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23 : 김예슬 님과 고집장이 동생

 무슨 책을 읽어야 내 넋을 아름다이 가꿀 수 있는가를 옳게 살피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꾸려야 내 얼을 곱게 여밀 수 있는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운 목숨 하나 선물받아 이어가는 누리에서 얼마나 사람다운 삶을 보듬느냐는, 내가 품은 꿈이 아니라 내가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매무새에 달려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을 거스른 채 ‘고졸자’가 되겠다고 외친 김예슬 님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2010)라는 작은 책을 써냈습니다. 대자보 하나 쓴 다음 대학교 앞문에서 한 시간 남짓 서 있으며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는 대학생들과 대학생이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고졸자로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얼마 나누기 힘들었을 테지요. 김예슬 님 당신 스스로 어줍잖은 몸부림이 아니요 뽐내는 몸짓이 아님을 밝히려 한다면, 이렇게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힌 책 하나를 써내야 했을 테지요.

 “자신의 경험과 개성을 바탕으로 해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는 일은, 삶에서 진정 필요한 일은 모조리 시장으로 떠넘겨 버렸다(58∼59쪽).”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김예슬 님이 작은 책 하나에 적바림한 이야기는 김예슬 님 당신이 잘나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닌 한편, 당신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익히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알면서 아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야기요, 알고 있기에 등돌리거나 모른 체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있으면서 옳은 길로 안 가고 있는 우리들이요, 알고 있기 때문에 굶어죽을 수 없다고 여기는 우리들입니다.

 석유가 펑펑 남아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석유 걱정을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석유가 바닥나면 다른 뭔가가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자가용 한 대 장만하는 값이란 우리 삶을 얼마나 빛내거나 돌볼 수 있는 돈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차 한 대 뽑아 굴릴 만한 돈으로 책을 사읽는다거나 힘든 이웃을 돕는다든가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파트 한 채 장만할 돈으로 영화를 찾아 본다든지 어려운 동무를 거든다든가 하는 사람 또한 만나지 못합니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는 길을 살피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벌며 알맞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찾지 않는 요즈음 우리들입니다.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동서문화사,1982)이라는 살가운 어린이문학이 지난 2007년에 《못 말리는 내 동생》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고집 잘 부리는 어린 동생은 이웃집 할매가 뜨개질을 한번 배워 보라는 말에 “배우고 싶지 않아요.” 하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웃집 할매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지만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것을 떠 줄 수 있단다. 크리스머스 선물도 만들 수 있고 생일 선물도 만들 수 있단다. 물론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란다.” 하며 따스한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할매 말씀을 듣고 난 고집장이 여동생은 이내 뜨개질을 배웁니다. 한동안 몹시 얌전하고 착하고 조용히 누군가한테 선물할 뜨개질을 합니다. 돈과 앎과 이름값이 아닌 땀과 손길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릴 적부터 시나브로 익힙니다. 이 고집장이 여동생은 앞으로 더는 고집장이에 머물 까닭이 없습니다. (4343.5.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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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내 동생 난 책읽기가 좋아
도로시 에드워즈 지음, 조세현 옮김, 셜리 휴즈 그림 / 비룡소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51 ― 고집장이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
 : 도로시 에드워즈,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



- 책이름 :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
- 글 : 도로시 에드워즈
- 옮긴이 : 최경림
- 펴낸곳 : 동서문화사 (1982.12.25.)
- 2007년에 ‘비룡소’에서 《못 말리는 내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옴.



 (1) 쉬지 않고 놀며 밥 안 먹는 아이


 2007년 6월에 옆지기하고 함께 살면서 충북 음성에 살고 계신 부모님 댁에 찾아갔습니다. 이날 아버지는 당신 아들이 당신한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혼인해서 함께 산다고 한 옆지기와 저한테 몹시 못마땅하다 했고, 이때부터 2010년 4월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몇 차례 부모님 댁에 찾아갔으나 이때마다 아버지는 다른 데에 볼일이 있어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에 거의 세 해 만에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인천으로 찾아왔고, 이날 아버지는 당신 손녀인 딸아이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나이와 몸뚱이만으로 할아버지가 아니라 참으로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셔서 따로 전화를 했습니다. 당신 손녀 얼굴이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고 음성으로 자주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온 다음주에 음성으로 찾아가려 했으나 사진잔치하고 새로 낼 책에 시간을 쏟느라 인천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하고 어머니한테서 한 번씩 전화가 왔습니다. 온다고 하더니 왜 안 오느냐고.

 저저번 주말,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한 번 더 인천으로 찾아왔습니다. 제 사진잔치를 보러 오신다고 했으나, 사진잔치보다 손녀를 보고픈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머니는 아침에 전화를 걸어 두 시간 뒤에 닿는다 했습니다. 애 아빠 된 저는 아이가 언제나 낮잠 없이 내내 놀자고 해대는 통에 몹시 고단하고 힘겨워 그예 곯아떨어져 있다가 이 전화를 받고는 벌떡 일어납니다. 집으로 오신다면 집을 치워야 하니까요.

 드디어 오늘 집식구가 즐거이 음성으로 마실을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그제에 걸쳐 아이랑 부대낀 하루가 그지없이 고단해 몸살이 걸립니다. 도무지 움직일 수 없고 물을 만진다거나 뭘 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애 엄마는 오랫동안 몸이 아픈 사람이라 당신 몸 건사하기조차 벅찬 노릇입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겨우 방바닥을 쓸고 닦은 다음 빨래를 합니다. 아이가 하도 밥 투정을 하느라 밥 먹이기까지는 못하고 옆지기한테 맡깁니다. 고단하고 아픈 몸으로 아이 바깥바람을 쏘이고, 한동안 드러누웠다가 다시 아이하고 어울리며, 깜빡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이는 여태 낮잠 없이 온 집안을 들쑤시며 놀다가 바지에 똥을 누었습니다.

 골골거리며 하루를 보내며 어느덧 저녁을 맞이합니다. 이제 하룻밤 자고 어찌 되든 음성으로 마실을 가려 하는데, 우리 아이는 언제쯤 잠들어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옷을 껴입고 끙끙거리며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 된 분이라고 쇳덩이로 만든 몸은 아니었을 텐데, 두 아들내미를 키우고 집살림하며 앓아누운 시아버지 병수발까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아플 때에 누가 돌봐 준 사람이 없었을 텐데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프면 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 한손으로 벽 짚고 한손으로 허리 두들기며 끝끝내 집일 모두 하고 시아버지 병수발과 똥오줌 치우기 모두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잠 없이 혼자 잘 논다 싶던 아이는 책을 밟고 창문가에 서서 인형을 들고 놀다가 갑자기 쭈그려앉더니 소리가 나도록 쉬를 갈깁니다. 틀림없이 스스로 오줌을 눌 줄 알면서 심통을 부리거나 졸리거나 골이 날 때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책과 바닥에 흐르는 오줌을 걸레로 훔치고 아이 바지를 갈아입히며 이마를 짚습니다. 한숨이 절로 터져나옵니다. ‘얘야, 아빠가 어떡하면 좋겠니? 이 몸으로는 너무 힘들어 널 업어서 재워 주지 못하겠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 어린 날을 떠올려 봅니다. 어머니는 거의 성을 부리지 않았다고 느끼는데, 저하고 형이 다투었다든지 뭔가 말썽거리가 있으면 큰소리를 내며 꾸짖었고 구두주걱 따위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후려갈겼습니다. 엉엉 울며 잘못했다고 빌어야 비로소 후려갈기기를 그치셨습니다.

 형은 집에서 낳고 저는 병원에서 낳았다는데, 형이나 제가 언제쯤 똥오줌을 가렸다거나 똥오줌을 아무렇게나 싸질러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여쭈면, 어머니는 그때가 언젠데 생각이 나느냐며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얼마나 말썽을 피웠다라든가, 제가 얼마나 걱정스러운 짓을 했다라든가 또한 생각나지 않으신답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아기였을 때와 어린이였을 때만 고달플 아이키우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나이를 먹으면 나이를 먹는 대로 갖가지 어려움과 힘겨움이 있습니다. 아이를 다 길렀다 싶은 이웃 분들은 정작 힘들고 어려울 때는 아직 멀었다고들 말씀합니다. 이즈음 보여주는 온갖 모습은 외려 귀엽고 재미있기까지 하답니다. 참말 그럴까 궁금하고, 아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나날이 부대끼는 삶만큼 앞날이 고단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단하다면 오늘 하루가 고단하지 다가올 모레나 글피가 고단하지 않습니다. 모레나 글피를 헤아릴 겨를이 없달까요.

 숨을 돌리고 싶어 아이는 집에 두고 혼자 구멍가게로 찾아가 먹는샘물 여섯 통을 사 옵니다. 아이를 데리고 가면 오르막길에서 아이를 안은 채 십이 리터들이 물통을 한손으로 들어야 하기에, 오늘처럼 아픈 몸으로는 아이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밖으로 나갈 낌새를 보이자 얼른 저도 따라 나서겠다며 신발을 찾습니다. 아빠는 쌀쌀맞게 문을 닫고 혼자 나갑니다. 아이는 문간에서 빽빽 소리를 지르며 왜 저는 두고 가느냐며 투덜거립니다.

 여느 때에는 한 번에 오르는 오르막을 여러 차례 쉬어 가며 오릅니다. 물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아픈 채 보내는 오늘 하루를 잊지 않으려고 오늘 일을 적바림해 놓고 있는데, 이렇게 적바림해 놓지 않는다면 나 또한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이가 어릴 적 겪거나 치른 일을 하나도 못 떠올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옆지기는 아이 예전 사진을 보며 아이가 그렇게 더 어린 적이 있었느냐며 묻곤 합니다. 고작 한두 해 지난 일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어머니한테는 사진기가 없었을 뿐더러 사진기가 있었어도 사진기로 당신 삶을 적바림할 틈을 못 내셨으리라 봅니다. 저한테는 사진기가 있고 글을 쓰는 셈틀이 있습니다. 허구헌날 아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투덜거리는 애 아빠 잔소리요, 아이 때문에 오늘 하루 또한 얼마나 고달프고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느냐는 푸념뿐입니다. 그래,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어찌 이토록 잔소리와 푸념만 가득한가 싶습니다. 아이를 찍은 사진을 혼자서 돌아보거나 옆지기랑 아이하고 함께 돌아보노라면 이 아이가 얼마나 곱고 착한가 하고 느끼면서, 정작 살을 부비고 있는 동안에는 고달프고 힘에 부친다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제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고단하게 하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아이가 저를 고단하게 하는 모습하고 같지 않으랴 싶습니다. 제가 어머니한테 궁금하게 여기는 대목은 바로 오늘 하루 아주 실컷 느끼거나 배우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바깥으로 돈 벌러 나다니지 않고 집안에서 식구들하고 내내 복닥이고 있기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힘겹고 벅차지만 힘겹고 벅찬 만큼 내 어린 삶을 되짚습니다. 우리 아이 어린 나날 삶을 적바림하여 둘레에 들려주면서 나중에 우리 아이가 더 클 무렵 ‘아이를 키우는 여느 어버이 삶과 넋’이 어떠한가를 조금이나마 짚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 키우기란 어버이 키우기요, 아이 키우기란 사람 키우기이며, 아이 키우기란 다름아닌 내 삶을 키우는 나날이라고 뼛속 깊이 느낍니다.
 





 (2) 어린이문학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


 1982년에 처음 우리 말로 옮겨진 뒤 2007년에 다시 나온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이라는 어린이문학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이 책을 알아보던 지지난달, 무엇보다 책이름에 눈길이 이끌렸습니다. ‘고집장이’라. 나한테는 여동생이니 남동생이니 아무도 없지만, 바로 우리 아이야말로 고집장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은 퍽 오래된 서양 어린이문학인데, 우리 나라에 옮겨지는 숱한 어린이문학마냥 ‘판타지’가 아닙니다. 아주 수수한 ‘삶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겪었음직한 이야기요, 어디에서나 봄직한 이야기를 담은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입니다. 동생이 있어 본 사람이라면 으레 느꼈음직하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라면 늘 부대끼고 있음직한 이야기가 조곤조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에 나오는 고집장이 여동생은 한낱 고집장이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느 때에는 벼락맞을 고집장이 짓을 하지만, 어느 때에는 둘도 없이 착하고 얌전한 아이 몸짓을 합니다. 여동생은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품과 가슴을 알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저를 미워하거나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눈길과 손길을 알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저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얌전합니다. 여동생은 저를 미워하거나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끔찍하게 고집장이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 우리 집 아이를 고집장이로 만들고 있지 않느냐고. 우리 아이가 먼저 고집장이일 리 없으나, 애 아빠 된 내가 툭하면 힘들다느니 걸핏하면 지친다느니 핑계를 잔뜩 늘어놓으며 아이하고 제대로 놀아 주지 않으니 아이가 자꾸자꾸 고집장이에다가 떼쟁이 짓을 하지 않느냐 싶어요.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에 나오는 어머니를 보면 이토록 따스하며 넉넉한 사람이 어머니로구나 하며 새삼 깨닫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를 보면 이다지도 무뚝뚝하고 제 일거리만 찾는 사람이 어머니로구나 하며 남달리 배웁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부터 아이를 더 살가이 보듬지 못하면서 아이 탓만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리 힘들고 저리 고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힘든 만큼 보람 있고 고된 만큼 아름다운 삶임을 잊고 있기에 아이를 키우는 나날을 즐거이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른 누구한테 읽으라고 건넬 책이 아닌 저 스스로 여러 차례 거듭 읽을 책이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읽어 줄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어 주며 애 아빠 된 저 스스로 얼마나 고집장이 짓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쓰다듬고 품에 안고 어부바를 하면서 아이가 너르고 따순 사랑을 듬뿍 받아먹도록 할 노릇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삶이요 부대끼는 몸짓에 따라 새로워지는 삶인데, 아이가 고집을 부리는 까닭을 살피고 아이가 고집을 피우는 뿌리를 헤아리며 곱게 손을 내밀어야지 싶습니다.


 (3) 조곤조곤 되읽는 말마디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이라는 어린이문학에는 돋보이는 고빗사위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몹시 부드럽습니다. 큰일이란 한 가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흔하고 너른 이야기만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어린이문학은 몹시 재미있고 애틋합니다. 바로 이 어디에서나 흔하고 너른 이야기야말로 우리 삶을 북돋우는 이야기이며, 이와 같이 흔하고 너른 이야기를 사랑하는 가슴이 될 때에 우리 삶을 아끼고 돌보며 힘차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글월 하나하나에 웃음을 지으며 읽고, 글줄 하나하나마다 눈물을 지으며 덮습니다. 제가 앞으로 써야 할 글이라면 다름아닌 이런 이야기여야 한다고 새삼 느끼고, 나 스스로 날마다 복닥이는 삶을 제대로 사랑하고 알뜰히 건사하면서 저부터 참되고 착하고 고운 어버이로 자리잡도록 힘써야겠다고 다시금 곱씹습니다. (4343.5.17.달.ㅎㄲㅅㄱ)


[9, 12, 14, 16쪽] 사진을 찍을 때 웃으라고 하면 꼬마 여동생은, “난 웃기 싫어!”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주면 동생은, “고맙습니다!” 하고 생글생글 웃었읍니다 … “얘, 너의 꼬마 여동생이 물속에 들어갔다!” 큰일났읍니다.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은 신과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물속에 들어와 고기를 잡으려고 했읍니다 … “말 안 들으면 끌어낼 거야!” 그러자 동생은 물속에서 달아나려고 했읍니다. 동생은 정말 바보 같은 아이입니다. 물속에서 달아나려고 하다가 넘어져서 옷이 온통 젖고 말았읍니다 … 꼬마 여동생은 샌드위치를 다 먹어 버렸읍니다. 동생은 자기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내 샌드위치와 내 친구들의 샌드위치까지 다 먹어 버리고 말았읍니다. 다 먹고 나서는 또다시 엉엉 울었읍니다. 이번에는 꼬마 여동생에게 주스를 주었읍니다. 동생은 주스를 밭에 뿌려 버리고 또 엉엉 울었읍니다.

[20, 22∼23쪽]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내 꼬마 여동생은 늘 아침 식사는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읍니다. 점심도 남김없이 다 먹었읍니다. 저녁도 남김없이 다 먹었읍니다. 무엇이든지 남기는 것이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은 아침을 조금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읍니다 … 어머니는 동생에게 나들이할 때 입는 푸른색 새 드레스를 입히고 흰 양말에 새하얀 신을 신겼는데, 그 사이에도 동생은 조금도 어머니를 돕지 않았읍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다 알 거여요. 동생은 그냥 멍청히 선 채, 옷을 입혀도 소매에 팔을 넣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 신을 신겨도 발을 들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말하셨읍니다. “할 수 없다. 너는 두고 가야 할 것 같다.” 그 말을 듣자 고집장이 꼬마 동생은 얼른 발을 들었읍니다.

[33, 36∼37, 40쪽] 동생은 우유배달 아저씨나 빵집 아저씨, 석탄집 아저씨나 유리창 닦는 아저씨, 그밖에 장사로 오는 사람들과 늘 이야기를 잘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방해가 될 만큼 잘도 재잘댑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고집장이 꼬마 동생을 좋아했읍니다 … “의사는 싫어!” 하면서 시트 아래에 얼굴을 묻었읍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동생이 좋아하는 우유배달 아저씨였읍니다. 우유배달 아저씨는 동생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옆줄이 쳐진 노트와 파란 연필을 두고 가면서, 말했읍니다. “빨리 나아야지.” … 유리창 닦는 아저씨도 지지 않았읍니다. “의사가 싫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데. 너는 가엾은 꼬마 아가씨로구나. 귀로 듣는 청진기도 입안에 넣는 체온계도 그리고 의사의 가방 속에 있는 그 많은 신기한 것들도 다 못 보고 말다니 정말 안 됐다…….”

[45∼46쪽] 동생은 도토리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읍니다. 혼자만 비밀로 간직했읍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고집장이 꼬마 동생은 도토리를 심은 곳에 가서는 돌멩이와 잎사귀와 가지를 보았읍니다 … “누구냐? 아빠의 꽃밭을 마구 파헤쳐 놓은 사람이?” 아빠가 물으셨읍니다.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이 대답했읍니다. “아빠, 내가 그랬어요.” “그래? 그렇다면 너는 나쁜 아이다. 아빠가 뿌린 꽃씨를 다 못 쓰게 만들어 놓지 않았니.” 그러자, 동생이 말했읍니다. “꽃씨 같은 것은 아무려면 어때서요. 반짝이는 갈색 도토리를 심었는데요.”

[47, 51쪽] 정말 모르는 것이 없는 우리 어머니는 병에 물을 담고 어떻게 하면 병 아가리에 도토리를 심을 수 있는지를 동생에게 가르쳐 주었읍니다 … 동생이 나무를 심자, 어머니는 주위의 흙을 어떻게 눌러 주는지를 가르쳐 주었읍니다.

[66∼68쪽] 어머니는 화가 나셨읍니다. 동생 옆에 가서 인형을 뺏으려고 하셨읍니다 … 벌로 어머니는 동생을 자기 방에 가두어 버렸읍니다. 그렇게 나쁜 일을 했으니까 당연한 벌이지요. 나의 소중한 요정인형은 마당의 흙탕물 속에 거꾸로 처박혔읍니다 … 두 인형은 무척 예뻐져서 병원에서 돌아왔읍니다. 그러나 동생은 병원에서 돌아온 로지 프림로즈를 보더니 아주 실망했읍니다. 왜냐하면 로지 프림로즈는 몰라보게 고운,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던 머리에는 곱슬머리가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99∼102쪽] 꼬마 여동생이 날마다 존즈 아주머니네 집으로 갔기 때문에 존즈 아주머니네 아저씨는 우리 집과 아주머니네 집 사이에 조그만 문을 만들어 주었읍니다. 아저씨는 그 문 위에 조그만 아치를 만들고 그 문 위에 덩굴이 자라도록 덩굴 한 그루를 심었읍니다. 동생이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래서 존즈 아주머니와 나의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과 아주 친하게 되었읍니다 … 어느 날이었읍니다. 코코아 존즈 아주머니가 고집장이 나의 꼬마 여동생에게 말했읍니다. “너, 뜨개질을 배우고 싶지 않으냐?” 그러자 동생이 대답했읍니다. “배우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겠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것을 떠 줄 수 있단다. 크리스머스 선물도 만들 수 있고, 생일 선물도 만들 수 있다. 물론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란다.” 그 말을 듣자 꼬마 여동생은 뜨개질을 배우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읍니다. “그럼 배울래요. 진짜 배워 주는 거지요?”

[118∼119, 122∼123, 125쪽] 다음날 아침 동생은 일찍 일어나 난생 처음으로 자기가 옷을 입었읍니다. 정말이어요. 단추도 자기가 잠그고 양말도 자기가 신었읍니다. 자기가 얼마나 옷을 잘 입는가를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는 동안 마당에 나가 자기 꽃밭에서 꽃을 꺾어 예쁜 꽃다발을 만들었읍니다. 선생님에게 가져다 드리려고요. 그러니까 나의 꼬마 여동생도 가끔은 아주 착한 아이였읍니다 … 아이들은 대답하려고 손을 들었읍니다. 그러자 나의 꼬마 여동생도 덩달아 손을 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 웃었읍니다. 선생님이 말하셨읍니다. “웃으면 안 돼요.” 그리고 선생님은 나의 꼬마 여동생에게, 진짜 큰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은 또박또박 맞는 대답을 했읍니다. 그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말하셨읍니다. “아주 좋은 대답을 했으니까 선생님은 90점을 주겠어요.” 학교에서 90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선생님은 동생을 위해서 손수 90점이라고 써서 진흙 바구니 옆에다 붙여 놓았읍니다 … 동생은 그날 참으로 좋은 아이였읍니다. 그런데 다음 시간에 우리가 교실에 돌아와서 책읽기를 시작했을 때 동생은 소리없이 가만히 있었읍니다. 왜 그런지 아셔요? 동생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130쪽] 아버지는 의자와 책상을 마당으로 내갔읍니다. 꼬마 여동생도 마당으로 나갔읍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기 때문에 동생은 아주 얌전하게 놀았읍니다. 꽃밭에 들어가 마구 짓밟지도 않았고 꽃을 꺾지도 뽑지도 않았으며 나쁜 짓은 조금도 하지 않았읍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다시 화난 얼굴을 하시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 “아빠, 나 물 마시고 싶어요. 목이 말라요.”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은 동생으로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읍니다. 왜냐하면 동생은 가끔 빗물통에서 더러운 물을 마실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창 일을 하실 때였기 때문에 동생이 자주 귀찮게 구는 것이 싫으셨읍니다.

[139쪽] 블레이크 할아버지는 동생을 내쫓았다고 우리를 무척 못마땅해 하고 있었읍니다. 고집장이 꼬마 여동생도 내가 데려오려고 하자 화를 내며 말했읍니다. “싫어. 블레이크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이 더 좋아.” 블레이크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달걀을 삶아 주었고 신문지에 싼 빵과 치즈를 꺼내어 가죽 자르는 칼로 잘게 썰어 주기도 했읍니다. 어머니도 화가 나셨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서 맛있는 차를 끓여 마시려고 했는데, 동생을 찾느라고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화가 났읍니다. 나는 동생만 블레이크 할아버지의 가게에서 즐겁게 지낸 것이 샘이 났기 때문입니다.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읍니다. “아, 이제 살았다. 이제 장난꾸러기 딸에게 정신을 팔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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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번 읽을 책값 9800원


 꽤나 비싸구려 책이 있고 꽤나 싸구려 책이 있습니다. 비싸구려 책이라 해서 사기 어렵거나 싸구려 책이라 해서 사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먹고살기 넉넉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 둘레에서 먹고살기 넉넉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치고 저보다 벌이가 적거나 저보다 작은 집에서 살거나 저보다 손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머니가 변변하지 못한 주제에 마음을 사로잡는 책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장만합니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주제에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마련합니다. 집하고 도서관 달삯을 낼 때마다 갤갤대는 주제에 마음을 건드리는 책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사들입니다.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사진책이든 글책이든, 저한테 좋은 책이기에 기쁘며 좋은 마음으로 사서 읽고 꽂아 놓으며 바지런히 다시 끄집어 내어 읽습니다.

 장만한 책을 한 번만 읽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어줍잖은 책이라 할지라도 세 번은 읽습니다. 꽤 괜찮은 책이라면 서른 번은 읽는다 할 만하고, 아주 훌륭한 책이라면 즈믄 번은 읽는다 할 만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성경책을 끼고 살곤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 아저씨 가운데에도 성경책만 되풀이해서 읽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야말로 얼핏 보면 ‘골수 예수쟁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며 얘기를 나누면 ‘살가운 이웃’입니다. 당신들이 성경책을 끼고 사는 까닭은 당신들한테 성경책처럼 수백 수천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쓰는 글과 책이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한 글이나 책이 되리라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글과 책이 나한테 성경책과 같도록 땀을 흘리고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을 바쳐야 한다고 꿈꿉니다. 한 번 글을 쓸 때마다 수없이 깎고 다듬고 고칩니다.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쓰고 손질하고 가다듬습니다. 책으로 내놓는다면 다시 읽고 거듭 읽으며 다듬어 놓습니다. 책으로 찍혀 나오면 옆지기와 나란히 찬찬히 되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저 스스로 제 글을 읽으며 웃음을 짓거나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내 글을 읽을 때에 내 웃음과 내 눈물을 자아내지 못한다면 내 글은 더할 나위 없이 엉터리라고 느낍니다. 나부터 내 글을 애틋하게 여기고 살가이 돌볼 수 있을 때에,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 글도 한 번 읽어 주셔요’ 하고 내밀 만합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제 글이 성경책처럼 거룩하거나 훌륭하지 못할지라도 성경책과 다름없이, 또는 성경책과는 또다른 테두리에서 거룩하거나 훌륭할 수 있도록 내 삶을 추스르고 다스리면서 글로 엮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느 애 아버지께서 책값 9800원을 못 쓰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따로 대꾸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런 책을 아이들한테 사서 읽히는 한편, 어버이 또한 함께 읽으면 아주 좋답니다. 책값 9800원을 쓰면 살림살이가 엉망이 되시나요? 책값 9800원이라고 하지만, 이 대단한 그림책은 한 번이 아니라 즈믄 번은 볼 책이에요. 즈믄 번을 보는 책이라 하면, 이 책을 장만한 값은 10원이 안 됩니다.’

 온누리에 비싼 책이란 없습니다. 온누리 모든 책은 제값을 합니다. 십만 원짜리 책이라 할지라도 백 번을 되읽는 책이라 할 때에는 천 원을 치르고 산 책입니다. 즈믄 번을 되읽는 책이라 하면 고작 백 원을 치르고 산 책일 테지요.

 우리 식구 가운데 저부터 즈믄 번을 읽고 옆지기가 즈믄 번을 읽으며 아이가 즈믄 번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책값이 얼마나 싼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렇게 온 식구가 즈믄 번씩 읽은 책은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이한테 사랑스러울 옆지기를 만나 저희네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도 보고, 또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새로운 옆지기를 만나 새로운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도 볼 터이니, 얼마나 값싸고 고마운 책이 될까요.

 참말 책값처럼 싸디싼 값이 없습니다. 참으로 책값처럼 적은 돈을 들이며 마음을 살찌우고 북돋우며 일구는 빛줄기가 없습니다. 참 책처럼 적은 돈으로 사랑과 믿음을 일깨워 따스하고 넉넉하도록 도와주는 스승이란 없습니다. (4343.5.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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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5-17 13:45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지요.
저도 가끔 그런 책을 만나면 아껴가며(?) 읽습니다.
아, 성경도 좀 많이 읽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파란놀 2010-05-18 05:53   좋아요 0 | URL
무슨 책이든 사람들이 좋다고 할 만한 아름다운 책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으면 아주 기쁘겠어요..

카스피 2010-05-18 18:57   좋아요 0 | URL
ㅎㅎ 아무리 비싼 책이라도 많이 읽으면 결국 싸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손석춘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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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섬기는 삶이 사람을 섬기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5] 손석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거님길 바닥돌을 새로 갈아치우는 데 들일 돈으로 교육과 문화와 복지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참 예전부터 불거져 나왔으나 아직까지 공무원 귓결에 스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공무원 귓결뿐 아니라 정치꾼 귓결에도 안 스치고 있으리라 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금세 자라는가를 헤아린다면, 굳이 돈을 들여 거리거리에 벚나무를 잔뜩 심지 않아도 넉넉합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나무심는날에 맞추어 반마다 몇 사람씩 거리거리 다니면서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거나 나무 씨앗 하나를 심어서 고이 기르도록 한다면,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심은 나무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들한테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랍니다. 이 나무는 이 어린이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에는 어른들한테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겠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심어 스스로 기르고 돌본 나무일 때에는 이 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사랑하고 아낍니다. 나중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할 때에는 골골샅샅 숱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사람들 터전을 아름다이 가꾸는 길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돈을 들여 꾸밀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움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 땀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며 손길을 바치면 언제나 아름다움하고 가까울 뿐 아니라, 이러한 땀과 마음과 손길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나라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살리기’라는 토목공사가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살리기’라는 이름을 붙여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데, 이 나라 대한민국은 수많은 사람들 일자리가 바로 토목공사에서 비롯합니다. 주택보급율이 일찌감치 100퍼센트가 넘었어도 아파트 짓기를 멈추지 않을 뿐더러, 제 고향마을인 인천 같은 곳은 240만 인구를 360만이 되도록 아파트를 어마어마하게 때려짓는 꿈까지 꾸고 있는 까닭이란, 바로 이와 같은 토목공사 일자리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살기 때문입니다.

 서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서민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은 중산층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더욱이,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대로 토목공사 일을 합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서민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하는 중산층이 드뭅니다. 알차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일을 재벌이 드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 많은 돈’에 휩쓸리고 있으며, 이러한 소용돌이는 광고지와 다를 바 없다는 몇몇 신문뿐 아니라 스스로 왼쪽이라느니 진보라느니 하고 내세우는 신문까지 어슷비슷합니다. 어떠한 신문이든 자유로운 목소리가 아닌 광고주를 찾아 돈을 벌어 일삯을 치르고 글삯을 내어 밥벌이를 하는 얼거리에 매여 있습니다.


.. 다만, 언제까지 기성세대의 잘못만 추궁할 일은 아닙니다. 기성세대 탓만 하다가는 소중한 10대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인생도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문제는 흑백의 울타리에 갇힌 민주주의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가두는 데 있습니다 ..  (27, 240쪽)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혁명처럼 내놓았던 손석춘 님이 젊은이들한테 ‘온누리를 옳게 읽는 자기계발서’ 틀거리로 엮어 내놓은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손석춘 님은 아주 너그럽게도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책을 따로 써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애써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지식청년 자기계발서’가 없이는 이 나라 젊은 지식인들이 ‘신문읽기’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레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신문읽기이니 영화읽기이니 책읽기이니 사진읽기이니 그림읽기이니 교육읽기이니 정치읽기이니를 ‘어떤어떤 자기계발서’를 들추어야 비로소 알아채는 지식인이 더없이 많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젊은이이든 중고등학생 푸른 넋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곧은 삶을 일구지 못하는 가운데 스스로 곧은 책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곧은 말을 붙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이 아무리 허접하고 엉터리보다 못한 이야기를 줄줄 읊고 있더라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맑고 밝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군가한테 돈을 먹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퍼뜨리는 목소리가 판을 치든 떡을 치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으면 올바로 읽을 올바른 삶입니다. 책을 읽으면 올바로 되새기는 올바른 넋입니다. 학교교육을 받으면 올바로 배우고 가르치는 올바른 매무새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까닭에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같은 ‘또다른 자기계발서’를 찾아 들고야 맙니다. 우리가 찾아 들어야 할 책이라면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이어야 할 터인데, 사람 삶 밑바탕을 건드리는 책을 쥐어도 속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찾고 새겨야 할 책이라면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이어야 할 텐데, 자연 흐름 밑뿌리를 보듬는 책을 거듭 살피더라도 온몸으로 삭이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막강한 자본의 힘을 배경으로 대화를 봉쇄하거나 대화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여론몰이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자본을 소유한 극소수 사람들은 여론이 공론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다수인 민중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다 보면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같은 이유에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절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인 양 호도합니다 ..  (107쪽)


 손석춘 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빗대어 우리 삶터가 얼마나 ‘안 민주주의’이거나 ‘민주주의를 억누르’거나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참말 우리 삶터는 아주 글러먹은 독재요 봉건이요 식민지요 쇠사슬입니다. 이는 정치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머리길이를 다그치고 치마와 바지 매무새를 나무라며 오로지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며 아이들 스스로 제 고운 삶을 붙안지 못하게끔 가로막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스스로 올바른 넋 올바른 삶이라 한다면 올바른 말로 올바른 길을 이야기하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습니다. 헌법을 내리누르고 있는 터무니없는 교칙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그릇되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칙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누구나 알리라 봅니다만, 아마 오늘 우리 터전에서는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은데, 학교에서는 교장이 임금님입니다. 우두머리요 왕초입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학교에서 교장이 임금님이요 우두머리요 왕초인 얼거리는 그대로입니다. 외려 나날이 더 깊어진다 할 만하고, 되레 갈수록 단단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예전처럼 손찌검을 한다든지 몽둥이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주먹다짐이 살짝 줄었지 돈과 권력으로 휘두르는 몹쓸 짓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같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교칙이며 교장 권력이고 교육감 지휘봉입니다.


.. 국민은 언제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만 강조하는 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법을 만들고 고치고 없애는 과정에 국민이 하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을 때, 법치는 비로소 민주주의입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는 법을 만들거나 고치고 없애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  (126쪽)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총칼이나 주먹다짐이 아닌 말로 일을 풀어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입니다. 속알맹이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떤 일이고 말로 풀리는 법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주가 말을 나누며 일을 푸는 모습을 보기란 참 힘듭니다. 꼭 집회를 해야 하고 어김없이 몸싸움을 해야 합니다. 헌법에는 집회를 하는 자유가 적혀 있으나, 어떠한 일터에서도 집회를 하는 자유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집회를 꺾어 누르는 경찰을 불러들여 흠씬 두들겨패고 감옥에 집어넣기까지 하거나 벌금을 왕창 물립니다.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 이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말로 일을 푼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어림 반푼어치조차 안 됩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말이나 평화로운 몸짓으로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민주주의가 없는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허울만 좋은 거짓 민주주의는 쓸어내고 싶다면, 말로는 아무런 일을 풀거나 맺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야말로 온몸으로 두들겨맞는 삶을 건사하고 싱긋싱긋 방긋방긋 웃으면서 평화로운 말과 몸짓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사람들하고 똑같이 삿대질을 한다고 민주주의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못난 엉터리들하고 마찬가지로 주먹다짐을 한다고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고 민주주의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 손석춘 님은 ‘젊은 지식인한테 도움이 될 자기계발서’로서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를 쓰셨는데, 이 나라에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이러한 자기계발서는 안 써야 맞습니다. 우리가 쓸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기성세대라 하는 우리 어른 가운데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꿈꾸며 살아가는 목숨 하나’로서 ‘나는 내 터전에서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롭게 살아가는가’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글을 써야 합니다.


.. 그런데 왜 자신의 미래 모습이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 물구나무 선 인식을 하고 있을까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주권 의식을 가지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노동 운동을 폄훼해 왔기 때문입니다 ..  (188∼189쪽)


 손석춘 님이 쓸 글은 아름다운 문학이어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젊은이 앞에 선물해 줄 책은 슬기로운 삶자락 이야기여야 합니다. 손석춘 님이 머리를 쥐어짜며 풀어낼 말마디란 ‘국어사전에 숨어 있는 예쁘장한 낱말’이 아니라 ‘저잣거리 여느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당신들끼리 주고받는 가장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을 써낸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알아채 주지 않습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아름다운 문학보다는 ‘꼴통 보수들이 휘두르는 총칼 같은 무기’에 맞설 만한 ‘총칼 같은 지식조각’들이니까요. 슬기로운 삶자락을 들려준다 한들 젊은 지식인들은 삶이 아닌 입으로 일을 하거나 싸움을 하거나 모임을 꾸리기 때문에 더없이 고단합니다. 수수하고 손쉽고 살가운 말마디로 책을 쓰면 아주 반갑지만, 이러한 책에 깃든 멋과 맛을 듬뿍 받아들이며 받아먹는 고운 젊은 넋은 얼마 안 됩니다.

 아마 ‘자기계발서’가 아닌 ‘삶책’을 쓴다면 손석춘 님은 굶어죽기 딱 알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굶어죽기 딱 알맞을 책을 손석춘 님 같은 분들이 써야 합니다. 굶어죽을 다짐으로 삶책을 써야지, 웬만큼 팔리고 읽힐 만한 자기계발서를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손석춘 님이 이 땅에 참되고 착하고 고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워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거나 꿈꾸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요? 제가 잘못 생각했다면 고개 숙여 뉘우칩니다. (4343.5.16.해.ㅎㄲㅅㄱ)


 ┌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2010)
 ├ 글 : 손석춘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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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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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 사진책은 시중 책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지율 스님 다른 책에 이 글을 걸쳐 놓는다. 이 사진책은 녹색평론사에 전화해서 주문해야 한다. 이 사진책을 보고 싶은 분은 한 권에 3000원이니 10권을 3만 원에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주신다면 더없이 고맙겠다.)
 

 






 낙동강 삶터와 거짓말하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8] 지율 스님, 《낙동강 before and after》



- 책이름 : 낙동강 before and after
- 글ㆍ사진 : 지율 스님, ‘낙동강 숨결 느끼기’ 순례 동행들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10.3.31.)
- 책값 : 3000원
(http://www.chorok.org)


 (1)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을 참말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진은 참말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참을 밝히는 글이 있으나 거짓으로 가득한 글이 있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한편, 거짓으로 넘실거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참을 숨긴 목소리가 있고 참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사진을 다르게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쪽에 서 있느냐 저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요. 우리 동네 한복판에 51층으로 올라설 아파트는 누군가한테는 아주 멋진 집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51층짜리 아파트 둘레에서 햇볕을 쬐지 못하고 찬바람만 씽씽 불어대는 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한테는 끔찍한 집자리입니다. 돈 몇 푼으로 햇볕권을 갚아 줄 수 없는 노릇이요, 살림을 꾸리는 넋을 보듬을 수 없습니다.

 헌책방을 속깊이 헤아리면서 책시렁을 가만가만 살피는 이들한테는 헌책방에서 숨죽이는 책들이 어떻게 아름답고 좋은가를 온몸으로 깨달으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묻기만 하거나 어쩌다 한 번 지나치는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람한테는 헌책방처럼 구지레하거나 어수선한 데는 따로 없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보배로운 책을 찾고 얻는 헌책방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아무런 책이 없는 헌책방입니다.

 골목길을 오로지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으로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은 내 터전인 골목길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습니다. 곱고 맑고 살갑게 일구고 돌봅니다. 골목동네 사람한테 골목길이란 추억 아닌 삶(현실)이며, 퇴락한 곳이 아닌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과 부산을 네 시간으로도 모자라 두 시간 반이나 두 시간 만에 오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수천 억이 아닌 수십 조를 쓰더라도 빠른기차를 놓아야 합니다. 수천 억이나 수십 조를 교육과 복지에 바쳐서, 대학 교육까지 개인이 돈을 내지 않고 나라에서 돈을 내도록 하면서 튼튼하고 곧은 배움마당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빠른기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논밭과 산들과 냇물이 파헤쳐지거나 무너지거나 앓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주 빨리 휙휙 지나치는 ‘풍경’이지, 숱한 목숨과 사람이 기나긴 나날을 보내온 삶터에 기찻길을 놓았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빠른기차를 달리며 바깥을 바라보는 사진하고 기찻길한테 자리를 내준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서 빠른기차를 바라보는 사진은 다릅니다. 빠른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기차가 내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 있는 사람은 삶자리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등에 업으며 귀를 막아야 합니다.

 자가용을 타고 골목을 쌩 하니 달리며 내다보는 모습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휙휙 달리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이랑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릴 때 골목을 쳐다보는 모습이랑 아이 손을 잡고 거닐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빨리빨리 달리기만 해서는 골목을 느낄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머리속에 자질구레한 생각조각이 많으면 골목을 한갓지게 거닐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습니다.

 사진 하나를 찍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사진감인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이나 물건하고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구경하는 삶으로는 구경하는 사진일 뿐입니다. 여행하는 사진은 거의 모두 구경꾼 사진입니다. 이러다 보니 여행 사진은 으레 그럴싸하거나 멋들어진 모습으로 꾸미려 할 뿐, 그 좋다고 하는 곳을 두루 다니면서 맛보고 받아들인 좋은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 가운데 스스로 조촐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합니다. 내 삶터를 찍고 내 사랑이를 찍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찍어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아파트를 아끼며 빠른기차와 자가용을 아끼는 사람한테는 ‘쇠삽날 재개발 정책’에서 장미빛 꿈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면서 큰물을 막는다느니 물을 잘 살려쓸 수 있다느니 일자리를 늘린다느니 아름다운 나라로 탈바꿈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잔뜩 파헤쳐진 강바닥을 보면서 ‘이제 더 멋지게 다시 태어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강바닥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바라보면서 ‘꿈처럼 아름다운 관광길’이 태어나겠거니 생각합니다. 서울 청계천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돈을 좋아하지 않고 자연 삶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4대강 살리기’란 무서운 말장난이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느라 정작 우리 삶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뿐 아니라, 일찌감치 우리 둘레 우리들 조그마한 터전부터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와 막개발이 판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좋은 삶 좋은 삶터 좋은 자연이란 사람이 돈을 써서 억지로 꾸밀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살리거나 사랑한다면 자연을 그대로 놓아 두기만 하면 되는 줄 헤아립니다. 씨앗 하나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넉넉한 줄을 읽습니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으며 자연스러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터전이요, 이 아름다운 터전에서 우리들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멋과 웃음이 있음을 느낍니다.

 온누리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든 사람 눈높이와 삶자리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사진이 됩니다. 구경꾼 사진은 동네 주민한테 거짓말 사진입니다. 동네 주민 사진은 구경꾼한테는 거짓말 사진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뜯어고치고자 집회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거짓말입니다.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경찰하고 한 자리에 선 사람들한테는 짓밟히고 억눌려서 집회를 하겠다는 사람들 이야기와 삶이 거짓말입니다. 흔히들 ‘왜곡 사진’이니 ‘비틀린 기사’이니 하지만, 왜곡이나 비틀림이란 없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매무새가 당신들 삶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꾸미거나 겉발림하는 모양새가 당신들 삶입니다. 큰 돈과 큰 집과 빠른 차를 바라는 이들하고 가난과 작은 삯집과 두 다리로 살아가는 이들하고는 참거짓을 가르는 잣대와 금과 틀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삶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지만,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꾸리지 않을 뿐더러,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돈바라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돈바라기 사진이라는 허울을 감추고 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 지율 스님 사진 《낙동강》


 ㅈ일보는 지율 스님이 찍은 사진을 놓고 “이들의 허위 선동은 국민 가슴에 근거 없는 증오를 심고,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든다(2010.5.11.)”고 이야기합니다. 또다른 ㅈ일보는 “현지 민심부터 읽어야 한다. 더 이상 식상한 이벤트로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려면 논리적인 설득만이 유일한 길이다(2010.5.13.)”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율 스님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녹색평론사)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사진책을 내놓으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ㅈ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거나 기자로 뛰는 분들이 지율 스님 사진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며, 지율 스님 사진잔치에서 사진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지율 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 강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세워진 시멘트 기둥을 자연과 신의 선물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4대강 사업은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의 강은 원형을 잃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녹색의 그믈망에 덮여 있는 저 베어진 나무들은 얼마전 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바로 이 강가에 서있던 생명들이었다. 한 나무들의 봄은 우리의 봄이었고 그 나무들의 여름은 우리들의 여름이었다. 그 나무들의 죽음은 바로 계절의 죽음이며 강의 죽음이며 우리들의 죽음이다 ..  (초록의 공명/2010.2.11.)


 지난 2007년에 사진쟁이 홍순태 님이 《낙동강》(눈빛)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홍순태 님은 1970년대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책 하나로 묶었습니다.

 올 2010년에 스님 지율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라는 작은 사진책을 내놓으며 2009년과 2010년에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 빛을 본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2000년대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1970년대 낙동강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진책 《낙동강》은 1970년대에 홍순태 님이 찍은 사진일 뿐, 1960년대나 1950년대나 1940년대나 이 사진에 깃든 모습하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바꾼다면 1870년대라든지 1770년대라든지 1670년대하고도 다를 바 없겠지요. 아마 1070년대라든지 570년대하고도 어슷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빛을 보는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2000년대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쇠삽날 개발 정책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2009년과 2010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모습이 어떻게 사라지고 마는가를 찬찬히 알려줍니다.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낙동강은 단순히 자연경관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만이 아니라 물의 원천이요, 물은 인간의 희망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을 살찌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수자원의 원천이며 우리 고유문화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고 덧붙입니다.

 스님 지율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라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천성산을 통해 나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신고 다니는 신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국토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천성산을 밟아 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없는 자들의 기술적인 잣대에 의하여 천성산은 무너지고 파헤쳐졌다. 천성산은 내게 우리의 국토가 처해 있는 아픔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기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 눈이 아픈 현장들을 담은 사진전을 여는 이유는 -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없이 무참하게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4대강 개발의 실상을 알리고,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하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한 시대를 살다간 한사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우리 뒤에 올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  (초록의 공명/2010.3.30.)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밥굶기 싸움에 이어 사진찍기로 접어들었을까요.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그토록 기나긴 밥굶기 싸움을 하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그토록 가녀린 몸뚱이로 작은 사진기를 어깨에 달랑달랑 걸치고는 기나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고 또 걷고 다시 걷고 있을까요.

 《낙동강》을 펴낸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강물이 얼어붙을 때이든 큰물이 져 풀집이 물에 잠기든 낙동강으로 달려갔습니다.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펴낸 스님 지율은 낙동강 물줄기에 쇠삽날이 한 번 찍히고 두 번 찍힐 때마다 거듭거듭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있습니다.


.. 제가 초록의 공명이라는 이름의 창을 쉽게 닫지 못했던 것은 문명과 자본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과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혹은 소유하는 행위가 계속 된다면 이 오리섬에 깃들었던 많은 생명들의 몰락처럼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도 지구라는 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질 동원은 무수히 많아 보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 더 사실적이기는 합니다 ..  (초록의 공명/2010.2.3.)


 무엇을 참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거짓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연에는 태어남만 있지 않고 죽음이 함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사람 삶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담아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다고 읽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은 거짓부렁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거짓부렁이라고 온나라 수백만 사람들한테 외치고 있는 사람이 거짓부렁 목소리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목소리는 고작 수십 또는 수백 사람 귀에만 들어가는데, 수백만 사람 앞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이 낮고 작은 목소리가 무엇이 그리도 무섭거나 두려워서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아냥거리기 앞서 지율이라고 하는 스님 하나가 선 낙동강 물줄기에 나란히 서 있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기 앞서 산을 보고 물을 보며 흙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물과 바람과 밥이 아닌 돈과 이름과 힘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 “여러분도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걸으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먼젓번 순례에 참가한 외국인 한 분은 전 세계 어디서도 낙동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36쪽)


 서울과 부산을 잇는 빠른기차를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빠른전철을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빠른기차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 거의 안 멈추고 달립니다. 빠른전철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서 드문드문 설 뿐 신나게 달립니다.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이웃동네를 오갈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전철이 있어야 합니다. 옆동네를 드나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넘어, 자전거와 두 다리와 아기수레로 오갈 조용하고 걱정없으며 오붓한 길이 있어야 합니다.


.. 지난 주말, 설악산의 단풍객이 5만이 넘었고, 해운대 광안리 불꽃놀이 인파가 70만을 넘었으며, 올 시즌 야구 관람객은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오색 단풍의 풍광, 바닷가의 현란한 불꽃놀이, 운동장의 함성과 열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다. 하지만 억만 년 이어져 내려온 자연의 물길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 재앙에 대한 경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되고 있어도, 태어나 자라게 해 준 국토가 겪는 아픔의 현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너무나 드물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10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기는 사진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은 거의 모두 빠른기차와 빠른전철하고 맞닿은 사진입니다.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닮은 사진이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는 사진은 더욱 드뭅니다. 아기수레를 끄는 사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두 다리로 거니는 사진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습니다.

 저는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우리 옆지기도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엄마랑 아빠가 손빨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딸아이 또한 손빨래를 사랑하여 머잖아 제 손으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는 날을 맞이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식구 옷가지를 손빨래로 깨끗하게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듯이 제가 마주하는 삶을 손빨래하는 마음으로 사진 한 장에 담고 두 장에 싣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손빨래를 하고, 두 다리로 걸으며, 동네에서 생협하고 어깨동무하는 내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일하며 알맞게 노는 삶을 좋아합니다.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하고 지율 스님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포개어 놓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고작 50쪽짜리인데다가 앞등조차 없어 책꽂이에 꽂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여느 책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여쭈어야 따로 받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낮은 자리에서 만들며 낮은 자리에서 나누는 사진입니다. 이런 낮은뱅이 사진이 뭇사람을 쑤석거린다든지 엉터리 이야기를 퍼뜨린다든지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낙동강에 선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니까요. 낙동강에 박힌 쇠말뚝을 본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파하는가를 받아들이니까요.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우리가 기나긴 나날 아름다이 건사해 오며 울고 웃고 보듬던 물줄기 삶터를 보여줍니다.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며 등돌리는 바람에 앞으로는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할 슬픈 물줄기 생채기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말없이 말하기도 하지만, 사진은 슬픔을 눈물과 함께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진은 사랑이지만, 사진은 미움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눈물을 담은 땀방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겉치레 돈벌레 몸짓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따스한 손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우악스런 주먹다짐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너그러운 어버이 품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차가우며 매몰찬 총칼이기도 합니다. (4343.5.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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