물이 훤한 양반이 머리는 왜 묶느냐고 걱정을 한다. 머리 묶은 덕에 노인들과 어렵지 않게 말문이 열린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남자답고 사내라고들 생각한다. 남자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우려한다. 만나는 이들마다 한 마디씩 한다 … 낚시꾼들이 포인트를 찾아 무인도에서 무인도로 옮겨 다니듯 사진가들도 분주하게 촬영지를 찾아나선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곳을 찾아 해외로 떠나려 한다 ..  (158, 182쪽)


 글쓰기를 가르치자면 글로 가르쳐야 하고, 그림을 가르치자면 그림으로 가르쳐야 하며, 사진을 가르치자면 사진으로 가르쳐야 한다고들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글로도 글을 가르치지만 그림으로도 글을 가르친다고. 사진으로도 글을 가르치고, 글로도 사진을 가르친다고. 왜냐하면, 글이 삶이 되면 무엇으로든 글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림이 삶이 되면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림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게 되니까요. 사진이 삶이 되면 누구하고 있더라도 모두 사진으로 바라보고 사진으로 삭이게 되니까요.

 어릴 적에는, 그러니까 제가 철부지일 적에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요즈음도 아직은 철부지가 아닌가 싶은데, 예전만큼은 철부지가 아닌지 모릅니다만, 아무튼 예전이나 이제나 똑같은 철부지라 하여도 요사이는 새로 느끼는 이야기가 많아요. 철부지인 주제에 깨닫는 셈입니다만, ‘온힘 쏟아 책 하나 펴낸 사람이 모두 잊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글은 한 줄도 안 쓰면서 새로 배우는 일’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저이들이 뭣하러 저렇게들 하나 알쏭달쏭하기도 했고, 배불러 저러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저이들이 ‘지난날 스스로 오른 제자리에 머물지 않으려’고 그렇게들 애쓰는 몸짓이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모를 일이지요. 철부지 머리로 헤아릴 뿐이니까요.


.. 섬 구석구석 아스팔트 길이 트이고 시멘트 건물이 늘어나면서 토박이들은 신명을 잃었다. 할망당이 없어진 자리에 대신 교회가 들어섰다. 하늘길이 열린 후 사람들이 몰려오자 인정도 사라졌다 … 마라도를 이해하는 데 태풍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마라도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바람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마라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 아주 작은 섬이지만 자연의 교향악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아주 감동적이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라도에서는 한 철을 혼자 살아도 그리운 사람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온종일 바다로 하늘로 공허한 마음을 채운다 … (사람들은)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건물 짓고 기념비를 세운다. 마라도가 오염돼 환경이 파괴되면 왔던 손님도 되돌아간다. 볼 것이 없고 느낄 것이 없으면 마라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사람이 마라도를 잊어버리는 날 민박집, 교회, 절이 폐가가 되어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시절이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사람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건물도 도시도 오래되면 늙는다. 늙으면 죽는다. 늙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매혹시키는 것이 마라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부각시키는 개발이 아니면 그 개발은 실패작이다.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보존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  (21, 185∼186, 200쪽)


 예나 이제나 아직 철부지이며, 이런 철부지이니 철부지로서 책을 펼치고 그림을 즐기고 사진을 맛봅니다. 철부지이니 아쉽거나 모자라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받아들이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맞아들입니다. 섣불리 더 뻗댈 마음이 없으며, 괜시리 숨기거나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늘 제 마음그릇 그대로 드러내면서 온몸으로 껴안고 싶습니다.
 





 (3) 김영갑 님 사진삶을 담은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사진으로 감동시킬 수 있으면 글로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밝히는 김영갑 님 사진삶이 담긴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를 읽습니다. 204쪽짜리 자그마한 책 마지막을 채우는 말마디입니다. 이 말마디 앞에는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글로 표현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한 줄로 밝힐 수 없다면 백 줄로도 살을 붙일 수 없고, 백 줄을 채우지 못한다면 한 줄로 간추릴 수 없다는 이야기와 매한가지일 테지요.


.. 아버지에 대한 미움, 증오가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긴장한다. 내 자신을 반성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만큼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 사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내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  (140, 173쪽)


 김영갑 님은 오로지 제주섬 중간산을 찍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들어 더는 사진기를 손으로 못 찍고 마음으로만 찍게 된 뒤부터는 두모악갤러리를 만들었고, 이곳 두모악갤러리는 당신 뜻을 잇는 분이 야무지게 꾸리고 있습니다. 제주섬마실을 하는 분들은 우도나 마라도에 들르듯 으레 이곳에 들르고, 김영갑 님이 온삶을 바친 사진을 고개를 끄덕이며, 또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봅니다. 또는, ‘저게 뭐야? 나도 찍겠는걸?’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쉰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마흔을 조금 넘기고부터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앞서 여러 매체와 만나서 남긴 이야기를 살피니, ‘쉰조차 못 되어 이슬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쉰 살 가까이 살아남은 나는 얼마나 고마운’ 노릇이냐고 밝혔더군요.

 그래, 쉰은커녕 마흔이나 서른에, 또는 스물이나 열에 떠난 넋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스스로 못 느낄 뿐이지만, 우리는 이 젊거나 어린 넋들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우리 목숨을 고이 여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앞에 길을 마련한 숱한 땀방울이 있었기에 우리들 누구나 잔걱정 덜하면서 세상살이를 해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정신나갔다고 혀를 찬다. 그래도 나는 웃는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다.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뭐했냐고 다그쳐도 나는 웃는다. 십 년 세월 동안 밥벌이도 안 되는 일에 몰두했지만 드러내 보일 것이 없다. 뚜렷한 결과는 없지만 부끄럽지 않으려 나만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  (160쪽)


 김영갑 님이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를 펴내던 해는 1996년이고, 이때 당신 나이 마흔이었으며, 제주섬에 흘러든 지 열두 해째입니다. 이 책에 스스로 적은 해적이를 보면, 이무렵까지 20만 장 넘게 제주섬 중간산을 찍었다고 했는데, 김영갑 님은 여느 필름이 아닌 파노라마사진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찍어댔습니다. 숨돌릴 틈 없이 찍었고, 오늘 어제 내일 가리지 않고 찍었습니다.

 한 장을 얻으려고 찍은 사진이었다 할는지 모르나, 제가 느끼기로는 하나하나 헤아리면서 20만 장을 얻으려고 찍은 20만 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뒤로 더 찍어 50만 장을 이루었다면 50만 가지 모습을 나누고 싶어 50만 장을 찍었으리라 봅니다. 김영갑 님한테 제주섬 중간산에 살며서 사진찍는 일이란 당신 삶이었으니까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삶이고, 하루도 놓칠 수 없는 삶이었으니까요. 아니, 하루조차 아닌 한 시간도, 한 분도 한 초도 잊을 수 없는 삶이었으니까요.

 한때 한때 사진으로 담아 한삶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렇게 담은 한삶을 스스로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얄궂게 찾아든 병 때문에 당신 사진을 당신 스스로 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신한테 병이 찾아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사진기만 붙잡았을 테며, 당신은 훨씬 더 많이 사진을 남겼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이 모인 사진은 당신 스스로나 다른 사람 누구나 짐을 질 수 없을 만큼 되었으리라 봅니다.

 당신을 부른 뜻이 하늘나라 뜻인지 모르겠지만, ‘제주섬 중간산을 제주섬 중간산 그대로 담아내는 일은 이제 그쯤이면 넉넉하구나. 이제부터는 있는 그대로 느끼며 담아낸 제주섬 중간산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끔 갈무리해야 하지 않느냐’ 하면서 김영갑 님한테 병을 내려주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김영갑 님 스스로 아쉽거나 모자란 대목을 느낀다면, 그 아쉬움과 모자람은 사람들이 당신이 남긴 사진을 보면서 깨달으면 된다고 헤아렸을지 모르고요.


.. 사람들은 사진 공해 속에서 살면서도 사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 …… 고개를 들면 사방에 사진이다. 문밖을 나서면 골목에도, 지하도에도, 전철에도, 버스에도 사진이다. 그런데도 무관심이다 ..  (69쪽)


 2006년에 나온 《김영갑 1957∼2005》(다빈치)라는 사진책이 떠오릅니다. 이 사진책이 나온 지도 벌써 세 해가 되었고, 김영갑 님이 세상을 떠난 지도 네 해가 되었습니다. 참 빠르구나 싶으면서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싶습니다. 《김영갑 1957∼2005》를 들춰봅니다. “중간산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빛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간산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 내가 한라산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웃는다.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벌써 다른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기에 한라산 자락에서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다 …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한라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빼어날 수 없다.” 같은 글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제주섬 중간산은 김영갑 님과 한몸으로 있던 삶이었군요. 비록 ‘세 대에 걸쳐’ 살지 않아 ‘제주 토박이’가 되지는 못했으나, 당신 그 삶으로 한몸이 되는 길을 찾았군요. 그러니, 돈벌이 사진이 아닌 두모악갤러리를 마지막으로 남겼고, 죽기 얼마 앞서 찾아온 기자 앞에서도 ‘기자 양반,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그때는 사진 찍기를 배우라’고 스스럼없이 말했군요. (4342.5.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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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들려주는 노래 카르페디엠 12
토마스 야이어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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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권학교는 아이들을 전쟁 미치광이로 만든다
 [잠깐 읽기 32] 토마스 야이어,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



- 책이름 :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
- 글 : 토마스 야이어
- 옮긴이 : 신홍민
- 펴낸곳 : 양철북 (2009.3.25.)
- 책값 : 9800원



 (1) 제도권학교와 정치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을 마치면서, 인천 부평을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뽑히고, 울산 북구에서는 진보신당 후보가 뽑혔습니다. 인천에서는 안상수 인천시장이 시민들한테 지난 1월 편지를 띄우며 ‘새 차를 살 때 대우 자동차를 사면서 지역경제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동차 공장 한 곳이 지역살림을 크게 움직이는 셈이라 할 테지만, 이 편지를 받아 읽는 마음은 가볍지 못했습니다. 왜 자동차 공장을 살려야 지역살림이 산다고 하는가 싶어서. 기름을 먹는 자동차는 석유값이 끝없이 오를 뿐 아니라 오래잖아 석유가 마르면 그예 깡통이 되어 버릴 텐데, 더구나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동안에는 자동차 배기가스가 공기를 더럽히는데, 지역살림 살리기를 오로지 ‘대우 자동차 한 대 더 사며 살리기’로만 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 “우리 아버지 머리속에는 미식축구밖에 없어. 우리 아버지에게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세상의 중심이야.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남편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따라. 어떤 때는 우리 어머니가 앨라배마의 촌구석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 아버지하고 결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  (15쪽)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뽑힌 조승수 님은 진보신당으로서는 첫 번째 의원입니다. 꼭 어느 정당 첫 번째 의원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정치밭에 진보정당 사람이 발을 디딛기 어려운 모습을 돌아본다면 좀더 뜻있게 이와 같은 소식을 다루어 줄 법하지만, 옆지기 식구네 집에서 모처럼 텔레비전으로 이런 소식 저런 소식 찾아 들어 보아도 딱히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인터넷이나 종이신문 소식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통 ‘여당-야당’이라는 두 갈래길만 있고, 두 갈래길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목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학입시를 앞두고 ‘대학교 가는 아이들’만 신나게 다룰 뿐, ‘대학교 안 가는 아이들’은 거의 한 번조차 다루지 않는 모습과 마찬가지입니다. 신문잡지 들은 ‘수험생 아이를 둔 독자님’을 생각한다며 ‘수능 문제’를 따로 찍어서 나누어 주기도 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꽤 넓은 자리를 내주며 입시 이야기를 실어 놓습니다. 그러나 입시가 아닌 ‘초중고등학교 삶’을 다루는 일이란 없으며, ‘대학교 안 가고 사회에 첫 발을 디딜 청소년한테 도움이 될 삶’을 다루는 일 또한 없습니다.


.. “나, 린다 코르먼은 모든 적군에 맞서 미합중국의 헌법을 지지하고 보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린다는 의식에 맞추어 진지하게 대령의 말을 복창했다. 심지어 장교가 금빛 소위 계급장을 건네주며, “이 세상 끝까지 행운을 빈다.”고 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린다는 멋진 외출복 차림을 한 자기를 보고 몹시 자랑스러워 할 아버지를 생각했다 ..  (54쪽)


 열네 살 처남은 다섯 해 뒤면 선거권을 받습니다. 어쩌면, 처남한테는 어느 날 갑자기 선거권이랍시고 뚝 떨어지는 셈일 텐데, 그때까지 학교나 집에서나 ‘정치란 무엇이고 선거란 어떤 일인지’를 제대로 배울까 궁금하곤 합니다. 아니, 가르칠 일이란 없을 테지요. 학교 공부 시키는 데에도 바쁠 테니까요. 처남한테는 학교 공부보다도 놀기에 바쁘기도 할 테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문이든 잡지든 다른 어느 매체이든, 아이들한테 ‘대학교 들어가는 시험’ 이야기만 들먹일 뿐입니다. 적어도 ‘대학교에 들어갈 아이들이 정치 바라보기’를 어찌 해야 하는가를 들먹이지도 못합니다. 대학생이 되면 대학 공부를 비롯해 동아리라든지 학생운동도 있기 마련이지만, 토익-토플, 학과공부, 사랑, 놀이를 빼고 이 아이들한테 세상과 사회와 나 스스로를 읽도록 이끄는 이야기는 조금도 들먹이지 못합니다.

 하기는. 언론 탓을 하기 앞서 어버이 탓을 해야 할 노릇이요, 학교 교사 탓을 해야 할 노릇입니다만. 제도권교육 틀거리를 탓할 노릇이요, 교과서를 탓할 노릇이지만.


.. 데비는 지미가 어떤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오래전부터 데비는 종종 학교를 더 다닐 필요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한껏 차려입고 하루 종일 ‘미식축구팀의 화끈한 남자아이들’과 외모와 옷에 대해서 수다를 늘어놓는 치어리더들을 만날 때는 더 그랬다 ..  (153쪽)


 지금은 어떠한 과목으로 이름이 바뀌었을는지, 또는 그대로 과목이 남았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정치ㆍ경제’라는 과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과목 이름은 이러하여도 ‘고등학생인 제가 겪는 이 나라 정치와 경제’를 곧바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인 우리한테 선거권이 있다 할 때에 선거 후보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공약을 내놓는지를 알 수 없었고, 안다 할지라도 이런 발자취와 다짐을 어떻게 지켜보아야 할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세상은 우리들(고등학교를 마칠 사람)을 교과서 지식으로만 머리가 가득 차도록 하고 나서 사회로 내보낸다고 해야 할까요. 기껏 아는 재주라 해 보았자 시험풀이 하는 재주요, 몇 가지 자질구레한 지식쪼가리뿐입니다. 실업계학교는 인문계학교하고는 달라 바로바로 회사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우리들이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할 수 있는 일이라 한다면 찻집에서 물잔 나른다거나 공사판에서 잔심부름 하기쯤? 이를테면 삽질 호미질 낫질조차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아니, 학교에서 이러한 일매무새를 가르칠 까닭이 없다고 여긴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우리들이 세상 보는 눈을 슬기롭게 키우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닫도록 거들지 못하고,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을 우리 스스로 찾아나서면서 일솜씨를 하나하나 가다듬도록 북돋우지 못했습니다. 학교는 우리들을 ‘책상물림 지식인’으로만 키우는 공장하고 같다고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 밤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물었다. “베트남은 어땠니?” “더웠어요.” 린다가 대답했다 ..  (307쪽)


 대통령을 뽑는 1992년 선거를 지켜보던 (고등학교 2학년인) 우리들한테,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주영 백기완 이러한 분들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야기해 줄 만한 교사는 없었습니다. 집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이 저마다 어찌 다른 공약을 내놓았는지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란 고작 ‘선거에서는 가장 나쁜 사람을 하나씩 덜어내어 마지막 사람을 뽑아야 한다’에 머물 뿐이었고, 그렇게 덜어낼 ‘나쁜 사람’이 누구이냐고 물으면 ‘모두 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비판적 지지’라지만,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비판’은 없이 ‘지지’만 있는 채로 ‘1번 찍기’와 ‘2번 찍기’에 그치도록 하는 우리네 학교교육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르는 일이긴 하나, 아이들을 낳은 어른이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키우는 어른 모두 ‘슬기롭게 비판하는 정치눈’을 다스리지 못한 탓에 아이들 앞에서도 옳고 바른 눈썰미를 기르도록 못 가르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맞고 자라던 교사가 오늘날 학교에서 때리며 가르치는 쳇바퀴가 이어지듯, 어릴 때부터 정치눈을 기르지 않으며 얕은 생각에 허우적거리던 어른이 오늘날 아이들을 당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들이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2) 전쟁 미치광이 미국을 이야기하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


 청소년문학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읽습니다. 이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거짓되이 베트남전쟁을 일으키면서 허울좋은 평화로 사람들 눈을 속이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꾼과 군인이 말하는 평화란 ‘돈많은 미국 시민권자 평화’일 뿐, ‘미국사람 모두가 누릴 평화’조차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1등으로 세계경찰 노릇을 해야 할 미국이 지구에서 지켜 주는 평화’이지, ‘1등이나 꼴등에 매이지 않으며 스스로 조촐하게 살림을 꾸리는 크고작은 뭇나라마다 애틋하게 어깨동무하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싸움터에서 총에 맞아 죽는 군인한테 훈장을 주는 미국입니다. ‘평화를 지키려 했’기 때문에 상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평화를 지키려다가 다치거나 죽었으니 ‘동료 군인을 비롯한 미국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숱한 주검과 핏물을 바라보면서 ‘왜 이런 싸움이 벌어졌고, 이 싸움은 누구를 지켜 주는 일인가’는 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원수! 돌격!’ 두 가지만 생각하게 됩니다.


.. “당신은 악마예요.” 린다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잔인한 악마! 당신들이 우리 병사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내 눈으로 봤어요.” 린다는 자기가 수술한 수많은 부상자들과, 희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분류해 옆으로 제쳐 놓았던 병사들을 생각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우리 마을을 파괴하고, 우리 식구들을 살해했는지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그 사람(베트콩)이 비난하듯 물었다. “미군 장군들은 딴소리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전쟁을 시작한 건 우리가 아니에요.” ,,  (225쪽)


 공산주의가 퍼지지 않도록 막는다고 했지만, 미국이든 한국이든 ‘공산주의란 무엇인가?’를 사람들한테 옳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이기는 하나, 사회주의란 참말로 어떠한 틀거리인가를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나라라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있을 뿐 아닐, 집회ㆍ시위ㆍ결사 같은 자유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론한테 재갈을 물리고, 제 생각과 뜻을 펼칠 자유란 민주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녀는 평등해야 하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평등해야 하며, 학력에 따라 일삯을 달리 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언제나 말에서 그칩니다. 우리 나라에는 자유도 없고 민주도 없고 평화도 없으며 평등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길들어 버립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공무원이 되고 교사가 되고 회사 정규직이 되면, 그만 제 이웃과 동무를 싹 잊습니다. 금을 그어 놓습니다. 울타리를 쌓습니다.

 전쟁 미치광이 미국은 총칼을 들고 힘여린 나라에 군화발로 쳐들어갔지만, 우리들은 전쟁 미치광이 나라가 하는 짓에 손뼉을 치고 나팔수가 되는 한편, 우리 스스로 ‘총칼만 안 든 전쟁 미치광이 짓’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 미 공군이 작전을 도맡아 이 지역에 있는 베트콩의 보급로에 샅샅이 고엽제를 뿌렸다.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벌건 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231쪽)


 그런데, 이 청소년문학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이 나라 청소년 가운데 얼마나 속속들이 알아보거나 느끼면서 가슴으로 받아안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어떠한 나라인지 하나하나 배우지 못할 청소년들 아닙니까. 한국 사회와 경제와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는 눈길조차 안 둘 뿐더러 슬기롭고 바르게 가르치는 어른이 없는 우리 청소년들 아닙니까. 청소년들한테 보여지는 이야기란 〈꽃을 든 남자〉요, 우리 어른들 스스로 이 이야기에 똑같이 얼이 빠져 버리지 않습니까. 〈꽃을 든 남자〉를 좋아하는 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꽃을 든 남자〉에만 묻히며 우리 눈에 흐리멍덩해지고 우리가 걸을 길과 우리 이웃이 걷는 길을 모두 놓쳐 버리면 우리 삶이 어찌 되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 군은 부상병들을 세심하게 돌보지 않았다. 여섯 달이 지난 뒤에도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사람은 퇴원 조치되어 친척과 친구들 손에 맡겨졌다. 그 사람들은 팔다리가 없고, 목 아랫 부분이 마비되고, 급히 임시방편으로 꿰맨 탓에 얼굴과 상처 부위가 기형이 되고, 자기 이름조차도 모르는 정신 장애인이 된 절망스런 남자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베트남에서 청춘을 잃고, 무기력한 불구자가 된 20대 남자들이었다 … 그 남자들은 따뜻한 정을 절실하게 바랐지만 받지 못했다. 아들이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마치 무슨 치욕이라도 되는 듯, 부모들이 거의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들과 여자 친구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그 남자들 곁을 떠났다 ..  (338∼339쪽)


 《그리운 매화향기》(2001)라는 어린이문학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전쟁 미치광이 나라가 우리 삶터를 어떻게 옥죄었는가를 깊이있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2008)이라는 어린이문학이 하나 있습니다. 전쟁 미치광이 나라를 잊고 지내던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보가 되어 무너졌는가를 너른 눈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2003)라는 어린이문학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전쟁에는 가해자 나라와 피해자 나라가 나뉘지 않고, 힘센 이가 힘여린 모두를 찍어누를 뿐임을 환하게 밝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배경 지식’이 좀 모자라거나 없더라도 작품으로 말하는 이야기에 어렵잖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는 우리네 아이들한테는 좀 어려운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경 지식’도 있어야 할 테지만, 문화와 삶자락이 아주 다른 서양 청소년 눈길에 따라 그려지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 흐르는 빛줄기는 틀림없이 ‘전쟁이 싫고 평화가 좋다’입니다만, 그리고 이 빛줄기가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 청소년과 어른 들한테도 고운 목소리로 다가오겠지만, “미국은 말 그대로 전쟁 미치광이 나라이지. 자, 그러니 그 미치광이 짓이 무언지 차근차근 살펴볼까?” 하면서 우리 목소리와 눈높이와 마음결에 알맞게 맞춘 작품을 우리 스스로 빚어내어 주는 어른들이 있으면 얼마나 더 기뻤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번역 백 권이 나오는 동안 좋은 창작이 한 권이라도 나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4.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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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전희식.김정임 지음 / 그물코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66 ― 어린이와 늙은이, 딸아들과 어버이는 한몸
 : 전희식과 김정임, 《똥꽃》



- 책이름 : 똥꽃,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 글 : 전희식, 김정임
- 펴낸곳 : 그물코 (2008.3.5.)
- 책값 : 12000원


 (1) 할배 자전거와 어린이 자전거


 인천에 있는 ㅈ대학교 사진학과 ㅂ교수님과 낮밥 약속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찾아갑니다. 사진학과 교수님은 도서관장 일도 맡고 있어 본관에서 뵙기로 했기에, 본관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어디에다 잠가 놓으면 좋을지를 헤아립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ㅂ교수님한테 손전화를 거는데, 학교문에서 지켜서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거, 어디 가려고 왔어요?” 하고 묻습니다. 뻔히 이 대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보고 이렇게 묻다니, 아마 제가 양복을 차려입고 까만 자가용을 끌고 왔다면 이런 말투나 말이 나오지 않았겠다고 느낍니다. “여기(ㅈ대학교) 왔어요.” 하고 짧게 끊습니다. 그러니 더 묻지 않습니다. 차 댄 자리 끄트머리에 자전거를 댈까 하다가,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자리가 도둑 안 맞는 자리임을 생각하며, 본관 들머리 옆으로 길게 나무를 심어 놓은 한켠에 자전거를 묶습니다. 이리로는 걸어다닐 사람이 없어 걸리적거리지 않고, 저로서도 볼일 마치고 나오면 곧바로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문 지킴이는 다시 다가와 “자전거 거기 세우면 안 돼요.” 하고 가로막습니다. “여기 세우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거기 세우면 안 돼요. 거기 세우면 다른 사람도 오토바이 거기다 세워 놔.” “여긴 사람들 다니지 않는 자리인데 여기 세우면 안 될 까닭이 있습니까?” “안 되니까 저기 구석으로 갖다 놔요.”

 방송국에 가도 신문사에 가도, 또 어느 건물에 볼일을 보러 가도, 건물 지킴이는 자전거꾼한테 푸대접입니다. 때때로 반말을 놓기도 하고 멱살잡이라도 할 듯 우락부락거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워낙 자주 겪어 보았고, 어느 규칙이나 교칙이나 회칙에도 ‘건물 앞 빈터에 자전거 세우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터라, “이거 손대지 마세요. 손대면 신고합니다.” 한 마디로 으름장을 놓고 건물로 들어갑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한테 으름장을 놓아야 하니 마음 한켠이 켕기지만, 자전거꾼 권리를 생각한다면 물러설 수 없게 됩니다. 전철을 탈 때에도 이런 일이 흔한데, 나이를 제법 잡수신 분들은 자전거꾼을 밉보거나 뱀눈으로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자리를 느낄 때마다, 왜 이분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얕은 우물에 가두려고 하는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마땅히 타니까, 자전거 세울 자리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자동차 세울 자리는 있어도 자전거 세울 자리란 없습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걱정없이 알뜰히 세워 놓을 자리를 찾아볼 노릇이건만, ‘비싼돈 들여 멋들어지게 지은 건물 옆에 자전거가 비죽이 서 있으면 보기 나쁘다’는 말로 자전거를 못살게 굽니다.


.. 어머니 목소리가 바뀌는가 싶더니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젤 불쌍항 기 너라. 묵을 끼 남아 있어도 묵으락꼬 안 카믄 묵을 줄도 모르고, 형들 안 묵었닥꼬 냉가두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누르스름한 조끼를 입었다. 등짝이 넓적한 게 보기 좋다며 어머님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좋아하셨다. “내가 죽더라도 이거는 태우지 말고 니가 입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누가 머락카믄 그래야. 우리 어무이 생각나서 어무이 옷 입는닥꼬.” ..  (224∼225쪽)


 퍽 예전 일인데, 아버지가 모는 차를 얻어타고 아버지 살던 동네를 달린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이었음에도, 길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거나 걸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 앞에서 빵빵거리며 욕을 몇 마디 하시곤 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어떻게 교사 된 아버지가 이렇게 하실 수 있나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라, “아버지, 조금 기다렸다가 가도 되지 않아요? 아이들한테 빵빵거리면 놀라잖아요?” 하고 여쭙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날은 더 빵빵거리지 않으시지만, 다음에 또 얻어탈 때 보면 또 그 빵빵거림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자동차를 몰게 되는 분들은 교육자이건 아니건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길에서 차 앞에서 얼쩡거리는 무엇’이라도 있으면 짜증스러워서 이내 빵빵질을 하게 되지 않느냐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차를 몰 때만이 아니라, 여느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 돌아오는 길에 봉투랑 선물들을 가리키며 내가 “우리 어머니 부자가 되셨다”고 부러워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날라 댕긴다 칸들 누가 나보고 이런 걸 주건노. 다 니 얼굴 보고 중기지.” 공덕을 나에게 돌리고 사리를 분별하시는 어머니 모습은 아침과 비교하면 거짓말 같았다. 절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머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음식뿐 아니라 마실 물까지 챙겨다 주며 곁에 와서 일부러 말을 걸면서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것에 어머니의 긴장과 경계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정성스런 모심’이 백 가지 약보다 나았다 ..  (84쪽)


 자전거한테 빵빵거리는 자동차, 건물 벽에 자전거를 바짝 붙인다고 하여도 ‘건물 보기 흉해진다’며 손사래치며 자전거를 발로 툭툭 차는 늙수그레한 건물 지킴이들한테 때때로 묻고 싶어지곤 합니다. 아니, 앞으로는 물어 볼 생각입니다. 늙어 허리 굽은 할매 할배가 엉금엉금 기듯 길을 걸어간다고 할 때에도 그처럼 빵빵거리거나 얼른 비키라고 소리를 치실는지를. 당신님들은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저 할매 할배와 같은 나이가 될 텐데, 그때 당신님들한테도 그렇게 못살게 굴면 느낌이 어떠하실는지를.

 힘여린 이를 아낄 줄 알고, 힘없는 이를 보듬을 줄 알며, 힘앗긴 이를 사랑할 줄 알아야 참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를 아끼고 어린이를 보듬으며 할매 할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우리들은 바른 사람으로 우뚝 서면서 이 땅 이 겨레와 어깨동무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계남면에서 장수읍으로 넘어가는 국도를 따라 ‘에프티에이FTA 결사반대’라는 장수군 농민회의 노란 깃발이 죽 꽂혀 있는 걸 보셨다. “저거는 먹꼬? 새 쫓을락꼬 꼬자 난나?”라고 하셔서 글자를 읽어 보라고 했더니 바람에 펄럭거려서 잘 못 읽으신다. 읽는다 해도 영어를 모르니 ‘결사반대’만 읽으셨을 것이다. 노인들만 있고 문맹자도 만만찮은 시골길에 농민회에서 만든 영어로 쓰인 ‘FTA’라는 남의 나라 말 깃발이 참 낯설어 보였다 ..  (81쪽)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다가 곧잘 큰 찻길로 접어들어 달리다 보면 거슬러 달리는 할배 자전거를 드문드문 마주칩니다. 무척 아슬아슬한 노릇인데, 할배 자전거가 ‘역주행’을 몰라서 이리 하실 수 있는 한편, 지난날에는 역주행이고 순주행이고 없이 ‘길에서는 자전거가 가고픈 대로 달렸다’는 생각으로 그리 달리시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날이라고 해 보아야, 인천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신호등이 놓인 때는 고작 마흔 해밖에 안 되었으며, 마흔 해 앞서 신호등이 놓였을 때에도 북적이는 곳에 한두 곳만 놓였을 뿐, 어디에서도 신호등이란 없이 사람과 자전거가 마음껏 오갔습니다. 이런 지난날 삶자락이 몸에 밴 할배 자전거는 찻길에서 스스럼없이 ‘거슬러 달리기’를 하십니다. 그래, 이런 할배 자전거질을 몰랐을 때에는 “할아버지! 그렇게 달리면 위험해요!”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제는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뒷거울로 뒤에 차가 있는가 살피며, 제가 찻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며 할배 자전거가 느긋하게 지나가도록 뒷차를 막아서 빠르기를 늦추도록 하고 왼손을 들어 줍니다.


.. “어무이, 오줌 눌 때 안 됐어요? 오줌 좀 누러 가입시다.” “오줌? 여따 눠 삐리지 뭐.” “예?” “불도 따끈따끈해서 싸도 잘 마르겠네, 하하하하.” “안 돼요. 여따 누면 안 돼요! 옷 빨기 힘들어요!” “옷 빨드래도 내가 빠나 니가 빨지!” ..  (59쪽)


 할배들한테, 또 아이들한테, 자전거를 걱정없이 몸 튼튼히 지키며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자동차한테서 당신들 몸을 지키는’ 자전거질만 가르칠 노릇이 아니라, 자동차 모는 사람이 먼저 ‘자전거 타는 사람’을 눈여겨볼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전면허증을 줄 때에는 길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한테 어떻게 얼마나 마음쓸 줄 아는가를 돌아보면서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골목을 걷는 할배 할매와 어린이 앞에서 어떻게 차를 모느냐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면허를 주든 말든 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르신을 모실 줄 알자면 어린이를 받들 줄 알아야 하고, 어린이를 받들 줄 알자면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한테는 우리 스스로 사람됨을 잃어 가는 가르침과 사람됨을 내다버리는 돈벌이만 판치고 있지 않느냐 느낍니다.


 (2) 골목길 할매와 할배


 ㅈ대학교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자전거머리를 돌립니다. 집으로 돌아가 할 일이 산더미같고, 어제부터 몸살이 돌아 얼른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지만, 오늘처럼 볕이 좋을 때 골목마실을 안 하면 두고두고 안타까워 하리라 생각하면서 버티어 보기로 합니다.

 마침 오늘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으슬으슬 추운 몸은 더 고단합니다. 그러나 송림4동을 거쳐 도화3동 골목집 사이사이를 도는 동안, 마음이 활짝 펴고 눈이 맑게 뜨입니다.

 틀림없이 이 동네는 말끔하게(?) 밀려 아파트가 될 곳인데, 곧장 내일부터 아파트로 바뀌게 된다 하여도, 이 골목길 사람들은 ‘헐리고 비어 버린 집터’를 치우고 흙을 고르고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야말로 곳곳에, 사람 오가는 길자리를 뺀 모든 ‘빈 집터’가 골목밭이 되어 있습니다.


.. “나 같은 거는 사람도 아잉기 농띠처럼 죽지도 않고 니 짐떵어리다, 니 짐떵어리.” “너 없을 때 내가 그만 칵 죽어 삐리야 이도 저도 안 보고 내가 눈을 감아야 안 보지.” “나 땜시 니가 딴 살림 함스로 두벌 고생하는 거 내가 눈을 감아야 안 보지.” 자식이 집에서 부모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 하는 것도 아니요,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려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본정신일 때 자식 보기 미안하고 똥오줌 범벅인 이부자리가 창피해서 하는 면피용 발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저런 극단의 말씀을 하시는 순간의 심정은 어머니 건강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어무이, 어무이가 나 어릴 때 기저귀 갈아 채우고 똥걸레 다 빨아 주고 했잖아요. 그것도 몇 년 동안을 그랬잖아요. 제가 이제 그거 어머니한테 갚아 드리는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애 키울 때는 다 그라지. 앙 그라는 사람 누가 있노.” “마찬가지죠, 어머니. 자기 어머니가 나이 잡숫고 몸 아프면 자식이 다 그라능기라요. 오줌 누믄 옷 갈아입히고 똥 묻으믄 빨아드리고요.” “요새 세상에 그라는 사람이 오대 있노. 지 밥 묵끼도 바쁜데.” “아이 차암, 옷에 똥오줌 누시는 사람보다 그거 빨 수 있는 사람이 몇 배 행복한 거예요. 저 아무리 고생한닥캐도 어머니하고 안 바꿔요, 절대.” ..  (210∼211쪽)


 길그림책에는 ‘도화3동 20번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눈앞에 펼쳐진 도화3동 20번지는 딱 한 집만 남고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저는 도화1동에서 태어났으니 도화3동하고는 그리 애틋한 느낌이 없다 할 수 있지만, 제가 태어난 바로 이웃 동네인 까닭에 한참 동안 바람을 맞으며 빈 들녘 아닌 허물어 쓸려나간 집자리에 멀뚱멀뚱 섭니다.

 아직 가까스로 살아남은 나무전봇대를 쓰다듬습니다. 도화3동 나무전봇대까지 하면, 인천 옛 도심지에서 송림1동과 내동과 중앙로2가까지 해서 저로서는 네 번째로 찾아낸 나무전봇대입니다. 조금 거닐다 보니 송림4동에 나무전봇대가 두 군데 더 남아 있습니다. 하루 사이에 나무전봇대를 세 군데나 보게 됩니다.

 나무전봇대 살아남은 둘레로도 어김없이 텃밭이 일구어져 있습니다. 고추를 심고 푸성귀를 심었으며, 아직 싹이 돋지 않아 무슨 씨를 심었는지 모를 밭이랑이 그득그득 보입니다.

 빈 집자리에 동그랗게 꽃밭을 일구기도 합니다. 버려진 꽃그릇에 한 포기씩 심긴 고추줄기가 싱그럽습니다. 그 위로 다닥다닥 붙은 빨래집게와 빨래줄을 바라보면서, 당신님들 마지막 삶자락 이곳에서 밀려나게 될 마지막 그때까지 ‘나무 심는 사람’처럼 ‘골목길 텃밭 일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들 손길을 가슴 찡하게 느낍니다.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바지런히 담으며, 송림4동과 도화3동 둘레에서 대학생으로 배우는 이들이 이 삶터를 꾸밈없이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무엇인가 가슴에 고이 껴안는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생각합니다.


..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뒤로 밀렸다. 거추장스런 짐덩어리가 되었다. 5월 8일 어버이날은 가슴에 그 잘난 카네이션 한 송이가 대롱거리다 만다.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든여섯의 몸 불편한 어머니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 장례식장에서 울컥울컥 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 잔치를 하고 싶었다 … 면사무소에 가도 그렇고 병원에 가도 그렇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간병인도 그렇고 하물며 우체부 아저씨도 그랬다. 여든여섯인 우리 어머니에게 쉽게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디가 아픈데?” “이거 아니야. 할머니, 주머니 다시 찾아봐요. 다른 도장 없어?” 나이 잡수시고 몸 어딘가가 불편한 노인을 대하는 건강한 사람들의 태도는 단순한 무시를 넘어서 무례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호호백발 할아버지 환자에게 반말을 하던 어느 대학병원 간호사는 “친근하게 하느라고 그런다”며 자기들의 반말을 변명했다. “아, 그래? 반말하니까 할아버지도 친근해서 좋다고 그러더냐?” 내가 바로 받아쳤더니 그 간호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  (150∼151, 155∼156쪽)


 곳곳이 허물린 집이라 어찌 보면 으스스한 동네이지만, 길바닥에 자잘한 쓰레기 나뒹굴지 않습니다. 집마다 문간에 쓰레받이와 빗자루가 놓여 있는데, 여느 사람들이 안 보는 때에 골목집 할매와 할배는 부지런히 쓸고 치우고 하셨을 테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돈을 주지 않아도, 당신 스스로 당신 집을 사랑하고 당신 동네를 아끼는 마음으로.

 저잣거리 길바닥장사라도 할 기운마저 남아 있지 않을 듯 구부정한 할매와 할배가 곡괭이를 들고 빈 집자리 돌을 고른다든지, 호미와 괭이로 밭을 일군다든지, 그러면서 푸성귀 몇 손을 거두어들인다든지 하는 모습이란 바로 당신님들 스스로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을 당신님들 딸아들한테 기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당신님 마지막 삶을 알차고 싱싱하게 꾸릴 수 있음을 갖은 몸뚱이로 드러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 그동안 내가 읽어 온 책들은 좀 건조했다. 《노년기 정신장애》는 치매 중에서도 혈관성치매인 뇌졸증이나 우울증 같은 증상에 대해서는 도움이 될 책이다. 그러나 노년기의 심리변화나 노년기 적응의 과제 등은 너무 도식적이었다. 책 구성이 논문처럼 딱딱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고 ‘노인기계’를 관리하고 보수하는 실용서 같았다는 말이다 ..  (102쪽)


 햇볕에 빨래를 말립니다. 길가 빨랫줄에 빨래를 넙니다. 오가는 이웃이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집마다 문간에 마련한 걸상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니 걸상은 모두 비어 있습니다.

 이제 이곳 이 골목이 죄 사라질 판이 되자, 민속학을 한다느니 국문학을 한다느니 지역학을 한다느니 건축학을 한다느니 사진을 찍는다드니 하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할매와 할배한테 ‘이 동네에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며 부산을 떨곤 합니다. 주말이 되면 인천 골목길은 서울 둘레에서 사진 찍으러 나들이 오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합니다. 다만, 인천역 차이나타운과 배다리 헌책방골목 언저리와 북성포구 둘레에서 맴돌 뿐이지만, 어찌 보면 ‘사라지거나 없어질 즈음’ 되니 뒤늦게나마 한 장쯤이라도 건져 보려고 찾아드는 사람으로 어수선합니다.

 할매와 할배는 난데없이 모델이 되고 뜬금없이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할매 이름과 할배 이름을 여쭈던 젊은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할매 나이가 얼마이며 할배 이름이 무엇인가를 여쭈는 젊은이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고작 한두 번 찾아와서 듣고는 끝입니다. 할매 할배 스스로 오래도록 풀어내는 긴 나날을 듣기보다는, 곶감 빼먹듯 알짜가 될 법한 몇 마디만 얼른 듣고 서울로 돌아가려는 몸짓들입니다.


.. 어머니한테 다가갔다. 똥이 발에 밟혔다.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어머니 얼굴이 반쪽이었고 훨씬 굵어진 주름들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어머니 곁에서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어머니 어깨를 감싸고 꼭 안았다. 울컥하고 울음이 솟았다. 어머니가 천천히 돌아앉으며 내 팔을 잡았는데 미끈거리는 똥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어머니 얼굴에 볼을 대고 속삭였다. “어무이 똥재이.”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그래서 웃었다. 그러자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내렸다. “어무이 똥박사∼” 소리를 높여 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알아들었나 보다. 어머니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어머니도 내 웃음에 감염되었는지 따라 웃었다. “어무이 똥대장∼”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서로 똥 묻은 상대를 손가락질해 가며 마구 웃었다. 불을 환히 밝히고 보니 여기저기 발린 똥덩이들이 몇 년 잘 묵은 된장 같았다 ..  (49쪽)


 골목마실을 하면서 옆지기와 아기를 생각합니다.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우리 옆지기와 아기가 우리 삶터인 골목길을 몸으로 마지막으로 부대낄 요 몇 해를 생각합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와 형을 낳아 길렀을 그 옛날 이 골목길 자취를 떠올립니다.

 할매 할배와 저하고는 아무런 사이가 아닐지 모르나, 어쩌면 이웃 사이였을는지 모릅니다. 골목마실을 하며 할매 할배한테 고개숙여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말을 섞지 않습니다. 저절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나눌 뿐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제가 이 동네에서 태어났을 때 이쁜 아기가 태어났다며 기뻐해 주었을는지 모르고, 제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 ‘저런!’ 하면서 일으켜세우고 빨간약을 발라 주었을는지 모릅니다.

 한 목숨은 늙어 쭈그렁뱅이가 되었습니다. 한 목숨은 아기에서 ‘아기 낳아 기르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3) 《똥꽃》이라고 하는 이야기책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전희식 님이 농사짓는 이야기가 아닌 어머니 돌보는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냅니다. 아니, 어머니를 돌보는 이야기라기보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라 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늙어서 죽을 날을 코앞에 둔 어머니 똥오줌을 치우고 밥해 먹이고 ‘좋은 데’ 찾아 함께 놀러 다니는 이야기라고 해야 맞겠구나 싶습니다.


.. 어머니를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다. 노인이 되면서 정신을 살짝 놓은 덕분에 저렇게 남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식 흉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것이다. 맨정신이라면 저럴 수 없을 것이다. 분노는 더욱 내면화되고 화석처럼 굳어져 병을 키울 것이다 ..  (138쪽)


 전희식 님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가 당신 똥오줌을 치워 주고 먹이고 키웠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지 않습니다. 전희식 님 또한 늙은 할배가 될 줄을 알고 어머니를 보듬지 않습니다.

 그저 똑같은 한 목숨으로서 어머니를 사랑할 뿐입니다. 어디 먼 데에서 나누는 사랑이 아닌, 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할 사랑이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 “빼뿌재이 나왔네. 저거 생주리 해 묵어도 좋고 삶아서 된장 끓여 묵어도 된다.” “이거 질경인데요?” “빼뿌재이라. 내가 빼뿌쟁이도 모륵까이!” 이 외에도 ‘나시래이(냉이)’나 ‘질금다지(빌금다지)’ 등의 봄나물 이름도 익혀 나갔다. 어머니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 있는 것은 도시의 세련된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각종 전기제품과 거기에 딸린 리모컨들은 귀신 붙은 방망이였고, 가스레인지나 진공청소기, 믹스기도 만지기가 무서웠다 ..  (70쪽)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날이 새로움을 봅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배웁니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도 젊은 아들한테 새로운 모습을 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웁니다. 서로서로 새 세상을 보고, 서로서로 새 날을 맞이합니다. 저마다 눈물과 웃음이 범벅이 되는 하루를 맞이하고, 같이 얼싸안으면서 시골살림을 꾸립니다.


.. 아이들도 어른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는 것이 시골일이고 생태 집짓기다. 도시일과 달리 힘이 세건 신체조건이 열악하건 다 조건에 합당한 일거리가 있는 게 시골일이다. 그래서 누구도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자부심과 어른들의 뿌듯함은 최대치가 된다 … 자다가 오줌 누러 가려면 총총한 별도 봐야 하고, 얼어붙는 겨울바람도 쐬야 한다. 손빨래를 하면서 빨랫감 하나하나에 얽힌 내력들을 되새겨 보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된다 …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목표 중심의 삶이 고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짓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모아서 다시 되살려내겠다는 원칙이다 … 일을 서두르거나 일정을 빠듯하게 세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이 일이다. 기다려야 하고 느긋해야 한다 … 귀도 멀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고 바위와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어머니가 철따라 피고 지는 꽃도 보시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곡의 바람결도 느끼시고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  (24∼25, 32쪽)


 섣부른 목소리로 ‘늙은 어버이 모시자’고 외치는 《똥꽃》이 아닙니다. 늙은 어버이 똥은 꽃과 같다고 내세우려는 《똥꽃》이 아닙니다. 억지스러운 아름다움을 빚어내려는 《똥꽃》이 아니요, 못난쟁이는 못난쟁이대로 즐겁다는 이야기를 값싸게 팔아치우려는 《똥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마다 참살길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선 자리에서 찾아내기를 바라는 《똥꽃》입니다. 내 몸과 마찬가지로 내 이웃 몸과 내 식구들 몸과 내 동무들 몸을 사랑할 슬기로운 길을 찾자는 《똥꽃》입니다. 낮은 목소리도 아니요 높은 목소리도 아닌 《똥꽃》입니다. 어울리는 삶, 땅에 발을 디딘 삶, 하늘을 우러를 줄 아는 삶을 조곤조곤 나누어 보고픈 《똥꽃》입니다. (4342.4.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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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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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낱 불쌍한 떨거지인 미국과 이명박과 ……
 [잠깐 읽기 31] 다케나카 치하루,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책이름 :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 글 : 다케나카 치하루
- 옮긴이 : 노재명
- 펴낸곳 : 갈라파고스 (2009.4.10.)
- 책값 : 11000원



 (1) 아이들 삶에서 사랑과 전쟁이란


 중학교 1학년인 처남은 ‘한국전쟁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릅니다. 헷갈려 합니다. 어쩌면, 해방된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잡아먹은 해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르는 일은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딘가 글렀다거나 말썽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전쟁이 터진 해를 안다 한다 하여 전쟁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피해 숫자를 알고, 휴전을 언제 맺었는지 아는 이들이 한국전쟁뿐 아니라 온누리 전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옥죄는지를 깨닫고 있을까요? 임진왜란이 우리한테 아픔이었다면, 고구려가 땅을 넓힌 일은 아무한테도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곰곰이 살피면, 우리 처남만 아니라 이웃 아이들도 한국전쟁을 잘 모릅니다. 일제강점기는 더욱 모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잇는 군사독재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며 이러한 독재 앙금이 그리 풀리지 않은 사회 얼거리를 더더욱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는 아예 모른다 하겠습니다. 촛불집회 이야기를 얼핏 들었을 테지만 살갗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이들 삶에 어떻게 잇닿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모두와 얽혀 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와 아이를 가르치는 학교교사 모두 이러한 이음고리를 못 느끼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비싼 손전화를 사 줄 돈은 있고, 인터넷게임을 하도록 마음써 주기는 하지만, 아이들한테 제 삶이 어떻게 흘러왔으며 앞으로 어찌 흘러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생각을 잇지 못합니다.


.. 최근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 테러전쟁에 수많은 나라들이 이런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반기를 들면 손해를 본다, 그렇기 때문애 전쟁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과연 이 경우에도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사상적 근거가 존재할까요? …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유는 전략적인 거점과 석유 확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산유국이 밀집되어 있는 페르시아만의 강대국 이란이 반미로 돌아선 것은 이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 식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사상이 수출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란에 전쟁을 유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신에 전쟁을 해 줄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 목표를 이루게 됩니다 ..  (26, 116쪽)


 6월 25일을 안다 하여도 4월 19일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한국사람일까 궁금합니다. 8월 15일을 안다 하여도 5월 18일을 모른다면? 10월 9일은 알아도 11월 13일을 모른다면? 12월 25일은 알아도 5월 1일은 모른다면? 그리고 이 모두를 죄다 모른다면? 이 모두를 죄다 안다면?

 안다면 무엇을 어디까지 알까요. 모른다면 무엇을 어느 만큼이나 모를까요. 뭔가를 안다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요.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마주했으며, 우리 어른 스스로는 얼마나 제대로 샅샅이 깨닫고 있을까요.


.. ‘폭력을 통제하는 방법’은 우연히 발생한 폭력사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폭력을 추방할 수 없습니다 ..  (166쪽)


 한국전쟁을 알아야 한다면, 한겨레가 둘로 쪼개어져 서로 죽이고 죽은 일이 끔찍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나쁜 놈이요 빨갱이는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은 나쁘다’는 속없고 알맹이없는 이야기만 외쳐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대리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대리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한국전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군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이 죽은 이러한 전쟁은 북녘이든 남녘이든,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느 무엇한테는 이바지할 구석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이란, 우리 스스로 치고받은 싸움이 되었든, 일본이 우리 땅에 쳐들어온 싸움이 되었든, 때리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모두 제 삶이 망가지고 제 삶터가 무너지며 제 삶자락이 사라지게 이끕니다. 나를 때린 이를 내가 앙갚음하며 때린다 하여 나한테 남은 생채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다리 자른 사람을 찾아가 그이 다리를 싹둑 자른다 하여 내 다리가 새로 돋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면 끝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습니다. 꺼진 셈틀을 켜듯 다시 켤 수 없고, 하드디스크를 갈아 새로 켤 수 없습니다. 오락실에서 돈을 더 넣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놀이처럼 새로 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오로지 누구한테나 꼭 하나만 있는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짓밟는 전쟁입니다. 일으켜 짓밟으려 하는 쪽이나 일어나 짓밟히는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일으켰다고 이네들 삶이 안 무너지겠습니까. 전쟁에 휩쓸렸지만 이겨냈어도 우리 삶이 안 무너졌겠습니까.

 낫과 쟁기가 아닌 총과 칼이란 처음부터 없어야 했습니다. 이제라도 걷어치워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하여 지키는 군대를 키운다지만, 세상 어느 나라 군대이든 ‘지키는 군대’란 어느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나라밖으로 쳐들어갔든 나라안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거나 독재에 팔뚝질을 하는 여느 사람을 후려갈기든 하는 군대였을 뿐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힘은 ‘총칼 주먹다짐’이 아닌 ‘맨 몸뚱이 사랑’일 뿐입니다. ‘돈과 재물’이 아닌 ‘어깨동무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이란 몹시 끔찍했던 지난날이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지난 삶이요,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지 말아야 할 지난 발자국입니다.


..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부터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사실 한 나라 안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슬럼지역에 사는 주민을 개발계획 때문에 강제 퇴거시키는 정책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됩니다. 이른바 ‘아름다운 도시’, ‘범죄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정책이지요 …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시민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더러운 것’들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  (172∼173쪽)


 열네 살 처남은 아홉 달짜리 아기를 보면서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기가 한 달이 될 무렵부터 보았는데, 나날이 ‘더 귀엽다’고 이야기합니다. 열네 살 처남은 제 두 눈으로 제 가까이에서 아기를 처음으로 마주할 뿐 아니라, 똥오줌을 누고 칭얼거리고 젖과 죽을 먹고 기고 놀고 웃고 우는 모두를 보면서 ‘귀엽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알게 된 처남한테는, 저 스스로 모르게 마음속에 사랑이 싹트리라 믿습니다. 아니, 사랑이 싹틀밖에 없습니다. 어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 어른이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 말을 하는 이 작은 목숨붙이가 이 하나로 얼마나 아름다운 줄을 느끼고 있으니 마땅히 사랑이 싹틉니다.

 그렇지만, 열네 살 처남 앞뒤와 둘레로 얼마나 많은 어리고 푸르고 젊은 넋들은 ‘귀여운 아기’를 부대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집에서, 제 배움터에서, 제 일터에서, 제 동네에서, ‘귀여운 아기’뿐 아니라 ‘살가운 나무’나 ‘애틋한 길고양이’나 ‘고마운 이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버이와 교사와 학교벗만이 아닙니다. 버스기사나 전철기사, 길에서 스치는 사람, 가게 일꾼, 학원 강사, 동네 사람들 가운데 오늘날 ‘열네 살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이 스스로 샘솟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 주는 어른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화를 보고 자라야 평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난감 총으로 전쟁놀이를 하는 가운데 저절로 총싸움은 아무것 아니요 텔레비전으로 흘러나오는 ‘미국이 일으킨 침공’ 또한 재미난 볼거리로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맛을 보고 자라면 사랑을 알면서 나누지만, 돈맛을 보며 자라면 돈만 벌면서 돈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2) 첫걸음 떼는 책


 일본사람이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이 책을 펼치기 앞서, ‘왜 우리는 전쟁 이야기마저 일본사람 글을 읽어야 하는가?’ 하고 물어야 했습니다. 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치르고 겪은 그 숱한 전쟁 이야기를 우리 땅과 사람과 넋에 맞추어 풀어내지 않는가 하고 되물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입으로는 ‘전쟁 반대’를 외치더라도, 우리 몸은 ‘전쟁에 길든 채’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전쟁 반대’를 외치는 입이라면, 저절로 ‘군 가산점’ 따위는 얼마나 ‘전쟁 사랑’이며 ‘사람 푸대접’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군 의무 복무’란 참된 나라사랑이 아닌 기득권 지키기에다가 군사독재가 이 땅에서 씻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입으로만 외쳐지는 ‘전쟁 반대’만 있을 뿐, 우리 온몸으로 부대끼려는 ‘전쟁을 털어낸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전쟁 반대’를 하겠다면, 《우리들의 하느님》을 쓴 동화쓰는 할아버지 권정생 님처럼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파병을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 가 닿을 터이나, 승용차는커녕 냉장고와 텔레비전조차 못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 가해자, 즉 폭력을 휘두른 학생도 폭력의 ‘희생자’로서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생활이 완전히 망가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폭력의 문화’에 깊숙이 빠져 있는 병든 상태입니다 ..  (200쪽)


 그러고 보면, 이제는 세상을 떠난 동화쓰는 권정생 할아버지님입니다만, 권정생 님 또한 텔레비전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 나름대로 세상을 읽자면 텔레비전을 보셔야 했기 때문일 테고, 걸어다니기도 힘든 터라 좋은 영화를 보자면 비디오로 보아야 했기 때문이리라 봅니다.

 권정생 님 작은 집에는 냉장고도 있었습니다. 한 번 앓아누우면 꼼짝 못하고 끙끙거려야 했으니, 며칠 먹을거리를 간수하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두 다리 멀쩡하고 두 손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수 없는가요? 신문을 읽어야만 세상을 알까요? 냉장고를 모셔야만 굶지 않고 살게 되나요? 승용차를 굴려야만 집과 일터를 오가며 우리 뜻을 펼치게 되나요? 손으로는 빨래를 못하고 전기 먹는 빨래기계를 돌려야만 할까요? 그러다가 열 몇 해쯤 지난 냉장고와 세탁기와 승용차들은 어떻게 하지요? 이런 기계와 전자제품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까지 ‘안 버리고’ 잘 쓰고 있습니까?


.. 전후의 일본은 자신의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후 일본인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전후를 보낸 아시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일본인들은 잊기 쉽습니다. 중국이나 한반도는 1945년 이후 내전이나 분단, 군사지배를 경험했습니다. 이 지역사람들에게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반공정책을 지원했던 일본은 두 나라의 분단에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1세기인 지금도 두 나라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 아시아인들은 지금껏 일본사람들을 증오하거나 해치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일본이 가혹한 식민지배와 잔인한 살육을 범했어도 넓은 마음으로 일본인들을 대했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나라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지금껏 아시아인들이 일본인에게 보여준 관용의 정신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인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뿐 아니라, 정부를 비판해 온 세력 또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쟁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정치가들은 음지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입니다 ..  (219, 234쪽)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고 하는 책은,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밑뿌리까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아니, 파고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쓴 분 스스로 아직 ‘나는 밑뿌리가 무엇인지 다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밑뿌리를 찾는 가운데, 모자라나마 풀이법 또한 함께 찾고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아주 뾰족하고 시원스런 이야기를 바라는 분들한테는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은 지루하거나 아쉽게 느껴지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몸부림을 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평화를 사랑하는 옳은 길’은 무엇인지 누구보다 글쓴이 스스로 찾아나서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살내음이 배어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거든요. 글쓴이 스스로 아직 어설피 알고 있는 대목이 엿보이고, 잘못 아는 대목 또한 군데군데 보입니다만, ‘옳은 길’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몸담은 대학교에서 ‘가해자이며 전범인 일본은 어느 누구보다 용서와 사랑을 많이 받은 겨레’임을 몸소 깨닫는 가운데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에 입만 살았네?’ 하고 빈정거릴 분이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가해자 또한 제 삶이 망가져 있음’을, 일본사람 스스로 ‘가해자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제대로 못 느끼는 대목에서 제대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한국사람 스스로 ‘주먹질을 받았음에도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멀리할 줄 알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책을 써내도록 바라고 또 바라야 하겠습니다만, ‘주먹다짐을 일으킨 주제라 할지라도 평화와 사랑으로 돌아서며 고개숙여 뉘우치고 바르게 제 삶을 되찾는 길’이 담긴 이 책 하나를 곱다시 껴안는 일도 겉훑기로나마 보람과 열매를 얻는 일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 이를 보면 이 분쟁(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분쟁)은 사실 신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이익 대문에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싸움이라면 인간이 평화의 길을 열 수 있습니다 ..  (96쪽)


 저는 이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읽으며 책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가 아니라 ‘미국, 그러니까 흰둥이들은 왜 허구헌 날 싸움질이여?’ 하고 책이름을 고쳐 달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흰둥이든 미국이든 이명박이든 또 아무개이든 한낱 불쌍한 떨거지가 아닐까 싶구나.” (4342.4.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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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서 - 에드워드 김 포토 에세이
에드워드 김 지음 / 바람구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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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참’도 ‘거짓’도 숨기지 못한다
 [잠깐 읽기 30] 에드워드 김(김희중), 《그때 그곳에서》



- 책이름 : 그때 그곳에서
- 글ㆍ사진 : 에드워드 김(김희중)
- 펴낸곳 : 바람구두 (2006.1.16.)
- 책값 : 19800원



 (1) ‘전두환 만세!’를 부끄럽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1987년 1월 26일에 나온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HEK홍보기획공사)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오로지 ‘경상북도는 한국 전통을 잇는 밑뿌리 같은 곳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밝은 앞날이 있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사진책 차례를 살피면 ‘전통의 고장, 호국의 터전, 신라 문화 꽃피운 경주, 부처님의 미소, 신비의 섬 울릉도, 맑고 푸른 동해, 내 고장의 특산물, 마음의 고향, 역사 속의 인물, 조상의 얼 지키는 하회마을, 마음이 닿는 곳, 미래를 여는 산업, 특색있는 9시ㆍ24군’,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펴낸 ‘에드워드 김(김희중)’ 님 요즈음 해적이를 살피면, 다음처럼 적혀 있습니다.


.. 경기고 재학중 두 번의 사진 개인전을 열었으며, 연세대 재학중 미국으로 유학, 텍사스 주립 대학 신문학과와 미주리대학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하고 내셔날지오그라픽에 입사하였다. 1971년 미국기자단 최우수 사진편집인상과 1974년 미국 해외기자단 최우수 취재상, 1979년 백악관 출입 기자단 사진 취재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0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장 겸 기획위원으로 승진한 이후 미국 출판협회 최우수 편집상과 미국 디자인협회 편집기획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시사주간지 〈타임〉의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일보〉 사진자문위원과 월간 〈지오〉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이명동 사진상을 수상하였다. HEK 홍보기획공사 대표,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Korea : Beyond the Hills》, 《Decade of Success》, 《The Family of Dolls》, 《The Korean Smile》, 《Taekwondo : The Spirit of Korea》, 《THIS EHWA》,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그때 그곳에서》 등이 있다 ..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으로 뜻을 이루어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까지 맡았으니, 대단히 뛰어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더욱이 이 잡지사를 그만둔 뒤로도 한국에서 〈타임〉 서울특파원에다가 〈지오〉 편집장까지 맡았습니다. 사진을 찍는 손매와 사진을 다루는 손길과 사진을 보는 눈매가 무척 남다르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자리를 맡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대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을 만한 눈높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몇 가지 궁금한 대목이 있습니다. 1987년까지는 어디에서나 밝혀져 있던 ‘에드워드 김 발자취’ 몇 줄이 그 뒤로는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첫째입니다.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에는 에드워드 김 님이 찍었던 ‘박정희-전두환 새마을운동’ 사진 몇 장이 깃들면서 몇 마디 이야기가 다음처럼 덧붙습니다.


.. 경제발전을 위하여 온 국민이 하나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흘려 일하던 1970년대. 중세 무사를 방불케 하는 복장을 하고 쇳물이 튀는 용광로 옆에서 일하는 노무자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할머니 두 분이 새마을 깃발을 들고 밭으로 나가는 모습. 온 가족이 동원되어 힘들게 쟁기를 끌어 농사짓는 모습. 일하는 가족 옆 흙바닥에서 잠이 든 아이. 자칫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후진국스러운 장면들이지만, ‘하면 된다’는 구호와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를 흥얼거리며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땀흘려 열심히 씨를 뿌렸기에, 오늘과 같은 발전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108∼110쪽)


 에드워드 김 님 해적이에 나오지 않는 세 가지 책을 책꽂이에서 들추어 봅니다. 모두 헌책방 책시렁에서 찾아내어 간직한 책입니다. 이 가운데 《전통의 뿌리, 경상북도》 뒷장을 봅니다. “그의 저서로는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상을 담은 《한국:언덕을 넘어서》가 1980년 일본 고단샤에 의해 발행되었고, 형문출판사에서 발행한 《민주복지의 길》과 《인형의 가족》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 《미국 순방》(1985년) 및 《유럽 순방》(1986년) 등은 직접 수행 취재하여 편집한 사진집이며, 제5공화국의 치적 5년을 기록한 사진집 《국민이 함께》와 86아시안게임을 기록한 《영원한 전진》 등의 사진집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987년 책에는 밝혀져 있는’ 에드워드 김 님 사진책 가운데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민주복지의 길》과 《유럽 순방》입니다. 《미국 순방》과 《국민이 함께》와 《영원한 전진》과 《인형의 가족》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올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들은 나라돈으로 찍어 전국 구석구석에 퍼뜨린 ‘전두환 찬양 사진책’이기 때문입니다.
 





..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북을 치는 중학생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교정에서 교련훈련을 받고 있다. 1973년 북한의 경제수준이 남한과 거의 비슷했던 시절, 북한은 주체사상과 천리마운동으로 자신감 넘치는 정책을 펼쳤다. 혁명박물관. 김일성 수령의 업적을 기리는 95개의 대형 전시실 그곳에 우뚝 서 있는 18미터나 되는 동상. 박물관 광장에서 금색의 김일성 조각을 청소하는 일꾼들. 그리고 북한의 산업화와 자급자족 경제를 상징하는 제철소의 역군들. 불가리아 대통령 환영 인파로 동원된 만여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 천리마운동을 상징하는 천리마동상과 넓은 도로 건너편 모란봉 위의 극장과 저 멀리 대형 텔레비전 전송탑이 평양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느 집에서 한 소년이 벌거벗은 채 뛰어나왔고 이어 누나뻘 되는 소녀도 뛰쳐나와 달아나는 아이를 냅다 뒤쫓았다. 그 어린아이들이 석양 속에서 뛰어다니며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안내원은 어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다며, 그러한 장면을 찍는다면 북한의 어린이들이 헐벗어서 옷을 입지 못한 채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처럼 선전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나의 촬영을 제지한 것 ..  (70∼74, 98쪽)


 에드워드 김 님은 1974년에 북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듬해 1975년에는 남녘을 찾아가서 취재합니다. 이 취재는 모두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고, 1974∼1975년 사이에 나온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다른 여느 해 잡지와 견주어 웬만해서는 헌책방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누군가 쓴 힘에 따라서 솎아내어졌기 때문입니다. 1974년 8월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딱 한 번 헌책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취재한 자리는 면도칼로 아주 잘 잘려져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1975년 9월치 남녘 취재 기사는 잘리지 않았더군요.

 곰곰이 돌아보면, 2009년 오늘날에도 ‘북녘사람들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녘땅에서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남녘 사진기자뿐 아니라 나라밖 어느 사진기자도 북녘사람 여느 삶자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또한, 남녘뿐 아니라 나라밖 웬만한 사진작가와 사진기자는 북녘을 사진으로 담으려 할 때에 ‘북한, 너네는 이런 놈들이야!’ 하는 틀에 갇혀서 뻔한 모습으로 ‘깎아내리는’ 사진을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1974년에 에드워드 김 님이 북녘을 찾아갔을 때 수행원이 ‘어색하게 말린’ 까닭이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때나 이제나 달라지지 않은 ‘우리 눈길’ 때문입니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가난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고, 잘사는 사람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사기꾼이 틀림없이 있고 착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사진기 눈은 어디로만 쏠려 있는가요?

 오래된 동네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 우리들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요? 서울 강남을 찍을 때, 우리 나라 청소년을 찍을 때, 이명박 대통령을 찍을 때, 전투경찰을 찍을 때, 공무원을 찍을 때, 운동선수를 찍을 때, 노숙자를 찍을 때, 연예인을 찍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찍을 때, 식구들을 찍을 때, 우리 눈길은 어떻게 맞추어져 있는가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삶터로 다가가면서 사진기를 들고 있을까요?
 





 (2) ‘어제’는 있되 ‘오늘’과 ‘내일’ 모두 없는 사진이면?


.. 농촌의 식생활도 많이 달라져 새참 때 읍내에 전화해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빵과 우유를 들며, 막걸리보다 맥주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농촌의 깊은 시름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 농촌도 세계무역기구 농산물 개방정책의 장벽을 넘어 어서 빨리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  (152쪽)


 에드워드 김 님이 바라보는 눈길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에드워드 김 님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국땅은 ‘박정희-전두환 두 대통령이 일으킨 새마을운동’이 있었기에 모두 잘살고 넉넉하게 되었다고 느끼는데, 이러한 눈길은 이분 삶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입니다. 좋은 장비와 좋은 손길과 좋은 눈길에 따라, ‘아름다워진 한국’을 담아내려는 에드워드 김 님한테는 박정희 씨나 전두환 씨는 ‘독재자’가 아닌 ‘훌륭한 치적을 남긴 거룩한 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에드워드 김 사진이야기 《그때 그곳에서》를 비롯해, 요즈음 나온 책에서는 당신이 우러르던 사람들을 담아낸 사진책 이야기가 쏙 빠져야 했을까요. 빼야 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대통령으로 뽑힌 이명박 씨를 지지한 사람 눈에는 이명박 씨가 ‘한국을 먹여살리는 훌륭한 분’으로 비추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눈길이 글렀든 어긋났든 엉터리라 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 눈길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수렁에서 벗어나 참눈과 참마음과 참생각을 가꾸어 준다면 더없이 반가울 터이나, 수렁에서 허우적거린다 하여도, 세상을 보는 얕은 눈은 그 눈길대로 두면서도 당신이 걷는 길을 옳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지 않았어도 그릇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으나 마나입니다.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찍었다 하여도 올바르게 삶을 꾸리는 사람은 이명박 씨를 안 찍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투표 하나로도 세상을 바꾸지만, 세상을 참되게 바꾸는 밑힘은 투표 아닌 ‘자그마한 우리들 살아가는 매무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진정한 행복은 공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미소에서,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맑고 투명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한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도 새봄이면 푸른 싹이 돋아날 것임을 깨닫는 순간, 맘속으로 번지는 희망과 행복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 마음의 온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결국 그 온기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지요 ..  (60∼61쪽)
 





 사진은 아무것도 숨기지 못합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아무리 힘을 들이고 돈을 퍼붓고 이름을 들이밀어도, 사진은 ‘참’을 숨기지 못합니다. 참된 사람 스스로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이름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사진은‘거짓’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참이든 거짓이든 언제나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참과 거짓을 못 알아채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으나, 알아채는 사람이 없더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낱낱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김 님은 스스로 당신 발자취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까닭이 없다고. 부끄럽다면 부끄럽다고 떳떳이 밝히면서 뉘우칠 노릇이라고. 부끄럽지 않다면 부끄럽지 않다고 당차게 밝히면서 내세울 노릇이라고.

 ‘전두환 수행비서’와 다를 바 없이 함께 다니면서 ‘전두환 만세’를 불렀다 하여 ‘저런 죽일 놈!’이라고만은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한테는 그와 같이 살았던 지난날이 ‘나라 살리기’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지난날에만 만세를 부르고 이제는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때 일은 꽁꽁 싸매 놓고 있다면, 궁금함만 몽실몽실 커집니다. 오늘은 어제와 어떻게 다르며, 다가오는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제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지 않고서는 참다이 사람을 사귈 수 없을 뿐더러, 사진쟁이는 ‘스스로 찍으려는 사람이나 삶터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모두를 바쳐야 나한테 스며드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요 ‘사진에 들어오는 삶터’입니다. 모자람도 바치고 넉넉함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어설픔도 바치고 솜씨있음도 바쳐야 하는 사진입니다.

 그래도 에드워드 김 님으로서는 그동안 해온 일거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앞으로 튼튼하게 대학교수 자리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 에드워드 김’은 될지언정 ‘사진쟁이 에드워드 김’은 될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 김 님 스스로 ‘새롭게 펼치는 사진길’을 헤아리지 않으신다면야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저 《그때 그곳에서》 같은 ‘예전에 찍은 사진을 몇 가지 추슬러서 추억 팔기’ 책을 쓰신다고 할 때에는 어찌할 노릇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정작 오늘날에는 ‘사진기를 안 들고’ 있는 채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안쓰럽습니다. 그 기나긴 사진길 마무리를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어서. 그 고단하고 벅찼던 기나긴 사진길 끝을 이렇게밖에 못 맺는가 싶어서.

 새로운 글을 써내지 못하면 글작가가 아니요,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면 그림작가가 아니며, 새로운 만화를 그려내지 못하면 만화작가가 아닙니다. 새로운 사진을 찍어내지 못하면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역사뿐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 앞에서 언제나 벌거벗고 있어야 합니다. (4342.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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