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신미식 포토에세이
신미식 지음 / 푸른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구경꾼 사진인가 사랑꾼 사진인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2] 신미식,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책이름 :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글ㆍ사진 : 신미식
- 펴낸곳 : 푸른솔 (2007.7.7.)
- 책값 : 27000원


 (1) 구경하는 사진과 살아가는 사진


 제가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는 고등학교입니다. 제가 마친 고등학교는 여느 인문계 고등학교이기에 따로 어떤 특기나 재주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가 이곳이든 저곳이든 저로서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내세울 만한 대목이 따로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이 대학교에서 강사나 교수가 되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대학교라는 자리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모두 자격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란 숱한 자격증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언제나 어디에서든 내밀어야만 하는 자격증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문 일자리를 얻으려면 대학교 졸업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이든, 온누리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언론사이든, 아이들 가르치는 터전이라는 학교이든, 동네사람을 보듬는 일을 맡는다는 공공기관(동사무소)이든, 졸업장이 없고서는 입사지원서 하나 내놓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그림그리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노래부르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춤추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사진찍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어느어느 사람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경력이나 자격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나아가,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따위를 처음으로 배운다든지 새롭게 배운다든지 하는 우리들 스스로 ‘어느어느 대학교’라든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온 아무개’라든지 ‘이런저런 강좌나 특강’이라든지 ‘어찌어찌 이름난 누군가’를 찾아나섭니다. 하다못해(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에 따라) 밥하기를 배운다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낳아 기르며 먹여살린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밥하기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요리학원에 나가야 하고, 요리교실을 들어야 하며, 요리책을 들여다보거나 요리방송을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대학교라는 틀이 나쁜 틀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섬돌을 밟아 올라가듯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틀입니다. 샛길로 빠지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며 이끄는 틀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라는 배움터는 열린 마당이 아닌 갇힌 틀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찾으며 저마다 다른 삶을 꾸리도록 길벗이 되어 주는 열린 마당이 아니라, 어떠한 자격증을 따내도록 한 가지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갇힌 틀입니다.

 열린 마당에서는 무슨 솜씨나 재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로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밥물 맞추기와 나물 무치기를 알려주는 할머니가 무슨 솜씨나 재주를 부려서 더 맛나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밥을 할 때에는 물을 어찌 맞추고 나물을 무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갇힌 틀에서는 언제나 솜씨와 재주를 가르칩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고서는 따로 배울 수 없습니다. 밥물을 맞출 때에 비율을 따지고 부피를 셈합니다. 쌀알을 몇 그램 떠서 몇 차례 씻어서 어느 높이가 되도록 맞추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나물은 몇 그램을 마련하고 어디를 어느 만한 길이로 다듬어서 몇 분에 걸쳐 어떠한 그릇이나 냄비나 불판을 쓰는데 어떤 양념을 얼마만한 부피를 어느 때에 넣어서 무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주부터 어찌저찌하여 어느 대안학교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저처럼 대학교를 안 나왔을 뿐 아니라, 사진 전공조차 안 했으며, 가르쳐 준 사진 스승이 없는 사람한테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분들이 참 용하구나 싶은데, 저로서는 즐겁게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덧 해쯤 앞서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 자원봉사 활동가 아줌마 아저씨한테 사진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이때나 제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 ‘사진 배우기’를 하겠다는 분들은 ‘가르쳐’ 주기를 바라시지만, 저는 사진을 가르치지 못하고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가르치려 한다면, 모든 사진기마다 딸려 있는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손전화를 장만해도 이 손전화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마련해도 이 자전거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자동차를 사서 몰든 오토바이를 사서 몰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에 딸린 설명서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물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힐 노릇입니다.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고, 그림이나 글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볼펜을 쓰는 솜씨를 익히고자 글쓰기를 배운다 하지 않겠지요? 붓을 놀리는 재주를 알고자 그림그리기를 배운다 하지 않을 테고요.

 사진기 다루는 재주나 솜씨 때문이라면 저 같은 사람한테서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누구한테서든 배울 까닭이 없어요.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요, 사진강좌나 사진교실 같은 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사진기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스스로 알아차릴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을 만드는 일이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빨래를 하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사진을 배운다고 할 때에는 사진기 다루는 재주가 아닌 사진 한 장에 담을 내 넋과 삶을 배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을 어떠한 눈길과 매무새로 바라보는가를 돌아보고, 사진 한 장을 얻고자 어떻게 마음쓰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를 살피며, 사진 한 장을 얻고 나서 이 사진으로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하고 즐거운 눈물과 웃음을 주고받느냐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람을 사귑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우리 삶을 배우겠다는 셈이요, 이제까지 보내 온 내 삶을 찬찬히 되새기고 되짚으면서 앞으로 꾸릴 내 삶이 어떠한 모습과 매무새가 되면 좋을까 하고 내다보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읽을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려는 걸음걸이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맨 먼저 내 삶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진찍기는 못합니다. 내 삶을 모르는데 무슨 글쓰기를 하며, 내 삶을 알려 하지 않는데 무슨 그림그리기를 하겠어요.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사진기를 쉽게 장만하고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몇몇 부자나 예술쟁이들이 겉멋 부리듯 하는 놀음놀이가 아니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만 사진기가 아니요, 값싼 1회용 사진기 또한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어야 하며, 사진기는 누구나 장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빼어난 장비를 갖추었다고 빼어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며, 허술한 장비밖에 없다고 허술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숟가락을 들고 주걱을 들며 칼을 든 살림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밥이듯, 사진기를 쥔 우리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에서 언제 찍으려 하느냐는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는 겉멋을 부리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겉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겉멋에 들린 삶을 꾸리며 겉멋을 한껏 뽐내는 또다른 길로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간다고 잘못이라거나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길로 접어들지 못할 뿐이니, 이렇게 겉스치는 길로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구경꾼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속알을 채우며 보듬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시나브로 속알이 야무지거나 단단하여 그윽한 멋이 풍기는 사진을 얻습니다. 사랑스레 꾸리는 삶이기에 사랑꾼 사진을 얻어요.

 그런데 사진 가르치기를 두 번째로 해 보면서 적잖이 걱정스럽습니다. 저로서는 제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 싶어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사진을 배우려는 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따로 사진 재주만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하루하루란 아이들한테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닐 텐데,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배우려 하는 사진이란 당신 스스로 ‘사진 다루는 지식’으로 흐르지 않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경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오로지 구경하는 사진만 얻으며 구경하는 사진이 아름다운 듯 여길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그러니까 땀흘리고 마음쏟으며 꾸리는 참삶일 때에는 땀흘리는 사진이고 내 마음 깊이 바쳐진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으로 나날이 거듭납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아름다우나, 오늘은 오늘대로 어제까지 보낸 삶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는 새로우며 빛나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티없는 사랑꾼 사진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사진 지식을 내려놓고 사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사람 삶터를 담는 사진이란


 “사진가가 아름다운 풍광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34쪽).” 하고 말하는 신미식 님은 당신 사진을 그러모은 작품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사진은 감동이다》(2010)를 엮었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2009)라든지 《천국의 땅, 에티오피아》(2009)라든지 《행복 정거장》(2008)이라든지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2008)이라든지 《미침, 여행과 사진에 미치다》(2007)라든지 《카메라를 던져라!》(2006)라든지 《마다가스카르 이야기》(2006)라든지, 지난 2002년부터 숱한 사진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2007)는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는 당신 삶과 넋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을 여러 번 되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틀림없이 ‘사진쟁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기쁜’ 일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쟁이 스스로 내가 남긴 사진에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을 때 눈물을 흘릴 뿐 아니라, 이 아름다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이튿날이 되어 보잘것없다고 느낄 줄 안다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어제 쓴 글’과 견주어 ‘오늘 쓴 글’이 더 아름답거나 훌륭하기 마련이요, ‘어제 그린 그림’과 맞대어 ‘오늘 그린 그림’이 한결 빛나거나 놀랍기 마련입니다. 사진쟁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책을 내놓으려고 하는 이들은 으레 한 가지 사진감을 놓고 아무리 짧아도 열 해는 잇달아 꾸준히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까닭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입니다. 어제 찍은 사진이 제아무리 훌륭했어도 오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 보잘것없거든요.

 사진쟁이가 되었든 그림쟁이나 글쟁이가 되었든 모두 한 가지 매무새입니다. 첫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내 사진에 아름다움이 담겼으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오늘 찍은 사진은 오늘로 잊고 이듬날에는 이듬날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일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를 채워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사진은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호흡법이기 때문이다 … 이곳에 실린 사진의 인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겐 잊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와 동떨어진 피사체가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로 다가가 찍은 사진들이 결국 내 마음을 만진다 …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작품성의 의미를 떠나 신미식이 만난 귀한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을 먼저 사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아져 결국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 카메라를 장만한 지 이제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스스로 감사하며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원한다. 만들어진 틀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아닌 스스로 찾아낸 삶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된 것은 나에겐 행운이다 ..  (책을 내면서)


 사진 한 장 아름다이 찍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진쟁이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칩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움 그대로 담아낸 사진쟁이는 이웃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며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끌기 앞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면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사진쟁이라는 사람은 당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죽이거나 밀어내어 손가락이 덜덜 떨리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차분하게 아름다움을 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이웃사람한테 벅차오르는 가슴이 무엇인지를 나누지 못합니다. 벅차오르는 가슴일 때에 벅차오르는 그대로를 담아야지, 벅차오르는 가슴을 다독이며 담은 사진에는 ‘벌써 차분해지고 만 재미없거나 따분한’ 사진이 박히고 맙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서는 ‘이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데?’ 하고 말할는지 모르나,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쟁이가 덧붙이는 말’ 때문에 ‘그렇군요!’ 하고 생각하지, 사진을 보는 사람 스스로 가슴이 울렁거리지 못합니다.

 신미식 님은 2007년에 열여섯 해째 사진찍기를 했다 했으니, 2010년이면 열아홉 해째요, 2011년에는 스무 해째가 될 테지요.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이제는 신미식 님이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생각인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삶을 꾸리며 사진을 즐길’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신미식 님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바라기 앞서, 신미식 님 스스로 찍은 사진으로 남들보다 당신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치며 당신 삶을 스스로 티없이 맑고 밝으며 곱게 다스릴 수 있기를 바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소금호텔을 나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길 하나 없는 하얀 사막을 달리는 운전사는 이정표도 없는 길을 잘도 찾아간다. 아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길이 있는 듯하다 … 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플라밍고의 동작 하나하나를 담기 위해 숨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분홍빛의 플라밍고는 처음으로 내 카메라의 포로가 되었다. 한참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운전사가 오더니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러냐고 어깨를 들썩이니, 이곳은 플라밍고가 많은 곳이 아니고 다음에 가는 호수가 진짜 제대로 된 플라밍고 서식지라는 것이다. 난 이곳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는데, 이보다 더 큰 서식지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수밖에 ..  (30, 33쪽)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신미식 님은 ‘사진쟁이로서 당신 나름대로 아름다이 걸었던 길’은 그다지 밝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로 걷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본 길’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당신이 두 눈과 두 다리와 온몸으로 부대낀 여행지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을 그저 ‘풍광’으로 받아들일 뿐, 당신 ‘삶’으로는 삭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자연과 그들의 소중한 삶 속에서 난 미치도록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82쪽)” 같은 말을 해야 하고 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말마디에 뭉클해 해야 할는지요. 우리는 우리 둘레 여느 삶터 여느 이웃하고 복닥이는 삶에서 ‘미치도록 즐거운 삶자락’을 느끼고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쟁이 길을 걸어야 참다이 아름답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에 내 이웃 보금자리에서도 내 이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를 깨닫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신미식 님 말은 슬픕니다. 아직 한국사람이 안 내디뎠다는 그곳 모습을 처음으로 찍어야만 미치도록 즐거울는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곳에서 ‘수없이 스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거나 마주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 모습을 신미식 님 당신만은 날카롭고 포근하며 따스하게 잡아채거나 느껴 사진 한 장으로 옮길 노릇이 아닌지요.

 아무도 못 본 모습을 처음으로 사진으로 담을 때에 즐겁다면, 그예 1등주의와 다름없는 최초주의로 머무는 삶이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찍기란 1등주의가 아니고 최초주의가 아닌데, 사진찍기란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다름없는 아름다움 찾기일 텐데, 사진찍기란 사진기를 든 사람부터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움을 나누는 일일 텐데, 왜 ‘(구경꾼한테)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일컫는 곳에만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벌어진 틈이 있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연기가 올라온다. 함께 온 여행자들의 입에서는 탄성소리가 터져나온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 이곳에 서면 사람은 모두가 작아진다. 그리고 한없이 작아진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그랬듯이, 이곳을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가 그랬듯이.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은 새로운 여행자들을 이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직접 오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여행자의 특권 앞에 난 심장이 뛰었다 ..  (50, 62, 77쪽)


 여행하는 사람은 당신한테 낯선 곳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 당신으로서는 낯선 곳이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태어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하나도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여행지’라는 곳이 ‘고향’인 사람하고 여행지가 말 그대로 ‘여행지’요 ‘낯선 곳’이요 ‘처음 내딛는 곳’인 사람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 모습을 당신으로서는 ‘처음 사진으로 담는다’ 할지라도 여행지를 여행지 아닌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은 ‘늘 으레 보던 모습’이요 ‘늘 으레 사진으로 담은 모습’입니다.

 플라밍고 호수를 사진으로 찍는 신미식 님을 보며 웃던 운전기사는 ‘플라밍고가 조금 모여 있는 곳은 이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한편 ‘플라밍고가 구름처럼 모여 있으며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 곳을 함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는 소리가 아니라, 두 곳이 저마다 달리 아름다운 줄을 알고 있습니다. 고향땅 운전기사는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 알맞춤하게 아름다움을 맛보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땅 사람’처럼 머물고 살고 일하고 놀며 지낼 수 없으니 겉훑기처럼 몇 가지만 살짝 보고 그치겠지요.

 여행이란 ‘눈을 넓히는 일’이 아닌 ‘좁은 눈을 자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며 내 삶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본다지만, 내가 보았다는 사뭇 다른 모습이란 ‘속내를 알고 보면 내가 찾아간 낯선 땅 참모습이 아닌 몇 가지 겉스친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찾아간 낯선 땅을 속속들이 느긋하고 너그러이 돌아볼 수 있으면 여행이란 더없이 ‘눈을 넓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여행을 한다는 분들은 얼마나 ‘눈을 넓히고자 넉넉하고 느긋하고 따스하게 여행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으려나요. 우리들 여행자는 나라밖에서는 나라밖에서대로 좁은 눈으로 몇 가지만 겉스쳐 보고 있는 한편, 나라안에서는 나라안에서대로 내 삶터와 동네와 이웃을 넉넉하고 속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지요. 우리들한테 고향을 우리 고향으로 여기지 못하면서, 다른 ‘여행지가 고향인 사람들 터전’ 또한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곳인지를 살피지 못하는 쳇바퀴 돌기가 아닐는지요.


..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가슴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전부 가슴에 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바쁘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두고두고 나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줬다 … 아마존의 숲을 걸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 숲속 길을 걸으면서 내가 정말 아마존의 밀림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야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내 여행의 여정들을 생각해 봤다. 여행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후로 가장 가슴에 남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어진 이곳에서 난 너무나 행복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던 그곳에서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114, 141쪽)


 신미식 님은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끊임없이 스스로한테 말합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이런 말 뒤에는 어김없이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 같은 말마디가 이어집니다. 입으로는 대단한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진으로는 대단한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 듯 책을 엮었습니다.


.. 인도의 골목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을 찍을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선택이다 … 여행자들은 사파의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싶어 찾아오지만 정작 이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겠지 … 모른다바 바닷가의 눈부시도록 신비한 오렌지색 하늘과 그 아래 휴식을 취하러 나온 사람들의 찬란한 오후는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이다. 난 이들이 매일 접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늘을 잠시 훔쳐본 이방인일 뿐이다 … 니켈의 주요 생산지이자 뉴칼레도니아의 수도인 누메아는 흔히 작은 프랑스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적인 프랑스의 모습을 닮았다.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프랑스의 니스를 옮겨 놓은 듯한 건물들과 부둣가에 정박돼 있는 화려한 요트들을 구경하는 것도 이곳에서의 즐거움 중 하나다 ..  (214, 251, 323, 355쪽)


 인도 골목길이든 한국 골목길이든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잘 읽거나 깨달을 수 있으나, 토박이 아닌 구경꾼 또한 어느 만큼 읽거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이라고 더 잘 읽거나 깨닫지 않으며, 구경꾼이라고 하나도 못 알아채거나 못 읽지 않습니다. 저마다 살아낸 만큼 읽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려는 몸짓만큼 읽습니다.

 사진책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를 덮을 무렵,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는 대목을 읽고는 무릎을 칩니다. 그렇군요. 신미식 님은 태평양에서 태평양 문화를 느끼는 즐거움 못지않게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고 있었군요. 태평양 한복판에 뜬금없이 프랑스 문화가 있는 까닭을, 프랑스사람이 왜 뜬금없이 태평양 한복판까지 저희 문화를 심어 놓았는지를 읽지는 못하는군요.

 스스로 더 읽으려 하지 않거나 스스로 더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더 아름다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더 바라볼 수 없으며 스스로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한국땅 곳곳에 숱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심어 놓은 집과 건물과 문물’ 또한 즐겁게 맛볼 수 있는 노릇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못박혀 있는 일제강점기 문화를 얼마든지 즐겁게 맛볼 수 있습니다. 신미식 님이 태평양 한복판 ‘프랑스 식민지 자국’을 즐겁게 맛본다고 하는데 토를 달거나 말꼬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하는 분들 마음이 이토록 가난하다면 어떤 사진이 태어날까요. (4343.6.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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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스미다 - 그대에게 띄우는 50장의 그림엽서
민봄내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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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으로 스며야 할 그림읽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9] 민봄내, 《그림에 스미다》


 잘 놀던 아이가 잠이 듭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쉴새없이 뛰고 놀고 노래하고 말하고 하던 아이가 까무룩 잠이 듭니다. 더운 날씨에 물놀이를 시키니 한 시간이 넘도록 물에서 나오지 않고 놀려고 하더니, 물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옷을 입히니 이 더운 날씨에 양말 신겨 달라며 칭얼거리다가 한쪽 발에 꿰어 주니 어느새 큰 베개에 제 몸을 넙죽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아이를 삼십 분 즈음 그대로 둡니다. 삼십 분이 지나고서야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는 살짜이나마 깨어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채 두 시간 반이 넘도록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이맘때는 애 아빠가 비로소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동네마실을 다니든 할 만한 말미인데, 그렇다고 애 아빠 스스로 뭔가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른 새벽에 아이가 깨어나기 앞서 일어나 주섬주섬 이 살림 저 살림 하는 가운데 하루 내내 아이랑 씨름하며 지내다 보니, 아이가 늦은 낮잠을 자는 이때에는 애 아빠도 고단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드러누운 아이 옆에 함께 드러누워 늦은 낮잠을 함께 자고 싶습니다.


.. 나의 아빠 또한 딸에게 처음이고 싶은 게 많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에티켓, 정찬을 먹는 순서, 두 발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셨고, 막걸리 넣은 밀반죽을 아랫목에 묻었다가 찐빵이 돼 가는 과정도 보여주셨다. 그네를 탈 때 뒤로 나뒹굴지 않는 요령과 어린 동생을 돌보는 법, 어른들에게 꼭 인사해야 하는 이유와 동물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울지 않는 뚝심까지. 하지만 공식적인 어른이 될 때까지 난 그것들을 스스로 익혀 왔다고 여겼다 ..  (55쪽)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잠든 아이가 쉬를 했습니다. 날이 더워 낮잠 잘 때에는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더니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천으로 오줌자리를 훔칩니다. 아이한테 새 바지를 입힙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기계빨래를 하는 분들은 빨랫감을 모아서 할 텐데, 손빨래를 하는 사람도 하루치 빨래를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날도 있으나, 으레 그때그때 빨래를 해서 널어 놓습니다. 요사이처럼 더운 날은 일부러 손빨래를 자주 하며 몸을 식힙니다.

 다 한 빨래를 빨랫대에 널어 놓습니다. 아이 오줌으로 젖어 아침에 널어 놓은 담요가 언제쯤 마를까 모르겠습니다. 다 안 마르면 아빠가 안 젖은 자리 쪽으로 해서 바닥에 깔고 자야지요.

 요즈음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는데,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기에 아이 이야기를 나눈다 할 테지만, 하루 내내 아이랑 붙어서 복닥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축구 경기에 하루 내내 마음을 파는 분들이라면 으레 축구 얘기가 터져나올 테고, 정치 소식에 늘 눈길 두는 분들이라면 저절로 정치 얘기가 흘러나올 테지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지난날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책 얘기만 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헌책방 얘기를 신나게 했구나 싶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안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책을 쉼없이 사 읽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바지런히 글을 썼으니까요. 이래도 책 저래도 책 그래도 책인 삶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피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좋아할 책을 찾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반가운 짝을 사귑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몸에 맞는 밥을 먹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흐뭇해 하는 일거리를 붙잡습니다.


.. 내가 아는 노래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다. 장르나 시대상을 몰라도 물의 하류처럼 고여 드는 기분. 귀에 콕 박혀서 버스 노선같이 외워지는 가사들. 꼭 그만큼의 흡입력이면 됐다 ..  (82쪽)


 사진을 읽을 때에, 사진을 꼭 잘 알아야 사진을 잘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느낌에 따라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꾸리는 삶이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지 못한다면,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사진이라든지 ‘널리 이름났다는’ 사진에 매달립니다.

 그림을 읽을 때에, 그림을 잘 안다든지 그림쟁이를 잘 알아야 그림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림읽기란, 그러니까 ‘그림 감상을 하며 감동하기’란 그림 지식을 불리거나 뽐내는 일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을 찾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본다든지 오래도록 마주 바라보면서 마음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뭉클함을 사랑하는 일이 그림읽기입니다.

 민봄내라는 분이 쓴 《그림에 스미다》라는 이야기책 하나는 바로 이렇게 그림을 읽은 삶을 담은 책입니다. 민봄내 님 책 《그림에 스미다》라는 책에서는 민봄내 님 스스로 좋아하고 아끼는 그림을 놓고 ‘기교가 어떻고 유파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다’ 하고 밝히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지식조각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읽기를 하며 우리가 따질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거든요. 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나 스스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띄우면서 즐거웠느냐입니다.


..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건 커다란 이불 홑청 아래 만들어지는 약간의 응달이었다. 그 자그마한 빨래 그림자가 태양의 뒤뜰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한번 앉으면 오래 노는 걸 알고 있던 엄마는, 가끔 빨래줄 장대를 옮겨 달라고 명하셨다 ..  (164쪽)


 책읽기란 그림읽기하고 같습니다. 책 하나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또는 셈틀을 켜고 누리집을 뒤적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을 펼치고 줄거리를 살피며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실천으로 받아들일는’지 ‘머리에 지식으로 채울는’지를 가름합니다.

 책읽기를 마친 뒤 ‘책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그림읽기를 마친 다음 ‘그림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책이나 그림이란, 우리 가슴으로 스며든 책이나 그림 이야기이지, 이 책이나 그림에 얽힌 지식조각이 아닙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어찌저찌하고는 하나도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책 하나가 내 품에 고이 안겼느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림 하나가 내 가슴에 푸근히 기대었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언젠가 열대 나라를 여행하면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그러나 몹시 아끼는) 책을, 베개로 삼은 적이 있다. 지치고 목이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응달진 회랑을 찾아가 책 모서리에 머리를 걸치고 누워 버렸다. 돌아올 때까지 완독은 못했지만, 좋았다. 아끼는 제목과 문구들을 배낭에 지고 걷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신이 났으니까. 읽고 난 후에도 마음 밖에서 겉도는 문장들. 책의 백양백색을 따지다 보면, 늘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책은 세상살이에 있어, 참 괜찮은 친구라는 것 ..  (232쪽)


 민봄내 님 《그림으로 스미다》는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겉멋 들린 그림읽기에서 살짝살짝 홀가분해지는 매무새를 언뜻선뜻 보여줍니다. 지난날에는 갖가지 어렵고 딱딱한 말로 겉치레를 해대는 ‘예술비평’만 있었는데, 민봄내 님 책은 이런 겉치레 딱딱함하고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좋은 그림읽기란 좋은 삶에서 비롯하는 만큼, 잘나거나 못나거나 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 나한테 좋으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좋은 삶인가를 곱씹으면서 그림을 읽고 그림을 말하며 그림을 나누면 됩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은 아직 마무리가 슬기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그림읽기를 겉멋으로 하지 않고 당신 삶자락으로 하고 있는 민봄내 님인데, 민봄내 님이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낸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에서 민봄내 님 넋은 아쉽게도 착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맑은 곳으로 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자 나이 서른이면 세 가지 틀을 완성시키라고 했다. 돈과 일과 사랑. 혹시 혼자여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서른은 ‘나홀로 세상에’라고 말해 주고 싶다(19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떨굽니다. 왜 ‘돈과 일과 사랑’이어야 할는지 안타까워 고개를 떨굽니다. 그나마 ‘사랑’이 있으나 민봄내 님이 밝히는 사랑은 남녀 사이에 맺는 살섞기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숱하고 너른 사랑 가운데 아주 작은 귀퉁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이라고 하여도 도시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하는 일이지, 나 스스로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뭇목숨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돈’은 두말할 까닭이 없겠지요. 더없이 빛나는 나이인 서른에 한낱 돈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 넋인지요.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우리는 ‘돈-일-사랑’이라는 겉발린 허울에서 홀가분할 수 없을까요.

 어설픈 틀에 매이지 않는 그림읽기요, 어줍잖은 틀에 갇히지 않는 그림읽기이며, 어리석은 틀을 내세우지 않는 그림읽기인 《그림에 스미다》이지만, 어설픈 돈과 어줍잖은 일과 어리석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맙니다. 아무쪼록 ‘참-착함-고움(진선미)’을 찾으며 깨닫고 곰삭이는 싱그럽고 푸르디푸른 봄볕으로 빛나는 냇물 한 줄기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랑어린 빗물 같은 《그림에 스미다》로 다시 태어나 주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 《그림에 스미다》(아트북스,2010)
 ├ 글 : 민봄내
 └ 책값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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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생뚱맞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라는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놓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모르는 분일 테지요. 〈우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http://cafe.naver.com/saveuriedu〉이라는 자리가 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이라도 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육〉이라고 하는 배움책


 대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은 꽤 많습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기도 하고, 대학교는 배움터가 아님을 깨달아 그만두기도 합니다. 돈벌이를 일찍부터 하고자 그만두기도 하며, 대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를 다른 곳에서 찾았기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김예슬 님이 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쪽글을 하나 적바림했고, 이 쪽글에 살을 입혀 자그마한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김예슬 님 이야기와 생각이 담긴 책은 참 자그맣고 가벼우며 값이 쌌습니다.

 김예슬 님은 대학교를 그만두기는 했으나, 아직 당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옳고 바르고 착하며 참된 가운데 곱게 깨닫거나 붙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느낌을 버리지 않고 생각을 붙잡아 대학교를 떨칠 수는 있었으나, 아직은 대학교 떨치기만 했을 뿐, 아름다우며 참되고 바른 삶을 붙잡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예슬 님 생각을 담은 책이 꽤 사랑을 받으며 팔립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 여러모로 알려졌기에 사랑받을 만하고 팔릴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생각(주의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삶(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들여다본다면 이런저런 부스러기 생각이 모여 있을 뿐, 부스러기로 있는 생각을 어떻게 왜 누구하고 언제 어디에서 그러모으고자 하는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는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지를 이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일꾼들은 어느 만큼 고개숙이면서 삶을 다부지게 붙잡으며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우리교육〉에 몸담고 있던 그대로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쫓겨난 사람들이 모인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그동안 〈옛 우리교육〉에서는 제대로 담아내거나 나타내지 못했던 삶자락을 차곡차곡 담아내어 배움터 안팎에서 땀흘리고 눈물흘리며 피흘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웃음과 눈물이 되고자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옛 우리교육〉은 아마 ‘(주) 우리교육’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내놓으리라 봅니다. 〈새 우리교육〉을 ‘(주) 우리교육에서 쫓겨난 일꾼’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옷만 새로 갈아입을 뿐, 줄거리와 고갱이와 삶은 예전 그대로는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이 아니라면 어떡하느냐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잡지를 낸다고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글쟁이들이 새로운 글을 써서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새로운 이름이 붙는다고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김예슬 님이 낸 책을 읽으며 ‘이 젊은 넋은 아주 마땅하게도 옳고 바르며 고운 삶을 아직 모를 뿐 아니라, 옳고 바르며 고운 삶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옳고 바르며 고운 삶자락 한 귀퉁이라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새 우리교육〉은 어느 무엇보다도 (1) 참됨(올바름) (2) 착함(사랑과 믿음) (3) 고움(아름다움), 이렇게 세 가지를 제대로 깨닫고 찾으면서 담아내는 잡지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 세 가지를 담아낼 수 있으면 어떠한 잡지이든 괜찮습니다.

 반드시 교육잡지라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교사와 학부모 중심으로 읽힐 잡지여야 하지 않습니다. 교육이란 교사만 하는 일이 아니요, 학부모만 마음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 아닌 누구나 교사여야 하고, 학부모 아닌 누구나 학부모로서 우리 마을 아이들을 살피고 사랑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교사 아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지식이 아닌 삶으로 아이들 앞에서 좋은 스승으로 보여지도록 참다이 살아가야 합니다.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알맹이가 참되고 착하며 고와야 하는데, 올바르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배움터뿐 아니라 책마을까지 슬기로운 넋을 일깨우는 책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새 우리교육〉이라 한다면 《김예슬 선언》처럼 자그맣고 값싸며 가벼운 종이를 쓴 잡지가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진이 들어가도 되고 그림이 들어가도 되지만, 사진과 그림이 한 장조차 없어도 됩니다. 100쪽짜리 잡지여도 좋고 200쪽짜리 잡지여도 좋은데,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은 책이 되기를 꿈꿉니다. 아니면 한손으로 가벼이 들고 다니며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물하기에 좋은 판짜임이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참배움(‘참교육’이 아닌)이라 한다면,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만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모든 몸짓과 넋이 참배움이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자면 무엇을 알고 느끼며 생각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바로, 무엇보다도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참다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뿐 아니라 아이들 누구나 내 힘으로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돈만 벌면 되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교실 안쪽이든 집 안쪽이든 꽃그릇 하나 마련하여 콩을 심어 거둘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서로 바느질을 하고 손빨래를 하며 청소와 밥하기를 제대로 슬기로이 배우고 가르치는 틀이 〈새 우리교육〉에 담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본질)’을 캐내고 밝혀야 비로소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 우리교육〉이라는 잡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얼마 앞서까지 다달이 나왔던 〈옛 우리교육〉을 보면서 ‘이렇게 지식조각만 가득한 잡지라 한다면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잡지’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아이들한테 ‘다양한 직업을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람이 마땅히 찾아서 즐길 일거리를 저마다 제 몸과 마음에 맞도록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제도권 교육 얼거리를 스스로 떨쳐내고 당신 삶자리에서 조용하게 당신 삶부터 옳고 바르고 착하게 돌보신 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지식은 다루지 않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제발 지식이 아닌 땀방울과 굳은살을 다루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다달이 내야 할 까닭이 없는 〈새 우리교육〉입니다. 한 해에 두어 번 내는 ‘무크’가 되더라도, 한 권 한 권 알뜰하고 사랑스러워, 이 잡지를 만드는 일꾼들부터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사람과 땅과 목숨 모두를 사랑하고 믿고 껴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무슨무슨 꼭지가 있어야 하느냐를 생각하기 앞서, 무슨무슨 마음가짐이어야 하느냐를 생각할 〈새 우리교육〉입니다. 잡지는 한 사람이 만들어도 되고, 열 사람이 만들어도 됩니다. 그냥 ‘갱지에 문고판으로 만들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참배움이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요, 껍데기에 눈이 팔리는 사람이 아닌 알맹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끄는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라 하여 허술하게 할 까닭이 없으나, 정작 우리가 살필 모습이란 사람들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 속마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속마음을 살피고 아끼려는 사람이라 한다면, 잡지를 만들 때에도 속알맹이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참되고 착하도록 짜고 엮어야 하는 데에 온마음을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저는 이 잡지를 즐겁게 받아볼 생각인 한편, 저 스스로 내 삶을 곱게 일구려고 애쓰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글이든 사진으로든 갈무리해서 자원봉사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갈 뜻이 아니라 한다면, 저는 〈헌 우리교육〉이든 〈새 우리교육〉이든 그리 생각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 살아가는 데에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란 더없이 빠듯하고 고됩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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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지난 2002년 한국땅에서 벌어진 축구대회 때에는 나 또한 길거리에서 뜀박질을 하며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무렵은 나 스스로 참 철이 없기도 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을 누비면서 뜀박질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 더없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드넓은 찻길에 차가 못 다니도록 가로막고 사람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퍼질러 있을 수 있는 대목이 기뻤다. 비록 ‘운동-사랑놀이-영화’ 세 가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며 바보스레 깎아내린다 하지만, 어쩌면 정치권력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세 가지를 잘 살리면서 우리 나름대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꿈을 꾸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는 가운데 지난날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으며 어설픈가를 뼛속 깊이 느낀다. 모든 사람이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접어들려 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않음을 느끼거나 깨달으면서 바보는 바보일 수밖에 없으니 덧없는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딱 한 번 주어진 아름답고 멋지며 사랑스러운 내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며 야무지게 기쁘게 붙잡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축구대회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도 하며, 아이와 옆지기와 바쁘고 힘겨이 살아가는 살림살이에서 이런 데까지 둘 눈길이란 처음부터 있지 않다. 지난 6월 며칠이더라, 축구대회가 벌어진다고 하는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만석동이었나 어느 골목을 세 식구가 나란히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옆지기가 어느 가게에서 받아 온 전단지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 이거 축구대회 편성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에 비로소 올해 2010년에 축구대회가 또 있음을 알았고,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나란히 축구대회 본선에 올라 있음을 알았다.

 지난밤이겠지. 우리 시간으로 새벽에 북녘나라하고 브라질이 축구 한 판을 치렀다. 이런 새벽에 축구대회를 보자고 일어날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애 아빠와 애 엄마 모두 텔레비전을 키울 마음이 없다. 아무튼 경기를 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으나, 북녘나라 선수들이 1966년 뒤로 처음으로 축구대회 본선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함께 올라 있다는 대목은 놀랍다고 느낀다. 북녘나라가 치른 축구 경기는 뒷소식이 궁금했다. 어떻게 되었나 알아보려고 누리그물을 들여다본다. 북녘나라는 브라질한테 1대 2로 졌단다. 그런데 이런 소식보다 ‘북녘 나라노래가 흐를 때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렇구나. 눈물이구나. 그래. 눈물이지.

 엊저녁, 수원 칠보산 기슭에 자리한 칠보산자유학교라는 곳 선생님들하고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느즈막하게 막차꼬리를 붙잡으며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 하나를 읽었다. 이날 수원 팔달문 앞 헌책방 〈오복서점〉에서 찾아낸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라는 책을.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일본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소설쟁이가 되었다는데, 한때 이분 책이 우리 말로 곧잘 옮겨지곤 했으나, 이제는 이분 책은 모조리 판이 끊어졌다. 어느 한 가지조차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헌책방에서도 만나기 힘든 이분 책인데, 다문 한 가지라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터에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만났다.

 이 책은 일본사람도 조선사람도 한국사람도 재일조선인도 재일한국인도 아닌 한 사람이 쓴 소설이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모른 채 살았을 뿐 아니라 아무도 이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당신 삶을 소설에 담으려고 당신 집안 뿌리를 알아보다가 아주 우연하게 할머니가 평안도사람임을 알았다지.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아니 그냥 일본사람이었을, 이러면서 아무런 걱정이나 푸대접을 받을 일조차 없으며, 당신 몸에 한겨레 피가 1/4이 흐르는 줄 알았다 하더라도 당신 이름이며 국적이며 그냥 ‘일본사람’인데,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소설쓰기를 붙잡다가 뒤늦게 알아 버리고야 만 당신 뿌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짊어졌다. 이 짐을 지다가 그만 고꾸라졌다. 몹시 꽃과 같은 나이에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른여섯,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나이에 눈을 감은 사기사와 메구무 님인데, 사람들은 서른여섯이면 꽃과 같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려나. 열둘은 어린 싹이고 스물넷은 푸른 잎이며 서른여섯이 꽃다운 아름다움이고 마흔여덟에 무르익다가는 예순에 씨앗을 남기고 일흔둘에 우람한 나무가 되다가는 여든넷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아흔여섯에 마지막 잎새를 피우는 줄을 살피는 사람은 없으려나.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를 누리그물을 들여다보며 만나는데, 이이 눈물에서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홀로 조용히 흘렸을 눈물이 떠올랐다. 이러면서 나 또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모든 운동경기는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란 운동이 아니다. 이기려고 바둥거리는 운동경기란 전쟁하고 똑같으며,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엉터리 삶하고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우리 한삶을 꾸린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즐거움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삶을 꾸린다. 한삶을 꾸리는 가운데 운동경기를 치르는 선수들 또한 ‘이기는’ 데에 큰뜻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운동선수한테는 꿈과 같다는 무대에 서는 일이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니까, 이러한 무대에 서는 날까지 피와 눈물을 바칠 수 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이라면 당신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릴 테고, 교사라면 당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북받치는 눈물을 흘릴 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신부님이라면 거짓 신부님이요, 눈물을 쏟지 않는 교사라면 거짓 교사라고 느낀다. 맨 처음 들어서는 때에만 눈물이 솟을 수 없다. 맨 처음뿐 아니라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눈물은 샘솟으며, 마지막이 되든 언제가 되든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입을 맞출 때에 맨 처음에만 기쁘겠는가.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기쁘며 언제라도 기쁘다. 노상 눈물이 흐르고, 한결같이 웃음을 머금는다.

 축구를 하는 정대세 선수가 흘리는 눈물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구지레하게 덧붙이거나 덧달 이야기란 한 가지도 없다. 눈물은 그저 눈물이다. 정대세 선수는 가없는 북받침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름다우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고, 눈물을 흘리는 몸뚱이로 온누리를 부대끼는 사람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4343.6.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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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3   좋아요 0 | URL
정대세 선수의 눈물을 보면서 저는 외국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머무는 타국적인 분들 생각도 나구요.

파란놀 2010-06-16 11:1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쓸 마음은 없었는데, 문득 궁금해서 '조선일보는 어떤 기사를 썼을까?' 하고 들여다보다가 더없이 슬픈 마음이 들었답니다. 왜 그렇게들 '비틀기'를 하려고 안달일까요... 불쌍한 사람들...

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7   좋아요 0 | URL
참 시사인에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사는 곳을 옮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럽고 한편으로는 아쉽고 그랬습니다.

파란놀 2010-06-16 11:46   좋아요 0 | URL
인터뷰는 아니고 전화로 몇 가지 물어 본 다음에 나온 기사예요 ^^;;;
사진도 지난해에 <책방 이음>에서 사진잔치 할 때에 찍었던 녀석을
다시 실었구요 ^^;;;;;

그래도, 제 모자란 책에 눈길을 보내 주는 분들은 누구나 고맙답니다~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인천골목 사진 찍기 많이 어렵지만,
식구들이 튼튼하게 지낼 수 있어 좋답니다~
 


 엉터리 사진, 엉터리 책, 엉터리 말


 엉터리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다. 이들이 찍는 사진을 본다든지 이들이 읊는 사진말을 듣다 보면 참으로 갑갑하며 슬프다. 아니, 이들이 더없이 딱하고 안쓰럽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길을 걸어가면서 엉터리 사진을 찍거나 엉터리 사진을 말하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헤아리지 못하는데다가, 바로잡지 못한다. 이리하여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는 불쌍할 뿐 아니라 슬프다.

 나는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들을 으레 부대끼거나 마주해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길을 걷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옆에서 보기에 뻔히 어설플 뿐 아니라 볼썽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와 같은 길을 걸어가겠는가. 사진을 삶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며, 사진에 깃든 빛과 그림자를 읽을 줄 모르고, 사진으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백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백 장에 이르는 사진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사진을 내 온힘을 바쳐 찍을 노릇이요, 사진을 밝히는 글을 내 온마음을 들여 적바림할 노릇이다.

 엉터리 책을 쓰거나 내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다. 게다가 많다. 이들이 쓴 책이나 내놓은 책을 살핀다든지 이들이 떠벌이는 광고 글월을 살피다 보면 속이 메스꺼울 뿐 아니라 참말 어이없으며 괴롭다. 아니, 이들이 가없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이름놀이를 하면서 엉터리 책을 퍼뜨리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는데다가, 거듭나지 못한다. 이러니까 이들 엉터리 책쟁이는 우악스러울 뿐 아니라 무시무시하다.

 나는 이들 엉터리 책쟁이들을 늘 만나거나 쳐다보아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삶을 꾸리지 않아야겠다고 되뇐다. 곁에서 바라보면 어엿하게 어리석을 뿐 아니라 볼꼴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책쟁이와 같은 삶을 꾸려야 하겠는가. 책을 삶으로 녹일 줄 모르며, 책에 담긴 알맹이란 밥처럼 날마다 즐겨먹으며 내 아름다운 일을 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줄 모르고, 책으로 따스함과 넉넉함을 펼치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즈믄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즈믄 권에 이르는 책을 건네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이 펄떡펄떡 뛰도록 하는 책을 온땀 들여 쓸 노릇이요, 책을 밝히는 글을 내 온피를 쏟아 적어내릴 노릇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죄 엉터리로 살아간다. 죄 엉터리로 학교를 다니고 죄 엉터리로 밥을 먹으며 죄 엉터리로 텔레비전에 파묻혀 있다. 죄 엉터리 가득한 신문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죄 엉터리 아파트에서 엉터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하나 자가용한테서 홀가분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두 다리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돈이 아닌 사랑을 믿고, 이름값이 아닌 믿음을 섬기며, 주먹힘이 아닌 꿈을 건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삶이 엉터리이니 넋이 엉터리이다. 넋이 엉터리인데 말이 엉터리 아닐 수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면 넋이 아름답고, 넋이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말이 아름답다.

 그지없이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를 쉽고 마땅히 새기거나 품는 사람이란 왜 이렇게 드물까. 지저분한 온누리이니까 예방접종을 다 맞추어야 하고, 더러운 이 땅이니까 농약과 비료 펑펑 써대야 하며, 먹고살기 팍팍한 이 나라이니까 돈벌이만 하면 될까.

 아무래도 이모저모 핑계거리가 있는 우리들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일 저 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든지 학교를 다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서 얼마나 고단한 하루하루일까. 그런데 이 모두는 집어치울 핑계거리이고, 우리가 돌아볼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다. 누구한테든 저마다 주어진 삶은 딱 한 번뿐이요, 이 한 번 주어진 삶은 다른 어떤 사람 삶하고 견줄 수 없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즐거운 나날이다. 남하고 나를 견줄 까닭이 없이 나는 나대로 내가 걷는 이 길을 가장 신나게 걸어가면 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거움이 있고, 가멸찬 살림일 때에는 가멸찬 살림인 대로 즐거움이 있다. 두 다리가 튼튼하여 힘차게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힘차게 걷는 길에서 즐거움을 맛보고, 두 다리가 아파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라면 바퀴걸상을 탄다든지 다른 사람 힘을 빌어 다닌다든지 하며 또다른 즐거움을 맛본다. 밥을 해서 스스로 먹어도 즐겁고, 밥을 차려 먹여도 즐거우며, 밥을 차려 준 분한테서 얻어먹어도 즐겁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엉터리 사진을 찍고 엉터리 책을 쓰거나 읽으며 엉터리 말을 일삼는 까닭은 오로지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며 즐겁고 소담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자꾸자꾸 엉터리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싶다.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내 넋을 사랑하고 내 말을 사랑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랑이 안 묻어날 수 있겠는가.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쓴 책에 사랑이 안 담길 수 있겠는가.

 돈에 파묻힌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돈내음이 폴폴 난다. 권력을 좇는 사람이 쓰는 책에는 권력내음이 구리게 난다.

 꿈을 품을 노릇이지 검은 속셈을 키울 노릇이 아니다. 꿈을 이루고자 땀을 흘릴 노릇이지 돈을 벌고자 땀을 쏟을 노릇이 아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꿈을 살피고, 책으로 이루는 꿈을 곱씹으며, 내 땀을 알뜰살뜰 곱게 들이며 이루는 꿈을 찾을 노릇이다. 성적표는 숫자가 아닌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데, 참말 사랑으로 성적표를 쓰고자 하는 스승이라면 아예 성적표란 집어치우고 아이들한테 편지를 써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쓰는’ 성적표라고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 아니란 얘기다.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란 ‘사랑으로 쓰는’ ‘편지’ 한 가지이다.

 옳게 살고 착하게 살며 곱게 살면 된다. 옳은 마음을 깨닫고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고운 마음을 보듬으면 된다. 옳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즐기며 고운 일을 나누면 된다. 옳은 사진을 찍고 착한 사진을 나누며 고운 사진을 펼치면 된다. 밑바탕을 차리고 밑틀을 세우며 밑돌을 닦으면 된다. 갈래는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다 다르게 나아가면 된다. 맨 먼저 밑자리를 슬기롭게 뿌리내리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면 된다. (4343.6.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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