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고은우 외 지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기획 / 양철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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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을 부추기고, 폭력에 젖어 있는 나라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7]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지난주 토요일 낮, 대안교육 이야기책을 펴내는 민들레 출판사에서 강의를 하나 맡아 하기로 해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혼자 갈까 하다가 옆지기하고 아기도 함께 갑니다. 인천 맨 끄트머리 전철역에서 타니, 처음 길을 나설 때만큼은 조금은 수월합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요. 잠깐조차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며 앉으며 노는 아기를 달래며 복닥이고 있는데, 조금 늙은 아저씨 한 사람이 옆지기보고 ‘비키’라면서 당신 아주머니를 앉히려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멀거니 쳐다보다가 “앉으시려면 이쪽에 앉으셔요.” 하고 제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때 바로 옆에 다른 자리가 납니다. 아주머니는 그리 앉습니다. 그지없이 어처구니없는 노릇인데, 드물게 이런 일을 겪습니다. 옆지기한테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그 자리를 당신한테 달라’는 어르신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날은 ‘머리를 짧게 깎은 옆지기’를 어린 학생쯤으로 보며 얕잡았기 때문입니다. 옆지기는 올해로 나이가 서른이지만 얼굴로는 퍽 어리게 보이는지(제가 보기엔 나이 서른이면 생기는 주름이 퍽 많다고 느끼는데) 애 엄마한테 막 구는 어르신이 때때로 있습니다. 옆지기가 아이하고 경주에 있는 생채식수련원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기차에서 겪었다는데, 어느 할머니가 옆지기를 보며 ‘고등학생이 사고 치고(?) 애 끌어안고 다니는 줄’ 엉뚱하게 생각했다더군요.

 그런데, 옆지기가 서른이 아닌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버젓이 앉아 있는 사람한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장애인노약자영유아보호자 자리’라는 데가 아니었으니까요.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다리가 아프면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어르신이라 하더라도 자리에 앉고 싶다 할 때에는 ‘고운 말’로 “여보게, 내가 많이 힘드니 자리를 내어줄 수 있나?” 하고 물어야 합니다. 다짜고짜 비키라고 하는 일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젊은 애 엄마라 할지라도, 애 엄마한테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자리를 비키라는 일은 어르신으로서 할 노릇이 아닙니다. 아이는 ‘작은 짐가방’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다 하여도 어른하고 마찬가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기에 아이 둘이 어른 한 사람 앉는 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자리에 몸피가 큰 어른이 찡겨 들어오면 모두한테 고달픕니다. 아직 무릎이며 뼈며 관절이며 단단히 여물지 않은 아이보고 서라 하고 어른이 앉으려 하는 일 또한 올바르지 않기도 합니다. 힘이 여린 아이한테 힘이 있는 어른이 참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는 폭력입니다.


.. 작년 동균이 담임은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이기적으로 변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나 역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같이 놀려고 하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데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25쪽)


 어쩌는 수 없이 요사이 한 주에 닷새는 꼬박꼬박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탑니다. 이렇게 지옥철을 타면서 숱한 ‘서민’을 부대낍니다. 이들 서민은 지하철에서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퍽 옅습니다.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따스한 분이 틀림없이 있지만, ‘아무리 홍보를 하고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전철 걸상에서 다리 쩍 벌리는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은 당신들 매무새를 고칠 생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대로 어릴 적부터 남자를 섬기고 높이는 터전에서 살아오면서 익숙합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오늘날에도 남자를 드높이고 모시는 터전에서 지내 왔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제아무리 값비싸구려 양복을 차려입고 있어도 마음씨가 착하거나 다소곳하지 못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런 전철, 아니 지옥철을 날마다 타고다니려니 제 마음이 나날이 거칠어지고 메말라 갑니다. 제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가 모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착한 마음을 이어나가기란 꿈 같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하여, 서로서로 먼저 타고 먼저 내리고 먼저 쑤시고 들어가며 자리를 차지하면 더 널찍하게 즐기려고 어깨를 펴고 다리를 벌리고 신문을 쫙 펼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 같다고 느낍니다. 따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어도, 따로 집에서 일러 주지 않았어도, 모두들 저절로 시나브로 배우고 깨닫습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한테 또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얼굴과 이름 없는 깡패’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 준혁이도 어린 아이일 뿐이다. 아무리 거칠고 못되게 굴어도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 할 일이 차고 넘치는 교사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따돌림의 뿌리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갑갑하고 불행한 일이다. 갈수록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니, 점점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내 아픔을 느끼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  (54, 137쪽)


 어제와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일기》라는 그림일기 책을 아침길에 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란 꾸밈말이 좀 낯간지럽지 않느냐 싶고,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지만, 꽤 사랑스럽고 살가운 자연일기를 담고 있습니다. 넘겨읽기에는 좋은 판짜임이 아니라 눈과 목이 좀 아픈데, 그래도 아침길을 즐겁게 열어 준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아침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서 이런 자연일기를 읽는 뜻이 있을까?’ ‘모시나비이고 네발나비이고 긴꼬리나비이고 호랑나비이고 노랑나비이고 흰나비이고 하나 찾아볼 길이 없는 서울로 일하러 오가는 주제에 이런 책을 읽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살찔 수 있을까?’ ‘내 오른쪽에 선 아가씨가 읽는 처세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내 왼쪽에 선 젊은 사내가 읽는 영어책을 보아야 하지 않나?’ ‘부질없는 지식조각만 잔뜩 집어넣는 꼴사나운 책읽기가 아닌가?’ ‘그예 겉치레 겉발림에 지나지 않으며 겉맛만 부리는 짓이 아닌가?’

 광화문 세종로이든 새문안길이든 볼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느끼며 걷습니다. 앞사람들 담배연기를 쐬기 싫어 더 빨리 걷습니다. 잰걸음을 놀리며 담배연기 풀풀 피우는 양복쟁이는 때려잡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놀러온 손님이 어느 비싸구려 밥집으로 줄지어 들어갑니다. 저 일본 손님은 저 밥집에서 먹은 밥으로 ‘한국 밥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물결치는 자동차가 끊이지 않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칩니다. 책을 읽으면서 걷기로 합니다. 저로서는 서울에서 눈둘 데가 없어 아무것도 보지 말고, 땅이며 건물이며 사람이며 차며 보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그저 책에다 눈을 처박자고 생각합니다.

 몇 분 걸어 한글회관에 닿고, 5층까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책을 내처 읽습니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셈틀을 켭니다. 오늘치 할 일을 돌아보며 숱한 공공기관 누리집을 드나듭니다. 중앙부처이든 지자체이든 옳고 바르게 말글을 다루며 누리집을 건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들 공무원은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고 공공기관 누리집을 마련하고 있을 텐데, 더욱이 이들 공무원은 하나같이 ‘좋다는 대학교’를 제법 높은 성적을 거두며 나왔을 텐데, 스스로 말글을 알맞고 싱그럽게 간수할 줄을 모릅니다.


.. “어떻게요? 저 못할 것 같아요. 휴…….” “아니야. 해야 해. 개새끼라고 해. 다른 욕도 필요없어. 아이들은 쉴 틈 없이 욕을 하면서 더 센 척을 하잖아. 그런데 이 선생이 아무리 큰 소리로 혼낸다고 해서 먹히겠어?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럴수록 우습게 보이겠지.” … 개새끼 소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준혁이가 몰라보게 순한 양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교실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은 조용히 집중했다. 이 년 만에 평범한 일삼을 맛보고 있었다 … 세화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과 권위로 아이들을 제압해서 얻은 평화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 반은 진정으로 폭력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일까? ..  (66, 72, 78쪽)


 지지난달에 다 읽은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책이름에도 나오는 ‘이 선생’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서로 주먹다짐을 할 뿐 아니라 따돌림을 아주 밥먹듯이 하고 있다면서 골머리를 앓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어느 ‘이 선생’들이든 이 같은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골머리를 앓지 않고 선생들 스스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스스로 나서서 펼쳐 보이고 있는지 모르고요.

 학교에서 수많은 ‘이 선생’들은 교과서에 적힌 대로, 또는 스스로 아는 대로 아이들한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돕고 어깨동무하면서 지내라고 가르치리라 봅니다. 몸소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기도 하리라 봅니다. 집에서는 어버이들이 서로 착하게 놀라고 이야기할 테며, 마을에서 어르신들은 아이들한테 서로서로 잘 지내라고 이야기할 테지요.

 그런데 이 나라 이 삶터 이 학교 이 회사 이곳저곳에서 주먹다짐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따돌림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든 저런 모습으로든 끝없이 불거집니다. 온갖 모습 온갖 크기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판을 칩니다. 밥그릇 지키기와 밥그릇 빼앗기가 춤을 추고, 헐뜯기와 비아냥거리기가 넘실거립니다.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을 섬기든 예배당에서만 노래하고 눈물짓는 사랑으로 그치고, 예배당 바깥에서는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다스릴 수 있을까요? 학교폭력은 다스려야만 할까요? 학교폭력은 왜 터져나올까요? 학교폭력은 어떻게 털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기 앞서도 폭력에 물들어 있지는 않나요? 아이들한테 폭력 기운이 없어도 학교 바깥에서는 언제나 폭력에 둘러싸여 있지 않나요? 아이들이 잘 배워서 학교에서 폭력을 씻어냈다 할지라도 학교 밖으로 나오거나 사회로 나오면 또다시 폭력에 젖어들어야 하지는 않는지요?


..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중간고사에서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와!” “깜지 덕인 줄이나 알아.” “우…….” 강 선생은 3월부터 깜지를 시키더니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아이들과 강 선생 중 누가 더 센가 내기하는 것 같다. 고래 심줄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강 선생은 목표를 정하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강 선생의 채찍질 때문인지 아이들 모두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봤다 ..  (198쪽)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는 학교에서 몸소 학교폭력을 부대껴야 하는 선생님들 눈길과 눈높이에 맞추어 이런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이 모습을 가다듬으려는 몸짓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참 괜찮구나 하고 느끼며 책장을 처음 넘겼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글머리가 어영부영 흐트러집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쓴 탓이라 하겠으나, 아무래도 학교폭력이란 똑부러지게 말하거나 잡아채어 뜯어고칠 수 없는 탓이겠지요. 학교에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사라지게 한대서 폭력이 사라질 일이란 없을 테고요. 우리 마음에 폭력이 남아 있고 따돌림이 남아 있는데 학교폭력이 자취를 감출까요? 우리 스스로 ‘더 높은 대학교에 우리 아이만큼은 들어가야 해!’ 같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데 학교폭력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은 ‘남들은 몰라도 나 혼자 정규직이면 되고, 내가 비정규직이더라도 이주노동자 아픈 일까지 마음쓸 겨를이 없단 말이야!’ 같은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따돌림을 없앨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한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국가보안법 폐해를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장 문제를 풀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전기를 더 펑펑 쓰고 있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망가진 이 나라 삶터와 자연을 남김없이 물려줍니다. 아이들한테 아파트와 자가용만 물려주려는 어버이는 아이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괴롭히고 들볶는 배움터 골칫거리를 언제까지나 이어가게 합니다.

 세상은 평화가 아닌데 학교만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과 따돌림이 판치는데 학교만 조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돈타령이요 무시무시한 싸움터인데 학교만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사이좋은 어깨동무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늘 되풀이됩니다. (4342.10.29.나무.ㅎㄲㅅㄱ)


 ┌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양철북 펴냄,2009)
 ├ 고은우, 김경욱, 윤수연, 이소운 씀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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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
편해문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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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는 아이들’을 찍은 ‘노는 어른’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5] 편해문, 《소꿉》



- 책이름 : 소꿉
- 글ㆍ사진 : 편해문
- 펴낸곳 : 고래가그랬어 (2009.7.1.)
- 책값 : 3만 원



 (1) ‘노는 아이들’을 찍는 ‘노는 어른’ 편해문


 ‘편해문’이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저는 편해문 님(1969년에 태어남)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편해문 님은 젊은이입니다. 당신 또한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편해문 님은 ‘우리 나라 어린이 놀이와 노래’를 찾아서 갈무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이는 1998년에 첫 책을 하나 내놓았는데, 이이가 내놓은 첫 책은 큰상 하나를 받았을 뿐 아니라(‘좋은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꾸준히 잘 팔리기까지 합니다. 어린이문화나 어린이문학을 즐기거나 살피는 분이라면 모르는 이가 드물며 안 읽은 이가 적은 《가자 가자 감나무》와 《동무 동무 씨동무》라고 하는 책이 이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어린이노래와 어린이놀이를 다룬 책을 띄엄띄엄 썼고, ‘어린이와 어버이가 함께 읽을 만한 책’이 아닌 학술책으로 《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박이정,2002)하고 《어린이 민속과 놀이문화》(민속원,2005)를 냈습니다. 기운이 빠졌기 때문일까요, 깊이있게 학문을 파고들면서 우리 문화와 삶과 교육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어린이노래와 어린이놀이를 ‘학문’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2008넌에 다시금 낸 《문경의 어른과 아이들 노래를 찾아서》(민속원)를 생각해 본다면, 편해문 님은 틀림없이 뒤쪽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나라는 우리 노래와 놀이를 학문으로 살피지 않으며 다루지 못합니다. 한편, 학문으로 ‘국어’는 있되 옳고 바르게 가누거나 가다듬을 ‘우리 말’은 없으나, 놀이와 노래는 학문으로는 없어도 삶으로는 오래도록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달라지는 세상에서는 놀이와 노래마저 사그라듭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계집아이는 씨가 말랐습니다. 딱지를 접을 줄 아는 사내아이라든지 운동화 끝으로 흙땅(또는 흙운동장)에 금을 그어 갖가지 금긋기놀이나 잡기놀이를 할 줄 아는 어린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뭇가지를 주워 새총을 만들거나 헌 나무젓가락을 모아 고무줄총을 엮는 어린이는 몇이나 될까요. 하다못해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돌멩이를 그러모아 할 줄 아는 어린이는 있기나 할까요. 말꼬리 잡는 놀이라든지 맨손으로 하는 놀이를 열 가지쯤 할 줄 아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니, 아이들한테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이 같은 놀이를 잊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우리 동생들한테 우리 놀이와 노래를 물려주지 못하거나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가 되면서 아이들을 닦달하고 들볶으며 갖은 지식을 머리속에 일찌감치 쑤셔박는 데에만 마음을 씁니다. 아이들이 또래 동무를 찾아다니면서 얼굴과 무릎이 까지고 깨지고 멍들고 찢어지고 하는 꼴을 보아주지 못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옷이 흙범벅이 되도록 뛰어놀도록 풀어 놓지 못할 뿐 아니라, 풀어 놓을 놀이터나 골목길이 없습니다. 골목길이 겨우 남았어도 우리 어른들이 장만한 자가용이 버티고 앉아 있으니 놀 수 없습니다. 골목길에서 빵빵대는 자가용은 이웃집 자가용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몰고 있는 자가용입니다.


.. (어른한테서) 버려진 것이 소꿉놀이에서는 주인공입니다 ..  (19쪽)


 한동안 조용하던(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책을 내지 않아) 편해문 님은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산나물아 어딨노?》(소나무)를 내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이듬해 2007년에는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소나무)를 내고, 다음해 2008년에는 《께롱께롱 놀이노래》(보리)를 내놓습니다. 2009년을 코앞에 둔 2008년 11월에는 거듭 《아기를 주시는 삼신할머니》(소나무)를 써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책으로 우리 어린이문화를 북돋우고자 하면서 ‘내가 죽은 줄 아쇼?’ 하고 목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올 2009년 7월, 사진쟁이도 아닌 주제(?)에 당차게 사진책 《소꿉》을 떡하니 내놓습니다.


.. 놀다 보면 웃습니다. 웃다 보면 행복하지요. 논다는 것은 행복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  (53쪽)


 저는 편해문 님을 1999년부터 만났습니다. 해수로 치면 퍽 깁니다. 다만, 1999년부터 2009년까지 만난 횟수는 열 차례쯤 될까 말까 할 뿐입니다. 열 해에 걸쳐 열 차례 안팎 만나는 동안, 편해문 님 어깨나 손에 ‘사진기 들린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에만 해도 사진이 꽤 많이 실렸습니다. 이 책을 펴낸 책마을 일꾼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쭈었더니, 책에 못 넣은 ‘좋은(그러니까 애틋하고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사진’이 아주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며 머잖아 ‘아이들이 놀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만으로 책을 하나 낼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로서는 띄엄띄엄 만났으며, 만나는 자리 또한 ‘(편해문 님이 사진감으로 삼은 어린이) 사진을 찍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으니, 편해문 님 어깨에 사진기가 걸린 모습을 볼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땅한 노릇이지요. 제 사진감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굳이 사진기를 꺼낼 까닭이 있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감이 없는 자리에서도 어깨에 사진기를 걸쳐 놓고 있습니다만, 사진기를 어깨에 걸쳐 놓고 있어도 제 사진감이 없으면 그냥 걸치기만 할 뿐 사진기를 들지 않습니다. 편해문 님은 ‘사진쟁이도 아닌’데,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니기를 바랄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둘레 이 나라 아이들은 놀이터와 쉴 곳이 마땅하지 않은 탓에, 찻길에서도 놀고 제 엄마아빠 일터인 구멍가게나 약국이나 부동산에서도 놉니다. 밥집에서도 놀고 학교 골마루에서도 놉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편해문 님은 이런저런 ‘아이들 노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을 테며, 이런저런 ‘오늘날 도시문명사회 어린이들 노는 모습’을 두 눈과 사진기 눈으로 골고루 담아내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도를 비롯한 (퍽 가난한) 아시아 나라 아이들이 꾸밈없이 놀고 어울리고 복닥이는 모습을 담은 사진책 《소꿉》을 엮은 힘과 손길로, 우리 나라 어린이들 놀이 문화를 담은 사진책을 새롭게 펴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요사이 아이들이 싱그러움을 잃거나 아름다움을 놓치거나 재미남과 신남을 모른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요. 잃어버린 아이들은 잃어버린 아이들대로 우리가 사랑하고 보듬고 껴안아야 할 테니까요. 잃어버린 아이들이면서도 이 가운데에도 빛줄기를 품은 모습을 찾을 수 있고, 놀이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이 사라진 모습에서도 깨알만 한 빛깔을 잡아채면서 고이 가꿀 수 있을 테니까요.
 





 (2) 놀이가 없으니 일이 없고


 여느 날이라면 낮 두어 시쯤 지나고부터 골목길에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납니다. 서너 시쯤부터라면 웬만큼 많이 보이고 네다섯 시라면 꽤 많이 보입니다. 제가 사는 인천에는 대안학교가 꼭 한 군데 있기는 하지만, 인천에서 제도권학교를 안 다니는 초등학생은 거의 없으며, 학교를 아예 안 다니고 집에서 배우는 어린이도 거의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길과 골목에 아이들이 물결을 칩니다.

 물결을 치는 아이들은 아이들 깜냥껏 놀이를 합니다. 학원가방을 한손에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돌을 차면서 걸어가는(이 또한 놀이입니다) 아이가 있고, 자전거나 인라인을 타며 뒤엉키는(가장 자주 봅니다) 아이가 있으며,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든지 술래잡기를 하는(아주 드물게 봅니다) 아이가 있습니다. 연장을 쓰는 놀이라면 혼자서 하는 줄넘기하고 배드민턴쯤입니다. 어쩔 수 없겠으나 줄넘기줄을 길게 이어서 종아리에 감아 고무줄을 하는 아이는 볼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골목에 나와 볕바라기를 하거나 이웃하고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 가운데 아이들한테 놀이를 가르쳐 주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팽이를 친달지 연을 날린달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린달지 흙놀이를 한달지 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뽑기나 ‘과자에 딸린’ 선물이나 카드패 같은 녀석으로 빼앗기 놀이를 하는 모습은 드문드문 봅니다. 엄마를 따라 훌라후프를 하는 아이도 제법 됩니다. 그러나 이 훌라후프로 굴렁쇠를 놀거나 뛰기놀이를 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학교 운동회에서 돌치기(비석치기, 비사치기, 망까기) 놀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는데, 동네에서 돌치기를 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네에 ‘돌’이 어디 있겠어요? 요사이는 골목길에도 ‘돌’은 없습니다. ‘흙’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놀이가 꽁꽁 틀어막혀 있습니다. 놀이가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올 구멍이 없습니다.


.. 놀이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일입니다. 만약 놀지 않으면 추억도 없을지 모릅니다 ..  (70쪽)


 제 고향동네 인천으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분들은 으레 ‘웃는 할머니’나 ‘찌푸린 할머니’나 ‘웃는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곤 합니다. 저는 동네 할머니이든 어린이이든 섣불리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좋아 보인다 해서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어르신과 아이들은 ‘그림’이 아니라 ‘삶’이거든요. 그리고 이 어르신과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한테 삶을 빼앗긴 채 자꾸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거든요.

 우리 옆지기가 아이를 낳기 앞서인 2007년에 동네 꼬마들한테 고무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고무줄은 전통놀이 아니에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 〈검정고무신〉에나 나오는 놀이이며, 저희들이 놀 만한 놀이가 아니라, ‘전통이니 민속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며 박물관에서 찾아보거나 교과서에 적히는 숙제거리쯤으로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그래, 처음에는 낯설어 하고 그리 재미없는 듯 여기더니, 며칠 뒤부터는 퍽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러나 고무줄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하나도 모르고, 어떻게 다음 차례로 넘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어찌어찌 넘어가는지 모를 뿐 아니라,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새 길을 찾으며 푹 빠져들지 않는다면, 이 동네 아이들로서는 한두 해 뒤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옛적 전통놀이’로만 남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 어울려 놀아야 서로 다름을 배웁니다 ..  (80쪽)


 아이들은 놀아야 합니다. 어른들 또한 놀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놀지 못하고 놀 겨를이 없으며 놀 동무를 찾기 힘듭니다. 어른들 또한 놀지 않으며 놀 돈이 없다 투정인 가운데 놀 겨를에 돈벌이를 걱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로서로 놀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내 몸과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이런 모습이 하루하루 이어집니다. 우리 손으로 일구는 문화란 어느 결에 가뭇없이 사라지고, 남이 차려 주는 밥상을 받아먹듯 구경만 하는 문화만 자리잡습니다. 돈을 들여 마을잔치나 큰잔치를 벌여야만 놀이가 이루어지는 듯 생각하고 맙니다. 스스로 조촐하게 즐기며 나누던 잔치와 놀이는 새롭게 움을 트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저는 동네 골목길에서 아이들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놀이가 없는 아이들을,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을, 놀이를 모르거나 잊은 아이들을 찍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싱그러운 넋과 얼을 듬뿍 보여주는 아이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골목길 아이들을 찍어야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해맑은 마음과 꿈을 가득 드러내는 아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골목동네 아이들을 담아야 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 아름다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였습니다 ..  (111쪽)


 편해문 님 사진책 《소꿉》은 우리 나라에서 우리 어른들이 내버리거나 내팽개친 ‘놀이’와 ‘사람’과 ‘삶’이 골고루 어우러져 있습니다. 놀이하는 사람과 놀이하는 삶이,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 있는 놀이가 고루 어깨동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 찍는 솜씨’나 ‘사진 멋지게 나오도록 하는 재주’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이런 솜씨나 재주를 부린다면 사진맛은 아주 망가져 버립니다. 어린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어린이 눈길과 눈높이와 눈썰미가 되어야 하며, 찍는 내가 찍히는 나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산을 찍을 때에도 그러하고, 바다를 찍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모델을 찍든 먹을거리를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찍는 나를 잊거나 잃지 않으면서 ‘찍고 찍히는’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과 손길이 만나야 합니다. 편해문 님 사진에서는 이 ‘길’들이 곱고 부드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사진책을 찬찬히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한국사람 눈길로는 참 가난해서 못나고 모자라다’고 여기는 이 아시아 나라들 어린이들은 ‘그나마 한국에서 놀이를 좋아하는 어른 한 사람이 사진으로 남겨 주어’서 뒷날 이 아이들 삶자락을 찾아보려고 할 때에 좋은 이야기로 남을 수 있겠다고.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아이들 놀이는 누가 담지? 누가 담았지? 누가 얼마나 담았지?’

 이 나라 사진쟁이들은 이 나라 아이들 놀이를 사진으로 담았을까요? 이 나라 사진쟁이들은 이 나라 아이들 삶을 사진으로 담았을까요? 이 나라 사진쟁이들은 이 나라 아이들을 둘러싼 여느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을까요?

 틀림없이 우리 나라에서도 ‘어린이 놀이와 삶’을 다룬 사진책이 몇 가지 나왔습니다. 이름있고 이름없는 숱한 사람들 작품에 ‘어린이 놀이와 삶’이 드문드문 섞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뿐입니다. 무언가 살가운 새길을 찾아보지 않습니다. 어딘가 새롭고 즐거운 새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고여 있거나 묶여 있거나 멈추어 있습니다. 다른 일에 너무 바쁘고, 돈벌이에 지나치게 매이며, 예술만 말하는 예술로만 뻗어 갑니다.


.. 어른들은 가짜 놀이로 아이들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  (160쪽)


 앞으로 열 해쯤 뒤에? 아니면 다섯 해쯤 뒤에? 또는 스무 해쯤 뒤에? 누구보다도 편해문 님 살림집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가 뛰노는 모습이 담긴 ‘이 나라 어린이 놀이 모습 사진’이 《소꿉》에 이어 《고무줄》로, 또 《돌》로, 또 《줄》로, 또 《구슬》로 차근차근 거듭나고 새로워질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이리하여, 마지막에는 더도 덜도 아닌 《놀이》로, 또는 《어린이 놀이》로 똑부러지게 빛나는 사진책 하나 우리 아이들한테 신나는 선물로 내어줄 수 있는 날을 손꼽아 봅니다. (4342.10.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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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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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 교실혁명’을 꿈꾸려 한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0] 후쿠타 세이지, 《핀란드 교실혁명》



 엊저녁 서울 하계동으로 마실을 갔습니다. 제 둘레 가까운 분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인천부터 가자면 멀고, 아기는 집에서 쉬어야 하니 혼자서 길을 떠납니다. 용산까지는 빠른전철을 타고, 용산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탑니다. 그런데 청량리까지만 가는 전철이 석 대 잇달아 들어옵니다. 청량리를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고달프게 기다립니다. 청량리까지만 가는 전철이 왜 이리 잦은지 모를 노릇이지만, 서울 위쪽에서 달리는 전철 가운데에는 구로까지만 가는 전철도 잦습니다. 그래서 서울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서울에서도 어느 만큼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지루하거나 고달프게 기다려야 합니다.

 먼길 마실이라 숨을 트고 싶어 외대앞역에서 내려 조금 걷습니다. 외대 앞문에서 석계역 쪽으로 가는 길가 언덕마루에 자리한 헌책방 〈신고서점〉에 들러 봅니다. 퍽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 둘레에도 재개발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많다고 합니다. 어디를 가나 온통 재개발뿐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요즘 서울로 다니는 일터로 들어오는 신문은 꾸준하게 부동산 정보를 다루는데, 엊그제에는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3색 메뉴, 입맛 따라 골라 드세요”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나 수도 없이 새로 허물고 새로 짓느라 법석입니다. 지구자원은 끝없이 쏟아지지 않는데 아파트 짓기는 용하게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치닫습니다. 더구나 ‘입맛대로 골라’ 먹으라는 아파트를 입맛대로 골라서 먹을 만큼 돈이 넉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마도 오늘날 우리 삶터에는 돈이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도 많고 돈이 모자라다 못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도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골고루 나누고 고르게 즐기며 고루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닙니다.

 헌책방은 오랜만에 들를수록 돌아볼 책이 많습니다. 넘겨볼 책이 많고 장만하고픈 책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머니는 가볍습니다. 가벼운 주머니이지만 다문 책 하나라도 더 챙기고프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멈칫멈칫합니다. 그러다가 ‘이코 나라하라(奈良原一高)’라는 일본 사진쟁이 작품 《人間の土地》라는 책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남다른 사진책 이름이라 생각하며 죽 넘기는데 사진이 꽤 괜찮습니다. 책 뒤에 찍힌 책값을 들여다봅니다. 5만 원입니다. 허걱. 꽤나 비싼걸?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책을 새책으로 들여와서 파는 책방에서라면 얼마쯤이었을까 하고. 얼추 8∼10만 원 가까이 하지 않으랴 싶고, 그런 값을 따진다면 몇 만 원 눅게 장만할 수 있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얌전하게 도로 꽂아 놓았다가 다시 꺼냅니다. 사진을 부지런히 다시 넘깁니다. 못 사더라도 사진만큼은 다 보자고 다짐합니다. 사진을 두 번째 다 넘겨봅니다. 다시 꽂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뽑아듭니다. 오늘 장례식장에서 낼 부조돈을 반 덜어내자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오늘 상주로 선 분한테 선물로 드리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고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흙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오래도록 모신 어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허전해지는 마음은 아프고 슬프고 가라앉습니다. 어줍잖으나마 이 사진책 하나로 상주 되는 분이 마음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자서 꿈을 꿉니다.


.. 핀란드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한다. 왜일까? 공부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에게 배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의사만 있다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재가 치밀하게 개발되어 있다 …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건 당연하죠.” 모든 학생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를 하든 말든 선생님한테는 남의 일인 걸요.”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므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교육을 받는 듯했다 ” … (일본에서) 게으르다고 비난받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비난해야 할지 아니면 그들 스스로 공부하도록 키워내지 못한 사회를 비난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  (38∼39쪽)


 장례를 치르는 곳에서 밤을 샙니다. 상주를 서는 분이 생태환경책을 펴내는 출판사 사장인 까닭에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이 제법 모이고, 홍성 풀무학교 식구들도 찾아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모두들 생태와 환경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장례집에서 쓰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그릇과 나무젓가락’이 마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병원이나 업체에서는 이런 물건만 쓰니까요. 참말, 환경운동 모임에서 ‘장례 치르는 일’을 다루는 회사를 하나 차려야 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님들 발길이 끊긴 깊은 밤까지 남은 네 사람은 저마다 방석을 깔개 삼아 한동안 눈을 붙이기로 합니다. 몇 시간이나마 몸을 쉽니다. 아침에 부시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전철역으로 찾아갑니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자전거 타고 오가는 사람을 꽤 여럿 스칩니다. 이 동네에서는 자전거 출퇴근이나 통학을 꽤 하는군요. 그렇지만 자가용이 훨씬 더 많습니다. 기름값이 비싸다느니 무어라느니 하면서도 자가용을 버리거나 떠나보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으레 ‘자가용 더 몰고 더 바지런히 일하면서 기름값 더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더 일하고 더 돈을 벌어 더 기름값을 댈 수 있다 한다면, 그만큼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데에 들일 짬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식구를 살피거나 보듬을 겨를 또한 줄어들며, 우리가 발디딘 이 터전을 보살피거나 지키는 데에는 힘을 못 쏟거나 덜 쏟지 않을까요?


.. 핀란드식 교육제도의 특징을 정리하면 밑바닥을 끌어올리되 위쪽은 제한 없이 개방하는 것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핀란드의 학교는 잘못하는 아이들을 끌어가긴 하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잘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율적으로 배우도록 키우면 아이들은 교사나 어른을 뛰어넘어 뻗어나간다 … 핀란드에서 교과서란 지식을 집대성한 단 하나의 교재가 아니라 하나의 질 좋은 자료로 취급받는다. 따라서 교과서는 공권력에 의한 검정 없이 자유롭게 채택된다. 또 교과서를 사용하여 배우는 일은 있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교과서를 외우게 하는 일은 없다. 교사도 교과서를 획일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방면의 지식이 없다고 해서 결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지식은 불충분하다. 그러니까 계속 배우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다. 즐겁게 배우면 지식은 정착된다 ..  (54, 71, 112쪽)


 어제에 이어 오늘도 책 하나를 붙잡습니다.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조금 도톰한 책입니다. 얼핏 보기에 부피가 있는 듯하지만 282쪽짜리 책이고, 글자가 크며 빈자리 많고 줄사이가 넓어서 속알맹이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사람이 쓴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덜어낸 알맹이가 많은데다가, 일본사람이 쓴 줄거리에 한국사람이 달아 놓은 보탬말이 거의 같은 이야기라서 금세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 ‘좀더 가볍고 작고 단출하게 엮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좀더 값싸면서 야무지게 꾸밀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아쉽습니다. 1만 5천 원짜리 282쪽짜리 책이 아니라 1만 원짜리 220쪽짜리 책으로 꾸밀 수 있었고, 손바닥으로 쥘 만한 작은 판으로 엮어 종이를 한결 아끼면서 8천 원짜리 책으로도 여밀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책이름이 말하듯이 《핀란드 교실혁명》이라 한다면, 이러한 이야기를 담아서 나누려는 우리들부터 ‘책 만들기 혁명’을 살필 수 있어야 한결 알맞거나 슬기롭거나 반가웠을 테니까요.

 한편, 한국사람이 보탬말을 붙인 대목은 적잖이 거추장스럽습니다. 굳이 보탬말을 붙이지 않아도 일본사람이 처음 적은 글만으로 ‘핀란드는 이렇게 가르치고 배운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이렇게 알아듣는 동안 ‘한국은 핀란드와 달리 어느 대목에서 모자라거나 안타깝거나 못났거나 슬프다’는 이야기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탬말을 달아 놓을 자리에 ‘핀란드 교육 이야기와 학교제도’를 좀더 실어 놓았다면 이 책이 더욱 알차고 아름다웠겠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힘든 노릇일까요? 우리한테는? 제도권 입시지옥을 스스로 뜯어고칠 줄 모르는 우리들은 조금 더 낮은 자리를 헤아리면서 마음밥 하나 튼튼하게 나누는 일을 하기가 더없이 어려울까요? 우리로서는?


.. 평가는 모두 힘을 합쳐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지 서열을 매겨 학부모가 학교를 고르게 하려는 의도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다 …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생각하는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 분명했다 … 교사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말을 거는 것이다 … “일본이라면 one부터 ten까지를 한 단원으로 묶고, white, red 등 10가지 색을 한 단원으로 묶어서 단원별로 단어를 외우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시험을 계속 치르겠죠. 그런데 여기는 어떤가요?” “학급의 목표는 정해져 있지만 개인의 진도는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배우는 데도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리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반복시켜서 억지로 외우게 하지 않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목표를 부과할 수 없습니다.” ..  (83, 103, 107, 110쪽)


 똑같은 옷과 똑같은 연속극과 똑같은 스포츠와 똑같은 회사일과 똑같은 사랑놀이뿐 아니라, 똑같은 학교와 똑같은 아파트와 똑같은 도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우리들은 《핀란드 교실혁명》 같은 책을 읽으면서 어느 만큼 달라지거나 새로워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저 지식조각으로 읽는 책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 삶과 교육과 문화와 마을을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자고 하는 길잡이로 삼는 책이 될까요. 그예 심심풀이땅콩처럼 한 번 읽고 치워 버리는 책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 넋과 얼을 추스르고 가다듬으면서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도록 이끄는 책이 될까요.


.. 양호교실 보조교사가 말했다. “경계를 만들기 때문에 차별이 생깁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아이들 각자가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뿐인데 말이죠. 뒤떨어졌다든지 특수하다든지 하는 구별은 하지 않아요.” … “아이들은 제각각이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죠. 핀란드에서는 아무 말 없는 아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떠드는 아이는 답을 찾아낸 것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생각해서 먼저 답을 찾아내는 아이도 있고 복잡하게 생각해서 시간이 걸리는 아이도 있겠죠. 그러니까 수업을 할 때도 기다리는 시간이 깁니다. 대개 기다리다 보면 어떤 학생이든 꽤 좋은 답을 만들어냅니다. 반응이 느린 아이가 할 수 없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수업 중에는 학생에게 멋대로 떠들지 못하게 하고, 답을 알면 손을 들게 합니다 … 잘하는 아이에게만 맞추면 수업은 빨리 진행될지 모르지만, 못하는 아이가 의욕을 잃어버리죠. 아! 일본은 한 반이 40명이라고요? 20명이면 기다릴 수 있지만 40명은 기다리기 힘들겠네요. 음, 20명 이상은 무리예요.” ..  (159, 212∼213쪽)


 종각역에서 내려 광화문 신문로 쪽으로 걷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똑같이 숱한 양복쟁이들 숲을 헤치면서 걸어갑니다. 숱한 양복쟁이들은 저마다 몸담은 건물로 들어가고, 저 또한 숱한 건물들 가운데 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제 일터가 있는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갑니다. 5층밖에 안 되는 건물이지만, 3층이나 4층을 다닐 때 계단을 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10층짜리 건물이라면 3층과 4층뿐 아니라 8층과 9층도 으레 승강기를 타겠지요. 10층까지 계단을 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20층 아파트에서 18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고향동무들과 만나 술 한잔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걸어갈게. 잘들 들어가라.” 하고 인사했더니 모두들 손사래를 쳤습니다. “야, 너네 집이 어딘데 걸어가?” “걸어가도 한 시간 조금 더 걸릴 뿐인데, 뭐.” “어떻게 그런 거리를 걸어다니냐?” “옛날엔 다 걸어다녔잖아. 난 지금도 그 길을 그냥 걸을 뿐이야.”

 고향동무들 가운데 자가용 안 모는 사람은 저 혼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향동무가 아닌 책마을 선후배 가운데 자가용 없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몇 안 됩니다. 어제 장례집에 자가용 몰고 온 분이 있기에, “집도 바로 옆이라면서 이런 자리에는 택시를 타고 오시지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우리가 택시만 타고 돌아다녀도 자가용 몰 때보다 훨씬 적은 돈이 들 터이며 차댈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험값이니 뭐니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만큼 지구와 우리 삶터를 더욱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일이 있으면 빌리면(렌트카) 되고요.

 어쩌는 수 없는 어줍잖은 생각입니다만, 우리 스스로 운전면허증을 가위로 싹뚝 잘라서 버리는 매무새까지 가 닿지 않는다면 《핀란드 교실혁명》이 수십만 권이 팔리더라도 우리 교육 얼거리는 늘 제자리걸음이거나 뒷걸음에 그치리라 봅니다. 저마다 형편 때문에 자가용을 장만하더라도, 타야 할 때만 타고 되도록 멀리하는 매무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핀란드 교실혁명》을 가슴찡하게 읽고 새기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고 말리라 봅니다.

 삶을 바꾸어 주는 책이 있기도 하지만, 삶을 바꾸어 주는 책을 바라기 앞서 내 삶을 바꾸는 가운데 만나는 책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야 책이 책 그대로 보이며, 내 삶을 바꾸는 동안 책에 담긴 알맹이가 꾸밈없이 내 마음밭에 속속들이 스며듭니다. (4342.10.26.달.ㅎㄲㅅㄱ)


 ┌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2009)
 ├ 글 : 후쿠타 세이지 / 옮긴이 : 박재원, 윤지은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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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무의 노래
아와 나오코 지음, 김난주 옮김, 정지현 그림 / 달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3 ―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잊은 우리 삶이라면
 : 아와 나오코, 《바람과 나무의 노래》



- 책이름 : 바람과 나무의 노래
- 글 : 아와 나오코
- 그림 : 정지현
- 옮긴이 : 김난주
- 펴낸곳 : 달리 (2009.8.10.)
- 책값 : 9500원


 (1) 아침이슬과 저녁햇살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엊저녁, 인천 부개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 〈책사랑방〉 나들이를 할까 생각하면서 전화를 겁니다. 헌책방 〈책사랑방〉 아저씨는 책을 사러 밖에 나갈 때에는 가게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 퍽 길게 울리는 동안 받지 않습니다. 안 계신가 하고 끊으려 할 무렵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낯선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인사를 여쭙는데, 생각대로 낯선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아, 최종규 씨세요? 예전 오○○ 사장님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고규태라고 합니다. 열흘 전에 갑자기 책방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열흘’이라는 말마디에 움찔 놀랍니다. 꼭 열흘 앞서는 한글날이었고, 한글날 앞뒤로 해서 〈책사랑방〉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느라 짬을 도무지 못 내고 있던 터에 여러 달째 찾아뵙지 못해 궁금하기도 하고 책도 보고 싶었거든요. 조금 더 바지런을 떨었다면 예전 아저씨가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미적미적 바쁘다는 핑계로 어수선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헌책방 〈책사랑방〉을 새로 이어받은 분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책과 책방과 헌책방을 좋아하는 일하고 헌책방 일꾼이 되어 책살림을 꾸리는 일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전화로 이날 저녁에 만나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부랴부랴 전철을 탑니다. 오늘 따라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이 퍽 늦습니다. 전철을 타니 기사가 안내방송을 합니다. “제 시간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더 늦어지고 있습니다. 객차가 혼잡하오니 다음 열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퇴근시간에 십 분이 훨씬 넘도록 늦어 버린 전철을 보내고 다음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빠른전철을 용산부터 탔으니 제법 널널하긴 했지만 영등포역에 다다르자니 어느새 미어터지고, 신도림역과 구로역에서는 장난이 아닙니다. ‘히유, 오늘도 이렇게 악다구니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미워하고 밀치고 하면서 짧지 않은 동안을 오징어떡이 된 채로 견디어야 하는가?’ 송내역에서 내려 느린전철로 갈아탈 때까지도 북새통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이런 북새통에서 손에 책을 쥐고 있는 사람은 제 둘레에 저 빼고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들 귀를 틀어막고 손전화로 텔레비전 보기에 바쁩니다. 아가씨들은 연속극이나 김연아를 보고, 아저씨들은 한국시리즈 야구경기를 봅니다. 손전화로 화투를 치거나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밀리거나 밀치거나 밟히거나 밟거나 서로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손전화에만 박아 놓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지옥철에서는 책읽기로는 마음을 넉넉하거나 너그러이 다스릴 수 없을는지 몰라. 이런 지옥철에서 날마다 시달리는 채 젊음과 늙음을 다 보내야 하는 요즈음 도시사람한테는 유행노래와 연속극과 영화와 운동경기 아니고서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지 몰라.’

 찡긴 몸을 송내역에서 가까스로 빼내고 한숨을 돌리면서 북새통 지옥철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을 고쳐야겠다고 느낍니다. 모두들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저 또한 불쌍한 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사이가 아니라 매섭게 눈알을 부라리면서 빈자리를 날름날름 노리는 남남이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하거나 거룩한 책으로 마음을 알뜰하게 채워 놓는다 할지라도, 이 지옥철을 타면서 사랑과 평화와 믿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일이란 하느님이나 부처님한테나 바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서 막 전철을 탈 때에는 거의 기울던 해님이 송내역에서 느린전철로 갈아타고 부개역에서 내릴 때에는 어두움으로 바뀝니다. 시간을 살피니, 이즈음은 땅거미가 찬찬히 내리며 도시 골목길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상을 마주하거나 숨바꼭질 마무리를 짓는 무렵이구나 싶습니다. 제 어릴 적을 돌아본다면, 얼른 저녁밥상 물리고 잽싸게 다시 밖으로 뛰쳐나와서 깊어가는 밤까지 숨바꼭질을 이어가는 저녁나절 첫무렵이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학교 끝나고 오락실에 처박혀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아차차, 이렇게 늦게까지 오락실에 처박혀 있으면 집에서 들통이 나는데.’ 하면서 근심걱정에 가득 쌓인 채 두려움에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가던 무렵이었고요.

 헌책방 살림을 이어받은 시인 아저씨는 “최종규 씨는 모든 책은 헌책이라고 말하셨는데, 저는 헌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세상에 나오는 책들이 갈수록 지혜는 적어지고 모든 분야에서 처세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춰 놓고 있”다는 생각을 덧붙입니다. “인문학 책에까지도 그래요.” 하고 한 번 더 덧붙입니다. 당신은 이 헌책방이 문닫지 않게 하고 이어받은 일이 참으로 기쁘다면서, “헌책방이란 영원히 다다르지 못할 듯하던 책을 만나는 곳”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시인 아저씨 말이 아니어도, 제 생각은 시인 아저씨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책이 헌책이기에 어떠한 책을 읽든 우리들은 책을 가까이하며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아니, 참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새사람이 되었음을 느끼지 못하거나, 새사람이 되었어도 새마음으로 새일을 새롭게 붙잡는 매무새를 간수하지 못할 뿐입니다.

 헌책방 일꾼이 된 시인 아저씨한테 “길든 짧든 헌책방 일꾼으로 지내며 겪고 본 이야기를 일기로 적어 보셔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신 다음 아슬아슬한 막차가 아직 안 끊길 무렵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포에서 형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우리 집 고장난 셈틀을 어찌어찌 고쳐 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형이 이야기하는 대로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켜고 몇 가지 드라이버 풀그림을 내려받고는 책상셈틀에 옮겨놓고 깝니다. 그렇게 세 가지를 더 깔아 놓으니 비로소 책상셈틀이 예전 모습대로 돌아옵니다. 형한테 고맙다고 말하고는 이제 책상셈틀을 끕니다. 요 며칠 동안 사들인 책을 조금 넘기다가는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그러고 이튿날 새벽 여섯 시 이 분에 일어나,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아침에 글을 좀 쓸까 하다가 그만두고, 어젯밤 못 다 읽은 책을 마저 펼칩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일 분에 집을 나섭니다. 어제 아침과 똑같은 지옥철에 부대낍니다. 오늘은 옆과 뒤에서 그지없이 못난 아저씨들이 팔꿈치로 밀고 신문으로 쑤시고 그럽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아봅니다.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 억척스레 신문을 쫙 펼치고 읽으려는 아저씨를 노려봅니다. “야, 뭘 째려보는데?” 외려 큰소리입니다. 피식 웃어 주고 고개를 돌립니다. 이게 나이값인가 하는 생각, 이런 나이값으로 당신 집식구한테도 그런 모습밖에 못 보여주느냐는 생각, 참말 안쓰럽고 딱한 삶을 붙잡고 있는 아저씨라는 생각, 이런 사람하고는 말대꾸를 할 값어치가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사람을 윽박지른다든지 꿀밤 한 대 먹일 값어치조차 하나 없다는 생각입니다.

 못났구려 사람들 생각은 잊자고 다짐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책에 좀더 힘을 줍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았던 끝물 나팔꽃에 살짝 맺힌 이슬방울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하루 쌀쌀해지면서 겨울 들머리에 다가선 하루하루를 살갗으로 차근차근 느끼면서 내 마음자리는 이토록 씁쓸하고 못난쟁이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힘쓰고 애쓰자고 다짐합니다. 내일부터는 집에서 새벽 여섯 시에 나와야겠습니다. 








 (2)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수 있는 가슴


 1943년에 태어나 1993년에 세상을 떠난 아와 아야코라고 하는 일본사람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습니다. 이 작품은 1973년에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적이 예전에도 있었나 궁금한데, 옮겨진 적이 있든 없든 자그마치 서른 해를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나라안팎에서 제법 사랑받는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문득, 제 고향 인천에서 수채그림을 늘그막까지도 즐기며 동화를 쓰는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쓴 동화를 읽을 때에도 이 작품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이 작품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당신 작품을 책으로 내고 싶어 출판사를 알음알이하니, 출판사마다 하는 말이 “할머니 동화는 참 좋기는 한데,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내기가 어려워요.” 하는 대꾸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수채그림 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넘는 곳에 있는 골목동네에는 시와 동화를 쓰는 나이 지긋한 가시버시가 있습니다. 두 분은 예순일곱 나이임에도 시쓰기와 동화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는데, 예순일곱 할머니가 쓴 동화 또한 퍽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당신들 오랜 삶과 생각과 땀과 슬기와 사랑이 담긴 동화는 나라안에서 제대로 빛을 못 봅니다. 당신들이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었거나 미국사람이었거나 유럽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비슷한 작품이라면 나라안 작가들 땀방울보다 나라밖 작가들 땀방울을 추켜세우는 우리 나라이니까요. 나라안 창작 작가들은 작품모음을 펴내기 힘들고, 나라밖 창작 작가들은 한국땅에서 큰 어려움없이 작품모음을 쏟아낼 수 있으니까요.

 우리 나라에 훌륭한 작가가 많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라밖 작가는 안 훌륭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뜻있고 생각있고 사랑있는 작가들 작품은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우리 삶터라는 소리입니다. 나라밖 좋은 작품이 꾸준하게 옮겨지는 일은 반갑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과 넋에 걸맞는 작품을 일구려는 손품이 몹시 모자라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쓴 아와 아야코 님 작품은 참 좋습니다. 따순 바람결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고, 향긋한 나무결이 살며시 스며 있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싱그러운 노래와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노래가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동화란, 아니 동화를 떠나 문학이란, 아니 문학을 넘어 글이란 이렇게 엮어내는구나 하고 가슴을 톡 건드립니다.


 (3) 가만히 들여다보기


 지난 8월 28일에 처음 손에 쥐고는 그날 곧장 읽어 버린 《바람과 나무의 노래》입니다. 좀 쉬었다가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한달음에 끝까지 달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러면 안 돼’ 하고 생각하면서 책상맡에 한 달 남짓 얌전하게 올려놓았습니다. 아무리 반갑다 하여도 이렇게 읽어치우면 속탈이 날 수 있으니 차근차근 삭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한달음에 읽어치운 책’을 마음으로 삭일 수 있겠다 싶어 다시 한 번 책장을 넘기며, 그동안 내 마음밭에 한 알 두 알 자리잡은 글월을 새롭게 곱씹어 봅니다. (4342.10.20.불.ㅎㄲㅅㄱ)


[9, 19쪽]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어요. 어디서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게다가 이 산에 이런 꽃밭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 참 신기한 일이었어요. 나는 이 산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숨겨진 길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멋진 꽃밭과 친절한 새끼 여우의 가게도 있고 말이죠. 나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어요.

[25쪽] 산초나무는 가난한 농가의 밭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 거치적거리니까 베어 버릴까 싶어.” 농부가 말했어요. “그래요, 여보. 이 나무가 없으면 채소를 좀더 심을 수 있잖아요.” 농부의 아내가 대답했어요. “하지만 엄마, 이 나무를 잘라 버리면 산초나물은 못 먹잖아요.” 그렇게 말한 것은 이 집의 딸 스즈나였어요. “하긴 그렇구나.”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산초나물은 정말 맛있지.” 그래요. 산초의 새 잎은 봄의 음식에 향긋한 냄새를 더해 주지요. 하지만 스즈나는 산초나물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어요. 산초나무를 베어 버리면 산초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36쪽] “스즈나가 시집을 간대.” “이웃마을에 사는 부자에게 간다던데.” “광이 스무 개나 있는 집이래.” “듣자 하니, 대단한 집안이라더군.” “그럴 만도 하지. 스즈나는 미인이잖아.” 산타로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그저 먼 산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스즈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니까, 부자가 되겠네.’ 그런데 산타로네 집은 나날이 기울어 갔습니다. 엄마가 몸이 허약해져 산타로가 가게를 운영하게 된 후로는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죠. 손님은 근처에 새로 생긴 가게에 빼앗기고, 지붕은 태풍에 날려가고. 그런데다 산타로는 장사 수완이 하나도 없었지요. 경단에 쓸 팥조차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산타로네 찻집의 명물 경단은 끝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51, 53쪽] 감자와 우유가 아주 맛있는 북쪽 지방 어느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 어귀에 의자를 만드는 젊은이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지요. 이 젊은이가 만드는 의자는 모두 튼튼하고 앉으면 편안한 느낌이 절로 들었죠. 어느 날, 이 젊은이가 귀여운 흔들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나, 정말 멋진 흔들의자네. 누가 주문한 거야?” 아내가 감자 스튜를 만들면서 그렇게 물었지요. “주문은 무슨, 우리가 쓸 거야.” “우리가 쓸 거라고! 하지만 누가 앉는데?” “우리 아이가 앉을 거야.” … 젊은이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빨간색을 칠해도 그 아이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자 슬퍼서 어쩔 줄을 몰랐죠. 어제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고 물과 하늘도 그 색을 볼 수 없다고.”

[119쪽] “에이, 겨우 이거뿐이에요?” 설탕은 네모난 종이봉투 속에 겨우 한 숟가락 정도밖에 들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 이렇게 맛있는 게 집집마다 다 있는 건 아니야. 엄마는 옛날에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이건 네가 다 먹으렴.”

[131∼132쪽] 아기 빗방울은 아주머니의 바지자락에 매달려 떼를 썼어요. “여름 동안 비를 뿌려 주면 설탕을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네, 그랬잖아요?” “이런 멍청이. 비에게 보답을 하면, 해님에게도 바람에게도 보답을 해야 되잖아.” 아주머니는 아기 빗방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서 개미들이 핥을 설탕도 없다.” 아주머니는 그런 말을 뱉고는 저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밭 저 너머에 있는 설탕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습니다. 그때야 아기 빗방울은 엄마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 ‘엄마는 이제 없어.’ 그제야 아기 빗방울은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였습니다. 응석받이 아기 빗방울이 응석을 떨쳐 버리고 분노를 알게 된 것이.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아기 빗방울은 혼자 중얼거렸어요. 훌륭한 어른이 되면 이 마을에 큰비를 내려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집이고 밭이고 다 떠내려 가게 할 거야.” 그런 말을 내뱉은 아기 빗방울은 엄마의 은 물뿌리개를 껴안고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171쪽] “뭐가 그리 답답하다는 것인가?” 거북은 목을 다시 움츠리면서 물었어요. 어부 료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쉴 틈도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라 하는 말입니다.” “쉴 틈이 없다! 그거 바람직한 일 아닌가.” “하루하루가 바빠서 그물을 손질할 틈도 없는데 바람직은 무슨 바람직이랍니까. 그물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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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 아르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21 ―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책이름 :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글 : 조안 말루프
- 옮긴이 : 주혜명
- 펴낸곳 : 아르고스 (2005.11.7.)
- 책값 : 9800원



 (1)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요 며칠 사이,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일하러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굳이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나 저한테까지 자리가 나기 일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가 있어도 안 앉아서 제가 앉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빈자리에 앉은 다음 ‘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안 앉으려 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제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쩍 벌리거나 화장품 냄새를 너무 짙게 내거나 엉덩이가 팔꿈치로 밀거나 하면서 고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 견디다 못해 슬쩍 눈을 찌푸려 보기도 하지만 못 본 척입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서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제가 앉던 자리가 비며 제 앞서 서 있던 이가 앉곤 하는데, 이분들은 좁거나 말거나 끝까지 잘 앉아서 가시고, 또 이내 잠들며 곯아떨어집니다. 저로서는 딱히 내 자리를 내어준다는 생각이 있지도 않습니다만, 제 앞에서 빈자리 얻는 분들 가운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침저녁 미어터지는 때에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분이 드물게 있습니다. 어이하여 이런 때에 이 전철을 타시나 싶어 안쓰러운데, 이분들은 틀림없이 이분들 다른 일이 있어서 이때에 꼭 타야 했겠지요. 이때 제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지만,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어머니나 어버이를 마주칠 때에는 으레 서 있곤 합니다. 아이들이며 어버이며 답답하고 힘들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지만, ‘자리에 앉은 다른 분’들 가운데 힘들지 않은 분이 없을 테니, 아기를 안고 있든 다리 아파 괴로워하는 어린이 손을 붙잡고 참으라고 말하고 있든 마음써 주는 모습을 보기는 더없이 힘듭니다. 도시 문명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만큼도 안 되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하기는. 찻길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푸른불이 들어와도 버젓이 가로지르는 자동차나 버스가 퍽 많으니까요. 건널목 가운데쯤을 지나고 있어도 부웅 지나가는 차가 꽤 되니까요.

 그렇지만, 자가용을 살금살금 모는 이 또한 많고, 골목에서 아이들을 널리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달리는 이 또한 많습니다. 빵빵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이 또한 많으며, 멈춤줄에 잘 멈추며 건널목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곧바로 달리지 않고 더 기다려 주는 이 또한 많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에는 두 다리로 걸으나 전철과 버스를 타나 자가용을 몰거나 자전거를 끌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볼썽사납습니다. 이웃을 헤아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갑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숨쉴 틈 얼마 없이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도 공짜신문을 쫙 펼치면서 옆사람이나 앞사람 머리통이나 얼굴이 신문으로 긁히도록 하는 사람들한테 치이며 광화문 한글학회로 온 오늘 아침, 등판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하루일을 엽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 아기이든 아는 사람 아기이든 안아 본 적이 있을까?’ ‘그 사람들은 당신 어린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여 옴쭉달싹 못하고 있을 때 그예 밀어붙이기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너덧 살짜리 아이는 서서 가도록 하고 당신들은 오래오래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그 사람들은 당신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왜 사랑하고 있을까?’

 한참 셈틀에 눈을 박고 일하자니 눈이 아픕니다. 화면을 끄고 뒷간으로 가서 오줌을 누고 낯을 씻은 다음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람이 퍽 거세게 부는 오늘은 서울하늘조차 꽤 파랗습니다. 파랗고 높은 하늘에 하얀구름 조금조금 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 날은 골목마실 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어느 사무실이든 건물 안쪽에 깃들어 있고, 어느 사무실이든 한낮 햇살 따갑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때에도 형광등 불빛을 환하게 켜 놓고 있습니다. 낮밥 때가 되어 이때만이라도 불을 꺼 놓고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니, “사람이 있는데 왜 불을 끄고 있어?”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는 낮밥 먹는다며 밖으로 나가십니다. 다른 일꾼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슬며시 다시 불을 끕니다. 다문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만이라도 한낮에는 창문으로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거나 쉬거나 단잠을 자거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가을을 이 가을답게 느끼고 이 파란하늘을 이 파란하늘로 느끼며 이 거센 바람을 거센 바람으로 제 살결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2)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읽기


 지난 9월 22일부터 읽고 있던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라고 하는 199쪽짜리 책을 다 읽습니다. 하루면, 아니 몇 시간이면, 아니 인천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전철길이면 큰 어려움 없이 다 읽을 만한 부피인 작은 책인데, 금세 읽어치우자니 몹시 아쉬워서 읽고 쉬고 읽다가 멎으면서 10월 19일 아침에 끝을 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나 읽던 지지난주, 책 한귀퉁이에 몇 마디 생각부스러기를 끄적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놀랍도록 반갑고 기쁘며 좋은 책을 하루아침에 써냈을는지 모르는데, 이러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이가 온삶에 걸쳐 배우고 삭이고 가르치고 나눈 끝에 어느 하루 온힘을 모아 책 하나를 써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웬만한 거의 모든 책은 몇 해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쓰는 가운데 한 권으로 모두어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피와 땀이며 사랑과 믿음이며 깃든 책을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만 반가움과 기쁨을 맛보기에는 참으로 아쉽고 아깝고 슬프지 않습니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내 마음을 채우고 덥히고 북돋워야지 싶습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환경학을 가르친다는 글쓴이 조안 말루프 님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책에 갇히거나 연구실에 매인 지식으로는 다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내 이웃과 우리 터전인 자연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매무새로 생물학을 가르치고, 사람과 자연이 도시나 시골에서 슬기롭게 어울리는 길을 일러 주는 환경학을 가르치겠구나 싶습니다.

 이 책에 처음 붙은 이름은 “Teachi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우리 말로 옮기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로 고쳐썼는데, “나무를 가르치고, 숲한테서 배우기”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나무를 꼬옥 안아 보는 데에서 뗀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몸으로 껴안아 보지 않고서는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 가슴으로 느껴 보아야 비로소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 나무란 사람과 같은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지 않고 어찌 나무를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 우주가 깃든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려고 다가서지 않으며 나무를 배운다든지 다룬다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나무를 나무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껴안는 일도 드뭅니다. 나무라는 낱말은 다 알고 있겠지만 나무라는 삶과 목숨은 제대로 모릅니다.

 이와 비슷하게 책을 살포시 껴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흙길을, 물과 바람을, 어린이를, 할매 할배를, 무지개를, 비와 구름을, 산과 들을, 논과 뻘을, 바다와 시내를, 골짜기와 들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쉬우나마, 또 모자라나마 이 같은 작은 책이라도 한 권쯤 읽으면서 우리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거나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걸어갈 앞길에 좋은 마음벗을 사귀고 좋은 마음스승을 모실 수 있으면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3) 슬쩍 들여다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한 줄 두 줄 스며든 대목을 차근차근 되짚으면서, 이 알맹이를 섣부른 지식조각이 아닌 마음밥으로 잘 받아먹자고 다짐합니다. 밑줄을 긋거나 별을 그린 몇 대목을 옮겨적어 봅니다. (4342.10.19.달.ㅎㄲㅅㄱ)


[15쪽] 숲에서는 특별한 향기가 난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날은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숲 향기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자연림이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나무와 이끼, 새와 곤충이 함께 호흡을 섞던 그 먼 과거에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도 이런 향기가 나지 않았을까?

[16쪽] 우리는 숲을 잃고도 우리가 진정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30쪽]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요즘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것이 보호해야 되는 대상이라면 불편해 하는 마음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는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을 하면 학생들은 금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몸을 비튼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두가 깊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숨쉬는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듯이, 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33쪽] 짚신벌레, 뱀, 나무에게서 누가 경이로움, 경외감, 존경 따위를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이들도 경이로운 존재이며,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44∼45쪽] 나는 양버즘나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는 아홉 마리의 곤충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아마 내가 모르는 곤충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양버즘나무 한 그루를 벨 예정이라면 어쩌면 그 나무 위에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될 아이 하나와 최소한 다섯 종의 곤충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내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무는 환경을 이루는 한 요소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환경이구나.”

[55쪽] 사람들은 곰을 먼저 죽이고, 그리고 나서 너도밤나무 숲을 죽인다. 친구와 내가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나무는 대부분 벌목을 당한 후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벌목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고요함 때문에 숲은 더 슬퍼 보였다. 막 잘려나간 나무 밑동은 수액으로 젖어 있었고 남아 있는 나무들은 무력하게 잘려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린 나무들이 집이나 가구를 만들 목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짓이겨져서 버려지거나 태워 없어진다. 그나마 가장 나은 건 나무 판지를 만들기 위한 펄프로 가공되는 경우다. 이 숲의 주인은 이렇게 나무를 통째로 내어줘도 아주 적은 돈을 받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나무를 베냐고? 그것은 너도밤나무가 가치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40년이 지나도 이 너도밤나무들은 지금보다 더 자랄 뿐, 여전히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다.

[61쪽] 그 순간 우린 우리의 잘못을 깨달았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하늘다람쥐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버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죽은 나무들조차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내는 것이다.

[69쪽] 더 슬픈 것은 이곳이 이 근처에 남은 마지막 활엽수림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있던 나무들이 베어지던 날 이곳에 살던 새들과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숲 주위에 이들이 거처를 옮길 만한 곳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73쪽] 하지만 산림 관리원이 당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룡뇽과 도마뱀, 그리고 소나무좀을 유용한 양식으로 보는 새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는 건강한 숲에 사는 소나무좀은 절대 소나무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76쪽] 딱따구리가 둥지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1년에서 6년이 걸린다 … 놀랍게도 이들이 주로 먹는 먹이는 바퀴벌레였다. 우리는 바퀴벌레를 먹어 주는 이 새를 사랑해야 한다.

[78∼79쪽] 다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나무를 단지 자원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 “이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늙고 아름다운 나무는 없어.” 그렇다. 노목들은 죽음이 얼마 안 남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나무들이다 … 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에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숲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어린 나무와 젊은 나무만 있을 뿐이다.

[91∼92쪽] 바구미의 일생이 경이로운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 곤충들의 행동을 쫓아서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성충바구미가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112쪽] 내가 꽃밭에 아카시아 나무를 두기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 자연은 그것을 두기로 결정했고, 자연의 선택이 가장 옳다는 걸 안다. 나는 나무와 싸우기를 멈추고 그냥 물러서서 두고보았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이제는 15미터가량이 되어서 정원의 한 구석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무는 이제 나의 쉼터다.

[127쪽] 종이를 값싸게 얻기 위해 숲을 아름답게 수놓는 붉은꽃산딸나무 꽃을 포기할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129쪽] 나는 내 손 안에 있는 종이가 나무뿐만 아니라 딱정벌레와 아름답게 지저귀던 새들과 벌레를 잡아먹던 박쥐 같은 다른 생명들이 사라진 대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작은 도시에 단지 나 하나라는 사실이 몹시도 슬프고 외로웠다.

[140쪽]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과 노후를 대비하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정작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숲과 산호초와 강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일에는 무신경하다.

[159쪽] 공원 조성 책임자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숲길을 걸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곳의 나무들을 판 돈으로 공원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숲이 지금 그대로 보존되길 바라는 나로선 그들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60쪽] 드디어 어느 날 경고도 없이 벌목 기계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173∼174쪽] 나는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성이 우리의 모든 환경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들은 지구와 나무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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