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 할아버지 사계절 그림책
장주식 글, 최석운 그림 / 사계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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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런데 ……
 [그림책이 좋다 64] 장주식+최석운, 《강아지똥 할아버지》



- 책이름 : 강아지똥 할아버지
- 글 : 장주식
- 그림 : 최석운
- 펴낸곳 : 사계절 (2009.5.1.)
- 책값 : 9800원


 (1) 돌아가신 넋을 기리는 일이란


 2007년 5월 17일, 그러니까 꼭 나흘이 지났습니다만, 이날은 어린이문학을 해 온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날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지 벌써 이태가 되었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할아버지 이름은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또렷하게 마음과 머리에 새겨 놓습니다. 앞으로 우리들 이름은 하나둘 잊힐 테지만, 할아버지 이름은 더욱 또렷이 살아남으리라 봅니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니요, 할아버지가 써낸 책이 많이 팔려서는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 ‘이름 안 알려진 여느 사람’ 마음자리 그대로 살아가면서 우리 이야기를 조곤조곤 글로 남기면서 즐거이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 《강아지똥》이나 《몽실 언니》나 《하느님의 눈물》 들을 높이 추어올립니다만, 할아버지 삶과 삶자락과 삶결을 헤아린다면, 추어올려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렇게 추어올려야만 비로소 참뜻이 살아난다 생각한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데,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당신이 거룩하거나 훌륭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 삶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당신 삶을 고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곰삭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할아버지라 해서 안 아프지 않으며 안 힘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올 때면 으레 들려주던 “내 대신 아파해 달라”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고무호스를 몸에 끼워 오줌을 빼내야 하는 아픔을 여러 열 해에 걸쳐 견디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란 섣부른 엄살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 몸에 꽂는 고무호스 때문에 아프지만, 당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남과 북으로 갈리며 미워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 총을 들이밀거나 칼부림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서로 돈을 더 움켜쥐며 빼앗으려고 주먹다짐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도무지 아파할 일이 없을 듯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대고 더 몸부림치고 더 발버둥치고 더 용을 쓰다가는 제풀에 겨워 고꾸라지고 자빠지고 엎어집니다. 그러면서 울부짖습니다. 정작 아파 죽을 노릇인 사람은 홀로 골골대고 있는데, 돈 때문에 이름 때문에 힘 때문에 또 뭣 때문에 아프다는 까닭을 대며 시골집 단칸방 할아버지한테 찾아와서 이야기를 여쭙니다.


.. “베지 말아요! 이 대추나무를 베지 말아!”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어. “허 참.” 사람들이 톱질을 멈추고 혀를 끌끌 찼지.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꼭 끌어안고 버티니 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결국 대추나무는 살아남았지.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 ..  (10쪽)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마냥 답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아파하건 이름 때문에 아파하건 힘 때문에 아파하건 아픈 사람들이니까요. 몸뚱이는 더없이 튼튼하고 주머니는 그지없이 두둑하면서도 마음은 가없이 가난한 이네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이이들한테는 다른 어떤 도움말보다 마음밥이 되는 도움말을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갈무리하면서 당신 삶을 꿰뚫는 아픈 생채기를 들추고 헤집고 쑤시면서 적바림하는 이야기꽃으로 태어나도록 했습니다. 





 《꽃님과 아기양들》이니 《사과나무밭 달님》이니 《까치 울던 날》이니 《벙어리 동찬이》이니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이니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니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이니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니 《바닷가 아이들》이니 《점득이네》이니는 이와 같이 새빛을 얻었습니다.

 아파할 까닭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 몸에 깃든 아픔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끼면서도 내 몸이 얼마나 아프냐고 다시금 생각하지만, 아파 죽겠다고 까무러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나이에 꼴까닥 하고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은 이렇게 아프다 하여도 안 죽고 더 오래 살고 있으니 당신 몸에 찾아와 떨어지지 않는 아픔이란 참말 보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다시금 힘을 내어 《무명저고리와 엄마》이니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이니 《우리들의 하느님》이니 《한티재 하늘》이니 《깜둥바가지 아줌마》이니 《밥데기 죽데기》아나 《비나리 달이네 집》이니 《죽을 먹어도》이니를 써내거나 고쳐 냅니다. 마지막으로 《랑랑별 떼떼롱》을 내놓고 나서는 손을 놓으셨습니다만, 할아버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느꼈다면 아무런 글줄을 적어 내려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신 스스로 아픈 가운데, 당신마냥 아프다 하는 숱한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있던 까닭에, 내 아픔과 사람들 아픔을 곰곰이 되새기고 들여다보면서 당신 마음을 달래고 이웃사람 가슴을 달랠 이야기보따리를 주섬주섬 여미어 냈구나 싶습니다.


.. 할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밝고 우스운 말도 참 잘 했어. 그런데도 슬픈 이야기를 많이 쓴 건, 할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였어. 지구 저쪽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났다거나 어린아이들이 포탄에 맞아 다쳤다는 기사를 보면 할아버지는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곤 했지. 죽어가는 동물이나 식물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했어. 사람들이 욕심껏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쓰느라 동물들과 식물들 몫을 다 빼앗는다고 말이지. 할아버지는 ‘나라도 덜 쓰며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헤진 옷 한 벌도 몇십 년 동안 누덕누덕 기워 입었어 ..  (30쪽)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찾아뵌 2004년과 2005년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언제나 글로만 만나던 분을 두 눈과 온몸으로 부대낄 수 있다니 설레는 한편으로, 몸이 아파 고단한 분을 찾아가는 일은 썩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픈 할아버지를 귀찮게 할 마음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 몸은 어떠셔요? 오늘은 밥 맛있게 드셨어요?” 하는 인사 한 마디 나눌 수 있다면 할아버지도 가끔 말문을 트면서 “오늘 햇볕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든지 “집 뒤 나무에 열매가 가득 열렸는데 하나도 따먹을 수가 없어” 같은 이야기를 웃음어린 목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만나자’가 아니라, ‘책을 읽으며 마음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마주보며 마음으로 만나자’가 될 때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아도 좋고 마주보지 못한 채 책과 책으로 이은 만남으로만 남아 있더라도 좋습니다.

 두 번 찾아뵈며 찍어 놓은 사진 몇 장을 오랜만에 더듬어 봅니다(제가 찾아간 까닭은, 다른 분들이 찾아갈 때 할아버지 사진을 찍어서 남겨 놓아야 한다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진기자로 따라간 셈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당신 얼굴은 찍히고 싶지 않다고 넌지시 손사래를 치면서, 그보다는 다른 데로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이 머리를 써서 기막히게 만들었다는 ‘만년 빨래집게(굵은 전기줄을 알맞게 잘라서 꼬아 놓은 것)’를 찍으라는 둥, 박하풀을 찍으라는 둥, 주전자를 찍으라는 둥 ……. 





 그무렵뿐 아니라 다른 분(어른)들이 찾아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으레 비슷비슷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게 보면 안 돼요.” 하는 말씀을 자주 했는데, 동화 할아버지를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하게 볼” 구석이 없다기보다, 동화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며, 동네 할아버지와 매한가지인 사람임을 느끼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이 세월 저 세월 견디고 부딪히고 부둥켜안아 오면서 머리카락 한 올 두 올 빠지고 허옇게 세어 버린 다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곱씹습니다. 스스로한테 주어진 삶을 고맙게 사랑하고 반갑게 끌어안을 때에는 누구나 동화이든 소설이든 빛고운 문학을 맺을 수 있고, 굳이 책이라는 물건으로 담아내지 않더라도 이웃이나 식구나 동무하고 오순도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헤아립니다.


 (2) 권정생 할아버지를 말하는 그림책이란


.. 예순 살쯤 되었을 무렵에 할아버지는 세상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어. 그동안 동화를 여러 편 써 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을 좋아했거든. ‘몽실 언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황소 아저씨’, ‘비나리 달이네 집’ 같은 동화들이 다 할아버지가 쓴 이야기들이야. 슬프고도 아름다운, 뭐랄까 …… 말하자면 찬란한 슬픔 같은 이야기들이지 ..  (23쪽)


 권정생 할아버지 삶자락을 기리는 뜻으로 그림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강아지똥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 첫 책 이름이 《강아지똥》이고,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강아지똥〉이었기에 이처럼 이름을 붙였구나 싶습니다. 또, 다른 작품보다도 그림책 《강아지똥》은 아이들한테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넘기는 동안 ‘왜 강아지똥 할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강아지똥이 뭐 어때서? 강아지똥이 뭐 어떻다고?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서 자주 나오는 몇 가지 짐승이 그림책에 함께 나옵니다. 이를테면 강아지라든지, 토끼라든지, 누렁소라든지, 새앙쥐라든지. 그리고 난남이를 업은 몽실이까지.

 그렇지만 이 짐승들 모습이 그리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 나오는 그 강아지’ 같지 않습니다. 강아지라고 그렸으나 강아지조차 아닌 ‘도사견’으로 느껴집니다. 갑자기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무서운 얼굴이요 눈매요 몸집입니다. 토끼라 하면 으레 ‘흰토끼’를 그리는 우리들이 되었겠습니다만, 멧토끼가 이처럼 눈처럼 새하얀 토끼였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누렁소는 논밭을 갈며 굵은땀 흘리고 제 새끼 잃어 서글픈 누렁소가 맞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른들이 돈 놓고 돈 먹겠다 하는 싸움소가 아닌가 싶어 몇 발자국 뒤로 떨어지고픈 느낌입니다. 누렁소 등판에 올라탄 새앙쥐는 새앙쥐가 아닌 새끼돼지 같아 보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도 그릴 수 있’고 ‘저렇게도 그릴 수 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나오는 짐승들은 ‘그림 그리는 분들 생각과 눈썰미와 마음밭에 따라 다 다르게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그림책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강아지똥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번 판처럼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장주식 님이 말하는 대로 “찬란(燦爛)한 슬픔” 같은 이야기가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이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거듭 생각해 보아도,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맑은 눈물’과 ‘따뜻한 웃음’을 담은 ‘옆집 할아버지 살아온 이야기’였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과 동무 할매 할배한테까지도 구수하게 나눌 수 있는 글줄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우리가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하늘나라에서 느긋하게 쉬셔요. 할아버지네 엄마가 살고 있을 그 먼 나라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피눈물도 괴로움과 따돌림도 싸움도 없이 언제나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과 어깨동무만 있을 테지요.’ 하는 마음을 담아내려 한다면, 이참에 나온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어딘가 바람이 빠지거나 곁길로 샜거나 한눈을 팔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11쪽 그림을 보면, 권정생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베지 말라며 부둥켜안았다고 하는데, 옆에 붙은 글에는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라 되어 있으나, 11쪽 그림 어디에도 흉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부둥켜안은 자리가 톱날로 벤 자리라 가려졌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에 드러누운 할아버지 젊을 적 모습(5쪽) 또한 여러모로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일부러 엉성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 우듬지가 이 그림책과 같은 모습일는지 궁금하고, 할아버지 몸이며 발을 보면서 왜 이렇게 그리려 했을까 싶어 궁금합니다. 7쪽에 나오는 풀빛 새를 보면서도 깜짝 놀랍니다. 몸빛이 풀빛인 새가 있었던가요? 글쎄.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풀빛 깃털인 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었었는가요? 다른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책에 나오는 ‘복실이’란 강아지는 하나도 복실이답지 않아서 징그럽습니다. 그린이께서 ‘나라밖에서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셨는지 모릅니다만,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름 안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책입니다. 할아버지를 알고 있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되새기도록 이끌어 줄 그림책이며, 할아버지를 아직 모르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도 할아버지 따순 사랑과 믿음을 조곤조곤 보여주고 들려줄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이루는 글은 ‘글쓴이가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며 《어린이와 문학》이라는 데에 실었던 글’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기림글(추모글)로 기림책(추모 그림책)을 엮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책은 얼마나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릴 수 있을까요. 어느 대목에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림책 사이에 끼워진 쪽지(출판사에서 마련한 홍보쪽지)에는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에게 귀한 정신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 겁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 옳은 말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고마운 마음밥을 얼마나 받아먹으면서 책이라는 열매로 다시 꽃피워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좋은 책 하나 엮으려 했던 일꾼들한테 씁쓸한 말씀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책은 올해가 아니라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다음해가 아니라 그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이태가 되는 올해에만 만들어야 하지 않고, 세 해째 되는 해, 또는 열 해째 되는 해, 또는 스무 해째 되는 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섣부른 생각을 앞세우는 책이 아니라, 참된 마음에서 솟아나는 싱그러운 풀기운에 따라 즐거이 나누는 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4342.5.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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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쓴’ 책이지만, ‘가슴에는 안 남는’ 책
 [잠깐 읽기 34] 어슐러 K.르귄, 《날고양이들》



- 책이름 : 날고양이들
- 글 : 어슐러 K.르귄
- 그림 : S.D.쉰들러
- 옮긴이 : 김정아
- 펴낸곳 : 봄나무 (2009.4.15.)
- 책값 : 1만 원


 (1) 잘 쓴 작품이면서 ‘가슴에는 안 남는’ 작품


 지난날 《날개 달린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나 모두 나오지는 못했다고 하는 ‘어슐러 K.르귄’ 님 책이 《날고양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옮겨졌습니다. 판이 끊어진 예전 책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분이 많았을 테며, 르귄 님 작품은 널리 사랑받고 있는 터라, 이 책 《날고양이들》 또한 두루 사랑받는 작품으로 우리 품에 안깁니다.


.. 뭔가 생각하던 셀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는 좋은 손을 만나면 다시는 사냥 나갈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 하지만 나쁜 손은 개보다도 못하다고 했어.” … 해리엇이 오빠 제임스에게 속삭였습니다. “야아, 아이들 손길이 따뜻하고 기분 좋아.” ..  (38, 49쪽)


 어린이책(판타지 동화)으로 갈래를 나눌 《날고양이들》은 책날개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르귄은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보석 같은 책을 썼다(퍼블리셔스 위클리)’라든지 ‘이 시대의 것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 타인과의 차이에서 오는 자긍심과 소외감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부드럽게 일깨워 주는 책(뉴욕타임즈 북리뷰)’이라든지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매력적인 책이다. 쉰들러는 섬세한 펜선과 수채화 기법으로 아름답고 진지한 판타지 속의 날고양이들을 보여 준다(북리스트)’라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이렇게 짤막하게 적힌 추천글이 아니더라도 《날고양이들》은 금세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이야기흐름이 빠릅니다. 글은 단출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양이’를 내세워 우리 삶터를 구석구석 살피거나 훑는 눈매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나와 남이 어떻게 다른가를 돌아보는 한편, 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삶터를 어떻게 이루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살며시 느끼게 합니다. 사람 스스로도 사람 삶터인 도시에서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있는 가운데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얕고 안타까운 발자국을 걱정하는 가운데, 우리가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은 누가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펼쳐 보입니다.


.. 하늘을 나는 얼룩고양이들을 처음 본 순간, 아이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철창에 가두거나, 서커스나 애완동물 쇼에 내보내거나, 실험실로 보내거나, 돈벌이에 이용하거나, 아예 팔아넘길까 봐 겁이 났거든요 ..  (55쪽)


 틀림없이 《날고양이들》은 우리한테 빛줄기 가득 담긴 구슬 같은 책이 아닌가 느낍니다. 우리 모습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앞날을 찬찬히 헤아리도록 이끄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홀딱 읽고 난 이 책을 다시 펼쳐서 살피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어, 벌써 이야기가 다 끝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뒤끝이 없는 깔끔한 작품이기는 한데 왜 이리 허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르귄이라고 하는 분이 굳이 ‘날고양이’라는 판타지로 이 작품을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판타지를 쓴다 하여 달라질 대목이 없으리라 느끼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그예 ‘걷기만 하는 사람’ 이야기를 펼친다 하여도 《날고양이들》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 “아아, 우리 아기 고양이는 떠나야 한단다. 아기 고양이가 무사하다는 것도 알았고, 너희들이 잘 돌봐 주리라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아기 고양이의 안전뿐이란다. 날개 달린 고양이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이 도시에는 없어. 얘들아, 그건 너희도 알지?” … 하늘 높이 날던 제인이 개들 가까이로 내려가면, 개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사팔눈이 될 때까지 짖어댔습니다. 꽤 재미있었습니다만, 제인은 아무 데서도 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인은 생각했습니다. ‘날개가 있으면 외톨이로 지내야 하는 걸까?’ 날개 달린 고양이 제인은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들은 날개가 있었지만, 날개 달린 고양이를 보고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올빼미와 매는 위험했어요 ..  (94, 163∼164쪽)


 문득, 만화책 《기생수》가 생각납니다. 만화책 《기생수》나 동화책 《날고양이들》이나 빼어난 생각힘으로 놀랍게 펼쳐내는 줄거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만화 《기생수》는 내 둘레 고마운 분한테 여덟 권 한 질(44000원)을 선물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처럼 선물하고프다’는 쪽이지만, ‘동화 《날고양이들》(1권 마무리, 책값은 1만 원)은 굳이 선물해 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무엇이 두 작품을 이처럼 다르게 느끼게 하는지, 왜 두 작품을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작품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외곬로 기울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씹습니다.

 다른 이들은 ‘더없이 좋다’거나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책을 나 혼자 ‘그리 시덥잖은데?’ 하고 느끼는 마음그릇은 아닌가 곱씹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다음에 마음 한구석을 쩌렁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책이었는걸요. 크게 쩌렁 울리지 않더라도 살짝 통통 울리지도 못한 책이었는걸요.


.. 제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왜 있는지 알아!” 셀마가 물었습니다. “왜 있는데?” 제인이 소리쳤습니다. “하늘을 날라고 있지요!” 제인은 곧장 하늘 위로 날아올라 두 번 옆으로 구르고, 한 번 앞으로 구른 다음, 잠시 날갯짓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알렉산더의 잔등 위로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 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는데, 왜 아무 데도 가지 않지? 어디로든 날아가서 무엇이든 볼 수 있을 텐데?” 오빠 로저가 말했습니다. “에이, 제인, 너도 왜 그런지 알잖아.” 언니 해리엇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날개 달린 고양이를 발견하면, 동물원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오바 제임스가 말했습니다. “아니면 실험실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맏언니 셀마가 말했습니다. “남과 다르면 살기 어려워. 남과 다르면, 아주 위험할 때도 있어.” ..  (156∼157쪽)


 그러고 보면, 만화 《20세기 소년》을 보다가 뒷권으로 갈수록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짙게 느끼던 때하고 비슷합니다. 좀 묵은 작품이지만 《Z 마징가》를 보던 때에는 참 재미있다고 느끼며 여러 번 다시 보았고, 《초인 로크》나 《바벨 2세》 같은 작품 또한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보았습니다. 모두들 ‘터무니없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놀랍다’고 느낄 만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나 글감이나 만화감을 ‘터무니없거나 놀랄 만한 데’에서 잡아챘다고 해서 ‘훌륭하거나 가슴 찡하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멋지거나 좋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뛰어난 붓솜씨를 보여준다고 해서 뛰어난 그림이 되지 않는 셈입니다. 뛰어난 짜임새며 눈길로 잡아챈 사진이라고 해서 뛰어난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글씨를 곱게 잘 쓴 글이라고 해서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는 셈이고요.


 (2) 가슴에는 안 남으나 ‘되새기는’ 이야기


 그렇지만 글쓴이 르귄 님은 우리한테 아낌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쉽게 놓치거나 언제나 잃고 있는’ 삶자락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사이사이 톡톡 건드리듯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 모두 곱게 잘 커 준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인 부인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몰래 속을 태웠습니다. 이 동네의 환경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자동차 바퀴와 트럭 바퀴가 온종일 지나다녔습니다.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굶주린 개들이 어슬렁거렸습니다. 신발과 장화가 끝도 없이 걸어가고, 뛰어가고, 짓밟고, 걷어찼습니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점점 사라졌고, 먹을 것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참새들은 오래 전에 다른 데로 이사갔습니다. 시궁쥐는 난폭한 데다 위험했고, 새앙쥐는 비쩍 마른 데다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 도시 비둘기 한 쌍이 먼지 구름을 보고 날아왔다가 한 마디씩 하고 날아갔습니다. “빈민가를 또 철거하는구나.” “이게 발전이란 거야.” ..  (12, 67쪽)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고,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키는 길이란 아주 쉽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꾸는 길 또한 참으로 수월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알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쉬워도 안 하는 일이요, 수월하여도 껴안으려 하지 않는 일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여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다 함께 뜻을 모아 할 수 있는데, 혼자서도 안 하고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할 마음조차 없는 일이기조차 합니다.


.. 보드라운 땅, 이상야릇한 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사 남매가 알던 땅은 포장도로, 아스팔트, 시멘트뿐이었습니다. 마른 흙, 젖은 흙, 죽은 나뭇잎들, 풀, 나뭇가지들, 버섯들, 벌레들, …… 이런 땅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냄새가 났습니다. 작은 샛강도 있었습니다 ..  (23쪽)


 어쩌면, 아무래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르귄 님 작품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더없이 낯익으면서 쉽게 받아들여 읽을 수 있었는데, 언제나 이와 같은 매무새로 살아가고 있는 터라 굳이 이런 작품을 읽지 않아도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또한,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을 알고 있으나 ‘먹고살기 바쁜데 어떻게?’라고 핑계를 둘러대기에 바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 작품조차 눈여겨보지 않고 가슴에 새기지 않습니다. 아예 읽을 마음조차 없어요.

 그러니, 이 작품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여도 허전합니다. 두루 읽히고 팔린다 하여도 씁쓸합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새책방 책시렁에서 새로운 책손을 만날 수 있다 하여도 허거픕니다.


.. 사라 (할머니)는 제인의 목에 감겨 있던 자주색 리본을 풀어 휴지통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저런 거 없어도 예쁘단다.” ..  (195쪽)


 출판사에서는 애써 펴내 주었고, 글쓴이 르귄 님 마음도 가없이 푸근하다고 느낍니다만, ‘판타지 옷’을 안 입어도 괜찮고 ‘이름난 작가 작품’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지 않아도 괜찮으며 ‘깔끔하고 예쁘장한 작품’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투박한 글이어도 괜찮고 어설픈 그림이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모자라거나 어설픈 작품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어리숙하거나 얕은 눈길이라도 재미가 없지 않아요.

 길은 지름길로만 가야 하지 않으며, 반드시 가장 빨리 거쳐가야 하지 않습니다. 100미터를 10초에 끊어야만 하겠습니까. 초중고등학교를 차근차근 밟아 대학교를 네 해 만에 마무리해야만 하겠습니까. 무슨 자격증이 있고, 어떤 예쁜 얼굴과 몸매가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 스스로한테든 우리 어버이한테든 넉넉한 돈이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없어도 괜찮고, 외려 없으니 즐겁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지없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할 만한 《날고양이들》가 아닌, 수수하고 곱지 않은 ‘길고양이들’이어도 반갑습니다. (4342.5.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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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님 책 가운데 내 책꽂이에 꽂힌 책을 살펴본다. 《장길산》이나 《모랫말 아이들》이나 《무기의 그늘》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들이 보이지만, 이런 책은 일찌감치 끈으로 묶어 구석진 자리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지 오래. 내 책꽂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황석영 님 책은 오직 하나, 1985년에 형성사에서 펴낸 《객지에서 고향으로》.

 묵은 책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어 오랜만에 펼쳐든다. 내가 이 책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만난 때는 1998년이니 열한 해가 지났다.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던 그무렵에도 황석영 님을 놓고 여러 말이 많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과 함께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우리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살며시 건네는 책이라고 느끼며 곰곰이 새겨 읽었다.


.. 구공탄은 연탄공장의 기계가 찍어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깊숙한 땅속에서 캐어져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처럼 단순한 사실을 연탄집게로 집어올릴 적에 단 한 번이라도 되새겨 본 사람들은 드물 것이리라. 마치 하늘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다는 도회지의 바쁜 월급장이의 깨달음처럼, 이 뒤늦은 고마움은 어딘가 슬프기까지 한 것이다 ..  (31쪽/1973년)


 나로서는 열한 해 만에 펼치는 책. 그러나 열한 해 앞서 이 책은 판이 끊어져 있었다. 1985년에 처음 나온 책이었으니 1990년대가 저물녘에는 판이 끊어질 만도 하지. 그런데 황석영 님 다른 책은 수없이 다시 찍고 거듭 찍고 새로 나오고 하는 가운데, 오직 이 녀석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왜일까? 왜 이 책은 되살리지 않았을까?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이제는 황석영 님 생각하고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아서? 스스로 내버리는 책이라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황석영 님 삶이요 문학이며 생각이요 넋이라서?


.. 확실한 것은 그들이 파괴된 환경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인가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가 많이 누리는 게 있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돌려주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자각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보편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집단적인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야말로 진정한 근대화이며, 사회적 진보였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73쪽/1973년)


 빛바랜 갱지로 된 책장을 만지작거린다. 빛바랜 옛책에 담긴 이야기는 그야말로 예스런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오늘’을 살아가려는 황석영 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지난날’을 살았다는 황석영 님을 내세우는 이야기는 되고, 훈장처럼 가슴에 달아 놓는 이야기는 될 터이나,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이웃하고 소담스레 나눌 이야기는 못 될는지 모른다.

 어쩌면, 황석영 님은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을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구경하기는 했어도, 당신 몸을 내맡겨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하고 ‘함께 살아가기’는 안 하지 않았을까. 낮은자리 이웃하고 손을 마주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뜨겁게 얼싸안거나 뒹굴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어느 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서 글만 쓰고 있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이 너머로는 손뼘 하나만큼도 넘어갈 뜻이 없지 않았을까.

 독재에 무너지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나쁜법에 옥죄이며 제도권교육에 목졸리는 가운데 사회 푸대접과 따돌림에 앓고 있던 사람들하고는 아주 ‘다른 곳’에서 살아가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돈에 밟히고 이름값에 눌리며 힘에 밀려난 사람들하고는 사뭇 ‘다른 나라’에서 지내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 힘센 아이가 그네를 독차지하면 저 혼자 실컷 타도록 버려 두고, 그네에서 벗어나서 다른 놀이를 창조해 내자. 그 아이의 힘을 통해 이익을 보려 하지 말자. 제일 힘없는 꼬마를 잊지 말자. 그와 언제나 같이 있자. 그러는 가운데 구슬과 고리는 보배로 변할 것이다 ..  (99쪽/1983년)


 말이란,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모음이 아니다. 글이란, 손으로 끄적이는 기호모음이 아니다. 내 삶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말이요, 내 삶에서 샘솟는 외침이 글이다. 돈을 바라면서 할 수 없는 말이요, 이름을 바라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힘을 얻자고 할 수 없는 말이며, 한자리 차지하자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사랑이 스미도록 하는 말이다. 믿음이 깃들도록 하는 글이다.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말이다. 믿음으로 껴안는 글이다. 나한테 있는 모든 힘을 바쳐 사랑스러운 손길을 내미는 말이고, 내가 낼 수 있는 젖먹던 힘을 용을 쓰듯 짜내어 나누는 믿음직한 몸짓이다.


.. [황석영] 어떤 형태로든 민중을 신비화하는 것에는 저도 반대합니다. 제가 해남에서 경험한 것이지만, 농민들이 어떤 때는 더 영악하고 현실에 순응적입니다.
[황지우] 우리가 병든 만큼 민중도 병들어 있어요.
[황석영] 그렇지만 민중은 운동의 힘줄입니다.
[황지우] 힘의 저장소로서의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도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운동에는 지식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야 합니다. 《장길산》에서의 김기와 같은 예외적 존재도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의 지식인에 대한 태도는 불신이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더군요.
[황석영] 제가 지식인을 혐오한다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저도 지식인의 한 종자인데요. 다만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  (188쪽)



 그런데 1985년에서 스물네 해를 훌쩍 지난 2009년에 다다른 황석영 님은 우리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시인 황지우 앞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하고 힘주어 말하던 그 황석영 님은 사람들 앞에서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황석영 님 옆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있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있는가. 황석영 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보이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보이는가.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다시 펼쳐 읽는 동안, 소설쓰는 황석영 님은 틀림없이 예나 이제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 어김없이 예나 이제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우리한테 건네는 말마디와 글줄은 똑같지 않다고 느껴진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탓일까. 내가 책을 제대로 못 읽은 탓일까. 책에 담긴 이야기가 거짓말이었을까. 책이란 세월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슬어 버리는가. 흘러간 책에 담은 이야기는 쓰레기통에 내던져야 하는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이어오면서 우리한테 ‘참된 목숨 하나 고맙게 받으며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거룩한 사람 길’을 찾고 느낄 책이란 이 세상에 없는가.

 한숨 한 번 쉬고 물 한 잔 마시면서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인다. 둘레에서 적잖이 내다 버리기도 하고 불사르기도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차마 내다 버리지도 못하겠고 불사르지도 못하겠다. 오히려 더 꽁꽁 붙잡아 두고 간직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책을 내다 버리거나 불사를 때마다 이런 분들은 더더욱 말바꾸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며 핑계를 둘러댈 테니까. 뜬소리와 뜬생각과 뜬몸짓으로 우리 눈을 홀리고 귀를 어지럽힐 테니까.

 나는 《월간 조선》 1980년대치와 조갑제 님 책과 이문열 님 책, 그리고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책 옆에 황석영 님 책을 나란히 꽂아야겠다. (4342.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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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이라고 하는 소설쓰는 분이 ‘변절’을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내 보기로는 황석영 님은 ‘변절’을 하지 않았다. ‘변절(變節)’을 말하려 한다면, 이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살필 노릇이다.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바꾼”다고 하는 ‘변절’인데, 황석영 님한테 ‘절개나 지조’는 무엇이었을까. 황석영 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자리나 마음밭은 무엇이었을까. 황석영 님은 어떤 매무새로 문학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우리한테 들려주려고 했을까.

 황석영 님을 아끼고 사랑하고 믿는 분이었다면, 마땅히 황석영 님 글이든 책이든 작품이든 무엇이든 살피면서 이분 매무새와 넋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이분 매무새와 넋을 고이 살펴 왔다면, 황석영 님은 ‘변절’이 아닌 ‘당신 삶결’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황석영 님이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어깨동무를 한다 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안타깝다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늙은’ 황석영 님은 ‘어린’ 황석영이나 ‘젊은’ 황석영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일는지 모른다. 스스로 ‘가난한’ 마음자리를 잃고 ‘돈많고 이름높고 힘있는’ 마음자리로 갈아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갈아타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어리거나 젊을 때에도 ‘돈-이름-힘’에 어느 만큼 눈독을 들이고 있지 않았겠는가. 이들이 처음부터 ‘돈-이름-힘’에 매이지 않으면서 홀가분한 넋과 얼로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외쳤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갈아타기를 했다기보다는, ‘가난한’ 마음밭을 조용히 일구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고 해야 옳지 싶다. ‘가난한’ 마음밭이 얼마나 내 삶과 이웃 삶을 너그럽고 즐겁게 북돋우는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해야 맞지 싶다. ‘가난한’ 마음밭으로 살아가는 당신 삶은 당신한테뿐 아니라 우리 모두한테 기쁨과 보람을 나누는 일음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 알맞지 싶다.

 내남없이 ‘세상에 둘도 없는 구라쟁이(이야기꾼)’라고 하는 황석영 님인 줄 안다. 당신으로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무엇인가를 할 때에 우리 나라를 아름다이 일으키거나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무렴. 이렇게 손잡는 일이란 잘못이 아니다. 손을 잡건 발을 잡건 옳게 일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누구하고 손을 잡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손을 잡느냐이며, 손을 잡고 무엇을 어떤 모습으로 하느냐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손을 맞잡은 다음 ‘이명박 뜻대로’ 한다면, 또는 ‘황석영 이름값-돈값-힘값을 더 높이려는 뜻대로’ 한다면, 황석영이라고 하는 분은 아주 ‘개밥’일 뿐일 테지. 저 스스로 제 삶에 임자가 못 되고 ‘손님’이 되어 버린 불쌍한 떠돌이일 테지. 입은 살았되 몸뚱이가 오롯이 살아 있지 못한 한낱 ‘돼지꿈’일 테지. (4342.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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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퐁 Pong Pong 3 - 완결
오자와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착한 사람, 착한 만화, 착한 웃음과 눈물
 [살가운 만화 47] 오자와 마리, 《PONG PONG》



- 책이름 : PONG PONG (1∼3)
- 글ㆍ그림 : 오자와 마리
- 옮긴이 : 서수진
- 펴낸곳 : 대원씨아이 (2008.9.15.∼2009.4.15.)
- 책값 : 한 권에 4200원씩



 (1) 착한 만화 즐기기


 만화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밤이 새는 줄 모르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만화가 비슷하거나 겹치면 여러 날 지치지 않고 이야기나무를 심기도 합니다. 그런데 둘레에 만화 좋아하는 분들이 많기는 하여도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분은 생각 밖으로 그리 안 많고, 순정만화를 좋아한다고 하여도 제가 즐기는 순정만화와 그분들이 좋아하는 순정만화가 어느 만큼 벌어지기도 합니다.

 나라안 만화로는 김진, 원수연, 박연, 황미나, 김혜린, 강경옥 들을 즐겨 보았습니다. 나라밖이라기보다 일본 만화로는 오사무 야마모토, 준코 카루베, 니노미야 토모코, 미츠하시 치카코, 오자와 마리 들을 즐겨 보고요. 이 가운데 미츠하시 치카코 님 작품은 나라안에 제대로 옮겨지지 않아 거의 헌책방에서 일본판으로 만나 책장을 넘기는데, 일본글을 읽을 줄 몰라도 그림결로도 따뜻함과 수수함을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글은 그 나라 글을 따로 익히거나 번역책을 읽어야 하지만, 사진과 그림과 만화는 그 나라 글을 모르고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함께하면서 즐길 수 있다고 할까요.


..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고, 완전 데이트하기 딱 좋네. 이런 날, 이런 냄새 나는 사내놈들 틈바구니에서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하필 하고 많은 학교 중에 이런 남학교에 왔나 몰라. 이런 산속에선 땡땡이쳐 봐야 할 일이라곤 나물 캐기밖에 없을 텐데.’ ..  (1권 10쪽)


 다만, 순정만화를 그리며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분들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즐기지는 않습니다. 저한테는 저대로 좋아하는 만화가 있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딱히 ‘순정’만화를 즐긴다기보다, ‘착한’ 만화를 즐겼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란마 1/2》이나 《도레미하우스》 같은 만화를 보면서도 이야기가 퍽 착하다고 느끼면서 좋아했는데(어찌 이 만화들이 ‘착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만화란 누구나 저 보고픈 대로 보고 느끼고픈 대로 느끼기 나름이라는 말씀을 올립니다), 저로서는 착하지 않은 만화에는 그리 눈길이 끌리지 않습니다.

 《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 같은 작품은 퍽 눈여겨볼 만하다고 느끼면서 즐겨 보기는 했지만, 좀 뾰족뾰족하다고 해야 할까, 어지럽다고 해야 할까,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얼마나 뒤틀렸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니 그 느낌 그대로 만화를 그릴밖에 없었을 텐데, 한 번 덮고 난 뒤로는 다시 들추지 않습니다. 《따끈따끈 베이커리》는 얼핏 느끼기에는 착할 듯 보였지만, 정작 권수를 더해 가면서 짓궂고 억지스러운 대목이 많아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와 견준다면 《딸기 100%》가 한결 나았다고 보는데, 야자와 아이 만화 가운데 《NANA》가 퍽 많이 사랑받고 있지만, 저한테는 《NANA》나 《파라다이스 키스》보다 《내 남자친구 이야기》와 《천사가 아니야》가 훨씬 사랑스럽고 즐거웠습니다. 






.. “미안해. 오오시마. 내가 가서 설명할게. 단장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지금 바로.” “아냐, 됐어.” “그치만, 그동안 팀을 꾸리고 열심히 애쓴 건 넌데.” “우리 모두지. 모두가 같이 노력한 거잖아.” ‘아아. 바로 이 미소야.’ ..  (1권 41쪽)


 생채기를 남기는 줄거리를 다루기 때문에 ‘착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두 갈래만이 아니기 때문이요, 세상을 둘로 가른다 할 때에도 ‘까망과 하양’으로만 가를 수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흥미 님이 그린 《디스》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우리 집》은 ‘그림감을 무엇으로 잡든 그림결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서 따스함과 수수함은 사뭇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송채성 님이 그린 《취중진담》도 그렇습니다. 《쉘 위 댄스?》나 《미스터 레인보우》도 그렇고요. 가난, 아픔, 외로움, 성 정체성, 푸대접, …… 세상을 가르는 수많은 잣대를 만화로 다루든 사진으로 다루든 글로 다루든, 우리가 받아들여 삭여내기 나름입니다.

 그예 뾰족뾰족하게 마주할 수 있으나, 거울처럼 튕겨낼 수 있습니다. 그지없이 넉넉하게 품에 안을 수 있으며, 스스럼없이 껴안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척 흘려보낼 수 있는 가운데, 깨닫지 못하며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맨발의 겐》처럼 아주 투박하면서도 거칠게 ‘전쟁과 평화’를 담아낼 수 있지만, 《머나먼 갑자원》이나 《도토리의 집》처럼 참으로 부드러우면서 살가이 ‘전쟁과 평화’란 무엇인가를 넌지시 느끼도록 할 수 있어요.


.. “후유코 누나는 했어요?” “어?” “노력요. 토고 선배한테 왜 좋아한다고 말 안 해요.” “그야, 예쁜 앨 좋아하니까. 그리고 약해져 있을 때를 이용하는 건 솔직히 안 내켜. 대학 준비로 바쁘기도 했고.” “그건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억지로 고백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서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포기하고. 그런 건, 무지 꼴사나워요.” ..  (1권 71∼72쪽)


 《게임방 소녀와 어머니》 같은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우리 깜냥껏 재미난 틀을 마련한다면 몹시 애틋하면서 맑은 웃음을 티없는 눈물과 함께 선물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린이가 3권으로 너무 짧게 끝내 버린 대목이 아쉽지만, 한국 만화밭으로는 3권까지 그린 대목이야말로 놀랍다 할 수 있어요. 권수가 늘어날수록 재미가 떨어져 이제는 더 안 보지만, 《알바고양이 유키뽕》 같은 일본 만화는 참 놀라웠습니다. 나라안에도 《납골당 모녀》를 그린 강현준 님이 《cat》을 그렸는데,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꽤 많으면서도 이렇게 재미와 웃음이 톡톡 묻어나게끔 살뜰히 그리는 만화쟁이는 너무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이 굳었다고 할까요, 느끼는 가슴이 닫혔다고 할까요.

 그렇다 하여 ‘착한’ 만화를 그리는 분들은 바라보는 눈이 말랑말랑하고, 느끼는 가슴이 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하게 그릴 줄만 알고 알맹이가 없는 만화도 많으니까요. 그린이 스스로 우리한테 할 말이 있는 가운데 착하게 엮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흐뭇하면서 즐거운 만화, 두 번 세 번 거듭 들여다보며 즐기는 만화가 된다고 봅니다.

 《빈곤자매 이야기》라든지 《빈민의 식탁》 같은 작품이 이런 얼거리에 걸맞는 ‘착한’ 만화입니다. 《여자의 식탁》도 돋보이는 착한 만화이며, 같은 이름으로 된 책이 많은데, 이와시게 타카시 님 《흐르는 강물처럼》도 눈여겨볼 작품입니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따뜻함과 넉넉함과 살가운 들을 듬뿍 담으며 우리한테 ‘야무진 알맹이에 책장 넘기는 재미’를 한껏 북돋우는 작품입니다. 자전거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와 함께 《스피드 도둑》도 좋아하지만, 저는 《스피드 도둑》은 그리 내키지 않아요. 지나치게 ‘싸움을 붙이’고, ‘서로를 너무 미워한’다는 느낌이 짙으며, ‘더 세고 튼튼하고 커야’지 좋은 듯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 ‘역시, 오타쿠틱해. 그래도 좋아. 그냥 좋아. 이유 없이 좋아.’ ..  (1권 83쪽)


 애장판으로 다시 나와도 널리 사랑받는 《아기와 나》 같은 작품 또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착한’ 만화입니다. 《최종병기그녀》를 그린 다카하시 신 님 작품 《좋은 사람》은 책이름부터 ‘착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라고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할 말’과 ‘보여줄 이야기’가 뻔히 드러났어도 기쁘게 읽었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 님 《야와라》도 얼핏설핏 느끼기로는 ‘착한’ 쪽으로 흐를 듯했지만, 이 또한 《스피드 도둑》처럼 ‘더 크고 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루토》를 볼 때에도 기쁨이나 반가움보다다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느낍니다(틀림없이 《플루토》를 아주 좋아할 분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또한 저는 그리 좋아하지 않고, 잘 그리지도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톰’에서 밑생각을 따오는 대목이야 그린이 자유입니다만,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은 그냥 그런 ‘로봇’이 아니에요. 테즈카 오사무 만화에서 ‘아톰’을 비롯한 수많은 주인공에 어떤 마음과 넋이 담겼는가를 읽어내어야만, 또 느껴야만, 또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아톰을 따왔다’고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붓다》며 《불새》며 《뱀파이어》며 《노만》이며 《미크로이드 S》며 《아야코》며 《넘버 7》이며 《블랙잭》이며, 테즈카 오사무 님 만화에 남달리 스민 사랑과 믿음을 읽어내지 않고서 섣불리 ‘아톰’을 불러오는 일은, 우라사와 나오키 님은 당신 이름만으로도 사랑을 두루 받고 있지만, 스스로 어줍잖은 이름값을 좀더 높이려는 얕은 손길이라고 느낄 뿐입니다.


.. “상대팀 치어리더는 우리와 달리 전부 여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대. 우리 팀이 이기지 못하는 건 아마 그것뿐일 거야! 하지만 여장을 하면 틀림없이 그것도 문제없어! 적어도 관객을 웃기는 건 우릴 테니까!” ..  (1권 116쪽)


 《아기공룡 둘리》뿐 아니라 《아리아리 동동》이라든지 《일곱 개의 숟가락》이라든지 《소금자 블루스》라든지 《볼라볼라》라든지 《꼬마 인디언 레미요》라든지 《쩔그렁쩔그렁 요요》라든지 《미스터 점보》라든지 《오달자의 봄》이라든지 《자투리반의 덧니들》이라든지 《홍실이》라든지 《1남3녀 막순이》라든지 《날자 고도리》 같은 작품에 한결같이 흐르는 구수한 사랑과 뜨거운 눈물이란,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느끼고 네 가슴속에 살아숨쉬는 하느님을 만나는 반가움입니다. 이러한 반가움이 없이 그리는 만화라면 겉보기로는 착해 보이는 만화이지만, 속살은 하나도 착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백성민 님 만화를 날카롭고 무섭다고도 하던데, 《장산곶매》와 《삐리》와 《장길산》과 《백범일지》 들에 흐르는 붓질은 더없이 반갑고 기쁜 봄비와 같습니다. 《노을》이나 《부자의 그림일기》를 비롯한 ‘한국현대문학 단편선’ 같은 오세영 님 만화는 얼마나 따뜻하며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착한’ 만화였던가요.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잡아채는 손길만이 아니라, 우리 삶터 구석구석을 골고루 따스하게 보듬는 손길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만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이희재 님이 《간판스타》와 《제비전》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그리던 손길도 이렇게 따뜻했고, 이상무 님이 그린 《포장마차》도 이와 같이 부드러웠습니다.


.. “남자를 좋아해?” “아니. 그건 아냐. 그래서 밤새 고민했는데, 아마 너니까 좋아하는 걸 거야. 넌?” ..  (1권 192쪽)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저로서는 요즈음 한국 만화를 그리 즐기지 못합니다. 그나마 《내 어머니 이야기》 같은 작품이 나오고, 《옥상에서 보는 풍경》 같은 작품도 나오며, 《꽃》과 《노근리 이야기》 같은 작품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말 한 마디 넣지 않아도 가없는 사랑과 기쁨을 ‘착하게’ 그려낸 에리히 오저 님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지, 아니 한국땅에 걸맞게 그려낼 누군가가 없을지 궁금합니다. 《아즈망가 대왕》이나 《요츠바랑!》처럼 꾸밈없이 우리 삶자락을 담아낼 만화를 아끼고 붙잡을 붓질은 언제쯤 이 나라에서 다시 꽃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길창덕 님처럼 단출한 붓질로, 윤승운 님처럼 시냇물 같은 붓질로, 또 김동화 님처럼 꽃잎사귀 같은 붓질로 착한 마음을 나누고파 하는 만화는 언제쯤 우리 삶터에서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2) ‘오자와 마리’가 바라보는 삶터


 착한 만화를 떠올리며 더듬다 보니 새삼 송채성 님 만화가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둘레에 아는 분들한테 가끔 송채성 님 작품을 선물해 주곤 하는데, 모두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고 “순정만화잖아?” 하면서 “난 순정만화 안 보는 줄 알면서 왜 이런 책을 읽으라 해?” 하면서 싫어했지만, 막상 만화를 다 보고 나서는 “이런 순정만화도 있구나.” 하면서 “다른 작품 더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송채성 님은 이승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2004년 3월에 저승사람이 되었습니다. 벌써 다섯 해가 지났으니 세월 참 빠르구나 싶은데, 착한 만화를 떠올릴 때마다, 또 《퐁퐁(PONG PONG)》 같은 만화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송채성 님 만화가 그립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송채성 님이 더 오래오래 살면서 당신 만화밭을 일구었다면, 당신 깜냥껏 《취중진담》을 그리고 《쉘 위 댄스?》처럼 두고두고 명작이라 할 만한 작품을 또 하나 낳을 수 있었을 텐데 싶습니다. 일본에서 오자와 마리 님이 《퐁퐁》을 그린다면, 한국에서 송채성 님이 ‘뭐뭐’를 그린다고 나란히 놓을 수 있었을 테고요.


.. “아, 새가 오네요?” “예. 전에 여기서 가게를 했던 사람이 매일 쌀이랑 빵부스러기를 창가에 올려놨던 모양이에요. 참새랑 개똥지빠귀가 지금도 잊지 않고 찾아오죠. 그래서 저도 예전 주인처럼 빵부스러기를 주고 있어요.” “멋지네요. 잘 먹었습니다. 커피, 정말 맛있었어요.” “또 오세요.” ‘엄마의 뜻밖의 일면을 알게 됐다. 재즈바에 있는 자그만 창문.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바구니에 있는 창문이라 낮에도 어두침침하고 별 의미 없는 창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미는 있었구나. 엄마도 남몰래 작은 정원같이 안정되고 조용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 거야.’ ..  (2권 28∼30쪽)


 만화 《퐁퐁》은 ‘남자로 태어났으나 성 정체성은 여자’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이런 이야기는 꽤 많다 할 수 있는데, 《방랑소년》도 같은 그림감을 다룹니다. 아쉽다면, 《방랑소년》은 권수를 거듭할수록 어영부영 실마리가 흐려지면서 재미가 떨어집니다.

 아직 우리 세상이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이 좀더 오래도록 길게 펼쳐지지 못하나 싶곤 합니다. 막힌 세상에서는 막히지 않은 꿈을 꾸기도 하지만, 막힌 틀에 매인 채 뾰족뾰족이로 에돌고 마는 사람이 꽤 많거든요. 고달픈 삶이기에 으레 고달픔을 얼굴 가득 담아낸 채 살잖아요. 고달픈 삶이기에 더더욱 홀가분함과 기쁨을 온몸 가득 펼치면서 살지 못하고 말입니다.


.. “오늘 시간 더 있어요?” “있어. 뭐 하고 싶은데?” “저기.” “말로 해. 눈앞에 있으니까.” “그, 그럼, 거, 걸으면서 얘기하기.” “나야 좋지만, 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예?” “얼굴이 빨개.” “아, 아픈 건 아니에요. 그건 아마, 아마.” “라면을 먹었기 때문에?” “예? 아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건 제가 선배를 좋아히기 때문이에요.” ..  (2권 77∼80쪽)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퐁퐁》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낱권으로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주인공 ‘라이조’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듯, 한 계단 두 계단 마음이 자라납니다. 조금씩 내 몸과 마음을 또렷하게 깨닫고, 차근차근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다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채 살아갈는지, 내 꿈을 접은 채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는지, 겉과 속을 하나로 모둔 채 살아갈는지, 세상 이끌림이 아니라 내 꿈대로 살아갈는지 찾아나섭니다.

 그러면서 부딪힙니다. 맨땅에 머리를 박듯, 달걀이 아닌 맨주먹으로 바위를 치듯 박고 넘어지고 까지고 긁힙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딪히면서, 다치면서, 아파하면서 ‘어린이’에서 ‘푸름이’를 거쳐 ‘어른’ 한 사람이 돼요.

 나를 속이지 않으며,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면서 남을 사랑하는 길을 찾습니다. 나를 믿으면서 남을 믿는 마음이 무엇인가 느끼고,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되도록 하면서 내 삶터에서 나 스스로 아름답고 내 이웃과 함께 모두가 아름다울 자리가 어떠한가를 배웁니다.


.. “난 이렇게 미키랑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게 좋았어.”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손을 잡으면 항상 꼬옥 마주 잡아 왔었지?” “응, 이런 식으로.” “그래 맞아. 나도 그게 좋았어.” “그건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길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이었기 때문일 거야. 미키랑 있으면 길 가운데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래서 이 손을 절대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건 역시 날 속이는 짓이었어. 마음 한구석에선,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미안해.” “하지만, 너한테 마음이 설렜던 거나, 네 덕분에 실연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거, 그리고 널 좋아했던 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어.” “응, 알아.” ..  (2권 155∼157쪽)


 《퐁퐁》 3권 마지막을 보면, 주인공 ‘라이조’보다 훨씬 늦게 제 삶과 모습을 느끼고 찾은 ‘토고’ 선배가 속으로 한 마디를 읊습니다. “다시 한 번 너를 만나 다행이었다.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라고.

 착한 만화 《퐁퐁》은 바로, 그린이 오자와 마리 님이 읽는이 우리 모두한테 마음을 건네고파 내놓은 작품입니다. 그린이가 건네고픈 마음이 사랑이었을는지는, 또는 믿음이었을는지는, 또는 다른 마음이었을는지는, 읽는이인 우리 스스로 헤아리고 곱씹고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3)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며


 저는 만화책을 볼 때면, 되도록 잠자리에서 홀로 조용히 보고자 합니다. 또는, 하루일을 마치고 보리술 한 병을 구멍가게에서 사다 마실 때 혼자서 고즈넉하게 보고자 합니다.

 웃음이 터져나올 때 누구 눈치를 안 보고 거리낌없이 웃고 싶거든요. 울음이 솟아날 때 누구 눈치 아랑곳 않고 스스럼없이 울고 싶거든요.


.. “그래서, 답은 나왔어요?” “아니.” “선배는, 뭐든 흑백으로 나눠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군요?” “맞아. 옛날부터 그랬어. 답이 안 나오면 잠을 못 자는 편이었지.” “그럼 역시, 제 존재 자체가 선배한테는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전 평생 회색이었으니까.” ..  (3권 18∼19쪽)


 실컷 웃게 하고 마음껏 울게 하는 만화는 책상맡에 한 해쯤 올려놓고는 하는데, 이렇게 올려놓으며 날마다 겉그림을 바라보고 때로는 선 채로 한 번 다시 넘기고 나서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쉽니다. 이 만화를 그린 분이 앞으로 어떤 새 작품을 내놓을지 기다려지면서 한숨이 나오고, 앞으로 이분을 비롯해 다른 분들이 다른 새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이 나옵니다.


.. “탈의실에 유니폼 준비해 놨을 거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올까? 남성용이든 여성용이든 입고 싶은 걸로 입어.” “예. 예?” “고등학교 때 치어리더복 입었었지? 신문에서 봤어.” “아, 그건 그냥 연출로.” “이쪽이야. 이게 여자 거고, 그 옆이 남자 거.” “농담 아니었어요?” “참고로 이건(내가 입은 옷은) 남자 거. 여자 걸 입을 때도 있지만, 거의 이걸 입어. 난 트랜스젠더거든.” “…….” “점장님은 개인을 존중해 주시지.” “여긴, 회색이라도 괜찮군요.” “회색?” “세상은 흑과 백만 인정해 주는 줄 알았어요.” “기왕 중간색을 지칭할 거면 흑과 백 사이보단 홍과 백 사이가 예쁘지 않겠어?” “홍과 백?” “장밋빛깔. 바로 그 입술색 말야.” ..  (3권 28∼30쪽)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면서 지난날 느낀 벅참과 설렘을 새삼스레 받아들이는 일은 즐겁습니다. 아마 언제까지나 이 마음이 고이 이어갈 수 있다면 참말 기쁠 테지요.

 그런데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스며든 좋은 ‘착한’ 만화 하나는 갑작스레 뚝 하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 하나가 나오기까지 그린이는 그동안 숱하게 습작을 했습니다. 다른 작품도 꾸준히 그리는 가운데 비로소 ‘즐겁고 반갑고 기쁘고 좋은 착한’ 만화 하나가 제 품에 안깁니다.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를 그린 카루베 준코 님이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를 그린 다음, 《푸른 하늘 클리닉》을 그려내듯, 그리고 또다른 작품을 빚어내려고 애쓰고 있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과 《니코니코 일기》를 그린 오자와 마리 님은 《퐁퐁》을 마무리지으며 《민들레 솜털》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을 다시금 끝내면 또다른 작품으로 우리한테 살그머니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고인 물이 아니니까요. 어느 누구든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요, 흐르는 사랑을 널리 나누어 주면서 새로운 사랑을 새삼스레 가슴에 담으면서 기다리니까요.

 착하며 아름다운 만화 《퐁퐁》을 더 오래오래 책상맡에 놓으며 거듭거듭 즐길 수 있습니다만, 또다른 착하며 아름다운 만화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책꽂이에 보기 좋게 꽂아 놓은 다음, 저부터 스스로 새로운 만화길을 찾도록 기지개를 켜야겠습니다. (4342.5.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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