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지음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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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가장 즐거운 멋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6] 김윤기, 《내 멋대로 사진찍기》


 우리 집에 디지털사진기가 두 대가 되었습니다. 형한테서 얻은 돈을 보태어 가까스로 한 대를 장만하여 쓰고 있었는데, 이 디지털사진기는 고작 한 해 반을 썼을 뿐이지만 부속품이 낡고 닳아 사진기값 1/5에 이르는 돈을 치르며 고치고 한 대를 새로 장만합니다. 사진기 수리점에서는 ‘사막에 다녀오셨어요?’ 하고 묻더군요. 오로지 인천골목길하고 헌책방하고 아이 세 가지만을 사진으로 담았으니 참 어이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퍽 어릴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습니다. 백일이 지난 뒤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아빠가 늘 사진찍기를 하고 있으니, 사진기가 바닥에 놓여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사진기를 만지작거렸고, 단추를 하나하나 눌러 보면서 ‘설명서 한 번 안 보고’ 사진기 다루는 솜씨를 웬만큼 익혔습니다. 이제 고작 스물석 달짜리 아이인데, 혼자서 제법 씩씩하게 사진기를 들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든지, 사진을 주루룩 넘긴다든지, 옆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을 꽤 잘합니다.

 디지털사진기 한 대만 있고, 필름사진기조차 망가져서 못 쓰고 있는 동안에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따로 사진으로 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하면 못미더워 합니다. 저러다 비싼 사진기 떨어뜨려 깨뜨리지 않느냐며 걱정합니다. 아이는 백일 무렵부터 이제까지 아빠 사진기를 한 번도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없으며, 늘 살몃살몃 다루어 줍니다. 어린 나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사진기를 갖고 놀았으니 스물석 달을 살았으면서 채 돌이 되기 앞서부터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어버이가 농사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호미질 가래질 쟁기질을 옆에서 지켜보며 농사일을 익힐밖에 없고, 어버이가 살림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밥하기 빨래하기 씻고 닦기 같은 일을 늘 바라보며 익힐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삶으로 헤아리고 삶으로 배우며 삶으로 스며듭니다.

 태국에서 짐차를 모는 일을 하는 김윤기라는 분은 사진찍기를 무척 즐긴다고 합니다. 어디를 다니든 사진기를 챙긴다고 하는군요. 당신은 스스로 ‘프로’ 아닌 ‘아마추어’라 얘기하고,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면 사진쟁이라고 밝힙니다. 당신은 《내 멋대로 사진찍기》라는 책까지 하나 써 냈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으레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인데,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낸 김윤기 님은 머리말에서 “사진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프로가 아마추어를 가르치는 그런 식이었다 … 사람이 다르면 사진도 다르고, 그 방법도 다를 수밖엔 없다. 길을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7∼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윤기 님 말마따나 사람이 다르면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에 사진이 다릅니다. 사진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더 낫거나 모자란 사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만큼 제 사진을 사랑하기 마련이요, 저마다 제 삶을 좋아하는 만큼 제 사진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손쉽고 따스하며 넉넉한 말씨로 들려줍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다룰 때에는 언제나 살가우며 가슴이 뭉클하고 신나는 보람 하나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사진이란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삶을 꾸릴 때에 태어납니다. 누가 좋다고 말하기 앞서 나 스스로 나부터 좋다고 느끼는 사진입니다. 누가 엉성하다고 따지기 앞서 내가 먼저 온몸으로 엉성하다고 느끼며 뉘우치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멋이란 내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삶을 일구는 멋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맛이란 내 깜냥껏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며 어깨동무하는 맛입니다. 사진찍기는 온통 땀내 나는 삶이요, 사진읽기는 속속들이 살가우며 따스한 삶입니다.

 “완성에 이르지 못한 예술 사진처럼 쓸데없는 사진이 또 있을까? 무엇을 전하려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그러나 주로 실패하는, 그런 사진을 찍는 데 필름을 마구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34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윤기 님은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필름을 알뜰히 아낀다고 밝힙니다. 식구들하고 먹고사는 가운데 사진찍기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좋아할 만하거나 더욱 사랑할 만한 사진이 나오기까지 더 생각하고 살피며 부대낀 다음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싶답니다. 사진기 단추를 더 많이 눌러 본다고 해서 당신 마음에 더 들거나 당신이나 둘레 사람이 흐뭇하게 여길 만한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필름을 아껴 쓰는 것,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아마추어의 사진이란 절제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58쪽).” 하고 덧붙이는데, 곰곰이 따지면, 프로 사진쟁이이든 아마추어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어떤 매무새로 어떻게 담으려는가’에 마음을 쏟을 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크게 헤아려야지, 어떻게 찍든 잘 나오는 사진 하나 얻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부질없거든요. 우리한테는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덧없거든요. 우리한테는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쓸모없거든요.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팔 생각입니까.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을 대문에 걸어 놓고 뽐내려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으려 애쓴다(83쪽).”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며 받아들이고자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두 발을 내디딘 이 땅에서 우리 아름다운 삶을 즐기고자 사진을 찍고 일거리를 찾고 놀이감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하고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아름다운 삶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는 아름다움을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윤기 님 책 《내 멋대로 사진찍기》는 김윤기 님이 살아가는 멋이랑 다른 이름난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멋이랑 똑같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슷하거나 닮은 구석 하나조차 없는데, 누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우거나 누가 누구 사진 틀거리를 배우거나 할 수 없음을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강좌이든 사진학교이든 모조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론이든 사진실기이든 하나같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들었으면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붓을 들었으면 내 삶을 고즈넉히 살피면서 그림 하나 그리면 됩니다. 연필을 들었으면 내 삶을 맑고 밝게 껴안으면서 글 하나 적바림하면 됩니다. 춤과 노래와 몸짓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멋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멋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느끼며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삶 하나로 모두어지며 태어납니다. 사진은 누구나 ‘내 멋대로’ 찍고 ‘내 삶대로’ 좋아하며 즐기는 가운데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4343.7.11.해.ㅎㄲㅅㄱ)


― 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글·사진,들녘 펴냄,2004.2.2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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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 캐기


 집 앞에 있는 텃밭을 일구려고 돌을 고르는데 삽으로 땅을 파면 팔수록 비닐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온다. 줄줄이사탕처럼 비닐쓰레기가 잇달아 나온다. 꽤 예전에 이 땅에서 밭농사를 하던 분이 비닐농사를 하면서 파묻었다고 하는데, 열 몇 해가 지난 예전 비닐쓰레기들은 썩을 생각을 하지 않고 꽤 질기기까지 하다. 이러니, 이런 비닐쓰레기를 시골사람은 불에 태워서 없애려고 할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집에서 나오는 비닐은 어떠한가. 도시사람들 살림집 비닐봉지이며 비닐로 된 껍데기이며 모두 어디로 갈까. 도시에서는 쓰레기를 나누어서 버리고 주마다 일꾼들이 나누어서 가져간다고 하지만, 이 쓰레기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고 있을까.

 우리 집 식구들은 만화책을 몹시 좋아하지만, 만화책을 싸고 있는 비닐은 끔찍하게 여긴다. 만화책을 구경하는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 모두 책을 마구 다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닐을 덮어씌운다는데, 이렇게 덮어씌운 비닐은 모두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아이들 손길을 타서 책이 다칠 걱정을 하기 앞서, 아이들이 책을 곱고 올바르며 얌전하게 만지고 살필 수 있도록 가르치며 이끌 노릇이 아닌가.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책 하나를 만들 때마다 ‘쓰레기 비닐 껍데기’를 엄청나게 쏟아내고 있음을 생각하고는 있을까.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사진책이든 비닐은 제발 안 씌우면 좋겠다. 비닐 씌울 돈으로 ‘구경책’ 하나를 책방에 선물로 줘서, 이 구경책은 마음껏 보는 가운데 돈을 치르고 살 책은 깨끗하게 집어들어 장만하도록 이끌어 주면 더없이 좋겠다. (4343.7.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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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리고 삶
최건수 / 시공사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모두 즐길 노릇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3] 최건수, 《사진 그리고 삶》


- 책이름 : 사진 그리고 삶
- 글·엮음 : 최건수
- 펴낸곳 : 시공아트 (1999.3.2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언제까지 만들고 있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은 ‘찍는’ 일만으로 모두 담아내어 보여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로서는, ‘찍는’ 틀을 벗어던지며 ‘만드는’ 쪽으로 접어들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만화쟁이와 그림쟁이들은 종이에 대고 펜이나 붓으로 그림을 안 그리곤 합니다. 셈틀을 켜 놓고 셈틀에서 펜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화책이나 그림책에서 ‘종이 그림’을 만나기란 퍽 힘듭니다. 또한, 종이 그림을 그렸다 할지라도 다시 스캔을 뜨느니 뭐를 하느니 하면서 훨씬 번거로울 뿐 아니라, 종이에 그렸던 그림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까지 퍽 많은 손길과 손품과 돈까지 들여야 합니다.

 만화쟁이와 그림쟁이가 셈틀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진쟁이는 필름사진 아닌 디지털사진을 찍는다 할 만합니다. 요즈음은 필름 원판이 아닌 디지털 파일로 일을 하거나 사진을 마련하거나 책을 꾸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디지털 파일로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나중 일이 수월합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따로 현상을 하고 스캐너를 돌리고 빛느낌을 살피고 하면서 손이 많이 가고 오랫동안 눈 빠지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디지털사진은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 빛느낌을 다 맞추어 놓고 찍으면 됩니다. 셈틀을 켜고 사진 풀그림을 돌려 이래저래 손질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빨리빨리 온누리’에 걸맞는 문화나 예술이 디지털사진이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사진쟁이들이 필름값 걱정을 덜며 어느 만큼 홀가분하게 즐기는 디지털사진이라 여길 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사진이라고 반드시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필름사진은 필름값이 들지만, 디지털사진은 ‘셈틀 저장장치’가 있어야 하거든요. 필름값도 필름값이지만, 디지털사진 파일은 부피가 작지 않기 때문에 이 파일을 건사할 저장장치가 꽤 커야 할 뿐더러, 한 번 모셔 놓은 저장장치가 언제까지나 알뜰히 지켜질 일은 없으니, 더 큰 부피인 저장장치를 틈틈이 따로 마련하여 겹으로 건사해 놓아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돈이 많이 깨질밖에 없는 사진입니다.


..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 사진에 대한 고정된 틀이 몸에 밴 경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잃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교육과정의 경직성이 개개인의 개성을 묻혀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우리가 외국어를 해독할 때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시각 언어의 해독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문의 영역과는 달리 예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열린 마음이지요 ..  (14, 18쪽/구본창)


 우리 집식구는 열흘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을 떠나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들처럼 돈이 있어 집 사고 땅 사고 하며 들어온 시골집은 아닙니다. 돈이며 집이며 땅이며 하나 없는 주제에 비어 있는 집자리 하나 얻어 살림살이를 옮겼습니다. 여러 날에 걸쳐 손바닥만 한 땅뙈기 돌을 고르고 비닐을 걷어내어 밭으로 일구었고, 이 밭에 처음으로 씨앗을 심어 기릅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찍기는 거의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담아 온 사진은 ‘헌책방’과 ‘인천골목길’인데, 이 두 가지하고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시골살림을 꾸리고 있으니까요.

 새 삶터에서는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사진감을 놓거나 잊지 않은 채 틈틈이 찾아다니며 내 사진감을 함께 일굴 노릇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시골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좋으며 반가운 사진감을 하나 느껴 붙잡고, 지난날부터 꾸준히 이어온 사진감은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여태껏 나 스스로 걸어온 사진길이 얼마나 고왔거나 좋았거나 올바랐는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사진길은 나 스스로 바라지 않았어도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자꾸 스러지거나 잊혀지거나 없어지는’ 모습을 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 사진감을 저 스스로 즐기고 있으면서도 ‘오늘 찍은 사진을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찍을 수 없겠지’ 하고 느꼈습니다. 따로 조바심을 내려 하지 않았으나, 찍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며 제대로 못 담은 사진이라고 느낄 때에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과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사진감을 왜 자꾸 엉터리로 찍느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나무라면서 지냈습니다.

 시골집 한 구석에서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보다가 밥을 하다가 파리를 잡다가 빨래를 하다가 등허리를 두들기며 한동안 드러누웠다가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는 나날이 길면서도 짧아, 사진찍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그나마 시골집으로 온 뒤부터는 아이 사진조차 얼마 못 찍어 주고 있다고.


.. 그러나 몇 달 동안은 거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밤거리에서 방황하고 술집 종업원들과 사귀면서 이태원 분위기를 몸으로 익혔죠. 그러다가 한 업체와 연결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비로소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한 3년 찍었어요 … 처음 이태원에 들어갔을 때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를 든다면 서양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짬뽕 문화의 현장, 속 빈 여대생들이 영어라도 한 마디 배워 볼까 배회하는 곳 등. 그러나 몇 년을 이태원에 출입하고, 유흥가 종업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들도 평범한 인간들이었고, 도리어 기구한 삶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고발성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과 동격으로 놓고 담담히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스트레이트냐 메이킹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진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  (28, 34쪽/김남진)


 한숨을 돌리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부터 얼마 앞서까지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서만 지냈습니다. 시골살림을 꾸리면서도 도시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돌아보면, 사진쟁이뿐 아니라 그림쟁이도 매한가지요, 만화쟁이나 여느 글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교사나 교수들 모두 도시사람일 뿐입니다. 전문직이라는 의사나 변호사나 정치꾼 모두 도시사람입니다. 사는 곳은 시골일지라도 도시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는 시골에서 조용히 곱씹습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하자면 아무래도 도시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즐길 사람은 모조리 도시에만 있으니,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사람이어야 하고 도시 터전에 발맞추며 지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잔치를 해도 도시에서 하고, 사진책이 나와도 도시에서 나오며, 사진을 누군가 사들인다 하여도 도시사람이 사들입니다.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잔치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팔려고 내놓는 사진책을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사진 작품을 장만해서 당신 집이나 논가나 밭가에 세우거나 걸어 놓는 모습 또한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삶이란, 아니 오늘 우리 사진쟁이 삶이란 도시에 뿌리내리고 도시에 머물며 도시만 헤아리는 삶이로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만 주고받을 사진이요 도시에서 태어나는 사진인 가운데 도시에서 자리매기는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삶과 넋과 열매 모두 온통 도시에 쏠려 있는 사진문화이고 사진예술입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다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산사람이나 들사람이나 바다사람 눈높이와 삶결로 사진을 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승일 님이 이룬 《굴피집》(1997) 하나쯤 있다고 할까요.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지내는 분들이 찍는 시골살림 사진조차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풍경으로 담습니다.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삶’으로 껴안으며 ‘사진’으로 빚어내는 모습은 아직 못 보고 있습니다. 산일이든 들일이든 바다일이든,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하는 일을 담을 때에도 ‘풍경’에서 헤매거나, 뭔가 다르다면 그나마 ‘기록’이라는 테두리에 머물 뿐, ‘삶’이라는 자리를 찾아나서지 못합니다. 산사람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헤아리거나, 들사람과 바다사람은 무엇을 어느 곳에서 어떠한 눈썰미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날 한국땅 사진쟁이들 사진이란 ‘만듦사진’뿐입니다. 일하는 골방에서 만드는 사진이든, 셈틀을 주무르면서 만드는 사진이든, 인화액과 인화지를 만지작거리며 만드는 사진이든 만듦사진입니다. 더욱이,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며 담는 사진 또한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에 머물고 맙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고 풍경만 잡아채니까, 이 또한 ‘스냅’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눈높이로 얼개와 이야기를 억지로 만드는’ 사진이 되어 버립니다. 만듦 삶이고 만듦 넋이며 만듦 사진입니다. 




 (2) ‘한국 사진작가’는 누구인가


 사진찍기와 사진비평과 사진전시와 대학교수 일을 다 함께 한다는 최건수 님이 쓰고 엮은 책 《사진 그리고 삶》을 읽습니다. 이 책 《사진 그리고 삶》에는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최건수 님이 사진쟁이 스물다섯 사람을 차례차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통으로 실어 놓고 있습니다.


.. 요사이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뭐랄까, 학연이나 인맥으로부터 자유가 결국 작업의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들어요 …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소재들을 새롭게 접근하여 사진을 풀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새롭게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  (57, 59쪽/민병헌)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 최건수 님은 틀림없이 ‘한국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어떻게 ‘한국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사진작가라 하는 사람이 이들 스물다섯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을 드는 책을 내놓는다고 할 때에,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맨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건수 님은 2004년에 《사진 속으로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사진 그리고 삶》은 판이 끊어졌고, 《사진 속으로의 여행》은 품절되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구본창, 김남진, 김장섭, 민병헌, 이상일, 이정진, 이주용, 임양환, 조남붕, 최광호, 최병관, 황경희, 김대수, 김재경, 김석종, 김석중, 박용세, 신경철, 신미혜, 신현숙, 신혜경, 안승환, 정동석, 정주하, 한세준” 님을 다룹니다. 두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강상훈, 강용석, 고명근, 권순평, 김기찬, 김우영, 김정수, 박홍천, 배병우, 성남훈, 양성철, 오상조, 오형근, 우종일, 육명심, 이갑철, 이완교, 임영균, 전흥수, 정창기, 주명덕, 차용부, 한정식, 홍순태, 황규태” 님을 다룹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낱낱이 살펴보면 이들을 두고 ‘한국 사진쟁이’라 일컫는 일이 엉성하거나 잘못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진쟁이를 다룰 수 없고 모든 사진밭을 두루 살필 수 없으며 모든 사진삶을 펼쳐 보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몇몇 분을 빼놓고는 사진을 만드는 분들입니다. 사진으로 이야기 하나 엮으려고 하는 분들은 몇 사람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쟁이 온삶을 실어내는 사람은 쉰 꼭지에 이르는 만나보기 이야기 가운데 몇 되지 않습니다.


.. 대학의 사진과에 입학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이미 예술가가 되어 버리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증거지요 … 결국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양분으로부터 나오지 못할 때, 한 사람의 올곧은 사진가가 아닌 모방꾼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 또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쉽게 예술가라는 탈을 뒤집어쓰기 위해서라도 메이킹으로 선회하죠 ..  (73쪽/이상일)


 한국에서 사진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한국 사진작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말이나 ‘사진작가’라는 말은 더없이 부질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쟁이들 발자국을 더듬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분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사진쟁이는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찍은 손품에 따라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룬 사진은 다른 이들보다 한결 돋보이거나 빼어나다 여길 수 있습니다. 주류라 하건 비주류라 하건 이들 ‘가르침이 + 찍새’인 분들이 숱한 ‘아마추어’ 사진쟁이들한테 피와 살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 이 책은 값있고 뜻있고 멋있다 할 만합니다.


..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의 사진 속에 그들의 삶이 스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깊이 있는 사진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삶의 즐거움입니다 ..  (106쪽/이주용)


 만듦사진이라고 해서 사진을 모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을 한다고 해서 사진하고 동떨어진 길을 걷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이든 삶사진이든 사진을 할 수 있으면 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최건수 님이 만나본 최광호 님 말씀마따나 ‘사진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되는 한편,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최건수 님 사진책에 실린 쉰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마 두 갈래 가운데 하나에 드는 분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들이 돈이나 이름을 바라며 사진을 찍지는 않을 터이나, 거의 모두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사진하고 삶이 이어지는 고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잘 모겠습니다.

 만듦사진 또한 똑같이 사진이요, 만듦사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한테나 삶이 있으니 《사진 그리고 삶》이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몇몇 ‘찍는 사진’을 하는 사람을 끼워넣는 일은 달가워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스물다섯 사람 + 스물다섯 사람을 몽땅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서 ‘만듦사진에도 어김없이 삶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고 나아가면서 더욱 깊은 사진말을 들려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녀왔거나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하거나 사진을 가르치는 이들만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식구들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골목 안 풍경》을 이룬 김기찬 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사진밭에서는 ‘당신은 아마추어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여느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어우러지는 삶을 찍는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가 얼마 없기는 합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진작가이면서 사진비평가이고 사진전시자인 가운데 대학교수이기까지 한 최건수 님이라 한다면, 당신만 한 자리에서 써 내려갈 《사진 그리고 삶》이란 이러한 높낮이에서 그칠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진은 무엇이며 삶은 또 무엇인가를 파헤치면서 건드리는 책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한테서 당신들한테 사진과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뿐 아니라 최건수 님 스스로 생각하는 사진과 삶을 또렷이 밝히며 더욱 깊고 너른 이야기를 나누어 《사진 그리고 삶》에 담아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 미국에서는 사진으로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진이 다양한 것은 사진을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사진은 무엇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진을 가지고 즐기지도 못합니다.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곁눈질하면서 사진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 사진의 특성은 이미지 전달이지요. 기계적 특성에 너무 매달리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사진은 보편적 아름다움이나 결정적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진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죠 ..  (157, 164쪽/최광호)


 아쉬우나마, 숱한 사진쟁이들은 사진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을 이 도톰한 책에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최건수 님은 이 대목에서 더 깊고 그윽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사진이라 한다면, “무엇을 느끼셔서 무엇을 담았습니까?” 하고 물을 줄 알아야 하고, “느낀 그 무엇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하고 다시금 물을 줄 알아야 하며, “사진으로서 그 무엇을 느끼는 일이란 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고 거듭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 속에 있는 자기가 느낀 것을 보려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같은 물음을 잇는다든지, 이 물음을 사진쟁이들이 하기 앞서 최건수 님 스스로 “아, 그래요. 사진이란 이러구저러구이며 삶이란 이바구저바구로군요.” 하는 사진말을 길어내야지 싶습니다.


..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의 어린 유치원생들은 해를 그릴 때도 모두 빨간색으로 그리도록 교육받지 않습니다. 파란 해를 그린 아이도 있고, 검정 해를 그린 아이들도 있죠. 선생님들은 그 부분을 인정하고 북돋아 주지요. 이렇게 열린 사고로 훈련받은 아이들은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요 ..  (122쪽/임영환)


 어제 집에서 아이랑 애 엄마랑 영화 〈로빙화〉를 또 한 번 보았습니다. 어제는 “아명, 왜 해를 파랗게 칠하지?” “해가 너무 뜨거우면 아빠가 일하시기 힘드니까요.”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마침 요 며칠 동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텃밭에서 돌 고르기를 한 탓인지 모릅니다. 해를 발갛게 그릴 수 있으나 노랗게 그릴 수 있고, 또 파랗게 그리거나 까맣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얗게 그린다거나 잇빛으로 그릴 수 있겠지요. 푸르게 그리거나 하늘빛에 녹아들도록 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때이든 해를 그리는 사람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제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누리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곱씹습니다. ‘찍는’ 사진이 되든 ‘만드는’ 사진이 되든, 오늘 이 땅 이 나라 사진쟁이라 하는 분들은 참으로 당신들 나름대로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는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사진기를 쥐고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사진작품을 선보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이나 잘 팔리는 사진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에 얽매인 채, 정작 ‘내 사진 즐기기’하고는 그예 멀어지거나 등을 돌리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엮는 분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걱정은 이어집니다. 참말 ‘좋은 사진을 좋게 즐기는 마음을 담는 사진읽기’를 펼치고 있으신지, 강단에 선 지식인으로서 ‘말 만들기’를 하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진찍기도 즐기는 일이요, 사진읽기도 즐기는 일입니다. 즐길 수 없다면 사진찍기가 아니고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아니, 즐기지 못한다면 삶이 아닙니다. 즐기지 못하면서 사진삶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4343.7.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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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 전국편 - 대한민국 자전거 여행지 52 주말이 기다려지는 여행
김병훈 지음 / 터치아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자전거로 다니는 시골길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1] 김병훈,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


 시골 살림집에서 지내면서 면내나 읍내로 나가자면 시골버스를 타야 합니다. 우리 식구는 자동차를 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골 살림집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가자면 아이를 안거나 업고 삼십 분 즈음 걸어야 합니다. 시골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들어오고,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곤 합니다.

 도시 살림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웬만한 볼일을 볼 곳은 두 다리로 걸어갈 만한 데에 있었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어디로든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한테 자가용이 없어서 고단하거나 힘겹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정 다리가 아프거나 아이가 힘들어 하면 택시를 타면 그만입니다. 도시 택시삯은 참 쌉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살아가며 써야 할 물건이 있어 장만해야 할 때에는 애 아빠가 자전거를 몰고 면내나 읍내를 다녀와야 합니다. 도시 살림집에서 살아가며 써야 할 물건이 있을 때에는 으레 애 아빠나 애 엄마 아무나 걸어서 다녀오면 되었고, 때로는 세 식구가 함께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동안 아이와 함께 움직이거나 아이한테 바깥바람을 쐬도록 하느라 자전거는 거의 탈 수 없었습니다. 아직 많이 어린 아이를 자전거에 태울 수도 없으나, 아이만 집에 놓고 아빠 혼자 재미나게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시골로 살림집을 옮긴 뒤로는 가까운 면내나 읍내 모두 십사오 킬로미터 거리에 있기에 자전거로 오가지 않는다면 온 하루를 다 써야 합니다. 시골 살림집에서는 뜻하지 않게 자전거를 탈 일이 자주 생깁니다. 더욱이 짧은 길이 아닌 제법 긴 길을 달릴 일이 생깁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을 장만할 돈이라든지 자가용을 굴릴 돈이 없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하거나 굴릴 만한 돈이 있어도 자가용을 장만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애 아빠는 그동안 타고다닌 자전거에 아기 걸상을 하나 붙여야 하고, 애 엄마는 다시 자전거 타기를 익히는 한편, 애 엄마 몸에 맞는 좀더 작은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야 합니다. 시골길은 길섶이 거의 없이 자동차만 오가도록 닦아 놓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움직이면 아슬아슬하다 하는데, 길을 닦은 사람이 길을 잘못 닦았다고 우리가 없는 살림에 빚을 내어 자동차를 장만해야 하지 않습니다. 길을 잘못 닦은 사람들은 당신들이 잘못 닦은 길을 손질해야 하고, 우리는 우리 깜냥껏 시골사람이 시골사람다이 길을 오가도록 자전거를 즐거이 타고다니면 됩니다.


.. ‘절경’과 ‘비경’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충주호 호반길을 자전거로 달려 보지 않고 알프스와 로키산맥의 아름답지만 살벌한 호수를 동경하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큰 실례가 될 것이다 …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는 장쾌한 들길은 이 땅에 희귀한 지평선의 광활함 속에서 역사의 부조리도 체험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내내 평지를 달리는데도 마음속의 일렁임은 결코 작지 않다 … 요란한 볼거리와 왁자한 분위기에 익숙한 관광객의 마음과 눈으로 간다면 이 강변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평범하고 심심한 풍경은 전국에 널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꾸로 본다면, 이 강변길은 실로 감성의 감별자인 셈이다 ..  (25, 71, 103쪽)


 어제는 우리 살림집이 깃든 신니면 광월리에서 이웃한 금왕읍 무극리를 다녀옵니다. 광월리에서 무극리를 오가자면 자전거로는 헐떡고개를 셋 넘어야 합니다. 이 헐떡고개란 꼭대기까지는 헐떡이지만 꼭대기에 닿을 무렵부터는 신나고 시원하게 바람을 쐬는 길입니다. 엊그제는 생극면 신양리를 다녀왔습니다. 광월리에서 신양리를 오가자면 자전거로 갈 때에는 죽 내리막이고 돌아올 때에는 줄곧 오르막입니다.

 예전에는 죽 내리막으로 갔다가 줄곧 오르막으로 돌아오는 신양리를 즐겨 오갔는데 요 며칠 달리고 보니, 내내 내리막이었다가 오르막인 길보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갈마드는 길을 달릴 때에 한결 재미나지 않느랴 싶습니다. 한 사람 삶을 놓고 볼 때에도 오르막이기만 한 사람이나 내리막이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오르내리막이거나 내리오르막입니다. 고단하게 오르다가도 개운하게 내리꽂으며 땀을 식힐 수 있습니다. 개운하게 내리꽂으며 땀을 식혔으면 다시금 페달질에 힘을 넣어 새로운 땀을 쏟습니다.

 자전거란 내리막만 선선하게 다니거나 오르막만 고달피 다니도록 하는 탈거리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내리막은 내리막대로 좋고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좋은 탈거리인 자전거라고 느낍니다. 신양리로 가는 길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아주 호젓하면서 조용합니다. 무극리로 가는 길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제법 많아 그닥 조용하지 않은 가운데 평택부터 충주까지 새로 놓는다는 고속도로 길닦기가 한창이라 둘레 모습 또한 썩 좋지 않습니다.

 2007년까지 이 마을에서 살 때에도 지방도로이든 국도이든 다니는 자동차는 많지 않아 길막힘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이때에도 또다른 고속국도 길닦기는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고속국도를 숱하게 깔았어도 새삼스레 고속도로를 다시 닦는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아니, 슬픕니다. 아무래도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로 오가는 사람보다 자가용으로 오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오늘날일 테지요. 그러나 자동차로 오갈 여느 국도며 고속국도며 여러 가닥으로 곳곳에 촘촘히 놓여 있는데, 또다시 고속도로를 닦아야 할 만큼 나라돈이 넘치는지 궁금합니다.

 틀림없이 자가용으로 오가는 사람이 많지만, 농사짓는 할매 할배 가운데에는 차를 몰지 못하는 분이 많으며, 자전거만 타는 분도 제법 됩니다. 시골버스를 타고 자전거를 모는 농사짓는 사람들을 헤아리며 여느 지방도로 길섶이나마 손질해서 자동차한테 치일 걱정이 없도록 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돈이 들겠습니까. 요사이는 ‘전국 걷기 여행’을 하는 사람이나 ‘전국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여느 지방도로 길섶을 손질한다면 이 나라와 지방정부 모두 바라마지 않는 ‘관광수요 늘리기’까지 이루리라 믿습니다.


.. 출퇴근 시간의 상주 거리는 유럽이나 일본에 온 것처럼 자전거 물결로 넘쳐난다. 이용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고, 자동차는 알아서 자전거를 배려해 준다. 각급 학교마다 비를 피하는 자전거 주차장이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여학교도 예외가 없다 … 주암호가 자전거 여행지로 특히 소중한 것은 이처럼 아름답고 조용한 호수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호반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동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다닐 필요도 없는 외진 흙길에, 고개 하나 넘으면 고즈넉한 산사도 만날 수 있다 ..  (37, 76쪽)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을 읽었습니다. 읽은 지 꽤 오래되었으나 아직 이 책에 실린 ‘자전거여행 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천 골목집이나 지난달부터 지내는 충주 시골집에서 전국 자전거여행 길을 찾아가자면 자가용에 자전거를 싣고 먼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사람이라면 기차를 타기에 손쉬울 테고, 전국 어디로든 고속버스 길이 잘 뚫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서 ‘후미진’ 골목동네에서는 서울에 있는 기차역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기 벅찰 뿐 아니라 인천 ‘번화한’ 도심에 있는 버스역까지 자전거를 모셔 가는 일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골집에서 기차역은 아예 꿈꿀 수 없고, 시골마을에서 버스로 가는 길은 거의 모두 서울로만 뚫려 있습니다. 행정구역은 충주이나 음성읍과 붙어 있는 우리 마을에서 이웃한 대전이나 청주나 홍성 같은 데를 가자면 서울로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갈 때가 훨씬 빠르고 돈이 적게 듭니다.

 그러니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은 서울에서 자동차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눈높이에 맞추어 마련한 여행 길잡이책이라 할 만합니다. 또는,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 같은 데에서도 도심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 삶자리에 맞춘 여행 길잡이책이요, 다른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자동차를 반드시 갖고 있는 사람 흐름에 맞추었다고 하겠습니다. 아쉬움 한 가지를 더 들자면, 모두 쉰두 곳에 이르는 ‘자전거로 여행하기 좋은 곳’을 다루고 있는데, 쉰두 곳을 다루는 이야기 투나 줄거리나 생각이 너무 틀에 박혀 있습니다. 줄줄이 늘어놓는 정보만 있을 뿐, 글쓴이 스스로 이 길을 달리며 이러한 느낌으로 좋았으며, 이렇게 좋은 마음을 얻으며 당신 삶이 얼마나 좋아졌는가를 밝히는 대목이 한 군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감동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할 만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이라 할는지 모르나, 제아무리 정보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지라도 정보를 들려주는 따스하거나 너른 마음씨가 엿보야야 할 텐데요.

 그래도, 이 책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은 자전거로 이 나라 이 땅을 밟는 기쁨과 놀라움이 얼마나 큰가를 글쓴이 스스로 몸소 먼저 찬찬히 느낀 다음 꾸밈없이 펼치고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보다 더 멋스러운 곳이라고 추켜세운다든지, 전국 골골샅샅 밟아 보지 않고 유럽을 누빈다며 깝죽대지 말라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저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우리 나라 이 산 저 산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맛본 짜릿함과 기쁨과 재미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여행의 열매는 반드시 땀과 여유(느린 속도)를 먹고 자랍니다 … 이 멋진 해변길의 추억과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서로 사진을 찍어 주느라 수없이 멈춰야 할 것이고, 혼자라면 풍경을 담기 위해 시선을 빼앗기게 되니 속도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책머리에, 141쪽)


 글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땀과 느리게 달리기’를 이야기합니다. 자전거는 틀림없이 두 다리로 걸을 때보다 여섯 곱절 넘게 빠릅니다. 그렇지만 글쓴이는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느리게 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기는, 두 다리로 거닐며 나들이를 하면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볼 때에는 하염없이 멈춰서거나 자리에 주저앉아 이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며 받아들이니까요. 자전거를 타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모습으로 흘리기만 한다면 굳이 여행을 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다면 자동차에 타고 에어컨을 쐬면 될 일입니다. 예쁜 모습을 옆에 끼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다면 뚜껑 열린 차를 몰면 될 노릇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을 사랑한다거나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곱고 멋스러운 터전을 맞아들이고자 한다면 자동차를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자전거까지 버려야 합니다. 어느 때에는 여행이라는 허울까지 버려야 합니다. 참으로 살기 좋으며 아름다운 마을을 만났을 때에는 이 아름다운 마을에 몇 달이나 몇 해씩 묵으면서 내 일거리를 찾아 마을 이웃하고 오순도순 부대끼며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하룻밤 뚝딱 갔다 온다고 여행이 아닙니다. 몇 밤 자고 돌아오는 길만 여행이 아닙니다. 우리 한삶부터 여행이요, 우리가 다니는 모든 길은 나들이길이 됩니다. 저는 이웃 면내와 읍내를 자전거로 오가면서 날마다 여행하는 마음입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이웃마을 자전거마실이란 다름아닌 자전거여행입니다. (4343.7.7.물.ㅎㄲㅅㄱ)


 ┌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자전거여행 (전국편)》(터치아트,2009)
 ├ 글 : 김병훈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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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이선혜 옮김 / 이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숫자는 삶도 사람도 경제도 평화도 아니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0] 마리-모니크 로뱅,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밭갈이나 논삶이를 하는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르신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1/1000이 채 안 된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꽤나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밥쓰레기 또한 어마어마하게 내놓습니다. 벌써 열 몇 해 앞서부터 ‘남녘사람이 먹다 버린 밥쓰레기 부피만으로도 북녘사람을 모두 먹이고 남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제 땅을 일구며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밥쓰레기를 내놓지 않습니다. 다 못 먹었다든지 남기고 썩힌다든지 하는 일이란 없지만, 어쩌다가 남는 밥이 있다면 땅한테 돌려주거나 짐승한테 내어줍니다. 그러니까, 제 땅을 손수 일구는 사람한테는 밥쓰레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개밥이든 돼지밥이든 거름이든 되도록 다시금 손을 놀립니다.

 밭갈이나 논삶이를 하는 사람이라든지 해 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밭에서 돌을 고르고 흙을 뒤엎으며 판판하게 다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나날을 보내야 하는지를.

 고기집에서 상추 한 접시 더 달라고 말하는 일은 쉬울 뿐 아니라, 돈조차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흔한 푸성귀 상추 하나를 접시에 올리도록 씨앗을 뿌리고 돌보고 거두고 손질하여 내놓기까지 드는 품과 땀과 나날이란 참으로 많고 깁니다. 그런데 돈으로 치면 ‘스스로 땅을 일구어 얻는 상추’보다 ‘돈 몇 푼 치르는 일’이 아주 적게 치일 뿐 아니라 품이며 나날이며 안 써도 됩니다. 요즈음 도시사람들 ‘한 시간 일삯’이라 하여도 ‘농사꾼이 일구어 거두는 상추’ 부피란 꽤나 많으며, ‘하루 일삯’만 되어도 열흘 내내 배터지게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한 부피가 됩니다.

 조금이나마 머리가 구르는 사람이라면 흙을 만지며 땅을 일구는 일은 안 하기 마련입니다. 형편없는 품삯에 몸은 고되며 얼마나 긴 나날을 땀흘리는 일에 바쳐야 하는데요. 책상맡에 앉아 펜대를 굴린다든지 셈틀을 또닥거리며 수백 수천만 원이나 억대 돈을 벌어들여 돈굴리기를 하는 데에 마음과 머리와 몸을 쓸 뿐입니다.


.. PCB는 50년 동안 변압기와 산업용 수력기계의 냉각액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도료, 잉크, 종이 등 다양한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윤활액으로도 사용되었다 … 몬산토케미컬스컴퍼니는 최초의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을 제조하여 조지아에 위치한 신흥기업인 코카콜라에 전량 판매했으며, 뒤이어 바닐라와 카페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그가 ‘유령도시’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다 버려진 집들이에요.” 데이비드 베커는 심하게 낡았거나 아예 폐허가 되어 버린 허름한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채를 기르던 텃밭이랑 물이 심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에 다들 떠날 수밖에 없었죠.” … “우리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산업화된 농업의 팽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수출에 역점을 두는 이러한 농업 형태는 가족농을 몰아내고 있어요.” ..  (30∼31, 416쪽)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시골집을 사랑하거나 아끼며 시골살림을 신나고 즐겁게 꾸리려는 젊은이나 푸름이나 어르신은 그리 안 많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도시로 나오며 도시에서 일감과 놀이감을 찾고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동무를 사귑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쓰는 교과서에서 시골살림을 옳고 바르게 다루는 적이란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직업을 알려주거나 보여준다’는 자리에서는 으레 도시에서 하는 일만 나오지, 시골에서 하거나 할 만한 일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며 사회며 문화며 예술이며 정치며 경제며 온통 도시에만 쏠려 있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내 손에는 물을 안 묻히는 데에 쏠려 있습니다. 밥하기, 빨래하기, 쓸고 닦기, 애 키우기, 살림 꾸리기는 아예 다루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도 ‘학교에서 밥하기를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손수 ‘빨래하고 집안 쓸고 닦거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분은 거의 안 보입니다.

 누구나 전문 기능인이 되어 있으며, 누구라도 전문 기능인이 되도록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교사는 교육 전문 기능인이지, 옳거나 바르거나 곱거나 참되거나 착하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교과서를 잘 다루는 교육 기능인일 뿐인 오늘날 우리 터전 사람들입니다. 법을 잘 다루고 의료 기술을 잘 다루고 자동차를 잘 다루고 기계를 잘 다루고 할 뿐입니다. 그저 공만 잘 차서 나라밖 무슨무슨 대회에 나가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예 얼음판을 잘 지쳐서 무슨무슨 기록을 세우면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피아노만 잘 치면 된다거나 책만 들입다 파면 된다거나 연구실에서 온 하루 파묻히면 된다거나 빵 반죽만 잘 하면 된다거나 할 뿐입니다.

 스스로 제대로 된 삶을 꾸리지 않아도 되는 도시살이입니다. 밥·옷·집에다가 아이를 키우는 몫은 돈을 들여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고 여기는 도시살이입니다. 틀림없이 바깥밥을 사먹을 날이 있고, 손수 누에를 치고 물레를 자으며 베틀을 밟고 바느질을 하여 옷을 기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쁘고 할 일이 많은데 내 집을 어떻게 손수 지어서 사느냐 할 만합니다.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은 마땅히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밥·옷·집에다가 아이마저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돈 하나만 벌면 내 삶이 아름다이 마무리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밥·옷·집에다가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떠맡기는 가운데 내 삶을 즐겁고 알차게 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모든 사실을 뻔히 알면서 오로지 이익을 위해,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유독물질로 오염된 환경에 방치시킬 수 있었을까? … “어떻게 해서든 이윤을 남기려는 생각이 그들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들에게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거죠.” … 대법원의 놀라운 판결은 아무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표현인 ‘생명체의 사유화’를 가능하게 했다. 뮌헨이 위치한 유럽 특허청은 미국의 판례를 근거로 1982년부터 미생물에 대한 특허를 발부했으며 1985년부터는 식물, 1988년부터는 동물 그리고 2000년부터는 인간의 태아에 대해서도 특허를 발급하고 있다 ..  (36∼37, 324쪽)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요즈음 들어 비로소 알려지고 있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 가운데 하나인 몬산토를 파헤치는 책입니다. 500쪽을 웃도는 두툼한 책은 몬산토 하나만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은 몬산토가 얼마나 거짓부렁이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스레 돈을 벌어들이는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또다른 ‘죽음을 만드는 기업’ 이야기를 다루자면 고작 500쪽 남짓 한 책으로는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둘레 모든 ‘죽음을 만드는 기업’ 이야기를 다루자면 500만 쪽이 아닌 500억 쪽으로도 모자라리라 봅니다. 몬산토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 가운데 겨우 하나입니다.

 〈록키 호러 픽처 쇼〉라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름 ‘RKO’를 세운 자본가는 또 다른 곳에서는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팔아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팔아 거둔 돈으로 영화배급을 하고 영화 찍을 돈을 댄다 할 수 있는 노릇입니다. 우리들은 즐겁고 재미나게 보는 영화 하나일 뿐이지만, 정작 어느 영화 하나를 즐겁게 재미나게 보고 있는 동안 지구 맞은편에서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대준 무기를 갖고 피튀기게 싸우며 죽고 죽이는 아픔이 터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터 맞은편에서 전쟁무기가 어마어마하게 팔리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방이나 극장에서 하하호로 깔깔낄낄 웃으면서 영화 하나를 즐길 수 있습니다.


.. “세수할 때나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에이전트 오렌지가 담겨 있던 빈 통을 이용하는 동료들도 있었어요. 제초제에 다이옥신이 들어 있다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정부는 모든 걸 알고 있었죠.” … “누군가 박사님께 rBGH를 투여한 소의 우유를 권한다면 드시겠습니까?” “아마도 사양할 겁니다.” 마가렛 하이든이 대답했다 … 1998년 10월 몬산토 홍보 담당 이사인 필 엔겔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GMO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몬산토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제품을 많이 파는 것이다. 안전성 확보는 FDA가 할 일이다.” ..  (79, 211, 281쪽)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란 사람들과 사람 삶터와 뭇 짐승과 푸나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돈 하나만 벌어대는 기업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들 ‘죽음을 만드는 기업’은 어떻게 죽음을 만들어 팔면서 엄청나게 큰 돈을 벌어댈 수 있을까요? 이 몹쓸 기업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면서 우리 스스로 죽음이라는 벼랑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을까요?

 ‘우리 몸을 살리고 우리 터전을 살리는 먹을거리’를 지구라는 터전에서 일구어 마련하자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인공감미료이든 화학첨가물이든 유전자조작식품이든 식품첨가물이든 만듭니다. 우리 몸을 살리기 때문에 인공감미료를 만들어서 쓰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인공감미료를 씁니다.

 우리들은 ‘아주 값싼’ 인공감미료를 넣은 먹을거리 앞에서 게걸스레 굽니다. 아주 값싼 인공감미료를 넣었으니 ‘우리 몸을 살리고 우리 몸에 좋은 먹을거리’하고 견주어 대단히 값싼 ‘공장에서 만든 먹을거리’를 사들입니다. 참말로 유기농과 무농약이 좋다고 여긴다면, 농사꾼이 땀흘려 땅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과 많은 품이 드는가를 헤아리면서 ‘옳고 바르며 알맞춤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옳고 바르며 알맞춤한’ 값을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더 싸게 장만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만드는 기업’은 바로 이 같은 우리들 매무새를 꿰뚫어보고 나서 죽음을 만들면서 떼돈을 법니다. 우리 스스로 더 값싼 것만을 찾으며 우리 삶을 살리려 하지 않으니까, 죽음을 만들어도 돈은 돈대로 벌고 이름은 이름대로 높이며 권력은 권력대로 누립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음 구덩이에 내몹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돈으로 온갖 물질과 먹을거리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우리 몸이 망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음과 삶 또한 허물어지고 있는데, 이를 하나도 못 느끼고 못 알아채며 못 보고 맙니다.


.. “사람들은 녹색혁명 덕분에 인도가 식량자급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 오늘날 인도는 매년 7400만 톤의 밀을 생산하는 세계 제2의 밀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아세요? 토양은 황폐해졌고, 수자원은 염려스러울 만큼 감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경 전반에 걸쳐 오염이 발생했고, 단일경작의 확대로 다양한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겼어요. 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농업 형태에 적응하지 못한 수만 명의 영세농이 농토를 잃고 빈민굴로 이동했어요.” ..  (491쪽)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는, 적어도 집 안쪽에서 스티로폼 농사를 짓거나 꽃그릇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터 얼거리와 내 몸과 마음 틀을 깨달은 사람일 때에는,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아름다울 내 삶을 헤아리며 시골살림으로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거나 삼백만 원을 번다고 해서 내 삶이 즐거울까 모르겠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번다지만 내 몸을 살리지 못하는 먹을거리만 받아들이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손을 놀리며 흙을 만지고 싱그러운 물과 바람을 맛보는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기쁠까 모르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서 우리 곱고 좋은 나날을 병원에 ‘돈을 갖다 바치며’ 마무리를 해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맨 처음부터 돈바라기 삶이 아닌 사랑바라기 삶으로 나아가고, 학벌바라기 아닌 믿음바라기 삶으로 나아가며, 권위바라기 아닌 꿈바라기 삶으로 나아갈 노릇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책을 읽고 몬산토라는 기업이 얼마나 돈에 눈이 멀어 죽음을 만들고 있는가를 알아챘다면, 몬산토 하나로 그치는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 아니요, 우리 나라에도 숱하게 ‘죽음을 만드는 기업’이 넘치고 있음을 읽어내는 가운데, 나 스스로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하고 찾는 매무새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내가 여태껏 엉터리로 살았네. 이제부터는 참되게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살이를 떨쳐내며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을 손에서 놓을 수 있을는지요.

 숫자는 삶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경제도 아닙니다. 숫자는 평화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교육도 아닙니다. 숫자는 평등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며 과학도 아닙니다. (4343.7.5.달.ㅎㄲㅅㄱ)


 ┌ 《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레,2009)
 ├ 글 : 마리-모니크 로뱅
 ├ 옮긴이 : 이선혜
 └ 책값 : 2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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