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을 걷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2
김담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위인전’ 아닌 ‘살아온 이야기’ 한 자락
 [잠깐 읽기 33] 김담, 《그늘 속을 걷다》



- 책이름 : 그늘 속을 걷다
- 글 : 김담
- 펴낸곳 : 텍스트 (2009.3.30.)
- 책값 : 9000원



 (1) 그늘 자리에서 살아온 길


 ‘책이야기를 하는 잡지’ 〈텍스트〉가 있습니다. 띄엄띄엄 나오고 있으나 아무런 사람줄과 학교줄과 돈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책이야기만 꾸밈없이 수수하게’ 펼치는 작은 매체입니다. 이 잡지를 정기구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알쏭달쏭했는데, 이태쯤 지나고 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일터에 도둑이 들어 정기구독자 주소가 든 셈틀을 훔쳐 가는 바람에 보내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출판사에까지 들어가는 도둑이라면 먹고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이었을까 궁금한데, 그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훔칠 만한 물건은 아무래도 셈틀이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출판사로서도 그 셈틀이야말로 둘도 없는 재산입니다. 셈틀이 비싸고 값싸고를 떠나, 출판사 한 곳을 꾸리며 이루어 온 모든 자료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 4월 초에 전학했을 때 내가 받은 반 번호가 67번이었지만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전학생들이 들어왔다. 전학을 오는 반 동무들의 고향도 경향 각지였으나 무슨 이유로 전학을 왔는지는 다들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다. 월요일 애국조회라도 할라치면 사람멀미가 났다. 지루한 조회가 끝나고 각자 자기 반으로 향하는 행렬은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으로 길디길었고 운동장에는 온통 흙먼지가 보얗게 일어났다 ..  (13∼14쪽)


 ‘책이야기를 하는 잡지’ 〈텍스트〉에서 올 3월에 낱권책 세 권을 한꺼번에 펴냈습니다. 곧 두 번째로 세 권을 더 펴낸다 하고, 앞으로도 세 권씩 꾸준하게 펴낸다 합니다. 이참에 나온 세 권과 다음참에 나올 세 권, 또 앞으로 꾸준히 세 권씩 나올 낱권책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쪽수로 치면 200쪽 안팎이고 책값은 모두 9000원입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판크기는 아니지만, 단출하게 들고 다닐 만큼 가볍고 수수하게 엮는 손바닥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권은 《신호등 건너기 게임》(신민영 글)이라는 이름이 붙고, 2권은 《그늘 속을 걷다》(김담 글)라는 이름이 붙으며, 3권은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한윤형 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 가운데 둘째 책을 골라서 읽습니다.

 책끝에는 ‘릴레이 인터뷰’가 퍽 길게 실립니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를 쓰는 젊은 글쓴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2권 《그늘 속을 걷다》에는, 1권을 낸 신민영 님이 2권을 낸 김담 님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실립니다. 이 자리에서 김담 님은 “이제는 돈이 먼저가 되는 거죠.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던 게 전도돼 버린 현상들이 생기잖아요. 돈을 버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돈이 신이 된 거죠.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건데, 돈을 벌다 보니까 피곤해져서 아이에게 짜증을 내요 … 옛날에는 사람이 돈을 썼는데, 지금은 돈이 사람을 쓰죠.(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늘 속을 걸었다는 김담 님 이야기에다가, 요즈음 사람들 살림살이를 짚은 한 마디를 곱씹으면서, 어쩌면 앞으로도 이 굴레는 걷히지 않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를 생각해서 버는 돈이 아니요, 나를 생각해서 버는 돈이 아니며, 식구와 동무를 생각하며 버는 돈이 아닌 오늘날 삶이 그예 굳어 버리면서, 우리 마음과 넋과 살림새마저 딱딱하고 메마르게 굳어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 시골에서는 할머니가 참빗으로 아침마다 물을 묻혀 착착 머리카락을 빗겨 손질해 주었으나 도시로 이주한 뒤로는 그런 알뜰한 손길을 기대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끼니마저 직접 챙기고, 때로는 밥까지 지어야 했다 ..  (25쪽)


 김담 님 말마디는 이어집니다. “도시에서는 공부를 안 하고 건들거리면서 놀아도 일단 보고 듣는 게 있고 즐길 만한 문화가 있죠. 하지만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 와서 하는 거라곤 기껏 게임밖에 없어요.(197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도시’라고 했지만, 낱말을 ‘서울이나 부산’쯤으로 고쳐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는 ‘서울’이나 ‘서울처럼 큰 도시’나 ‘서울과 부산 같은 도시’라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틀림없이 ‘작은 도시’에도 즐길거리나 놀이거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작은 극장이 있는 읍이나 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읍이나 군은 도심지라는 곳이 아주 짧아 몇 분 거닐면 끝입니다.

 제가 태어나 사는 인천을 떠올려 봅니다. 서울사람은 인천에 오면 ‘갈 데가 없’고 ‘할 일이 없’으며 ‘즐길 놀이가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저야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하지만, 인천에 남아 있는 책방 숫자는 새책방과 헌책방을 통틀어 열 몇 곳밖에 안 됩니다. 아예 없는 동조차 있습니다. 연수동이나 관교동이나 송도 같은 데에는 오로지 아파트뿐이요, 뭔가 사람이 갈 만하다 싶게 만든 자리에는 오로지 술집이 그득차 있습니다. 가느니 술집이요 하느니 술마시기입니다. 이름이 도시일 뿐이라 사람이 더 많아 술집 또한 좀더 많이 있을 뿐이라고 할까요. 공연문화든 출판문화든, 공연예술이든 출판예술이든 하나도 없다 하여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역 문화재단이 있고, 지역문화 활동가가 있으며, 저 또한 지역문화를 한몫 맡는다는 소리를 듣지만, 언제나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너나 없이 서울로 빠져나가는 곳에 어떤 ‘지역’과 ‘문화’가 있겠느냐고. 새벽바람으로 일하러 서울로 빠져나가, 밤바람으로 잠만 자러 인천으로 돌아오는 판에, 이곳에 무슨 삶이 깃들겠느냐고.


.. 내가 다닌 여자중학교는 여자고등학교와 같은 재단 소속으로 교문을 함께 썼으며 중교 선도부 학생들이 교문 좌우로 벌리고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감시, 적발하고 벌까지 내렸다. 아침 조회시간이면 무슨무슨 일을 하지 말라고 시작하여 종례 시간 또한 무슨무슨 일을 하지 말라고 끝냈으나 우리들은 교문만 벗어나면 그런 주의사항 같은 것은 까맣게 잊었다 … 고등학교 교복은 일본과 자매결연 맺은 일본 학교의 교복과 같았다. 청소시간이면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반드시 써야 했으며 금지사항이며 주의사항을 외려 들면 숨이 가빴다. 소지품 검사 또한 예고 없이 불쑥 시행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책가방 속을 홀라당 털어 열어 보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실시되었다. 소지품가방 속에 바늘쌈지, 손거울 등은 필수품이었다. 몸을 지켜야 한다는 순결주의의 강조는 순혈주의와 내통하고 있었다. 시나브로 현모양처의 여성상이 자리잡아 갔다 … 학교도 병영과 다를 바 없었으며 학급의 반장은 곧 담임선생님을 대리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평등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일러 준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  (34∼36, 41∼42, 72쪽)


 김담 님은 거듭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시골을 떠나와 성남에서 적응하는 데 힘들었어요. 일단 마당이 없잖아요. 골목이 쭉 있고, 거기에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아유, 숨이 안 막히나요?(204쪽)”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옆지기는 우리 아이를 걱정해서라도 우리가 새로 얻어 살 집에는 ‘작더라도 마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넓고 시설이 괜찮다 하여도 빌라 같은 데는 우리 삶하고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옆지기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살림에 맞는 집을 알아보러 다니며 이 빌라 저 빌라에 들어가 보는데, 그곳에서 알뜰살뜰 살림 잘 꾸리는 분들이 많기는 하나, 하나같이 너무 어둡고 어수선했습니다. 3층이나 4층쯤 되면 햇살이 살짝 비추지만, 1층이나 2층은 한낮에도 집에서 불을 켜야 합니다. 인천은 그나마 반지하 집은 거의 없다 할 만하기는 한데, 반지하가 아님에도 한낮에 불을 켜야 한다면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 어려운 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이 없으니 그런 데에서라도 살아야지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없으니 더더욱 사람다움을 찾거나 느끼면서 살 작은 방 한 칸을 얻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햇볕 한 줌과 바람 한 점을 먹으면서 살 방 한 칸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한완상 교수가 쓴 《민중과 지식인》을 통해 처음 민중이라는 낱말을 접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으로서 민중이라면 부모를 비롯하여 나 또한 민중일 테지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낱말이었다. 계급과 계급의식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 직업란에 건설현장에서 날품을 파는 아버지의 직업을 ‘건설업’이라고 기재했던 기억은 또렷했다 … 선배들은 철학책을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한 책들은 내 깜냥으로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번 읽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  (77, 82쪽)


 김담 님은 당신 책 《그늘 속을 걷다》 머리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세월이 바뀐 이제는 일상다반사였던 이런 일들이 일회성 이벤트 행사로 진행되거나 아니면 무슨무슨 축제라는 이름을 달고 희번드르르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과거는 다시 돌아갈 수 없거나 추억할 수 있을 때 과거일 테지만 그러한 까닭에 각색되거나 조작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을 것이었다. 우파들이 과거를 악용, 남용하는 것과 같이……(6쪽)”

 제 삶을 돌이켜봅니다. 저는 ‘추억’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억에 잠길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곁에는 아홉 달짜리 갓난쟁이 아기가 있고, 둘레에는 어미 잃은 눈도 못 뜨는 새끼 고양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지역 막개발 반대 집회’에 나가야 하기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일산에서 인천까지 새벽밥 먹고 날아가야 하며, 저녁에는 책 팔러 서울마실을 해야 합니다.

 저한테 ‘추억’이라 한다면, 하루하루 잊지 않고 땀흘려 보내는 ‘삶’입니다. 술자리에서 떠들거나 무슨무슨 잔치판에서 떠벌이는 놀음놀이가 아니라, ‘늘 새롭게 맞이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김담 님이 쓴 《그늘 속을 걷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김담이라는 한 사람이 가슴에 품고 있는 추억’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김담이라는 한 사람이 온몸으로 부대낀 역사’라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학자나 지식인은 ‘마을 토박이라 하는 할매 할배’를 찾아서 옛이야기를 듣고 엮고 짜고 하면서 ‘옛날엔 그랬었지’ 하는 추억을 끝없이 만들고 있는데, 정작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동무요 이웃이요 후배요 선배요 아재요 아지매요 누나요 동생이요 언니요 오빠요 하는 사람하고는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역사’를 바로 이 자리에서 여미지 않습니다. 꼭 세월이 흘러 자료 찾기도 어렵고 사람들마다 잊어버리기도 한 나중에서야 ‘역사 찾기’라는 이름으로 ‘추억 곱씹기’만을 되풀이합니다. 생각해 보면, 학자나 지식인은 그 옛날에도 ‘그 옛날에 현실(바로 오늘 일)이었던 때에 등을 돌리거나 못 본 체하며 책상물림’으로만 지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발을 디뎌야 할 자리에서 발을 안 디디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손을 뻗어야 할 자리에서 손을 안 뻗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핑계를 대지요. ‘나도 한마음이기는 했으나 먹고살기 바빠 어깨동무하지 못했다’고. 그러면서 뒤늦게 옛이야기를 추억거리 삼아 찾아들으면서 말하지요. ‘이런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기에 나라나 학교에 기금을 신청해서 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 반공글짓기, 반공그림대회. 자나 깨나 반공을 몸으로 실현했다. 때로는 남한에서 북쪽으로 보내는 삐라가 역풍을 받고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오래된 금강소나무 우듬지에 내려앉는 일도 있었다 ..  (39쪽)


 저는 ‘학자’라는 이름과 ‘지식인’이라는 이름이 무섭습니다. 아니, 무섭다기보다 소름이 돋습니다. 문화니 역사니 체험이니 추억이니 하면서 ‘예전에는 불량식품이요 나쁜 짓’으로 깎아내리고 다그쳤던 뽑기라든지 달고나라든지 딱지라든지 아폴로라든지를 되살리는 움직임들을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든 ‘그리운’ 추억이 되고 ‘애틋한’ 역사처럼 뇌까리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마땅한 노릇이지 않습니까? 달고나를 추억하는 이들은 ‘평화의 댐 성금 모으기’를 추억할 수 있습니다. 뽑기를 축제로 되살리는 이들은 ‘반공글짓기 대회’를 축제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아빠 어렸을 때에”니 “엄마 어렸을 적에”니 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이 우리를 억누르던 모습들을 즐거운 옛일이라도 되는 듯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고스란히 이어온 군사독재정권 찌꺼기를 우리 아이들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마치 ‘다시 누리고 싶은 일’이라도 되는 듯이. 꼭 ‘다시 그때처럼 우리 사회가 거꾸로 가야 옳다’는 듯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같은 입시지옥 또한 오래지 않아 ‘추억 스케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헌법으로 누리도록 해 놓은 권리인 ‘집회와 시위’를 몽둥이로 두들겨패며 깔아뭉개는 짓거리 또한 머잖아 ‘추억 만들기’처럼 다룰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2) 그늘 자리 다음을 기다리며


 어설픈 위인전이나 어줍잖은 추억 읊기가 아닌,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갈무리한 《그늘 속을 걷다》를 읽습니다. 그늘 속을 걷는다는 일이란 어두운 길을 걷는다는 느낌이 짙고, 글쓴이 김담 님 발자취는 어두움을 헤맨 하루하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늘이란 응달지기만 한 자리는 아닙니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시원한 가림막이기도 합니다. 지치고 고단한 몸을 쉬게 하는 보금자리 노릇을 합니다. 물기를 남겨 주고 새힘을 북돋우는 샘터와 같습니다. 세상 어느 샘가도 그늘 자리에 있지, 볕바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 누구나 서울대, 연고대를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기에, 담장 옆 학교 전문대생들이 공부와는 다른 특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무언가 모자라는 이들로 폄훼하기 일쑤였던 어린 우리들은, 그런 그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경찰들과 맞서는 일을 가당찮다고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놀랐다. 무엇 때문에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던 탓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일일연속극과 오락프로그램을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녹화방송 되는 권투와 레슬링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또한 일요극장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는 미국의 서부영화를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우리 나라 배우들 이름은 몰랐어도 서부영화에 나오는 총잡이들의 이름은 또렷이 기억했다 ..  (43쪽)


 김담 님은 당신이 걸어야 했던 지난 삶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내가 걸을 수밖에 없던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걸어야 했기에 당신 ‘스스로 걷고 싶은 밝음’이 무엇이었는지를 환하게 깨닫습니다. 어두운 길을 걸으며 어두움에만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지만, 어두운 길을 걷기 때문에 밝음을 꿈꾸거나 찾는 사람이 있으니, 김담 님으로서는 ‘내 어둠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가’를 찾아내어 뽑아 버리는, 또는 좋은 길벗으로 여기며 살가이 다스리려는 매무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식당 종업원에게 하대를 하고 반말을 하는 것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람이 귀하면 그 사람을 지탱해 주는 음식물도 소중하고 귀한 것 아닐까 … (고향에서 어르신들이) 화이트칼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데, 왜 다시 내려왔느냐고 볼 때마다, 만날 때마다 되물었다 … 비육우를 대량으로 기르면서 우사(소우리)의 소들은 싱싱한 풀 대신 항생제 범벅인 사료로 연명했으며 사철을 콘크리트로 된 우사 안에서 떠나지 못했다. 돈사(돼지우리)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주변의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이었다. 가축에서 대량 소비재로 바뀐 까닭이었다 ..  (114, 139, 165쪽)


 다만 한 가지, 김담 님은 소설쓰기를 하기 때문인지 ‘소설책에만 나올 법한 낱말과 말투’를 제법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그 문학을 하는 나라나 겨레가 어떠한 말로 삶을 가꾸고 생각을 가다듬는가를 보여주는 열매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문학에 담는 말은 ‘우리들 말’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에 묻히는 말이라거나 옥편에 잠자고 있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읽을 때 ‘민중’이라는 낱말을 낯설다고 느꼈던 분이 ‘면목처량’ 같은 말을 쓴다면, ‘면목처량’은 ‘민중’이라 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소설문학’다운 말로 느낄 수 있을까요. ‘몰풍스럽다’는 누가 알아들을 소리이며, ‘자심했다’는 어느 시골사람이 알아차릴 말이겠습니까.

 ‘사람들 말’이 아닌 ‘우리들 말’입니다. ‘사람들 말’을 쓰는 문학이 아니라 ‘우리들 말’을 찾을 문학입니다.

 잘못 쓰는 말이라거나 엉터리로 쓰는 말이라거나 겉멋에 휩쓸린 ‘사람들 말’이 아닌, 어깨동무하는 삶이라거나 사랑과 믿음을 담는 말이라거나 넋하고 얼을 보듬는 ‘우리들 말’로 문학을 일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책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안내서였다. 책과 함께 있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교과서는 잊고 챙기지 않는 경우가 있어도 시집을 비롯한 여타의 책들은 상비약처럼 챙겨서 다녔다. 약속한 상대가 약속시간에 늦어도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손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외딴 시골에 조용히 살고 있으니 인맥, 지연, 학맥, 그런 것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친목회, 동창회 안 나갈 수 있으니 세상 편했다 ..  (69∼70, 153쪽)


 그렇지만 아직 “그늘 속을 걷”고 있는 김담 님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꾸준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김담 님 스스로 걷는 ‘그늘길’에 우리들을 불러올는지, 아니면 김담 님이 그늘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을는지, 또는 그늘길이 그늘길 아닌 자리가 되도록 할는지, 어쩌면 우리들이 미처 못 보고 있는 아름다운 그늘길을 누구나 살가이 깨닫고 받아들이게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웃음 어린 목소리로 부를는지는 모르는 노릇이니까요. (4342.5.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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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04 - ‘1급 장애인’ 아닌 ‘문학사랑이’  장영희 님 떠난 길
 :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책이름 : 문학의 숲을 거닐다
- 글 : 장영희
- 펴낸곳 : 샘터 (2005.3.15.)
- 책값 : 12000원



 (1) ‘장애인’ 아닌 ‘한 사람’이 죽은 길


 지난 5월 9일, 서강대 영문과 교수인 장영희 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영희 교수라 하면 먼저 ‘장왕록 박사 딸’이라는 이름에다가 ‘1급 장애인’이라는 이름이 달라붙곤 합니다. 틀림없이 장왕록 박사 딸이 맞고, 1급 장애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끈과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껴안으려 한다면, 아무개 딸이건 몸이 어떠하건 우리한테는 ‘장영희 한 사람’만 보거나 느끼지 않으랴 싶습니다.


.. 아직 우리 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ㆍ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내 학교 성적은 좋았고,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장왕록 박사)는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시며 입학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구걸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 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  (38쪽)


 장영희 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뜻밖에 듣고는, 몇 해 앞서 읽고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아 놓고 있던 책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인천에서 일산으로 가는 전철길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죽 읽습니다. 이 책은 2005년에 나왔고(이무렵 300쪽 조금 넘는 책이 12000원이면 꽤 비쌌습니다), 책에 실린 글은 2001년 8월부터 세 해에 걸쳐 〈조선일보〉에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이름으로 이어썼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 머리말은 늘 맨 마지막에 들여다보는 터라, 다시금 책을 읽어내고 머리말을 훑다가 깜짝 놀랍니다. 그렇구나, 〈조선일보〉에 이어썼던 글이구나.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분 장영희 님 글을 다른 매체에서, 이를테면 ‘사회에서 힘여린 사람한테 등돌리지 않고자 애쓴다’ 하는 매체에서 기꺼이 받아안을 수 없었을까요. ‘사회에서 돈없는 이가 푸대접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외치는 매체에서 넉넉히 껴안을 수 없었을까요. ‘사회에 따돌림과 괴롭힘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입시지옥과 갖은 갈등이 평화로이 풀어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매체에서 살포시 손을 내밀 수 없었을까요.


.. 운명은 인간의 것이지만 생명은 신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고, 그 무슨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의 꿈, 소망, 사랑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125쪽)


 저로서는 쉰일곱 해를 살다 떠난 장영희 님하고 만날 일이란 없었습니다. 나라밖 문학에 그리 눈길을 안 두고 있기도 했기에, 장왕록 님이 펄 벅 문학을 숱하게 우리 말로 옮겼다는 대목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헌책방을 찾으러 신촌 둘레를 자전거를 타고 돌거나 두 다리로 골골샅샅 누빌 때 서강대 옆도 곧잘 스쳐 지나가곤 했고, 서강대 앞에 잠깐 문을 열었다가 그야말로 금세 문을 닫은 헌책방마실을 더러 하곤 했지만, 이 울타리 안쪽에 목발을 짚고 강의를 하는 장영희 교수라는 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세대 건너편에 있는 헌책방 〈정은서점〉 아저씨가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이분 따님 가운데 한 분도 장애인이었고, 초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나 대학 입시를 치를 때에나 대학에 다니는 동안까지도 몹시 힘들었기에), 마음은 모르나 몸은 멀쩡하다 싶은 사람들 둘레에 몸 어느 곳이 다치거나 아파 못 쓰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얼핏설핏 느끼곤 했습니다. 바퀴걸상을 타고 헌책방마실을 하던 사람을 꼭 두 번 만났습니다(열여덟 해 헌책방마실을 통틀어). 팔이나 다리 어느 한 군데라도 아프면 자전거를 탈 수 없으니, 자전거모임에서도 몸 아픈 이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통계로는 ‘한 나라 10%는 신체장애인’이라 해서, 우리 나라로 치면 오백만 가까운 숫자가 신체장애인일 텐데, 길거리를 누비는 사람 가운데 신체장애인을 보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초중고등학교를 걸쳐 신체장애인하고 함께 배운 적이란 없고, 이웃 학교에서도 못 보았습니다. 어쩌면 ‘취학면제’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처음부터 교육권이나 평등권을 누려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 ‘화교 선거권’을 준 일도 고작 한 해가 된 듯 싶습니다. 그나마 화교 아닌 ‘외국사람이라고 하는 한국사람’한테는 선거권이 없습니다. 이웃 일본이 한겨레붙이한테 선거권을 안 주는 일하고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요. 재일‘조선인’이든 재일‘한국인’이든, 일본에서 ‘코리아’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선거권을 비롯해 기초권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라밖이라기보다는 바로 우리 일이요, 우리 어버이 또래 일이며, 우리 삶하고 곧바로 이어진 이와 같은 일에 우리들 눈길이 머물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옳고 바르게 누리면서 어깨동무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 이 책(펄 벅, 《자라지 않는 아이》)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나의 어머니이다.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나의 어머니. 무엇보다 이 땅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은 것은 부모님과 내게 너무나 힘겹고 고달픈 싸움이었다. 업어서 교실에 데려다 놓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시던 나의 어머니.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가 제발 응시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며 다니시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문간을 서성이던 나의 어머니.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제발 한몫 끼어 달라고 애원해도 자꾸만 벼랑 끝으로 밀쳐내는 이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의 위업도 그 위대한 이름, ‘어머니’에 비할까 ..  (131쪽)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영문과 교수로 영문학을 가르치는 장영희 님 삶에 박힌 ‘좋은 문학’이 당신 삶에 어떻게 ‘좋은 마음밥’이 되었는가를 돌아보는 책입니다. 펄 벅 문학을 다루는 글에서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은 1951년에 발표한 《자라지 않는 아이》이다(1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나라안에 옮겨진 펄 퍽 문학 가운데 이 책처럼 안 읽힌 책이 또 있을까 싶은데, 《자라지 않는 아이》는 2003년에 새로운 판으로 옮겨지기 앞서 두어 차례 옮겨졌고, 샘터사에서 우리 말로 옮긴 판이 이제까지 나온 옮김판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습니다. 저는 이보다 앞서 나온 낡은 판으로 읽으며 ‘펄 벅 문학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낳아 기른 아이가 ‘자라지 않는 아이’여서 장애인 삶을 온몸으로 부대끼게 되고 이렇게 부대끼면서 숨기거나 꺼리지 않고 고이 사랑으로 껴안으면서 뭇사람한테 참다운 어머니길이요 사람길이 무엇인가를 밝힌 대목도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당신은 장애를 안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어도 언제나 얼마든지 어깨동무할 만한 마음밭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마음밭이 없으면 아무리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설 생각을 못할 뿐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다시 일어서더라도 슬기로움과 튼튼함을 갖추지 못합니다.


.. 신체장애는 단지 의학적 케이스일 뿐, 악이든 선이든 모종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또한 인간 치유의 역할을 가진 문학이 한 집단에게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문학의 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몇 년 전 없는 재주로 무리해서 수필집을 낸 적이 있다. 가끔 방송이나 신문에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1급 장애 여교수의 인간 승리, 그녀의 치열한 삶’ 등등으로 요약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책을 소개하는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문인 220명에 의해 설날에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으로 내 책이 뽑혔다고 했다. 시간에 맞춰 TV를 보니 마침 사회자가 내 책을 들고 소개하고 있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의 단 한 번》은 자서전적 에세이집입니다. 요새 암투병 중이라 투병 중 느낀 바를 적은 책입니다.” 옆에 있던 여자 사회자가 때 맞춰 “쯧쯧”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 책은 이미 4년 전, 내가 암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때에 쓰여진 책이다. 그러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코미디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저자 장영희 씨는 1급 신체장애인이라네요.” 순간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숙이며 죽은 사람에 대해 묵념하듯이 눈을 내리깔고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책에 대한 소개는 그게 다였다. ‘자서전적’ 에세이니 불가피하게 나의 신체장애에 관한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의도는 ‘장애인 장영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형태의 삶의 장애를 갖고 있는 ‘인간 장영희’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암만 생각해도 내 삶이 별로 ‘치열한’ 것 같지 않다. 아니, 내 삶이 치열하고 감동스럽다면 난 이제껏 치열하고 감동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226∼227쪽)


 전철은 어느새 대화역에 닿습니다. 다 읽은 책은 앞가방에 넣습니다. 사람들이 자동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는 돌계단을 하나나 둘씩 밟으며 밖으로 나옵니다. 장애인 권리를 생각해 준다는 말은 많아 새로 생기는 전철역에는 으레 승강기가 놓이고 점글판이 붙고 오돌토돌 새긴 돌을 바닥에 깔아 놓곤 합니다. 그나마 전철역 둘레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버스역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서 시내버스를 타기란 꿈조차 꿀 수 없는 노릇입니다. 목발을 짚든 바퀴걸상을 끌든 이때에도 시내버스는 탈 수 없으며, 광역버스 또한 탈 수 없습니다(고작 몇 대에만 탈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어떻겠습니까. 시골버스는 어떠하고, 마을버스는 어떠할까요. 학원버스는 어딘가 나은 대목이 있을까요. 학교버스나 유치원버스는 어떻습니까.

 승강기나 자동계단 같은 시설은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을 생각해서 마련한 시설임을 아는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비장애인은 마땅히 돌계단으로 다닐 뿐이요, 몸이 아프거나 힘든 사람이 승강기와 자동계단을 타도록 마련해 놓았음을 깨닫는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어버이 된 분들은 아이들한테 이런 대목을 알려주고 있습니까. 교사 된 분들은 학교에서 얼마나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2) 글 하나에 담으려 했던 사랑


 세상 떠난 한 사람이 죽은 일을 앞두고 여러 매체에서 ‘궂긴 소식’을 실어 줍니다. 모두들 ‘장애인 장영희’한테만 눈길을 맞추고, ‘한 사람 장영희’한테는 눈길을 맞추지 않습니다. 아니, 눈길을 맞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눈길은 장영희 님한테만 맞춰지는 매무새가 아닙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았고, 앞으로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오로지 돈만 바라보도록 맞춰져 있으며, 사회로 나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오로지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높은 이름을 날리며 더 큰 힘을 누리는 사람’이 되도록 ‘네 동무를 미워하라, 밟고 타 올라서 너 혼자 1등이 되어라’ 하고 내모는 제도권입시교육이기 때문입니다.


..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갈증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시의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비상구를 찾게 했다 … 무정한 모정에 대한 비난이 혹독하지만, 아마도 두고 가는 자식들도 결국은 자신처럼 ‘안’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 죽기 싫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를 밀치고 세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안고 뛰어내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끼리 모여 동그랗게 금 그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밀쳐내며 사는 이 세상에 자식들을 두고 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작품 중에서 유독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말이 주는 너그러움이, 따뜻함이,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낯선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73, 108쪽)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으면서 새삼 놀랐습니다만, 장영희 님 글을 실었다는 〈조선일보〉는 장영희 님 글을 받으며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신문 〈조선일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끼리 모여 동그랗게 금 그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밀쳐내며 사는 이 세상”이 더욱 단단해지도록 하는 데로 모아져 있지 않습니까. 사랑보다 돈을, 믿음보다 이름을, 나눔보다 힘(권력)을 높이 추켜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장영희 님이 그런 신문에 그런 글을 실은 모습은 엇박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다시금 곰곰이 헤아리면 그리 엇박자는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이고 똑같이 아름다운 목숨 하나요 살가운 사람 하나라 한다면, 돈바라기 사람이든 사랑바라기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일찍 철이 들었든 나이먹어도 철이 안 들든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뜨거운 가슴은 누구한테나 깃들어 있습니다. 제힘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너른 넋은 누구한테나 잠들어 있습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장영희 님은 ‘몇몇 깨인 사람한테만 사랑을 말하려는 목소리’이기보다, ‘깨인 사람이고 깨이지 않은 사람이고를 가리지 않고 누구한테나 사랑을 말하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책을 거듭 읽으면서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를 ‘깨인 사람이고 깨이지 않은 사람’이고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 그때부터 마아너는 딱딱하고 차가운 금화 대신에 딸 에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를 버렸던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도 마아너를 따뜻하게 대한다. 그는 에피를 통해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준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함을 새롭게 배운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지만, 이 소설에서 강조되는 점은 돈에 집착했을 때 고립되고 의미 없는 삶을 살던 마아너가 그 돈이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실된 인간관계를 발견한다는 아이러니이다 … 거울에는 자기만 보인다. 금ㆍ은으로 사방에 벽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거울 속 사람들처럼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돌보며 감옥인 줄 모르는 채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  (135∼136쪽)


 ㅈㅈㄷ이라는 신문들만 골프 이야기입네 외국여행 이야기입네 비싼 자동차 이야기입네 떠들지 않습니다. ㅎㄱ이라는 신문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떠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민’은 옛날 ‘백성’과 달라, 큰차 몰고 나라밖으로 골프를 즐기러 떠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는지 모릅니다만, 주식투자이든 펀드투자이든 돈 놓고 돈 먹는 일거리는 오늘날 ‘부자’뿐 아니라 오늘날 ‘서민’도 함께 즐기는 일인지 모릅니다만, 정규직 노동자만 갖은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라 하여 타워팰리스를 꿈꾸지 말란 법 없습니다만, 딱히 더 나은 신문이나 방송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어느 신문도 ‘한 달 벌이 50만 원으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 눈높이’에서 찾아 읽을 만한 이야기거리를 기사로 다루지 못하고 있거든요. ‘쉬는 날 없이 한 달 빽빽하게 열 시간 남짓 일하여도 백만 원 받기 어려운 형편’인 가운데 지친 몸으로 펼쳐들어 읽을 만한 이야기거리를 다루는 신문이란 글쎄,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다루는 기사뿐만이 아닙니다. 기사로 쓰는 말과 글도 그렇습니다. ‘여느 노동자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읽을 만한 높낮이로 글을 다스릴 줄 아는’ 지식인이나 기자가 이 나라에 몇이나 있는지요. 다루는 기사도 기사이지만, 기사에 담는 말과 글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가를 헤아리면서 늘 힘쓰는 분들은 몇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는지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인지, 한국사람 아닌 이들이 읊는 섞임말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 언제부터인가 눈만 뜨면 떠드는 ‘세계화’는 실상 자존심도 오기도 없는 ‘강국화’일 뿐, 힘없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짐승, 버러지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것이 진정 ‘세계화’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부모 형제들도 바로 지금 우리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때 간호사로 광부로 낯선 나라에 가서 고된 노동을 하고 고향에 부친 달러는 겨우 우리가 인간과 짐승도 구별 못하는 ‘부자’가 되는 데 일조했을 뿐인가 보다 …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했다. 맞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는 사람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  (277, 279쪽)


 장영희 님이 서양문학이 아닌 한국문학을 했다고 하여도, 또 한국문학으로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펼쳐냈다고 하여도, 당신이 부대끼고 곰삭이며 차근차근 나누려 했던 이야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느낍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하고 노래할 수 없는 이 땅에서 끝없이 걸려 넘어져야만 하는 삶을 꾸리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고 느끼고 담아내는 목소리는 한결같았으리라 느낍니다. 우리는 ‘달러(돈)’ 아닌 사랑을 보아야 하고, ‘달러’에 매인 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스스로한테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도 ‘달러’만 보여주고 가르치고 물려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풀어냈으리라 봅니다. ‘사람만이 절망이다’고 느끼는 가운데에도, 이 절망을 딛고 설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한편, 절망을 딛고 선다기보다 절망은 또 절망대로 고운 벗님이니 고마이 껴안으면서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려는 목소리를 펼쳐냈으리라 봅니다.


.. 어른들의 닫힌 마음으로 아이들의 열린 마음까지 꽁꽁 걸어 잠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국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 끝에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을 지켜 주는 것은 피비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 가까이에서 공부할 수 없으니 학교에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을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이 세상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누구나 조금씩의 모자람, 불편함을 갖고 있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곳이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까 ..  (184∼185쪽)


 장영희 님이 아직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던 때 방학을 맞이해 한국땅으로 돌아와 동생하고 ‘명품을 많이 판다는 패션가를 지날 일’이 있었고, 이때 동생이 옷 구경을 하러 들어간 가게에서 당신은 못 들어가고(계단 턱이 너무 높아) 문밖에 서서 기다리니, 가게 임자가 나와서 당신을 거지로 여기고는 어서 꺼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합니다. 아마, 장영희 님으로서는 이런 일을 겪으며 또다시 ‘걸려 넘어지기’를 하는 가운데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라는 영국 시인 문학과 삶을 찬찬히 읽어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저는 목발까지 짚지는 않으나 헐렁한 차림새에 고무신을 끌고 자전거를 슬슬 몹니다. 늘 큰 가방에 책을 가득 채우고 다니니 언제나 온몸에서는 땀내가 풍기기까지 합니다. 몇 해 앞서 ㄱ이라는 국립기관에서 한 해 동안 ‘우리 말 이야기 강사’로 일한 적 있는데, 그때 ㄱ이라는 국립기관 건물 지킴이들은 ‘잡상인 출입금지’를 내세워 눈을 부라리고 막말을 하며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그 국립기관에서 강사로 일하는 사람인 줄 알고는 갑자기 거수경례를 하더니 높임말로 바뀌더군요. ‘여느’ 강사처럼 까만 양복을 빼입고, 까만 차를 몰며 다녔다면 어느 누구도 저를 가리켜 ‘잡상인’이라든지 ‘노숙자’라든지 ‘미친놈’이라며 삿대질을 안 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을 늘 겪는 동안, 제가 이런 제 삶을 좋아하면서 즐기지 않았다면 세상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다만, 이런 일을 겪고 저런 일을 치르면서도 제 어리숙한 마음밭은 좀처럼 자라나지 못하지만.
 





 (3) 문학으로 꾸려 온 삶


 몸이 아픈 가운데에도 글쓰기와 문학즐기기를 멈추지 않은 장영희 님은,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가면서 책 하나를 더 우리한테 남깁니다. 며칠 앞서 나온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마지막 남긴 선물로, 이제까지는 ‘몸이 살아온 기적’이라면, 앞으로는 ‘마음이 살아갈 기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시와 사랑의 강’. 아인슈타인이 시인인지 물리학자인지 모를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아침에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지고 아인슈타인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세 가지 이상, ‘친절과 아름다움과 진리’도 점차 힘을 잃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로봇같이 움직이고, 시와 사랑의 강은 자꾸 말라만 간다 … 나는 새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별로 ‘특별’하지 않은 가장 보통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특별하게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대박이 터지거나,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기괴한 일이 없고, 별로 특별할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이 서로 함께 조금씩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사는 세상 ..  (89,141쪽)


 생각해 보면, 살아온 기적이든 살아갈 기적이든 조금도 남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쬘 수 있으면 살아 있음이요 기적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멎고 더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죽어 감이요 또한 기적입니다. 내 몸은 다른 목숨붙이를 받아들이며 숨을 이었고, 내 몸이 숨을 멎으면 흙으로 가면서 다른 목숨붙이가 살아갈 거름이 됩니다. 내가 사는 동안 나한테 스며든 목숨들이 바친 몸뚱이가 기적과 같으며, 내가 죽은 다음 내 몸뚱이가 새로운 밥이 되어 다른 목숨한테 옮아 감이 또 기적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몸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새 밥을 먹으며 기운을 얻어 몸이 움직이는 우리들인 가운데, 새 마음을 먹으며 새 넋을 일깨우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이 세상을, 이 나라를, 아니 가족조차 변화시키려는 야심이 없이 아버지는 늘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하고 책을 즐기는’ 학자의 외길 인생을 기쁘게 살다 가셨다 …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  (104, 316∼317쪽)


 틀림없이 장영희 님은 수많은 마음자리를 고이 얻으면서 마음삶을 이었습니다. 당신 몸뚱이 때문에 ‘걸려 넘어진’ 온갖 일이 있었다는데, 당신 마음 때문에 ‘걸려 넘어진’ 일도 숱하게 많았으리라 느낍니다. 그렇지만 몸 때문에 걸려 넘어진 온갖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몸삶을 이었듯, 마음 때문에 걸려 넘어진 숱한 일을 스스럼없이 맞아들이면서 마음삶을 이었습니다.

 이 마음삶은 언제나 수필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으며, 한 벌 두 벌 선보인 옷을 모두어 《내 생애 단 한 번》이라든지 《축복》이라든지 《생일》이라든지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고이 묶어내어 나누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세상을 떠난 장영희 님 목소리는 더 들을 수 없고, 앞으로 또다른 장영희 님 선물이 우리 앞에 선보이지 않겠지만, 숱한 마음밥이 장영희 님한테 스며들어 새로운 이야기로 피어났듯, 우리는 우리대로 장영희 님이 나누어 준 마음밥을 달게 받아먹으며 우리 깜냥껏 새로운 마음밥을 일구어 우리 이웃한테 나누어 줄 삶을 이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 누운 자리가 고즈넉하고 따뜻하기를 빕니다. (4342.5.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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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세대 - 상상력과 용기로 세상을 바꾸는 십대들 이야기 양철북 청소년 교양 5
김진아 외 지음, 참여연대 기획 / 양철북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98 ― ‘푸르고 여린(청소년)’ 심지에 폭력을 들이대지 마셔요
 : 김진아 외 아홉 사람, 《열정세대》


- 책이름 : 열정세대
- 글 : 김진아 외 아홉 사람
- 펴낸곳 : 양철북 (2009.2.16.)
- 책값 : 9800원



 (1) 아이들을 폭력에 길들게 하는 학교


 엊저녁, 옆지기가 동생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처남(옆지기한테는 막내동생)은 오늘 학교에서 ‘두발검사’를 한다면서, 이때 걸리지 않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깜빡 잊었다고 합니다.

 열네 살 처남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학교 공부보다는 동무들하고 뛰어놀기를 훨씬 더 좋아하지 않느냐 싶던데, 아마도 학교에서 담임 교사가 ‘두발검사’를 한다고 알려주었어도 곧 잊어버렸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지요.

 처남 머리는 그리 짧지 않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를 떠올리면, 더구나 제 고향이며 일터인 인천에서 중학생인 요즈음 아이들 머리길이를 살피면, 경기도 일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처남 머리길이는 ‘인천에서는 고등학생 머리길이’라 할 만합니다.


.. 우선 가출이라는 용어는 항상 청소년에게만 사용되고 있어. 그렇지? 너 ‘가출 어른’이라는 말 들어 봤냐? 없지? … 어른들에게는 가출 대신 다른 멋들어진 단어가 사용되지. 독립. 음, 이 얼마나 장대한 말이냐 … 사실 학교 폭력은 학교의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 때문에 가능하거든. 일종의 폭력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런데도 청소년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희석해 버리지. 그래서 폭력 청소년을 학교 바깥으로 쫓아내면 모두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야 … 가출하고 나서 나는 진짜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있었어. 전에는 희미하게 보이던 미래가 조금씩 명확하게 보익 시작했다 … 하지만 이 따스한 공간(집)이 가장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부모님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서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  (16∼19, 22쪽)


 옆지기가 처남 머리를 잘라 주는 동안, 때가 어느 때인데 학교에서 ‘머리길이 살피기’를 하는가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는 아이들 머리길이를 살피는 일을 ‘교육’이라고 여기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지시사항을 내리는 교육부도 놀랍고, 이런 지시사항이 없었다면 학교장 스스로 이런 지시사항을 마련했을 테니 이 학교 교장 또한 더없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학교장이 이런 지시사항을 내렸다 하여도 담임을 맡은 교사 스스로 ‘터무니없을 뿐더러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아이들을 억누르는 셈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되는 사람들은 ‘아이들 머리카락 길이를 짧게 맞추어야, 아이들이 바르고 착하고 얌전하고 슬기롭게 크리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런 짓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도 경제적 가치 앞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서글플 뿐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감동을 받지 못하는 사회와 삶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  (55쪽)


 제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간 때는 1988년입니다. 이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천에서) 중학생은 머리길이가 3센티미터가 넘어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나마 앞머리는 눈썹에 안 닿으면 된다고 했지만, 그예 빡빡이 머리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말이 3센티미터이지 빡빡 밀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고, 하루아침에 머리통이 허옇게 드러나는 아이들이 우글우글 모여 학교에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모습은 조금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런 모습이야말로 ‘참교육’이 이루어진다며 좋아한 분들이 있었겠지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단발령’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깜짝 놀라던 일이 떠오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머리카락이란 몸뚱아리와 마찬가지였기에,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하여 목숨을 끊은 사람이 나왔다고 했는데, 지난날 우리 삶자락을 헤아린다면, 중학교에서 우리들 머리카락을 이토록 밀어대는 일은 ‘우리가 스님이 될 생각’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스스로 밀고 싶으면 밀며, 깎고 싶으면 깎도록 해야 할 뿐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한테 이름을 빼앗고 말을 빼앗고 땅을 빼앗고 문화와 몸 모두를 빼앗은 아픔과 생채기를 목소리 높여 가르치던 교사들인데, 정작 이런 교사들이 가위를 들고 교실과 학교 구석구석 누비며 어디 숨은 ‘놈’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두발검사’ 하는 날이면 교사들은 하나같이 새벽밥 지어먹고 학교 곳곳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지켜서곤 했고, 이렇게 지켜선 다음에도 운동장으로 죄다 불러내어 하나하나 자로 머리길이를 재면서 다시금 가위질을 해대었고, 조리로 돌을 솎아내듯 하루 동안 교실과 골마루와 뒷간에서 서너 차례 가위질을 해댄 다음에야 비로소 살얼음판 같은 가위질이 끝나곤 했습니다.


.. 문득, 어른들은 ‘십대 동성애자’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십대는 미성숙하고 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잖아 ..  (64쪽)


 가위질은 고등학교에 갔어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교에서는 3센티미터는 아니었습니다. 앞머리가 눈을 찌르지 말고, 옆머리가 귀를 덮지 않으며, 뒷머리가 옷깃에 닿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인천이라는 데에서는 ‘학교옷’을 안 입어도 누가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인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고, 신분증이 없어도 신분증처럼 알아보았습니다. 극장에 들어갈 때이든 전철을 탈 때이든 버스표를 살 때이든 머리길이만으로 우리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사를 비롯한 모든 어른은 우리 ‘푸름이(청소년)’를 ‘한꺼번에 다스릴(일제단속)’ 수 있었습니다.

 시험점수에 따라 줄세우기 하는 짓만으로도 모자라, 아니, 줄세우기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하니까 심심했는지(?) ‘두발검사’에다가 ‘복장검사’에다가 ‘소지품검사’를 수도 없이 해댔고, 굵직한 몽둥이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교사들 가운데에는 중고등학생한테까지 ‘손톱검사’를 하면서 골마루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매질을 일삼는 사람이 어김없이 학년마다 한둘씩 있었습니다.


.. 처음에는 집으로 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차마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용돈 몇 푼 더 벌지 모르지만, 촛불집회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유는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  (99쪽)


 어린 처남이 “아이! 내일 두발검사 하는데 어떡하지?” 하며 걱정을 하기에 옆지기는 머리를 손수 잘라 주었습니다만, 제 마음은 “얌마, 머리 그냥 그대로 두고 학교에 가. 가서 청소년 인권을 말하면서 따져!” 하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에 따르는 어떤 앙갚음을 교사들이 해댄다 할지라도, 아이들한테 ‘인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교칙만 있다’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교사들한테, ‘어린이도 푸름이도 어른과 똑같은 사람이다’고 당차게 외쳐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2) 학교에서 폭력에 길들지 않고자


 그러나 처남한테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반항이 아닌 저항은 앞으로 언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머리가 잘리지 않으면서 지내며 폭력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아야 하지만, 처남 스스로 이런 대목까지 살피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인권’을 말하는 일은 샛길로 샌다든지 잘못 받아들일 걱정이 있습니다.

 차근차근 다루어야 하며, 혼자서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길이를 살핀다고 하는 날 갑작스레 홀로 외치는 말이 아니라, 오래도록 차근차근 생각하고 돌아보고 동무들하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함께 움직여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처남 스스로 학급회의 같은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감을 꺼내어 교사가 함께하는 가운데 ‘인권이란 무엇이며, 학교란 어떤 곳이고, 교사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따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억지로 밀어붙이는 교칙은 터무니없습니다만, 깊은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말 또한 교사한테도 학교한테도 동무들한테도 살갗 깊숙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나 몸짓으로 스며들기란 어렵다고 느낍니다.


.. 청소년 시절에는 입시 위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한다고 생각해. 왜 전국의 청소년들을 성적순으로 등수를 매기고(일제고사), 아름다운 우리 말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영어 몰입 교육),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는(0교시 수업, 야간 자율학습) 걸까? ..  (29쪽)


 그러면서 제가 중고등학교 때 해 본 저항을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반항이었지만, 한낱 맞대꾸하는 일(반항)만으로는 제 뜻을 교사와 학교한테 알릴 수 없을 뿐더러, 동무들한테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가벼운 맞대꾸나 철없는 맞대꾸를 딛고 서서, 차분한 맞섬이나 올바른 거스르기를 해야 교사도 생각을 고치고 학교도 다른 매무새로 나오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1988년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아직 세상을 제대로 모르던 때였기에, 전두환이 얼마나 나쁜 놈인 줄 몰랐고, 그때까지 학교에서 한 주에 한 번씩 거두던 ‘평화의 댐 성금’이라든지 다달이 거두던 ‘방위성금’이 어디로 들어가는 돈이었는지를 비롯해 ‘독재’라는 말도 몰랐습니다. ‘쿠테타’를 알 턱이 없었을 뿐더러, 어느 교사도 우리한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마을운동 체험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더 얻어맞지 않으려고 쓸’ 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국민학교 6년을 마칠 때까지 쓰던 일기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늘 ‘새마을일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레 머리를 빡빡이로 밀어야 하는 일은 제 마음에 깊이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왜 깎아야 하는데? 안 깎으면 깡패가 되나? 안 깎으면 공부를 안 하나? 깎으면 모두 천재라도 되나?

 더구나 한 달에 한 번씩 가야 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거칠게 휘젓는 가위질과 마구 문지르는 머리감기는 고달플 뿐이었고, 머리 깎는 돈이 몹시 아까웠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았으나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머리를 깎아 주시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건 고등학생이 되건,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집에서 스스로 깎도록 하면 될 노릇이고, 저마다 제 머리와 몸과 마음에 따라서 간수할 노릇이 아닌가 싶었기에, 이 마음을 곰곰이 다스려서 토요일 학급회의를 할 때에 늘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받아 주든 안 받아 주든 ‘안건으로 올려야 할 까닭’을 예닐곱 가지나 열 몇 가지씩 쪽지에 적어 놓고는 읽었고, 우리 학교는 우리 인권을 너무 짓밟고 있으니 이러한 일들을 고쳐야 한다고 거듭 외쳤습니다.


.. 이제 중ㆍ고등학교에서 풍물 동아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동아리를 만들어도 부모들이 반대해 동아리실이 폐쇄되기도 한다. 학생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 학교가 생긴 지 1백 년이래요. 선생님들도 우리 학교 출신이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들이 자신들이 배운 교육 방식 그대로 우리를 가르친다는 점이에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예전 방식 그대로예요. 정말 심해요. 앞뒤가 꽉 막힌 선생님들이 많아서 친구들도 무척 힘들어 해요 … 제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학교 안에만 있으면 많은 걸 놓칠 것 같아서였어요. 생각과 상상력이 고갈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학교라는 거대한 배가 흘러가는 방향대로 같이 흐르니까요 … 학교 안에서 상상하지 못하던 아이는 밖에 나와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아예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불행해지는 거예요 ..  (138, 144∼145쪽)


 나중에, 중고등학생 가운데 생각있는 학생이 모여 ‘대학생처럼 하는 학생운동 모임’이 있음을 알았는데, 이 모임에 있던 이들 가운데 우리 인권을 따진 동무들은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모임이 있다 했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책도 읽는다 했는데, 물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반장을 뽑을 때 ‘전교 몇 등에 드는 테두리’에서 후보자를 고를 수 있던 일이라든지, 교사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이 없어져야 한다는 외침 따위에는, 반 동무들이 뜻을 같이했어도 담임 교사는 언제나 ‘오늘 이 이야기는 이 교실에서만 있었던 걸로 한다’며 끝맺고는, 교감이나 교장한테 한 번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학급회의 주제는 대충 아무것이나 바꾸어 적고 토론한 줄거리도 대충 채워 넣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를 깨끗이 하자’라는 주제로, 청소를 잘하자라느니 쓰레기를 줍자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적습니다. ‘공부를 잘하자’라는 주제로, 다가오는 시험에서는 더 부지런히 공부하자라느니, 예습과 복습을 잘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느니 하면서.


.. “청소년 운동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나라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현재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공무원도 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또 원하기만 하면 군대도 갈 수 있고요. 그런데 유독 참정권만 없어요. 이건 좀 말이 안 돼요.” ..  (180쪽)


 중학교 세 해에 걸쳐 끝없이 싸우고 싸웠습니다. 맞으면서도 우리가 왜 맞아야 하느냐고 따졌고, 교사들이 잘못하면 우리가 교사를 때리면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소지품검사를 거스르고자 했으나 언제나 거스르지 못하게 되었고, 교과서 아닌 책을 빼앗아 갈 때면, 그 책이 무슨 불량불온도서라도 되는데 빼앗느냐고 따졌습니다. 자율학습이라면 자율로 하고픈 사람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보충수업은 보충해야 하는 아이들만 해야 하지 않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지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한 가지도 나아지는 구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번, ‘청소년 인권선언문’을 전지에 옮겨적어 한 주 동안 학교 문간에 세워 놓도록은 했는데, 한 주가 지난 다음에는 쓰레기통에 처박혔습니다.

 교사들은 버젓이 동무들 뺨따귀를 올려붙이거나 코피가 터져도 주먹질을 그치지 않는 일을 교실에서도 해댔습니다. 이런 학교를 다녔다는 일은 ‘내 창피’라고 여겨, 중학교 졸업사진책은 안 사기로 했습니다. 졸업장도 안 받으려고 했으나 어머니 얼굴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습니다. 기껏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까요. 전교에 너 혼자만 졸업사진책을 안 산다니 말이 되느냐고 담임이 몇 번이나 달래고,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이 도장을 찍어 주십시오 하고 했어도 끝내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어처구니 학교를 다닌 일을 돌아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비싸게 팔아치우는 졸업사진책도 마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뒤, 연합고사를 마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중학생 때에도 1학년 때부터 아침 여덟 시 이십 분부터 0교시를 해서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이어졌는데,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0교시와 자율ㆍ보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수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지 않았고, 수업 때에는 비디오를 틀어 주었고, 때로는 운동장에서 나가 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끼리 웃고 떠들고 찧고 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수학 교사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떠들어!” 하면서 우리보고 책상을 들고 벌을 서라 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저도 얼결에 책상을 함께 들고 벌을 받았지만(저는 동무들하고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맨 뒷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늘), 수학 교사가 비꼬듯 되뇌는 설교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네가 그동안 우리한테 한 짓이 있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십 분쯤 팔이 덜덜 떨리도록 책상을 들고 있다가, 이 수학 교사가 우리한테 한 시간 내내 책상을 들고 있으라고 하는 소리에 불뚝 성이 나서, 교단으로 책상을 냅다 집어던졌습니다. 동무들만 떠들었어도 나 또한 한 반 동무로 벌을 받기도 해야 할 테지만, 십 분 넘게는 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차피 이 학교는 한두 달 뒤면 나하고도 인연이 끝인데, 너 같은 사람한테 입발린 설교는 듣기 싫으니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수학 교사 얼굴에 대고 책상을 던졌는데, 안타깝게도 수학 교사 얼굴은 살짝 스치고 칠판에 꽝 하고 박았습니다. 갑자기 날아온 책상에 놀란 수학 교사는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책상을 던진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무어라 한 마디를 더 했으면, 이번에는 걸상을 들고 뛰쳐나가 휘둘렀을는지 모르니까요.

 수학 교사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시늉도 없기에 걸상에 털썩 주저앉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팔짱을 끼고 앉았습니다. 동무들보고 “야, 니들도 앉아. 저런 놈이 시키는 대로 할 게 뭐야?” 하고 말했는데, 다들 끽소리 없이 책상을 들고 있기만 할 뿐입니다.


.. “후문 개방 사건 이후로 생각이 많았어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인데, 어른들도 학생들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들은 더더욱 그렇고요 … 어른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들을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로 치부해 버려요. 고등학생도 그렇게 생각하니 중학생은 더하죠.” ..  (219, 224∼226쪽)


 마침종이 울리고 모두들 책상을 내리고 팔 빠져 죽는 줄 알았다느니 투덜투덜댑니다. 수학 교사는 교무실로 돌아갑니다.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학 교사가 학생과로 부르면 한판 몸싸움이라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이 일을 쉬쉬하고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뒤로 우리들 ‘연합고사 끝나고 나서 졸업 때까지 이루어진 수업’은 더 개판이 되었고, 교사들도 더는 몽둥이질을 해대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중학생 때 일을 돌아보면, 조금도 잘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철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철이 없었기 때문에 당돌한 짓을 저질렀고, 저 또한 폭력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찌들고 길드는 바람에 ‘폭력에 맞서는 폭력’밖에는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는 어떻게든 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이음고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로 읽으라 내준 책 가운데 이러한 이음고리를 보여준 책은 하나도 없었고, 이무렵 국민학교 교감 자리에 오른 아버지 또한 아들인 저한테 ‘사람됨 이끄는 가르침’이라든지 ‘사람다움을 보여주는 책’을 하나도 일러 주지 못했습니다.

 동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맞선 폭력을 ‘짱’이라느니 ‘멋있다’라느니 하는 말로밖에 바라볼 줄 몰랐고, ‘네가 잘못했어’ 하고 말해 준 녀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 이기려 해서도 안 되지만, 폭력을 굳이 이겨야 한다고 해서도 안 됨을 알 길이 없기도 했습니다. 제도권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로는 우리가 ‘틀에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 따르고, 먹이는 대로 잘 먹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민주시민’이 된다고 앵무새 말을 거듭 할 뿐이었습니다.


 (3) 푸름이 목소리를 푸름이 입으로


 이야기책 《열정세대》를 꼼꼼히 읽고 난 지 여러 달 지났습니다. 푸름이들 나이와 자리를 헤아리면서, 제가 그 나이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책을 찾고 어떤 공부를 하는 가운데 무슨 꿈을 키웠는가 곱씹습니다.

 우리를 낳아 기른 어른들은 우리를 보며 ‘너희는 전쟁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세대야’라느니 ‘너희는 보릿고개도 부대끼지 않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배부른 세대야’라느니 하는 말을 일삼았는데, 어찌 보면, 어른들은 우리 푸름이를 ‘배부른 돼지’로 기른 셈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틀림없이 당신들처럼 배를 곯거나 헐벗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당신들처럼 학교도 못 가고, 학교에서도 더 끔찍한 콩나물시루에서 더 모진 몽둥이질에 시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한테도 당신들처럼 고단함이 있었고, 허구헌날 운동장 돌 줍기를 해야 했으며, 날이면 날마다 매타작에 엉덩이와 허벅지와 뺨따귀가 성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작 한 학년 위인 선배들은 건들거리면서 종아리를 걷어차거나 침을 찍찍 뱉었고 돈을 빼앗기는 동무가 많았습니다. 후미진 골목에서는 너구리 소굴 같은 하얀 연기가 피어났으며, 자유공원과 화도진공원 같은 데는 동네 양아치들이 학교옷을 구겨입고 술판을 벌여 이 옆으로 지나가기도 무서웠습니다.


.. 청소년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권리를 인정한다면 법으로 명시된 최정임금을 준수하는 건 기본이 아닐까? 그게 진짜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아니겠냐고 ..  (24쪽)


 《열정세대》를 읽는 동안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눈을 뜬’ 아이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이 아이들한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한둘쯤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보았자 턱없이 모자란 손길입니다만,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날까지 따뜻한 손길이라곤 ‘학교 둘레’에서 한 번도 못 받았던 제 삶을 생각해 보니,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잘되었다며 한숨이 나오기도 하며, 이렇게 살가운 어른이 있어도 좀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어른들 모습이 보인다는 느낌에 아쉽기도 합니다.


.. “조중동의 문제는 자신들의 시선이 옳고, 전부이고, 객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들이 일부이고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 옳고 다른 신문들은 틀리다’는 식이잖아요. 그게 가장 잘못된 점이죠 … 주위 친구들을 보면 지금 당장 자기와 상관이 없어 보인다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뭐든지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건 없잖아요. 쇠고기 수입 문제, 쌀 수입 개방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비정규직 문제 들이 커다란 고리에서 보면 결국 자신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  (160, 165쪽)


 무엇인가 허전하구나 싶어 다시금 책을 들춰봅니다. 이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어슷비슷하게 생채기를 입어 보았던 어른이었기에 기꺼이 이 아이들한테 손길을 내밀 수 있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예전에 겪은 생채기하고 아이들이 오늘 겪는 생채기하고는 같지 않습니다.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도 같지 않습니다. 사회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경제가 다릅니다. 학교 시설이 다르고 교육제도가 다르며 입시지옥이 다릅니다. 지난날 같은 군사독재자가 나라를 어두움에 내몰지 않습니다만, 군인이 아닌 사람이라 하여도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교육밭이나 문화밭에 평화와 자유와 민주를 심지 않았습니다. 너나없이 돈벌이를 외치지만, 돈벌이를 왜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못합니다. 자립형사립고니 교육평준화니 외칠 줄은 알아도, 이런 교육이 푸름이인 오늘 아이들한테 어떤 눈높이에서 다가가는 일인지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래도 하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가슴팍에 뜨거운 심지 하나를 붙안고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손길 내민 어른들 또한 어른들대로 가슴자리에 따뜻한 촛불 하나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와 촛불이 제대로 만날 수 있다면, 심지와 촛불이 오래도록 어깨동무를 하면서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여린 심지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열 해나 스무 해쯤 뒤 새롭게 커 나갈 더 작은 심지한테 촛불이 되어 다가설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 하나로 빈틈없는 끝마무리를 바라서는 안 될 노릇이요, 이 책 《열정시대》에서는, 심지와 촛불이 만나는 이야기를 읽어내면 넉넉하며, 이 심지와 촛불이 다음 심지와 촛불로, 또 다음 심지와 촛불로 꾸준히 이어나가면서 우리 손으로 차츰차츰 새롭게 일구는 우리 터전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하는 이야기를 새겨낼 수 있으면 즐겁다고 느낍니다. 그래, 한 걸음씩 아닌가?

 겨우 마음을 놓으면서 책을 덮고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우리 처남이 이 책을 알아보면서 스스로 집어들어 읽을 날을 기다립니다. (4342.5.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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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의 경제학
가가와 도요히코 지음, 홍순명 옮김 / 그물코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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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03 - 가난한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살림살이, ‘생협’
 : 가가와 도요히코, 《우애의 경제학》


- 책이름 : 우애의 경제학
- 글 : 가가와 도요히코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 (2009.2.10.)
- 책값 : 9000원


 (1)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옆지기 어머님이 지난해께였나, 인천 관교동에 다녀오실 때 그곳에 빼곡하게 들어찬 술집으로 이루어진 거리마다 자동차가 촘촘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많’은 듯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자날부터 어린이날까지 징검다리 쉬는날이 이루어졌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하는 어느 아주머니가 모처럼 나들이를 해 보려고 차편을 알아보는데 닷새에 걸쳐 예약이 꽉 차 빈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며,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도 안 그런’ 듯하다고 말씀을 잇습니다.

 이런 말을 따로 듣지 않더라도 배부른 사람들은 그야말로 배부른 삶을 이어갑니다. 배부른 사람이 몇 퍼센트이고 배곯는 사람이 몇 퍼센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살림이 기우뚱하더라도 배터지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나라살림이 넉넉하더라도 배고픈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고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이웃과 고르게 나누려는 마음이 적습니다.


.. 오늘날 가난은 물질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풍부에서 생기고 있다. 물질이나 기계의 과잉생산, 과잉노동이나 지식층의 존재에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들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부는 아주 작은 한 줌 사람들의 손에 쌓여 있고, 사회의 일반 대중은 헛된 외침을 부르짖고 있다. 물자가 넘치는 창고 밖에는 한없이 많은 실업자가 굶주리고 있다 …  ..  (14쪽)


 자전거를 타고 인천과 서울을 가끔 오가곤 하는데, 이때마다 길거리를 가득가득 누비는 자동차물결을 구경합니다. 전철을 타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에도 한강을 따라 이어진 찻길에는 자동차가 빼곡합니다. 때때로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볼일을 보러 움직이노라면, 버스가 많이 막혀 제대로 못 가곤 합니다.

 기름값이 하늘 모르게 치솟는다 하여도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기름 먹는 자동차만 달리는 길’을 새로 닦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지구자원을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제 살림을 줄이면서 모자라거나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려는 마음 또한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씀씀이와 이웃이 함께 사는 씀씀이를 헤아리는 눈썰미를 찾기 힘듭니다. 내 살림을 즐기거나 누리자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살피는 눈매를 찾기 어렵습니다. 내 앞날을 걱정하며 돈을 쌓아두는 손길은 있으나, 바로 오늘 걱정스러운 삶을 가까스로 잇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형제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날 도시 생활을 비참하다. 도시가 크게 될수록 범죄가 많아진다. 법률만으로 범죄자나 빈민가 소년들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일본에서 우리들이 농민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도둑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좋은 협동조합이 있으면 도둑질 하려는 욕망이 사라진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도 그렇다. 그들 나라에는 도둑이 적다. 그러나 미국에는 많은 경찰관, 감옥 그리고 범죄자가 있다. 좋은 국민실업보험, 노령연금, 큰 도시가 있으면 연기로 뒤덮인 문명이 있다. 그리고 좋은 협동조합운동이 있으면 그 나라에 절도가 사라진다 ..  (32쪽)


 그래도 이웃을 보듬는 손길을 아예 못 찾지 않습니다. 배부르거나 배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만, 똑같이 배고프거나 배곯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쉽게 찾아보곤 합니다. 이랜드 일반노조 사람들 목소리가 담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예배당에 몇 억도 아닌 수십 수백 억에 이르는 돈을 척척 갖다 바칠 줄은 알아도,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안 쓰고 비정규직으로 쓰다가 내치려고 하는 기업주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말해요 찬드라》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똑같이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 사이이지만,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가볍게 손찌검을 하고 자연스레 일삯을 떼먹는 일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더 안쓰러운 일이라 한다면, 우리 스스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목아지까지 날아가 길거리로 쫓겨나기까지는 이런 얼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니, 있는 그대로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정작 나 또한 길바닥에 내팽개쳐질 그때가 되어서야 ‘그렇구나. 이런 일이 거짓이 아니구나. 이렇게 길바닥으로 내몰리니까 악을 쓰며 내 권리를 찾으려 하고, 평등과 평화를 바라게 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진작 우리 스스로 정규직 자리에 있을 때부터 비정규직을 보듬으며,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일에 똑같은 대접을 받는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을 못 품습니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이라지만 나 또한 당신처럼 힘들다’는 핑계 한 마디로 고개를 홱 돌릴 뿐입니다.


.. 중세의 길드는 착취 없는 경제활동의 조직화를 이루었지만, 그 조직은 비조합원까지 형제애를 미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현대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그 서비스를 지역사회 전체에 확대하는 것이다. 옛 조합은 서비스를 자기 조합에 한정하였다 … 조합의 기본 신조의 하나는 정치와 종교 양쪽에서 중립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현대의 협동조합은 단일한 조직 속에 일정한 사회집단의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런 단일 조직은 어느 땐가는 기능을 계속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 강제 협동조합에서는 개개인이 비밀 매매로 협동조합의 본질에 어긋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시스템 전체가 헛돌게 되고, 계획경제는 무너지게 된다. 다른 한편, 자발적인 조직에서는 이런 유혹이 없을 것이다. 협동조합 경제의 진정한 모습은 착취 없는 계획된 경제체계라는 데 있다 … 소비자협동조합은 단지 먹을거리 잡화를 사기 위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협동조합이란 새 사회의 경제 단위이고, 조합원은 거기에 충실히 협력해야 한다. 설령 서비스가 조금 늦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조합원은 그 이익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 노동으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목적의식적인 견실한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은 암초에 부딪쳐 버린다 … 조직된 조합 사회에는 형제애가 필요하다. 자본가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그들이 교정되도록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  (94, 100, 105, 108∼109쪽)


 홍세화 님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같은 책에도 썼지만, 고리끼 같은 분은 일찌감치 《러시아 이야기》나 《이탈리아 이야기》 같은 책에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제 권리를 되찾고자 주먹 불끈 쥐며 어깨동무를 할 때에, 옆에서 이들이 손을 놓은 일 때문에 전차도 못 타고 가게에조차 못 가게 되더라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똑같이 어깨동무를 해 주는 노동자 벗’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느끼는 일이지만, 지난날 이 나라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민란’이나 ‘소작쟁의’ 같은 일 또한,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어깨동무’가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를 역사책에 적바림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까닭이라든지 이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품앗이나 두레와 같은 모둠일을 헤아리면서, ‘있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고마움’보다 ‘없는 사람이 종이 한 장 맞잡는 나눔’이 훨씬 오래도록 이 땅 구석구석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과 낮과 저녁 사이 골목길 쓰레기를 줍는 할매와 할배 같은 손길이 바로, 없는 가운데 낮은자리에서 이웃을 생각하며 서로 돕는 매무새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 현재 노동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에 아무 주목도 하지 않고, 신용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조합이 그와 같이 근시안적인 정책을 유지하는 한, 설령 정치권력에 아무리 이기더라도, 자본주의적 압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자본가가 파산을 하고 노동자가 실업에 빠졌을 때, 노동자들은 수요자인 자본가로부터 공장을 맡아 자기 임금을 조정하는 권리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체제와 비교하여 수입은 줄었지만 실업은 벗어날 수 있었다 … 만일 사람들이 새 지하철 건설에 도시 공채 발행보다 협동조합 자본을 이용하면, 자본가들이 합법적 이익을 도시에서 빨아들이는 것을 막을 것이다 … 현재 시스템에서는 예를 들면, 철도나 항만, 시장이나 해운 등 자체 공익사업은 정치의 돈잔치가 된다. 정권과 정당이 바뀐다 해도 다음 선거 뒤에는 포기할지 모르는 계획이 세워지게 된다 ..  (116, 118, 132∼133쪽)


 새 살림집 보증금을 빌리려고 은행에 찾아가며 느꼈는데, 나라에서는 우리 식구 같은 사람한테 도움을 준다면서 ‘저소득자 전세자금 대출’이나 ‘무주택자 전세자금 대출’ 같은 제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만, 정작 저소득이든 무소득이든 무주택자이든 영세민이든, 우리 같은 사람은 대출을 받을 수 없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저소득자라 하여도 ‘돈 좀 있고 정규직으로 느긋한 일자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싼 대출, 이를테면 전세돈 천만 원이나 오백만 원을 빌릴 수 있었고, 다문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조차 빌려 주는 대출이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 광고에서 수없이 떠드는 ‘대출 대부업’이 그토록 판치고 넘치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없는 사람은 은행문을 두드릴 수조차 없음을 익히 알기에 그런 대출 대부업이 넘칠 테지요.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은 그 같은 대출 대부업에 손을 뻗게 되면,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빚잔치 하느라 살아가는 즐거움을 싹 잊고 주름살이 늘어갈 테고요.


 (2) 베푸는 삶, 나누는 삶


 자전거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안이나 부평 둘레에만 가도 우람한 예배당 건물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 중ㆍ동구 옛 도심지에도 비죽비죽 뾰족탑 높이 올린 예배당이 꽤 많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받이 꼭대기마다 천주교회나 성공회교회니 감리교회니 장로교회니 안식일교회니 또 무슨무슨 교회니 하면서 우람한 건물이 지붕 낮은 집을 내려다봅니다. 구멍가게 숫자와 맞먹는, 어쩌면 구멍가게 숫자를 훨씬 뛰어넘을 만한 예배당 숫자입니다.

 집없는 사람 많으나 예배당 어느 곳도 이들한테 사랑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드넓는 예배당은 하느님 사랑을 노래하고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비손을 올리지만, 예배당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쳐다보지 않습니다. 길 가는 사람한테 티슈꾸러미를 안기며 교회 나오시라며 꾸벅하고 절을 할 줄은 알아도, 집집마다 어떤 근심과 걱정으로 하루하루 실낱 같은 삶을 붙잡는 줄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예배당한테 가난한 사람들 눈높이에 서라고 하는 일은 처음부터 잘못이었을까요.


.. 일본에는 1800개 교회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도시에 있다. 시골에는 3천만 명의 사람이 있고 9천 개의 마을이 있지만, 그 사람들을 위한 전도소는 겨우 170개가 있을 뿐이다 … 예수 종교의 위대함은 그의 가르침이 우수한 데 있지 않고, 그의 의식이 하나님의 그것과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끝마친 짧은 삶에서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발달을 체현한 데 있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완전한 융합을 보인 것이다 ..  (23∼24, 38쪽)


 낡고 헐어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신자 숫자가 늘어 큰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은 옳습니다. 거룩한 집을 새로 지어야 하기에 신자들이 돈을 바쳐야 한다는 말도 옳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집에 바쳐지면서 거룩한 집이 지어진 다음에, 이곳은 누구한테 문을 열어 놓습니까. 그 넓디넓고 따뜻하거나 시원한 거룩한 방 한 칸쯤 우리들한테 내어주면서 다리를 쉬고 몸을 뉘일 수 있게끔 열어 놓고 있습니까. 또는, 예배당에 쌓이는 돈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몇 해 앞서 몇몇 재벌회사 우두머리 되는 분들이 몇 천 억씩 턱턱 ‘사회에 바치겠다’고 내놓은 돈을 보면서, 그만한 돈을 일찌감치 나눌 수 없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돈이란 우리한테 입이 쩍 벌어지는 크기이지만, 그이들한테는 그리 큰돈도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이들은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할까요. 너무 많지만 너무 많은 줄 모르고, 탱자탱자 써도 다 쓰지 못할 그 끔찍한 돈에 갇혀 사람을 못 보고 사랑을 못 느낀다고 할까요.


..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의 실천에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귀의하는 데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믿는 그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요구한다 … 만일 하나님만 생각하고 인간을 무시한다면 종교는 무의미하게 되고 인간을 창조한 이유도 없게 된다 … 사실 사랑은 인간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 신앙이란 언뜻 봐서 약하게 보이는 사랑의 힘이 인간 폭력의 힘보다 위대함을 믿는 데 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은 같은 일, 하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 그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 개신교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제한한다. 한편 가톨릭은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한다 … 신앙을 단지 이론적인 것으로 알고, 삶 전체의 문제로 삼지 않는 신학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 햇볕을 받으면서 그것을 통과시키지 않는 유리창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  (40∼43, 46쪽)


 사랑을 베풀라고들 하지만, 사랑은 베푸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랑은 나누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나눌 수 있으니 사랑이요 믿음이지, 베풀 수 있다면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나한테 넉넉히 있기에 베풀 수 있는 사랑이나 믿음이 아닙니다. 내 온몸으로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내 온몸으로 함께하는 삶이기에 나누게 되는 사랑이요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이면서 얼마든지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조금도 안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조금 베푸는 척 시늉을 하지만, 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닌 자랑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팔고 얼굴을 팔 뿐인 겉치레로 그칩니다. 베푸는 사람은 저한테 넘치거나 많은 무엇을 덜어내지만, 나누는 사람은 ‘나누어 받을 사람한테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를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돈을 쥐어 주어야 할는지, 일을 거들어야 할는지, 밥상을 나란히 마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는지를 그때그때 알맞게 느낍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사랑이란 돈으로만 할 수 있지 않거든요. 이웃집 꽃그릇에 물을 주는 일도 사랑이요, 이웃집 할매 다리를 주물러 주어도 사랑이며, 이웃집 할배한테 책을 읽어 주어도 사랑입니다.


.. 오늘날 방탕에 쓰이는 막대한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에서 공인 매매춘과 사적 매매춘에 쓰이는 금액은 연간 1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쌀의 연간 소비는 15억 엔으로 그 금액의 1.5배에 지나지 않는다(1936년) …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기 위하여 종교단체가 늘어나, 미국에서만 건물 유지를 위하여 약 70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사용되고 있는가. 그 총액은 아무도 계산할 수 없다 ..  (60∼61쪽)


 하기는. 지나온 제 삶을 돌아보니, 먹고 입고 쓰고 마시고 하는 모두를 아끼거나 줄이면서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 몇 천만 원짜리 전세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이렇게 아끼고 전세집에서 살 때에는 이만한 ‘집크기’를 지키거나 ‘조금 더 큰 집자리’를 알아보려고 내 자리만 더 돌아보게 되지, 좀더 값싼 전세집으로 옮기면서 ‘그만큼 덜어진 돈’으로 이웃과 나누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저 한다는 생각이라면, 한 달에 십육만 원 벌면서 살던 때에는 오백 원이나 천 원을 동냥그릇에 넣으면서 나눈다고 하다가, 한 달에 백만 원 넘게 벌면서 지내니 만 원짜리나 오천 원짜리도 넣으면서 나눈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십육만 원 벌며 천 원을 내는 푼수라면, 백육십만 원을 벌 때에는 만 원을 내는 일이 ‘손 떨리는’ 일이 아닐 텐데, 손이 떨렸습니다.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참말 그러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주 작은 살림을 꾸리고, 벌이 또한 아주 낮아진 이즈음에는, 때때로 만 원이나 이만 원 거들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손 떠는’ 일이 없습니다. 척척 바칩니다. 돈을 바쳐야 할 때에는 돈을 바치고, 몸을 바쳐야 할 때에는 기꺼이 자원봉사를 합니다. 더 있다고 베풀 수 없는 사랑이며, 아무것도 없다 하여 나누지 못하는 사랑이 아님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일반적으로 현대의 입법부는 설령 사회민주주의 성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것을 막거나 그들을 공황과 불황에서 구출하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의회의 기구가 주로 입법의 여러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산업이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직업의 기본적 사항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생활의 여러 문제를 파고들지 못한다 … 산업조직은 윤리 의식이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의원들이 자기중심의 이윤 추구자가 되어, 국내 문제에는 공정한 법안을 가결하지만 국제관계에는 지나치게 국가주의가 되는 수가 있다 … 소는 잡초가 40퍼센트 이상이면 먹이로 할 수 없으나, 염소는 90퍼센트 잡초 사료로도 훌륭하게 자라난다. 덴마크에서는 젖 짜는 염소의 대규모 사육장이 72군데 있지만, 일본에는 한 군데도 없다. 사람이 염소 키우는 법을 알고 젖을 식재로 받아들이면 일본의 식량 공급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농업과 낙농 제품의 새로운 계획을 무시해 왔다. 우리가 현재 군비에 쓰는 돈을 그런 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 군인들은 이런 경제의 문제를 잘 모른다. 그들은 칼만을 절거덕절거덕 울리고 싶어 한다 … 유일한 해결은 경제 기획에 쓰는 돈을 더 늘리고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다 …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를 개선해 가려면, 현재 군사비로 낭비되는 몇 백만 파운드 돈을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 개선에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  (140, 147, 166∼167, 174쪽)


 새로 옮길 달삯집에 아침에 찾아가 계약서를 쓰는 자리에서, 집임자 할매는 ‘십 년 전에도 월세를 30만 원 받았고, 이제도 35만 원 받는데, 더 달라고 하기가 힘들다’고 말씀합니다. 30이든 35이든 달삯을 낼 사람한테는 만만하지 않은 돈이지만, 두 어르신은 그렇게 삯 사는 사람이 쥐어주는 돈으로 고만고만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집임자라고 하나 자가용도 없고, 2층과 3층에 삯을 놓고 1층에서 마흔 해 남짓 살아오면서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집을 돌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씀을 가만히 들으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당신들이 처음 이곳에 자리잡고 지낼 때에 둘레는 죄다 풀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써 마흔이 넘은 딸아이도 이 집에서 키웠고 적잖은 사람들이 당신 집을 거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홉 달짜리 갓난쟁이가 밤에 빽빽 울어댈지 모른다 하여도 ‘사람 사는 데에 다 그러하지 않느냐’면서 ‘삯집이 비니까 허전하고 심심하다’면서 ‘손주 뻘 애들 구경하는 일이 즐겁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도장을 안 갖고 가 손으로 이름을 적으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로서는 달삯 35만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랄 수 있지만, 골목집을 곱게 가꾸면서 뿌리내려 온 이분들한테 앞으로도 튼튼하고 즐겁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내어드리는 선물로 여긴다면 아무것 아닌 돈이라고도 여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 주제에 무슨 베풂이 있겠느냐만, 그저 이만큼이라도 나누면서 우리 어버이를 떠올리고, 우리 어버이와 비슷한 또래인 할매 할배를 생각하면서 하루 한삶을 고맙게 맞아들이자고 생각합니다.


 (3)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을 말하는 《우애의 경제학》


 1888년에 태어나 1960년에 세상을 떠난 ‘가가와 도요히켜(賀川豊彦)’ 님이 1936년에 내놓은 책 《우애의 경제학》이 나라안에 처음으로 옮겨졌습니다. 자그마치 일흔 해나 묵은 책입니다만, 여느 ‘고전’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묵은 세월’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깊고 너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천 해가 훨씬 넘은 세월을 ‘묵었’으나, 참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루 읽히듯, 《우애의 경제학》 또한 사람이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흔 해가 넘은 책임에도 기꺼이 옮겨서 읽을 만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 내 조상은 봉건사회에서 19개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커다란 집과 많은 하인을 두었다. 그러나 아무 사랑도 없는 커다란 집에 사는 일은 내게는 지옥이었다. 내 가족은 부자였으나, 그들의 행동양식은 가혹한 것이었다. 나는 밤낮으로 울면서 세월을 보냈다 ..  (18쪽)


 가가와 도요히코 님은 목사이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분이었고, 가난한 이웃한테 전도를 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때에는 반전운동을 하면서 옥살이를 했고, ‘가난을 떨치자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만으로는 안 된다’고 깨달으면서, ‘올바른 소비자-생산자 운동’을 일으키고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듭니다.

 이 책 《우애의 경제학》은 바로 낮은자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협(생활협동조합)을 꾸려 서로 돕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밝힙니다. 생산은 어떻게 소비는 어떻게, 그리고 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생협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돈이 많다고 이룰 수 없는 생협이요, 또한 돈을 벌자고 하는 생협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생산자 스스로 참다이 생산을 하면서 일하는 보람을 얻고, 소비자 스스로 올바르게 소비를 하면서 제 삶을 한껏 넉넉하게 꾸리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있다고 더 잘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니요, 빈손이라 하여 못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님을 들려줍니다.


.. 우리들은 부자만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자선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의 지원 기초는 더 굳건하게 된다 … 우리가 있어야 하도록 생활하면 식량 결핍의 위험은 없다.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탐욕이다. 사람은 사치와 미식을 갈망하고 돈을 갈망한다. 그것이 투쟁과 알력을 일으킨다 ..  (160, 167쪽)


 나라안에는 ‘우찌무라 간조’라는 이름은 제법 알려지기는 했으나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알의 밀》이나 《신과 걷는 하루》 같은 책, 또는 《사선을 넘어서》 같은 책이 알려지고 읽히면서 ‘하느님과 예수를 따르는 믿음을 바탕으로 저마다 제 삶터에서 바른 길을 찾아 즐겁게 어우르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조곤조곤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1990년대 접어들어 처음으로 《우애의 경제학》이 나오기는 했습니다만(1993년에 《사선을 넘어서》가 다시 옮겨진 뒤로는 이번이 첫 책).

 그리고, 이번에 나온 《우애의 경제학》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분이 ‘하느님 사랑’만 외친 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외치는 까닭’을 보여주는 첫 책이라 손꼽을 수 있고, ‘하느님 사랑은 어떻게 외쳐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 사랑을 참되이 이루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첫 책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키우는 믿음이 아닌 사람을 키우는 믿음이어야 하며, 모든 독재권력을 물리치는 믿음이어야지 사람을 억누르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신조만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조나 교리와 함께 사회에서 속죄애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 20세기에는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적 공산주의는 다함께 포기해야 한다 ..  (6∼7쪽)


 지금 우리 식구는 두 군데 생협에 회원으로 들어가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있습니다. 쌀은 홍성 풀무학교생협에서 받아 먹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생협 먹을거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옆지기가 생협 물건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깨우쳐 주어, 뒤늦게 알아차리라 함께하고 있습니다.

 으레 생협 물건은 ‘비싸다’고 여기곤 하지만, 비싼 물건이 아니라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러 주는 값’이 붙은 물건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르면서 ‘싼 물건을 억수로 쟁여 놓고 먹지 않게 되’니, 몸이며 마음이며 살림살이이며 한결 넉넉하고 따뜻해진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알맞는 만큼 밥을 먹으면 되며, 우리 식구들한테 알맞는 만큼 돈을 벌면 됩니다.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즐기고, 어느 만큼 넘치면 넘치는 대로 나누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더 먹으려 하고 더 가지려 하고 더 쓰려 하니까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더 나누려 하고 더 함께하려 하며 더 흐뭇하고자 한다면, 저절로 생협 회원이 되거나 생협 물건을 가까이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종교가 가르치는 슬기이기도 하지만, 종교 없는 사람 스스로도 옳고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된 종교란 종교라는 울타리가 없고, 참된 사람이란 종교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이란 가난한 자리에 나란히 서면서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즐거움을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기에. (4342.5.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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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배우는 자의 권리를 찾아서
츠지모토 마사시 지음, 이기원 옮김 / 지와사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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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01 - 학교를 다니며 자유와 창조를 빼앗긴다
 : 츠지모토 마사시,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책이름 :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 글 : 츠지모토 마사시
- 옮긴이 : 이기원
- 펴낸곳 : 知와사랑 (2009.3.30.)
- 책값 : 13000원


 (1) 자전거 타는 어린이는 자전거 타는 어른이 된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집부터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동무나 형이나 누나나 동생을 본 일이 없습니다. 자전거를 탄다 하면 집 둘레 골목길이나 아파트 주차장 같은 데에서나 탈 뿐이었습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집과 학교를 자전거로 오간 동무나 선후배를 본 일은 없습니다. 딱 한 번, 새벽에 신문배달 하는 동무가 자전거 타고 신문 돌리는 모습을 본 일이 있을 뿐입니다. 1994년에 잠깐 대학교에 들어가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때까지 대학생 동무나 선후배 가운데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자가용 끌고 학교 오는 사람을 본 적은 있습니다.


.. 지금의 우리는 교육이라면 언제나 학교교육을 생각한다. 학교가 널리 보급되어 있고 서양의 근대 학문을 전제로 성립한 학교가 가장 보편적인 교육 수단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일본에서도 겨우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근대사적 산물이다 … 모든 아이가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근대 공교육 제도의 사상은 오랜 역사의 눈으로 볼 때 최근에 나타난 상당히 편협한 사상이다. 그렇기에 공교육 제도를 자명하다거나 최상의 교육 형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  (8, 196쪽)


 자전거를 타고 학교나 일터를 오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학생이나 회사원이 생각이 밝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집과 학교 사이, 집과 일터 사이가 십 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면 걸어서도 오갈 수 있는 한편 자전거를 타고 오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와 같은 길은 자가용이든 버스든 전철이든 타고 오가기보다는 오로지 우리 두 다리를 믿고 오간다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고.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학교길이나 자전거를 타고 삼십 분 남짓 들이는 회사길은 조금도 시간을 ‘길에 내버리는’ 일은 아닐 터이라고.


.. 데나라이쥬크에 다닌다는 것은 어느 데나라이 선생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데나라이쥬크라는 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학문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어느 선생의 제자로 들어갈지는 배우는 쪽의 의지로 결정하였다. 선생의 인격, 서도의 유파, 글솜씨, 사람들의 평판 등을 여러모로 고려했을 것이다 … 가이바라 에키켄은 데나라이 선생을 올바로 선택하는 것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에키켄은 선생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교육과 학습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 교사와 아이의 관계는 결코 제도적인 관계가 아니라 신뢰와 존경으로 맺어진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 쥬크는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어떤 규제도 없이 자유로웠다 … 아침 몇 시에 등교하는지 그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각자 가정의 생활시간 안에서 아침식사를 마치는 대로 등교한다 … 언제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기본적으로 배우는 이의 의사에 달렸으며 존중되었다. 교사는 학습하는 주체의 주문에 맞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  (30∼31, 33, 34∼35쪽)


 국민학교 적 동무, 중고등학교 적 동무, 대학교 적 동무, 그리고 군대와 회사에서 만난 동무 가운데 새롭게 ‘자전거를 타겠다’며 나선 사람은 다섯손가락으로 꼽지 못합니다. 모두 꼽으면 두엇쯤?

 곰곰이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자전거 타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전거 타기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자전거모임에 들어가면서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자전거모임에라도 나가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모임에 나간다 하여도 자전거 사랑을 키우는 사람보다는 쉬는날에 가끔 자전거 굴리며 놀러다니는 테두리에 머무는 사람이 거의 모두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자전거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올바르고 살가운 말’에 익숙하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올바르고 살가운 말을 나누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곤 합니다. 어릴 적부터 바른 말은커녕 알맞거나 마땅한 말을 듣거나 읽거나 말할 겨를이 없었다면, 나이가 들어 국어학자가 되고 교수나 강사가 된다 하여도 말씀씀이며 말매무새고 아름다운 쪽으로 거듭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데나라이쥬크에서 아이들이 이혼장 쓰기까지 배웠던 것이다. 아이니까 아직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발상은 애당초 없었다.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배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 개별적인 자기학습 시스템이 일반적이었던 데나라이쥬크에서는 원칙적으로 경쟁 원리는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속도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되었다. 어느 정도의 학습이 필요한가는 아이들의 능력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 부모의 생각 등에 따라 각기 달랐기 때문에 학습자는 스스로가 혹은 그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배우면 되었다 ..  (45, 48쪽)


 아이들이 어릴 적에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제대로 배우기 어려울 뿐더러 여러모로 힘들기 때문에 어릴 적에 가르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면, 영어만 어릴 적에 가르쳐야 좋을까요. 영어 아닌 다른 이야기는 어릴 적에 가르칠 만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영어 한 가지만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다른 모든 이야기는 안 가르쳐도 괜찮을까요.

 착한 마음씨랄지, 따순 마음결이랄지, 넉넉한 마음밭이랄지, 푸진 마음그릇이랄지, 깊은 마음씀씀이랄지를 어릴 적부터 온몸에 고이 배어들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을 올바르게 꿰뚫어보도록 어릴 적부터 슬기롭게 이끌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껴안을 수 있게끔 어릴 때부터 꾸밈없이 어루만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들 어른이 아이 앞에서 ‘교육’이라는 말을 꺼내고 싶다면 말입지요. 우리들 어른이 아이를 ‘학교’에 넣으려 한다면 말입지요. 이 나라에 ‘교육부’가 있고, 교육부장관이며 교육감이며 교장ㆍ교감ㆍ교사가 있다면 말입지요.


.. 내제자가 식사 시중을 드는 중에 스승의 마음을 읽는 것이 샤미센을 연주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직접적으로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러나 스승을 섬기면서 샤미센을 연주하는 스승의 리듬이나 숨소리,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까지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면 높은 경지의 예술에 오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제자가 스승으로부터 깨달아 알아차리는 능력은 일상생활의 시중이든 예술의 수련이든 간에 차이가 없다. 예술을 수련할 때만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떠난 일상의 장에서도 끊임없이 스승의 숨소리까지 느끼려는 노력이야말로 내제자가 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 스승은 실제로 해 보일 뿐이다. 그러고 난 후에는 제자가 직접 스승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해 보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노력을 거듭해 가는 수밖에 없다 … 스승이 가르쳐 주는 것을 제자가 기다렸다가 그것을 배운다는 수동적인 방법은 아니다 ..  (184∼186쪽)


 자전거 타는 어린이는 자전거 타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어린이는 자전거를 타지 않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동무들을 사랑하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어린이는 세상사람과 이웃 모두를 사랑하며 어깨동무할 줄 어른으로 커 단다고 느낍니다. 어린 나날부터 거짓말이 아닌 참말로 생각을 나누고 키운 사람일 때라야, 뒷날 정치꾼이 되든 공무원이 되든 지식인이 되든 무엇이 되든, 거짓말 아닌 참말로 사랑과 믿음을 고이 베풀 줄 알게 된다고 느낍니다.


 (2) 맞고 자란 어린이는 때리는 어른이 된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교사한테 흠씬 두들겨맞았다고 떠올립니다. 더 어릴 적에도 어머니한테 얻어맞지 않았으랴 싶으나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초등학교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떠올리는 1980년대 인천 국민학교는 1학년이고 6학년이고 가리지 않고 머리박기나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나무막대기나 밀걸레막대가 부러지도록 두들겨팼습니다. 손바닥이나 종아리는 아주 가벼운 매질이었고,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놓고도 ‘평등’이라 할 분이 있을까 궁금한데, 매질 앞에서는 늘 평등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공부 좀더 잘하는 아이와 학교 임원인 아이와 뭔가 있는 아이를 빼놓고는.


.. 근대가 되면서 아이와 부모는 학교 시간에 맞춰 자신들의 생활시간을 결정해야 했다 … 지금의 학교 수업은 일제수업 시스템으로 등교 시간이 제각각이면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학교 수업 시간에 맞출 수밖에 없다 … 일제수업은 가르치는 쪽이 정한 커리큘럼을 따른다. 그것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반면, 아이의 학습을 아이 자신이 아니라 가르치는 쪽이 정하게 된다 ..  (33∼35쪽)


 중고등학교 때에 ‘체벌 아닌 매질’을 놓고 학급토론 비슷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 교사는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치며 ‘일본사람은 조선사람을 두들겨패야 말을 잘 듣는다고 말했다’며, 이런 말이 얼마나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는가 하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이런 말을 하면서도 우리한테 휘두르는 매질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라는 데에 한동안 몸담을 때에 선배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얼차려를 시켰고, 군대에서는 계급에 따라 아주 마땅하다는 투로 주먹다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회로 돌아와 회사에 다닐 때에는 얼차려나 주먹다짐은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푸대접이 있었으며, 귀에 거슬리는 욕설과 인신공격이 있었습니다.

 모습을 조금씩 달리할 뿐, 어린 나날부터 이날까지 제 둘레에는 온통 폭력이 감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주먹질이 될 수 있고, 국가보안법이 될 수 있으며, 어처구니없는 집임자 폭리일 수 있으며, 난데없는 재개발과 철거일 수 있는데다가, 날벼락 같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될 수 있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으로 몸에 배인 것은 선이든 악이든 자각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 소유한 천성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에키켄은 행동은 선천적인 천성이라기보다는 습관, 즉 생후 교육에 의해 몸에 배는 것이 많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분명한 자각 없이 이루어지는 모방과 숙달의 과정이야말로 인간 형성의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했다 … 아이에게 부모는 최초이자 최대의 환경이지만,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이 인적 환경이 아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가 자각하여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규제하면서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환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150, 156쪽)


 크고작은 폭력에 길들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는 힘에 눌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보다 여린 이웃을 억누릅니다. 우리보다 고단한 이웃을 들볶습니다. 우리보다 낮아 보이는 이웃을 등처먹거나 울궈먹습니다. 우리보다 못 배운 이웃을 깔보고 업신여깁니다.

 오래도록 폭력에 길들다 보니, 주먹질 폭력과 입질 폭력과 따돌림질 폭력 따위가 수없이 판치고, 이러한 폭력을 우리 아이들한테까지 차곡차곡 물려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엄마 말 안 듣는다’느니 ‘아빠 말 안 듣는다’느니 하면서 아이 스스로 싱그러이 피어나는 꽃망울을 밟거나 찢거나 꺾고야 맙니다.

 왜 아이들은 ‘엄마 아빠 말을 고스란히 들어야’ 할까요. 왜 아이들은 엄마 말이든 아빠 말이든 ‘옳은 말이면 옳게 받아들이고 그른 말이면 그릇되었기에 바로잡거나 고쳐서 곰삭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요. 왜 아이들은 어느 누구 말이라 하든 ‘아름다운 말과 살가운 말을 찾아나서거나 알아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가요.


.. 커다란 책가방과 다 들어가지 못한 교재를 몇 개의 손가방에 나누어 담고는 무거워 보이는 가방들을 밑으로 축 늘어뜨린 채 등하교하는 조그마한 일본의 초등학생들을 보라 ..  (201쪽)


 아이들을 좁은 교실에 몰아놓고 가르치자니 교과서를 쓰게 됩니다.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쓰자니 시험점수에 목매달게 됩니다. 시험점수에 목매달게 하자니 교칙을 세우고 교복을 입히고 도덕을 가르치면서 국민의례를 시킵니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한 가지 틀에 얽매이게 됩니다. 홀가분한 삶터를 못 보게 됩니다. 정답이라는 올가미에 갇힙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과 슬기를 모두어 어깨동무하는 물줄기를 못 보고야 맙니다.

 그런데 그토록 아이들을 다잡아 놓는 교과서는 고등학교를 마치기만 하면 쓰레기로 내버려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하느님처럼 떠받들리던 교과서이건만, 입시를 치르고 나면 헌신짝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옳고 바르며 알맞다는 이야기를 담아 아이들 누구한테나 가르쳐야 하는 책이 교과서라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성경 하나를 온삶 바쳐 거듭 읽듯, 교과서 또한 내 아이한테까지 물려주면서 가르칠 만한 앎이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 결국 대학 관계자는 물론 국민 대다수는 내심 지금의 대학 입시와 그것을 위한 공부를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 현행 입시는 학습 능력이 높은 학생을 선택하는 시스템으로서 매우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 수험 세계는 경쟁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서 습득하려는 실력이란 수험 실력 외에는 없다. 그 실력의 배후에 사상적인 의미 부여 같은 것은 없다. 일류 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공리적인 목표가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일본의 학교 교사는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아이들 측에서 보면 교과서를 배우는 일이 목적이므로 교사는 그를 위한 가이드에 지나지 않는다 … 사실 교사도 ‘교과서를 가르치는’ 편이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 그러나 결국 그것이 교사를 나타하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  (205, 222, 229∼232쪽)


 맞고 자란 어린이는 때리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옳게 배우며 자란 어린이는 옳게 가르치며 나누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이 배우며 큰 어린이는 아름다움에 사랑과 믿음을 담뿍 싣는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제길과 제자리를 어릴 때부터 스스로 찾도록 배운 어린이는, 어른이 된 다음 맑은 윗물이 되어 아랫물 또한 맑게 흐르도록 뒷배하는 착한 이가 된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건 안 보내건, 우리들 어른 된 사람한테 주어진 몫이라면, 우리 어른 스스로 올바른 어른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어린이로 살아가도록 손을 맞잡는 데에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어른을 보고 배우는 어린이일 테니까요. 어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흉내내는 어린이요, 어른들이 나누는 사랑을 고스란히 따르는 어린이이며, 어른들이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사랑하면 아이들 또한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크고자 하는 어린이일 테니까요.


 (3)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책


 일본에서 나올 때 붙은 책이름은 “배우는 자의 권리를 찾아서”였다고 하는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책을 읽습니다. 우리가 굳이 일본사람이 예부터 공부해 온 길을 알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우리 길을 찾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는 “배우는 사람이 누릴 권리를 찾는” 일은 틀림없이 값이 있다고 느끼면서 집어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교육이 뒤틀렸다고 느낍니다만, 일본 또한 일본 스스로 일본 교육이 뒤틀렸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책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는 우리한테 우리 앞길을 살며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읽습니다.


.. 서점의 앞쪽에는 언제나 수험 참고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험 참고서는 전부 자습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시험 공부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직 텍스트를 반복하는 학습이다 ..  (203쪽)


 저는 일본에 꼭 한 번 가 보았습니다. 저한테 돈이 있다면 몇 번 더 가 보고 싶은 일본인데, 둘레에서 일본을 다녀온 분들 말씀을 듣거나 제가 보았던 일본을 떠올리면, ‘일본 책방에서 수험 참고서는 그리 안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를 쓴 분은 “서점의 앞쪽에는 언제나 수험 참고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기는, 이렇게 말할 까닭이 있습니다. 일본 교과서를 보신 분이 있는가 궁금한데, 일본은 교과서를 아주 빼어나게 잘 만듭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재미없고 따분하게 만든 책이 일본 교과서’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교과서는 어떠하느냐? 일본 교과서 발가락 때만큼도 좇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 교과서를 들여다보아야 ‘일본 교과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터이나, 일본사람들은 제 나라 일본이라는 ‘앞선 책나라’를 헤아린다면 ‘교과서를 너무 못 만든다’고 늘 뉘우치면서 고쳐 나가려 합니다. 이와 달리 우리 나라 한국에서는 ‘교과서를 제대로 만드는지 안 만드는지’조차 헤아리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가 또한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엉터리 줄거리를 담는다 하여도 한결 슬기롭고 알차고 싱그럽게 엮어내는 손길마저 없어요.


..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는 신체상의 구제를 사소한 부분까지 정해 놓고,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복을 정하고, 일정한 두발 형태를 강요하고, 혹은 여학생의 치마 길이나 주름의 숫자, 남학생의 바지 형태나 길이, 신발이나 양말의 형태, 색깔 등을 규제하고 있다 … 의복이나 머리 모양 등은 본래 아주 기본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한 통제가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개성 존중 교육을 추구하면서 이와 정반대로, 학교생활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용인되고, 그것을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 단체수업의 방법으로 아이들 수십 명의 개성을 어떻게 육성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그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개인의 의사에 따라 서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로 규정된 우연적인 관계이다 ..  (242∼243, 256쪽)


 아이들한테 사입혀야 하는 학교옷이 수십만 원이라면서, 학부모 된 분들은 한결같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러면,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안 입히면 됩니다. 학교옷을 왜 입혀야 하느냐고 따져야 하며, 꼭 학교옷을 입혀야 하면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옷을 나눠 주고 입도록 하라고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어버이도 아이들한테서 학교옷을 벗기지 않습니다. 먹혀들지 않을 소리로 생각하기도 할 테지만, 미운털 박히기 싫을 뿐더러 아이들 스스로 ‘예쁘고 멋지고 다리 길어 보이는 이름난 회사’ 학교옷을 입고 싶어합니다.

 아이들한테 학교옷을 입히고, 머리길이를 따지며, 신발이 어쩌고저쩌고 배지와 이름표가 이러쿵저러쿵하는 나라에서는 자유란 없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 푸른 나날을 학교에서 지내는 사이 ‘빼앗기는 자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유뿐 아니라 민주와 평화와 평등과 창조와 통일을 빼앗기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이, 아이 부모 된 분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토록 한 나라 사람들 모두를 바보로 삼으려고 하는 ‘겉보기 자유민주주의’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 두 나라만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아이들 옷을 ‘틀에 가두어’ 놓겠습니까. 세계 어느 겨레에서 아이들 몸을 ‘틀에 매어’ 놓겠습니까.


.. 물론 번교에 따라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영민함과 둔함의 차가 있었고 진도도 다르고, 사용하는 텍스트나 학습 부분도 다르기 때문에 일제수업은 불가능했으며 단시간의 개별 지도와 혼자 행하는 비교적 장시간의 자습 활동이 기본이었다. 이 점은 어떠한 번교라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학교처럼 연령, 학년에 따라 정해진 일정한 커리큘럼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마다 이해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각자의 속도로 학습하며, 차이에 따라 개별의 학습과 지도가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75쪽)


 앞으로 누군가 쓸는지 모르는데, “한국사람은 어떻게 배웠을까?” 같은 책이 나올 날을 기다려 봅니다. 그리고,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에 걸쳐, 우리들 한국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도록 길들여지는가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줏대를 찾거나 키우면서 바르고 곱고 맑은 사람이 되자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다룰 만한 우리 이야기책을 기다려 봅니다. ‘의무 교육’이 아닌 ‘자유 교육’으로 우리한테 ‘의무’가 아닌 ‘자유’를 심는 배움길에서 우리 손으로 새 세상을 힘차게 가꾸고 일으킬 빛줄기가 우리들 누구한테나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4342.5.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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