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참 따뜻하다
유선진 지음 / 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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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8 ― 할머니 삶자락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 유선진, 《사람, 참 따뜻하다》



- 책이름 : 사람, 참 따뜻하다
- 글 : 유선진
- 펴낸곳 : 지성사 (2009.10.26.)
- 책값 : 12000원



 (1) 제대로 닥친 추위를 느끼며


 새벽부터 깨어난 아기는 한낮까지 잠깐이나마 잠들지 않습니다. 다문 삼십 분이라도 아침잠을 자 준다면 아빠와 엄마는 숨을 돌리며 글을 쓴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할 텐데, 이렇게 숨돌릴 겨를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한테는 마땅한 몸짓일 테니,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아기하고 옹글게 마주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나중에 아기가 크면 엄마 아빠가 아이보고 ‘엄마랑 아빠랑 함께 놀아 주렴’ 하고 노래를 불러도 밖에 나가서 동무들하고 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기는 ‘나중에 엄마 아빠 스스로 안타까워 하지 말고, 바로 이 자리에서 놀아 주셔요’ 하는 마음일는지 모릅니다.

 셈틀 앞에 앉았으나 글쓰기는 못하고 아기하고 놀던 아침나절, 무슨 냄새가 나는가 싶어 아기 기저귀를 만지니 젖어 있습니다. ‘쉬를 했구나’ 생각하며 기저귀를 벗기려는데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아기 엉덩이에 넓게 눌러붙은 똥이 보입니다. ‘언제 이렇게 똥을 누었지?’ 다시 기저귀를 엉덩이에 대고 아기를 덥석 안고 씻는방으로 갑니다. 씻는방 바닥에 똥기저귀를 내려놓고 따순 물을 받아 아기 아랫도리와 엉덩이를 씻습니다. 다 씻은 아기는 마루로 보내고 똥기저귀를 빱니다. 냄새가 빠지라고 창문을 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우중충합니다. 비가 오려나? 올겨울에는 눈 구경이 어려울 듯한데.

 똥을 푸지게 눈 아기는 뱃속이 시원한지 눈자위가 벌거며 졸음이 가득한 데에도 잠잘 생각은 않고 더 놀자고 칭얼거립니다. 아빠는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인형놀이를 합니다. 벌써 두 시간 반을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데 아기는 지루해 하지 않고 팔팔합니다. 아홉 시 반이 조금 못 되어 옆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빠는 아기한테 이길 수 없다며 잠자리에 듭니다. 이제부터 엄마하고 더 놀든지 잠들든지 하기를 바라면서.

 살짝 눈을 붙이지만 얼마 잠들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집을 찾아올 처가 식구를 헤아리며 기저귀 빨래를 해 놓습니다. 옆지기는 마루와 방을 쓸고 닦습니다. 밥을 한 솥 해 놓고 집살림을 조금 갈무리합니다. 그래 보았자 아기가 도로 어질러 놓겠지만.

 도서관 문을 열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문을 열고 골목을 내다봅니다. 싸락눈이 온 골목을 휘감습니다. ‘눈?’ 아침에 본 구름은 비구름이 아닌 눈구름이었을까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사진기를 챙기며 집을 나섭니다. 바깥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이런 날씨에 옆지기와 아기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장갑을 끼고 골목을 걷습니다. 온도가 퍽 떨어졌는지 손가락이 금세 얼어붙습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려 해도 손가락이 굳어 잘 안 움직입니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늘 푸념하고 있는 소리를 하늘이 들었을까요. 두 시간 반쯤 골목마실을 하며 겨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귀와 코와 입이 시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걸리적거리지 않으며 따뜻한 장갑 한 켤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혼자 살며 한겨울에도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달릴 때에는 ‘하루 열 시간을 자전거로 달려도 손가락이 얼지 않을 만한 장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겨울날 열 시간쯤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리면 손가락도 얼고 발가락도 어는데, ‘발가락이 안 얼 만한 양말이 있으면’ 하는 꿈도 함께 꾸었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모진 추위를 견디게 해 줄 좋은 장갑과 양말이 더없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저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에 땀이 나니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내내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 손과 발과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 한 벌이 참말 그립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늘 그 자리에서 동냥을 하는 사람을 볼 때에도 ‘값싼 장갑 한 켤레’를 건넬 수도 있지만, ‘그저 손에 끼는 장갑이 아닌 손이 따뜻할 장갑’을 건넬 수 있기를 꿈꿉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 그저 배만 가득 채우는 싼 먹을거리도 나쁘지 않겠으나, 조금 더 돈을 치르면서 내 삶을 채우고 내가 얻은 곡식과 푸성귀를 길러 준 일꾼한테까지 이바지를 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옷 한 벌을 장만할 때에도 같은 마음입니다. 책 하나를 사들여 읽을 때에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더 싸게 싸게 또 싸게 싸게 해서 내 주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짐스럽다면 반가울 수 있습니다만, 나 혼자만 홀가분한 삶이기보다는 내 이웃과 함께 홀가분하며 기쁠 삶이고 싶습니다. 내가 얻는 대로는 아니나, 내가 얻은 기쁨을 내 이웃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보면, 지난날에는 이런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어리고 철부지일 때에는 그저 ‘돈을 적게 쓰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적게 쓰고 덜 쓰고’ 하면서 내 삶을 가꾸고 내 삶터를 일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적게 쓰는 삶과 덜 쓰는 삶이란 틀림없이 나와 내 둘레 터전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밑바탕을 튼튼하게 일구지는 못합니다. 겉훑기예요. 참으로 도움이 되려면 ‘쓸 곳에 알맞게 써야’ 하는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적게 쓰는 삶에서 알맞게 쓰는 삶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덜 쓰는 삶에서 올바로 쓰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적게 쓰거나 덜 쓰는 삶이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적다’는 테두리에서 머뭅니다. 알맞게 쓰거나 올바로 쓰는 삶이란 ‘아예 한푼조차 안 쓸 때가 있는 한편, 내 모두를 송두리째 바칠 때가 있’습니다. 써야 할 곳에는 아낌없이 쓰고, 쓸 까닭이 없는 데에는 조금도 안 씁니다. 이와 같은 삶이 알맞게 쓰는 삶이요 올바로 쓰는 삶입니다. 그렇지만 제 삶은 아직 알맞게 쓰는 삶이나 올바로 쓰는 삶에 가 닿지 못합니다.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 시늉이나마 한다 말할 수 있는데, 하루아침에 탈바꿈하는 꿈이 아니라 나날이 차츰차츰 애쓰는 땀방울로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갑작스레 닥친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붙으며 사진을 찍는 동안 뼛속 깊이 느끼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를 느끼며 찍는 사진에는 추위와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담아야 한다고. 사진기로 골목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추위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히는 골목사람 삶터에 그동안 배어 온 추위를 함께 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이 추위를 살며시 녹이는 따스한 손길을 놓치면 안 된다고.


 (2) 책에 담는 할머니 삶


 몇 해 앞서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2007)라는 책을 읽으며 참으로 기뻤습니다. 기쁘면서 반가웠고, 반가우면서 고마웠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이렇게 받아들이고 곰삭이고 되새기면서 글 한 줄 우리한테 선물로 내어준다고 깨달으면서 기뻤습니다.

 요 한 달 사이에 《사람, 참 따뜻하다》라는 책을 읽으며 새롭게 즐거웠습니다. 즐거우면서 놀라웠고, 놀라우면서 흐뭇했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알차고 푸진 말마디를 우리한테 선물로 내려주는구나 하고 깨달으며 즐겁습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쓴 문영이 할머님은 1935년에 태어났습니다. 《사람, 참 따뜻하다》를 쓴 유선진 할머님은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느새 일흔을 넘기고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가는 두 분입니다. 생각을 곰곰이 가누며 당신들 또래 할아버지들은 어떠한 글을 쓸까 궁금해집니다. 아니, 일흔을 넘기고 여든이 되어 가는 ‘예부터 글을 써 온’ 할아버지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일본사람 ‘사하시 게이죠’라는 분은 《할아버지의 부엌》(여성신문사,1990)이라는 책을 쓰면서 ‘나이 들어 혼자 남는 할아버지들이 집일을 하나도 못하며 너무 힘없이 쓰러지며 무너지는 삶으로 끝장이 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앞서 집일을 익히며 늙은 삶을 아름다이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아름답게 늙는 지혜》(정우사,1985)라는 책을 쓰며 ‘늙음은 덧없음이나 못남이 아니라 새롭게 아름다움을 찾는 나이’라고 밝히며 스스로 늙어 가고 있음을 돌이킵니다. 나이가 들어 가기 때문에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사하시 게이죠 님 책은 《아버지의 부엌》(지향)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새로 나왔고, 소노 아야코 님 책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리수)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새로 나왔습니다).

 모두들 어린 날은 어린 날이기에 아름다우며, 어린 날 철없이 구는 모든 짓거리는 철없이 굴 수 있는 기운이 있는데다가, 뒷날 스스로를 깨닫고 고쳐 나갈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날은 철이 차츰차츰 들면서 어린 날부터 품어 온 꿈을 일구어 가는 땀방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늙은 날은 기운이 없어 예전과 같지 않은 모습이 되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을 품에 안고 지내 온 삶이 아름답고 당신 꿈을 뒷사람한테 고이 물려줄 수 있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선진 님 책 《사람, 참 따뜻하다》는 수필문학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수필문학이라는 이름 없이 당신이 보내 온 삶을 적바림한 이야기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따로 어떤 문학 갈래로 나누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굳이 어떤 대단한 문학이 되어야 하는 글이 아니요, 반드시 어떤 높은 이름을 얻어야 하는 자귬이 아닙니다. 아픈 지난날을 아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 좋은 글이고, 외로움을 고스란히 즐기는 당신 삶을 속살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 좋은 글입니다. 꼭 마음 뭉클하게 읽지 않아도 좋은 글이요, 오래오래 간직하며 거듭 돌아보지 않으며 살포시 삭여내어도 좋은 글입니다.

 나이 든 사람으로서 내려놓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나이 들지 않은 사람들 또한 언제나 홀가분한 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조촐히 적바림한 글입니다. 할머니가 어린 딸아들한테 조곤조곤 들려주는 글이요, 할머니가 더 어린 손자와 손녀한테 조용조용 나누어 주는 글입니다.


 (3) 《사람, 참 따뜻하다》 곰곰이 되읽기


 앞으로 할머님들 책이 우리 앞에 얼마나 선보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크게 이름 높지 않은 할머님들 책들이, 이를테면 예순이 넘은 뒤 처음 붓을 잡고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수채그림을 즐기는 박정희 할머님 같은 분들 책이든 온삶에 걸쳐 집살림을 꾸려 온 여느 할머님들 책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할머니 된 분들한테 ‘홀로 넉넉하고 느긋하게 당신 삶을 돌아보며 글 한 줄 적어 내려갈 틈’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나오기 어려운 만큼 더 고맙게 받아 읽은 《사람, 참 따뜻하다》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되읽어 봅니다. 저 스스로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어 가기 때문이 아니라, 한 해 두 해 갈수록 할머님들 삶자락이 한결 따스하고 포근하다고 느낍니다. (4342.12.5.흙.ㅎㄲㅅㄱ)


[23, 65, 147쪽] 사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학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 삶의 내용이 학력이지요 … 쇠잔이란 얼마나 평화로운 체념인가. 젊음의 열정과 과욕이 씻기어 나간 평화. 그리고 쇠잔이란 또 얼마나 사람을 조그마하게 만드는가. 나는 아주 작아져서 엄지의 엄지가 되어 그의 등에 업혀 잠들고 싶다 …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소 ‘신’이 바로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39, 42∼43쪽] 나는 자라면서 내가 딸이어서 좋구나, 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연코 없다. 아들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지만, 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컸던 것이 내가 살았던 사회환경, 아니 우리 집의 가정환경이었다 … 짐을 풀면서 솜씨 좋은 어머니가 새로 만드신 분홍빛 아기 옷에 눈이 가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꼭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학교도 다녀 보고, 돈도 벌어 보고, 큰소리도 치면서 살고 싶다, 를 입에 달고 사셨던 어머니. 딸 다섯을 낳을 때마다 섭섭하고 섭섭하여 몽땅 도둑을 맞았다 해도 그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으리를 노상 읊어대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당신 딸이 낳을 넷째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당신의 절박한 염원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64, 94∼95쪽] 고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관점에서 장점을 볼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니 장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새로웠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꼭 쓰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깨달았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약초이구나. 그래서 다른 이의 삶에 치유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한다. 구태여 익명으로 나를 감추지도 않는다. 언제나 실명이다.

[79쪽] “조카, 아주 이쁘게 나이를 먹었네.” 내가 칭송하자 “아마 미국에서 살아서 그럴 거예요. 한국에서라면 사방의 적들이 견제하고, 자연히 조급증에 걸리고, 사회 전체가 무언지 불안하고 바쁘잖아요? 그 가운데서 나도 그런 표정으로 늙었겠지요?”

[86∼88쪽] 오빠는 다섯 가지 약을 열심히 먹었다. 그 약이 자기를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성으로 먹었다. 그것은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목숨에 대한 최대의 성실이었다. 성한 몸이든, 병든 몸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생명을 준 자에 대한 최고의 감사며 정의였다 … 소식을 듣고 모인 형제들에게 (오빠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웠어요” 말을 하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단잠에 잠기는 듯 편안하게. 그 모습은 맑고 고왔다. “어서 와서 영진의 이뻐진 얼굴을 보아라!” 용케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오열을 터뜨리셨다 …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고 한심하고 지루한 병상에서 오빠가 누렸을 자유!

[102, 133쪽] “아무 생각 마시고 그림만 보세요.” 동서가 가만가만 말을 합니다 … 교편을 잡고 있는 동서가 아이를 낳자, 병원에서 바로 제 집으로 데려와 키울 때나, 열세 식구 조석을 단풍잎만 한 손과 종이배 같은 발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육신의 고달픔이 보기에 안쓰러워 “그러지 말고 약국을 하거라. 너는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람을 써서 살림을 맡기면 덜 고단하지 않겠니?” 내가 말하면 “언니, 우리 가족에게 젤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우. 형제 간에 사랑하고 화합하는 일이 문제인데 그 몫을 돈이 할 수 있나?”

[106쪽] 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날렵한 차를 몰고 가는 이웃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운전석 옆 유리창을 열고 정중하게 동승을 권한다. “역까지라도…….” 나는 한껏 상냥한 어조로 사양을 한다. 미끄러지듯 멀어지는 차를 보며 ‘당신은 오늘 그 귀찮은 물건을 끌고 다니느라 수고가 많겠구나’ 하고 가당찮게 오히려 동정을 한다. 그러면서 상대적인 자유를 느낀다.

[138쪽] 나는 다행히 나를 닮은 딸은 없고 아들만 있는데, 내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내게 훈도하신 대로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고 일러 주며 길렀다. 아니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약점을 갖는다는 건 축복이야. 약점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 보거라.”

[280쪽] 사실 70년을 산 여인들에게 쌓여 있는 것이 지나온 삶의 이야기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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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이 넉넉한 점수를 안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잘 팔리곤 하며,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안 팔리곤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책에는 외려 짠 섬수를 매기고,

 

 나는 내가 참으로 안타깝거나 불쌍하다고 여기는 모자라거나 어설픈 책에는 넉넉히 점수를 붙여야 할까.

 

 이 바보스러운 세상에서

 

 바보스러운 책이 판치는 흐름을

 

 나 같은 사람 하나가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나로서는 내가 별 다섯 만점에 둘이나 하나나 빵을 붙이는 책을

 

 둘레 사람들이 별 다섯을 붙이며 손뼉 치는 모습을 보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올린 글에도 적바림했지만,

 

 길거리 나무에 전깃줄을 친친 감고

 

 예수님나신날을 맞이한다며 들볶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내며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도무지 무슨 소리를 끄적일 수 있겠는가?

 

 젠장 된장이 아닌 환장 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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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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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글이 내 삶이 되어야 태어나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6] 곽아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12월 1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선 나무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발걸음을 늦추고 올려다보니,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조그마한 전구가 달린 줄을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날 저녁 다시금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걷던 몇몇 사람이 “이야, 예쁘다!” 하면서 ‘아직 불을 넣지 않고 전구만 달아 놓은 나무 모습’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12월 2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또 지나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광화문 둘레 나무들은 여느 때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사람들 담배 연기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십이월과 일월을 맞이할 때까지 ‘예수나신날 맞이 불밝히기’에 시달려야 합니다.


..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 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속 풍경으로 간직된다 ..  (머리말)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과 나무가 뒤집어쓴 전깃줄에서 눈을 뗍니다.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책에 눈을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서울에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일 텐데, 저로서는 서울에 쉴 곳과 마음 둘 곳과 사랑 나눌 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람한 건물과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과 끝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흙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없고 바람에 씨앗을 날리는 들풀과 들꽃이 내려앉을 땅이 없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구름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입니다. 버스 택시 짐차 오토바이 자전거 모두 몰려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다리로 느긋하게 오가면서 둘러볼 터전이 없는 서울입니다.

 서울마실을 다루는 책이 곧잘 나오고, 서울 시내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다니며 만난 예쁜 맛집과 멋집을 다루는 책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넓고 크며 사람 북적이는 서울에서 ‘책에 몇 군데 모아 놓아야’만 하도록 맛집과 멋집이 적은가요. 굳이 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 책에 담을 수 없도록, 어느 곳에 깃들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알찬 서울은 될 수 없는지요.

 엊그제 혜화동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인천과 견주어 안주값이 두 곱이 비싼 차림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킨 안주가 나왔을 때에는, 이 안주값이 인천과 견주어 두 곱이나 되지만 부피는 반이 안 되고 맛은 더 떨어집니다. 다시금 크게 놀랍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천과 견주어 이곳 서울 혜화동 술집 자리값은 몇 곱이나 비쌉니다. 제가 드나드는 인천 술집은 가게를 꾸미는 데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인테리어비로 몇 억이니 권리금으로 몇 천만 원이니 또 무엇무엇에 얼마니 하면서 들이붓습니다. 이렇게 들이부은 곳은 물건값도 높을 테지만 내어주는 밥상 부피도 작을밖에 없습니다.


..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토지)들을 뽑아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 간 권도 있다. 계집아이다운 허영심이 강했던 어릴 때는 여주인공 최서희에 끌렸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미인에다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머슴과 결혼하고 마는 여자 … 나는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남자를 지배할 줄 아는 것이 대놓고 으르딱딱대어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  (20, 112쪽)


 인천은 제 고향마을입니다. 그러나 제 고향마을이라 해서 다른 데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입니다. 예부터 인천사람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고, 으레 서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인천에 머물거나 남는다든지, 저처럼 서울로 나아갔다가 거꾸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바보나 멍텅구리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리보기로 여겨 버릇합니다. 한 번 서울로 나아갔으면 두 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없어야 하고, 인천에서 무슨 일거리나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을 인천에서 할 때와 서울에서 할 때에는 다릅니다. 받는 일삯이 서울에서 훨씬 높고, 받는 대접이 서울에서 훨씬 넉넉합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인천에서는 아무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작품을 그러모아 책을 내거나 전시마당을 마련하기는 벅찹니다. 그만큼 서울이 눈높이가 높다 할 텐데, 이렇게 서울만 홀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천은 인천다움을 잃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천은 부천다움을 잃고 수원은 수원다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광명에서 광명다움을 찾기 어렵고, 안양에서 안양다움을 읽기 힘듭니다. 과천에는 어떤 과천다움이 있을까요? 성남에는 무슨 성남다움이 있을는지요? 고양은? 파주는? 남양주는? 군포는? 안산은? 시흥은? 구리는? 김포는?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답고 어여쁘며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하게 반갑고 멋지며 믿음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 흐름을 돌아보면 사람이 사람값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맛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험성적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학교이름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학교를 다 마치면 은행계좌 크기로 차례를 매깁니다. 이러는 동안 옷차림과 자가용 크기와 아파트 넓이를 놓고 차례를 매깁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숫자가 되어 서로 치고박으며 죽도록 다툼질을 해야만 하는 터전입니다.

 이는 보수나 수구라는 쪽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질이 아닙니다. 진보나 개혁이라고 하는 쪽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툭탁질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듯이 ‘같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가 서로 엇갈린 모임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숫자는 나날이 늘고, 교사 대접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공무원이 여느 사람 앞에서 온몸을 바친다든지,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참 가르침을 펼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늘 한결같이 들을 길이 없습니다.


..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溫氣도 느껴 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54쪽)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


 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


 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


 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4342.1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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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책도 엉터리로 읽지만, 글도 엉터리로 쓴다. 내가 좋아하고 더러더러 만나는 번역가 형은 알라딘서재에 글을 바지런히 올리다가 '덧없는 댓글 다툼'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고 '제대로 된 흐름을 못 잡는 샛길 빠지기'인가를 느끼며, 그동안 올렸던 모든 느낌글을 지우고, 댓글을 다 막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번역가 형처럼 그런 '덧없음'을 알면서도 '댓글 막기'는 하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까닭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덧없는 댓글싸움을 벌이는 이들 스스로 부끄러운 노릇 아닌가? 왜 바보들은 스스로 바보인 줄을 깨닫지 못할까? 

 

이렇게 글을 쓰는 나는 바보이다. 나는 나대로 바보이고, 덧없는 댓글을 다는 이들은 그들대로 바보이다. 저마다 제가 꾸리는 삶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외곬로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삶에 따라 바라보는 매무새이다. 

 

자가용에 매여 있는 사람한테 자전거 이야기를 해 보아야 무엇 하리? 

국어사전 한 번 제대로 펼쳐서 꼼꼼히 읽고 새긴 적 없는 이한테 우리 말 이야기를 한들 무엇하리? 

책삶을 깊이 파헤치지 않는 사람한테 책 이야기를 들려준들 무엇하리? 

새책방과 헌책방과 도서관이 어찌 얽혔는가를 살피지 못하는 이한테 헌책방 이야기가 무슨 쓸모? 

우리가 먹는 밥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데, 무슨 생태고 환경인가? 

 

귀가 있으면 듣는다고 했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 얼마나 귀가 뚫려 있을까? 눈 안 달린 사람이 없을 텐데, 다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알라딘서재를 기웃거린다든지, 나 같은 책바보가 끄적이는 바보스런 글에 매달려서 왈왈 멍멍 컹컹 짖는 그 철없는 댓글싸움을 건다든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조선일보를 보며 스스로 멍텅구리가 되는 삶보다, 바보 최종규가 쓰는 글을 읽으며 '넌 참 바보로군' 하고 들먹이는 삶이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다. 

 

바보 최종규조차 칭찬할 만한 책을 내도록 애쓸 노릇이지, 댓글로 이러쿵저러쿵 해 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며칠째 '팔리 모왓'이 쓴 <잊혀진 미래>를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띄어쓰기 맞춤법 교정교열이 어마어마하게 엉터리이지만, 책에 담은 줄거리는 더없이 훌륭하다. 그런데, 지지난주인가 느낌글을 올린 <청춘을 읽는다>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교정교열을 놓고는 몇 군데 잘못을 빼고는 참 잘 엮었다. 그러나 줄거리에서는 몹시 안타까웠다. 

 

우리는 왜 겉꾸밈처럼 속가꾸기는 못할까? 우리는 어이하여 겉차림처럼 속다지기는 안 할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지만, 나는 보기 좋은 떡은 먹지 않는다. 속내가 좋은 떡이라야 먹는다. 보기만 좋은 떡은 빛깔과 냄새로도 엉터리인지를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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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즐기다
이자와 고타로 지음, 고성미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을 즐기는 내 삶은 아름답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8] 이자와 고타로, 《사진을 즐기다》



- 책이름 : 사진을 즐기다
- 글 : 이자와 고타로
- 옮긴이 : 고성미
- 펴낸곳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3.15.)
- 책값 : 11000원



 (1) 내 삶에 있는 사진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한테는 눈이 둘도 없는 보배입니다. 손목아지가 부러져도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지만, 눈이 감기면 사진도 그림도 영 부질없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그이한테 눈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 삶에서 눈이란 ‘본다’를 넘어서 ‘산다’를 나타내는 큰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 같은 피사체를 오랜 기간 동안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추어의 특권이다 ..  (127쪽)


 그러나 눈이 감겨서 아무것도 못 본다 하는 삶이라 해서 어둡다고만 느끼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제 눈은 활짝 뜨고 있으니 눈을 감은 나날을 생각조차 못할 뿐인데, 갑작스레 눈이 감기더라도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눈이 감기면 감기는 대로 내 삶을 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눈이 감기고 나면 눈이 감긴 삶으로 새롭게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이 감겼어도 저한테는 목숨줄이 있기 때문에 눈보다 아름다운 선물인 목숨줄을 될 수 있는 대로 튼튼하게 붙잡으며 가꾸고 싶습니다. 아픔과 생채기일 뿐이라 하더라도 악착같이 붙들면서 일구고 싶습니다.

 아마, 이렇게 악착스레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느끼겠지요. ‘악착스러움이란 무언가? 왜 난 이렇게 망가지면서까지 더 살아야 하느냐?’ 하고. 이처럼 느끼던 그때에는 ‘한 번 주어져서 즐겁게 누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이 삶인데 악착같이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기쁘게 맞아들일 웃음과 눈물을 놓치지 않았나?’ 하고 뉘우치리라 봅니다. 이와 같이 뉘우친 다음에는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는 대로 잘 살아왔으니, 눈이 감긴 때에는 눈이 감긴 대로 잘 살아가면 되지 않나?’ 하면서 바야흐로 새 삶길에 눈을 뜨리라 봅니다.

 참말 이렇게 살아가리라 봅니다. 헤아려 봅니다. 생각해 봅니다. 어림해 봅니다. 느껴 봅니다. 이야기해 봅니다.


.. 내 경우만 하더라도 사진전 등에서 “어떤 사진을 살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면 평소의 평론가의 눈과는 달라진다 ..  (162쪽)


 한석봉 어머님은 캄캄한 방에서 떡을 썰었다고 하는데, 저는 캄캄한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세발이를 쓰지 않고 선 채로, 또는 벽에 기댄 채로, 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또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몇 초 동안 꼼짝을 않고 숨을 멈추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몇 초에 걸쳐 담아낸 사진은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아주 드물게 아무런 떨림이 없는 사진을 얻곤 합니다.세발이를 받치면 걱정없이 더 나은 사진을 더 많이 찍었을 텐데, 저로서는 세발이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세발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괜히 세발이까지 챙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사진을 찍는데, 떨림 사진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려 떨림 사진이 깊은 밤 사진에 걸맞지 않겠습니까?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는 깊은 밤인데, 밤을 잊고 새벽을 열며 신문을 넣고 우유를 넣는 사람이 있는 어두운 골목인데, 떨림 사진이란 스스럼이 없고 살가운 눈길이요 눈맞춤이 아니겠습니까?

 집에서도 몇 초 동안 사진기를 붙들고 있곤 합니다. 때때로. 드물게. 일부러. 아주 깊은 밤 곯아떨어진 옆지기와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3초나 5초쯤 사진기를 무릎에 받치고 찍습니다. 감도를 1600으로 맞춘 다음 두 장쯤 담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두 사람 모습이 사랑스러우니 깊은 밤나절 모습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한두 장쯤 남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뛰노는 아기도 사랑스럽고 칭얼대는 아기도 사랑스러우며 웃는 아기도 사랑스럽습니다. 아파하는 옆지기도 사랑스럽고 아픔을 씻은 옆지기도 사랑스러우며 아파 죽겠다는 옆지기도 사랑스럽습니다. 제 둘레에는 온통 사랑스러움투성이라, 저는 사진을 찍으며 언제나 사랑 한 점 톡 떨어뜨리듯 사진 한 장 찰칵 찍습니다.

 헌책방이 왜 꾀죄죄함입니까? 헌책방이 왜 칙칙함입니까?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는 왜 헌책방을 ‘낡아빠진 사라지는 곳’으로만 여깁니까? 도무지 언제까지 이런 고리타분하고 낡아빠진 생각으로 헌책방을 마주합니까?

 왜냐하면, 기자나 작가라는 이름을 걸친 이들은 헌책방 한 곳부터 이렇게 엉터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다른 자리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네들 속내와 속알맹이와 속살과 속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다루든 경제를 다루든 운동경기를 다루든, 이들 속에 깊이 또아리를 튼 고갱이를 확 끄집어내야지요. 뽀얀 속살이든 때에 절은 속살이든 꾸밈없이 느끼고 받아들이고 삭여내어 당신들 슬기로움으로 보듬으며 우리 앞에 내놓아 주어야지요.

 우리는 사진 찍는 기계가 아닙니다. 자판기처럼 척척 찍어 대는 기계가 아닙니다. 쇠돈 한 닢 넣으면 좔좔좔 쏟아 놓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멋지구려 사진’을 판박이처럼 따라하는 못난이가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찾아야 할 우리가 아닙니다. ‘잘 꾸리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나부터 좋아할 사진 한 장’을 찾아야 합니다.

 사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손에 쥔 다름아닌 나한테 있습니다. 나한테 있는 사진인데 나를 못 보고 있는 탓에 자꾸만 대학교를 떠돌고 사진교실을 떠돌며 인터넷을 떠돌다가 비싸구려 장비에 몸을 팔고 마음을 빼앗기며 바보 멍텅구리 얼간이 같은 사진기계로 굴러떨어집니다.


 (2) 무얼 즐기라는 《사진을 즐기다》일까?


 일본 사진평론가 이자와 고타로 님이 쓴 《사진을 즐기다》를 읽습니다. 얇은 책이기는 한데, 30분 만에 읽고 책을 덮습니다. 고작 30분 만에 다 읽어낸 다음 ‘내가 잘못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책을 펼치지만 더 읽을 만한 건더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이 삐었나? 내가 잘난 체를 하자고 이 책을 얕보는 셈인가?’ 하고 뉘우치면서 다시금 책장을 넘기지만, 207쪽짜리 이 책에서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열 줄쯤 찾기조차 힘이 듭니다. 더욱이 207쪽짜리 책이라 하지만, 부록과 찾아보기 따위가 꽤 길게 차지하며 빈자리가 많아서, 속알맹이는 160쪽을 조금 넘는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난주에 읽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하고 견줍니다. 이 책은 이 책대로 좋고 저 책은 저 책대로 좋습니다만, 알맹이가 없어 되읽지 못하도록 하는 사진 이야기라 한다면, 이 같은 사진책은 누구한테 이바지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밭에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한테? 사진밭에 발을 디딘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사진을 제대로 못 즐기고 있는 사람들한테? 사진밭에 오래 몸담고 있으나 잘난 척하고 젠 체하는 사진쟁이한테?


.. 사진전을 권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사진가들의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많은 경우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어쩌면 사진가는 그 우연마저 불러들이는 능력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  (16, 124쪽)


 《사진을 즐기다》라는 책이 허술하거나 모자라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책한테는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 책한테는 “사진을 즐기고 싶은 이한테”라든지 “사진나라에 들어오고 싶은 분한테”라든지 “사진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한테” 같은 이름이 어울리겠다고 느낍니다.

 새내기도 즐길 수 있는 사진이요 헌내기 또한 즐길 수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을 내걸며 얼마든지 당신 깜냥껏 ‘사진 즐김’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궁금합니다. 사진평론이라는 길을 서른 해 넘게 걸어왔다는 글쓴이는 무슨 마음으로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가벼운 입문서’를 내놓았을까요? 더욱이, ‘일본땅 사진 입문자 길잡이책’으로 나온 이 책을 한국말로 옮겨 한국 사진쟁이 앞에 선 보인 출판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사진을 즐기다”가 아닌 “사진 평론을 즐기다”인 글쓴이 이자와 고타로 님입니다. ‘사진 평론 즐기기’도 어김없이 “사진을 즐기는 또 다른 길”이라 할 텐데, ‘사진 평론 즐기기’를 수많은 사진쟁이한테 선물처럼 내어주면서 “여러분도 이렇게 사진을 같이 즐겨 보아요” 하고 손짓을 할 수 있을 텐데,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시큰하고 책을 덮은 뒤로 가슴 한켠이 쓰라립니다.


.. 사실 일본의 사진 상황을 보면, 이 부분이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을 위한 도구와 기술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무엇을 어덯게 표현하고자 사진을 찍는가라는 중요한 핵심이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 굳이 비싼 1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장만할 필요도 없이 휴대용 카메라로도 충분하다.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만나는 장면들을 담아 그대로 셔터를 누르면 된다 ..  (103, 109쪽)


 사진은 틀림없이 우리 삶에 있습니다. 저한테는 제 삶에 걸맞게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을 즐기다》를 펴낸 이자와 고타로 님한테도 당신 삶에 알맞게 사진이 있습니다. 배병우 님 같은 분은 배병우 님 나름대로 사진이 있고, 노순택 님 같은 이는 노순택 님 깜냥대로 사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저 마음그릇대로 사진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가 즐기는 사진그릇이 더 낫다 할 수 없으며 더 부끄럽다 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즐기는 사진그릇이 더 나쁘다 할 수 없으며 더 훌륭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사진책은 ‘사진을 즐기려면 우리가 우리 마음과 눈길과 몸을 어떻게 다스리면 더 좋은가’ 하는 이야기를 틈틈이 들려줍니다. 곰곰이 생각할 만하고 깊이 돌아볼 만하며 차분히 되새길 만합니다.

 다만, 생각할 만한 이야기는 담겼되, 가슴을 적실 만한 넋은 담기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되짚을 만한 이야기는 실렸되, 가슴을 울릴 만한 얼은 실리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 늘 신선한 기분으로 촬영에 임하라. 그런 사진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하게 전해진다 … 세월이 흐른 뒤 (내가) 사진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새겨 보면서 결과적으로 사진가가 되기 위한 자질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부터 서술할 ‘매케니즘을 활용하는 능력’, ‘분위기를 컨트롤하는 능력’, ‘지속적으로 촬영하는 정열’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다 ..  (104, 122쪽)


 사진 한 장으로도 웃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울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이야기 한 줄로도 웃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이야기 한 줄로도 울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사진을 즐기다》는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주는 책일는지요. 이 책을 읽은 사진쟁이는 당신들 가슴을 어떻게 다독이거나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는지요.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일본 사진평론가 이자와 고타로 님은 얼마나 뿌듯하고 기쁘고 보람차고 즐거운 마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같은 피사체를 똑같이 촬영하면 지겨울 뿐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의 묘미는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된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피사체이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  (125쪽)


 저는 ‘사진은 내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이라고 느끼는 사진은 아름답다고 받아들입니다.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싶으며 제 모자란 깜냥과 재주껏 아름답게 갈고닦고 있으니, 내 사진이 이럭저럭 어줍잖거나 어설프지만 이러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작가로 이름을 내거는 분들 작품을 보면서 이분들 이름 때문에 사진이 더 우러러보이지 않다고 느끼며, 사진작가 이름이 없는 분들 작품을 보면서 이분들 이름 때문에 사진이 더 낮아 보이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진작가 작품 가운데 허접한 녀석이 퍽 넘치고 있으며, 사진작가 아닌 이들 작품 가운데 눈물젖게 하는 님이 꽤 많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책 하나는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수하게 당신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에 이 이름, “사진을 즐기다”를 쓰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걸림돌은 아니지만 징검다리 노릇은 힘들다고 느낍니다. 안쓰럽습니다. (4342.11.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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