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초등학교 아이들 그림 338점 지음, 이오덕 엮음 / 보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어설프고 잘못된 편집 때문에 안타까이 절판된 책을 기리며 별을 다섯을 붙이지 못하고  

고작 셋밖에 못 붙인다.) 

 


 어린이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그림책이 좋다 81] 이오덕,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책이름 :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그림 : 이오덕 선생님한테서 배운 시골 아이들
- 엮은이 : 이오덕
- 펴낸곳 : 보리 (2008.8.25.)
- 책값 : 5만 원 (판 끊어짐)



 (1)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읽으며


 아이슬랜드에서 나고 자란 비요크 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고운 삶을 보여주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세 식구가 함께 앉아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보았고, 아이는 엄마 곁에서 이 영화를 잘 지켜보곤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싶은 한편, 아이 엄마가 집에서 이 영화를 되풀이해서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때에 군데군데 보기도 했구나 싶습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 때문에 당신이나 당신 아이나 눈이 몹시 나쁜 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입니다. 영화에 붙은 이름 그대로, 셀마(비요크)는 차츰 눈이 나빠지며 어둠에 갇히고 맙니다. 또한, 셀마가 꾸리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여 주지 못하는 안쓰러운 이웃 때문에 셀마는 어둠 쪽으로 자꾸 밀려나다가는 그예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맙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집 동무는 가녀린 셀마를 깊이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며 슬픈 넋입니다. 모두가 돈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나, 돈에 앞서 참다운 사랑과 믿음을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셀마는 둘레에서 바라보기에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며 애틋합니다. 그러나 셀마는 당신 스스로를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애틋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셀마한테는 셀마한테 닥친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조차 달콤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눈병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뮤지컬을 즐길 수조차 없으나, 셀마는 어둠이 더 깊디깊이 닥칠수록 더 불타는 마음이 되어 스스로 숱한 뮤지컬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꿈에서 만들 뿐이지만요. 눈이 좀 밝다 싶은 때에는 한결 밝은 뮤지컬을 만들지만, 눈이 자꾸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에도 무척 신나는 뮤지컬을 만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만드는 뮤지컬은 당신 꿈속에만 가두지 않고 사람들 모두한테 보여줍니다. 이태껏 셀마 스스로 만든 뮤지컬은 셀마 혼자만 즐겼다면, 마지막 뮤지컬은 이 뮤지컬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을 사람한테는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하고, 이 뮤지컬을 보고도 어벙벙해 하는 사람한테는 가슴이 하나도 벅차오르지 않는, 사랑하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이 없는 가슴이라면 그예 메마른 채로 있고 마는 뮤지컬을 선보입니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이자 문화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거나 받아들이며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임을 모르는 가운데 누구나 이 문화이자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딱히 뮤지컬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든지, 그저 뮤지컬이라서 한결 아름답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뮤지컬은 뮤지컬일 뿐입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보는 동안, 이 영화를 찍은 분이나 셀마라는 삶을 보여주는 분이나 더없이 눈이 맑고 밝다고 느꼈습니다. 빛그림 이야기에 담는 틀부터 몹시 부드러우며 따사롭습니다.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과 뭇목숨한테 둘러싸여 고운 삶 하나를 꾸리고 있음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둠 속의 댄서”로 옮겨 적었으나, “어둠을 춤추는 사람”이라거나 “어둠을 노래하는 춤꾼”이라거나 “어둠과 벗삼는 춤꾼”이라거나, 제 나름대로 다시 읽으면서 영화를 헤아려 봅니다. 셀마라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 그대로 당신 꿈속에서 뮤지컬을 만들거든요. 웃고 싶을 때에는 웃고, 울고 싶을 때에는 울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워하고, 기쁠 때에는 기뻐하며 뮤지컬을 만듭니다. 목매달려 더는 노래를 할 수 없을 무렵 셀마가 펼친 노래는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기뻐하면서 해맑게 부른 노래였습니다. 셀마와 살가이 지내던 동무는 셀마가 ‘사형장 이슬’로 사라지지 않는 일이 당신 아이한테 ‘엄마로 살아가는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셀마는 ‘내 아이한테 눈을 주는’ 일이야말로 당신 스스로 당신 아이한테 ‘엄마가 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셀마처럼 내 아이 땀따귀를 갈기며 왜 학교에 안 가고 못된 녀석들하고 어울리느냐고 다그치는 어머니가 되면서, 내 목숨을 바쳐 내 아이한테 눈을 주고, 내 목숨이 사그라지는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내 아이가 비로소 새 삶을 얻었음을 느낀 다음에는 더없이 느긋하며 즐거울 수 있는 삶길이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뮤지컬을 즐기면 됩니다.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즐기면 됩니다. 책을 즐기고 싶다면 책을 즐기고,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고 싶다면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며, 사진을 즐기고 싶을 때에는 사진을 즐기면 됩니다.

 문학과 영화로 함께 나온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과 고차매 남매는 시골마을에서 둘 나름대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에 따라 바라보는 그림이 아닌, 두 사람 눈썰미에 따라 서로서로 그림을 좋아하며 즐겼습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 나오는 셀마는 무척 외로웠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은 가운데 당신 둘레 사람들을 동무나 이웃으로 여기면서 당신 일과 삶과 춤노래를 꾸밈없이 즐겼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아직 우리 누리에서는 어린이 그림을 제대로 읽거나 깨닫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없이 모자라거나 드문데, 바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을 담은 그림책’에 실린 그림을 그렸던 1960∼70년대 산골마을 어린이들하고 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쳤던 이오덕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하건 그림 재주와 이론이 어떠하건, 당신들은 당신들 배움터인 산골마을 작은 학교에서 당신들 나름대로 아름다우며 신나고 멋진 그림누리를 즐겼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은 이론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 이오덕 선생님은 이론으로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교사는 종이 하나와 크레파스 하나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종이를 펼치고 크레파스를 쥔 손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짜내려고 하는 몸뚱이나 넋이 아닙니다. 산골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고스란히 담을 뿐입니다. 아니, 고스란히 삶을 담는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고스란히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 그렸다고 해야 옳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로 꾸리는 삶이 좋든 싫든 궂든 재미있든,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로‘도’ 저희 삶을 나누었습니다.

 자랑이 아닌 이야기입니다. 뽐냄이 아닌 말걸기입니다. 효행일기나 반공일기 따위는 조금도 아니지만, 생활일기 또한 아닙니다. 셀마가 꿈속에서 웃음지으며 춤노래를 즐기다가는, 꿈 밖으로 나와서 바야흐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듯, 아이들은 노상 꿈 바깥자리에서 까만 얼굴 까만 손 까만 몸뚱이인 산골아이로 지내는 저희 하루하루를 홀가분하면서 스스럼없이 종이 한 장에 크레파스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2) 아이들 그림을 함께 즐겨야 할 텐데


 지난 2008년 8월에 나왔던 어린이 그림책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무척 슬프게도 진작에 판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들여다보면, 이오덕 선생님 아드님인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더는 책을 내지 마십시오’ 하고 잘라 말하면서 스스로 판을 끊은 까닭을 알 만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그림을 읽을 때에는 아이들 눈높이뿐 아니라 아이들 삶결 그대로 바라보며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 멋대로 그림을 요모조모 자른다든지(트리밍), 어느 한 군데만 오려낸다든지 하면서 엉뚱한 겉멋 부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그림 한 장을 그리며 구석구석 빈틈없이 크레파스를 다 발라 놓는 흐름을 우리 어른들은 잘 읽어야 합니다. 배경이 군더더기라고 잘못 읽는다든지, 끝자리가 좀 구지레 보인다고 하면서 가운데 쪽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며 긴네모 그림을 바른네모 그림으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 눈결과 삶이 되어 어린이 그림을 볼 노릇입니다. 처음부터 ‘오로지 어른 눈썰미로 좀더 예쁘장한 책을 만들겠다’는 섣부른 생각이 되면 안 될 노릇입니다.


.. 그림은 이렇게 그려라, 저런 색을 칠해라 하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다만 남의 그림을 흉내내지 않도록 할 것이고, 종이·연필·붓·물간……과 같은 용구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가려서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는 태도는 천천히, 온 정신을 기울여서 그리도록 하고, 자기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해야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면서 즐길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은 모두 어렸을 때 비참한 흉내내기 그림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그리도록 했을 때에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저희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글짓기 아닌 글쓰기로 아이들마다 제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널리 쓰고 있는 낱말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었습니다. 글이란 억지로 만드는 ‘글짓기’가 아닌, 꾸밈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 그대로 즐기는 일이기에 ‘글쓰기’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느끼며 쓰셨습니다. 글이란 글쓰기라면, 그림이란 바로 ‘그림그리기’이겠지요. 사진이란 ‘사진찍기’이며, 춤이란 ‘춤추기’이고, 노래란 ‘노래부르기’입니다. 일이란 ‘일하기’이며, 놀이란 ‘놀이하기’입니다.

 이런 모든 우리 삶은 그예 삶입니다. 뒤에 ‘-교육’이라든지 ‘-강좌’라든지 ‘-학습’이라든지 ‘-체험’이라든지 ‘-학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무엇이든 붙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둘레를 보면 이런 안쓰러운 이름들이 더없이 많습니다. 놀이마저 놀이교육 놀이강좌 놀이학습 놀이체험 놀이학원 …… 아주 많습니다. 영어는 어떻지요? 영어는 아예 영어마을 잉글리쉬존 따위마저 판을 칩니다. 영어를 즐기려면 마음껏 즐기도록 해야 하는데,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고 맙니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학문 또한 즐기는 삶이어야 할 뿐인데, 이 나라 이 땅 이곳 학교에서는 늘 ‘교육’이라는 이름이 달라붙습니다. 모두 제도권이 되고야 맙니다.

 이리하여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책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 한 차례조차 나오지 못한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누리를 펼쳐 보이면서 나눌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망가뜨렸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그림을 즐긴 나날이 소록소록 배어든 알뜰한 그림책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출판사 일꾼들이 아이들 그림을 잘못 매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 〈로빙화〉에 나오는 ‘그림을 이론으로만 아는 교사’들이 ‘사물을 똑같이 베껴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듯, 아이들 그림을 아이들 그림 그대로 읽고 즐기며 받아들이지 못한 편집자들이 여기 자르고 저기 자르면서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니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기에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어도 언제 생채기를 입혔는지 모를 뿐 아니라 무엇이 생채기가 되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소 귀나 다리가 잘리도록’ 소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통으로 소 몸뚱이를 그림에 다 그려 넣습니다. 그림 한 장에 소만 우격다짐으로 꽉 들어차게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 깜냥껏 넉넉한 품을 남기고 소를 채워 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보리밟기를 하는 모습을 위 아래 옆이 빡빡하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그리고 넓은 보리밭이 잘 드러나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해가 잘리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에 나오는 해가 잘 나와서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게끔 그립니다.

 아이들은 보리베기를 할 때에 보리 알곡이 잘리게 그리지 않습니다. 보리 알곡을 줄기와 잎사귀와 알곡 모두 잘 나오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에 다리를 자른다든지 머리를 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통으로 잘 나오도록 알뜰살뜰 그립니다.

 아이들은 집을 그리며 집 어느 한쪽을 자르지 않습니다. 집을 통째로 다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모두모두 자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통으로 내보이면서 이 통 그림 하나에 아이들 넋과 삶과 꿈과 손길이 어떻게 묻어 있는가를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편집하는 멋’에 따라, 어느 대목은 자르고 어느 자리는 붙일 수 있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편집하는 멋이란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하는 멋이란 멋을 부릴 자리에 부려야지 섣불리 아무 데나 부릴 수 없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책이라면 이러한 책에 걸맞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산골마을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며 그린 그림이라 할 때에는 바로 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편집하는 멋을 살릴 노릇입니다. 이와 동떨어진 데에서 어설피 멋을 부릴 노릇이 아닙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빌어 말씀드린다면, 셀마는 당신 아들한테 새 눈을 선물해 주려고 체코에서 미국까지 건너와서 공장 일꾼이 되어 돈을 벌지, 당신 아들한테 자전거‘나’ 사 주려고 미국가지 건너오지 않았습니다. 셀마 또한 아이 어머니로서 얼마나 자전거‘를’ 사 주고 싶었을까요. 그렇지만 셀마는 자전거 ‘따위’는 아이한테 사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따위’는 나중에 아이가 새 눈을 얻은 다음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살 수 있으니까요. 자전거는 언제라도 돈을 다시 벌어 사면 되지만, 하루하루 나빠지는 눈을 고치려면 셀마 스스로도 눈이 더 나빠지기 앞서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빨리 ‘아이 눈을 고칠 수술을 할 돈’을 버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아이 또한 셀마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눈이 몹시 나빠지고 있으니,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라든지 아이한테 새 옷을 사 입힌다든지 아이한테 더 맛난 밥을 해 준다든지에 돈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이런 데에는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135쪽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김경수’라는 아이가 그림 한쪽에 적은 이름 석 자마저 ‘책을 편집하는 분들께서’ 싹둑 잘라 놓았습니다. 이런 책 편집을 이 아이가 들여다본다면 이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통으로 내보이지 않고 어느 곳은 잘라서 없애 버리고 말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글 한 꼭지를 썼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싹둑싹둑 자르면 어찌 되지요?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내가 담은 모습을 동강동강 자르면 어찌 되나요?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건전하지 않다’며 몇 분치를 마구마구 자르면 어떡합니까? 노래 하나를 지었는데 ‘노랫말을 바꾸라’느니 무어니 하며 몇 초를 요리조리 자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손가락 몇 가락을 잘라도 괜찮을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머리통 반쪽이 잘려도 살아숨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염통을 조금 잘라도 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발톱 몇 군데쯤 없어도 잘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331쪽부터 335쪽까지 실린 그림 일곱 점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얼굴 그림’입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 그림들에 ‘아버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림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요, 아이들이 무엇을 그림으로 담았는가를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더구나,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그림 원본을 보내 줄 때에 이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쪽지에 적어 붙여서 보냈는데 이런 편집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 아이들의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그대로 그리게 해도 괜찮은가요? 언제나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데 어떻게 지도하면 될까요?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곱고 착하며 참되게 일구어야 합니다. 다른 이 생각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다른 이 생각이 내 생각으로 녹아들도록 잘 새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떠한 좋은 생각이든 좋은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내 생각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요, 이리하여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터전에 걸맞게 내 땀을 흘리며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가 아이 하나를 낳아서 키운다고 할 때에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아동발달 전문가’한테서 말씀을 하나하나 듣고서 키우겠습니까. ‘보육지침서’에 따라 키우겠습니까. 어린이집과 보육원과 학교에만 맡기며 키우겠습니까.

 우리가 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읽겠습니까. 전문가 비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신문잡지 서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출판사 보도자료대로만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아이들 그림은 아이들 삶결을 살피고 삶무늬를 들여다보며 삶자락을 껴안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를 톺아보고, 아이들이 저희 삶을 얼마나 아이들 스스로 즐겁도록 일구는 가운데 이어가고 있는가를 헤아리며, 아이들이 어떤 눈빛이고 말빛이고 얼빛인가를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만 쓴다고 해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그린다고 해서 그림그리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가이 찍는다고 사진찍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느낌대로 부른다고 해서 노래부르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춘다고 해서 춤추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삶으로 이룹니다. 두렵고 걱정스러우며 따스하며 넉넉하다가는 차갑고 슬픈 삶으로 이룹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웃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울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로빙화〉에서 고아명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책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린 그림과 울면서 그린 그림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엮은 분들은 아이들 웃음과 울음을 느끼기 앞서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는 대목에만 지나치게 매여 있고 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 한다면,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20년대 아이들 또한 즐거우며 기쁘며 보람차게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면서 알뜰살뜰 오순도순 알콩달콩 누릴 수 있는 고운 그림나라 넋을 스며 놓은 책으로 엮어야 했겠지요.

 유물로 만드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놀라운 어르신 한 사람이 이룩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그림인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 누구나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부둥켜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릴 수 있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좋은 그림을 읽고 즐기며 좋아할 수 있으려면,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좋은 아이들 좋은 그림을 읽기 앞서 좋은 일놀이를 즐기는 좋은 어른으로서 좋은 나라를 가꾸고 있는 좋은 삶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저희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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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와 지렁이


 음성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가서 돌아오는 길에 나비 한 마리를 칠 뻔했다. 2·7 날에 음성 읍내에서 장날이 열리기에 이날에 맞추어 나들이를 하면서 수박과 무우와 애호박 들을 장만하고 퍽 무거운 가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찻길 구석자리에 앉아 하늘하늘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보았는데, 자전거로 달리며 거의 1미터 앞에서 알아챘기 때문에 찻길 구석자리에서 그냥 달렸으면 나비 몸통을 고스란히 짓밟았겠지. 뒷거울로 뒤따르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이 손잡이를 틀어 아슬아슬 나비 옆 3센티미터를 비꼈다.

 그러구러 한숨을 돌리며 저수지 옆길을 달리는데, 어제 이 길을 달리며 지렁이 한 마리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죽은 지렁이라 하지만 나까지 주검을 밟고 지나가기는 싫어 살금살금 살피며 달리는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지렁이 주검은 아무런 자국이 남아 있지 않다. 지난밤에 비가 잔뜩 퍼붓기도 했지만, 비 때문에 지렁이 주검이 쓸려가지 않았다. 비 때문에 지렁이가 차에 밟히고 거듭 밟혀 묵사발이 된 모습이 많이 씻겼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제만 해도 지렁이가 처음 밟혀서 죽은 모습이 통통하게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짓이겨진 자국이 보였기 때문.

 가파른 언덕을 낑낑대며 오르는 동안 길가에서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한 마리 더 본다. 아까 나비는 자전거가 달리는 찻길 구석자리 흰줄에 앉아 있었고, 이번 나비는 찻길 한복판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 이번 나비는 내가 칠 일이 없으나, 자동차들이 달리며 ‘스스로 친 줄조차 모르는’ 채 치여 죽을까 걱정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그나마 코앞에서 알아채는데,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길가에 사마귀가 있는지 귀뚜라미가 있는지 지렁이가 있는지 나비나 나방 애벌레가 볼볼볼 기고 있는지, 무당벌레나 딱정벌레가 뜀밤질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챌 수 없는 자동차이다. 자전거 아닌 두 다리로 걷는다면 이 모든 작은 목숨을 낱낱이 알아채며 하나하나한테 인사할 수 있겠지. 줄줄줄 기어가는 개미한테도 인사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개미까지 알아채지는 못한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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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월에 나온 책이 드디어 배본이 되었구나. 

ㅜ.ㅠ 

왜 이렇게 오래오래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래도 겨우 나오고, 가까스로 배본이 되니 한숨을 돌리며 

고맙다고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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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7-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파란놀 2010-07-22 17:59   좋아요 0 | URL
(__)

고맙습니다.
이 책이 제대로 사랑받으면 좋겠어요~~
 
악동들의 주머니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최정인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눈물과 웃음이 없다면 학교일 수 없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1] 하이타니 겐지로, 《악동들의 주머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자니 팔뚝이 근지러워 비비다가 모기 한 마리를 잡습니다. 모기는 제 팔뚝에 앉아 피를 빨아먹으려다가 그만 으스러지고 맙니다.

 며칠 앞서부터 모기가 하나둘 보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때면 모기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끔찍했는데, 올해에는 좀처럼 모기 구경이 어려웠습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으니 모기라는 녀석이 퍽 늦게 깨어나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제 저녁이나 그제 저녁에는 달빛이 무척 밝았습니다. 보름달이 아닌 반달이었으나 집안으로 달빛이 곱다시 비쳐들더군요. 보름달 빛이었다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았겠구나 싶습니다. 반달 빛으로는 책을 읽기에는 모자라지만, 길가에 켜 놓는 등불만큼은 밝다고 느낍니다.

 우리 세 식구 깃든 산골마을에는 둘레 길가에 따로 등불이 없으니까 오로지 달빛에 기댑니다. 따로 손전등을 켜고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어두운 길에서는 얼마쯤 기다리고 있으면 밤눈이 트여 다 보이기에 굳이 손전등이 없어도 됩니다. 손전등을 켜면 오히려 잘 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지낼 때에도 달은 늘 올려다보기는 했으나,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달빛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깊은 밤에도 길마다 등불이 환히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한 골목이란 어디에도 없기에, 그나마 좀 어둡겠다 싶으면 자동차 불빛이 들이치면서 어두움다운 어두움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밝은 낮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밝은가를 느끼지 못하는 도시요, 어두울 저녁에도 얼마나 어떻게 왜 어두워야 하는가를 느낄 수 없는 도시인 셈입니다.

 요즈음 같은 찜통 더위에는 그야말로 푹푹 찌는 더위를 느껴야 할 텐데, 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후줄근하게 땀을 쏟으며 더위를 느낄 테지만,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낮게 맞춘 에어컨 때문에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도 춥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시골이라 해서 이런 날씨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도 건물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다 보니, 건물 안팎 느낌이 지나치게 다릅니다. 시골에서 차를 몰 때에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면 될 텐데, 시골에서 차를 몰며 창문을 열고 알맞게 달리는 사람이 퍽 드뭅니다.

 우리 스스로 살짝이나마 생각하는 기운이 남아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에어컨을 많이 쓴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리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름날 ‘더위를 식히려’고 도시사람이 찾아가던 곳은 은행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관공서조차 에어컨을 들여놓고 펑펑 틀어대지 못했어요. 고작 1980년대를 헤아리고 1970년대를 더듬자면, 선풍기 한 대 들여놓는 일마저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1994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동안 대학교를 다녔는데, 이무렵 인천에서 서울로 전철을 타고 오가면서 ‘에어컨 달린 국철’은 타 보지 못했습니다. 이무렵 국철은 ‘선풍기 달린 국철’이었고, 선풍기조차 안 달려 있어 창문을 여는 국철이 수두룩했고, 선풍기가 달려 있어도 망가져 있거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제나 창문을 열고 다녔습니다(이무렵 서울 지하철은 모두 에어컨이 달려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부채로 더위를 식혔고, 등물을 한다든지 모시옷을 입는다든지 제철 열매를 먹는다든지 하면서 땀을 식히려 했습니다. 모두모두 선풍기나 에어컨을 쓰는 삶이 아닌, 거의 모두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 더위를 받아들이는 삶이 우리 삶이었습니다. 지난날에도 오늘날처럼 도시가 있었으나, 도시라 할지라도 전기이며 물질이며 되도록 쓰지 않는 가운데 서로서로 엇비슷하게 가난하면서 오붓한 살림살이였습니다.


.. “이 아이들은 1학년 동생들이 정성껏 기르는 화분을 발로 차서 깨뜨리고 지나갔어요. 대체 이 아이들한테도 따뜻한 마음이 있을까요?” 1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때는 어벙이가 어쩌다 화분에 발이 걸려 화분을 깨뜨려 버렸어. 어벙이 혼자 야단맞으면 너무 불쌍하니까 우리도 같이 화분을 찬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 해 선생한테 변명하는 녀석은 인간쓰레기야.’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저희 반 아이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돈을 빼앗은 적이 있어요. 그 아이는 워낙 성격이 소심해 그 뒤로는 겁이 나서 학교에도 잘 나오지 못할 정도라고요.” 5학년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 자식은 집에서 몰래 돈을 갖고 나와 아이들한테 한턱 쓰고는 그 아이들을 자기 부하처럼 부려먹는 나쁜 놈이란 말야. 그래서 우리가 대신 벌을 준 것뿐이라고. 하지만 변명 따윈 안해. 선생한테 변명을 하면 그 자식이랑 똑같아져 버리니까.’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  (15∼16쪽)


 여름날 흙길을 걸어가며 느끼는 더위하고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을 걸으며 느끼는 더위는 사뭇 다릅니다. 숲길을 거닐 때 느끼는 더위 또한 크게 다릅니다. 더 많은 돈과 끝없는 경제개발을 바라면서 온 나라가 도시로 바뀌고 갖가지 회사가 생겨납니다. 농사지을 터전은 줄고, 농사짓겠다는 사람 또한 줄며, 회사일 하겠다는 사람이나 셈틀 자판 만지작거리겠다는 사람은 늡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시험 공부만을 시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참다운 환경 공부를 시키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라든지 기후변화 같은 낱말을 가르치고, 이러한 환경 문제를 지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정작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풀어낼 길을 우리 삶에서 우리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찾아 고치거나 다독여야 할는지를 일깨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모조리 부자가 되어 ‘더 많이 벌어들인 돈’으로 ‘생태에너지’를 만들거나 ‘환경 지키기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우리 터전이 나아질 수 없습니다만, 학교에서 이러한 틀거리를 올곧게 가르치거나 받아들이는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농업고등학교’는 몇 군데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아도, 농업고등학교라 해서 농사꾼 되는 길을 가르친 학교는 드물었습니다. 시골학교조차 농사꾼을 키우는 배움마당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온통 도시로 나아가도록 내몰고,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도록 몰아쳤을 뿐입니다.

 사람들 누구나 몸으로 내 삶을 느끼거나 헤아리며 내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찾도록 이끄는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라 할지라도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 되는 길로 나아가지, 대안학교 가운데 농사꾼을 말하거나 농사꾼으로 가르치는 곳이 몇 군데 있을까요. 당신 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면서 ‘우리 아이는 흙과 물과 바람과 벌레와 풀을 사랑하는 농사꾼이 되면 좋겠어요’ 하고 꿈꾸는 어버이는 있기나 있는지요. 아니, 어버이부터 스스로 농사꾼이 되고자 꿈꾸기는 하는지요.


.. 수수깡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수수깡의 아버지는 공해병을 앓았지만 공해병 환자로 인정받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공해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지 않은 탓에 보상도 전혀 받지 못했다. 수수깡은 키가 작고 야윈 것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너는 정말 효녀구나.” 수수깡은 엄마한테 이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수수깡은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먹을 것이 생기면 반은 자기가 먹고 반은 반드시 집에 가져가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  (17∼18쪽)


 우리 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살아가면서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찾는 가운데, 사람을 사귀고 문화와 예술을 누리는 한편, 보금자리를 빌라나 아파트로 마련하는 도시라고 하는 터전입니다. 이러한 도시인 탓에 도시 학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에 알맞춤한 지식을 베풀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우리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목숨 하나 곱게 선물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학교에서 익히고 배우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울 수 있어야지, 돈만 잘 번다거나 이름값만 드높인다거나 권력을 움켜쥔다거나 해서 무슨 즐거움이나 보람이 있을는지요. 다 같이 물을 사다 마시는 도시 삶터가 아닌, 모두 다 물을 ‘흐르는 냇물에서 얻어 마시는’ 시골 삶터로 거듭날 수 없을는지요.

 학교는 언제까지 모든 아이들한테 지식조각만 쑤셔넣는 감옥소 같은 데로 남아 있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학교는 왜 모든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몇 가지 권장도서만 읽히며 아이들 넋과 얼을 짓누르는 감옥소 노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학교는 이름 그대로 ‘배우는 터전’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 공부는 못 하지만 쓸모없지는 않아.” 다보가 말했다. “공부 못 하는 게 반을 욕먹이는 짓이냐? 말도 안 돼.” 오탸양도 맞장구를 쳤다. “선생한테 알랑방구나 뀌고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고 만날 낑낑대기나 하지.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식이 큰소리치기는. 그런 자식이야말로 쓸모없는 인간 아니냐? 바보, 머저리 아니냐고!” 세이조는 화가 점점 더 치미는 모양이었다. “가바시마 선생님은 우리를 나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겠지?” ..  (31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짤막한 어린이책 《악동들의 주머니》라는 작품을 읽으면, 1970년대 일본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 학교에서 복닥이는 삶이 고스란히 나와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아이들이라면 겪기 힘들 만한 삶이요, 2010년대 한국땅 가난한 마을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느끼기 어려운 삶이 아니랴 싶은데, 이웃나라 지난날 삶이든 이웃나라 가난한 마을 아이들 삶이든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이 마주할 법한 사람내음 묻어나는 삶일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놓인 자리와 살아가는 자리는 틀림없이 다르지만, 학교가 학교답지 못한 곳이라면 사회가 사회답지 못할 뿐더러 사람들이 사람들답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던져 놓는다고 아이들이 온갖 지식을 잘 받아들여 시험 잘 치르는 아이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맡겨 놓고 돈벌이를 하는 어른들은 스스로 아름다이 꾸리는 삶이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어버이 스스로 당신 살림터와 마을에서 언제나 아이들하고 오붓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굳이 학교라는 데에 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하며 슬기롭게 자라날 수 있는 배움마당을 늘 베풀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참다이 배우고 올바로 배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지 않다면 학교는 감옥소에 머물 테니까요. 이렇게 할 수 없다면 학교는 감옥소 노릇만 알뜰히 할 테니까요. 생김새도 감옥소이고, 아이들한테 붙이는 이름(번호) 또한 감옥소다우며, 아이들한테 시키는 공부 또한 감옥소 얼거리입니다. 하루 내내 시멘트 교실에 가두어 놓은 채 바깥바람 쐴 겨를조차 주지 않기 일쑤인 학교 아닙니까. 교사와 학생이 즐겁게 앎과 슬기를 나누는 열린 터전이 아닌, 교사가 학생한테 온갖 지식을 쑤셔박는 외곬 늪이 아닙니까. 아이 하나하나를 골고루 헤아리는 학교를 본 적이란 없습니다. 아이가 서른이든 예순이든, 서른 아이이든 예순 아이이든 저마다 다른 삶이고 목숨이며 넋입니다. 이 다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회사원이나 전문지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아름다운 일꾼이 되고 살림꾼이 되며 어른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할머니는 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었다. 그런데 음식을 모두 열 개씩 샀기 때문에 종류마다 하나씩 남았다. “할머니, 그건 할머니 아들 몫이야?” “오냐.” 할머니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 다음에 할머니 아들이 외국에서 돌아오면 꼭 같이 살아야 돼요.” 하고 도메코가 말했다. “오래오래.” 세이조도 말했다. “아아아아, 아아, 아아…….” “오냐오냐.” ..  (136쪽)


 《악동들의 주머니》에 나오는 ‘악동’들은 교사가 붙여 준 이름대로 ‘악동’입니다. 이 악동들은 저희 스스로라든지 마을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착한 ‘아이’입니다.

 이 나라 숱한 제도권학교는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푸름이를 푸름이로 보지 않습니다. 이 나라 대학교 가운데 젊은이를 젊은이 그대로 바라보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이는 이 나라 대안학교 또한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푸름이는 푸름이이지 학생이 아니며, 젊은이는 젊은이이지 학생이 아닙니다.

 학생만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교사 또한 배우는 사람입니다. 서로 배우는 사람이고, 서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교사라고 하는 전문지식인이 학생이라고 하는 덜 여문 풋내기한테 숱한 지식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로서로 어른과 아이, 또는 어른과 푸름이, 또는 늙은이(어르신)와 젊은이라는 사이로 만나면서 서로서로 다른 삶과 넋과 말을 느끼는 가운데 서로서로 아름다울 길을 깨달아 다 함께 발돋움하며 즐거울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배움마당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 “깡패도 착한 깡패, 나쁜 깡패가 있어?” “당연하지. 아양 형은 착한 깡패야. 이것 봐, 우리한테 초콜릿도 주잖아. 선생들이 우리한테 초콜릿 준 적 있어?” ‘치, 거기서 초콜릿 이야기가 왜 나와? 그치만 아양 오빠는 늘 우리 친구였어. 선생님 중에 우리 친구는 한 명도 없어.’ 하고 도메코는 생각했다. “그치만 세상에 정말로 착한 깡패가 있을까?” ..  (37∼38쪽)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교사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길 수 있어야 교사입니다. 무엇이든 모르고 있는 학생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함께 하며 함께 배우고 함께 즐기는 마음을 키우는 학생입니다.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다니며 내 동무하고 이웃하고 살붙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배운 적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열두 해를 거쳐 들어갔던 대학교에서도 ‘함께’ 살아가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배울 수 없었다고 느낍니다. 중학교라는 문턱을 밟자마자 이런 곳은 곧바로 때려치워야 한다고 느꼈으나 여섯 해를 마지못해 참았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네 해를 더 감옥소살이를 해야 한다고 느끼니 몹시 아찔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은 아주 마땅히 다니지 말아야 할 곳이어서, 다섯 학기까지 참다가 그예 그만두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학교라는 곳은 내 동무와 이웃과 살붙이하고 아름다이 부대낄 삶을 가로막는 슬픈 울 안이라고 느낍니다. 기쁜 열린 마당이 될 수 있고, 신나는 열린 배움터가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돈과 큰 힘과 높은 이름을 꿈꾸면서 학교를 자꾸자꾸 더 굳센 감옥소로 다져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눈물을 잃고 웃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 《악동들의 주머니》(양철북,2006)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그림 : 최정인
 └ 책값 :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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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씻김


 다음달에 두 돌을 맞이할 딸아이가 제 아빠 발에 물을 묻힌 다음 비누를 바르고 다시 물을 뿌려 씻어 준다. 아빠랑 엄마가 갈마들며 아이를 씻기곤 하지만, 으레 아빠가 아이를 훨씬 자주 씻어 주고 있는데, 아빠 발을 아이가 씻어 주기는 오늘이 처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엄마 발이라든지 할머니 발은 일찌감치 씻어 주었다고. 이런 우리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 앞에서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말을 늘어놓는데다가 어떤 사람을 사귀고 어떤 물건을 쓰는 가운데 어떤 매무새로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가를 제대로 따지거나 살피거나 다스리거나 곧추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들 누구나 ‘어른’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 나라를 쉬 망가뜨리고 말겠다고 느낀다. 책은 한 권조차 없어도 되고, 책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안 읽어도 된다. 학교는 꼭 하루뿐이어도 안 다녀도 그만이고, 학교란 곳은 아예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이한테는 어버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스승이다. 아이한테는 제 살림집과 마을과 골목이 바로 배움터이다. (4343.7.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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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7-20 15:00   좋아요 0 | URL
뒤집어 말하면 아이도 우리 어른들의 스승이지요.
저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봅니다.

파란놀 2010-07-20 15:38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랑 함께 살아가면서
그예 서로 좋은 동무로 지내며
즐겁구나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