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 맞나


 새벽 일찍 일어나 글 한 줄 쓴 다음 한 표 권리를 쓰러 다녀온다. 한 표 권리를 쓰고 나서 골목마실을 두 시간쯤 했고, 사람들이 하나둘 투표장에 모여들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한테 한 표 권리를 쓰라 이야기한다. 애 아빠는 인천 동구, 애 엄마는 인천 중구에 주소가 되어 있어 서로 한 표 권리를 쓰는 데가 다르다. 애 아빠가 한 표 권리를 쓴 곳에는 그나마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후보가 나와 이모저모 더 살피며 한 표 권리를 쓸 수 있었는데, 애 엄마가 한 표 권리를 쓸 곳에는 모조리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람뿐이다. 이쪽 아니면 저쪽일 뿐이다.

 애 엄마가 한 표 권리를 쓸 지역구 후보자가 내놓은 공약을 살피고 재산을 살핀다. 구청장 후보 한 분은 재산이 60억 원이 넘고, 동네에서 꽤 큰 부동산을 꾸리고 있는 사장님이 구의원으로 나오기도 한다. 교육위원 후보이든 교육감 후보이든 인천 아이들이 일제고사 성적이 잘 나오도록 한다는 데에 눈길을 맞출 뿐 아니라 효 교육이니 영어 교육이니를 떠든다. 효를 가르치는 일이 잘못이란 소리가 아니다. 효란 마땅히 가르칠 밑바탕이지, 교육위원 후보나 교육감 후보가 떠벌일 공약이 될 수 없다. 이런 밑바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교육이라면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나온 모든 교육위원 후보와 교육감 후보들은 하나같이 효니 영어니를 외치고 있다. 공약일 수 없는 이야기를 공약이랍시고 내세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시장 후보나 구청장 후보 모두 매한가지이다. 공약이랄 수 없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런 후보들한테 한 표 권리를 쓰는 일은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후보가 정치를 이끌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참답거나 착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후보는 얼마나 되는가. 돈을 더 벌어들이겠다고 하는 후보에다가, 지역 재개발을 외치는 후보에다가, 일제고사 성적을 높이겠다는 후보에다가, 어마어마한 재산을 자랑하는 후보들뿐인데, 무슨 한 표가 권리가 되는가. 선거가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는가.

 허울좋은 민주주의조차 아니다. 허울조차 나쁜 거짓 민주주의이다. 이런 거짓 민주주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삶과 올바른 이야기가 샘솟을 수 없다. 이런 겉치레 민주주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는 참다운 넋과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말이 뿌리내릴 수 없다.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수구란 이름은 모두 말놀이가 아닌가 싶다. 참말 진보라 할 만한 후보는 누구이고 참말 보수라 할 만한 후보는 누구인가. 진보가 무엇인 줄 아는가. 보수가 무엇인 줄 아는가. 진보 발가락만큼 따라가지 않으면서 진보를 외치는 후보들이 불쌍하다. 보수 머리털만큼 따르지 못하면서 보수를 들먹이는 후보들이 가엾다. 그러나,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인 줄 잘못 아는 유권자가 더 딱하다. 보수 아닌 사람이 보수인 줄 믿고 마는 유권자가 더 슬프다.

 한 표 권리를 안 쓸 수는 없지만, 한 표 권리를 즐겁게 쓸 수 없는 삶은 하나도 민주주의일 수 없는데, 이런 엉터리 민주주의를 우리 딸아이한테 어떻게 가르치거나 물려줄 수 있는가. (4343.6.2.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지음 / 대가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0] 전민조, 《담배 피우는 사연》


- 책이름 : 담배 피우는 사연
- 글ㆍ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대가 (2010.5.15.)
- 책값 : 2만 원



 (1) 사진기 드는 마음


 사진을 잘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들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 사람 또한 사진기를 들 수 있으며, 사진을 어설피 찍는 사람 누구나 사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사진을 훌륭히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든다면 우리 누리는 얼마나 슬프거나 메마르거나 치우쳐 있을까요.

 밥을 잘 하는 사람만 밥상을 차릴 수 있지 않습니다. 밥솜씨가 모자라더라도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밥상을 차릴 수 있고, 푸름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누구나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함께 수저를 들며 배고픔을 달랠 사람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을 줄 안다면 모두모두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애보기를 잘 하는 사람만 아이를 보며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 애보기에 어설픈 사람도 아이를 보며 키워야 합니다. 애보기를 해 보지 않았다 한들 애보기를 손사래쳐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배에 열 달 보듬고 있다고 낳기에 남자들과 견주어 아기한테 쏟는 사랑이 남다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내 배에서 보듬어 보지 못했다 하여 애보기를 안 한다든지 아이가 눈 똥오줌을 못 치운다든지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애보기를 할 노릇입니다.

 사진기를 들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사진기는 얼마나 싸구려 사진기인가 하고. 그렇지만 이 싸구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내가 ‘싸구려 기계를 쓰니까 싸구려 사진만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싸구려일지라도 내가 내 손으로 이루는 사진에는 내 온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지며 일구려는 손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손에 들고 있을 이 사진기가 비싸구려 사진기일지라도 더 나은 사진이나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더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퍽 비싸구려 사진기를 어쩌다 한 번 손에 쥐어 보면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비싸구려 사진기로 이 사진기를 갖고 있는 분 모습을 찍어 드리다 보니, 이 비싸구려 사진기에 찍히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대단하더군요. 대충 찍는 사진이란 없겠습니다만, 대충 찍어도 작품처럼 보이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를 내려놓고 제 싸구려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낡고 닳은 제 싸구려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내 살림살이가 푸지지 못해서 서운하느냐고 속으로 묻습니다. 내 사진기는 싸구려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거나 마주하는 사람들 삶자락을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하느냐고 혼잣말로 되뇝니다.

 틀림없이 그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면 오늘 제가 담아내어 나눌 사진은 한결 빛나거나 아름다이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들고 있는 사진기는 싸구려인 탓에 더 마음을 쏟고 더 손을 쓰며 더 몸을 부려서 사진 하나를 일구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대충 찍는 일이란 없지만, 대충 찍을 수 없는 사진임을 더 뼈저리게 깨달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살짝 어긋나기만 하여도 엉터리가 되는 싸구려 사진기이니 훨씬 힘을 내고 땀을 흘리며 다리품을 팝니다. 무엇보다도 사진기 눈으로 들여다볼 때하고 사진으로 찍힐 때하고 넓이가 달라 애를 먹으나, 이렇게 애를 먹으면 애를 먹는 대로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만큼’이 아닌 요모조모 어긋나게 나오는 푼수를 헤아리며 찍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른 분들보다 더 사진에 힘을 들여야 하고 마음을 바쳐야 하니까, 나는 나로서 한결 반갑고 고마운 사진을 얻는 셈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두 끼니나 세 끼니 밥을 해서 아이와 함께 먹습니다. 아빠가 아이한테 가장 맛나거나 좋을 밥을 해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차려 준 밥을 늘 고맙게 받아먹지는 않고 고개를 요리조리 홱홱 돌리며 밥은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애 아빠는 아이가 밥을 안 먹으려 할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섭섭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애 아빠가 더 밥을 잘 하지 못한 줄은 살피지 않고 그냥 기운이 빠집니다. 그래도 아이는 달리 아픈 데 거의 없이 용케 무럭무럭 큽니다. 참으로 씩씩하게 뛰어놉니다. 끝없이 수다를 떨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기운이 좋아 펄펄 날듯 놀고, 아빠는 집살림이며 돈벌이이며 다른 일이며 치르느라 헉헉댑니다. 아이는 배고플 때에 차려 주니까 먹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먹어 주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애 아빠 스스로 아이 눈높이가 되어 아빠 된 사람이 이런 밥을 차려 주면 먹을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면, 저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며 더 마음을 쏟아야 할 텐데, 언제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한숨만 쉬고 맙니다. 더 애쓰고 더 용쓰며 더 힘쓸 노릇인데 자꾸 풀이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밥거리를 좀더 살뜰히 마련해 주어야 할 노릇인데, 아이 입맛과 밥맛에 잘 못 맞추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애 아빠 입맛과 밥맛이 아닌 아이 입맛과 밥맛을 살피며 밥을 차리고 밥술을 떠 줄 노릇인데, 그저 배고픔 때울 끼니거리만 해 오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하루 내내 힘들여 찍은 사진을 셈틀로 옮기며 갈무리하며 생각합니다. 군더더기와 티끌 하나 없이 제대로 찍은 사진은 제가 찍은 제 사진이면서 스스로 웃고 스스로 웁니다. 군더더기가 한 군데라도 있으면 더없이 잘 찍은 괜찮은 사진이라 여기면서도 이 사진을 쓰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시 가서 새로 찍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며 주눅이 듭니다. 필름사진기라든지 더 값나가는 좋은 장비였다면 다시 찍을 일은 거의 안 생겼을 테지요. 그래도 저 스스로 더 마음을 쏟지 못한 탓에 사진을 다시 찍을 일이 생기고 만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아니,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달삯 치를 돈조차 빠듯한데 무슨 사진 장비 타령을 합니까.

 그러니까 애 아빠가 차린 밥상을 아이가 그닥 달가와 하지 않는다면, 애 아빠는 ‘내가 오늘 밥을 제대로 못했나?’ 하고 뉘우치면서 밥을 아예 새로 차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따가 뭘 해야 하고, 낮이나 저녁에 누굴 만나야 하고 하면서 ‘이 녀석아, 얼른 좀 먹어!’ 하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먹을 만하지 않게 밥을 차려 놓고 억지로 쑤셔넣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이가 아직 많이 어려 어른이 알아들을 말을 못한다고 함부로 굴면 안 됩니다. 사진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진 꽤 괜찮은데 왜 버리셔요?’ 하고 묻는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 이 괜찮다는 사진에서 군더더기와 티끌을 한 군데에서라도 보거나 느낀다면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저한테 괜찮은 사진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빈틈도 군더더기도 티끌도 어설픔도 모자람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릇 빚는 이들이 옹근 그릇이 아니면 모두 깨부수듯, 사진찍는 이들 또한 옹근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필름은 불사르고 파일은 지울 노릇입니다. 다시, 새로, 거듭, 또다시, 새삼스레, 자꾸자꾸 찍고 또 찍어야 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을 얻어야 합니다. ‘꽤 괜찮은’ 사진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내 마음을 넉넉히 채우는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앞으로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는 동안에도 즐거이 마주할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숨을 거두어 딸아들한테 물려줄 때에도 기쁘게 웃으며 물려줄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사진밭은 그림밭하고 견주어 훨씬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사진을 찍어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하고 그림을 그려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는 엇비슷합니다. 제대로 사진을 찍고 올바로 사진을 찍으며 훌륭히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한삶을 걸쳐 이룰 아름다운 사진’ 숫자란 몇 안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이 많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참 아름다운 사진 한 장’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은 참 쉽게 찍을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모두 엉터리입니다.


 (2) 바보스럽게 찍은 《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님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2010년 새 사진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사진 작품을 내놓고 있는 전민조 님은 앞으로 2011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을 터이며, 2012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으리라 봅니다. 그야말로 꾸준하고 이야말로 한결같으며 더할 나위 없이 새롭습니다. 사진찍기란 ‘꾸준함’과 ‘한결같음’과 ‘새로움’ 세 가지 매무새를 갖추어 찍어야 함을 당신 스스로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조차 제대로 안 갖추거나 못 갖춘 채 어설프고 어줍잖으며 엉터리일밖에 없는 사진을 쏟아내는 ‘거짓 쟁이’가 넘치는 한국땅에서 전민조 님 사진밭은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1926∼2006) 장관은 당시 한ㆍ일회담을 성사시킬 때의 반대여론을 회고하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이내 방 안에 안개처럼 꽉 차서 그의 얼굴이 희미해 보였다. 사진은 미래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기가 찍은 인물은 순식간에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20쪽/1991.1.14.연희동 자택)

― 박 대통령 사망 후 정치인 김대중(1924∼2009)은 상도동 김영삼 자택을 찾아 환담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기자들한테 보여준 도전적인 얼굴이 아닌 아주 편안한 얼굴로 비장의 파이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의 표정은 앞으로 어떻게 어두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 대권을 잡을지 라이벌 김영삼 앞에서 무엇인가 골똘하게 구상하는 듯했다. (28쪽/1979.12.29.상도동 김영삼 자택)


 여원사와 한국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다음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은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사진잔치를 열고 사진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2005년은 ‘섬’, 2006년은 ‘서울’, 2007년은 ‘한국인의 초상’, 2008년은 ‘기자가 바라본 기자’, 2009년은 ‘농부’이고, 2010년은 ‘담배 피우는 사연’입니다.

 이 나라에 사진기자는 수두룩하게 많으나 ‘한 해에 한 번씩’은 어렵다 하여도 ‘여러 해나 열 해에 한 번’쯤이라도 사진잔치를 열며 사진책을 펴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누구보다 사진을 많이 찍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사진기자라 한다면, 누구보다 사진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잔치와 사진책을 신나게 선보이는 사람은 너무 적은 우리 나라입니다.

 일에 치여 바쁘기 때문일까요. 찍어 달라는 사진만 찍어도 속이 얹히거나 메스꺼워 도무지 ‘내 사진’을 일굴 수 없기 때문일까요.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선보이며 온누리를 크게 놀래키고 싶기 때문일까요.


―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맹희 씨는 기자들을 불러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야기를 갑자기 쏟아냈다.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며 고뇌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겪는 재벌가의 암투와 갈등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와 몸뚱이만 가지고 세상을 향해 사진만 찍고 있는 사진기자 직업이 정말 속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48쪽/1988.12.13.장충동 자택에서)

― 영업택시 운전기사가 달리면서 담뱃재를 도시를 향해 털고 있다. 꽁초와 담뱃재는 도시에 버리고 자신의 좁은 공간만 깨끗하게 하려는 이런 얄궂은 심리는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풍경은 윗목에 쓰레기를 모아 놓고 아랫목에서 코를 막고 누워 있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164쪽/2010.3.20.강남구 논현동)


 해마다 내놓는 전민조 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먼저, 당신이 올해 새로 선보이는 사진 가운데 2/3나 3/4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뛰었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1/3이나 1/4은 당신이 사진기자를 그만둔 뒤에 여느 사진쟁이와 다를 바 없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새롭게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 사진꾼’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런 사진을 얻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일 때에는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때때로 ‘내가 내 사진감을 만들어서’ 신문에 싣기도 하지만, 신문에 싣는 사진은 사진쟁이 한 사람 목소리로 선보일 사진일 수 없습니다.

 홀가분한 사진쟁이 한 사람으로 찍는 사진일 때에는 ‘나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거나 찾아보는 사람은 ‘이 사진쟁이는 뭘 그리 좋아해서 이런 사진을 다 찍나?’ 하는 궁금함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누구나 다 찍는 사진이 아닌 사진쟁이 한 사람 눈길로만 들여다보며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최종규면 최종규 사진을 찍고 전민조면 전민조 사진을 찍으며 강운구면 강운구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진만 척 보아도 ‘어허라, 아무개 사진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게 누구 사진이더라?’ 하고 있다면 이런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이런 사진은 흉내내기 사진이거나 짜깁기 사진입니다. 이런 사진은 너절한 사진이요, 무엇보다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는 종이조각입니다.

 전민조 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지난 1960년대 것부터 2010년대 것까지 두루 있습니다. 한 사람 작품을 이리 오랜 나날에 걸쳐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일이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노릇입니다. 사진삶을 쉰 해 아우르는 사진쟁이란 이 나라에 몇 없습니다. 더욱이 사진삶 쉰 해를 늘 새내기 마음으로 새내기 사진으로 일구려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 해서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오랜 나날 사진기를 붙잡고 필름 수십만 통을 썼다 할지라도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일구며 아름다운 손길이 서린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지, 무슨무슨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얼굴값으로 사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가 한 분 작품이 나왔소이다!’ 해서는 사진이 팔리지 않습니다. ‘이야, 이번에 이런 좋은 작품이 나왔습니다!’라든지 ‘우와, 이번에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습니다!’라 해야 사진이 팔립니다.


.. 실제 신문, 잡지의 사진 찍는 일은 인터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담배 피우는 사진은 재미있게 찍어 와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게재하지 않았다. 유명인사로 알려진 인물들의 그럴듯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모습은 담배 피우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사색하는 모습은 모두 고독해 보였다. 어제의 승리자에서 패배자로 전락한 기업가가 연신 뻐끔 담배로 울분을 토하는 표정, 담배가 꼭 남성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연기를 날리는 드라마작가 … 모든 흡연자는 자신들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  (6쪽)


 사진책이 사진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나라입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좋아한다는 분들은 어김없이 글책은 많이 사서 읽는데,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만화책은 참으로 멀리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이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글 하나 엮는 일과 아름다운 그림 하나 그리는 일과 아름다운 사진 하나 일구는 일과 아름다운 만화 하나 낳는 일은 얼마나 다를까요. 어느 일이 더 힘들거나 어느 일이 더 값있을까요.

 아름다운 책이면 한결같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글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만화책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만화라고 하는 틀을 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담아서 나누려는 책을 만나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피땀을 흘린 손자국을 글책에서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피땀을 쏟은 손자취를 그림책에서 만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땀을 바친 사진책을 만나는 가운데, 만화를 빚는 사람이 피땀을 들인 만화책을 만날 노릇입니다.

 참말로 피땀이 깃든 책은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만화책이든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곱게 어루만집니다. 피땀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이거든요. 사랑과 믿음이란 다름아닌 글쟁이ㆍ그림쟁이ㆍ사진쟁이ㆍ만화쟁이가 눈물과 웃음으로 부대낀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삶이란 어디 먼 나라에 있는 삶이 아니라, 바로 우리 둘레에서 늘 마주하고 살을 섞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 삶이거든요.


.. 나는 그때 지옥에서 기어나와 천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 같았다. 국내 산에 올라 그렇게 숲속을 걸어다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그때 처음 느껴 본 것이다. 나는 그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땅바닥에 발을 딛자 본능적으로 담배를 한 대 입에 가져가게 되었는데 담배연기를 마시자마자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왔던 가슴에서 담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강대국들의 담배회사는 지금까지 약소국의 젊은이들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망쳐 놓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담배를 끊고 소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의 입에서는 향긋하지 못한 냄새가 풍겨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  (8∼9쪽)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전민조 님은 똑같은 이름을 붙인 사진잔치를 2010년 5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토포하우스(02-734-7555)에서 엽니다. 사진책과 전시회 알림쪽지에 적힌 글월을 읽다 보면, “그래서 ‘담배는 일종의 마약이며 국민들을 병자로 만드는 독약’이라는 생각에서 요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항상 불안하게 쳐다보면서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사진집은 금연운동에 바치는 사진집이다” 하는 이야기로 끝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나라에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함부로(?) 끄적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든 손가락질을 하든, 전민조 님 스스로 ‘담배 사랑이’였다가 ‘담배 끊은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게가다 전민조 님은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으로 말을 걸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당신 스스로 담배 태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무슨 뜻이 한 가지 있기 마련입니다.

 담배란 무엇인가 살피고, 담배가 태어난 밑뿌리는 어떠하며, 사람들이 담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담배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담배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까 하는 숱한 생각을 사진으로 풀어낼 전민조 님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진책을 넘기면서 싱긋 웃음이 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은 ‘담배 끊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 피우는 사연》을 내놓으셨지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은 당신 말씀마따나, 숲이 없고 물질만 넘치는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며 ‘어, 담배나 한 개비 물어야겠네’ 하는 분들이 훨씬 많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그래, 담배가 몸에 얼마나 나쁘고 우리 터전을 얼마나 무너뜨리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절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343.6.1.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 - 대답 없는 너
토베 케이코 지음, 주정은 옮김 / 자음과모음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아이는 우리한테 맑은 빛입니다
 [살가운 만화 55] 토베 케이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 책이름 :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12)
- 글ㆍ그림 : 토베 케이코
- 펴낸곳 : 자음과모음 (2003∼2008)
- 책값 : 한 권에 8000원씩



 (1) 어른과 어버이


 볕이 들다가 말다가 하던 일요일 낮 아이와 함께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다닌 골목마실 가운데 동네 아이를 가장 많이 마주한 하루였습니다. 아이는 이웃동네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그냥 그곳에 눌러붙으며 오래오래 놀고 싶은 눈치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이 골목 저 골목 두루 누비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빠로서는 퍽 ‘오래’ 한 곳에 멈추어 동네 아이랑 섞인다 할지라도 아이한테는 그리 ‘오래’가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한 시간쯤은 놀아야 논다고 할 만할 테니까요.

 여러 동네를 여러 시간에 걸쳐 두루 다닌 사람이 보기로는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아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골목마다 제법 많은 아이들이 서로 복닥이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저희들 집이 깃든 골목 언저리에서만 맴돌 뿐, 조금 더 나아가 이웃동네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못합니다.

 동네 모습에 따라 아이들 놀이가 다릅니다. 동네에서 어버이가 아이를 보살피는 매무새에 따라 아이들 눈빛과 기운이 다릅니다. 아랫도리를 벗고 맨발로 골목에 서서 텃밭 가장자리에 골라진 돌을 헌옷 모으는 통에 던져 넣는 아이는 집에서 엄마한테 꾸중을 듣고 골이 났기 때문일까요. 이윽고 애 엄마가 동네 텃밭 위쪽 계단 타고 꽤 올라가는 기스락집 난간에서 아이를 찾더니 소리소리 지르며 나무랍니다. “너 맴매해야겠어!”

 행정구역으로는 아랫도리 벗고 골 부리는 아이가 사는 집하고 같은 동네인 금곡동 다른 쪽에서는 다 다른 집에 사는 세 아이가 이 집으로 저 집으로 기웃기웃하면서 동네 개하고 놀고 길에서 뛰고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며 놉니다. 한 아이가 사는 골목집 앞에서 빨래 널린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자니, 이 집 애 엄마가 어느새 다가와서 “여기에서 뭘 찍을 게 있어요? 빨래요? 저거 그냥 던져 널은 건데.” 하며 웃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다시 올려다보니 빨래가 꽤 구겨져 있습니다. 아이 보랴 뭐 하랴 바쁘다 보니까 제대로 털지 못하고 부랴부랴 널기만 하셨군요.


..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면 알 수 있어요.” “네? 선택하는 사람의 기분이라뇨?” “전에 제가 저지른 실수인데요. 그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시키기 위해 더 싫어하는 것을 섞어 놓고, 둘 중의 하나를 고르게 한 적이 있어요. 본인에게는 뭘 골라도 괴롭기는 마찬가지. 선택을 하는 즐거움 따윈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잘못을 곧 깨닫고 더 이상 강요하진 않았지만 두고두고 후회가 되네요. 선택을 통해 본인의 의지를 끌어내 볼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그 선택이란 것이 결국 제 의지만을 강요하는 수단이 돼 버린 거였어요.” ..  (6권 151쪽)


 일요일을 맞이했기 때문인지, 골목 한켠에서 끌신 차림으로 슬슬 거닐며 아이랑 놀아 주는 애 아빠를 드문드문 만납니다. 집안에서 아이맡에 앉거나 누워 아이하고 놀고 있는 애 아빠를 하나둘 마주합니다. 일요일이기에 아이하고 놀아 주는 애 아빠일는지, 여느 날에도 아이랑 신나게 놀아 주는 애 아빠일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여느 날에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애 아빠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누리가 제아무리 남녀평등이 어느 만큼 이루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혼인을 한 두 사람이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할 때에는 거의 어김없이 엄마 쪽이 바깥일을 멈추거나 그만둔 다음 아이를 보기 마련이니까요. 어쩌면 두 분 모두 바깥일을 하며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기거나 어린이집에 맡길는지 모릅니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바깥일을 그만둔다든지, 또는 두 쪽 모두 바깥일을 접는다든지 하는 사람이란 도시에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아니면,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복닥이는 새 삶을 꾸려야 한다고 느끼며 언제나 아이 곁에서 지낼 수 있는 새로운 바깥일을 찾거나 꿈꾸는 사람을 볼 길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당신들 스스로 당신들이 당신 아이처럼 어릴 무렵에 당신 어버이가 당신들을 집에 달랑 남겨 놓고 하루 내내 바깥일을 한다며 나가 있으면 얼마나 싫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심심했는가를 금세 잊고는, 당신들 또한 당신들 어버이가 했던 잘못과 슬픔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들 어버이와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슬픔을 되풀이하는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 ‘안달하지 말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을 가르쳐 준 건 히카루, 바로 너란다.’ ..  (5권 74쪽)


 아이를 키우는 삶이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란 더없이 고단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나날이란 몹시 힘겨우며 벅찹니다. 온 하루를 아이하고 붙어 지내는 가운데 밥하고 빨래하고 집 치우고 하노라면 하루가 아주 짧을 뿐 아니라 오늘이고 어제이고 글피이고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어느새 새벽이고 아침이며 낮이다가는 저녁과 밤입니다. 아이랑 부대끼면서 애 엄마나 애 아빠가 즐기고 싶은 책이라든지 영화라든지 무어라든지 느긋하게 즐길 수 없습니다. 기운이 다 빠져 책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텔레비전을 켠다든지 자리에 드러눕는다든지 합니다. 아이가 골을 부릴 때에 차분하게 마주하면서 따스한 말씨를 건네고 토닥토닥 보듬으면서 골을 풀어 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이를 먹고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뿐이지, 혼인을 했거나 사랑놀이를 즐기거나 아이를 낳았다고 ‘어른’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버이’란 이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른답게 굴어야 어른이요 어버이다이 살아야 어버이입니다. 밥그릇 숫자로 어른이 될 수 없고, 덩치가 크고 돈을 번다고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직하면서 튼튼하고 슬기로운 넋을 건사하는 가운데 맑고 밝은 얼을 나눌 줄 알 때라야 비로소 어른입니다. 사랑스러우면서 넉넉하고 고운 마음을 지키는 가운데 싱그럽고 다부진 몸을 다스릴 줄 알 때라야 바야흐로 어버이입니다. 제 슬기와 깜냥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어른이고, 제 피와 살을 스스럼없이 깎아 나누는 사람이 어버이입니다. 전두환 같은 분들은 나이를 아무리 많이 잡수어도 어른이라 할 수 없고, 아이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손찌검을 할 뿐 아니라 신나게 놀아 주는 너른 품이 없는 분들은 아이를 아무리 여럿 낳았어도 어버이라 할 수 없습니다.


.. ‘이 세상에는 히카루한테 보여주기 싫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쓸데없는 것들은 잊고 살고 그러면 좋을 텐데. 지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사라지는 저 모래처럼.’ ..  (7권 142∼143쪽)


 아이 앞에서 좋은 모습 거룩한 마음밭 사랑스러운 몸짓 훌륭한 삶 올바른 말을 보이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따로 아이 앞에서 좋은 모습으로 그치지 말고 어른 스스로 좋은 모습을 아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이 앞이기 때문에 거룩한 마음밭이 아니라, 아이가 없던 지난날부터 스스로 거룩한 마음밭이 되도록 일구어야 합니다. 아이 앞이라 사랑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닌, 언제나 스스로 사랑스러운 몸짓을 북돋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이 앞일 때에만 훌륭한 삶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요, 언제 어디에서나 훌륭한 삶을 믿고 꿈꾸며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이 앞에서만 올바른 말을 가리거나 쓰는 겉치레가 아닌, 어른 앞에서이든 어른인 동무들 앞에서든 늘 올바른 말을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무엇 한 가지 가르치기 앞서 어른 스스로 먼저 배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몸에 나쁠 먹을거리를 차리지 않겠다면 어른부터 제 몸에 나쁠 먹을거리를 손사래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가 물 맑고 바람 맑고 햇볕 고운 터전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어른부터 물과 바람과 햇볕을 어지럽히는 물건을 쓰지 않을 뿐더러 우리 삶터를 맑고 곱게 돌보는 데에 이바지할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이 책(자폐증에 대해서)은 내가 좀 빌려 가마.” “아, 그건.” “청소하다 보니 나오더구나. 근데 내용이 어려워서 읽어 봐도 잘 모를 거 같구나.” “저도 그랬어요. 그래도 천천히 읽어 보세요, 어머니. 그리고 다시 한 번 있는 그대로 우리 히카루를 봐 주세요.” ..  (1권 103쪽)


 아이는 저를 키우는 어른이나 어버이를 바라보며 자랍니다. 아이는 저를 키우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얼마나 스스로 담금질을 하며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눈여겨보며 자랍니다. 못난 어른이거나 몹쓸 어버이한테서 뜻밖에 착하며 참된 아이가 자랄 때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참된 어른으로서 참된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하고, 착한 어른으로서 착한 아이를 돌볼 줄 아는 어버이로 살 노릇입니다.

 내 모습과 내 삶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배우는 아이인데, 아이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눈길과 내 손길을 낱낱이 살펴보며 받아들이는 아이인데, 아이와 함께 어떻게 지내야 하겠습니다. 내 말투와 내 목소리를 고이 새겨듣는 아이인데, 아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벗을 사귀어야 하겠습니까.
 







 (2) 만화책 《히카루와 함께》


 한국판으로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라는 이름이 붙으며 옮겨진 만화책 《히카루와 함께(빛과 함께)》를 그린 토베 케이코 님은 2010년 1월 28일에 쉰셋이라는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연속극으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입니다. 가만 보면, 일본에서는 훌륭한 만화 하나가 태어난 다음, 이 만화를 바탕으로 연속극이나 영화를 찍는 일이 꽤 흔합니다. 만화를 연속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다기보다, 훌륭한 만화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속극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한다고 해야 옳구나 싶습니다.

 이와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만화가 연속극이나 영화라는 새옷을 입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는 어린이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문학을 연속극이나 영화라는 새옷을 입힌 적이 몇 차례나 있었을까요. 흥행을 노리는 상업영화 아닌 아름다움을 나누려는 문화와 예술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구는 손길과 몸짓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관객 몇 십만을 끌어들일 꿈을 안는 ‘어른만 보는 영화’를 넘어 관객이 얼마 들어오느냐 아니냐에 앞서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을 두루 펼치면서 기쁘게 맞이할 영화’를 꿈꾸는 예술인 영화인 작가 문화인이란 분은 몇이나 있을까요.


.. “모두 평등하게 대하고 히카루만 특별대우를 하라고? 그럴 수야 있나요. 학생들 개성이 그렇게 다른데. 특별대우를 할 거면 모두 특별대우를 해야죠.” … “집 근처에 괜찮은 유치원은 없니?” “전에 히카루에게 집단 생활을 시켜 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까운 유치원을 전부 다 둘러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들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받아주지 않았고, 받아주는 유치원도 자폐 아동을 그다지 잘 돌봐 주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 뒤로 별로 변한 것도 없어 보이고.” “그야 히카루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런 것 아니냐? 카논에게는 그런 곳이 좋을 수도 있어.” “과연 그럴까요? 아이들 여럿이서 섞여 노는 중에 그런 식으로 한 아이를 팽개채 두는 곳은 카논에게 있어서도 바람직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자기들과는 다른 타입의 인간을 그런 식으로 몰아내는 집단. 저는 너무 무서워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카논을 맡기고 싶진 않아요.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설령 선생님이 우리 카논을 예뻐 하신다 해도 저는 싫어요. 복지 센터, 보육원에 초등학교, 그렇게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깨달았어요. 히카루를 소중하게 대해 주시는 보육사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대해 주신다는 사실을요. 저는 히카루나 카논 모두 어떻게 하면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 속에서 안심하고 키우고 싶어요, 어머니.” ..  (5권 117, 212∼214쪽)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자폐를 안고 태어난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만화 열두 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거듭 읽다 보면, 주인공은 ‘빛(일본말로 ‘히카루’)돌이’인 아이라기보다 자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새로운 삶을 배우며 또다른 길을 찾는 한편 비로소 어른다움이 무르익고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어버이가 되는 어머니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장애인을 장애인 아닌 걸림돌로 여기는 사람은 비장애인입니다. 장애인이 누릴 장애인 권리를 짓밟는 사람은 바로 비장애인입니다. 장애인을 장애인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껴안지 않는 사람은 다름아닌 비장애인입니다.

 장애인 스스로 장애인 삶을 더 제대로 살피고 더 올바로 깨달아야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비장애인들 스스로 비장애인이란 어떤 사람이요, 비장애인과 언제 어디에서나 이웃하고 있는 장애인이란 어떤 사람이며 삶인지를 깨닫고 느끼고 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장애인인 사람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바보스럽게 살고 있으니까 자꾸자꾸 ‘장애인 인권 차별’이 생겨납니다. 권력을 움켜쥔 이들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바보스럽게 살고 있으니까 끝없이 갖가지 사건과 사고가 터집니다. 더 배운 사람과 더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만드는 입시지옥과 교육 문제입니다. 더 잘나고 더 이름나고 더 돈있는 사람들이 우리 삶터를 더 엉터리로 만들거나 더 뒤죽박죽으로 흩뜨립니다.


.. “학대는 가족도 하는 걸요. 저도 히카루 어렸을 때 학대 직전까지 간 적 있었어요. 몸을 가누지 못해 자식한테 학대를 받는 노인도 있을 거 아니에요. 단순히 시설이니까, 가족이니까 하는 것만으로는 그 속사정을 모르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을 수도 없고, 정신적으로는 한계가 왔는데 계속해서 어려움이 닥친다면, 그런데 보는 사람은 없고, 아니 설사 누가 본다 해도 체벌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라면. 저도 히카루를 때릴 때는 항상 아무도 없을 때였어요. 밖에서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누르며 숨기죠. 안 보는 데서 약한 생명을 괴롭히며 비명을 지른 셈이에요. 그 상태 그대로 갔다면 어땠을지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 혼자 악전고투하는 엄마라도 안 때릴 사람은 안 때려요. 한심하게도 난 그렇게 강한 엄마가 못 됐던 거예요. 그래서 더욱 따뜻한 시선이나 도움이 고맙게 느껴졌고, 덕분에 이렇게 좋아졌잖아요.” ..  (8권 180∼182쪽)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비장애인인 사람들한테 읽힐 길잡이책이라 할 만한 이야기책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들한테는 성경책이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한다면, 한 사람을 한 사람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분들한테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라는 만화책이 더없이 아름다울 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만화책 열두 권에는 사람이 사람다움을 지키는 길과 사람이 사람다움을 지키지 못하는 길을 ‘좋으니 나쁘니 하는 금긋기’로 따지지 않으면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아이가 태어난 일이 기쁨이요 즐거움이지, ‘장애 없는’ 아이가 태어났거나 ‘장애 있는’ 아이가 태어났대서 기쁨이거나 즐거움이 아닙니다. 장애 없는 아이가 태어나서 고마울 수 없습니다. 장애 있는 아이가 태어나서 슬플 수 없습니다. 장애 있는 아이가 태어났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장애 있는 아이라든지 장애 없는 아이라든지가 아니라 ‘우리한테 빛과 같은 목숨’이 곱다시 찾아왔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어린 넋입니다.

 대학교마다 사회복지학과가 있고 육아교육과가 있으며 또 무슨무슨 교육을 베푼다든지 보건과 복지 따위를 다루는 학과가 있습니다. 이러한 학과마다 숱한 교재와 교과서가 있으며, 복지사 자격증을 딴다든지 교사 자격증을 딴다든지 하는 사람은 수십만에 이릅니다. 그러면 이들 자격증을 딴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거나 아이를 아이 그대로 맞아들이는 아름다운 넋일는지요? 이 사람들한테 지식을 베푸는 교재와 교과서는 가장 아름다운 책일는지요? 사람이 사람이 될 밑바탕 슬기와 삶을 담고 있는 책일는지요?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대학교에서 사회복지나 장애 인권 다루는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한테 교재와 다를 바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책을 보면 ‘참 많이 가르쳐 주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하나에서 가르치는 이야기는 이 책이 대단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책을 그려낸 분이 당신 둘레 삶을 찬찬히 곱씹고 곰삭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릴 수 있었고, 이렇게 그려냈기에 소담스러운 삶자락을 나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소담스러운 삶자락은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삶을 찬찬히 헤아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누구나 언제라도 익힐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에 흔하고 너른 삶자락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흔하고 너른 삶자락을 여느 때에 살피지 않기에 가장 깊고 큰 아름다움을 이렇게 만화책 하나에서 새삼스럽게 느끼거나 배웁니다.


.. “너 자꾸 말 안 들을래?” (따귀를 짜악) “아아, 내가 무슨 짓을.” “아예 애를 더 울리고 있군. 당신 자식이잖아. 좀 조용히 시켜.” “그러는 당신이 좀 달래 봐요.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애한테 뭘 어떻게 하라고요. 당신 자식이기도 하잖아요. 엄마라고 해서 전부 나한테 떠넘기지 말아요! 히카루가 자폐증이 된 건 히카루 탓도, 제 탓도 아니라고요. 그저, 어쩌다 우연히 겹쳐서 그렇게 된 것뿐인데. 당신은 히카루가 부끄럽죠? 그러니까 숨기지 못해 안달이지요. 아버님 기일 때도 당신한테 망신을 줬다며 화만 냈어! 그게 무슨 가족이에요. 가족이라면 서로 도와야 하지 않나요? 당신이 아버지라면 우리를 감싸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나도 지긋지긋해. 그동안 나라고 편했을 것 같아? 여긴 내 집이야. 불만 있으면 당신이 나가.” “뭐라고요?” “나가라고. 매일 밤 파김치가 돼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데! 나도 편하게 쉬고 싶다고!” “하아, 그러시군요. 히카루, 옷 입자. 밖은 추워. 당신과는 이제 끝이야. 어디 영원히, 혼자 조용히 살아 봐요!” ..  (1권 72∼75쪽)


 일본은 만화가 넘실거리는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에 옮겨지는 만화 가짓수만 보아도 ‘일본에는 만화쟁이들만 있나?’ 싶을 만큼 만화가 넘실거립니다. 그러나 일본은 만화가 넘실거린다기보다 ‘만화라고 하는 예술 갈래 하나’로 보여주고 나눌 수 있는 멋과 맛을 잘 안다고 해야 알맞다고 봅니다. 그냥저냥 그리는 만화가 아닙니다. 만화 하나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를 다룬다고 할 때에는 이 이야기 하나를 아주 깊이 파헤치고 널리 보듬으면서 다룹니다. 이 이야기 하나에 얽힌 수많은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헤치고, 이 이야기 하나가 우리 삶하고 어떻게 얼마나 이어져 있는가를 밝힙니다.

 훌륭한 만화는 지식을 늘어놓는 작품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만화는 눈물이나 웃음을 억지로 쥐어짜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며 제대로 살아야 하는데, 제대로 알지 않을 뿐더러 제대로 살지 않으니 몇 가지 아주 큰 대목에서만 지식조각을 조곤조곤 풀어놓습니다. 사람들이 웃음과 눈물을 뚱딴지 같은 딴 나라에서만 찾고 있으니, 수수한 웃음과 투박한 눈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샘솟는가를 알려줍니다.


.. “히카루는 이미 취학 상담 요양학교로 가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는 이 학교의 무궁화교실에 다니게 하고 싶어요. 요양학교에도 가 봤습니다. 우리 애한테 그 학교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힘들게 우리 히카루를 이해해 준 보육원 친구들과 헤어지게 돼요. 교장 선생님, 아마 저는 히카루보다 먼저 죽게 될 겁니다. 남편 역시 그렇겠죠. 저희가 죽더라도 우리 아들이 이 동네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장애를 갖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우리도 맡고 싶습니다. 하지만 입학서류는 제대로 받겠습니다. 그 취학 상담하는 직원에게 계속 저희 학교에 다니게 하고 싶다고 말씀해 주세요. 하실 수 있겠지요, 어머니?” ..  (1권 245, 246쪽)


 함께 살아갈 터전이니 함께 살아갑니다. 함께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니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장애인이니 비장애인이니 하는 금긋기란 비장애인이 놓은 금입니다. 장애인 스스로 장애인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비장애인이란 이름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두 비장애인들이 저희 마음대로 지껄이는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에 나오는 자폐 아이는 ‘장애인’이나 ‘장애 어린이’가 아닙니다. 일본 이름으로는 ‘히카루’이고, 우리 이름으로 옮겨적으면 ‘빛돌이’나 ‘빛누리’나 ‘빛나라’입니다.

 이리하여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자폐 어린이를 막대접할 뿐 아니라 장애인 인권과 교육을 내팽개치는 일본 사회를 넌지시 꼬집는다든지 이런 사회에서 기운차게 살아가는 한 식구 수수한 삶을 보여주는 만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올바른 삶을 제대로 몰랐던 바보스러운 어른들이 빛과 같이 아름다운 목숨 하나를 처음 만나면서 바야흐로 고운 삶과 사랑스러운 넋을 아끼고 즐길 줄 알아 가는 수수한 만화라 할 수 있습니다.


 (3) 몇 가지 말마디 더 들여다보기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는 꽤 긴 작품입니다. 모두 열두 권에 이르기도 하지만 권마다 250쪽 안팎이 되니까, 쪽수로 치면 자그마치 3000쪽이 웃도는 긴 만화인 셈입니다. 이 만화는 1권부터 12권까지 내처 읽어내며 차근차근 자라고 눈을 뜨는 사람들 매무새를 엿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다 읽은 다음에는 사이사이 한 권씩 따로 끄집어내어 읽으며 그때그때 다 다르게 펼쳐지는 삶에 어떠한 아름다움과 아픔이 아로새겨져 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란 없는 가운데, 곰곰이 되씹을 만한 이야기가 넘칩니다. 이 가운데 몇 가지 말마디를 더 옮겨적어 봅니다. 아주 마땅하고 아주 쉬우며 아주 수수한 이야기야말로 우리한테 가장 맛나고 가장 맑으며 가장 빛나는 이야기임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5.31.달.ㅎㄲㅅㄱ)


- ‘엄마는 너희들이 그렇게 웃는 것만 봐도 너무 행복해.’ (6권 235쪽)

- “저, 가끔 애를 때리기도 했어요.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도 않고, 매일 저렇게 우는 소리를 듣고 살자니, 나까지 미칠 것만 같아서. 애가 얼마나 아팠을까요. 어른 손으로 저렇게 작은 애를. 애한테 너무 미안해요.” “때리는 네 마음도 아팠잖니. 때려 놓고도 많이 후회했을 거 아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렴.” “엄마.” ‘바보같이. 내 이럴 줄 알았지. 혼자서 얼마나 속을 태웠을까.’ (1권 77∼78쪽)

- ‘저 아이 혼자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색깔의 모자를 씌워 놓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혼자 방치해 두고 있다. 저 아이가 우리 히카루로 보여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절대 맡길 수 없어! 분명 다른 어딘가에 자폐 아동을 잘 맡아 줄 만한 유치원이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다닐 수 있는 그런 유치원은 없었다. 이렇게 우리처럼 좌절을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동 천 명당 한두 명이라는 자폐 아동. 그런데 그 아이들을 받아 주는 곳은 왜 이리 적은 건지. 센터만 해도 자리가 나길 반 년이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수십 명 있다고 한다. 대체 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해? 취학하기 전 중요한 1년. 우리 히카루한테도 단체 생활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어.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다 자기가 갈 곳을 찾아 떠났는데 아기들만 놀고 있는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1권 144∼145쪽)

- “그런데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행동을 하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걸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런 장애를 가진 아이입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 “난 처음 봤어. 자폐증 걸린 애. 그런 생난리도 없더라. 천만다행이야. 우리 애가 정상인 게.” “정말 가엾더라.” “그렇지만도 않지 뭐. 누가 알아? 저러니까 남보다 쉽게 입학할 수 있었는지.” ‘저렇게 말을 막 하다니.’ “아, 히카루 엄마. 정말 힘들겠어요. 힘내세요. 우린 아까 일 전혀 신경 안 쓰거든요.” ‘알아. 하나같이 다들 나쁜 뜻은 없는 거. 그저 저 사람들한테는 남의 일일 뿐, 동정을 하면 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만났잖아. 속을 홀딱 뒤집어 놓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착한 척하며 사람 우습게 보는 사람들!’ (1권 160∼161쪽)

- “저(히카루)는 이담에 커서 밝고 씩씩하게 일을 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1권 25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스페인으로 마실을 간다는 형이 인천에 찾아왔다. 이제 모레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단다. 꽤 오래 마실을 한다는 형인데 잠깐 있으라 하더니 은행에 들러 맞돈 백만 원을 뽑아서 나한테 건넨다. 다음달에 집을 옮긴다는 나한테 돈이 있느냐고 묻더니 이렇게 곧바로 보태어 준다. 집과 도서관 달삯은 벌써 몇 달 앞서부터 돈 대기에 빠듯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돈을 빌려주는 데도 없으나 돈을 빌려서 쓸 마음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어찌저찌 고마운 손길을 받으며 버티는 살림살이였기에 살림집을 빼면 보증금 삼백만 원으로 짐차 부르고 시골집 보일러 기름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코앞에 닥친 이달치 달삯이 걱정되었는데, 용케 형한테서 도움을 받아 크게 한숨을 돌린다. 밤나절, 졸려 하는 아이 이를 닦고 손발을 씻긴 다음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 준다. 업힌 아이 손에서 힘이 다 풀리고 고개가 내 등에 푹 박힐 무렵 천천히 바닥에 아이를 뉘인다. 이십 분을 아이 곁에서 가만히 기다린 다음 기저귀를 채운다. 비로소 느긋하게 셈틀을 켠다. 그렇지만 셈틀을 켰어도 글을 쓸 기운은 없다. 하루 내내 홀로 아이를 돌보느라, 더욱이 어제그제오늘까지 이불 세 채를 내리 빨래하느라 해롱해롱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인터넷으로는 책을 사지 않던 내가 두 군데 오래도록 다니고 있던 헌책방 누리집으로 들어간 다음 책을 십만 원어치나 고른다. 두 군데 헌책방은 처음부터 누리집을 꾸리던 데가 아닌데, 이제는 제법 크게 누리집을 꾸리고 있으며, 나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매장을 찾아가서 책을 살 뿐, 오늘처럼 누리집에서 목록을 들여다보며 책을 고르는 일은 없었다. 형은 틀림없이 집 옮기는 데에 보태고 아이한테 맛난 밥 사 주라는 뜻으로 돈 백만 원을 주었는데 이 가운데 십만 원을 책값으로 덜컥 쓰고 만다. 책값을 다 치러 놓고 괜히 아이한테 미안하고 형한테 쑥스럽다. 돈이 한 푼이라도 생기면 무엇보다 책을 사들이는 데에 쓰는 버릇은 참 어찌할 길이 없다. 굶어도 책이고 불러도 책인 내 삶은 늘 이렇게 돌아간다. 어쩌면 형은 내가 이렇게 책값으로 돈을 쓸 줄 알았을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책값으로 십만 원뿐 아니라 다시금 십만 원을 더 쓸는지 모르는데, 여기에서 즐겁게 멈추어야겠지. 아, 나한테는 파노라마 후지6×17은 그예 꿈으로 그치지 않으랴 싶다. 나 스스로 부끄럽고 옆지기와 아이한테 미안하며 형하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들 얼굴이 없다. 노상 하듯 두 손 네 손가락으로 사진틀을 만들어 마음껏 찍을 수 있는 사진만 찍어야겠다. (4343.5.29.흙.ㅎㄲㅅㄱ)
 

.. 형한테 미안하고 고맙기에 글 하나를 끄적이는데, 글을 끄적이는 내내 괜히 슬프면서 홀가분하다. 아무래도 후지617을 손에 쥘 날을 맞이할 수 없으리라 느끼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생각으로나마 이 사진기를 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끄적거리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가장 싼 파노라마사진기인 후지617이지만, 김영갑 님이 돌아가시면서 얼결에 이 값싼 보급형 파노라마가 지나치게 뻥튀기 값이 붙으며 비싸구려가 되고 말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으로 보는 눈 124 : 아이가 아플 때 읽는 책

 아이가 아플 때에 애 엄마는 아이 곁을 지킵니다. 다른 어느 일보다 아이 목숨이 크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픈데 다른 무슨 일을 하며, 다른 어떤 곳에 눈을 두겠습니까. 그런데 이때에 여느 애 아빠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애 아빠도 온마음을 아픈 아이한테 쏟을 수 있을는지요.

 하루이틀 새로워지는 우리 터전에서, 아이가 아플 때에 아이 곁을 지키지 않거나 지키지 못하는 애 엄마가 늘어납니다. 그러면 아픈 아이 곁을 내처 지키며 돌보는 애 아빠는 조금씩 늘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가씨들이나 젊은 애 엄마는 밥하기나 빨래하기나 청소하기 같은 밑살림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요즈음 젊은 사내들이나 애 아빠는 집살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옆에서 재미나다는 책을 읽는다든지 신난다는 연속극을 본다든지 하는 어버이가 있다면, 이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알쏭달쏭합니다.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기쁨을 찾고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나 스스로 낳아 기르는 아이를 돌볼 줄 모르는 어버이라 한다면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돌볼 줄 모를밖에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낳아 기르는 아이 똥오줌을 스스럼없이 치우고 이 손으로 거리낌없이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이이는 어버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이란 이름 또한 알맞지 않습니다.

 엊그제부터 우리 집 아이가 아픕니다. 그러께에 그러께를 더한 날부터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옆지기는 퍽 예전부터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애 아빠 된 저는 바깥일 때문에 아픈 애를 놓고 움직입니다. 집에서 애 엄마가 몇 시간쯤 더 애써 주기를 바라면서 혼자 바깥일을 봅니다.

 집살림이며 돈벌이 때문에 아픈 옆지기한테 살가이 마음 쏟지 못하며 살고 있는 하루하루를 돌아봅니다. 제가 읽은 훌륭하다거나 거룩하다거나 좋다거나 곱다거나 하는 책은 무슨 쓸모가 있을는지 되새깁니다. 성경을 읽어도 성경 말씀이 좋다고만 할 뿐 성경 말씀처럼 살아내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옳고 바르며 고운 삶을 살피며, 옳고 바르며 고운 길을 걷는 정치꾼한테 한 표를 선사하는 사람이란 뜻밖에 퍽 드뭅니다.

 애 아빠로서 아픈 아이 곁을 내내 지키지 못한다면 아이 앞에서 들 얼굴이 없습니다. 옆지기로서 아픈 애 엄마 둘레를 언제나 지키지 못한다면 애 엄마 앞에서 들 낯짝이 없습니다. 다른 남자가 어떠하다느니, 다른 집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부질없는 핑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엉성궂거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책에 빠져 있든, 좋은 책을 좀처럼 알아보지 못하고 있든, 나는 나부터 내 삶을 옳고 바르고 곱고 착하고 참되어 추스르고 있지 못하는 슬픔을 눈여겨보면서 아파해야 합니다. 누구보다 나한테는 얼마나 많은 책이 있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부터 내 삶을 참된 맑음과 착한 믿음과 고운 사랑으로 빚고 있지 못하다면,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쥔 이들은 온갖 모습으로 신나게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에 나오는 끔찍한 짓을 저지를 발판을 얻습니다. (4343.5.27.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