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생활하기
최광호 지음 / 소동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 최광호, 《사진으로 생활하기》


- 책이름 : 사진으로 생활하기
- 글ㆍ사진 : 최광호
- 펴낸곳 : 소동 (2008.5.15.)
- 책값 : 16000원



 (1) 사진기를 든 손과 사진기를 쥔 마음


 그동안 잘 쓰고 있던 렌즈가 지난 8월 15일에 망가졌습니다. 어디 떨어뜨리거나 부딪히지 않았으나 망가졌습니다. 이 렌즈는 지난해 6월 25일에 열 번째로 제 품을 떠난 사진기(도둑맞거나 잃거나)를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로 떠나보낸 다음 새로 장만한 녀석입니다. 꼭 한 해하고 한 달하고 열흘 만에 망가진 셈입니다. 그동안 이 렌즈로 이만 장 남짓 찍었는데, 값싼 렌즈치고 잘 버티어 준 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비바람이 몰아치건 춥건 덥건 언제나 제 땀을 먹으면서 지내던 사진기요 렌즈입니다. 어떤 이는 제 사진기와 렌즈를 보면서 ‘너무 막 다루고 있지 않으시나요?’ 하고 묻는데, 저는 사진기와 렌즈를 막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한쪽 어깨에 걸쳐 놓거나 한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 자전거를 몰 때에도 목에 사진기를 걸고 언제나 찍을 수 있게끔 비옷 안쪽에 두고 있습니다. 몹시 추운 날 손가락이 얼어붙어도 맨손으로 사진기를 쥡니다. 장갑 낀 손으로 쥐는 느낌하고 장갑 낀 손으로 단추를 누르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사진을 찍을 때에는 으레 사진기를 겉옷으로 감싸며 걷지만, 겨울에는 온몸과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채 사진을 찍으며 사진기도 함께 벌벌 떱니다. 손가락은 얼어붙더라도 사진기는 얼지 않기를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여름에는 웃옷 안쪽에 사진기를 모셔 놓으며 몸으로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사진기만은 젖지 말아 달라며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마구 눌러대는 사진은 싫어합니다. 꼭 찍어야 할 만큼만 찍고, 한 번 찍은 사진은 되도록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고단하도록 돌아다닌다 해서 더 많이 찍어야 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고단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디지털사진기를 쓰는 매무새는 필름사진기를 쓰는 매무새하고 같습니다.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돈이 몇 백 원씩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허투루 사진을 날릴 수 없습니다. 또한, 허투루 찍었다가 날린다면, 이 사진을 지우느라 시간을 몇 초씩 버려야 하며, 이렇게 시간을 버리다 보면, 나중에는 잘못 찍은 사진을 지우느라 더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볼 ‘내 사진감’을 몇 초 동안 못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한 장을 찍건 열 장을 찍건 백 장을 찍건, 모두 ‘내 사진’이라 말할 수 있도록 빛과 셔터빠르기와 조리개값을 알맞고 올바르게 맞추어 찍어내려 합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까지 내 사진감이 내 눈길로 들어와 내 마음길을 거쳐 내 몸길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다스려 내려고 합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예쁜 햇살이 나를 반기기에 사진을 찍는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면 그 밥이 예쁘고 맛있어 또 찍는다 …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것이다. 사진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는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꾸준히 고민했다. 그래서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진 찍고 땀냄새와 생활이 배어 있는 사진을 찍자고 항상 주장해 왔다 … 나다운 방식으로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작업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다운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산다, 사진으로 사는 삶, 살다 보니 내 것이 되어 있는 나다운 삶, 내가 나다운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올바른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  (4∼5, 148쪽)


 지난해에 사진기를 열 번째로 도둑맞고는 힘이 쪼옥 빠졌습니다. 그동안 쓰던 사진기는 영영 다시 쓸 수 없을 뿐더러, 내 꿈은 파노라마사진기 장만할 돈은 다시는 못 모으겠다고 생각하니 무엇하러 사진을 찍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시 허리띠 졸라매고 몇 해 동안 돈을 모으면 사진기며 렌즈며 알뜰히 되살 수 있겠지만, 그 몇 해 동안은 사진하고 헤어져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기’를 떠올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돈 좀 있거나 힘깨나 씀직한 곳에 이래저래 편지를 띄워 ‘사진기를 빌릴 수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적금을 붓듯 다달이 조금씩 갚아 나갈 테니, 사진기를 ‘스물넉 달 갚기’로 팔 수 있는지, 렌즈를 ‘서른여섯 달 갚기’로 내어줄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그럴 수 있고, 저와 비슷한 까닭으로 사진기와 렌즈를 빌려 주십사 하는 분들이 많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때 옆지기는 ‘우리가 다른 일을 못해도 괜찮으니, 밥을 굶더라도 사진기부터 어떻게든 먼저 사자’고 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백팔십만 원짜리 캐논 엘렌즈에, 사십팔만 원짜리 니콘 에프엠 이번에, 또 디지털사진기까지 장만하랴 싶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주머니가 후줄근하면 어찌할 길 없는 노릇입니다. 시무룩하니 며칠을 지내다가 목포에 사는 형한테 도와 달라는 아쉬운 이야기 담은 편지를 띄웁니다. 어려울 때마다 늘 도움을 받아 미안하지만, 또 도와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스스럼없이 또 도와줍니다. 외려 그만큼만 보태 주면 되느냐고 걱정해 줍니다. 우리 식구가 힘들 때마다 보태 주는 손길이 고맙고 미안해, 새 디지털사진기 하나(캐논 450디) 장만할 만큼 빌리고, 렌즈는 번들이 아닌 녀석 가운데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진을 다시 찍으니 ‘사진을 아예 못 찍던 때를 생각하면 숨통이 트이고 살맛이 납’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신나고 즐겁게 찍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 렌즈로는 이만큼밖에 안 보이는구나. 예전 렌즈로는 훨씬 넓게 보였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예전 렌즈로 찍었다면 한결 잘 나왔겠지’ 하는 생각마저 자주 품었습니다.


.. 그 인상을 기록하다가 보면, 그 기념사진을 모아 작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꼭 이런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내 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12, 47, 55∼56쪽)
 





 이렇게 한 달쯤 보내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값싼 렌즈로 찍은 사진을 종이로 뽑아 보면서 ‘그럭저럭 잘 나왔네. 생각보다 꽤 잘 나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그동안 헌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숱한 사진을 하나씩 돌아보았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퍽 좋아하는 제 작품들(헌책방이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다름아닌 바로 오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값싼 렌즈와 값싼 사진기로 찍었던 녀석이 아니었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사진기와 렌즈가 없더라도 내가 바로 이곳에 늘 있는 가운데 찍은 사진이기에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반가이 여기는 작품이 아니었느냐고 되씹습니다. 비록 파노라마로 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 사진에는 내 눈물과 땀방울과 웃음과 손길을 골고루 담아냈다 한다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껴안아 주고 사랑해 주지 않았느냐고 되돌아봅니다.

 1998년 1999년 2000년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춰내며 들여다봅니다. 나한테는 돈도 없었지만 사진기조차 없어서 후배한테 빌려서 찍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나와 출판사에 들어간 뒤에는, 두 번째로 일한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사진기를 한 대 선물해 주어 그 장비를 몹시 고맙게 여기며 다루었습니다. 그때에도 제 사진기에 달린 렌즈는 퍽 값싼 녀석이었고, 그 뒤 이태 동안 푼푼이 모아 다른 사진쟁이들 발가락만큼 따라가는 장비를 헌 것으로 겨우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값싼 장비를 남한테 빌려서 사진을 찍었든, 여러 해에 걸쳐 푼돈을 조금씩 모아 마련한 조금 괜찮은 장비로 사진을 찍었든, 제 사진은 늘 한결같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한 장비를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진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또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봅니다. 저한테 사진을 처음 가르쳐 준 분은 저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장비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꽤 비싼 장비를 자랑하듯 만지작거리면서 수업을 들으면 당신이 미국에서 사진을 찍고 배우고 가르치던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1회용 사진기로도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는데, 한국 사진기자들은 수천만 원짜리 사진기로도 기념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다’고 말하며 나무랐습니다.

 우리들한테 저마다 제 사진감을 하나씩 붙잡고 이 사진감을 우리가 눈을 감는 날까지 놓지 말라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붙잡는 사진감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가 알맞거나 걸맞는지는 잠깐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화각’이라든지 ‘광각-망원’ 렌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필름 인화와 현상이라든지, 잘라내기(트리밍)라든지 숱한 사진솜씨 이야기는 한 가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여태까지도 이런저런 사진 잔솜씨는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갖출 까닭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솜씨 이야기는 ‘너희들이 집에 가서 시간 내어 책을 읽어 봐’ 하면서 끝냈습니다. 집에서 암실을 마련해 손수 만들어 보아도 좋지만, 그냥 사진관에 다 맡기고 길에서 사진기 부둥켜안고 너희들 사진감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까지 하곤 했습니다.
 





.. 기록이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찍는 사람도 대상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 한창기 사장은 그제야 껄껄 웃으며, ‘야, 최광호,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를 볼 줄 모르는군’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자기에도 앞뒤가 있으니, 그것부터 공부하라며 집으로 데려가 도자기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건 이렇게 찍어라, 또 이런 건 저기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 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방법 이전의 더 근본적인 관점과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전통 한옥을 좋아했던 한창기 사장은 그 후에도,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시골마을에서 예쁜 한옥이나 초가를 지나치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집 대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집을 둘러보면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  (64, 75쪽)


 사진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스스로 사진감을 제대로 찾아내고 알아내면서 지치지 않고 사진길을 걷도록 이끌’ 구실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우리 스스로 하나씩 알아 가면서 마련하면 될 뿐이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열한 해 앞서 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봅니다. 그무렵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총장님께서 뒤에서 저지른 비리가 말썽이 되어 날이면 날마다 대자보가 춤을 추고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친 집회와 싸움은 가끔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끝내 말썽 많은 총장을 물러나게 하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과 앞으로 이 대학교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들을 동판에 새겨 도서관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몇 해쯤 지나고 나니 모두들 이때 일을 잊어버렸고, 이때 학교에서 쫓겨난 분은 교육부장관 자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앞에 세웠던 동판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날 깨끗이 사라졌고, 후배들 어느 누구도 사라진 동판을 알지 못할 뿐더러, 열한 해 앞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집회를 하고 수업거부까지 하며 강의실 걸상을 모조리 건물 밖이나 운동장에 쌓아 두고 있던 그때, 그 사진학과 강사(이제는 정교수가 됨)는 우리들한테 큰소리를 쳤습니다. ‘너희 대학교 총장 비리 문제는 잘 알고 있다. 나도 너희들 뜻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회는 너희가 밖에서 알아서 하고, 내 수업은 내 수업이니까 내 수업을 안 듣겠다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외치면서 수업을 하겠다고 버티었고, 그날 하루는 끝내 ‘해야 할 수업을 못했’습니다.

 이때 저는 강의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창문에 붙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아쉽게도 이때 찍은 필름은 잃어버렸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실랑이를 사진으로 담으며 조금 우쭐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실랑이나 이런 사진찍기는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뒷맛이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일까. 왜 그날 그 수업을 굳이 꼭 하겠다던 그 시간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그때처럼은 안 하겠지요. 그무렵 우리한테 조금 더 넉넉하고 느긋한 마음이 있었다면,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 총장 비리 말썽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과 모든 수업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 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수업을 안 듣기란 참 힘들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의실 수업이 아닌 길거리 수업이나 운동장 수업, 또는 다른 데에 가서 사람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 우리 수업을 조용히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건네면서 타협을 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사진가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사진에 자신의 인생과 사진을 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사진 찍기 때문이다. 사진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사진으로 세상 이야기를 나누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내가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내가 보기에 한국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사진이 사람들의 삶과 생활과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따로, 작품 따로, 이런 식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  (184, 186쪽)


 사진을 찍으며 늘 느끼고 배웁니다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델을 써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 해서 우리 생각과 느낌을 환히 담아낼 사진을 얻지는 못합니다. 살아가는 흐름을 거슬러서는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찍히는 사람이나 건물이나 풍경 앞에서 우악스럽게 군다 해서 이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늘 기다려야 하고, 뛰어들어야 하며, 어깨동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흐름을 우리 스스로 고이 헤아리면서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사진을 찍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이런 바탕을 마련한 다음 더 오랫동안 곰삭이고 껴안으면서 시나브로 좋은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는 솜씨를 굳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교실을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들을 때에도 사진 잘 찍는 이야기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다루는 우리 매무새를 배워야 합니다. 사진을 다루는 매무새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진기를 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학교나 강좌에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마음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하고 같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마음은 내 사랑하는 사람 손을 어루만지는 마음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사진이야기 《사진으로 생활하기》라는 책


 사진을 좋아하던 최광호 님은 어느새 사진을 배우려고 나라밖을 떠도는 사람으로 지냈고, 나라밖을 떠돌다 돌아온 한국땅에서 제 사진길을 꿋꿋이 가다가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습니다. 사진책 몇 권을 펴내기도 한 최광호 님은 ‘사진이 아닌 말’로 당신이 걸어온 사진길이 무엇이고 당신이 찍은 사진작품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붙잡은 사진기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습니다.


.. 그 당시 여의도에서는 반공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다. 기독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모여 하느님과 예수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반공을 앞세우는가 하면, 군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여의도에서 마포 지나 종로로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나는 거기에 물들지 않을 나다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전국을 방황하기도 했다. 사진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나를 갈구했던 것이다 …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사진가로서 최상의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사람, 멋있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에는 훌륭한 작품은 있는데 인생이 담긴 훌륭한 작가는 없다고. 그런데 일본에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사진가다운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개성 있는 작가들이 많다고 ..  (23, 93∼94쪽)


 사진쟁이 최광호, 또는 사진학과 교수 최광호 님이 쓴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읽어 보면, 맨 마음으로 쓴 글과 함께 술 한잔 걸치며 쓴 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최광호 님은 맨 마음인 채로 사진을 찍는 날이 있을 테며 술을 걸친 채 사진을 찍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맨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날이 있었을 테며,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던 날이 있었겠지요.

 어느 때 어떻게 찍었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잘 찍었건 못 찍었건, 찍힌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남깁니다. 찍은 모양새 그대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이야기를 남기고,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이야기를 남깁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은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랑을 사진에 담고,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으로 지내는 사람은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 그대로 사진에 제 느낌을 담습니다.

 감추려 한다면 얼핏설핏 감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감추면서 내보이는 작품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농사꾼 밀레가 추운 겨울날 손이 덜덜 떨리고 얼어붙는 가운데 주린 배를 붙잡고 그린 그림에 밀레가 겪은 가난함이 안 배어 있을 수 없습니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붙잡는 가운데 빛줄기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고흐 형제가 두 사람 힘으로 이루어 낸 그림에 둘이 겪은 외로움과 괴로움에다가 빛줄기가 안 담겨 있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일구어 내어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난 최명희 님 작품 《혼불》에 최명희 님을 비롯한 둘레 사람들 넋과 삶결이 안 스며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생활하기》에는 사진하고 서른 해 남짓 살아가고 있는 최광호 님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도 담기고 믿음도 담기며 미움과 아픔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이 깃들고 아련함이 깃들며 애틋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이 돈벌 욕심에 돈, 돈, 돈, 하지 가난은 오히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 …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자신있게 살 때만이 이 모든 것은 가능하고, 부족하기에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돈이 부족하면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돈 없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 … 가끔 아마추어들이 촬영하는 장소에 가 보면 사진기를 보물 다루듯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진기 망가질 것이 겁나서 저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사진기에 사람이 눌려 있음을 느낄 때,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  (35, 245쪽)


 지난달에,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공씨책방〉에서 《환희와 우정》(조선일보사,1988)이라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틀림없이 예전에도 곧잘 만났을 사진책이 아닌가 싶은데 여태까지는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 살며시 들어왔더라도 제 손은 가 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런 겉치레 사진책이 무슨 사진책이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꾀한 움직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 그늘진 자리를 감추는 이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씁쓸하고 안타깝다고 느끼면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사진책을 즐겁게 만지작거립니다. 무슨 꿍꿍이셈이 있든 없든, 사진은 사진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진에 새겨 놓은 꿍꿍이셈은 이러한 셈속대로 읽어내면서, 나 스스로는 꿍꿍이셈이 아닌 참사랑과 참믿음을 보여주거나 나눌 수 있도록 참삶을 가꾸며 참사진을 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올봄, 서울 봉천동(올해부터인가 ‘낙성대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봉천동’이라는 이름은 가난하다는 느낌이 사람들한테 콱 박혀 있다고 하면서)에 있는 헌책방 〈흙서점〉에서 《박상원-a monologue》(에디션 뿔,2009)라고 하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연기를 하는 박상원 님이 사진책을 펴냈다고 하니 뜻밖이면서 놀랐습니다. 펴낸 곳은 ‘웅진출판사 임프린트’라고 하는 곳입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면서, ‘이분은 이런 사진을 좋아하며 찍는구나’ 하고 느끼는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이렇게 좋은 꾸밈새로 세상에 또 하나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 하는 틀로 따져서 이 책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이만한 사진이 아니고서는 사진책으로 내 주기 어려운 우리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다 다름(다양성)’이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고, 우리 세상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왜 사진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은 사진을 왜 나누고 싶어서 사진을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구경꾼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남을 통해 자기 삶을 느낄 수 있기는 하나, 자신의 외로움과 자신의 이야기는 표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236쪽)


 올 1월에는 서울 동묘앞에 있는 헌책방 〈영광서점〉에서 1960년대 첫머리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을 세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두 권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국민학교 것인데, 파주에 있던 국민학교는 1960년대에 ‘수학여행을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 자취가 졸업사진책 뒤쪽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50년대 끝무렵에 ‘각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공원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멕아더동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봉공원으로 옮겨갔지만 이맘때까지는 자유공원에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공원에서 멕아더동상 앞에 서면서 묵념을 하고 놀이기구를 타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할까요. 그 다음에는 연안부두나 만석부두나 월미도 쪽으로 가서 배를 탑니다. 경기도 파주라면 뭍만 있는 땅이요 산과 들밖에 없을 테니, 인천 앞바다처럼 놀이기구에 ‘반공교육 하기 좋은 멕아더동상’에다가, 여기에 갯벌에 바다에 배까지 고루 있는 곳은 수학여행을 보내기에 딱 어울릴 만한 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졸업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은 나날을 보내던 인천 한구석을 조용히 돌아보았습니다. 벌써 예닐곱 달이 된 이야기이지만, 이 졸업사진책을 만나던 그날은 헌책방 골마루 한쪽에 선 채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이 졸업사진책은 그날 장만한 뒤로 여태껏 제 책상맡에 놓고는 가끔 들추어 봅니다. 들추어 보고 다시 덮을 때마다 ‘사진은 뭘까? 내 사진은 뭘까?’ 하고 거듭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사진으로는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는 사진이 아닌 신선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일상 생활에 대한 감동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 현실을 보며 감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보던 사물을 새롭게 볼 줄 아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 좋은 앵글이란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가장 잘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시각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  (270쪽)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지난해 여름에 장만했습니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장만하던 그날부터 즐겁게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조금 뜯어먹으며 읽던 지난 겨울날, 살림집 물이 얼어붙었다가 녹았는데, 물이 녹으면서 그만 수도꼭지가 터져 부엌이며 마루며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은 물바다에서 옴팡 젖어 버렸습니다. 물바다가 된 날 꽤 많은 책이 젖거나 퉁퉁 불어 못 쓰게 되었는데,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그나마 아주 버리지는 않았고, 책장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며칠에 걸쳐 말리니 그럭저럭 넘길 만큼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바다를 치르며 적잖은 책을 버리게 되니, 젖었다가 살아난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넘기기 싫어졌습니다. 다른 다친 책들과 망가진 책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렇게 반 해쯤 한쪽 구석에 팽개치듯 꽂아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지난달쯤, 도서관에 나들이를 온 어느 분이 이 ‘물 먹고 퉁퉁 불어터진 책’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두어 시간 동안 이 책 하나만 읽고 돌아가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말끔하고 깨끗하고 번듯한 책이 가득가득 있는데 어쩜 저 책 하나만 그리 알뜰하게 여기면서 들여다본담?’

 손님이 돌아가고 난 뒤 퍽 오랜만에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는 바로 이때, 지난겨울 물바다가 떠오르고, 그날 버리게 된 아까운 책들이 떠오릅니다.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할 책들을 눈물과 함께 떠나보낸 일이 새록새록 가슴을 쑤십니다. 그러나, 떠나간 책을 놓고 아파할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이 책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등돌린 채 지낼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읽다가 만 대목을 찬찬히 훑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은 두 번씩 읽고, 밑줄을 안 그었던 몸글은 천천히 읽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 금세 다 읽어냅니다. 이제 책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을 차례입니다. 며칠쯤 더 책상맡에 올려놓고 있은 다음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인데, 아무래도 저한테는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그날 그렇게 물바다에서 반쯤 죽다가 살아나 주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곰곰이 되읽으면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해에 다 읽었다면 더 좋았을는지 모르나, 이제 와서 다 끝마치니 한결 낫지 않느냐 싶습니다. 마침, 사진기며 렌즈며 여러모로 말썽을 부리는 요즈음, 값싼 장비를 붙잡고 사진길을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까를 놓고 걱정인 요즈음, 다른 어느 책보다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저한테 좋은 길잡이나 이슬떨이, 아니 길동무나 사진동무가 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최광호 님은 “사진으로 생활하기”이고, 저는 “사진으로 살아가기”입니다. 사진쟁이자 사진학과 교수님으로서는 한자말 ‘생활’을 넣고, 우리 말 지킴이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토박이말 ‘살아가기’를 넣습니다. 아마 어느 분은 ‘life’나 ‘living’이라는 말마디를 넣어서 “사진 삶”을 가꿀 수 있겠지요. 어느 이름이든 우리가 걷는 길은 사진길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가 이루려는 삶은 사진삶입니다.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걸으며 어떤 모습 사진삶을 일구든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사진밭입니다. (4342.8.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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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소복이 지음 / 새만화책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란
 [살가운 만화 50] 소복이,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책이름 :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 글ㆍ그림 : 소복이
- 펴낸곳 : 새만화책 (2009.7.25.)
- 책값 : 8000원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에서 살아가는 여섯 사람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는 아주 조그마한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 이상범 님(48), 경아 씨(38), 은동원 씨(36), 함은희 씨(37), 인섭이(20), 지희(12)는 남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네에서 저마다 제 삶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는 여느 사람들입니다. 이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에서 상범, 경아, 동원, 은희, 인섭, 지희 같은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는, 이 같은 이름으로 우리 땅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당신 이름을 세상에 내놓거나 드높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160쪽짜리 자그마한 만화책은, 그린이가 만화를 다 그릴 무렵, 매화동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만화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만화에 나온 사람과 동네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책 사이사이에는 그린이가 만난 여섯 사람이 손수 그린 그림 한두 장을 살짝살짝 곁들여 놓았습니다. 그린이가 사는 곳에서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으로 가자면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는데, 매화동은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이면서, 집값 싼 곳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고, 시골스러움과 어수선하지 않음에 끌려 찾아온 사람들이 있으며, 예부터 농사짓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함께 어우러진 곳이라고 합니다.


.. “뭐, 정신을 차려도 삶 자체가 변해야 되잖아요. 극단을 접거나, 혹은 대박을 터뜨리는 작품을 하거나. 그런데 여기서 공연을 해도 사람들은 공연 보러 서울로 가요. 못 믿는 거죠.” ..  (37쪽)
 





 오늘은 새벽 네 시 반에 잠에서 깼습니다. 아기가 그무렵에 깨었기 때문입니다. 잘 자다가 갑자기 깬 아기는 끙끙거리고, 아기 엄마가 기저귀에 손을 넣어 보더니 “똥 쌌네.” 한 마디. 뜨이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아기를 안고 씻는방으로 가서 기저귀를 벗기고 밑을 씻깁니다. 곧바로 똥기저귀를 빱니다. 일어난 김에 아기 엄마와 아빠는 모기를 대여섯 마리쯤 잡고 불을 끕니다. 아기는 이십 분쯤 더 칭얼거리며 엄마아빠 배며 등이며 올라타고 놀다가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빠는 곧바로 일어날까 했지만, 몸이 무거워 더 잠들기로 하고 다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안칩니다. 머리를 감고 셈틀을 켭니다. 그런데 모니터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엊저녁, 아기가 모니터에 대고 오줌을 갈겼는데, 그 탓에 모니터 전원단추가 맛이 간 듯합니다. 그제는 셈틀 자판에 똥을 갈기는 바람에 자판이 맛이 갔습니다. 지난달에는 엄마아빠 손전화를 입에 넣고 빠는 바람에 엄마아빠 손전화가 모조리 맛이 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기 엄마가 쓰는 노트북을 켜고 글 몇 조각을 쓰는데, 예전에 아기가 쥐어뜯은 자판 몇 군데가 잘 눌리지 않습니다. 히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아기한테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일곱 시 이십이 분에 나섭니다. 늦어도 이십 분 안쪽에 길을 나서야 전철역에 알맞게 닿는데, 전철역까지 가는 길에 사진 몇 장 찍는다며 이 분쯤 어기적거립니다. 전철역에 닿고 보니, 삼십삼 분에 들어왔어야 할 급행전철이 삼 분 늦어졌다고 합니다. 아침에 좀더 바지런히 길을 나서고 골목 사진 찍는다며 깨작거리지 않았어도 때맞추는 전철은 못 탔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제때 안 들어온 전철 때문에 전철역에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히유. 오늘도 첫 역인 이곳에서 자리잡고 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50살에 자살할 거예요.” “그때 너무 잘 살고 있으면요?” “그럼 그냥 오래 살구요.” “하하.” “저는 집에 있는 게 고통스러워요. 저는 막내인데, 사랑받는 막내는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내 밥은 내가 차려 먹었어요. 엄마가 차려 주면 이상해요. 엄마는 내가 밥 먹기 전에 이 닦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어요. 손으로 칫솔을 만져 보고 검사까지 했다니까요. 원래 제 꿈은 만화가예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힘들겠다 싶어서 포기했어요.” “그럼 지금의 꿈은 뭐예요?” “성공이요. 목표를 달성해서 행복하게 미소짓는! 세계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고등학교 때는 개근상 받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은 성공하는 게 목표예요.” ..  (51∼53쪽)
 





 전철에 타면서 자리는 꿈조차 꾸지 않고 바퀴걸상이나 자전거를 놓는 자리 안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펼칩니다. 이 다음으로 서는 주안역부터 퍽 많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 탑니다. 이이들도 아침 전철이 늦어지는 바람에 줄이 더 길어졌으니까요. 이리하여 부평역에서 사람들이 탈 때에는 서서 가는 사람은 옴쭉달싹 못할 만큼 꽉 끼게 되고, 끄트머리에서 책을 펼치던 저는 창문 쪽으로 몸이 눌립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송내며 부천이며 역곡이며 더 타려는 기나긴 줄은 지치지 않고 더 몰려들고, 먼저 들어와서 눌렸든 늦게 들어와서 누르든 서로서로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전철기사는 여러 차례 안내방송을 하면서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었으나 시원하지 않을 듯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문득 1994년 봄이 떠오릅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가끔 책방 마실(교보문고나 헌책방)을 하러 서울에 전철을 타러 왔고,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 자가용이 없어 전철을 타고 작은아버지 댁에 찾아갔는데, 이때에는 선풍기만 있거나 선풍기조차 없는 전철칸이 그렇게까지 덥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마, 출퇴근 지옥철을 탈 일이 없이 전철을 타서 그랬을 텐데(이무렵에는 다들 창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1994년 봄에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처음으로 ‘지옥철’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인천 끄트머리부터 구로역 둘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이 전철을 탈밖에 없으나, 그사이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타기만 해야 합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해서 서울로 수월히 갈 수 있지 않고, 외려 탈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벌써 꽉 들어찬 전철이라 하여도 우격다짐으로 밀면서 타려고 합니다. 서로서로 괴로운 노릇이지요. 그때, 1994년에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는 선풍기만 있었습니다(수원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도 매한가지). 게다가 선풍기는 안 돌아가기 일쑤였고, 그나마 돌아가는 선풍기라 하여도 한 칸에 두어 대가 달랑 달려 있었습니다.


.. ‘요즘 나는 매일 바란다. 오늘 밤 꿈에서 엄마를 만나기를. 몇 년 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못 봤다. 우리 엄마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견디고 사셨을까? 그런 일이 있고 나니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엄마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사셨는데 말이다.’ ..  (67∼68쪽)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여의도를 지나면 전철은 홀가분하다고 느낄 만큼 사람이 줄어듭니다. 서울에서 움직이든 서울 바깥에서 서울로 들어오든, 저마다 제 갈 곳을 찾아서 사람 물결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겠습니다. 오늘은 800쪽이 조금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조금 읽다가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살짝 펼쳤습니다. 고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두툼한 책은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드디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씨앗은 힘이 세다》는 2006년에 처음 장만해 놓고 한참 읽다가 줄거리가 조금 지루해졌을 때 덮어놓고는 이태 넘게 다시 펼치지 않다가 이즈음 마저 읽으려고 집어들고 있습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리기 앞서 “소비자들이 때깔이나 크기로만 농산물을 선택한다면 이 땅의 농부들은 농약을 안 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비자의 의식도 함께 바뀌어야 하겠지요(199쪽).”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는데, 오늘은 새삼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곡식이나 열매를 사먹는 도시사람들이 ‘굵직굵직하고 빛깔 고우며 벌레먹은 곳 없는 말끔한 녀석’을 찾는다면, 어느 농사꾼이건 농약과 비료를 듬뿍듬뿍 안 칠 수 없습니다. 포도며 능금이며 배며 복숭아며 수박이며 갖은 농약과 비료에 범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도시사람들은 뻔히 농약과 비료를 많이 친 줄 알면서 이런 열매를 사다 먹습니다.

 알 수 없는 우리 씀씀이요 삶이 아닌가 싶으나, 밀고 밀리는 사람 물결에서 벗어나서 아침햇살 받고 한글학회까지 거니는 동안 곱씹어 보니, 《씨앗은 힘이 세다》를 쓴 농사꾼이 외친 이 말마디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은 온통 껍데기로 겉치레를 하는 데에 매여 있다’는 소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책이란 알맹이(줄거리)를 살피고 사서 읽어야 합니다. 껍데기가 곱거나 멋스럽다고 사서 읽습니까. 꽂아 놓기에 보기 좋다고 사들이는 책입니까. 뭐, 누군가는 틀림없이 ‘꽂아 놓으려고 책을 사들일’ 수 있고, 이렇게 하는 일은 그이 권리입니다. 다만, 책은 꽂아 놓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가 아닙니다. 읽으려고 만드는 종이뭉치입니다.

 곡식이나 열매는 먹으려고 일굽니다. 보기 좋으라고 일구지 않습니다. 배속에 들어와서 우리 몸에 새힘을 불어넣도록 하려고 일굽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어떠한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꾸는가요. 우리 스스로 내 모습을 어떻게 차리고 있지요? 우리 스스로 내 이웃하고 마주하면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마주하는지요? 우리들 옷차림은 얼마나 내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옷차림입니까? 우리들 집치레나 몸치레는 얼마나 내 삶터를 사랑하며 돌보는 집치레이거나 몸치레인가요? 우리는 왜 일을 하지요? 우리는 왜 사랑을 하지요? 우리는 왜 아이를 낳아 기르지요? 우리는 왜 밥을 먹지요? 우리는 왜 돈을 벌지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한테 표를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개 정치꾼이 죽은 일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이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 “부모님은 수원에 사시구요. 여기도 곧 정리할 거예요. 귀농할 거거든요.” “왜요?”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이라고 하는데, 음, 썩은 꽃이죠. 도시는 죽이는 일만 해요. 지구라는 별에서 제대로 살려면 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혼자 가면 외롭지 않겠어요?” “술 안 드시죠? 술 마시면 외로운 것도 몰라요. 하하!” “농사일이 힘들 텐데요.” “일하는 게 즐거워야 해요. 농업이 아니라 농사가 되어야지요. 팔아먹을 거 생각하면 고되져요. 나는 행복하려고 가는 거예요.” ..  (127∼128쪽)
 





 그제 일터로 오는 길에 만화책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다 읽어 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일터 책상에 그대로 두고 나왔습니다. 어제와 오늘, 다 읽어 낸 만화책을 다시 더듬어 보면서, 이 만화는 우리한테 무슨 말을 걸고 싶어 하는가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그나마 저는 집이 아닌 일터에 있기 때문에 이 만화책을 생각할 겨를을 얻었습니다. 집에서 옆지기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면, 아기를 보고 놀고 씨름하느라 온 기운이 다 빠져서 책이고 뭐고 거들떠보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로 전철을 타고 와서 돈을 얼마쯤 버는 일을 한답시고 아기를 옆지기한테 통째로 맡겨 놓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 일이란 얼마나 저와 옆지기와 아기한테 도움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글을 쓰고 책을 쓰며 이것저것 곁일을 거들면서 가까스로 버는 돈으로 도서관 달삯을 대고 집삯을 또 어찌어찌 대며 우리 살림을 이렁저렁 꾸릴 때하고 견주면, 어느 회사 한 곳에 엉덩이를 지긋이 눌러붙이면서 일할 때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해서 버는 돈으로 우리 세 식구는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답게 우리 삶을 가꿀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을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한테 목숨 하나 내려주고 이 땅으로 보내준 ‘너른 자연’은 무슨 마음을 먹고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목숨 하나 붙잡으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굽어살피고 있을 하늘나라 넋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오로지 내 밥그릇만 챙기면 된다고 하는 이 터전인데, 너른 자연이든 하늘나라 님이든 따지기 앞서, 우리한테 목숨을 선사한 우리 어버이는 무슨 사랑과 믿음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어버이한테,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그린 만화쟁이 소복이 님 어버이한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여섯 사람네 어버이한테, 당신들이 살아온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으며, 당신 아이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고 하던 뜻과 보람은 무엇이었을까요. (4342.8.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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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22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그림체가 일반일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군요.요즘은 암만 알맹이가 좋아도 포장이 나쁘면 사지 않은 시대이니까요.

파란놀 2009-08-23 08:21   좋아요 0 | URL
'일반인'이란 누구일까요?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그림체'란 무엇일까요?

책은, 편견으로 보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책일 뿐입니다.
편견에 맞추어 주면 더 훌륭할는지 모르나,
그저 유행으로 그칠 뿐입니다.

카스피 2009-08-2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말씀 마따나 책은 편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하지만 암만 좋은 책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쉬이 읽혀 질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관주성경(아주 고풍스러운 20~30년대 문체의 성경인데 제목이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을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는다면 아마 반도 이해하지 못할것입니다.
솔직히 좋은 내용의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포장도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책으로 보는 눈 97 : 회사원이 읽는 책 - 저녁부터 밤까지

 서울에서 여느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쯤 마저 읽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전철길에서는 얇은 책은 한 권 반쯤 읽고, 조금 두툼하면, 아침에 2/3쯤 읽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저 다 읽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다 읽고 나서 새로운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못합니다. 처음 집에서 길을 나설 때에는 맨 첫 역에서 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맨 첫 역이 아니기도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철을 탈 때에는 책을 펼치기 어려울 만큼 오징어떡이 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전철에서 책을 읽자고 하는 사람이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에 칼퇴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퍽 드물지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도 끝끝내 책을 펼쳐 읽는 책사랑꾼을 한두 사람씩 꼭 보곤 합니다. 거의 모두 지치고 고단해서 곯아떨어져 있는데, 또는 집으로 돌아가서 만날 사람하고 수다를 떠느라 바쁜데.

 칼퇴근을 했어도 서울에서 좀더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느즈막하게 전철을 타면, 퇴근 물결에서 벗어난 까닭에 조금 널널합니다(그래도 미어터지기는 비슷비슷). 술 몇 잔을 걸쳤으면 해롱거리는 가운데 책을 펼칩니다. 둘레에 저처럼 해롱거리면서 손잡이를 붙잡고 기우뚱거리거나 용케 자리를 얻어 앉아 고개를 푹 숙이거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 돌아가나 늦게 돌아가나 책 한 번 손에 쥘 만한 틈을 내기란 더없이 빠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금세 다 읽어치운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호미,2009)이라는 책 끄트머리 빈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틈을 내고 힘을 내고 돈을 내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말미를 주고 집을 주고 돈을 주어도 책을 안 읽는다. 그 말미와 집과 돈으로 다른 놀음놀이에 젖어든다.’

 다 읽은 책은 집어넣고 새로 읽을 책을 꺼내고 싶으나, 급행전철이 부천과 송내와 부평과 동암과 주안까지 지나지 않고서는 꽉 끼고 밀리고 눌린 틈에서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치며 밑줄 그은 대목을 곱씹습니다. “십오 년 동안 한결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 대사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상설 퍼포먼스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슈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도 더는 이 문제를 돌아보지 않는다(236쪽).”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사람들은 꼭 책을 읽어야 하나?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책을 꼭 쥐어 주어야 하나? 책을 쥐어 준다면 무슨 책을 왜 쥐어 주나?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 책하고 멀어지도록 살아가나? 우리한테 책이 있어 무엇이 좋고, 우리한테 책이 없어 무엇이 나쁠까? 오늘날 우리들은 한결같이 더 돈을 많이 주는 일터를 바랄 뿐, 돈을 덜 주더라도 책 한 권 읽을 겨를을 넉넉히 내어주는 일터를 안 바라고 있지 않나? 내 몸과 마음을 사랑스레 돌보고 아끼는 길은 어느 누구도 안 가르칠 뿐더러, 우리 스스로 찾아 배울 뜻이 없지 않는가?’ (4342.8.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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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6 : 회사원이 읽는 책 - 아침부터 낮까지

 며칠 앞서부터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습니다. 한글학회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볼 수 있는 길이지만, 자전거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기하고 씨름할 기운은 바닥이 나기 때문에 전철을 타기로 합니다.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용산과 새문안길 사이를 오가도 괜찮으나,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전철에 자전거를 싣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가득가득 타는 사람들만으로도 넘치니, 자전거가 아니라 바퀴걸상이나 아기수레 또한 들어갈 구멍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철칸 한쪽 구석에 기대어 서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한손에는 책을 듭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엮은 《사진 이야기》(눈빛,2007)를 읽습니다. 인천에서 떠나는 전철은 서울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고, 이내 꾹꾹 눌러담듯 서 있는 사람은 서로서로 밀고 밀치면서 에어컨 돌아가는 전철은 후덥지근합니다. 문득, 이 전철이 1990년대에는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며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급행’이 없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선풍기조차 제대로 없거나 망가져 있기 일쑤였다는 생각이 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여기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앞둔 이날까지 죽 돌아보고 헤아려 보건대, 전철로 오가며 책을 손에 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리고, 예나 이제나 ‘전철을 타면서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참 적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것에 멋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사진도 멋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진을 추구했던 내 모습이 사진의 노예로 보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74쪽/최광호).”는 대목을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긋는데 제 앞쪽으로 어느 아가씨가 불쑥 끼어들더니 신문을 쫙 펼치며 읽습니다. 신문 끄트머리가 제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주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합니다. 틀림없이 입에 손을 안 대고 재채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전철은 어느덧 신도림역에 닿으면서 거의 모든 손님이 내립니다. 신도림역에서 내린 절반쯤은 강웃마을로 갈 테며, 다른 절반쯤은 강아랫마을로 갈 테지요. 집에서 나와 전철역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아직까지도 손에 책을 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만 보입니다. 사람이 오징어떡처럼 눌리는 전철에서는 손에 책을 쥔 사람을 더더욱 볼 수 없었습니다.

 숨막히는 전철칸에서 시달리다가 서대문역에서 내려 걷습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조금 덜 걷지만, 몇 걸음 더 걷더라도 아침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천천히 팔월 기운을 느끼고 싶습니다. 몇 분쯤 하느작하느작 거닐면서, 사람 걷는 길을 뚝 끊고 지붕 없이 새로 만든 ‘자전거 주차장’ 어설픈 모습을 봅니다. 울퉁불퉁한 거님길을 느끼고, 밝고 가벼운 차림인 아가씨와 까만 양복 차림인 아저씨를 숱하게 스칩니다. 낮밥때가 되니 온 길거리에 사람들로 그득하고 퍽 많은 사람 손에는 커피잔이 쥐어져 있습니다. 회사원은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낮밥을 먹을 때까지 책을 손에 쥘 겨를이 몇 분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2.8.1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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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인간 (특별보급판) - 1957-2006 최민식 사진 50년 대표선집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최민식 지음 / 눈빛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예식장 비싼 밥이 아닌 사진책을 선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 최민식, 《HUMAN 1957∼2006》



- 책이름 : HUMAN 1957∼2006
- 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눈빛 (2006.12.7.)
- 책값 : 6만 원


 (1) 사진에 담는 삶


 너른 터가 생긴 광화문 앞길을 가로질러 보았습니다. 한글회관에서 나와 문화체육관광부로 건너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땅밑길로 지나다녔다 하고, 몇 해 앞서 비로소 건널목이 생겼으며, 이제는 너른 터가 생겨 자동차 흐름은 조금 줄면서 걸어다니기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와 서울 시내 이런저런 모습을 찍는 사람이 제법 있고, 남녀 짝을 지어 오붓하게 하루를 즐기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다리쉼을 하는 공공근로 할매와 할배가 보이고, 개인옷을 입은 경찰과 제복을 입은 경찰이 곳곳에 많이 보입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대리석으로 보이는 돌을 새로 깔았습니다. 너른 터가 되었으나 아스팔트 밑에 있던 흙바닥을 밟을 수 있지는 못하며,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하지 못하게끔 꽃밭을 가꾸어 놓았습니다. 시청 앞 너른 터에는 잔디를 심고 광화문 앞 너른 터에는 꽃밭입니다.

 이나마 너른 터 한 곳이 늘어나니 반갑다고 해야 할까 싶지만, 돈을 지나치게 많이 들인 너른 터요, 꼭 무엇무엇을 세우고 놓고 마련해야만 하는 너른 터입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어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지 않으면 땡볕에 그예 드러나야 하고, 비라도 올라치면 고스란히 맞아야만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밟으면 흙땅은 딱딱해진다지만, 우리한테는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대리석이 아닌 맨흙을 풀기운과 나무그늘을 함께 느끼면서 밟을 수는 없는가 궁금합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숲길을 마련할 수 없고, 조그맣게라도 나무숲을 이룰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문득 오늘날 사진이 자꾸자꾸 날카롭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채 겉멋과 겉치레와 겉꾸밈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사진만 판치거나 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운 멋도,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자연스러운 손길도, 자연스러운 눈길도 찾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푸나무와 흙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이렇게 사람만 오갈 수 있으며, 참새나 비둘기 한 마리 깃들 틈조차 없으니까요. 이렇게 차 소리 가득한 가운데 귀가 멍멍해지는 터전에서 돈만 버는 일을 해야 하고, 돈만 쓰는 문화를 누려야 하고, 돈만 들이는 집을 얻어서 살아야 하니까요.


.. 내 앞선 세대에 그토록 불멸의 사진을 찍었던 작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보며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고, 몸을 조이는 긴장감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  (책 끝에 붙인 말 / 최민식 - 나의 사진 인생 50년)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지옥철에 시달리며 인천에서 서울로 옵니다. 새벽에 아빠가 일을 나갈 때면 어김없이 깨어나 ‘아빠 가지 말라’며 울면서 종아리에 달라붙는 아기를 달래며 홀로 떨어져 나와 하루 절반 남짓을 집 밖에서 보냅니다. 쇠와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놓은 책상 앞에 앉아 셈틀을 또닥거립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를 듣고, 모임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시 찻길에서 차 소리며 사람들 수다 소리며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들에 휘감긴 채 전철역으로 걸어갑니다. 전철은 쇠를 긁는 소리를 내고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에어컨 소리와 방송 소리를 냅니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 해도 옆에까지 들리는 디엠비 소리를 듣고, 전철에서 울리는 소리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나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쳐 놓고 있지만, 새벽에 집을 나서며 전철에 올라 서울에 닿은 뒤 일터에서 아홉 시간쯤 보내고 나서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진기 단추를 누를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 쳇바퀴 같은 하루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쳇바퀴 삶’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대끼거나 스치는 아가씨들 반바지와 치마를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딪히거나 뒤엉키는 아저씨들 담배 꼬나문 모습이나 침 뱉는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에서 잠든 사람들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모습만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사람들 다리께만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틈틈이 바뀌는 전철 광고판만 찍어도 재미있는 사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건물 들머리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건물 10층이나 20층에서 길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 흐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엇을 사진감으로 하느냐도 크게 돌아볼 대목일 터이나, 무엇을 사진감으로 삼든 사진쟁이 스스로 무슨 생각과 마음과 뜻과 넋을 담느냐가 훨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민식 님 사진책 《인간》 또는 《HUMAN》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데, 최민식 님 사진감은 늘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최민식 님이 사람을 찍든 말든 ‘당신들 깜냥껏 바라보거나 느끼는 사람’을 찍습니다. 모델을 찍든 알몸을 찍든 만듦사진으로 꾸미든 다큐로 찍든,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누구나 으레 사람을 사진감으로 삼습니다.


..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체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책 끝에 붙인 말)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사진감을 얻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어울리는 마을이나 도시가 사진감을 찾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나 사람한테 바람과 물과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자연이 사진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마주 바라보며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사람이 아닌 길이나 건물을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길이건 건물이건 사람이 짓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뒷골목이든 앞골목이든 사람 사는 터전이라, 골목을 어떻게 담더라도 사람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그런데, 사람을 찍은 사진 가운데 사람맛이나 사람멋이 나지 않는 작품이 있습니다. 섬뜩하거나 밋밋한 사진이 있습니다. 지루하거나 눈 버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빼어난 솜씨를 선보인다 하지만 손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눈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놀림 말고는 무엇도 스미지 않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은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사진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진기에 나를 송두리째 맡겨 버렸고, 내 인생을 사진으로 가득 채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  (책 끝에 붙인 말)


 나 스스로 우리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때에는 내가 담는 사진에 힘찬 넋이 서립니다. 나 스스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살아갈 때에는 내가 찍는 사진에 사랑스러운 얼이 스밉니다. 나 스스로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삶일 때에는 내가 이루는 사진에 따스한 기운이 녹아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젖어든 삶이라 할 때에는 자본주의 도시문명을 깊이 느끼는 사진이 됩니다.
 





 (2) 사진책 《HUMAN》을 이룬 최민식 님 삶이란


 1928년에 태어나 1950년대 끄트머리부터 사진을 찍어 온 최민식 님 《HUMAN 1957∼2006》은 당신 사진길 쉰 해를 그러모읍니다. 사진길 쉰 해를 기리는 뜻에서 새롭게 사진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고, 이무렵 《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예문,2006)과 《뭘 그렇게 찍으세요, 사진 작가 최민식》(우리교육,2006)과 《소망, 그 아름다운 힘》(샘터사,2006)이 잇달아 나왔습니다.

 사진찍기 한길을 쉰 해나 이었다는 대목은 무척 놀랍고 대단하며 기릴 만한 일입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을 기리는 책이 한꺼번에 네 가지 나오는 일이란 마땅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예전에 나오고 다시 못 나오는 책을 새로 펴낼 수 있으며, ‘최민식 사진전집’을 묶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2006년 사진길 쉰 해를 맞이하기 앞서인 2005년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사진쟁이 최민식이 생각하는 사진’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좀더 앞서인 1996년에는 사진길 마흔 해를 돌아보는 가운데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이 나오기도 했고, 이 책은 2004년에 고침판으로 다시 나옵니다.


..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 사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체험이 있었기에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삶의 진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통해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휴머니즘의 정의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  (책 끝에 붙인 말)
 





 그런데 궁금합니다. 사진길 쉰 해를 걸은 최민식 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최민식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들여다보거나 만나거나 껴안거나 부대끼거나 감싸안으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을까요. 곧게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최민식 님처럼 당신 스스로들 남다른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길동무 최민식’을 바라보는지, ‘넘볼 수 없는 위인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지, ‘눈물 콧물 웃음 쏟아내는 사진을 선사한 고마운 이’로 바라보는지, ‘꾀죄죄한 사람들 꾀죄죄한 삶 꾀죄죄한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가난한 사람을 찍어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에 몇 마디 말이나 시나 글을 붙이는 분들은 얼마나 최민식 사진을 당신 마음속 깊이 부둥켜안으면서 말마디나 글줄을 뱉어내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 사진을 놓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부터 군부가 등장한 1960년대, 그리고 민주화 투쟁이 가열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으로 포착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을 놓고 “최민식은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 삶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사진이란 보는 사람 삶결 그대로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보는 사람이든, 제 깜냥에 따라서 사진을 이루거나 즐깁니다. 내 눈길뿐 아니라 손길과 마음길과 몸길에 따라서 내 손으로 빚어내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이로서는 최민식 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이라고 느낄는지 모르나, 최민식 님은 당신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고 느낄는지 모르며, 사진에 담긴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을 ‘비참한 현실’인 적이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흔히들, 골목동네를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고 어둡고 퀘퀘하다고 여기지만, 골목동네 바깥에서 겉스치는 눈으로 잘못 바라보거나 대충 바라보니 이렇게 여길 뿐입니다.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가난 또한 어느 만큼 영향을 끼치겠지만, 가난보다도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훨씬 영향을 끼칩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밥 한 그릇에 흐뭇할 수 있으면, 가난하면서도 웃습니다. 돈이 없이도 즐거운 삶이요, 기쁜 삶이며, 보람찬 삶입니다. 큰도시 큰 아파트에서 깊은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 놓고 있어야 ‘구질구질하지 않고 어둡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청소부들이 바지런히 손을 놀려 쓰레기를 치워 놓는다고 ‘퀘퀘하지 않고 지저분하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안 보인다고 ‘없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최민식 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를 당신 사진에 담았을 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었을 때에는 가난한 그대로를 담습니다.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일 때에는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그대로를 담습니다. 싱그러운 웃음은 싱그러운 웃음 그대로, 하품하는 졸린 낯빛은 하품하는 졸린 낯빛으로 찍습니다.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은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 그대로 찍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그대로 찍습니다.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아이는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그대로 담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다 다른 느낌 그대로 살리면서 다 다른 삶임을 느끼도록 보여줍니다.


.. 사진작품 속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이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소중한 친구가 된다 ..  (책 끝에 붙인 말)
 





 최민식 님을 놓고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추켜세우는 말마디는 어쩐지 몹시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먼저, 최민식 님은 사진예술 1세대가 아닙니다. 우리네 사진예술 1세대는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입니다. 또는, 이 나라에 사진을 처음 들여온 지운영 님 같은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지운영 님 또래를 사진예술 1세대라 한다면,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은 2세대가 될 테지요. 그러고 나서 최민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은 3세대라 할 테고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발자취가 어떠한가를 참으로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참으로 안 알아봅니다. 참으로 안 알아볼 뿐 아니라 참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참으로 깊이 곰삭여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최민식 님 사진을 ‘넘어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사뭇 다른 길에서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꽃피우’거나 하는 우리들 사진동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사진길 쉰 해를 기리면서 이 책 저 책 나오기는 했으나, 무엇보다도 최민식 님 사진열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면서 아끼고 사랑해야 할 《HUMAN 1957∼2006》은 판이 끊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노릇인데, 우리네 얕은 사진문화로서는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2008년 3월에 ‘특별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 주었습니다. 2006년판은 6만 원이었고, 특별보급 2008년판은 3만5천 원입니다(저는 2006년판 6만 원짜리 책을 장만해서 보았습니다).

 ‘삼청각’ 같은 곳에서 혼인잔치를 하면 밥값이 5만5천∼10만 원이라고 합니다. 여느 예식장에서 혼인잔치를 해도 밥값이 몇 만 원쯤 합니다. 돌잔치를 해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식구는 혼인잔치도 안 하고 돌잔치도 안 했습니다. 문득문득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데, 우리 식구가 나중에 어느 만큼 살림이 펴서 ‘늦깎이 혼인잔치 또는 돌잔치’를 하는 날을 맞이한다면, 최민식 님 사진책을 500권쯤 한꺼번에 장만해서 손님들한테 ‘밥은 안 주고 책을 한 권씩 드리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돈은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꿈만 꾼다고, 새로 꿈 하나 꾼 만큼 이 꿈을 이루도록 돈을 신나게 벌어 볼까 합니다. (4342.8.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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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오늘 신촌 숨책에 갔더니 여자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요사이 책들을 안 읽어선지 책들도 잘 안들어 온다고요.
아이고 어른이고 책들 잘 안 읽는 상황에서 결혼식에 밥 대신 책을 돌리면 아마 신문 기사에 나던지,다시는 그 집안 결혼식에 안갈지 아마 둘중의 하나일걸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