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은종복 지음 / 이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45 ― 맑고 밝게 일하며 살고픈 풀벌레 한 마리
 : 은종복,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이름 :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글 : 은종복
- 펴낸곳 : 이후 (2010.4.1.)
- 책값 : 12000원



 (1)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를 생각하기란


 날이 포근하기에 아이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나왔습니다. 아이는 조금 걷다가 자꾸 넘어집니다. 걸음이 차츰 더디어집니다. 아이가 졸립다는 뜻이로군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아이가 앞쪽을 보도록 안고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면 참 힘듭니다. 팔과 등허리가 몹시 저립니다. 그러나 아이로서는 뒤쪽이 아닌 앞쪽을 보면서 안기고 싶겠지요. 아기수레를 안 쓰는 우리 식구는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다녀야 합니다. 둘레에서 아기수레를 선물해 주거나 물려주겠다는 분이 여럿 있었으나 우리는 안 받았습니다. 아기수레를 밀며 다닐 때에는 아이가 더 다니고 싶지 않아도 어른 마음대로 다니려는 뜻이 있고, 아이가 다리힘을 기르기보다 쉽게 가기를 더 좋아해 버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터전 길은 고르지 않아 아기수레를 밀면 아이 몸에 더없이 나쁩니다. 아이는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야 하며, 아이 다리힘으로는 아직 힘들 때에는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 따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잠들 무렵 옆지기가 아이를 업습니다. 일찍 돌아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는 동안 어린아이 하나를 아기수레에 태우고 어린 두 아이를 걸리고 있는 엄마를 마주 바라봅니다. “진짜 힘들겠네.” 옆지기 입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움직인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천기저귀를 쓰고자 하여도 쓰기 아주 힘들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쓸 때에도 만만하지 않을 테고요. 조금 큰 두 아이가 쫑알거리다가 저희 가고픈 대로 엇갈려 달리면 애 엄마로서는 죽을 노릇입니다. 아이 하나가 저 가고픈 대로 신나게 내달릴 때에도 붙잡기 얼마나 힘든데요.

 아이를 업고 안고 하며 집에 닿을 무렵 아이가 갑자기 깹니다. 낮잠을 잘 때이기에 두어 시간은 자야 하는데 어떻게 깨어납니다. 집으로 오니 말똥말똥 뛰어다니며 놉니다. 얼마 뒤 똥 한 번 푸지게 누고는 다시 신나게 놉니다. 엄마가 아이 똥을 치우는 동안 아빠는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마실을 마치고 금방 돌아온 탓인지 손빨래 비빔질을 하는데 팔뚝이 저려 힘겹습니다. 애벌 두벌 세벌 헹구며 물을 짜는데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따라 빨래를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 빨래를 이 자리에서 마치지 않으면 저녁나절 아이가 잠들 무렵까지 나올 빨래거리는 더 늘어날 테고 이튿날에는 또 생길 테니까요.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빨래를 하고 있자니, 다 마친 빨래를 옆지기가 들고 가서 빨래대에 널어 놓습니다. 모처럼 옆지기 몸이 괜찮아져서 집일을 도와주는구나 싶어 고맙습니다. 힘든 가운데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양말과 아기 웃도리 둘을 마저 빨고 씻는방에서 나옵니다.

 아이는 아침에 치우고 낮에 치운 방을 새삼스레 어지르며 놉니다. 엄마도 아빠도 어질러진 방을 치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둡니다.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참 게으른 사람들이라 여길 만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일 때부터 아이키우기를 해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집일이 얼마나 많고, 많디많은 집일은 그칠 틈이 없는 가운데, 날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크면 종알종알 재잘재잘 말을 신나게 해대며 아빠나 엄마가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하면 이런저런 일 하지 말고 저랑 놀자며 팔뚝을 잡고 허리춤을 끌어안으리라 봅니다.

 다가오는 4월 1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에 나들이를 갈 생각입니다. 저랑 옆지기랑 아이랑 셋이 나란히 나들이를 갑니다. 이날 책방 〈풀무질〉에서는 책방 일꾼 은종복 님이 써낸 책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를 놓고 기림잔치를 벌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림잔치에 함께한다면 다른 사람한테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데, 여태껏 책방 〈풀무질〉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잔치마당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 때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아 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처럼 어린 나날을 보냈고, 어린 나날을 보낼 때에 ‘풀무질 책방 기림잔치’ 같은 잔치마당에 어버이와 함께 찾아가서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다른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누리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은 당신 아이를 대안 초등학교에 보냈고 대안 중학교에 넣었습니다. 은종복 님은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아이는 또래 동무들하고 놀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무래도, 은종복 님이나 옆지기 님이나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면서 즐겁게 놀아 줄 수 있는 터전이었다면 아이로서는 따로 (대안)학교에 가서 동무들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안 품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이든 낮은 뜻이든 진보 넋이든 보수 넋이든, 모두들 어른들 생각과 삶에 따라 꾸리는 하루하루이다 보니,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이 저희들 나름대로 좋다고 여기는 삶’을 아이한테 곧바로 물려주거나 함께하기보다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어 아이들이 보내는 여느 나날과 고운 삶을 따사로이 껴안지 못한다고 할까요. 제아무리 환경운동을 하고 무슨무슨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가용을 못 버리듯, 아이를 옳고 바르게 키우는 자리에서도 돈을 더 벌지 않고서는 뜻있는 배움마당을 열지 못한다는 어려움 때문에 그만 아이들을 우리 어버이가 스스로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맙니다.

 ‘손그림 찍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민등록증을 거스르는 넋을 지키고 ‘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워야 하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얼을 가꾸는 우리 삶일 때에, 비로소 경부운하이니 4대강이니 하는 끝장 막개발을 비롯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주한미군 들을 거스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맑고 밝은 이야기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이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되도록 책으로 내지 않고 쪽글로만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으나, 당신이 품으려는 맑고 밝은 넋을 더 너른 이웃하고 나누려는 뜻으로 책을 하나 여미기로 했다고 합니다.

 “책방 일을 하느라 돈에 눈먼 어른들이 벌이는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4쪽).”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돈에 눈먼 어른들한테 돈이 아닌 사랑에 흠뻑 빠져들자는 이야기를 건네고자 바지런히 쪽글을 쓴 〈풀무질〉 은종복 님입니다.

 은종복 님은 당신이 몸담은 환경지킴 모임에서 ‘풀벌레’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흔하디흔한 풀벌레이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 버린 풀벌레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느긋하게 자랄 땅이 없거든요. 시멘트땅이요 아스팔트땅이니 풀이 자라지 못하고, 풀이 조그맣게라도 풀숲을 이루어야 풀벌레가 깃들 수 있는데, 풀벌레 하나 깃들 땅뙈기는 내버려 두지 않거든요. 건물을 세우고 가게를 들여 돈을 벌든지 아스팔트를 죽 깔아서 자동차 씽씽 달리도록 해야 한다는 도시이거든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 쓰면 내 마음도 아름다워지고 세상도 아름다워진다(6쪽).”는 생각을 품으며 쪽글을 꾸준히 가다듬기도 하는 풀벌레 은종복 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우리 말’이 아니라 ‘쉬운 우리 말’이요, 동네 할머니들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수수한 우리 말’이며, 초등학교를 다니든 어린이집을 다니든 어린이들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가장 낮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부드러운 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말입니다.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학교 좀 오래 다녀 가방끈 길다고 으스대지 않는 말입니다. 나라밖으로 다녀 본 티를 내겠다는 어설픈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따스하고 넉넉하고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작은 책방 〈풀무질〉이라는 곳부터 ‘잘난’ 책방이 아닙니다. 〈풀무질〉은 참으로 못난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더없이 모자란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지없이 어설픈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책방입니다. 공안경찰이 〈풀무질〉 일꾼을 붙잡았을 때에 당신한테 들려준 말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42쪽).”처럼, 인문사회과학 책방 일이란 ‘돈 안 되는’ 일이니 몹시 바보스러운 책방 일입니다. 따로 인터넷으로 책을 살 수 있지 않으니 번거롭기까지 한 책방입니다. 무슨 경품이나 마일리지를 잔뜩 내붙이고 있지도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책방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못나고 모자라고 어설프고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번거롭고 멍청한 작은 책방 〈풀무질〉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못나기 때문에 따뜻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넉넉하며, 어설프기 때문에 착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푸근하고, 바보스럽기 때문에 믿음직하며, 번거롭기 때문에 싱그러운데다가, 멍청하기 때문에 꿋꿋합니다.

 책방 일꾼과 책손 사이에 높고 낮은 자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목숨과 또다른 목숨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건전한 일”이라고 하는 “장사 잘될 술집” 아닌 “장사 힘든 책방”을 동네 한켠에서 자그맣게 하는 〈풀무질〉 일꾼들은, 다름아닌 작고 가난하고 모자라고 어설픈 가운데 착하고 살갑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을 땀흘려 일구자고 하는 뜻을 나눕니다.

 수험서를 사 가든 교재를 장만하든 잡지 하나 챙기든, 모두 어여쁜 빛줄기를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젊은 넋임을 돌아보면서 쪽글 하나 건네어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비추며 즐거이 살자는 뜻을 키우고픈 〈풀무질〉 일꾼들입니다. 무엇입네 뭐입네 하고 외치는 분들 목소리마냥 〈풀무질〉 일꾼 목소리는 신문 1쪽을 채우는 일이 없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가 우짖는 소리는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파묻히니까요. 아니,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스러집니다. 그러나 풀벌레는 꾸준하게 노래를 합니다. 풀벌레 한 마리는 어마어마한 도시 한복판에서 자그마한 풀숲을 보듬으면서 햇살 한 줌 받아안는 마음결을 다부지게 일굽니다.
 















 (3) 되새겨 읽으며 아쉬운 글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은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이 쓴 쪽글들을 갈래에 따라 새로 엮어서 나왔습니다. 은종복 님은 사람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게끔 짤막한 글을 써 왔지만, 책에서는 두어 꼭지를 하나로 묶으며 제법 길어진 글이 많습니다. 이에 따라 쪽글로 사람들하고 나눌 때에는 단출하면서 옹글던 글이 여러모로 헝클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은종복 님이 쪽글을 쓸 때에 마음을 깊이 쓰던 ‘우리 말 바르게 쓰기’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가운데 ‘것’이라는 말투는 346쪽짜리 책에서 자그마치 1000번이 넘게 나오고, ‘하지만’이라는 말투 또한 100번 가까이 나옵니다(‘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할 말을 잘못 적는 말투입니다). ‘고통, 불안, 시작, 필요, 원망, 후회, 전체, 강제, 만족, 고민, 열심, 생활, 방향, 결국, 진정한, 통하다, 별, 단, 전혀, 대부분’ 같은 말투도 지나치게 자주 나옵니다.

 ┌ 내가 붙잡혀 간 것은 → 내가 붙잡혀 간 데에는
 ├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 이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 군대를 보내는 것을 보고 → 군대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 정작 팔리는 것은 → 정작 팔리는 책은


 다만, 은종복 님이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고자 애쓴다 하여도, 쪽글마다 몇 군데씩 아쉬운 대목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책 한 권에 만 군데가 넘도록 얄궂은 말투가 깃들도록 흐트러지거나 엉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풀무질〉을 기리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을 때에도 ‘쉽게 쓴 낱말을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고쳐 놓아’서 어이없다고 느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이든 이곳 일꾼 은종복 님이든 ‘그냥저냥 흔한 책을 팔’거나 ‘이냥저냥 흔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흔하지 않은 넋’을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안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일부러 더 힘들게 글을 가다듬고 짤막한 쪽글을 써 왔는지, 왜 이 짤막한 쪽글을 쓸 때마다 은종복 님은 더더욱 뼈를 깎듯 애쓰면서 글다듬기를 하고 새롭게 말을 배우려고 했는지를 못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좀 어줍잖은 글이라 할지라도 좋은 넋과 훌륭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풀벌레 은종복 님이 굳이 더 마음써서 곱고 맑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종복 님 스스로 또이름을 ‘풀벌레’라고 붙이는 마음처럼, 쪽글 하나마다 풀벌레다운 얼과 기운을 실어서 이웃하고 함께하려는 사랑이 있습니다. 책을 엮는 일꾼들은, 또 풀벌레 은종복 님 글을 다루며 싣는 매체 일꾼들은, 글 하나가 그냥 나오는 글이 아니요 글 하나에 머리로만 굴린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부대끼며 삭여낸 이야기가 담기는 흐름을 짚어 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을 반갑고 기쁘게 집어들어서 널리 나누는 참뜻을 깨달으면서 지식쌓기 책이 아닌 삶 다스리기 길동무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4343.3.30.불.ㅎㄲㅅㄱ)


[8, 53쪽]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돈에 눈먼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더럽히고, 아이들 목숨줄을 조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강을 파헤치고, 핵무기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이럴수록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작은 동네 책방을 살려야 한다. 스스로 마음밭을 맑고 밝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 “큰 기업에서 일억 원을 내는 것보다 나같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만 사람이 만 원씩 내는 게 훨씬 나아요. 큰 기업에서는 한꺼번에 돈을 내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품삯을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지요. 그런 기업들이 돈을 내는 것은 이름값을 높여서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생각도 들어 있지요.”

[17, 19, 41∼42쪽] 헌법에 쓰여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방도 다른 많은 진보 모임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큰 책방이나 인터넷서점은 단지 돈을 받고 파는 사이로 머물지만,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려는 진보 공동체다 … 그때 나를 조사하던 수사관에게 내가 물었다. “이런 책들은 일반 큰 책방에도 모두 팔고 있던는데, 그곳 대표는 왜 조사하지 않는 거죠?” “그들은 단지 돈을 벌려고 책을 파는 것이고, 당신들은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거칠었고, 억지로 높임말을 썼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또 학생들한테 그 내용을 전할지 안 전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은 학교 다닐 때 시위 전력도 있고 지금도 학교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

[24, 54쪽] 햇살 한 줌, 빗물 한 방울, 눈송이 하나 볼 수 없는 땅속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책방 한 귀퉁이에 앉아 늦가을, 책방 밖으로 눈발 날리듯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펐다 … 나는 사람이 사람을 못살게 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27, 44, 68쪽] 자본가들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팔려고 약한 나라를 끊임없이 쳐들어간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패권을 누리거나,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을 만들려고 한반도 북녘을 쳐들어가려고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 나 같은 책방 일꾼이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가. 아니다. 대운하를 만들어 자연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고, 백성들이 먹고 죽을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미국 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들여오는 이명박 정권이 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 어느 날 열한 살 난 내 아이가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물었다. “아빠, 강남에 있는 땅들은 강북에 있는 땅보다 비싸? 맨날 땅값이 올랐다는 글만 나와?”

[37, 39, 66, 128쪽]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나 같은 어른들이 좀더 편하게 살려고 자동차를 수없이 만들어 공기를 더럽히고, 온갖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물을 썩게 하고 땅을 더럽혀서 그렇다 … 나는 돈에 눈먼 사람들이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볼 때까지 이렇게 해마다 하나씩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며 … 아이들이 학교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 수는 없나. 학교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배우는 놀이터가 될 수는 없나 …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이곳저곳 다른 배움터를 다니다가 밤 아홉 시 넘어 들어오고 밤 열두 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또 좋은 직장을 찾으러 공부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은 뒤에는 또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인가. 끝없이 행복을 뒤로 미루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내 아이에게 강요하기는 싫었다.

[51, 55, 71쪽] 내 아이를 살리자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 권정생 할아버지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맑고 밝은 부자였지요. 다시 태어나면 몸이 튼튼한 젊은이로 나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아이를 낳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진짜 부자는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가난하게 살아야 세상이 맑고 밝아진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살맛나는 마을을 만들 수 있다.

[58, 93, 106, 112쪽]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랑 걸으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종복아, 엄마는 종복이랑 이렇게 걸어가면 참 기쁘다.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아이가 정말 내 배속에서 나온 건지 믿어지지 않아. 그냥 종복이란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 … “또 어디 갈 데 없냐?”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갈 곳을 미리 물어 오신다. 아버지는 책방에 도움이 되려고 당신 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 몸 아끼지 않고 아들이 잘사는 것을 바라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 “내 머리엔 10원도 안 들어갔다.” 학교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할 때 어머니는 꼭 이런 표현을 쓴다 … 어릴 때 가정통신문에 어머니 학력 쓰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무학’이라고 쓰면서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배웠다.

[114, 125, 131, 132, 134, 136쪽] 조금 배고프게 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아이에게 찾아 주고 싶었다 … 내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도 구구단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별 걱정하지 않았다. 구구단은 잘 못 외우지만 생각이 참 깊다 … 아이들을 공부 잘하는 기계로 만들려 하니, 지금 일반 학교는 수용소가 되고 선생은 수용소장이 되고 있다 …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떠받드는 세상에선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 어른들이 돈에 눈먼 삶을 사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 아이들이 올곧게 잘 배우려면 아름답고 살맛나는 마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140, 144, 162쪽] 모두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살려야 할 것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마을이다 …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을까. 어른들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함께 공차기를 하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구슬치기를 하자 … 아이들이 좋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먼저 좋은 책을 손에 들어야 한다.

[200, 206, 214쪽] 군비 증강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줄까. 군비 증강은 결국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 우리 나라도 이것을 본떠 우리보다 더 작은 나라들을 괴롭힌다.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꼬마 제국주의 나라가 되고 있다 … 더 무서운 것은 살인무기는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평화는 무기를 버리고, 없애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지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사람들 마음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들을 떠올렸다.

[266, 270쪽] “파리야! 네가 내 밥에 앉아 밥을 먹으니 내가 싫구나. 여기에 네 밥이 있으니 내 것 말고 네 것을 먹으면 좋겠다.” …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소로우의 생각을 싫어했다. 사람 하나하나가 나라가 하는 일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소로우의 생각은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276, 310, 323쪽] 지율 스님은 이 세상에 난 모든 목숨붙이를 아끼고 보듬고 섬기는 마음을 지녔다 … 황우석을 떠받들고 지율을 내치려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오로지 1등을 하려는 마음,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면 남이야 어떻든 생각하지 않는 마음,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음은 아닐까 …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 싸움으로 맑고 밝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아파하고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민중의 세계사》를 꺼내 읽는다 … 미국도 인디언을 총칼로 죽인 뒤에야 자신의 나라를, 야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른 자본을 수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힘이 없거나 임금이 싼 사람들을 고용하여 착취하고 죽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을 쓸 때에


 글을 쓸 때에 나는 꼭 한 가지를 생각한다. 이 글을 쓴 나부터 내 글을 읽고 활짝 웃거나 꺼이꺼이 울 만하지 않다면 굳이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때로는 빙그레 웃을 글을 쓰고, 어느 날에는 조용히 눈물지을 글을 쓸 테지. 그러니까, 나부터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이 되어 내 글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느껴야 비로소 글다운 글이라는 이야기이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마음쓸 까닭이 없다. 내가 알아줄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어야 한다. 내가 알아주는 아름다운 글일 때에는 나는 웃음어린 목소리나 눈물젖은 목소리로 내 삶을 내가 왜 글로 담아내어 읽히려 하는지를 들려줄 수 있다. (4343.3.29.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소년한길 유년동화 6
도이 카야 글 그림, 김정화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그림책에는 참사랑을 담습니다
 [그림책이 좋다 76] 도이 카야,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책이름 :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글ㆍ그림 : 도이 카야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소년한길 (2002.6.10.)
- 책값 : 6500원



 (1)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


 온누리에 나오는 모든 책이 모두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만든 책이 있다고 느끼고, 나날이 돈을 바라보는 책이 차츰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돈바라기 책이라 하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다만 책다운 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엠에스지를 넣었느냐 안 넣었느냐를 놓고 아웅다웅이지만, 이에 앞서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얼마나 먹고 자란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깃들었느냐를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사다 먹는 밥거리 가운데 밥거리다운 밥거리란 없다고 할 만하다는 흐름하고 맞닿습니다.

 아주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가 있습니다. 며칠 앞서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를 얻어타고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생태와 진보를 바라는 분들 자그마한 모임자리에서 우리 옆지기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해서 찾아갔다가 전철이 끊길 무렵이 된 탓에, 인천(부개동)에서 자동차를 몰고 온 분이 우리 식구를 집 언저리까지 자동차로 태워 주었습니다.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찻길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사람들한테 찡기고 낑기며 힘들기는 하여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데,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워 어지러웠습니다. 아이는 집에 닿고 보니 차에서 똥을 싸서 기저귀를 적셨고, 옆지기는 이튿날까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지냈습니다. 저라고 몸이 나을 구석이 없으나, 집살림을 하느니 바깥일을 하느니 하면서 아픈 몸을 겨우 붙들어 세웠습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마다 고맙다는 마음이지만, 고마운 한편 제발 10분 넘게 달리지 않는 얻어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 몸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치고 자동차를 타며 멀미를 하거나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어지러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고, 이제는 고속버스를 타지만 한 번 타고 나면 며칠 몸앓이를 할 뿐더러, 택시이든 고급자가용이든 작은자가용이든 자동차라는 탈거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꽤 많은 짐을 한꺼번에 멀리까지 제법 빨리 옮겨 주는 자동차라 하지만, 제 몸과 삶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제 몸에 잘 안 맞기 때문에 되도록 바깥에서는 밥을 사먹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몸에 거의 안 맞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어타기조차 싫고 자가용을 장만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빨래기계를 쓰면 손일을 덜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넉넉히 낸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손빨래를 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손빨래를 하는 동안 옷을 한결 아끼면서 나중에 ‘빨래기계가 낡아서 버려야 할 때에 쓰레기를 만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빨래기계를 쓰면 전기와 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데요. 전기를 아예 안 쓰고 물은 훨씬 적게 쓰면서 우리 식구 옷가지를 좀더 사랑하고 아끼는 손빨래는 제가 두 눈을 감고 죽는 날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삶이 고스란히 제 책읽기로 이어집니다. 손을 쓰고 몸을 놀리며 땅하고 가까이 맞닿고픈 삶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눈길로 옮아갑니다. 몸이 제아무리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넋이 스민 책이 좋습니다. 산골마을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얼이 깃든 책이 좋았고, 골목동네 자그마한 가난뱅이 집에 살면서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다가 꽃과 나무와 풀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키우면서 옆지기나 저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보육원에든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붙어 지내야 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내고 아이를 또래 동무하고 억지로 사귀도록 내몰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탓도 있다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안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키우기란 얼마나 즐겁고 신나고 아름답고 멋진데요. 다만, 참말 힘들고 고되고 괴롭고 벅찹니다. 즐거우면서 힘들고, 신나면서 고되며, 아름다우며 괴롭고, 멋지며 벅찹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옆지기는 퍽 자주 “아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따로 말로 나타낼 줄을 모르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아빠가 좋아한다는 책이라 하지만, 정작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 아이 바로 너를 돌보면 다 알 수 있는 지식과 생각이 담긴 책이니, 굳이 이런저런 책을 읽기보다 바로 너하고 어울리면 아빠가 몸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고 곰삭일 수 있음’을 배우곤 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팔이 빠지거나 허리가 쑤시는 가운데, 날마다 치워도 끝이 없을 뿐더러 나날이 아이 옷가지 빨래가 넘쳐나는 이 모든 고단함이 곧바로 아이키우기에서 얻는 보람이 됩니다.

 예전에 혼자 살 때에도 아이들 그림책을 참으로 신나게 사들이며 혼자서 즐겁게 보았고, 오늘날 세 식구 살아가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지없이 반가이 장만하며 세 식구 나란히 봅니다. 지난날에 아이들 그림책을 신나게 사들이던 때에는 아이들 그림책이란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보고 어른들이 ‘꼭’ 함께 보면서 ‘아이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할 책이라고 느꼈고, 오늘날 세 식구 복닥이며 아이들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책과 아이가 쳐다보지 않는 책이 갈리는구나. 왜 갈릴까?’ 하고 돌아보면서, 아이가 콧방귀조차 잘 안 뀌는 책에는 아이가 이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차츰차츰 깨닫습니다. 그림만 이쁘장하다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이 엉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림 하나하나에 너른 사랑이 담겼을 때에는 아이는 어김없이 알아챕니다. 그림이 알록달록하더라도 아이가 달가이 받아들이지만 않으며, 그림이 수수하다 할지라도 그림마다 깊은 마음이 스몄을 때에는 아이는 아주 좋아하고 자주 펼쳐 봅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중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림책을 끄집어 내서 아빠나 엄마 앞에 집어던졌고, 조금 더 큰 뒤에는 아빠나 엄마 무릎에 그림책을 들고 털썩 주저앉아 얼른 펼쳐 달라고 옹알거리고, 이제는 혼자 책을 펼쳐서 한참 들여다보곤 하며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되풀이 넘기곤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아이한테 참으로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동안 제가 장만한 그림책들은 거의 다 우리 아이 또한 퍽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다른 아이를 바라볼 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길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몸소 아이를 낳아 길렀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루 내내 벌써 스무 달째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아니, 스무 달째 아이와 하루 내내 붙어 지냈다기보다 스무 달째 아이하고 얽힌 모든 일을 엄마랑 아빠랑 모두 손으로 보듬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마음으로 사귀어 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린이책을 어린이만 보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엄마 아빠 된 사람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날 이원수 님과 이오덕 님부터 줄곧 외친 까닭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이란 책 하나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좋은 다리이거든요. 아름다운 고리이거든요. 멋진 놀잇감이거든요. 훌륭한 배움터이거든요. 넉넉한 보금자리이거든요. 재미난 이야기보따리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손길이거든요.

 어른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책을 돈바라기 눈길과 몸짓으로 만드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에는 몹시 싫습니다. 몹시 딱합니다. 몹시 슬픕니다. 어린이책이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빚을 책이고, 어린이책부터 사랑으로 빚는 매무새를 갈고닦아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크면서 어른이 되어 어른책을 빚을 때에도 돈바라기 어른책이 아닌 사랑바라기 어른책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림과 뜻만 좋은 어린이책을 넘어


 그림책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는 어린 오누이가 목도리를 놓고 다툼질을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오누이한테 뜨개 목도리를 선물해 준 할머니가 슬기로운 생각을 짜내어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묶어 준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그림결에 따라 재미나고 살가운 이야기를 펼치는 좋은 어린이책입니다. 노란빛 목도리는 노란빛대로 어여쁘고 빨간빛 목도리는 빨간빛대로 어여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코앞에 마주하는 좀더 나아 보이는 빛깔에 끌리면서 시샘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샘을 다스리며 한결 사랑스러운 길로 나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차근차근 풀어 보입니다.


.. 치프와 초코는 강아지 오누이입니다. 오늘 할머니께서 선물을 보내 주셨어요. 오빠 치프에게는 노란 목도리를, 여동생 초코에게는 빨간 목도리를 보내셨습니다. 치프는 노란 목도리를 보고 좋아하며 말했어요. “이 목도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말이 색깔이야. 치프는 목도리를 목에 둘렀습니다. 초코는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가 더 멋져 보였어요. “나도 달걀말이 색깔 목도리가 좋아. 바꿔 줘, 바꿔 줘.” 엄마가 말했어요. “어머, 초코의 목도리는 빨갛고 귀여운 딸기 색인걸.” ..  (2∼4쪽)


 그림책이 되든 어린이책이 되든 어른문학책이 되든 마찬가지인데, 기나긴 말을 줄줄줄 늘어뜨리면서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을 들 수 없습니다. 짤막한 한두 줄로 느낌과 생각과 삶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에서도 할머니가 뜨개 목도리를 선물한 이야기를 짤막히 보여주고, 동생이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를 더 좋아하지만, 엄마가 잘 달래 주는 모습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첫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한테나 엄마한테나(또 이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아빠한테나) 큰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누이한테 선물한 목도리는 할머니가 한 땀 두 땀 애써 뜨개질을 해서 일군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몇 푼으로 치른 목도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넋으로 애틋하게 뜬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해요. 엄마도 아이도 “할머니 고맙습니다.”라든지 “우와, 이 목도리를 손으로 떴다구요?”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목에서 이런 대목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두 오누이가 노란빛과 빨간빛을 보고 다툼질을 하겠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시샘하며 다툼질을 하더라도 ‘할머니 사랑 손길’을 돌아보는 매무새를 한 줄쯤 살며시 밝힐 수 있었다면, 이 그림책은 더없이 따스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초코는 다시 노란색 목도리가 갖고 싶어졌어요. “바꿔 줘, 바꿔 줘.” “싫어. 나도 노란색이 좋단 말이야.” 초코가 울기 시작했어요. 치프는 하는 수 없이 목도리를 바꿔 주었어요.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  (10∼11쪽)


 아이들은 둘이 저마다 받은 목도리에 얼마나 깊고 짙고 너른 사랑이 담겼는지를 먼저 찬찬히 살피면서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에, 할머니 댁으로 찾아가면서도 끝없이 다툼질을 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또는 더 좋은 물건을 오빠한테 주거나 동생한테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오누이가 아니라,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겠어!’ 하는 마음만 부글거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라지만, 왜 오누이이든 형제이든 자매이든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우리 어른이 잘못 가르친 탓인가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들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은 것’을 스스럼없이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없는 탓인가요.


.. 할머니네 집이 바로 눈앞이에요. 꽃밭에는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예뻤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밭을 보니 치프는 걱정스러웠어요 ..  (16∼17쪽)


 오누이는 할머니 댁에 와서도 “할머니, 선물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누이가 좋아한다는 땅콩빵을 먹으면서도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기에 바쁩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도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 보기 바빴을 뿐이듯, 밥상머리에서도 “할머니도 와서 함께 먹어요!”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두 오누이 목도리 실을 끌러 새로 뜰 때까지도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저희끼리만 놀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와 흐름과 끝맺음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철없는 오누이들 다툼질을 할머니가 잘 마무리지어서 다시금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다고 ‘가르침’을 베푸는 얼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누이부터 오누이를 기르는 아빠엄마 모두 옳게 살아간다고 하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사랑이나 믿음이나 나눔이란 귀퉁이 한 자락에도 깃들어 있지 않아요.

 내 밥그릇에만 눈길이 머뭅니다. 내 손아귀에만 눈썰미를 둡니다. 내 몸치레에만 눈높이를 맞춥니다. 슬픈 우리 삶이 어여쁜 그림책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 치프와 초코는 할머니가 만든 땅콩 빵을 아주 좋아해요. 목도리 일은 까맣게 잊고 산처럼 쌓인 땅콩 빵을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아까 둘이 왜 울었는지 듣고는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할머니는 둘의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  (20∼21쪽)


 문학책에서야 어찌어찌 다루어도 된다고 하지만, 뜨개질을 아무리 잘하는 분이라 하여도 목도리 둘을 후딱 뜰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찌 되었든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땅콩빵을 먹는 짧은 동안에 할머니가 목도리 둘을 ‘짠!’ 하고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노랑과 빨강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목도리를 새로 받아들고는 기뻐합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목도리요, 그냥 후딱 뜰 수 있는 목도리인 듯 여깁니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그림결이며 오누이가 이래저래 시샘하고 다툼질을 하다가도 잘 끝난다는 줄거리라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림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두 오누이를 불러 “얘들아, 이 목도리란 말이지, 할머니가 너희 오누이를 사랑하면서 한 땀 한 땀 떴단다. 노란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뜻과 사랑을 담고, 빨간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넋과 믿음을 담았지.” 하면서 노란 목도리는 얼마나 노랗게 아름답고 빨간 목도리는 얼마나 빨갛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나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너희한테 노란 목도리와 빨간 목도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도 안 하고 주어서 다투었구나. 할머니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구나.” 하면서 할머니가 참다운 슬기를 뽐내는 얼거리로 뻗어나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만큼으로 마무리짓는 그림책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만큼으로 이루어 낸 그림책이어도 반갑습니다. 이만큼이나마 했어도 고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이만큼이나 돌아보거나 살필 겨를이 없이, 몹시 바빠맞도록 돈벌이에 매여 있는 탓입니다.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는 할머니를 기쁘게 맞이할 딸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쉬운 우리 삶에 걸맞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그림책이라 할 터이나, 아쉬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예쁘고 곱고 재미나고 뜻있기까지 한 그림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겠다고 봅니다.

 이 그림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며 더 너른 따스함을 꽃피울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감을 더 좋은 그림틀에 실어내면서 더 따사롭고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를 껴안고 어루만지는 훌륭한 그림책을 새삼 기다리고 손꼽아 봅니다. (4343.3.29.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문화유산 해설사 따라 사찰 여행
박상용 지음, 호연 그림 / 낮은산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한테는 좋은 그림책이 함께 있어야
 [그림책이 좋다 75] 박상용(글)+호연(그림),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책이름 :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글 : 박상용
- 그림 : 호연
- 펴낸곳 : 낮은산 (2010.1.15.)
- 책값 : 11000원


 (1) 그림책을 보는 눈


 아이를 낳아 기르기 앞서부터 그림책을 즐겼습니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한 까닭도 있으나, 이에 앞서 1999년 봄날 《우리 순이 어디 가니》라는 그림책을 만난 뒤로 그림책에 빠져들었습니다.

 1998년 12월을 끝으로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휴학계를 냈고(자퇴서를 내면 융자 받아 내던 학비를 한 달 안에 한꺼번에 갚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휴학계를 냈습니다), 오로지 신문배달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새벽에 일 마치고 그날 돌린 신문과 다른 지국에서 얻은 10대 일간지를 하나하나 넘기다가 ‘세밀화 그림책 봄 이야기’가 나왔다는 자그마한 기사를 보고는 ‘어, 이런 그림책도 있었나? 그림책이란 이런 책이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날 아침에 대학교 앞 구내서점이 문을 열자마자 신문배달 짐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서 책방 누나한테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주문했습니다. 이무렵 신문배달 한 달 일삯으로 32만 원을 받고 있던 터라(220부를 돌린 일삯), 그림책 한 권 값 7500원이란 퍽 만만하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다달이 10만 원을 적금으로 부었고 나머지 22만 원으로 먹고 입고 책 사 읽고 소식지 만드는 돈을 대고 있었거든요.

 이틀 뒤 주문한 책이 책방에 왔고, 책방으로 찾아가 7500원 온돈을 치르고 장만하여 신문사지국으로 돌아와 《우리 순이 어디 가니》를 넘깁니다. 홀로 있는 지국에서 조용히 책장을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기는 동안 볼을 타고 눈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그림책이란 이렇구나,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보이는 까닭이 이렇구나,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함께 즐기는 책이구나.’

 그림책을 두 번째 넘긴 다음 덮습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봅니다. 어린 날, 집에서 그림책을 본 일이 있었나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였으나 집에서 마땅히 그림책을 본 일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1982∼1987년에 국민학교를 다닌 저로서는 괜찮은 그림책이 얼마 없던 때이니까요. 우리 형이든 저이든, 또 동네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다른 동무들이든 살가운 그림책 하나 보면서 큰 동무는 없습니다. 꽤나 잘사는 아이들이었다면 동화책쯤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괜찮은 그림책까지 아니더라도 ‘그림책 꼴을 갖춘 책’이란 만나기 참 어려웠습니다.


.. 문화재란 옛사람들이 살아온 자취입니다. 옛사람들이 의식주에 사용했던 것들은 모두 문화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쓰던 도구 또한 오늘까지 전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갖고 만들었던 불상이나 석탑은 잘 닳지 않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잘 남겨져 문화재가 된 것입니다 ..  (17쪽)


 1999년 봄부터는 책방마실을 할 때에 그림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해 여름에 신문배달 일을 접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어린이책 출판사에 들어가 받은 일삯은 62만 원. 신문딸배 적과 견주면 두 곱이 되는 일삯. 얼른 적금 하나를 더 들어 25만 원을 붓는 통장을 하나 마련하면서도 ‘돈이 남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출판사 일꾼 얼굴을 하나둘 익히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만든 좋은 그림책을 하나둘 선물로 받고, 제 깜냥껏 눈결을 다스리면서 헌책방에서 ‘판 끊어진 예전 어린이책과 그림책’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무렵, 1982년에 ‘백제’라는 출판사에서 ‘현대세계걸작동화’라는 이름을 붙여 스물여섯 권짜리 ‘그림책 전집’을 내놓았음을 처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 일꾼들은 이 그림책을 모르고 있었으나, 헌책방에는 버젓이 이 그림책이 있었거든요. ‘백제’라는 출판사가 ‘돈 까밀로와 빼뽀네’ 책으로 큰돈을 번 다음 내놓은 ‘현대세계걸작동화’였는데, 백제 출판사는 갑작스레 번 큰돈으로 영어교재를 만든다고 하다가 폭삭 무너졌습니다. 이러면서 이 그림책은 통째로 ‘문선사’로 옮겨 1984년부터 1980년대 끝무렵까지 다시 펴냅니다.

 헌책방에서 ‘현대세계걸작동화’ 스물여섯 권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짝을 맞추면서(아직 두 권을 못 찾았습니다) 속이 떨떠름합니다. 왜냐하면 이 멋지고 훌륭한 그림책들을 우리 아버지께서는 1980년대에 당신 아이 둘이 국민학생이었을 때에 한 번도 장만해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이 그림책을 당신이 맡은 국민학교 아이들한테는 장만해서 읽혔는지 모를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훌륭한 교사로 지내셨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스물여섯 권 모두는 어렵다 하여도 다문 한 권이라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봅니다. 《까마귀 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책은 이때에 《까마귀 도령》이라는 이름으로 나왔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 그림책 《로타와 자전거》는 이때에 처음으로 옮겨진 뒤 아직 다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절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지만, 일주문을 들어설 때부터는 깨끗하고 고귀한 곳에 간다는 생각을 갖고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좋겠습니다 … 단청은 무척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파랑ㆍ하양ㆍ빨강ㆍ검정ㆍ노랑 이렇게 다섯 가지 색깔인 ‘오방색’을 기본으로, 이 색들을 섞었을 때 나오는 몇 가지 중간색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오방색은 동서남북 가운데의 다섯 방향과 나무ㆍ쇠ㆍ불ㆍ물ㆍ흙 다섯 원소를 뜻합니다. 이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좋은 기운을 뿜어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  (28, 100쪽)


 제가 어린 날 즐겁게 본 그림책이 하나도 없었나 하고 다시금 머리를 쥐어짜내면 꼭 한 가지 떠오르기는 합니다. 우리 형이 중학교에 들어선 다음 아버지가 사 주어 다달이 숙제를 해내도록 했던 학습지 별책부록으로 나왔던 《아모스와 보리스》 하나가 있습니다. 학습지에 딸린 해적판 《아모스와 보리스》는 1994년에 《생쥐와 고래》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온 ‘윌리엄 스타이그’ 그림책이었습니다. 비록 해적판이기는 하지만, 얄팍하고 번역 어설픈 학습지 별책부록 《아모스와 보리스》를 천 번 가까이 되읽곤 했습니다. 1999년 가을, 《생쥐와 고래》라는 그림책을 책방 책꽂이에서 만나면서 얼마나 반갑고 서럽고 기쁘고 아팠는지.

 저와 나이가 같은 대학교 적 동무는 국민학교 3학년 때에 《몽실 언니》를 읽었다고 했습니다. 권정생 님 《몽실 언니》는 1984년에 나왔고 이때가 우리한테 국민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몽실 언니》를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 집에서 밍기적거리다가 헌책방 나들이를 하던 1998년 1월에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열네 해나 지난 끝에 만난 셈이고,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서야 읽었습니다. 이때에도 이 놀랍고 아름다운 책을 왜 나는 국민학생 때에 읽지 못했나 되새기면서 가슴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와 되새기면, 어린 날 여러모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만나지 못했기에 오늘에 와서 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뒤늦게 알아채어 읽고 삭이고 즐길 수 있다고 할 테지만, 또한 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우리 아이한테는 제때에 제대로 읽힐 수 있게끔 하고자 힘쓰지만, 제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허전함이란 지우기 어렵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린 날 제 삶이란 워낙 개구져서 날이면 날마다 동무들하고 밖에서 뒹굴며 뛰놀았으니 책을 쥐어 주었다 하여도 안 읽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슴을 적시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눌려 밖에서 뒹굴며 뛰놀 생각을 잊고 집안에 틀어박혔을는지 모릅니다. 집안에 틀어박힌 채 책을 파고들었다면 좋은 책으로 마음밭이 한결 넉넉했을 터이나, 그만큼 바깥에서 동무들하고 골목놀이를 하며 부대끼지 않았을 테니 ‘뛰놀던 어린 나날’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어린 나날에 좋은 어린이책을 만나야 하고 좋은 그림책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어김없이 어린 나날부터 살가운 그림책을 마주해야 하며 살가운 어린이책으로 어린이 마음에 착하고 곱고 맑고 튼튼하고 씩씩한 넋이 자라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책으로만 키울 수 없는 어린이 마음입니다. 흙밭에서 뛰고 땀내 나도록 달리며 때로는 무릎이 까지고 팔뚝이 벗겨지고 얼굴이 새까매지도록 부대끼며 마음과 몸이 나란히 쑥쑥 자라야 할 어린이 삶입니다.


.. 지방 권력자들의 사상적인 협력자가 된 육두품 세력은 절을 지어 머물며 공부를 계속했는데, 터를 정할 때 ‘풍수’를 적용해 명당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산속의 좋은 자리에 절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종교적인 기능뿐 아니라 관광 명승지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30∼32쪽)


 1999년부터 2010년 봄까지 이천 권 남짓 그림책을 장만하여 늘 다시 꺼내어 펼치고 읽고 삭이면서 곰곰이 헤아립니다. 저한테 아름다운 그림책이란 제 마음을 아름다이 살찌우는 그림책입니다. 하루하루 알차게 꾸리고픈 제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책이 저한테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여야 재미있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별나라를 가고 달나라를 가며 해나라를 넘나들어야 신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와 걸레질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심부름을 하며 밥상을 차리고 쓰레기를 치우고 하는 갖가지 살림을 익히는 삶자락이 고이 담길 수 있으면서, 한 사람이 고운 목숨을 사랑스레 일구면서 내 몸과 마음을 오롯이 아낄 수 있도록 어깨동무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밑틀을 따스한 눈높이로 넉넉하게 품어 안을 수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나와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모두 빛나는 넋을 가슴에 담고 있음을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느낍니다.

 지식이란 부질없습니다. 삶이어야 아름답습니다. 정보란 덧없습니다. 땀방울이어야 알찹니다.

 삶이란 집살림일 수 있고 마을살림일 수 있으며 나라살림일 수 있습니다. 자연살림이나 겨레살림일 수 있겠지요. 학교살림이나 들살림이나 갯살림이나 멧살림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살림도 되고, 아파트살림도 될 테지요.

 땀방울이란 놀며 흘리는 땀방울일 수 있고 일하며 흘리는 땀방울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닫는 땀방울이 아닌 서로 나란히 나아가는 땀방울이어야 합니다. 신나게 놀고 기운차게 일하는 땀방울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아름다운 그림책 하나라 할 때에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즐겁게 쥐어들고 펼치며 가슴에 새길 수 있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사랑할 수 없다 한다면 아름다운 그림책이 아닙니다.


 (2) 절에 담긴 마음과 그림에 담는 뜻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그림책을 봅니다.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를 ‘그림책 갈래’에 넣을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분이 있을 텐데, 절 문화를 사진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사진으로만 이루어진 이 같은 짜임새 책일 때에도 ‘그림책 갈래’에 들 수 있습니다. 만화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도 ‘그림책 갈래’에 녹아들 수 있어요.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그림책은 이 땅에서 오래디오랜 나날을 여느 사람을 비롯하여 권력자까지 골고루 마음자리에 스며들어 왔던 ‘불교 문화’가 ‘절집’에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면서 이어왔는가를 부드러운 말씨로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만화쟁이 호연 님이 산뜻하고 정갈한 그림을 사이사이 넣어 ‘절집 문화’를 한결 포근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끕니다.


.. 그런데 불상이 생기고부터는 탑을 바라보면서 불러일으켜지는 신앙심보다는 위대한 이의 외형을 그대로 본따 만든 불상을 보면서 신앙심을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절의 중심이 점점 더 불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세워졌을 때, 고려가 멸망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불교의 폐단이 심했던 점이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불교가 귀족화되면서 일반 사람들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불교 행사만 성대하게 하고, 절에 많은 땅을 주어 일반 농민은 땅고 가지지 못하고 고통을 당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66, 84쪽)


 저는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를 장만하면서 이 책에 담긴 줄거리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절집 얼거리를 이 책을 읽으면서 좀더 꼼꼼하고 찬찬히 알아챈 다음 절집 나들이를 한다면 한결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보람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절집 얼거리를 하나도 모르는 채 절집 나들이를 한다면 내 가슴에 올망졸망 스며들 이야기가 얼마 없을 수 있어요. 아직 절집 삶과 문화를 모를 아이들한테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는 더없이 도움이 되고 길잡이가 되리라 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한테도 좋은 길잡이가 될 테지요.

 저로서는 이 그림책에 그림을 넣은 호연 님 그림이 좋아서 장만했습니다.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 그림을 넣은 호연 님은 《도자기》(애니북스2008)라는 대단한 작품을 내놓았던 분이고, 요즈음은 당신 누리사랑방(blog.naver.com/sakumkun)에 “사금일기”를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겪고 보고 느끼는 이야기를 서너 칸(거의 세 칸짜리로) 그림이야기로 선보이고 있어요. 호연 님이 당신 누리사랑방에 “사금일기”를 올릴 때마다 챙겨 보던 어느 날 당신 그림을 넣은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라는 책 소식이 떴기에 기꺼이 이 그림책을 장만했고, 이 그림책에 담긴 줄거리 또한 참 쉽고 부드러이 잘 풀어냈다고 느끼는 한편, 이와 같은 줄거리를 이만큼 제대로 삭이고 헤아리면서 그림으로 풀어낸 사람이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될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 좋아합니다.

 ‘문화유산 해설사 따라 사찰 여행’이라는 이름을 함께 붙여 펴낸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 이어, 우리 나라에 뿌리내린 역사 깊은 예배당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낮은산 출판사에서 앞으로 새롭게 펴낼 수 있을지 궁금한데, 서양 종교라고 하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불교 또한 나라밖에서 들어와 사람들한테 뿌리내린 믿음이었던 만큼, 오늘날 많은 사람들한테 뿌리내리는 서양 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 삶과 문화 이야기를 다루는 살갑고 포근한 그림책을 함께 선보일 수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은 것은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있었던 삼국 시대입니다 ..  (13쪽)


 그런데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에서는 한 가지 대목에서 아쉽습니다. 첫머리와 몇 군데에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있었던 삼국 시대”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왜 ‘가야’를 빠뜨렸을까요? 익히 입에 굳은 대로 읊고 만 탓일까요? 학교 역사에서 ‘가야’를 모두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왜 가야 이야기는 빼고 ‘삼국 시대’라고 해 버리고 말까요? 우리 옛 역사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까지 ‘네 나라 시대’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는지요.

 그렇지만 이 그림책 하나만 탓할 수 없습니다. ‘삼국 시대’라는 말은 이 그림책에서만 쓰지 않습니다. 우리 교과서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교과서와 맞물려 우리 생각과 지식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안타깝게도 북녘 또한 ‘세나라시기’라고 말합니다. 북녘 또한 가야 역사를 빠뜨린 채 ‘세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여태까지는 ‘삼국사기’이니 ‘삼국유사’이니 하는 이름에 얽매이며 ‘삼국’이나 ‘세 나라’라는 엉뚱한 이름을 썼다 하여도, 이제부터는 ‘사국’이나 ‘네 나라’라는 이름을 알맞고 올바르게 찾아서 우리 삶과 발자국과 터전을 다룰 수 있는 눈높이로 거듭날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좋은 그림책에 깃든 자잘한 티끌을 걷어내어 그지없이 알차고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애틋하게 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3.3.26.쇠.ㅎㄲㅅㄱ)
  

















(네이버에서 '사금일기'를 넣어 보셔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내 2014-06-30 13:31   좋아요 0 | URL
<로타와 자전거>는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논장출판사) 제목으로 이번에 출간되었습니다. 소식 전해드려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느낌이 있는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을 꿈꾸겠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9] 박경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세상으로 나와서 스무 달째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이제 밤에 두 번이나 세 번, 때로는 한 번만 칭얼거립니다. 깊은 밤에 두세 번씩 깨어나 아이 기저귀를 갈기란 만만하지 않은 노릇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에서 조용히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한창 갓난아기일 때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기저귀갈이를 해야 했고 백일 때까지는 한 시간이 아닌 삼십 분마다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무렵은 잠을 잔다기보다 졸면서 아기를 본다고 해야 맞았고, 밤 사이에 똥기저귀 빨래를 여러 차례 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스스로 잘 걷고 달리기까지 하는 만큼, 이제는 아이를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골목을 휘저을 때에는 어김없이 아이를 안아야 하고, 고단해 하거나 힘들어 하면 그때그때 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걷는다 하더라도 아이 몸으로는 한 시간 넘게 걷기란 몹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집에서는 쉬잖고 뛰논달지라도 밖에서는 삼십 분을 거닐어도 몹시 힘든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바깥바람을 쏘이며 아이를 걸릴 때면, 아이가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동네 모습이 아이 눈에 어떻게 비칠까 퍽 걱정스럽습니다. 어른 눈으로 보자면 고즈넉한 골목동네랄 수 있으나, 조금만 걸어나가면 곧장 시내이고 유흥거리가 나옵니다. 몇 분 걷지 않아도 자동차 우글거리는 큰길이 나오고, 큰길에는 시끄러운 노래 흘러나오고 번쩍이는 불빛 가득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울이 아닌 여느 도시이든 시골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익히 보고 길들고 젖어드는 삶자락이란 온통 소비주의 물질문명입니다.


.. 그럼, 곰은 무엇을 먹고 살까? 그 옛날 곰은 육식동물이었다. 그러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잡식으로 바뀌었고, 초식으로 변해 가는 단계라고 알려져 있다. 봄에는 부드러운 나뭇잎과 꽃, 나물류를 맛있게 먹는다. 열매가 맺는 여름에는 덜 익은 열매를 먹는데, 달콤한 산딸기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 벚나무 열매, 머루, 다래처럼 사람들이 먹는 모든 열매를 좋아한다 … 이 땅에 산양이 산다는 것은 천연기념물 한 종이 살아 있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땅의 생태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  (16, 43쪽)


 그제 아침 민방위훈련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민방위훈련 통지서는 참 질기게 온다고 느끼면서, 왜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런 훈련을 시키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를 한동안 곱씹습니다. 누가 무엇을 지키라는 민방위요, 우리가 지킬 만한 아름답거나 빛나는 터전이란 어디일까요. 고향이요 삶터임을 떠나, 내가 깃든 이 도시가, 많은 사람들 복닥이는 이 도시가, 얼마나 지킬 만한 값이 있거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기 어려운 이 도시가, 사람 아닌 뭇목숨은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이 터전이,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개성과 다양성을 건사할 수 없는 이 자리가, 어느 만큼 지킬 값이나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낮 목에 사진기를 걸고 한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눈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빗길이었는데 삼십 분쯤 걷다 보니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한동안은 싸락눈이더니 이내 굵은 눈송이로 바뀌었고, 얼음눈이 우산에 철벅철벅 들러붙어 무겁습니다. 눈과 바람과 얼음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얼어붙습니다. 눈으로 덮이는 동네를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으며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곳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곱고 맑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에 내린 눈은 그때그때 걷어내거나 치우며, 시골에 내린 눈이 아니고는 햇볕에 녹거나 마르기란 어렵습니다. 아주 잠깐 하얗게 덮어 줄 뿐이요, 요사이는 눈이 내리는 동안에도 쌓이지 않도록 바지런히 쓸고 치웁니다.


..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을 제안한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인이었다. 1933년 일본인 다무라(田村剛)는 금강산을 답사한 뒤 국립공원 지정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 사람들은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산 대청봉까지 하이힐을 신고 간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는 실제로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이나 슬리퍼를 신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산이 낮고 완만해서가 아니다. 향적봉은 1614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지만, 곤돌라를 타고 단숨에 봉우리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29, 210쪽)


 국립공원 나들이를 생각하는 이들한테 좋은 길잡이가 될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을 읽는 새벽나절, 시계는 세 시 삼 분을 가리키는데, 우리 윗집에 사는 분이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 무겁게 내며 계단을 딛고 올라갑니다. 윗집 이웃은 무슨 일로 이 깊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갈까요. 택시를 몰기 때문에 이제야 일이 끝나서? 그러고 보면, 퍽 자주 이 깊은 새벽에 발걸음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는 아이가 새벽나절 발걸음 소리에 놀라 깨곤 해서 퍽 애를 먹었습니다. 기찻길 옆 골목집에 살 때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울리는 기차소리에도 깨지 않더니.

 “여행이 더 즐거우려면 여행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하다(80쪽)”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힘주어 말하는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쓰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국립공원 둘레 마을’ 사람들 목소리를 빌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관광지를 찾는 사람들 누구나 쓰레기를 손쉽게 만들어 냅니다. 아니, 우리 나라 얼거리는 쓰레기를 끝없이 새로 만들도록 짜여 있습니다. 도시 삶터란 새 물건을 만들어 사고팔면서 일자리를 마련하고 돈을 벌도록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건 하나를 알뜰히 건사하거나 돌보면서 우리 터전을 맑고 곱게 지키도록 하는 틀로 맞추어 놓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다시쓰기나 되살려쓰기 얼거리를 이루어 놓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을 찾아가든 여느 관광지를 찾아가든, 우리는 우리 삶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찾아가서 지냅니다. 우리 삶자리에서 우리 동네를 맑고 곱게 건사하는 매무새를 지키고 있다면, 어느 곳에 간들 그곳 삶자리를 다치게 하거나 흐트려 놓거나 헤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삶자리부터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얼개여야 비로소 관광지에서도 관광지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살피고 껴안는 삶얼개를 이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라는 책에서든 《희망을 여행하라》라는 책에서든 《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이라는 책에서든,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타령을 제아무리 줄줄줄 늘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낌새가 없습니다. 나아질 구석이 없습니다.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진보 지식인마저 1회용품을 버젓이 쓰고 있거든요. 오늘날 뜻있고 생각있다는 보수 우익 인사조차 헌 물건 고쳐쓰기와 재활용품 살리기와 생협 매장 다니기와 텃밭농사 같은 일을 안 하고 있거든요.


.. 여행지에서 여행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역 경제를 살릴 반가운 손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쓰레기만 남기고 지역문화를 훼손하는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때문일까? 산에 올라 보면 유독 정상에만 사람들이 북적댄다. 근처에 있는 너른 공간과 시원한 숲그늘을 마다 하고, 굳이 햇볕이 내리쬐고 강한 바람이 부는 정상에만 몰려 있다. 덕분에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산봉우리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한 채 바위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서만 오르는 바람에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흙이 쓸려내린 것이다. 그리고 정상을 밟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정상 표지석을 끌어안고 기념촬영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  (45, 177쪽)


 말이 좋아 ‘여행’이요 ‘탐방’이요 ‘트레킹’입니다. 예부터 써 온 우리 말로 하자면 ‘나들이’이거나 ‘마실’입니다. 나들이나 마실이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웃 마을로 찾아가는 일”입니다. 국립공원이든 관광지이든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려도 되는’ 곳이 아니라, ‘내 이웃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든 뭐를 하든 순례를 하든 트레킹을 하든 ‘누군가 살아가는 마을’을 찾아가서 돌아보고 즐기고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에 사람들이 있든 들짐승이나 멧짐승이 있든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과 다름없이 곱고 어여쁘고 알뜰한 마을이나 보금자리나 삶자리’를 찾아가서 마주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를 추스르듯 우리가 찾아가는 곳에서 우리 살림새와 모양새를 번듯하고 야무지고 싱그럽고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내 보금자리 동네에서 내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느낄 노릇이요, 내가 찾아가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에서는 이웃사람 보금자리 동네가 얼마나 곱고 알차고 사랑스러우며 좋은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 국립공원은 우리 나라 생태계에서 가장 보전가치가 있는 곳이자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할 만큼 소중한 자연자원과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다 ..  (7쪽)


 그 숲에 가는 우리들은 이 숲 또는 이 도시 또는 이 아파트 또는 이 골목동네에서 아름다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섬에 찾아가는 우리들은 이 동네 또는 이 빌라 또는 이 도심지에서 살가운 우리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를 사랑하듯 내 아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요, 내 어버이를 아끼듯 내 이웃을 아끼는 한 사람이며, 내 동무를 살피듯 낯선 손님을 살피는 한 사람입니다.

 국립공원이란 나라에서 좀더 마음을 써서 건사하는 자연 터전이라 하는데, 국립공원만 건사해서 되는 나라살림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에 좀더 마음을 써야 한달 뿐이요, 우리 터전 어느 곳이든 마음을 샅샅이 쏟아야 합니다. 국립공원만 깨끗이 지켜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살아가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을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 할지라도 맛보고 껴안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여행’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생각하고 느끼는 삶’이어야 합니다. ‘천천히 기다리는 여행’이 되자면, 맨 먼저 ‘천천히 기다리는 삶’을 내 삶으로 곰삭여 놓아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새로운 국립공원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한편, 국립공원 아닌 곳은 손쉽게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국립공원마저도 차근차근 잡아먹으며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4343.3.23.불.ㅎㄲㅅㄱ)


 ┌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양철북 펴냄,2010)
 ├ 글ㆍ사진 : 박경화
 └ 책값 : 15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