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보는 눈과 사진을 담는 손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  
Erika Stone(사진)+Merle Good(글),  《Nicole visits an Amish farm》(Walker & com,1982)


 고추밭에서 고추를 딸 때에는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한여름이라고 반바지나 끌신 차림으로 고추를 딸 수 없습니다. 담배밭에서 담배잎을 딸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적어 놓은 책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과 그림으로 옳게 담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 이름난 그림쟁이 한 분이 곡괭이질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틀림없이 삽질과 곡괭이질을 알지만 ‘곡괭이자루를 쥐고 내리찍는 모습’을 엉터리로 그렸습니다. 곡괭이질을 하는 느낌, 영어로 말하자면 ‘이미지 보여주기’에만 마음을 쏟았을 뿐, 곡괭이질을 할 때에 두 손으로 자루 어디를 잡고 어떻게 내리찍는가를 옳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전거 타는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는 꽤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그림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는 대단히 드뭅니다. 아주 쉬운 보기로, 자전거 체인이 어느 쪽에 달려 있는가라든지 페달이 붙는 자리라든지 손잡이와 앞바퀴가 어떻게 이어져 있으며 안장과 뒷바퀴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올바로 그릴 줄 아는 그림쟁이란 드물고, 올바르지 않은 그림을 깨닫는 지식인은 몇 안 됩니다.

 콩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콩을 먹는 사람 가운데 콩을 심어 김을 매거나 콩꽃 어여쁜 하얀 꽃잎을 쓰다듬어 본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감자를 즐겨먹든 안 먹든, 감자를 먹는 사람 가운데 감자꽃이 무슨 빛이요 꽃잎이 몇 장인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배를 먹으면서 배꽃이 하얀지 노란지 헤아리거나, 능금을 즐기면서 능금꽃이 붉은지 불그스름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귤나무에 귤꽃이 피는지 생각하거나 대추나무에 대추꽃이 피는지 돌아보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지식은 넘치고 대학교 다닌 사람은 넘실거리지만, 정작 우리 삶자락 밑바탕을 둘러싼 지식을 보듬으며 껴안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들은 밥을 잘 할 줄 모르거나 밥을 아예 할 줄 모르면서도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 돈을 치러서 밥을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물레를 잣고 길쌈을 한 다음 베틀을 밟고 나서 바느질을 거쳐 옷 한 벌 지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이렇게 하는 흐름을 하나조차 모르면서 옷 한 벌 예쁘장하게 사서 입을 줄은 압니다. 어쩌면, 이제는 옷 한 벌 사서 입는 값이 훨씬 싸며 품이 거의 안 들기 때문에 옷이란 돈 주고 사서 입으면 그만인 삶자락이라 할 만합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갈래가 다를 뿐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찍어서 이루는 문화요, 사진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며 즐기는 예술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삶이 사진입니다.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조선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조선 삶’을 ‘당신 삶’으로 맞아들이며 어깨동무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뜻이 거룩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사람 허먼 멜빌 님이 《모비딕》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고래잡이 삶’을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며 껴안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용케 살아남았거나 굳센 고기잡이라서가 아닙니다. 당신 눈이 남다르거나 그윽해서가 아닙니다.

 이오덕 님이 《일하는 아이들》 같은 책을 엮을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어린이 삶’을 ‘당신 삶’으로 안아들이며 웃고 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뛰어나거나 교육자 얼이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마음이 더 따뜻하거나 훨씬 너그러워서가 아닙니다.

 사진책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까망둥이 니콜(Nicole)이라는 계집아이가 하양둥이 채리티(Charity)라는 계집아이를 만나서 보낸 보름에 걸친 나날을 담은 이 작은 사진책에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살아가는 니콜이라는 ‘까망둥이 아이’가 1970∼80년대에 오로지 하양둥이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에 들어가서 부대낀 삶을 보여주는데, 이토록 따뜻하고 살가운 이야기로 엮을 수 있나 싶어 놀랍니다. 그러나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사람들 가운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나 《아미쉬》 같은 책이나마 읽었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며, 《Nicole visits an Amish farm》 같은 사진책을 알아볼 한국사람부터 거의 없습니다. ‘아미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사람조차 드물고, 이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왜 거의 언제나 맨발인 모습일는지를 알아챌 사람이란 없을 테며,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낮은학년일 아이들이 밥하기이며 빨래이며 농사일이며 숱한 집일을 함께하는 삶에 어떤 뜻이 깃들어 있는가를 읽을 사람이란 없으리라 봅니다. 더욱이, 아미쉬 사람들은 무늬없는 투박한 긴소매와 긴치마를 입으나 니콜이라는 계집아이는 목덜미 드러나는 온갖 빛깔 밝은 민소매 웃도리에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를 입는데, 아미쉬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볼 줄 모르면 찍을 줄 모른다지만, 살 줄 모르니 볼 줄 모릅니다. 살 줄을 모르니 무엇을 어떻게 왜 언제 누구하고 찍어야 하는 줄 모릅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볼 줄 알자면 살 줄 알아야 하고, 살 줄 알자면 스스로 뿌리내리어 녹아든 매무새이자 마음밭이어야 합니다. (4343.6.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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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최종규-사진책과 함께 살기"

출판사에서 내 줄 수 있다면 올가을이나 올겨울에 <그림책과 함께 살기>라는 책도 하나 태어날 수 있어요... 이 글은 오로지 '사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만 읽힐 생각으로 썼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진과 그림을 이어서 살핀다'는 흐름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 하나조차 제대로 파고들지 않는데,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영화나 다른 갈래를 이야기한다면 도무지 뭐가 뭔지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프랑스 사진책 <뒷모습>은 한국 출판사에서 표지 사진을 바꾸었기 때문에 느낌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저한테는 프랑스판 원서로 <뒷모습>이 있는데, 프랑스 사진책 <뒷모습>은 저런 여인네 벗은 뒷모습이 아닌 수수하고 말끔한 다른 뒷모습이랍니다... 표지 하나 때문에도 책 느낌이 사뭇 달라짐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사진비평이나 사진책 소개글이라는 글을 보면, 하나같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이론과 지식에만 파묻혀 있어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한테든 그냥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든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요... 이런 생각으로도 이 책을 썼고, 이렁저렁 사랑받을 수 있으면 '글쓰기 거듭남'을 하면서 이듬해에 2권을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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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의 환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31
클레망 셰루 지음, 정승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기쁨 하나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앎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알아서는 안 되고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알고 있다면 앎을 머리에 가두지 말고 온몸으로 녹아내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내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도록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루는 글쓰기이고 그림그리기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노래부르기이고 춤추기입니다. 삶을 영글은 농사짓기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우리 둘레에서 맞아들이거나 부대끼는 일놀이 가운데 삶하고 이어지지 않는 일놀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애틋한 삶이고 모두 가멸찬 삶이며 모두 땀흘리는 삶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마련할 때에도 애틋한 삶이고, 밥그릇 하나를 설거지할 때에도 가멸찬 삶이며, 아이한테 노래 하나 들려주며 재울 때에도 땀흘리는 삶입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가운데 곰삭일 수 있으면 굳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가 없어도 넉넉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피며 어루만지는 가운데 되뇌일 수 있으면 따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로 나타낼 때에 눈물과 웃음이 절로 깃듭니다.

 어떤 잘난 사람을 따라하거나 흉내낼 글이 아니요 그림이 아니며 사진이 아닙니다. 대단한 노래꾼을 따라하며 노래를 불러야 맛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에 감겨드는 느낌을 살리고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제맛입니다. 엄청난 춤꾼을 흉내내며 춤을 추어야 멋이 아닙니다. 내 몸에 찾아드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움직이며 즐기는 춤이 제멋입니다. 스스로 제 결을 찾아야 할 삶이지, 스스로 제 결을 놓거나 버리며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고 다른 곳에 손길을 뻗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겉치레로 내동댕이칠 수 없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삶이 아닙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속차림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속을 차리는 일놀이일 때라야 비로소 삶입니다. 속을 차리는 내 삶이란 바로 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 하는 우리들이라 할 때에는 바야흐로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그러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재주를 배워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 교본을 챙겨 읽는다든지 사진 강좌를 찾아 듣는다든지 해서 사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면 내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진을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내 삶을 신나게 즐기고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란다면 내 삶을 아름답게 여밀 노릇이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꿈꾼다면 내 삶을 사랑스레 가꿀 노릇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진쟁이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마네킹, 인형, 매춘부, 눈 감은 사람, 잠자는 사람, 꿈을 꾸거나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 등 초현실주의 신화의 좋은 구성 요소를 사진으로 담아냈다(38, 41쪽).”고 합니다. 이때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갓 사진기를 손에 쥔 때요, 그러니까 새내기 사진쟁이 때 모습이라고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한층 성장하는 데는 전쟁의 경험, 수용소 생활, 지인들의 실종 같은 사건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염려하던 마음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추상적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 이제 그는 선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가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진기자였다(58, 64쪽).”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픗내기나 새내기였을 적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사진을 할지 그림을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돈 걱정을 따로 하지 않는 넉넉한 살림’에서 ‘사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을 뿐 아니라, ‘사진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담아서 보이고 나눌는지’는 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사위를 넘기는 동안 비로소 당신한테 ‘사진이야말로 내 삶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늘 좋은 이미지를 노렸다(45쪽).”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지, 어느 때에는 대충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어설피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이웃 아줌마가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사랑스러운 집식구가 찍어 주기를 바라며 찍든 늘 온힘과 온마음을 바쳐 나한테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진을 찍든 이제까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나으며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사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 있게 배열하는 작업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8쪽).”고 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사진을 잡지사에 팔고 신문사에 팔았을 텐데, 이렇게 돈을 받으며 사진을 내어줄 때에 편집자들은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는 한편, 당신이 사진으로 담아 나누려는 이야기하고 엇나갈 때가 있다고 밝힙니다.

 뭇사람들이 사진밭 큰사람으로 섬기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놓고 돌아볼 때에 이런 말마디는 퍽 얄궂습니다. 그러나 큰사람이든 작은사람이든 이런저런 다툼과 부딪힘과 아픔과 생채기를 겪거나 치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당신 자리를 찾아 가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주문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부탁에 따르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되어야 시나브로 나를 비롯한 내 둘레 사람들 모두한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는 땀방울로 영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미국에서 당신 사진을 전시하던 이들이 처음 붙였던 이름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마디는, 우리 말로 쉽게 옮기면 “바로 이 사진 하나 얻는 때”를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삶이었다는 당신 매무새는, 사진찍기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사진찍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고마운 이야기 하나라고 느낍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언제나 발생한 사건자 자체보다는 그 안의 진실을 다양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96쪽).”고 하니까요. ‘순간을 기다리며 찍는 당신’이 아닌 ‘어느 한때에 깃든 삶을 누구보다 스스로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삶을 글로 함께 적바림하는 사람은 몹시 드문 가운데,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우리한테 남긴 사진 못지않게 우리한테 남긴 글이 제법 많습니다. 이리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자그마한 책에는 당신이 걸어온 사진삶이 차곡차곡 담기는 한편, 당신이 밝히며 늘 거듭나고 있던 사진말이 알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꽤나 많으면서, 정작 당신 사진 작품을 찬찬히 챙겨 본다든지 당신 사진 이야기를 곰곰이 찾아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브레송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입방아를 찧기 앞서, 브레송이니 부라자이니 어렁저렁 말밥을 삼기 앞서, 사진 하나에 온삶을 들여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을 펼쳐 온 삶자락을 들여다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떤 매무새로 껴안았는지 살필 노릇이고,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돌아볼 노릇이며,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에 어떤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는 “결정적 순간의 환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습니다. 책을 두 번 내처 읽고 나서 이 덧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사람한테는 더도 덜도 아닌 “사진을 찍는 기쁨”일 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찍힌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로 이때”를 찍었다 할는지 모르고,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기막힌 모습을 짜릿하게” 찍었다 할는지 모르나,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으로서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을 뿐이요, ‘담아야 할 삶을 담았’을 뿐 아니랴 싶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 담긴 당신 삶과 넋을 돌아보니 그저 이런 느낌이 듭니다. 떠들썩하니 무슨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며 떠받들 브레송이 아니라, 그예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된 삶이었던 브레송이라고 느끼며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될 길을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4343.6.5.흙.ㅎㄲㅅㄱ)


[책에서 그러모은 생각조각]
ㄱ.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나 일화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ㄴ. 마그네슘 플래시는 빛이 전혀 없을 때라도 허용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만다.
ㄷ. 인간적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위적인 면을 반드시 피하고 사진기와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ㄹ. 만일 좋은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낸다면 결국 균형은 깨지게 된다.
ㅁ. 사진기는 작업의 도구이지 그저 예쁜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이 기계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ㅂ. 나는 내 사진을 트리밍하거나 피사체를 재배치해서 좀더 나아 보이도록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 사진이 그리 좋지 않았다면 프레임 안의 기하학적 비율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저기 변형하여 인화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ㅅ. 사진가는 자신을 잊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꿰뚫어보며, 상대가 지금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으로까지 정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한다.
ㅇ. 탐미주의에 앞서 현재의 삶이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애착을 가진다.
ㅈ. 나는 보도기자이지 화실의 초상화가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외부세계(혹은 내적 세계)는 내 작품의 주제이자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무대 배경이다.
ㅊ. 애호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고, 기술자들은 시험 중인 기계 속에 파묻혀 있다.
ㅋ. 사실 우리 모두는 모방자들로서, 무엇보다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담 없이 표현해야 한다.
ㅌ.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ㅍ. 나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
ㅎ. 나에게 보도사진은 눈과 손, 그리고 두 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클레망 셰루 씀,정승원 옮김,시공사 펴냄,2010.5.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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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5 : 길을 거닐며 새기는 책

 스물석 달째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낮잠을 다문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자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물석 달 동안 이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점을 먹고 살살 졸릴 무렵 그예 잠들어 주면 낮에 한결 기운차고 신나게 놀 수 있으며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밤에 깊이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금 싱그러우며 기운차게 놀 수 있고, 하루하루 이런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자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밤잠이 길지 않습니다. 새벽 여섯 시 무렵에 어김없이 깨어나려 하는데, 요사이 하루하루 낮이 길어지고 새벽이 일찍 찾아오니 벌써 다섯 시 무렵부터 깰려고 옴쭐옴쭐합니다. 바깥이 하얗게 밝아 오면 저도 잠에서 깨려고 부시럭거립니다. 애 아빠로서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이 조용히 일할 애틋한 때이기 때문에 으레 새벽 너덧 시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조각 하나 겨우 끄적일 무렵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아빠!” 하고 부르며 찾으면 “아이구!”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오늘도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낮잠을 건너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를 데리고 바깥마실을 나옵니다. 졸릴락 말락 하니까 한 시간쯤 걸리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아이는 아빠 품에만 안기려 하고 걷지를 않습니다. 이 녀석 졸리기는 무척 졸린가 보네. 그러나 잠들지도 않습니다. 자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이렇게 두 시간 반쯤 낑낑거리며 땀 뻘뻘 흘리는 골목마실을 하노라니 비로소 곯아떨어집니다. 아이가 곯아떨어지고서야 집으로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빠도 아빠 일을 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곯아떨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힘들며 더딥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가까스로 집에 닿습니다. 애 아빠는 더없이 고단하여 찬물로 한 차례 씻은 다음 아이 옆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딱히 아빠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멍하니 앉아 책조차 못 펼칩니다.

 며칠 앞서 우리 친형이 산티아고로 떠났습니다. 쉰 날 남짓을 다니는 나들이길이라고 하며 떠났습니다. 떠나는 길에 우리 식구한테 살림돈을 두둑히 보태 주었습니다. 한 달 반치 달삯에 이르는 돈을 주었습니다. 요사이 ‘산티아고 순례자’가 많이 늘었고 ‘산티아고 순례기’ 책이 꽤 많이 나온다는데, 우리 형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먼 나들이길을 떠나는지 궁금합니다. 먼 나라에서 낯과 물이 선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거닐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먹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형은 형한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며, 형한테 주어진 길을 어떤 매무새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형으로서는 곧 마흔 줄 나이에 접어듭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든지 《중년 이후》라는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나이가 젊을 때에는 젊은 대로 좋고, 나이가 들 때에는 나이가 드는 대로 좋다고 밝힙니다. “사람도 물건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그러한 존재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중한 의무인 것이다(92쪽)” 하고 《중년 이후》에서 밝힙니다. 먼길을 땀흘려 걷노라면 형은 형대로 저는 저대로 우리 삶을 알뜰히 사랑할 몸짓 하나 익힐 수 있겠지요. (4343.6.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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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루공화국의 비극 -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
뤽 폴리에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자본주의가 아름다운 나라를 망가뜨렸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7] 뤽 폴리에, 《나우루공화국의 비극》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요, 공산주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돈이 없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여기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국민소득이 꽤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은 아니지만 국민소득이 제법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은 높을지라도 복지와 문화와 교육은 꽤 뒤처진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번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들여다보면 적잖은 후보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무상급식’은 정치 후보자가 공약으로 내세울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이런 마땅히 나라가 할 일을 나라가 마땅히 안 하면서 정치 후보자들이 선거철마다 공약으로 되풀이해서 내놓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이면서 공업국이요, 토목국입니다. 공장이 온 나라에 넘치는 한편, 숱한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너무 우악스러운 이름이라 여겼는지 사라진 ‘경부운하’와 ‘경인운하’ 토목공사는 저마다 ‘4대강 사업’과 ‘아라뱃길’이라는 새 이름으로 갈아타고 끝도 모르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농업국이 아닙니다. 농업을 북돋우지 않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환경을 살리는 유기농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아니, 유기농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온통 도시에 바글바글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유기농’ 곡식으로 먹여살릴 수 없습니다. 흔한 말로 ‘남녘땅에서 쏟아지는 음식물쓰레기 부피’는 ‘북녘땅 사람들을 모두 먹여살리고 아주 많이 남을 만큼 되는 부피’라 할 만큼 남녘땅에서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버리는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훌륭한 유기농 곡식을 일군다 하더라도 버려지는 쓰레기가 잔뜩잔뜩 있으니 농사짓는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참된 농사를 지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치꾼 공약으로 ‘무상급식’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있으나, ‘친환경’ 무상급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19세기에 나우루는 여전히 야자나무로 뒤덮인 땅이었다 … 나우루인들은 대개 해변에서 하는 여러 가지 놀이와 즐겁게 낚시하기를 좋아했다. 저녁이 되면 나우루인들은 함께 음식을 먹고 불가에서 밤을 지새웠다 ..  (26, 33쪽)


 자본주의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면 어떤 ‘주의’를 섬기든 착하지 않고 참답지 않으며 곱지 않은 사람들이 나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섬기든 사회주의를 섬기든 공산주의를 섬기든 민주주의를 섬기든 독재정권을 섬기든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갈 수 있으면 나쁠 일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우두머리란 사람이 백 살까지 살며 백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우두머리가 누구이건 말건 아랑곳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일본 배우 미야자와 리에라는 분이 한창 젊고 사랑받으며 일하던 어느 날, 일본 총리가 마련한 잔치에 초대되어 가 있던 자리에서 “난 일본 총리가 누구인지 몰라요”라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는데, 대통령 이름을 모르든 시장이나 구청장 이름을 모르든 군수나 면장을 이름을 모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뿌리내린 동네에서 아름다이 살아가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좋은 정치꾼이 있건 몹쓸 정치꾼이 있건 우리 동네를 우리 힘과 슬기로 알뜰살뜰 가꾸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신동엽 님 시 〈산문시〉에 나오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너무 없어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꽂고 시인한테 찾아가 술 한잔 마시자고 굽신거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정치 생각’이 아닌 ‘삶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언제나 말썽거리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사람이 말썽거리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다 한들 이 제도를 다루는 사람이 말썽거리이니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엉망이 되며 교육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몹쓸 제도로 짓눌려 있다 한들 이 제도에 허덕이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아가고 있으면 착하고 참된 훌륭한 일꾼이 태어납니다.


.. 인산염은 1907년에 채굴되기 시작했다 … 20세기 초 몇 해 동안 나우루는 노천 광산이나 다름없었고, 모두가 이익을 챙겼다. 영국인들은 채굴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인들은 여전히 섬을 지배하면서 채굴 이익에 대한 배당금을 받았다 … 인광석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농업 발전을 가져오지만, 전시에는 폭발물 제조에도 쓰였다. 태평양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의 전략지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1948년, 나우루인들은 인산염 채굴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그 총수입에서 고작 2퍼센트만을 받았다 ..  (31, 36, 41쪽)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유럽(서구)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평화로운 태평양 섬나라 삶을 보여주는 작은 책입니다. 평화로이 살아가는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은 ‘식민지를 넓히려는 꿈’을 키운 유럽사람 때문에 평화에 금이 갑니다. 그 뒤로는 ‘돈을 얻으려는 꿈’을 키우던 또다른 유럽사람과 일본사람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평화에 얼룩이 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당신들을 해코지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총칼과 술과 돈 때문에 스스로 평화를 허물고 맙니다.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은 온누리 사람들이 나우루공화국에서 콩고물을 빼앗아 먹으면서 나우루공화국 몇 천 사람들을 엉망진창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은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자본주의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얼마나 끔찍한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가여우며, 나눔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슬픈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우루공화국 사람들은 흰둥이들이 가르쳐 준 대로 당신들 나라를 이룬 ‘인산염’을 캐면서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거머쥐었습니다. 고작 1만조차 안 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 나라보다 커다란 돈을 움켜쥐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 한 번 놀리지 않으며 놀고먹는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 근심걱정 없이 ‘쓰고 버리는’ 삶을 서른 해 동안 넘실넘실 펼치다가 폭삭 주저앉습니다. 돈으로 뜨고 돈으로 내려앉습니다.


.. 자기 땅에서 나는 인산염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들판에 양분을 제공하는 동안, 나우루는 부서지고 구멍이 난 자국 땅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 나우루 지도자들의 행태는 유명 스타들의 변덕과 비슷했으며, 장관들은 때로 자기네 금고와 국고를 혼동하기도 했다 …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할 수 없었는데, 어느 가족이건 정부에 한 발씩은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독립 이후 나우루가 이리저리 뒤얽힌 여러 건의 해외 투자와 결실을 맺지 못한 프로젝트 때문에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 확인할 길은 거의 없다. 사실 돈은 결코 나우루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제대로 그런 손실을 계산해 본 적도 없었다. 일부 오스트레일리아 전문가들은 누적 손실액이 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섬에 사는 거주민이 7000명을 조금 넘는데 말이다 ..  (65, 69, 108쪽)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시장이 바뀝니다. 예전 시장님은 지난 여덟 해에 걸쳐 인천땅 모든 곳을 ‘재개발-재정비-도시정화’라는 이름을 붙여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아엎으며 2014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치른다 하고, 갯벌을 메운 땅에 151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있는 한편, 우리 나라에서 동대문운동장보다 역사가 깊던 가장 오래된 야구장(건물 나이는 동대문운동장이 더 많았으나 역사는 동대문운동장보다 깊던)을 손쉽게 허문 데다가, 앞으로는 더 큰 돈을 들여 아파트숲을 일구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시장이 되신 분이 유세를 하면서 우리한테 나누어 준 공약자료집을 들춥니다. 이분은 30조 원을 들여 참된 재개발을 하겠다고 밝힙니다(예전 시장님은 10조 원을 들여 당신이 밀어붙이던 재개발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새 시장님은 예전 시장님이 내세운 ‘뉴타운’은 모두 엉터리라 하면서 당신은 ‘웰타운’을 세우겠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2024년에 인천에서 올림픽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붙입니다.

 예전 시장님은 ‘문학월드컵축구장’ 하나만 갖고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이끌어 냈습니다. 다른 모든 경기장은 새로 짓는다고 하면서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른다고 밝혀 왔습니다. 다가오는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를 경기장이 다 만들어지면, 경기를 치른 뒤에는 이 경기장들이 쓰일 데 거의 없이 놀고 있을 테니까, 2024년에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노릇이겠지요. 그러면 2024년 올림픽을 내다보며 인천과 부산이 서로 다툼질을 해야 할까 궁금하군요.


.. 나우루에서는 당뇨가 위험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병의 근원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돈이다. 인산염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었으며, 집에서 배달 음식만 시켜 먹고 차로만 움직이는 등 신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채 30년도 안 돼 나우루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 한 편 빌리면 그만인데, 굳이 다 같이 모여 전통 축제를 준비하는 데 누가 관심이나 있었겠어요?” ..  (143, 150∼151쪽)


 운동경기장 하나를 짓는 데에는 수천 억원이 듭니다. 운동경기장 몇 개를 짓고 큰 세계경기대회를 치르면 일자리라든지 홍보관광이라든지 무어무어니 하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바로 자본주의 이야기입니다.

 운동경기장 하나를 지을 돈이면 ‘무상급식’뿐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계경기대회를 치를 운동장을 짓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면 인천이라는 도시 하나뿐 아니라 나라를 통틀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루고 남습니다. 급식과 교육과 복지를 나라돈으로 아름다이 뒷배하는 동안 ‘좋은 일자리 만들기’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애써 돈을 들이지 않아도 좋은 일을 이루고 좋은 꿈을 이루며 좋은 삶을 이룹니다.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돈으로만 모든 일을 꾸리려 한다든지, 더 커다란 돈을 쏟아부어 뭔가를 꾀한다든지 해야만 하지 않습니다. 돈에서 홀가분하면서 자본주의를 펼칠 수 있고,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이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으며, 돈벌이 아닌 일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살찌울 수 있습니다.


.. 두바이는 겉으로 보기에 낙원이나 다름없다. 돈, 호화 관광, 그리고 거대한 규모 … 돈에 압도당한 나우루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보존할 줄 몰랐다 ..  (172∼173쪽)


 평화로운 섬나라 나우루는 대통령이 없던 지난날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사랑스러운 섬나라 나우루는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없던 지난날 더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살기 좋은 섬나라 나우루는 공장이고 회사이고 학교이고 없던 지난날 그지없이 살기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섬나라 나우루는 돈이 없던 지난날 해맑게 아름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며 국회의원이 있으며 공장과 회사와 학교가 수두룩하고 돈 또한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얼마나 평화롭거나 사랑스럽거나 살기 좋거나 아름다운 나라일는지 궁금합니다. (4343.6.3.나무.ㅎㄲㅅㄱ)


 ┌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에코리브르,2010)
 ├ 글 : 뤽 폴리에
 ├ 옮긴이 : 안수연
 └ 책값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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