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달팽이와 개구리


 퍼붓는 빗길을 헤치며 자전거를 달려 읍내를 다녀오는 길에 나비와 달팽이와 개구리를 만난다. 차에 치여 그만 숨을 거둔 나비 한 마리가 길섶 한켠에 쓰러져 있다. 비를 맞아 젖은 날개를 어쩌지 못하고 꼼짝 않는 나비가 길섶 흰 금에 앉아 있다. 달팽이가 어디부터 기어왔는지 모를 노릇인데 길섶 가장자리에서 기고 있다. 길섶 물 고인 웅덩이에서 놀던 개구리는 내 자전거가 물웅덩이를 가로지를 무렵 화들짝 놀란 듯 길 옆 풀숲으로 뛰어든다.

 자동차들은 빗길에 나비를 그냥 치거나 밟을까 걱정스럽다. 자동차들은 노란 금과 흰 금 안쪽으로 얌전하고 천천히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한테는 달팽이가 보일 노릇이 없으니 작은 돌멩이 하나 밟았다고 여기거나 아예 못 느낀 채 조그마한 목숨 하나 저승으로 보내겠구나 싶다. 그나마 개구리 한 마리는 내가 풀숲으로 보내 주었기 때문에 얼마쯤이나마 더 살아갈 수 있겠지. (4343.8.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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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웅진 세계그림책 132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서애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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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외로우면 우리 집에 놀러 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 앤서니 브라운, 《나와 너》



 어떤 이들은 앤서니 브라운 님과 같은 그림쟁이를 두고 “그림책 독자라면 누구나 최고의 작가라고 손꼽는” 같은 꾸밈말을 달아 놓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웁니다. ‘최고’란 “가장 높음”이나 “가장 훌륭함”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그림쟁이보다 앤서니 브라운 님이 가장 돋보인다거나 높다거나 훌륭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소리인 셈입니다.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끼기에 따라 다를 텐데, 누군가는 닥터 수스 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테고, 아무개는 윌리엄 스타이그를 첫 손가락으로 삼을 테며, 어떤 이는 버지니아 리 버튼 님 같은 그림쟁이는 없다고 침을 튀기리라 봅니다. 마리 홀 엣츠 님을 으뜸으로 치는 분도 있을 테고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가 다르기에 그림책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다릅니다. 모두들 하는 일과 즐기는 놀이가 다른 까닭에 그림책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릅니다. 누구나 서 있는 곳과 삶터와 마음밭과 살림돈과 가방끈이 다르니까 그림책을 읽는 눈높이와 눈결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한테는 그림책을 일군 그림쟁이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누구 그림은 어떠하고 아무개 그림은 저떠하다 말할는지 모르나(이를테면 논문이나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아이들은 그림책 하나하나를 꾸밈없이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생각합니다. 굳이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이라서 더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딱히 닥터 수스 님 그림책이기에 더 재미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드시 윌리엄 스타이그 님 그림책인 까닭에 한결 아름답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꼭 마리 홀 엣츠 님 그림책이니까 훨씬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림책 하나마다 다른 결을 살피고, 같은 그림쟁이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책마다 다른 손길과 마음길을 담았음을 읽습니다.

 서른 살 나이에 그리는 그림책에는 서른 살까지 살아오며 마주하고 부대끼며 보듬은 삶을 담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는 그림책에는 마흔 살까지 사는 동안 만나고 복닥이며 어루만진 삶을 싣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이는 그림책에는 쉰 살까지 지내며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며 어깨동무한 삶자락을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서른 살 나이에 그린 그림책에는 서른 살 그림쟁이 숨결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은 그림책에는 마흔 살 그림쟁이 숨소리를 들으며 반갑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인 그림책에는 쉰 살 그림쟁이 숨넋을 곱씹으며 고맙습니다.

 우리는 그림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서 ‘우와, 아무개 그림책이 새로 나왔네!’ 하고 놀랄 수 있을 터이나, 이렇게 놀라기 앞서 ‘이야, 이 그림책 참 좋구나!’ 하고 놀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움이 절로 터져나오는 그림책이 아니고서는 구태여 사들일 까닭이 없고, 펼쳐 볼 일이란 없으며, 둘레에 나누거나 보여줄 구석이 없다고 느낍니다.

 앤서니 브라운 님 새 그림책 《나와 너》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영국에서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새로운 틀로 꾸며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줄거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또 이런 줄거리를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영국 옛이야기이든 노르웨이 옛이야기이든 포르투갈 옛이야기이든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피며 돌아볼 대목이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가슴을 얼마나 두근두근 쿵쾅쿵쾅 울리는가’라든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마음자리에 어떻게 스며들면서 웃음이나 울음을 길어올리는가’입니다.

 제 어린 날을 생각해 봅니다. 국민학생 때였는데 우산을 깜빡 잊은 채 학교에 갔고 공부를 마칠 즈음 비가 퍼붓습니다. 꽤 걱정이 됩니다. 수업하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창밖을 내다 봅니다. 비가 언제 그치려나,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누가 집에서 마중을 나오려나. 집에서 날 마중나올 사람이란 없을 텐데, 이 빗길을 어떻게 헤치고 가나. 빗길을 헤치려면 가방이 안 젖도록 어떻게 해야 하나. 비닐봉지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나한테는 봉지조차 하나 없는데.

 어린 날,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찾아와 주신 적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일로 바쁘셔서 나와 주실 수 없었겠지요. 동무들 가운데 몇몇 아이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 앞으로 나와 줍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아이는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비를 쫄딱 얻어맞으며 집으로 쭐래쭐래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끔가끔 어떤 어른이 “이런! 비를 맞고 가는구나!” 하면서 당신이 쓰던 우산을 저 같은 아이한테 씌워 주며 “어디까지 가니? 네가 가는 길까지는 우산을 같이 쓰자.”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외롭게 떨어진 채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아이는 있습니다. 요즈음이야 우산 하나 아주 흔하고 값싸다고 하지만, 이토록 값싸고 흔한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하는 아이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이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외로이 빗길을 걷는 아이한테 따숩게 말을 건네는 어른이란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오늘날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이나 광주나 …… 이런 큰도시뿐 아니라 시골마을에서 이와 같이 따숩게 말을 건네며 손수건이든 수건이든 건네며 비를 닦으라 한다든지, 아예 우산을 안기면서 “어른인 나는 우산을 하나 새로 사도 되거든.” 하고 말할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그림책 《나와 너》에 나오는 노랑머리 아이는 홀로 말없이 후미진 길을 걷다가 문이 빼꼼 열린 집으로 살며시 들어갑니다. 문이 빼꼼 열린 집에 차려진 밥상을 보며 왠지 모를 너그러움과 포근함을 맛보고는, 이내 ‘낯선 집에 사는 아이 몫’으로 주어진 밥그릇을 싹싹 비웁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노랑머리 아이가 사는 집에서는 느끼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 즐거움을 실컷 느끼면서 ‘낯선 집에 사는 아이 잠자리’에까지 기어들어 달콤하게 잠이 듭니다. 그러나, 낯선 집 임자는 곧 집으로 돌아오고, 낯선 집 아버지와 어머니는 몹시 성이 났습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깜짝 놀라 후다닥 내뺍니다. 노랑머리 아이한테 밥과 걸상과 잠자리마저 빼앗긴 낯선 집 아이는 제 엄마 아빠랑 달리 노랑머리 아이한테 성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크게 놀랐을 뿐입니다. 꽁지가 빠지게 내빼는 노랑머리 아이를 창문으로 내다 보던 낯선 집 아이는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랑머리가 바라보기에, 낯선 집에 살던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공원으로 마실도 다녀오는 걱정없고 즐거운 아이입니다. 언뜻 보기에 참 따사롭고 넉넉한 집에서 근심이든 슬픔이든 하나 없이 살아간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낯선 집 아이네 어머니나 아버지는 당신 아이한테 ‘당신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즐기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함께 있기는 있으나 다른 누리를 생각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공원으로 세 식구가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빠는 아빠 회사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엄마 회사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냥 딴청을 피웠지요.” 하는 모습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누리고 즐기는 모든 물질문명과 학원과 학교와 장난감 따위를 골고루 잘 갖춘 아이는 외롭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이 넘친다 할 수 있을까요. 어버이 두 분이 다 있고, 집에 자가용이 있으며 널찍한 아파트가 있는데다가, 학교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고 있으면, 이 아이는 즐거운 나날이라 할 만한가요.

 아이들을 생각하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되새길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든 물질문명을 다 누리는데다가 돈이 철철 흘러넘치면 즐거운 삶인가요.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을 얻고 있다면, 어마어마한 공직자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 어른들 당신은 기쁘며 아름다운 나날이나요. 아우디를 몰거나 뚜껑 없는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있으면 짜릿하며 신나는 삶인지요.

 그림책 《나와 너》가 우리한테 얼마나 살가우며 따사로운 그림책인가를 헤아리자면, ‘앤서니 브라운’이 일군 그림책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털어내어 이 그림책만 그림책 그대로 들여다보며 아이랑 오붓하게 읽고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조각 나누면 됩니다. (4343.8.7.흙.ㅎㄲㅅㄱ)


- 나와 너 (앤서니 브라운,웅진주니어,201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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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별 보기


 밤에 갑작스레 큰비가 미친 듯이 퍼붓다가 새벽에 이르러 말끔히 개며 구름이 모조리 사라지는 날씨가 이어진다.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밤에는 어둡게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으며, 길가에 등불이 없어 달빛과 별빛을 가로막지 않으나, 한동안 밤하늘 별을 시골에서조차 찾지 못했다. 엊저녁 참 오랜만에 밤에 비가 퍼붓지 않는다. 밤에 비가 퍼붓지 않으니 후덥지근하며 끈적끈적한 날씨가 사라지는데, 이와 함께 밤하늘 별빛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밤하늘 별빛은 아예 잊는다고 하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까만 밤하늘 빛깔과 애기별꽃 같은 별무늬를 잊는다면 얼마나 슬픈 노릇일까. (4343.8.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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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숨은 과학
정창훈 지음, 한성민 그림 / 봄나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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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에 깃든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3] 정창훈, 《자전거에 숨은 과학》


 자전거 한 대에는 숱한 과학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학 이야기를 좀더 헤아리거나 살필 수 있으면 자전거를 한결 즐거우며 사랑스레 즐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자동차 한 대에도 숱한 과학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자동차를 즐기는 사람들 또한 이와 같은 과학 이야기를 더욱 돌아보거나 보듬을 수 있으면 자동차를 한껏 즐겁고 신나게 즐길 수 있을 테지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에는 과학이 깃들어 있습니다. 과학 이야기 하나 깃들지 않은 물건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들이 이러한 대목을 살피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대목을 애써 살피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러저러한 물건을 쓸 수 있기도 합니다.

 아이들한테 많이 파는 책 가운데 ‘과학 그림동화’와 ‘과학 글동화’가 꽤 많습니다. 아이들이 재미나게 읽을 무언가를 건넨다(교양)는 뜻에다가 아이들한테 무언가 가르칠 수 있다(학습)는 뜻을 더한 책입니다. 우리 삶 어디를 보더라도 과학이 깃들어 있으니 굳이 ‘과학 무엇’이라 내세우지 않아도 되건만, 이처럼 ‘과학 무엇’을 내세워야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 주머니를 엽니다. 아이한테 교양과 학습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싶어 이러한 책을 선뜻 장만합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이라는 책은 책이름부터 아예 ‘자전거와 과학’이라는 틀을 내세웁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한테 이러한 책을 선물로 내민다면 아이들로서는 자전거를 한결 더 아끼거나 살필 수 있어 무척 좋다고 여길 만하겠지요. 이를테면 “자전거 전국 여행”이랄지 “자전거 세계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도 아이들 눈길을 금세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다루는 손”이라든지 “자전거에 담은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들 눈길은 얼마나 쏠릴 수 있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이러한 이름을 얼마나 눈여겨볼까요.

 만화책 《내 마음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그림) 13권 20쪽을 보면, 자전거집 딸내미가 제 동무한테 “자전거는 기계라, 마음 따윈 갖고 있지 않아. 하지만 만약 마음이 있다면 너한테 이렇게 말했을 거야. 매일 타 줘서 고맙다고. 더러워져도, 흠집이 나도. 아마 자전거에게는 그게 가장 기쁜 일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참말로 자전거는 기계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놓고 자전거에 무슨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날개를 펼쳐서 ‘자전거한테 마음이 있다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까?’ 하고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자전거에 깃든 과학을 말한다 할 때이든, 자전거에 숨은 과학을 보여준다 할 때이든, 우리는 자전거와 얽힌 과학이 우리 삶과 넋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함께 돌아볼 수 있어요.


.. 자전거 핸들도 자동차 핸들처럼 축에 붙어 있어. 물론 자전거 핸들은 둥근 원이 아니라 막대 모양이지. 어쨌든 자전거 핸들도 자동차 핸들과 마찬가지로 축바퀴의 원리를 이용한 도구야 ..  (44쪽)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자전거를 글감으로 삼은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은 자전거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전거에 깃든 과학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전거 책이 아닌 과학 책입니다. 자전거 이야기책이 아닌 과학 이야기책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거의 모르거나 생각조차 않으나, 몸으로는 다 알거나 깨달은 이야기를 과학으로 풀어낸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자전거를 사랑하려는 사람보다는 과학을 사랑하려는 사람한테 걸맞거나 어울립니다. 자전거를 즐겁게 타려는 사람보다는 과학을 즐기고 싶은 아이한테 알맞거나 들어맞습니다.


..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려면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해. 하지만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작용하고 있잖아. 바퀴와 지면 사이의 마찰력, 바퀴의 축에서 생기는 마찰력, 공기의 저항력 같은 힘들 말이야. 이런 힘들은 모두 자전거가 달리는 걸 방해하고 있어. 그래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저절로 멈추는 거야. 자전거 바퀴 축에 윤활유를 치는 이유는 마찰력을 줄이려는 거야. 그럼 자전거가 더 잘 달리지 ..  (110∼111쪽)


 사람들이 자전거를 장만할 때에 ‘자전거 설명서’를 챙기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모든 자전거에는 다른 물건하고 똑같이 ‘제품 설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손전화 한 대를 사도 두툼한 설명서가 딸립니다. 사진기를 사도 사진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밝힌 설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장만하는 사람치고 자전거에 딸린 설명서를 챙겨 읽는다든지 꼼꼼히 살핀다든지 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거의 아무도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서 ‘설명서에 다 나온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묻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자전거를 이야기하는 책’에 깃든 적잖은 이야기라든지 ‘자전거를 손질하는 정보를 다룬 책’에 깃든 웬만한 이야기는 모조리 자전거 설명서에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 설명서만 잘 읽으면 자전거를 어떻게 배워서 타야 하는가부터, 자전거를 올바르게 타는 매무새에다가, 자전거가 망가졌을 때 고치는 법까지 찬찬히 익힐 수 있습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자전거에 깃든 과학 이야기 또한 자전거 설명서에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설명서는 ‘과학’을 내세우지 않으나, 자전거가 구르는 법이나 멈추는 법이나 미끄러지는 법 모두 ‘과학’하고 잇닿아 있거든요.


.. 앞 브레이크는 제동력이 좋지만, 회전력이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 또 뒤 브레이크는 회전력이 생기지 않지만, 제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끄러지기 쉽지. 자전거의 속도를 낮출 때는 이 두 브레이크의 성질을 잘 이용해야 해 …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으면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해. 자전거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면 먼저 뒤 브레이크를 잡아. 그래야 자전거가 흔들리지 않거든. 뒤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으면 자전거가 미끄러져. 관성의 법칙에 따라 몸과 자전거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지 ..  (114쪽)


 자전거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든, 도시 아파트숲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든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보호장구를 알뜰히 챙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보호장구를 하지 않은 어버이를 보면 나무라는 분도 제법 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로서는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으면 퍽 아슬아슬하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탈 때에 반드시 보호장구를 하도록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지난날을 거슬러 생각하면, 지난날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어느 누구도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도시 골목길도 시멘트가 깔리지 않은 흙길이 꽤 많았습니다. 아니, 도시 골목길에 시멘트가 깔린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흙길에서는 달리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크게 벗겨지는 일이 드뭅니다. 으레 긁힌 생채기만 납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때에도 비슷합니다. 풀숲이 우거진 자리에 넘어질 때하고 시멘트 전봇대나 쇠붙이 자동차를 들이받을 때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이제는 법으로 못박았을 뿐 아니라 길바닥에도 큼직한 글씨로 새겨 놓는데, 학교 둘레에서는 30킬로미터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앞 길에서 자동차를 30킬로미티 밑으로 해서 달리는 자동차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 마음이 이렇습니다. 골목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 한강에 있는 자전거길을 달릴 때에 이곳 한강 자전거길이 ‘몇 킬로미터 넘는 빠르기’로 달리지 않도록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전거길에서 자전거한테 달리도록 하는 ‘가장 높은 빠르기’는 20킬로미터입니다. 20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면 서로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이 빠르기를 넘지 않도록 못박습니다. 그렇지만, 서울 한강 자전거길에서 20킬로미터 밑으로 달리려 하는 자전거꾼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또한, 자전거길에서 20킬로미터 밑으로 달릴 때에 자전거끼리 부딪히면 서로 얼마나 다치는지, 또 10킬로미터나 15킬로미터, 또는 7킬로미터로 달리다가 넘어져서 길바닥에 엎어지면 얼마나 다치는가를 제대로 아는 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헬멧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꼭 착용해야 하는 보호 장구예요. 헬멧을 쓰면 자전거 사고가 났을 때 머리 손상의 85퍼센트, 그리고 뇌 손상의 90퍼센트를 막을 수 있다고 해요. 헬멧 안쪽의 완충재나 바깥쪽의 플라스틱은 깨지면서 충격을 흡수해요. 따라서 완충재나 플라스틱에 금이 가 있으면 완충 기능이 떨어져요 ..  (141쪽)


 자전거에 숨어 있다는 과학을 말하는 《자전거에 숨은 과학》은 책 끝자리에 아이들보고 헬멧을 반드시 쓰라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이 헬멧을 썼을 때에는 안 썼을 때보다 한결 낫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아이들 자전거는 20킬로미터를 넘는 일이 드뭅니다. 아니, 아이들 자전거는 10킬로미터를 살짝 넘는 빠르기입니다. 서울이든 시골이든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만한 자리를 어른들은 마련해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겨우 자전거를 타겠다 싶은 골목이나 빈터에는 어른들이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자동차를 내달릴 뿐 아니라 아무 데나 차를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은 사람들이 걷는 거님길로 자전거를 자주 다니는데, 사람들이 걷는 거님길에는 얼마나 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아무렇게나 서 있는지요. 또, 가게마다 얼마나 많은 짐과 물건을 거님길에 쌓아 놓고 있는지요. 게다가, 거님길에는 얼마나 많은 전봇대와 배전반과 맨홀 따위가 있으며, 턱은 얼마나 높은지요.

 참말, 우리 터전을 돌아본다면, 우리들은 자전거 한 대를 놓고 과학을 말하기 앞서 자전거에 얽히거나 깃들어야 할 만한 따스하고 너른 마음을 이야기할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전거로 여행을 한다든지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든지 하는 이야기책은 곧잘 나오지만, 정작 자전거를 내 몸으로 여기듯이 사랑하는 이야기책이라든지 자전거를 내 삶으로 곰삭이는 이야기책은 아직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제 막 자전거를 좋아하려고 하는 아이들한테마저 더 많은 지식과 더 새로운 정보를 집어넣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서 든 만화책 《내 마음속의 자전거》 13권 70∼71쪽을 보면, 자전거집 딸내미가 “이 푸조(자전거)는 20년도 더 된 프랑스제 평범한 대중 자전거. 부품 따윈 전부 고철들이야. 그래도, 그래도! 내겐 이 세상에 이걸 대신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더! 소중한 것에 구형이나 가격 따윈 상관없다고!” 하고 외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마디처럼 우리들이 타는 자전거는 이 자전거 한 대와 얽힌 이야기와 삶이 소담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이 자전거 한 대에 얽힌 과학 또한 돌아볼 만하고 생각할 만한 대목임에는 틀림없을 테지만, 자전거에 얽힌 과학을 아이들하고 나누기 앞서 자전거를 즐기는 마음과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전거를 아끼는 마음을 먼저 밝히고 나누며 이야기할 우리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이라는 책을 덮으면서 무엇보다 이 대목이 아쉽습니다. 자전거에 숨은 과학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든지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과 돌보는 마음과 아끼는 마음을 펼칠 수 있는데, 이러한 마음자리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책 끝자리에 넣은 헬멧 이야기는 ‘헬멧 완충 기능’만 다룰 뿐, 어떠한 길에서 어떠한 빠르기로 달리다가 어떻게 부딪힐 때에 ‘완충하는 기능’인지를 제대로 과학답게 다루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산을 타는 자전거나 갖은 재주를 부리는 자전거를 탈 수 있으나, 여느 아이들한테는 여느 자리에서 타는 ‘생활자전거’입니다. 이 책 《자전거에 숨은 과학》에서도 여느 아이들이 여느 자리에서 타는 생활자전거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도록 이끄는 생활과학 이야기에 눈길을 맞추고 마음길을 모두어 놓았으면 한결 알차고 아름다우며 신났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른한테든 아이한테든 학문하는 과학이 아닌 살아가는 과학일 때에 뜻이 있습니다. 지식이 넘치는 과학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과학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4343.8.5.나무.ㅎㄲㅅㄱ)


 ┌ 《자전거에 숨은 과학》(봄나무,2010)
 ├ 글 : 정창훈, 그림 : 한성민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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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스 높새바람 5
안니 M.G. 슈미트 지음, 경히 언니 그림, 김경태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좋은 어른으로 살아갈 우리들
 안니 M.G.슈미트, 《미노스》



- 책이름 : 미노스
- 글 : 안니 M.G. 슈미트
- 옮긴이 : 김경태
- 펴낸곳 : 바람의아이들 (2004.7.15.)
- 책값 : 7800원


 (1) 내 둘레에서 마주하는 말과 이야기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들이 자동차 이야기를 하면 저는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골프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파트나 주식이나 펀드 이야기를 하면 하품이 나옵니다. 서울 홍대 앞 무슨 카페라든지 옷 상표라든지 이야기할라치면 조금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 아이는 엄마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루젖을 먹지 않았고, 딱히 가루젖을 먹일 까닭이 없이 자랐습니다. 둘레에서 무슨무슨 가루젖 회사 무슨무슨 물건을 이야기하면 저로서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한테는 천기저귀를 댔으니 종이기저귀 값이 어떠하고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 식구는 빨래기계 없이 살아갑니다. 천기저귀를 빨든 이불을 빨든 신을 빨든 손으로 빨래합니다. 손으로 빨래하며 빨래비누 한 장을 쓰니까 무슨무슨 세제라든지 표백제라든지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들한테 자전거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전거를 어떻게 장만하고 어찌어찌 손질하는가를 이야기하면 마치 전문가들만 아는 테두리에서 말하는 양 생각합니다. 자동차를 닦듯 자전거를 닦을 뿐이고, 손쉬운 자동차 손질처럼 손쉬운 자전거 손질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대목을 살피는 분이 무척 드뭅니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샌다든지 브레이크슈가 다 닳았을 때에 손수 고칠 줄 아는 분은 매우 적습니다. 이 나라 적잖은 여느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여느 회사 출퇴근을 한다든지 학교를 오간다든지 하는 일이란 거의 꿈조차 꾸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아이를 돌보며 키운다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는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은 드물게 있습니다. 참으로 드물게 있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니 여남평등이니를 들먹이고, 육아휴직을 외친다 할지라도, 아이를 돌보는 몫이 엄마와 아빠 모두한테 있음을 헤아리는 지식인이나 지성인이나 대학생이나 전문가나 교사나 어른이나 몹시 드뭅니다. 아이를 돌보는 몫뿐 아니라 집안일을 하거나 집살림을 꾸릴 때에 서로서로 돕고 거들며 함께하는 길을 살피는 이 또한 대단히 드뭅니다. 아이는 엄마 품이 따스하다고 느낀다지만, 아이가 아빠 품을 따스하게 안 느낄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일컫는 말이지 어머니 혼자만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온다고 아버지 몫을 제대로 하는 셈이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애 아빠인 제가 집에서 애 엄마랑 함께 아이를 돌보는 한편, 숱한 집살림을 함께 나누어 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곧이 받아들인다든지 스스럼없이 헤아린다든지 하는 이웃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으레 ‘왜 애 엄마가 할 일을 애 아빠가 하지?’ 하고 묻거나 ‘애 아빠가 밖에 나가서 돈 좀 벌어와야 하지 않아?’ 하고 묻습니다. 하다못해, 애 엄마보고 ‘애 엄마가 밖에 나가 돈 좀 벌어와요.’ 하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났습니다.

 손빨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손빨래하는 고단함과 즐거움을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즐거움과 함께 고단함이 있고, 고단하면서 즐거운 손빨래인 줄 느끼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다른 집살림도 마찬가지인데, 집살림이란 참으로 고단하면서 즐겁습니다. 홀가분하면서 괴롭습니다. 멋지면서 슬프고, 사랑스러우면서 얄궂습니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슬슬 밀며 다닐 수 있겠지만, 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한 팔에는 저잣거리에서 장만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끙끙대며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삼십 분을 거닐다 보면 아주 팔이 빠질 듯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잠든 아이를 안거나 업고 삼십 분 남짓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라치면 애 엄마 아빠나 아이나 온몸이 땀투성이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땀투성이가 되는 몸으로 부대끼는 삶과 사람과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땀투성이가 되는 몸뚱이가 느낄 고단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한 사람으로 고운 목숨 선물받아 꾸리는 삶을 아낌없이 누리는 하루하루란, 이와 같이 살아가며 몸으로 복닥이는 사람끼리 오순도순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집일 할 사람을 돈을 주어 둔다든지, 아이를 안고 다닐 짬에 자동차를 몰며 차에 아이를 싣고 다닌다든지, 포대기를 넣을 가방에 화장품이나 책을 넣는다든지, 아이 얼굴을 닦아 줄 손수건을 넣을 주머니에 디엠비나 엠피셋을 넣는다든지 하는 이들하고는 아이랑 복닥이는 삶을 나눌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는 숱한 사람들한테는 박세리라는 이는 골프여왕이라 할 만하고, 박찬호라는 이는 이름난 야구선수라 할 만하며, 박지성이라는 이는 잘나가는 축구선수라 할 만하며, 박태환이라는 이는 손꼽히는 수영선수라 할 터이며, 김연아라는 이는 빼어난 피겨선수라 하겠지요. 그러면 텔레비전을 안 보고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 땅을 부치고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한테는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주노동자들한테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고, 신문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켤 때에 따로 무슨무슨 새소식을 읽지 않습니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사회이든 문화이든 종교이든 운동이든 이런저런 새소식을 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 둘레에 기쁘며 슬프고, 재미나며 지루하고, 반가우며 구지레한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마실을 하다가 때때로, 밥집이나 술집이나 이웃집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밥집이나 술집이나 이웃집에 놓인 신문을 들춰봅니다. 우리 누리를 옳고 바르게 일구겠다고 외치는 이들이 엮는 매체라 할지라도 ‘이주노동자 눈길’로 기사를 다루거나 쓰는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농사꾼과 여느 공장노동자 눈매’로 기사를 만지거나 가꾸는 모습을 마주하기 힘듭니다. ‘고졸자나 가정주부 눈높이’로 기사를 꾸리거나 엮는 모습을 만날 길은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론은 있고 주장은 있는 신문이요 방송이며 책입니다. 학문으로 갈고닦았고 사상으로 서 있는 신문이고 방송이며 책입니다. 그렇지만, 뜨거운 땀방울과 따순 손길과 너그러운 넋으로 이루어진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란 더없이 드물거나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살가운 손짓과 고운 사랑과 애틋한 마음씨로 어우러진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란 참으로 없거나 마주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비 한 마리를 이야기할 때에도 ‘나비 이야기를 참 잘 엮은 좋은 그림책’을 읽으며 나비를 이야기하지, 우리 둘레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와 부대낀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엊저녁 갑작스레 퍼붓는 빗줄기를 따라 나비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살며시 들어왔는데, 비를 그으려고 여느 살림집으로 들어온 나비 한 마리를 놓고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일구는 몸짓을 둘레에서 마주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들 나비 도감을 보고 나비 그림책만 보며 나비 다큐멘터리를 볼 뿐입니다.

 여느 사람들 삶이 살가이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은 좋은 그림책 《엄마의 의자》(베라 윌리엄스,시공주니어,1999)가 있습니다.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참 쉽습니다. 고되게 일하는 엄마가 느긋하게 쉬는 걸상 하나를 어렵사리 다시 마련했다는 줄거리입니다. 집에 난데없이 불이 나서 걸상이고 뭐고 다 타고 말아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웃집에서 이것저것 도와주어 다시 살림을 꾸렸고, 그림책 주인공은 한 푼 두 푼 모아서 드디어 푹신한 걸상 하나 새로 장만한다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쉬운 줄거리 흔한 이야기를 그림책 아닌 우리 삶에서 마주하려고 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멋진 이야기를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스포츠중계 아니고서는 찾지 못하는 요즈음 우리들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나 책 아니고서는 마주하지 못하는 요즈막 우리들입니다.

 이야기는 없는데 사람은 득시글합니다. 이야기는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데 돈은 흘러넘칩니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으나 자동차며 아파트며 경제성장이며 우뚝우뚝 치솟습니다.


 (2) 어린이책 《미노스》 읽기


 어린이책 《미노스》를 읽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책을 애써 읽을 생각이 없었으나, 아이 엄마와 함께 책방마실을 할 때에 아이 엄마가 골랐습니다. 네덜란드사람이 고양이를 글감 삼아서 쓴 《미노스》이기에, 저보고 이 책이 어떠할 듯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흘끗 살피며 “고양이 이야기네.” 하다가는 한낱 고양이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끼며 함께 책값을 셈했고, 아이 엄마보다 제가 먼저 읽었습니다. 책 겉에는 글쓴이가 네덜란드에서 아주 손꼽히는 어린이책 작가이며, ‘어린이책에서 노벨상으로 일컫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곳곳에 적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안데르센’ 같은 이름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안니 M.G. 슈미트’ 같은 이름은 알아볼 이가 아주 드물 테지요. 아니, 우리 나라에는 이분 책이 고작 세 권 옮겨졌을 뿐이요, 그나마 하나는 예전에 판이 끊어졌고, 다른 하나는 2009년에 나왔습니다. 《미노스》(2004)라는 책을 내놓은 출판사로서는 이 작품이 아무리 빼어나고 재미있다 할지라도 선뜻 작품만으로 사람들한테 알리거나 나누기는 힘들었으리라 봅니다.

 늘 그렇지만, 이 작품 《미노스》를 써낸 ‘안니 M.G.슈미트’라는 네덜란드사람이 네덜란드에서 아주 손꼽히는 분이기 때문에 이 작품 《미노스》가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책에서 노벨상으로 일컫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작품 《미노스》가 훌륭하다거나 재미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삶은 삶이며 작품은 작품입니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 없고, 널리 이름난 사람이라 해서 아름다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착하고 참되며 곱게 제 한길을 걷는 가운데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나누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훌륭합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같은 분은 더도 덜도 아닌 돈을 그때그때 이웃돕기로 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누구처럼 몇 백 몇 천만 원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십만 원 이십만 원씩 푼푼이 퍽 자주 내놓았습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어디이든 십만 원이나 이십만 원을 내놓는 사람 이름은 실어 주지 않습니다. 싣는다 할지라도 코딱지만큼 자잘한 글씨로 한 귀퉁이에 실어 놓으니 권정생이든 박정생이든 최정생이든 누구이든 알아볼 수 있지 않아요. 누군가를 돕는 삶이란 나 스스로를 돕는 삶이고, 누군가한테 사랑을 나누는 손길이란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손길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시골 저잣거리에 마실을 다니며 먹을거리를 손수 장만하면서 당신 삶을 꾸리는 가운데 시골 저잣거리 장사꾼들마다 장사하는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린이책 《미노스》에 나오는 ‘미노스’는 사람이 아닌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가운데 도시 골목동네 한켠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입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 미노스는 무슨 화학 실험실 곁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다가 쓰레기통에 있던 무언가를 먹으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꿈 같은 소리라 여길 만합니다만, 오늘날 과학자들이 벌이는 숱한 실험이란 몹씨 끔찍할 뿐 아니라 사람 유전자까지 건드리고 있음을 돌아본다면, 그저 문학책에서 ‘거짓말처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닌 ‘참말처럼’ 우리 삶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따이이따이병이나 미나마따병 피해자들이라든지, 미국 군인이 베트남에 뿌려댄 고엽제 때문에 2세와 3세가 받는 피해를 살피면, 사람이 벌인 생화학 실험과 과학 실험과 무기 실험과 전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몸이 뒤틀리거나 비틀리며 엉망이 됩니다. 이뿐 아니라 푸나무와 짐승마저 엉망이 되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 가운데 ‘유전자 안 건드린 곡식’이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고기 가운데 ‘유전자 건드린 곡식으로 만든 사료와 항생제’를 안 먹고 큰 돼지나 닭이나 소 들이란 거의 없습니다.

 고양이 미노스는 사람이 저지른 끔찍한 일 때문에 얼결에 사람 모양이 되고 맙니다.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걷고 움직입니다. 미노스는 사람 꼴이 되었어도 스스로 고양이요 고양이 말을 하고 고양이 노래를 부릅니다. 고양이처럼 새를 잡아먹으려 하고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고양이처럼 나무를 타고 지붕을 타며 잠을 잡니다. 그런데 미노스는 고양이 꼴이 아닌 사람 꼴인 까닭에, 미노스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미노스를 얄궂게 바라봅니다. 미노스한테 ‘고양이 짓’이 아닌 ‘사람 짓’을 하라고 들볶습니다. 똑같은 틀에 똑같은 울타리에 똑같은 고리를 채우려 합니다.

 둘레 사람들이 들볶는 가운데에도 ‘사람고양이(또는 고양이사람)’ 미노스는 고양이하고 사귀며 지냅니다. 고양이하고 사귀며 지내다가 당신 몸 하나를 건사해 주고 밥(먹이)을 챙겨 주는 토마한테서 따스함과 넉넉함을 느낍니다. 미노스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람내음을 살가이 받아들이거나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고양이인 이녁을 꾸밈없이 받아들이거나 맞아들이는 토마라고 하는 사람 하나한테 이끌립니다. 미노스로서는, 고양이 몸에 고양이 삶일 때이든 사람 몸에 고양이 삶일 때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제 목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즐길 뿐입니다. 사람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제 삶을 잃거나 버리지 않아요. 고양이 껍데기를 쓴다고 해서 제 삶이 더 아름답거나 알차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어떤 껍데기이든, 어디에서 지내든, 누구하고 어울리든, 미노스 스스로 미노스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깨닫습니다. 아직 어린 고양이였던 미노스는 사랑과 삶과 웃음과 눈물을 고이 헤아리면서 ‘어른’ 고양이사람(또는 어른 사람고양이)인 이녁으로 새로 태어나는 나날을 누립니다.

 삶을 따져야지 가방끈이라는 학력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살펴야지 얼굴이나 몸매를 살필 일이 아닙니다. 믿음을 섬겨야지 이름값 따위를 섬길 노릇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을 찾아야지 돈을 찾을 노릇이 아닙니다. 눈물과 웃음을 골고루 맞아들여야지 권력이라는 주먹다짐을 맞아들일 노릇이 아니에요.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우리들입니다. 좋은 어른이 될 우리들입니다. 좋은 삶을 사랑할 우리들입니다. 좋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우리들입니다. 좋은 일과 좋은 놀이를 붙잡을 우리들입니다. 좋은 밥과 좋은 집이란 돈이 아닌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며 따스함과 넉넉함으로 장만할 수 있음을 깨달을 우리들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를 더 먹었다고 더 어른이지 않습니다. 나이값을 해야 어른이고, 나이에 따라 알맞춤하게 값을 하는 아름다운 삶이어야 바야흐로 아름다운 어른입니다. 아름답게 살아가야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아른다운 어린이나 어른으로 자리잡습니다.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경로우대’만을 바란다면 참으로 슬픕니다. 어른이란, 아니 모든 사람이란, 저마다 제 땅 제 터전 제 누리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땀흘리고 손을 맞잡는 사람들이에요. 《미노스》에 나오는 미노스는 아름다움이라는 열매를 찾고 즐기고 누리며 나누는 살가운 길을 부드럽고 맛깔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사람은 왜 ‘고양이 말’을 듣지 못하는가


 어린이책 《미노스》를 읽다 보면, 사람은 왜 고양이 말을 듣지 못하는가 하고 자꾸자꾸 고개를 갸웃할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들 가운데 고양이 말을 듣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개 말을 듣는다거나 새 말을 듣는다거나 보리 말을 듣는다거나 복숭아 말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쉬리가 하는 말이라든지 송사리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밤나무가 하는 말이라든지 봉숭아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모두들 돈이 들려주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저마다 아파트가 들려주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자꾸자꾸 자가용이 들려주는 말 아니고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아이가 들려주는 말뿐 아니라 이웃 아이가 노래하는 말은 아예 귀담아듣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미노스》라는 책을 읽을 때에는, 사람들 말인지 고양이들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말인지를 찬찬히 가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따로 고양이 말이라든지 사람 말로 가른다기보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뭇목숨 말마디라고 느끼며 새삼스레 《미노스》를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4343.8.4.물.ㅎㄲㅅㄱ)


[11∼12쪽] “이 봐. 내가 자네 좋아하는 거 알지? 자넨 아주 똑똑한 친구고. 재미있는 기사도 쓸 줄 알아. 하지만 여긴 신문사야. 신문에는 뉴스가 나와야 하는 법이야.” “뉴스라면 이미 신문에 많이 나와 있는걸요! 전쟁 소식도 있고. 뭐 그 비슷한 다른 소식들도 있고요. 살인 사건도 있잖아요! 제 생각엔, 사람들이 가끔 고양이나 새로 난 잎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서로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는 것도 뉴스를 읽는 것만큼 좋은 일인 것 같은데요 …….”

[19쪽] “벌써 생선 냄새를 맡았구나! 부엌으로 가자. 요리해서 같이 먹어야지. 플루프(고양이 이름). 생선 한 마리 통째로 줄게. 너한테 생선을 사 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왜냐면 말이지. 내일. 나 해고당할 거거든!  길거리에 나앉을 거야! 쫓겨나고 말 거라고! 그러면 돈 한 푼 못 벌고, 너랑 나랑 같이 구걸이나 해야겠지.” “야옹!”

[53쪽] “가지 마! 떠돌이 고양이로 살라고! 자유롭게 말야! 그렇지 않으면 한 달만 지나도 주사를 맞으러 동물병원에 다니는 신세가 될 거야.”

[59쪽] 그는 예전처럼 숫기가 없었다. 이 뉴스는 모두 고양이들한테서 들은 것이었다. 그는 받아적었을 뿐이다. 그것 말고 다른 일을 한 게 있다면 …… 아주 부지런히, 고양이들이 얘기한 것이 정말로 사실인지 확인해 보는 것 정도였다.

[65쪽] “토마 씨, 그건 못하겠어요! 사람들이 무섭거든요.” “바보같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미노스는 긴 눈을 가늘게 드고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어색해져서 얼굴을 돌렸다. 토마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얘길 할 수 있지? 나도 수줍음 많고 겁 많은데! 나 역시 사람들보다 고양이들을 만나는 게 좋은데 말야!’

[93쪽] “저 여자가 바로 그 토마 시네 여자래!” “비서래요 …… 상자 안에서 잔다는!” “밤에는 지붕 위를 걸어다닌다지!” “정말 이상한 여자야!” 빵집 주인이 그 얘기를 다 듣고는 말했다.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면 됐지요. 호밀빵 반 덩이 달라고 하셨나요?”

[116∼117쪽] “시장님인가요?” 미노스가 속삭였다. “아뇨. 탈취제 공장 사장 말베르 씨예요. 아주 유명한 사람이죠. 좋은 일을 많이 하거든요.” “어떤 종류의 좋은 일인데요?” 미노스가 궁금해했다. “자선 단체에 돈을 내죠.”

[188쪽] “기사를 스실 건가요?” “예.” “어머! 그 기사를 쓰신다고요? 말베르에 관해서요?” “맞아요. 증거가 있든 없든 신경 안 쓸래요. 증인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요!”

[217쪽] “사진이 잘못됐습니다!” 강당 안이 술렁거렸다. 그때 다음 슬라이드가 나타났는데 이번엔 아주 분명하게 말베르 씨가 개를 때리는 채찍으로 외퀴메니 고양이를 때리는 장면이었다. 말베르 씨는 정말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건 우리 고양이예요!” 목사가 소리쳤다.

[239쪽] 플루프는 그에게 몸을 비벼대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고양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게 그렇게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건 알 수 있었다!

[250쪽] “고양이들이 하는 평범한 짓은 뭐든지 다시 할 수 있어! 뭘 생각하고 망설이는 거야?”

[270쪽] 토마는 부엌 창 밖으로 몸을 빼고 소리쳤다. “아침 식사 준비 다 됐어요! 고양이랑 사람이랑 모두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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