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엄마! 마음이 자라는 나무 21
유모토 카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엄마가 내려준 ‘고운 목숨’ 선물을 깨닫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9] 유모토 가즈미, 《고마워, 엄마》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그리 안 많습니다. 좀더 오래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보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그리 안 많기 때문에 한 마디 두 마디 오래오래 되새기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 마디 두 마디 더욱 곰곰이 돌아보고 한결 깊이 가슴에 새기고자 하지 않나 하고도 느낍니다.

 제 고향이며 삶터는 인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볼일을 보자면 서울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저는 운전면허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면허를 딸 생각이 없고 자동차 장만하거나 굴릴 주머니가 없으니 자전거로 시잉씽 달리거나 전철을 탑니다. 혼자 지낼 때에는 으레 자전거를 달렸고, 옆지기와 함께 살면서는 전철을 즐겨 탑니다.

 옆지기와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갈 때는 으레 출퇴근 발걸음으로 붐비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에서 살짝 벗어난 때이곤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은 많기만 했는데, 요 몇 달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때에 움직이니 그야말로 옴쭉달싹 못하면서 사람들한테 시달립니다.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고달프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제가 시달리는 만큼 제 옆에 선 다른 사람들도 다 다른 느낌과 크기와 세기로 시달리고 있으니, 서로서로 매한가지이거든요. 다만 하나, 서로를 들볶는 사람들 매무새가 고달프고 괴롭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얕거나 모자란 움직임과 몸짓에 치이고 밟힐 때에 쓰라리고 슬픕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저나 형을 따끔하게 나무라던 말 가운데 하나를 요사이 아주 뼛속 깊이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 앞을 지나다니면 안 돼.”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어디로 가려고 할 때 앞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이 앞으로 지나가지 말고 뒤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어기면 따끔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좁은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마루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으시면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쉬가 마려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고, 제발 어른이 제가 안절부절 어디로도 못 가고 있음을 느껴 주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바랐습니다.


.. 나는 물론 아빠의 장례식을 지켜보았으며,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빠의 얼굴에서 살아 있을 때와는 다른 뭔가를 느끼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 엄마도 나도 언젠가는 아빠처럼 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너무도 밝고 힘차서, 내가 두려워하는 그런 어두운 구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그럭저럭 학교에 도착하고 나면 엄마가 걱정이었다. 아빠처럼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 이 시각에 나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22∼25쪽)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타려고 달려듭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어느새 달음박질로 빈자리를 하나씩 꿰찹니다. 실랑이를 벌이기 싫고, 갑작스레 새치기하는 사람하고 다투기 싫어 으레 그냥 서서 갑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때에도 내리는 사람들은 우르르 쏟아지며 달음박질인데 저 같은 사람은 손쉽게 밀치고 밟으며 ‘먼저 자동계단에 타려’고 애씁니다. 저는 자동계단을 안 타고 돌계단만 밟으니 어차피 자동계단 쪽으로 가지 않으나, 옆이고 뒤고 제 앞으로 휙휙휙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표를 끊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람들 매무새는 무시무시합니다.

 이 같은 아침저녁 전철길에 모질게 시달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옆지기와 아기를 다시 만날 때 잔뜩 절고 지치고 힘이 없습니다. 쉬 짜증을 부립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고 차가워지고 쌀쌀맞고 맙니다.

 경쟁을 바라지 않고 경쟁을 하기 싫으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살고 싶기에, 제아무리 큰돈을 선물로 준다 할지라도 이렇게 뭇사람 물결에 휩쓸리는 일은 힘듦을 넘어 가슴이 아립니다. 왜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듯 뜀박질을 하며 ‘내가 더 먼저’와 ‘내가 더 빨리’와 ‘내가 더 많이’가 되어야 할까요. ‘나와 네가 함께’나 ‘나와 네가 나란히’나 ‘나와 네가 즐겁게’로 거듭나기는 어려운가요.

 모두들 똑같은 ‘어머니’한테서 아름답고 맑은 목숨 하나 선물로 받은 몸일 텐데, 우리는 왜 내 몸이나 네 몸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나요. 왜 우리 몸을 서로서로 맑게 돌아보거나 건사하지 못하나요.


.. 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편지를 내밀었다. “오사무네 엄마, 아기가 새로 태어나니까 오사무는 필요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오사무더러 가지 말라니, 정말 너무해. 오사무가 너무 불쌍해.” 나는 세탁비누 냄새와 탕약 냄새가 밴 할머니의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눈물과 콧물과 침을 묻혔다. 얼마 후, 내가 얼굴을 들어올리자 할머니는 밤이 든 양갱을 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마구 뒤섞여 있던 목 안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양갱이 넘어가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  (115쪽)


 우리 어머니라고 안 서두르며 살지는 않았으나 ‘괜찮아!’ 하고 짧게 내뱉으며 우리 몫을 덜 가지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몫이 더 있다고 해서 우리가 더 배부르지 않음을 넌지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견주어 훨씬 배부른 데에도 우리 몫까지 얌체처럼 가로채더라도 ‘괜찮아!’ 하고 아쉬움 없는 한 마디를 뱉어냈습니다.

 우리 옆지기를 돌아봅니다. 우리 옆지기는 ‘괜찮아!’를 꺼내지 않으나 ‘됐어!’를 꺼냅니다. ‘우리가 안 가져도 돼!’를 꺼냅니다. 우리 두 손에 든 몫은 거의 없거나 텅 비었음에도 ‘됐어!’를 꺼냅니다.

 저는 옆에서 허전하다고 느끼며 ‘뭐여? 굶으라고?’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래, 조금 굶는다고 우리는 죽을 일이 없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우리 살림에 은행계좌 숫자가 늘어날 턱이 없으나 그 밑바닥하고 이마를 맞대는 얼마 안 되는 숫자마저 선선히 털어내어 (우리보다 그 돈푼을 바라는 자리에 있는 고운) 이웃한테 어느새 다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 예전에 엄마와 내가 살고 있던 그리운 그 방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좁고 이렇게 천장이 낮은 방에서 살았던가 하고. 그렇지만 덜거덕거리는 덧문을 열자 포플러는 변함없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턱에 자그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나의 모습과 식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  (158∼159쪽)


 지난주에 제 새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이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오고, 다음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옵니다. 석 주에 걸쳐 세 가지 책이 나옵니다. 그동안 밀려 있던 책입니다. 이 세 가지 책을 한꺼번에 그러모아 음성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보낼까, 아니면 세 번에 걸쳐 따로따로 보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전화를 자주는커녕 가끔도 잘 안 하는 주제이니, 세 번 따로따로 편지와 함께 책을 부쳐야 옳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체국에 갈 겨를이 거의 없으나, 가방에 책 담은 편지꾸러미를 늘 넣어 놓고는 낮나절에 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얼른 우체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들내미 새로운 책을 얼마나 기쁘게 맞아들이며 즐겁게 읽어 주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아들내미 책을 놓고 이런저런 느낌이나 생각을 꺼내어 본 적이 없으니, 잘 썼다고 여기는지 엉터리라고 여기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즐겁고 흐뭇하게 편지 몇 줄을 적어 보내려 합니다. 따로 말씀이 없어도 저 스스로 잘 쓴 책이라면 잘 썼고, 잘못 쓴 책이라면 스스로 잘못 썼음을 깨달아야 할 노릇이겠지요.

 책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 석 자이지만, 제 이름 석 자가 책 하나에 새겨지기까지는 내 어버이가 쏟고 들인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을 돌아본다면, 제가 쓴 책은 제가 쓴 책이라기보다 제 몸뚱아리와 손길을 빌어 내 어버이와 내 어버이를 낳은 또다른 어버이와 또다른 숱한 어버이들이 빚은 열매요 보람이라고 느낍니다. 저로서는 이 피와 땀과 사랑과 믿음을 제 책들에 알알이 담았는가 못 담았는가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든 다음에, ‘그때는 참 젊었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살아야 해.” 평소 욕심 많고 질투심 많고 독설가였던 할머니가 그런 가슴 찡한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외증조할머니의 딸이다. 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가 정해 준 상대와 얌전하게 결혼하여 자식 넷을 키웠는데, 역시 그 할머니에게도 마음껏 다 살지 못한 자신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  (글쓴이 뒷말/182쪽)


 이야기책 《고마워, 엄마》를 읽습니다. 어머니가 ‘작품 주인공’ 만한 어린 날부터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음을 ‘작품 주인공’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작품 주인공이 보낸 어린 나날에 주인공네 어머니가 ‘어린 주인공이 앓고 겪고 부대끼는 슬픔과 생채기’가 덧나지 않도록 하려고 오래도록 말없이 참고 기다리고 헤아리고 있었음을 ‘주인공이 어머니가 된 다음은 아니고, 주인공이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시나브로 깨닫도록 마련해 놓고 있는 줄을 깨닫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옆지기는 딸이 아닌 어머니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딸아이한테 무엇을 느끼거나 깨닫도록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 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보낸 삶이 먼 뒷날 우리 딸아이가 ‘제 엄마 아빠 나이’로 다가설 즈음 무엇을 느끼도록 할까요. 우리 삶자락이, 우리 삶자취가, 우리 삶결이 우리 딸아이 앞날에 어떤 이야기로 다가설 수 있게끔 일구거나 가꾸거나 보듬거나 껴안고 있을까요.

 엄마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딸이 있습니다. 딸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뒷날 스스로 엄마가 됩니다. 스무 해이든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어느 만큼 햇수를 살아내면서 차근차근 ‘목숨 선물’을 사랑과 믿음을 실어 물려줍니다.

 틀림없이 아침저녁으로 지치는 몸이 되고, 지치는 몸에 따라 지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히유 한숨 한 번 몰아쉬면서 새삼스레 이맛살 주름을 문질러 지우고 곰곰이 되씹습니다. 나를 들볶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누군가한테 ‘아이’요 모두들 ‘어머니’가 있는 고운 목숨임을 느끼고자 합니다. 아직 이이들 스스로 누군가한테 ‘아이’요 ‘어머니’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지만, 언젠가 모두들 제자리를 깨닫고 고운 목숨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엄마는 엄마이기에 고맙고, 나는 나이기에 고맙습니다. (4342.11.25.물.ㅎㄲㅅㄱ)


 ┌ 《고마워, 엄마》(푸른숲 펴냄,2009)
 ├ 글 : 유모토 가즈미 / 옮긴이 : 양억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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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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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 사진은 세상을 모르는 만듦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7] 박태희 옮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 글(이야기) : 필립 퍼키스, 막스 코즐로프, 존 브레이버맨 리바인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09.9.27.)
- 책값 : 8000원


 (1)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진


.. “당신은 왜 그토록 선생 말을 믿는가요?” ..  (8쪽)


 세상에 나온 지 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이제 말을 하려는지 혼자 종알종알댈 때가 잦습니다. ‘엄마’와 ‘아빠’ 같은 말은 아주 또렷하게 합니다. 다른 말도 곧잘 따라합니다. 아직 자주 넘어지지만 집에서고 밖에서고 쉬지 않고 뛰고 엉덩방아 찧고 합니다. 옆지기는 슬슬 걱정합니다. 이 아이한테 앞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딱히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옆지기한테 미안합니다. 그러나 굳이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 결대로 살아갈 때가 가장 좋으니까요.

 다만, 아이가 아이 결대로 살아가기에 지금 우리 세 식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름답거나 좋으냐입니다. 아이가 이웃집에서 또래동무를 사귄다든지 동네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배울 이야기가 있느냐입니다. 아이가 흙을 밟고 만지고 뒹굴면서 걱정없이 놀 수 있느냐입니다. 풀을 알고 나무를 알며 새를 알고 들짐승을 알 수 있느냐입니다. 꽃이든 곡식이든 푸성귀이든 손수 심고 기를 수 있느냐입니다. 이런 테두리에서는 아이를 그대로 두면서 아이 결에 따라 아이 스스로 배우고 부대끼며 살아가도록 놓아 줄 수 없습니다. 따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를 따지고 둘을 살피면, 큰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작은도시라 하여도 아이를 키우는 데에 썩 좋기는 어렵겠구나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살림살이로 갈 만한 시골이 있을까 잘 모르겠고, 시골이라고 해서 가장 나은 길이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흙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뭇목숨이 고르게 어울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즐거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단단한 가방끈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높은 이름값보다 더 믿음직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옆지기와 저는 서로서로 날마다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터를 어디로 옮기든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든 재개발이 안 되는 가난한 동네를 찾아내고 새집을 얻어 지낼 수 있으면, 이 도시에서도 슬기롭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음악(재즈)이 들렸어요. 나도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 예술은 늘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지향합니다.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인들》을 통해서 그의 내면과 더불어 1950년대 미국의 현실을 동시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사진이 워커 에반스의 사진보다는 더 파격적입니다.” “35mm 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고 낭만적이며 생생함이 살아 있지요. 블루스, 재즈의 느낌입니다 … 숨소리가 들리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지요.” ..  (21∼22쪽)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을 때 빛살이 좋은 곳이 어디인가를 여쭙는 글을 읽습니다. 깊은 새벽에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또박또박 댓글을 달아 놓습니다. ‘골목길 빛깔을 제대로 느끼고 싶으시면, 제가 몇 군데 적바림한 동네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셔요. 그러면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하루 내내 해가 어떻게 걸려 있고 소리와 바람과 빛살과 사람이 어떻게 복닥이며 섞이는가를 그저 온몸으로 껴안아 보셔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느끼고 나서 사진기를 찾아들고 걸어다니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고스란히 예술입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아주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그저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늘 제가 다니는 곳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1992년부터 다닌 헌책방에서는 단골이나 손님이 아닌 그예 ‘헌책방 이웃’이요 ‘헌책방 동무’입니다. 우리 아버지 또래 아저씨들이 일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이웃’입니다. 저하고 열 살 안쪽으로 나이가 벌어진 분들이 꾸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동무’입니다. 아버지 또래하고 동무 또래 사이에 있는 분들이 가꾸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길벗’입니다. 오래도록 헌책방에서 나란히 숨을 쉬었고, 같이 책을 만졌으며, 서로서로 어울렸습니다. 제가 헌책방을 담는 사진은 작품이 아니고 예술이 아니며 그저 삶입니다. 제 삶이며 헌책방 일꾼 삶이고 헌책방이라는 책쉼터 삶입니다.

 지난 2007년에 돌아온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골목길을 사진에 담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는 저 스스로 제 삶터가 골목동네이고 제 모든 동무들은 골목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이제 숱한 동무들은 골목동네를 떠나 아파트나 빌라에서만 삽니다. 아직까지 골목동네에 남은 어릴 적 동무는 몇 안 됩니다.

 저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거나 충북 충주에서 살 때에 늘 작은 집이나 방에서 지냈습니다. 제 터전은 작았고, 제가 건사하는 책을 놓을 자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제 터전’보다 훨씬 넓은 자리를 책한테 내주며 지냈습니다. 인천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세 식구 지내는 살림집은 따로 조촐하게 마련했습니다. 지난겨울과 지지난겨울에 살던 곳은 겨울이면 집안에서도 물이 어는 썰렁한 옥탑집이었고, 올겨울을 나는 곳은 추위에도 제법 따뜻한 오래된 벽돌집입니다. 올겨울을 앞두고 이 집에서는 글을 쓰거나 밥을 할 때에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겨울까지 살던 살림집에서는 집안에서도 두툼한 겉옷을 껴입고 언손을 호호 녹이며 지내야 했습니다. 지난 1995년부터 부모님 집을 나와서 살림을 한 뒤로, 저로서는 처음으로 ‘안 추운 겨울’을 맞이하겠다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지냈던 제 살림집에서는 겨울이면 집안 온도가 영 도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 “무엇보다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이 좋습니다 …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면 그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선 정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묻고 있는 사람에게 귀 기울일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이 어떨지 감을 잡을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나요? 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나요? …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야 합니다. 셔터를 누를 때, 그저 관찰자로서 편견을 버리고 최대한 대상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  (35, 40∼42쪽)


 흔히 일컫기를 헌책방은 어둡고 낡고 퀘퀘한 곳입니다.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을 이웃집 삼아 드나드는 제가 느끼기로 헌책방은 어두울 때에는 어둡지만 밝은 구석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낡을 때가 있으나 새로울 때가 나란히 있는 곳입니다. 퀘퀘할 때가 있으나 싱그러울 때가 골고루 있는 곳입니다. 어두우나 어둡지만 않고 밝으나 밝지만 않습니다. 두 얼굴을 즐겁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헌책방을 사진으로 옮길 때에는 두 얼굴을 함께 느끼면서 기쁘게 바라봅니다. 낡은 모습을 담는 한편 새로운 모습을 담으며 뿌듯하다고 느낍니다. 퀘퀘한 모습을 찍는 가운데 싱그러운 모습을 찍는 동안 가슴속 깊이 사랑과 믿음을 키웁니다.

 으레 이야기하기를 골목길은 사라지는 곳이요 재개발로 밀어붙여 아파트로 바꾸어야 할 ‘주거환경개선 지구’입니다. 웬만한 사람들(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목길을 추억이나 옛날 옛적 터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이 되어 골목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골목집(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골목길을 사라지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공무원이나 아파트 주민이 보기에는 주거환경개선 지구일지라도, 우리와 같은 이곳 골목이웃은 스스로 ‘고향마을’이요 ‘삶터’입니다.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곳이며, 내 어버이가 나를 낳아 기른 곳입니다. 복닥이면서 하루하루 살림을 이어온 곳이고, 넉넉하지 않다지만 우리 식구 밥벌이를 이루도록 해 준 일터입니다. 이리하여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을 때에는 바깥에서 골목을 바라보는 대로 드문드문 ‘주거환경개선 지구’다운(?) 모습을 찍어 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눈길로 골목길을 담지 않습니다. 골목길 나들이를 하면서 추억어린 모습을 살풋살풋 찍을 수 있습니다만, 저한테는 골목길이 삶이요 현실이기 때문에 추억어린 모습은 한 장조차 찍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보기에는 참 비좁고 우중충하다 싶은 제 살림집인데, 이런 살림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옆지기와 아기를 사진으로 담으면서 우리 삶이 우중충하다거나 꾀죄죄하다거나 어둡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아기가 웃으면 웃는 대로 울면 우는 대로 우리한테 고맙고 기쁘며 거룩한 삶입니다. 신나고 재미나고 놀라운 하루하루입니다. 밥숟갈을 들듯 사진기를 듭니다. 밥그릇을 비우듯 필름을 쓰고 메모리카드를 채웁니다.

 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제 사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부대끼는 삶입니다.


 (2) 살아가는 눈으로 살아가는 목소리를 뽑아내기


.. “인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원래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진이 우울하고 어둡거나 입자가 거칠다면 실제로 그곳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원래 보았던 것을 그대로 옮길 뿐입니다 … 먼저 셔터를 누릅니다. 자기 표현에 대한 생각은 부차적입니다. 자기 표현은 저절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  (24, 25, 28쪽)


 지난 2005년 2월에,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눈빛)라고 하는 얇은 책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얇은 책 하나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책방 〈이음아트(이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빈자리 많고 사진 몇 점 안 담았으면서 150쪽으로 엮었고 책값은 7500원씩이나 붙였다고 투덜거리면서 이 책을 사들었습니다. 하루 아닌 한 시간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다 읽은 뒤 한 번 더 읽었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삭이면서 좀 비싸게 붙인 책값이 그리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이라 한다면 비싸구려 책값이지만, 두 번 볼 뿐 아니라 거듭거듭 되읽으면서 책꽂이에 오래도록 꽂아 놓을 책이라 한다면 알맞춤한 책값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올 2009년 9월에,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라고 하는 또다시 얇은 책이 나옵니다. 이번 얇은 책은 고작 94쪽이며 책값은 8000원이고 사진은 석 장 담깁니다. 이번에도 서울 혜화동 〈이음아트〉에서 이 책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이 얇은 책뿐 아니라 《The Sadness of Men》(Quantuck Lane Press,2008)이라고 하는 도톰한 사진책 하나를 함께 만납니다. 2005년 필립 퍼키스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박태희 님이 옮긴 둘째 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인데, 박태희 님은 아예 출판사 ‘안목’을 등록해서 이번 얇은 책 하나를 내놓고,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 하나를 정식수입해서 한국에서 이이 작품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습니다.

 책 두께와 책값을 살피고는 빙긋 웃습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사람한테 군더더기 말을 길게 늘어놓는다고 사진을 더 잘 읽거나 더 잘 느끼거나 더 잘 찍거나 더 잘 나누겠나?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들으며 새길 말만 새겨도 되지.’ 8000원짜리 가냘픈 책을 사듭니다. 오만 몇 천 원짜리 사진책까지 함께 살까 하다가, 비닐이 뜯긴 모습을 보며 ‘다음주에 와서 사자’고 생각합니다. 비닐이 뜯긴 책이니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분 사진책을 이 책방에 들를 때에 구경해 보도록 놓아 주고 싶습니다. 〈이음아트〉 일꾼은 책손이 ‘비닐 감긴 책’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면 서슴지 않고 비닐을 북북 뜯어서 얼마든지 구경해 보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어쩐지 미안해서 저는 꼭 살 책만 살핀 다음 책값을 치러고야 비닐을 뜯습니다. 이번 이 책은 어차피 살 생각이지만, 제가 사고 나면 비닐 뜯긴 책은 없어질 테니, 이렇게 열려 있을 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보면 좋겠다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 “요즘 학생들의 사진은 달라요. 사진이 정보에 가깝습니다. 디지털 매체는 당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내지요. 정보의 양이 많아진다고 풍부한 감성이 담기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감정의 톤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선 디지털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제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8×10뷰 카메라와 삼각대를 스고 싶지는 않아요. 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지금의 사진은 90프로가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아이디어로 끝납니다. 사진가는 아이디어를 갖고 주제를 찾아나서거나 아이디어를 완성해 냅니다. 나머지 10프로의 사진들만이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로 가서 눈앞에 있는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본 결과물이지요 … 거의 모든 것이 계획된다고 보면 됩니다 … 지금 우린 방안에 앉아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지 못한 실제는 어디에도 없어요.” ..  (31∼33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었는데,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그야말로 군말 한 마디 섞지 않습니다. 알짜 말만 펼칩니다. 그런데 알짜 말만 펼친다고 해서 딱딱하다거나 따분하다거나 골때리지 않습니다. 생채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더도 덜도 먹지 않고 꼭 알맞춤하게만 풀을 먹듯, 필립 퍼키스 님은 우리 마음밭에 피가 되고 살이 될 말만 콕콕 집어서 들려줍니다. 책을 마무리하며 옮긴이 박태희 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프랑스 요리를 생각해 보세요. 결코 손님을 배불리 먹이지 않습니다. 좀 부족한 듯 느껴지면 아쉬움이 들고 손님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반면 미국 요리는 배가 터질 만큼 많은 양으로 쉽게 질려 버리지요.(89쪽)” 하고 당신 삶을 보여줍니다. 이에 옮긴이 박태희 님은 “그래도 전 배부른 편이 좋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필립 퍼키스 님은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저도 이 대목을 끝으로 책을 덮으며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그러면서 차분히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건대, 제 삶에는 ‘군말 없이 알짜 말만 콕콕 집어서 펼칠’ 때가 있는 한편, ‘군말 알짜 말 가리지 않고 배터지게 늘어놓는’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때 가운데 어느 때가 더 낫다고는 따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저 두 모습은 모두 제 모습이라고 느끼며 어느 쪽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삶은 군더더기 없는 대로 좋고, 군더더기 믾은 삶은 군더더기 많은 대로 좋습니다. 가끔은 떡이 되도록 술을 퍼부으며 몸을 괴롭히며 마음을 달래니까요. 날마다 더도 덜도 말고 꼭 알맞게만 한두 잔을 즐기면 하루 마무리가 흐뭇하지만, 때때로 좀 넘치는 날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때때로 아무것도 안 먹고 조용히 지나가도 괜찮고요.


..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변화와 다양함은 형식에 있기보다 내용에 있습니다 …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오로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행위에 모든 의미와 모든 예술과 모든 감정들이 일어나도록 나를 맡기는 겁니다 … 그야말로 위대한 사진들은 ‘나’의 능력만으로는 나올 수가 없어요.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  (44, 47, 76쪽)


 사진책 《The Sadness of Men》를 처음 집어들었을 때에는 후루룩 넘겼습니다. 두 번째로 사진을 볼 때에는 조금 더디 넘깁니다. 세 번째로 사진을 살필 때에는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그러고 네 번째로 더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먼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라고 하는 얄팍한(얇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책을 읽어내고 이 사진책을 펼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말을 보아도 좋으나, 말을 보고 사진을 보아도 좋으니까요.

 어느 사진쟁이 작품을 살필 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먼저 보고 그 사진쟁이 삶을 귀담아 들어도 좋지만, 그 사진쟁이 삶을 먼저 들여다본 다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들여다보아도 좋습니다. 저는 으레 뒤쪽 길로 갑니다. 작품이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 사진쟁이 삶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피거나 돌아봅니다. 그 사진쟁이 삶자리를 가만히 짚고 그 사진쟁이가 걸어간 발자국을 곰곰이 톺아봅니다.


.. “나이가 들고 죽음에 다가갈수록 내 자신은 줄여 가려고 노력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사진을 배웠던 안셀 에덤스가 내게 남긴 교훈입니다. 그는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사진 속에 집어넣고자 했어요 … 사진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매체라는 것입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입니다 …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73, 81, 82쪽)


 어느 문화 갈래와 예술 갈래가 안 그렇겠습니까만, 늘 살아 있는 눈이어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나를 보고 너를 보며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옳고 즐거운가를 느껴야 합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내 작품으로 담아내고, 내 작품에 담아낸 내 삶을 내 이웃들하고 오순도순 나누려는 매무새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사진으로 돈을 벌든 사진 아닌 일로 돈을 벌든, 무엇보다도 사진이 내 삶이어야 합니다. 돈이야 어떻게든 무슨 일을 해서든 법니다. 살림이야 어떻게든 꾸립니다. 제가 살림을 잘 못 꾸리면 옆지기가 고단할 테지만 옆지기가 당신 몸을 바치며 짊어집니다. 사진하는 사람은 당신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묻어날 뿐 아니라, 당신 삶이 그예 사진일 수 있게끔 가다듬고 맞추어야 합니다. 글쟁이한테도 그림쟁이한테도 책쟁이한테도 노래쟁이한테도 춤쟁이한테도 연극쟁이한테도 영화쟁이한테도 기자쟁이한테도 정치쟁이한테도 회사쟁이한테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저마다 제 일로 삼고 길로 여기는 한 가지를 제 삶으로 추슬러 내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이름쪽을 내밀 수 있어요. 아니,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름쪽을 내밀지 않아도 맞은편에서, “아,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군요.” 하고 알아보면서 꾸벅 절을 합니다.


..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할수록 작업이 더 형편없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성공하면 계속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그 음식을 다시 먹고 싶은 것과 같아요. 하지만 두 번째 먹을 때는 첫 번째보다 맛이 덜하고 세 번째 먹을 땐 슬슬 지겨워져요 … 유명해진 후에도 작업이 발전한 예술가의 이름을 자신 있게 대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최근에 예술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졸업과 동시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도록 장려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로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상업적인 작가 양성에 혈안이 된 거지요 … 절대 학생들의 비전을 바꾸려고 시도해선 안 됩니다.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판단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84∼86, 87쪽)


 사진책 《The Sadness of Men》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이 뚝뚝 묻어 납니다. 글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은 알알이 배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살피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쪽에서 가슴울림을 느끼든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려고 이이 책을 우리 손에 쥐느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 이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사진찍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느냐입니다.

 먼저 내 몸가짐을 다소곳하게 매만져야 합니다. 먼저 내 매무새를 얌전하게 고쳐야 합니다. 먼저 내 넋과 얼을 아름답게 돌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The Sadness of Men》하고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립니다. 이렇게 하면 이 두 책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사랑노래가 내 가슴팍에 꽂힙니다. 이렇게 하면 이 책장 글줄과 사진 마디마디에 깃들어 있는 눈물과 땀과 웃음과 꾸덕살을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에, 내가 외롭지 않도록 내 사진길을 북돋우며 나 또한 그이를 북돋울 수 있는 좋은 사진동무가 손을 흔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진밭은 온통 ‘세상을 모르는 만듦사진’뿐이지만, 이 만듦사진 울타리를 훌훌 떨쳐내면서 해맑은 ‘삶사진’을 씩씩하고 다부지게 이루어 갈 내 애틋한 사진길을 홀가분하게 내디딜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쁨이요 슬픔인 내 삶입니다. 사진찍기는 눈물이요 웃음인 내 삶자락입니다. 사진쟁이는 바보이면서 일꾼입니다. (4342.11.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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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06 : 문닫을 책방 〈이음아트〉와 늙은이 책

 서울 혜화동은 ‘대학로’라는 이름이 따로 붙어 있습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대학교에서 내는 신문 이름은 ‘대학신문’입니다. 혜화동에는 아무런 대학교가 없으나 ‘대학로’이고, 관악구에만 대학교가 있지 않으나 그곳에서 내는 신문은 ‘대학신문’입니다. 그렇다고 나라안 모든 대학 소식을 담는 신문이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혜화동을 대학로라 일컫는다 한들 이곳에 대학생 문화가 숨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혜화동이 모든 대학생과 젊음을 나타내는 문화 터전이지 않습니다. 다만, 혜화동은 우리 젊음과 대학생 숨결을 크게 보여주거나 나타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 혜화동에는 책방이 도무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버티어 내지 못합니다. 물을 팔거나 술을 팔거나 밥을 팔거나 옷을 팔거나 전화기를 팔면 그리 어려울 일이 없으나, 오로지 책을 팔면 어렵습니다. 공연 문화만 문화가 아닐 텐데, 공연 문화는 자그마한 극장에서도 나눌 수 있는 터전이 있습니다만 책 문화는 자그마한 책방에서도 나눌 수 있는 터전이 없습니다. 100만 권을 갖추거나 10만 권을 갖춘 책방이어야 비로소 책 문화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1만 권을 갖추거나 1천 권을 갖추거나 1백 권을 갖춘 책방과 도서관과 쉼터라 한다면 책 문화를 말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삶터를 돌아볼라치면 작은 목소리는 ‘없는’ 목소리요, 낮은 목소리는 ‘따돌려도 좋을’ 목소리로 여깁니다. 돈이 적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거나 ‘게으른’ 사람으로 여기고, 못생기거나 공부를 좀 못하거나 키가 작은 사람은 ‘뒤처진’ 사람이거나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여깁니다. 말이 좋아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 정작 우리 삶은 조금도 “작은 아름다움을 알뜰히 여기어 사랑하는 매무새”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도 “작은 아름다움을 믿고 애틋하게 섬기는 몸짓”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혜화동에서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던 책방 〈논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2005년에 꿋꿋하게 문을 열었던 인문예술 책방 〈이음아트(이음책방)〉 또한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2009년 12월 31일까지만 문을 열어 놓고, 이제는 책방일을 접기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혜화동은 ‘작은 책 문화’와 ‘낮은 책 삶결’을 나눌 수 없는 동떨어진 곳이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혜화동과 명륜동을 잇는 더 작은 이음고리인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은 씩씩하게 힘을 내며 다부지게 한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음아트〉가 문을 닫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다섯 해 이음아트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진잔치”를 마련하기로 하고, 제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사진 69장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사진을 들고 찾아갈 생각인데, 안쓰러운 가슴을 쓰다듬으며 일흔 훌쩍 넘긴 할머니 유선진 님이 내놓은 《사람, 참 따뜻하다》(지성사,2009)라는 책을 넘겨 봅니다.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다 … 노년은 젊음보다 아름답다.(147∼148쪽)” 젊음을 넘어 늙음으로 오래오래 이어갈 작은 책방은 한낱 꿈일까요? 젊음은 젊은대로 아름답고 늙음은 늙음대로 아름답습니다. (4342.11.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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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습 -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티에리 수카르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우유가 나쁜 줄 모르는 당신은 바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5] 티에리 수카르, 《우유의 역습》



 지난 2003년에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이지북,2003)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우리들한테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오래 안 살아도 먹고픈 대로 먹으며 살기를 바라’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 책을 읽고도 우유 마시기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안 읽었어도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는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병이나 팩에 담긴 우유를 비롯해 가루를 낸 우유까지 먹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구르트를 마시고 숱한 유제품을 먹으며 우유를 넣은 빵과 과자를 먹습니다. 우리 둘레에 우유가 섞이지 않은 먹을거리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 어쨌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총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책임감 있고 똑똑한 정치인들이 어째서 유제품이 물, 과일, 채소만큼이나 건강에 필수적인 음식이라고 믿고 국민들까지 설득하게 된 것일까? ..  (34쪽)


 우리가 사서 마시는 우유에는 ‘성분 표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100% 원유로 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00% 오로지 원유라 한다면,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우유를 빚어내도록 해 주는 젖소는 무엇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지, 어떤 물을 마시고 있는지. 어느 소우리나 들판에서 날마다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지. 젖소는 사료를 먹는지 풀을 먹는지. 젖소가 사료를 먹는다고 할 때에는 사료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젖소가 먹는 항생제는 얼마나 되며, 젖소가 짚이나 풀을 먹는다고 할 때에 이 짚과 풀은 어디에서 거두어들인 짚이나 풀인지. 이 짚과 풀에는 농약이나 풀약 들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우유보다 두유가 좋다고 하며 콩물을 사다 마시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사서 마시든 두유를 사서 마시든 이와 같은 마실거리에 ‘어떤 첨가물’이 들어 있는지를 낱낱이 살피는 사람은 드뭅니다. 과일에서 짜낸 물을 담았다는 과일주스이든 콜라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서 가게에서 파는 마실거리’가 어떠한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어떻게 내놓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든지, 이렇게 책으로 나와 주어야 비로소 한 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들여다본 다음에 잊습니다. ‘맛있는걸’ ‘나는 좋은걸’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이 아프지 않은걸’ ‘나중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걸’ …….

 생각줄기를 더 이어 본다면, 우유가 들어간 먹을거리라는 유제품은 어떤 우유를 어떻게 다루어 넣었는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빵집에서 파는 우유식빵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가게에 잔뜩 쌓여 있는 과자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초콜릿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밥집에서 마련해 주는 밥에는, 술집에서 장만해 주는 안주에는 어떤 우유가 들어갈까요.


..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문을 열었다. 바로 아이들을 겨냥한 시장으로, 그 시작은 유아를 대상으로 했다. 당시 농산업계로서는 전략적인 공략이었는데, 어릴 때 얻은 식습관은 평생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 1920년대 말부터 영국의 우유 생산업자들은 ‘우유를 알리기 위해’ 학교에 저렴한 가격으로 우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영양실조를 없애기 위해 애쓸 것’을 약속했다 ..  (37, 39쪽)


 좀더 따지면, 우유 하나만 헤아릴 노릇이 아닙니다. 우유보다 훨씬 많이 먹는 우리들 쌀밥을 곰곰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땅 논밭에서 농약이나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나라 농협은 농사꾼이 비료와 농약을 쓰라고 하는가요, 안 쓰라고 하는가요.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하는데, 김장에 쓰는 배추는 또 어떠한 배추이겠습니까. 약과 비료와 항생제 없이 거두고 있는 배추입니까, 무입니까, 고추입니까. 시금치며 상추며 깻잎이며, 이와 같은 푸성귀에는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제나 항생제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을까요.

 곡식과 푸성귀 말고, 가공식품은 어떠한지를 따지기도 해야 합니다. 과자 한 봉지에, 또 커피 한 봉지에, 또 감기약 한 봉지에는 어떠한 화학성분이 깃들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한테 맞도록 하는 예방주사는 ‘생약’일까요, ‘화학약’일까요. 예방주사는 어떠한 성분을 어떻게 엮어서 만들고 있을까요.

 며칠 앞서 ‘빼빼로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빼빼로 날에 과자 빼빼로를 서로서로 주고받곤 하는데, 우리들은 과자 빼빼로를 주고받으면서 ‘빼빼로 하나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겠습니까. 성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나서도 기쁘게 선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우유 섭취량이 확인된 약 4만 명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사람들의 답변을 골다공증 골절의 위험과 연결지어 검토했다. 그런데 연구진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나왔다. 골절 위험과 관련해서 우유 애호가들과 우유를 전혀 혹은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아이들 대부분은 그(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제대로 소화하지만 일부는 주로 유전적인 이유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소화되지 못한 단백질 조각들은 혈액 속으로 유입되는데 면역계는 그것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파괴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단백질의 일부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 세포와 닮아 있는 까닭에 면역계는 착각하여 췌장 세포까지 파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이는 인슐린을 분비할 수 없게 되어 제1형 당뇨병에 걸리는 것이다 ..  (111∼112쪽)


 누구나 알듯, 우유란 소젖입니다. 소젖이란 어미소가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내어주는 밥입니다. 사람은 사람젖이 나와서 아기를 먹여살립니다. 사람은 엄마젖으로 아기를 키웁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젖은 어린이가 자라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소젖에는 마땅하게도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천천히 자랍니다. 소는 빨리 자랍니다. 송아지는 어미소 배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곧바로 섭니다. 사람은 엄마 배에서 밖으로 나와도 곧바로 서지 못합니다. 거의 돌이 지나야 비로소 서며, 걸을 때까지 퍽 걸립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젖은 아기가 알맞게 자라도록 이끕니다. 하루아침에 선다든지 뛴다든지 하도록 영양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사람 삶에 걸맞게 영양을 내어줍니다. 이와 달리 소젖은 송아지한테 영양을 퍽 빨리 내어줍니다.

 《우유의 역습》이나 예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라는 책에서도 다루지만, ‘빨리빨리 우쑥우쑥 크도록 이끄는 우유’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유를 마시면 ‘사람도 송아지마냥 좀더 빨리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나, 이렇게 빨리 더 크게 자라는 만큼, ‘사람한테 알맞춤한 흐름에 따라서 자라지 않는’ 탓에 뜻하지 않게 병치레를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더디 자라며 더디 살기에 백 살 안팎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빨리 자라며 빨리 살아가는 우리들로 바뀐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될는지는 뻔한 노릇입니다. “인구 집단별 연구들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바로 우유와 동물성 단백질을 적게 먹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한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는 나이지리아의 경우,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동물성 단백질의 비율이 독일에서 조사된 비율보다 10배 더 적고 대퇴골 경우 골절 발생율은 99%나 낮다(100쪽)”는 이야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우유의 역습’이 아니라 ‘우유가 보여주는 결과’는 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아이들한테 우유를 마시도록 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가 무척 가난하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은 우유를 마시면서 자라야 했습니다. 저 또한 국민학교 다닐 때에 학교에서 ‘거의 의무’처럼 우유값을 학교에 내고 날마다 받아서 마셔야 했습니다. 속에서 우유가 받지 않는 아이들마저 우유를 억지로 마시도록 했고, 우유를 마시고 속이 얹히거나 재채기가 끊이지 않아도 반드시 마시도록 했습니다. 이무렵 어느 누구도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크고 튼튼해진다’고만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버이나 교사 또한 ‘우유를 안 마시면 안 된다. 적어도 우유라도 마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유제품을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계속해서 단언하고 있는 네슬레를 비롯한 유제품 기업 연합의 구성원들과 영양학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의사 단체가 왜 이제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 보건 당국과 소비자 보호 및 불공정 거래 감시국의 방관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204쪽)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몸에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식품첨가물이나 화학조미료나 화학성분이 들어간 마실거리라 하더라도 몸에 잘 받으며 맛있고 즐겁게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약을 쳤든 비료를 먹였든 ‘엄마가 해 주는 밥’이면 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유 한 잔보다 ‘자동차 배기가스’ 한 모금이나 ‘담배연기’ 두 모금이 몸에 훨씬 나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제대로 따져 본다면, 우유를 비롯해 배기가스와 담배연기 모두 나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 ‘나쁜 것은 되도록 줄여’ 주어야지, ‘더 나쁜 것도 늘 마시는데 이거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지거나 더욱 나빠지겠어?’ 하는 매무새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유는 우리 삶터에 ‘역습’하듯 불쑥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소젖을 사람한테 먹이려 했을 때부터 ‘부작용’이나 ‘반작용’은 어림할 수 있던 일입니다. 논밭을 밀고 아파트를 지을 때, 산을 깎고 고속도로나 공장을 세울 때, 갯벌을 메워 공항을 닦을 때, 우리 자연 삶터가 더러워지며 우리 사람 삶터 또한 나빠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이란 없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나 맹꽁이 한 마리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 살 수 없는 만큼 우리들 또한 살 수 없는 터전이 됩니다. 맹꽁이 한 마리 뿌리내릴 수 없는 만큼 우리들이 마시는 바람과 물은 끔찍하게 더럽혀지고 매캐해집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분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장사를 하고 영업을 하고 무엇무엇을 하는데 자가용을 안 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가용을 몰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이름값을 얻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히면서 시나브로 우리 사람 삶터를 나란히 더럽히거나 망가뜨립니다.

 우유 한 잔? 뭐, 마셔도 좋고 안 마신다면 더 좋습니다. 우유를 마셔야 하느냐 안 마셔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얼마나 속깊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다듬으며 우리 발걸음과 몸짓을 고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돈을 더 벌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버는 만큼, 더 아름답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더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이웃하고 더 사랑을 나눈다든지 내 아끼는 고운 님하고 더 사랑스럽게 어울리고 싶다면, 이때에도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하지만 돈을 더 바란다면 내 아이와 옆지기하고 보내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내 동네를 살피거나 내 고향마을을 돌아보는 겨를은 마련하기 힘듭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살필 틈조차 줄어들고, 내 어버이나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여쭙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느긋함마저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갈래로 가느냐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돈을 더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를 더 아끼며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한테 입힐 옷과 먹을 밥과 지낼 집과 다닐 학교를 더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에 따라서 ‘우유와 우리 삶’ 이음고리는 달라지고, 우유는 일찌감치 우리 삶을 파고들며 좀먹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식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이다. 나는 포도주 한 잔에 신선한 핸드메이드 치즈를 곁들여 먹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유제품을 소화해 내고 면역계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에 하나쯤 먹는다고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위해 먹는 거라면 괜찮지만 의무적으로 먹지는 말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유제품을 먹도록 계속 권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본다 ..  (머리말)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유가 어떤 마실거리인지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분한테는, 또 지난 2003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를 읽은 분한테는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이나 가공식품이나 화학조미료나 식품첨가물 문제를 일찍부터 헤아린 분한테는 조금도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 형편’을 다루는 부록이 따로 실려 있지 않습니다.

 우유란 ‘완전한 마실거리나 식품’이 아니지만,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 또한 ‘완전한 책’이 아닙니다. 그저, 우유가 어떠한 마실거리인지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덧붙여, 우유가 어떻게 우리 삶터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렇게 널리 마시도록 하는지를 살피지 않았던 분들한테는 끔찍하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4342.11.18.물.ㅎㄲㅅㄱ)


 ┌ 《우유의 역습》(알마,2009)
 ├ 글 : 티에리 수카르 / 옮긴이 : 김성희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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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02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수화로 말해요 - 농인 아내, 청인 남편이 살아가는 이야기
가메이 노부타카.아키야마 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삼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27 ― 사랑으로 말해요, 삶으로 말해요
 : 아키야마 나미+가메이 노부다카, 《수화로 말해요》



- 책이름 : 수화로 말해요
- 글ㆍ그림 : 아키야마 나미, 가메이 노부다카
- 옮긴이 : 서혜영
- 펴낸곳 : 삼인 (2009.8.14.)
- 책값 : 11000원



 (1) 사랑으로 말해요


 북미 대륙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아미쉬 이야기’는 조각조각일 뿐, 이처럼 우리 눈썰미로 아미쉬 마을을 어깨동무하면서 풀어낸 이야기책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나라밖에서 나온 몇 가지 ‘아미쉬 이야기’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두레마을 얼거리와 삶을 책 몇 권을 훑으며 돌아보면서, 좀더 낱낱이 알기가 쉽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을 찬찬히 읽으며, 이들 아미쉬 삶은 더없이 ‘오래된’ 틀을 지키고 있으면서 ‘잘잘못을 함께 껴안고’ 있음을 느낍니다. 문명을 거스른다기보다 ‘제 삶을 고스란히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 아미쉬 마을에는 예배당이 없고 전기가 없으며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전화와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 없습니다. 성경이나 사제나 전도사 또한 없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이 옳다고 여겨도 굳이 당신 이웃한테 당신들 믿음을 퍼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딸아들이 아미쉬 마을에 남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냅니다. 그저, 다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탄소발자국으로 치자면, 아미쉬 마을은 놀랄 만큼 푸른빛입니다. 지하자원을 다른 데에서 캐내지 않으며, 지하자원을 얻으려고 전쟁무기를 갖추어 싸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몰지 않으니 굳이 새로운 물건을 밖에서 사 오지 않습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모두 손수 마련합니다. 가게에서 사는 옷이란 없고, 집 또한 손수 짓습니다. 기름을 쓰지 않으니 기름값이 치솟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인터넷을 열지 않으니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세상일에 얽혀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어느 모로 본다면 따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 ‘산에 가서 혼자 살아라’ 하는 그 말대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시골에서도 텔레비전과 전기와 자동차 없이 살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여기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땅에서는 ‘혼자 살 만한 임자 없는 산’이 없고, 섣불리 산에 들어가 홀로 살려고 하면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예배당이며 성경이며 사제이며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이웃이 다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를 볼 때에는 ‘마을에서 함께 보는 성경을 비로소 꺼내어 읽’고는 도로 제자리에 놓으며, 여럿이 모인 자리는 밥을 한 끼니 나누어 먹고 마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이들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깊고 믿음을 잘 지키며 믿음을 잘 나누고 있구나 싶습니다.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면 놀랄 만한데, 다른 모로 보면 놀랄 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매이지 않고 예배당에 매이지 않으며 사제 말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부터 내려온 ‘올바른 삶’을 붙잡으며 참다운 ‘하늘나라 삶’을 섬기고 따릅니다. 이리하여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자물쇠 없이 살아가고, 도둑이 물건이나 돈을 훔쳐도 신고하거나 앙갚음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몹쓸 사람한테 총에 맞아 죽어도 외려 몹쓸 사람을 용서합니다.

 모든 구석에서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길 수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이들 마을 사람들이 꾸리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말하며 사랑으로 손 내미는’ 매무새는 더없이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옹근 믿음이란 스스로 옹근 삶일 때 비롯하니까요. 가없는 나눔이란 스스로 가없이 나누는 삶일 때 펼쳐지니까요. 열린 사랑이란 스스로 나와 이웃을 고르게 사랑하는 삶일 때 샘솟으니까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책을 읽으면, 여러모로 훌륭한 아미쉬 마을이지만 가부장제 문화라든지 가정폭력 문제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좋은 모습과 나란히 있는 궂은 모습입니다. 모든 곳에서 빈틈없이 좋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나 얄궂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기에 좋고 나쁨을 나란히 안고 있겠지요. 그예 우리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우리들은 끝없는 경쟁과 학벌과 계급과 돈과 욕망과 물질문명과 편리주의와 부동산과 개인주의와 따돌림을 그치지 않으며 자질구레한 시시콜콜 이야기에 꽁꽁 옭매여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이웃하고 나누는 삶을 꾸리지 않을 뿐더러, 내 밥그릇을 반으로 나눈다든지 1/3로 나눈다든지 하면서 이웃사랑을 함께하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학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얼굴과 몸매 가꾸기, 더 크고 빠른 자가용 몰기, 비싸고 높은 집 장만하기에 소용돌이처럼 휘둘리며 대단히 바쁘게 살아갑니다. 숨돌릴 겨를이 없고 이웃을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돌아보거나 가다듬을 새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할 짬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을 건넬 생각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어깨동무하겠다는 매무새가 자리잡지 않습니다.


 (2) 삶으로 말해요


 지난달 저녁나절, 서울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서, 제 옆에 선 할배 둘이 있었습니다. 할배 둘은 큰 몸짓을 하면서 자꾸 제 팔꿈치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책을 읽으며 성가시고 번거롭기에 뭐 하는 할배들인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두 할배는 손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손으로 나누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토록 사람 미어터지는 전철에서 손말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내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겠군.’

 지지난달 저녁나절, 이날도 하루일을 고단하게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이었습니다. 젊은 사내 둘이 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큰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사이에 낀 제가 뻘쭘하도록). 저야 책에 눈을 박으니 아무렇지 않기는 했는데, 목아지가 아파 잠깐 목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옆에 선 두 사내가 손말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렇구나. 이 젊은이들이 입으로 나누는 속삭임이었다면 나란히 서서 갔을 테지만, 손으로 주고받는 말을 하자니 서로 두 걸음쯤 떨어져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밖에 없었군.’

 새로 짓는 지하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으레 합니다. 예전 전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새로 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승강기를 마련합니다. 장애인과 어르신을 생각하는 공사입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는 마련하면서 정작 ‘여느 길가 건널목’ 마련은 제대로 안 하기 일쑤입니다. 건널목은 너무 띄엄띄엄 놓기도 하고, 건널목으로 맞은편으로 가자면 빙 돌아야 하도록 마련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동차가 술술 지나가는 데에만 교통 얼거리를 짜맞추기 때문입니다. 제 고향마을 인천에서는 ‘지하상가 상권을 지켜 준다’면서, 한길가에 건널목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몰든 무거운 짐을 나르든 낑낑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무단 횡단’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새벽 느즈막하게 지하도 문을 열고 저녁 열한 시 무렵에 지하도 문을 닫으니, 이때에는 ‘아주 마땅히’ 찻길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야 합니다.

 우리 옆지기는 몸하고 마음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옆지기가 앓는 장애는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 옆지기와 같은 장애를 앓는 이웃이 꽤 많으나, 정부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이러한 장애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여느 사람들이 이러한 장애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무언가 옳고 알맞춤하게 ‘장애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장애인’일 때에 ‘장애인’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무요 이웃이요 한식구로 지내는지를 터무니없을 만큼 모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서 장애인권 교육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집에서 장애인권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애인권을 다루는 책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 ‘딱한 눈길’로 바라보는 책이요, 불쌍하게 여기려는 줄거리인데, 그나마 이런 책조차 잘 안 팔리고 거의 안 나옵니다. 눈물샘 쥐어짜내는 이야기책은 곧잘 대박을 터뜨린다든지, 《오체불만족》 같은 책은 아주 드물게 많이 팔리는데, 《다르게 보는 아이들》이나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같은 이야기책은, 또는 《도토리의 집(사랑의 집)》이나 《머나먼 갑자원》 같은 만화책은 읽히지도 팔리지도 이야기되지도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으로 들여다보지 않아서라고 할까요. 우리 삶은 오로지 ‘비장애인 눈길’에만 맞춰져 있는 탓이라고 할까요. 우리 삶으로는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며 더 많이 자랑하다가 더 많이 쏟아내야 한다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니, 내 이웃을 아름다이 바라보며 껴안기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니, 내 동무를 훌륭하게 여기며 서로 손 맞잡기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꿈꾸는 삶이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니, 내 식구를 꾸밈없이 받아들이기 벅차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1등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왜 더 낫다는 대학교에 가야 하는가요. 우리는 왜 ‘내 집(이라기보다 아파트) 마련’을 꼭 해야 하나요.

 우리 마을은 나라안팎에서 1등 도시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수출 1위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국민소득이 세계에 첫손으로 꼽혀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 잇는 철길이 두 시간 만에 뚫려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을, 또 서울과 인천을 잇는 물길을 닦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건설비에 들여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삶터를 얼마나 아늑하게 지켜 주고 있습니까.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둘레 농사꾼과 가난한 사람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골목동네 재개발과 재건축과 재생사업과 재정비는 골목동네 사람들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대학교 학문은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꾸는 데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무슨 길을 걷고 있습니까. 딸아들 키우는 우리 어버이는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요. 우리 삶은 무슨 그림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3) 《수화로 말해요》라는 책 함께 읽기


 이야기책 《수화로 말해요》를 읽습니다. 손말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가씨와 입말을 하며 손말을 익힌 사내가 가시버시가 되면서 겪고 복닥이고 부대끼고 헤아리고 맞아들인 여러 삶자락을 담은 책입니다. ‘장애인권’을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장애인 아픔을 외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나도 없는 장애인권 정책을 꾸짖는 책 또한 아닙니다.

 《수화로 말해요》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임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장애인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는 않으나, 장애인인 까닭에 한 번 더 사랑을 받을 만하고 더욱더 사랑스레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살며시 일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 저한테는 아무 힘이 없으나, 저한테는 꿈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 나라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손말(수화)’이 정규과정으로 들어가는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중학교 과정에서 ‘영어와 같은 자리에서 외국어 한 가지’로 배울 수 있도록 교과목을 마련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꿈꾸었습니다. 또는, 고등학교 ‘제2외국어’ 과정으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반드시 배우도록 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교에서는 이를 더 깊이 헤아리며 ‘토익 토플 점수’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통역사처럼 주고받을 만큼 익혀야 졸업장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회사에서 새 일꾼을 뽑을 때에, ‘손말’이나 ‘점글’ 한 가지를 하는 기본조건을 마련하고, 둘 모두를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홀로 품는 꿈이지만, 이 꿈을 사랑스레 껴안으면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새삼스레 거듭 읽어 내려갑니다. (4342.11.17.불.ㅎㄲㅅㄱ)


[33, 100쪽] 나는 부엌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농인의 언어는 수화이므로 시각적으로 확 열려 있는 편이 편리하고 쾌적할 것이다. 만약 농인이 사회의 지배자라면 세상의 건축물 구조는 아마도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하다는 사람도 제법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제삼자를 내세워 말하게 한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무례한 태도다. 농인에게 “당신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요.” 하는 거나 같다.

[41쪽] “아내는 청각장애인입니다.”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생활 감각으로는 ‘청각장애인’이란 말은 서류에서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본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에서 어떤 절차를 밟는 등 정해진 상황에서 쓰는 말이지 평소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아내는 귀가 불편합니다.” “귀에 핸디캡을 갖고 있습니다.”라니,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에둘러 하는 애매한 표현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짜증의 원천이다. 게다가 농인의 핸디캡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수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언어 정책에서 생겨나는 정보적인 핸디캡이기 때문에 사실하고도 맞지 않는다 … 일본 과자점의 견본 앞에서 수화로 말장난을 하며 웃는 우리를 가게의 판매원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도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명을 해 줘도, ‘농’이라는 말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그리고 실감할 수 없다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번역하기 힘든 웃음이다.

[56∼57, 89쪽] 편리한지 어떤지하고는 관계없이 우리는 늘 수화로 말하며 살고 있고, 그것이 창문 너머로는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수화 특유의 대화 예절은 유리창 너머에서도 잘 지켜져야만 하며, 따라서 실은 그러한 장면에서의 적절한 행동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사정이 드라마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수화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보통 때는 농인들이 큰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 놓고는, 이런 데에서만 수화를 조금 보여주고 “수화는 편리하다”며 재미있어 하는 것도 농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 애당초 음성으로 얘기한다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가능한 것이다. 수화통역사에게서 “농인이 구화를 하는 건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 나라 통역사의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61, 86쪽] 한 친구가 “여기서는 집 밖에서 수화를 하면 빤히 쳐다봐.” 하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실제로 레스토랑에서 보통 때 하듯이 수화로 얘기하며 식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똑바로 바라보면 금방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학습해 온 내가 ‘무례하네요.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구요.’ 하는 기분을 담아 노려봤는데도, 그들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를 계속 힐끗힐끗 보면서 소곤거리는 데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이곳 사람들이 지닌 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 나는 청인인 만큼 주변의 청인들의 몰이해한 발언이 전부 내 귀에 직접 들려온다.

[85, 92, 127쪽] “수화는 고유의 문법을 가진 언어예요. 몸짓도 아니고 음성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수단도 아닙니다. 수화를 학습하는 건 일반 어학을 공부하는 것과 똑같이 힘들어요. 수화만을 사용하는 대학이나 학회도 있습니다. 만약 수화가 단순한 몸짓이라면 그런 건 불가능하죠.” … 그런대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까 100퍼센트 들리지 않는 핸디캡이라는 게 정말로 굉장했다. 특히 영어 수업은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커리큘럼으로 되어 있고, 그런 만큼 압박감도 아주 크다 … 수화통역자를 양성해 필요할 때에 지원하는 대학은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대학은 수화통역자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학생끼리 서로 돕는다’, ‘자원봉사 정신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통역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버렸다.

[96∼97쪽] 나는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종별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거북이와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거북이의 가족이 크게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결혼 상대인 내가 ‘장애인이니까’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는 부모님의 성을 잇는 것이 싫어졌다 …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경우보다 농인이기 때문에 차별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느끼므로 여권론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인간으로서 농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 급하다.

[103, 104, 112쪽] 태어난 아이가 청인이라 하더라도 물론 사랑스럽겠지만, 농인 부모에게는 청인인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어떻게 수화를 받아들이게 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 수화를 공부하는 사람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수화를 익혀 ‘봉사’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텔레비전 전화가 있다고 다양한 연락 사무를 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 전화로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120, 131쪽] 수화로 얘기한다고는 하지만 농인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주류 세계의 한 사람이다. 고양이는 그런 존재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다. 칭찬해 주고 싶다 … 그렇게 남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미흡하나마 언어로서 수화를 배우고 수화 통역 업무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143, 146, 178쪽] 그렇게 수화를 우습게 여기는 세계로 꼭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대학이란 세계는 그토록 청인만을 위한 세계란 말인가? … 매일같이 내일은 통역자가 있을까 걱정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농인 한 사람이 수강권 보장 문제로 괴로워하다 병들어 죽어도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 대학의 담당 부서 말은 “수화 통역은 비용이 들어서 붙여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영어-일어 통역은 있는데 어째서 수화 통역은 인정을 안 하는가. 일반 공개강좌인데 만약에 농인이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할 건가.

[156쪽] 연구자들은 참으로 난해한 말을 좋아한다. 좀더 알기 쉬운 말로 쓸 수는 없는 걸까.

[248쪽] 아무 지원도 없이 음성으로 하는 대화나 정보 전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농인에게 고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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