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책 읽는 즐거움 ㉤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 너그럽고 따스히 살아가는 내 매무새


 사진을 찍으니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진을 읽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내 그림을 비롯해서 둘레 그림쟁이들 그림을 즐거이 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가 쓴 글이 실린 책을 읽는 한편, 다른 글쟁이들 글이 담긴 책을 널리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읽습니다. 사진을 읽지 않고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림을 읽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며, 글을 읽지 않고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는 내 아이 삶을 읽습니다. 내 아이 삶을 읽고 내 아이 말을 들으며 내 아이 몸짓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하는 짝꿍들은 서로서로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톺아보면서 서로서로 다른 삶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읽는 가운데 저마다 얼마나 애틋하며 살가운가를 읽습니다.

 사진찍기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만 해서는 이루지 못하는 그림입니다. 글쓰기만 해서는 이룩하지 못하는 글(책)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글쓰기와 아울러 글읽기가 잘 맞닿지 못하곤 합니다. 그림그리기와 맞물려 그림읽기가 살뜰히 어우러지지 못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즐기는 삶은 너무 적다 할 만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는 사람만큼 사진잔치를 찾아다니는 한편 사진책을 사들여 읽는 사람이 늘어야 사진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려고 여러 모임에 몸을 담는다든지 누리사랑방(블로그) 같은 데에 사진을 바지런히 올리기만 해서는 내 사진찍기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쟁이나 사진즐김이는 ‘내가 찍은 사진을 함께 나누어요’ 하는 마음과 함께 ‘내가 읽은 사진책을 함께 읽어요’ 하는 매무새일 때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좋은 사진책이나 좋다 하는 사진책을 찾아서 읽는 일은 훌륭합니다. 내 사진삶을 훌륭하게 가다듬는 일은 퍽 놀랍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책이라거나 좋다 하는 사진책에 앞서, 그저 사진책을 가까이하며 아낄 줄 알아야 하는 우리 삶이어야 즐겁습니다. 수수한 사진책이든 좀 떨어진다 싶은 사진책이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진책이든 사진도록이든 사진잡지이든, 우리들이 꾸리는 삶을 사진으로 엮어 소록소록 담은 이야기를 마주할 사진책을 쥐어들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되려고 읽는 사진책이 아닙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되려고 문학책이나 동화책이나 인문책을 읽는 사람은 없어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한결 아름다이 일구고픈 마음에 문학책이든 동화책이든 인문책이든 읽습니다. 사진책을 읽는 매무새란 사진 하나를 한결 깊이 사랑하는 가운데, 사진 하나로 내 삶과 넋과 말을 어떻게 일구는가를 깨닫고 헤아리며 가다듬습니다. 브레송을 읽어야 사진책을 읽은 셈이 아니고, 강운구를 알아야 사진책을 아는 셈이 아니에요. 동네 이웃 사진첩을 넘기든, 헌책방 책시렁에서 조용히 잠자는 사진책을 돌아보든, 내 눈을 트도록 돕고 내 마음을 열도록 이끌며 내 삶을 일구도록 어깨동무하는 사진책을 마주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읽기를 밑바탕으로 삼으며 이루어 갑니다. 사진읽기 또한 사진찍기를 밑틀로 다스리면서 이룩합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사진을 너그럽고 따스히 읽는 가운데 내 사진찍기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 삶을 너그럽고 따스히 (눈으로든 사진으로든 마음으로든) 담는 가운데 내 사진읽기가 싱그럽고 아리땁게 뿌리를 내립니다.

 쟁이(작가)가 되어야 하는 사진찍기가 아니듯이, 꾼(비평가)이 되려고 하는 사진읽기가 아니에요. 즐거이 찍고 기쁘게 읽습니다. 넉넉히 찍고 따스히 읽습니다. 알차게 찍고 알뜰히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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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식량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본질
월든 벨로 지음, 김기근 옮김 / 더숲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이 많은 사람은 왜 서울로 몰려드는가
 [책읽기 삶읽기 27] 월든 벨로,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어두운 승리》(삼인,1998)와 《탈세계화》(잉걸,2004) 같은 책이 한국말로 옮겨진 월든 벨로 님 새책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읽다. 지구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읽는 눈썰미가 남다르면서 깊다 할 만한 월든 벨로 님이기 때문에, 이분이 쓴 책을 찬찬히 헤아리며 받아들인다면, 올 2010년 12월 5일에 흙으로 돌아간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어리숙하거나 모자란 생각밭을 일구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자본가들은 식량이냐 사료냐 연료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익성에 따라 언제든 바꿔치기할 수 있는 투자 대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한 세계 대다수 인구의 궁핍한 상황을 해소시키는 일 따위는 자본가들에게 있어 이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 갈수록 줄어드는 농토에서 보다 많은 것을 짜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 플랜테이션 임시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계 문제를 자본가들이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 ..  (30∼31, 43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책은 참 잘 짰고 잘 엮었으며 잘 쓴 글이라고 느낀다.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이런 책 하나쯤은 곁에 놓고서 찬찬히 읽으며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짝꿍이랑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은 젊은이들이 거의 아무런 생각을 않고 예방접종을 맞히는데, 스스로 예방접종과 병의학과 병원 얼거리를 살피거나 익힌다면, 삶과 넋이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스스로 예방접종 흐름과 성분을 헤아리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4대강사업이든 어슷비슷하다. 숱한 사람들이 비판을 하거나 편들기를 하거나 하면서 쏟아내는 말마디를 읽는 일도 나쁘지 않다만, 이런저런 ‘딴 사람 생각들’만 읽어서는 고갱이를 캐내지 못한다. 나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살피거나 배우거나 알아보아야 비로소 고갱이를 짚는다. 나부터 고갱이를 제대로 알아내고 나서야 숱한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듣고 새겨야지, 고갱이를 제대로 모르는 채 숱하게 떠도는 소리만 듣는다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다. 방송꾼 손석희 님이 이끄는 토론 풀그림이 퍽 사랑받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토론 풀그림을 볼 까닭이나 값어치가 없는 줄 옳게 깨닫지 못하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마무리(결론)’는 처음부터 다 나왔으니까. 어떤 말썽거리 하나를 놓고 이야기(토론)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는 진작에 뻔하니까. 이리 해야 옳거나 저리 해야 맞다는 말을 얼마나 슬기롭거나 또박또박 밝히느냐는 부질없는 놀음놀이이다. 옳거나 맞는 길을 조용히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내 삶자리에서 옳거나 맞는 일을 하면 된다.

 이리하여,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무척 괜찮은 책은 오늘날 사람들한테 널리 제대로 읽혀야 하는 책인 가운데, 책이름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낼 수 있다. 자,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리 코앞에 있다. 우리 밥상에 있다. 그러면 뭐가 말썽거리이느냐고? 바로 우리 코앞에 그 많던 쌀과 옥수수가 놓였기 때문에 말썽거리이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우리 코앞이나 밥상에 놓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한테는 우리가 그날그날 비울 밥그릇 부피에 걸맞는 만큼만 쌀과 옥수수가 있으면 넉넉하다. 우리 스스로 다 먹지 못할 만큼 지나치게 많은 쌀과 옥수수가 우리한테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뒤틀린다. 나 때문에 굶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나 때문에 지구 사회는 전쟁과 푸대접과 따돌림으로 춤을 춘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수치와 지식’에 따라 ‘남녘나라 사람들이 버리는 밥쓰레기 부피만으로도 남녘땅과 북녘땅에서 굶거나 가난한 사람을 모두 먹여살리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를 알면 뭐 하는가. 삶을 스스로 안 바꾸는데. 삶을 스스로 안 고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지만 ‘무엇’이라는 일을 안 하는데.


.. 최초로 옥수수를 재배했던 멕시코인이 어찌하여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옥수수에 기대어 살게 되었는가? … NAFTA 협약 당시 옥수수에 대한 보호관세를 향후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없애 나간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미국산 옥수수가 밀려들면서 가격이 반으로 폭락함에 따라 이후 멕시코의 옥수수 농업은 계속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  (69∼70, 77∼78쪽)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코앞에 있지만, 이 쌀과 옥수수는 미국 재벌이나 한국 재벌이 갖다 놓지 않았다. 우리 코앞에 있는 너무 많은 쌀과 옥수수는 바로 우리 스스로 갖다 놓았다. 미국과 한국 재벌은 이런 일을 우리들 스스로 하도록 내몰면서 뒤에 앉아 조용히 큰돈을 벌어들인다. 돈 놓고 돈 버는 사람은 손이나 몸을 쓰지 않는다. 입으로 말 한 마디 벙긋 하면서 모든 일과 갈무리를 우리들이 하도록 시킨다. 일도 우리가 하고, 돈도 우리가 잃으며, 삶도 우리가 망가뜨리는 얼개이다.

 주식으로 정작 돈을 버는 재벌들은 주식시장에 다리품을 팔며 나온다든지 주식시세표를 보지 않는다. 아니, 주식시세표 따위는 볼 까닭이 없으며, 볼 일이 없다. 주식시장이 흔들리거나 움직일 일만 조용히 하면 그만이니까. 이러는 가운데 문어발 회사 얼거리에 걸맞게 온갖 곳에서 곁다리로 돈을 번다. 곁다리로 돈을 벌 때에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만들’어서, ‘자잘한 일’을 바로 우리 같은 여느 사람이 하도록 시키면서 적잖은 연봉을 품에 안긴다. ‘스스로 흐뭇하게 여겨 깊은 골이나 속살을 굳이 들여다보거나 캐내거나 알아채지 않도록’ 사로잡는다. 이른바 ‘사랑놀이·운동경기·영화(sex·sports·screen)’ 같은 놀이거리를 ‘곁다리 장사판’으로 마련해서 여느 사람인 우리들한테 선물보따리처럼 내놓는다. 돈을 주고 이름값을 베풀며 힘부리기를 봐주면서 다람쥐 쳇바퀴 놀이에 빠져들도록 붙잡는다.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를 차근차근 새겨서 읽는다면 이와 같은 흐름과 이야기를 잘 짚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와 자본과 사회와 정치가 어떤 본질인가’ 하는 ‘지식읽기’로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고작 지식조각을 얻고 그친다. ‘세계화 본질 알기’라든지 ‘신자유주의 본질 파헤치기’는 부질없는 지식놀음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밑삶(본질이 되는 삶)이란,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삶을 얼마나 바보스레 망가뜨리는가를 얼마나 빨리 깨우쳐서 나부터 내 삶을 아름다우며 즐거운 길로 접어들도록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어떤 매무새와 몸가짐과 땀방울로 열어젖힐까 하는 한 가지이다.


.. 농촌을 떠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간 사람들은 일단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농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대기업가들이 너도 나도 농업연료 산업에 몰려드는 이유는 1980년대에 생명공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 분야가 미래에 커다란 수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88, 189쪽)


 우리 식구들 살아가는 곳은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충주시이지만, 충북 음성군에 9/10가 둘러싸인 멧자락이다. 모든 볼일은 음성읍에서 본다. 충주시 면사무소로 가는 길은 음성읍 어느 면사무소로 가는 길보다 두 곱은 멀다. 충주 시내로 가는 길이나 서울 시내로 가는 길이나 얼추 비슷하다. 언제나 음성읍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음성 장마당에 찾아가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곤 한다. 지난달께였나 우리 식구들은 처음 알아보았는데, 음성 읍내에 가면 곳곳에 “음성읍 인구 9만 돌파 축하”라 적힌 걸개천이 나풀거린다. 참 사람이 적기는 적구나 싶은데, 9만에서 10만이 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알 길은 없다. 음성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면 으레 음성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흘러나가리라 본다. ‘좁은’ 시골‘구석’에서 무슨 일자리를 찾겠는가. 그렇다고 오늘날 아이들이 시골자락에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농사꾼 삶을 아기자기하게 꾸리겠다고 꿈을 꾸겠는가. 이제 한국땅에는 홍성 풀무농업고등학교를 빼고는 ‘농사짓기 가르치는 고등학교’는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시골 고등학교 가운데 시골학교다운 매무새를 건사하는 데는 없다. 시골사람이면서 시골살이를 즐기려는 매무새를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이어주는 어른은 너무 적다. 서울 시내를 닮으려 하는 시골 읍내인데, 이런 작은 시골 읍내에서 무슨 재미로 놀겠는가. 땅 넓고 물 좋으며 사람 많은 서울로 몰려들어야지.

 멧골집에서 아이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 하루 여섯 대 오가는 시골버스를 한참 기다려서 타노라면, 이 시골버스를 타는 젊은 사람은 우리 식구뿐이요, 이 시골버스를 타는 아이 또한 우리 아이뿐이다. 시골버스를 타는 사람은 모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인데, 가끔 이주노동자가 탄다. 시골 젊은 사람이나 시골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은 한결같이 자가용을 몬다. 자가용을 몰고 더 큰 마트로 가서 더 값싼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산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사람 삶을 사랑하기에 만만하지 않고 만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와 똑같이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똑같은 연속극이랑 연예인 이야기에 젖어든다. 똑같은 운동경기를 ‘똑같은 결과(우리 편만 이기기)’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들여다보고, 똑같은 회사일에 똑같은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면서 살아간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니라, 돈만 버는 나날이기에,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아갈 까닭을 느끼지 못한다. 삶을 꾸리는 나날이 아닌, 돈만 벌면 좋은 나날인 나머지, 서울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드글드글 몰려들밖에 없으며, 드글드글 몰려드는 이 많은 사람들이 ㅅㄱㅇ(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대학교를 마쳤든 다른 대학교를 다녔든 책읽기를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책읽기를 삶읽기로 여미지 못한다.

 알맞게 먹어야 알맞게 배가 부르며 알맞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배불리 먹으면 지나치게 배가 불러 일이고 뭐고 흐트러진다. 지나치게 벌고 쓰며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다 보니, 서울이나 부산처럼 큰도시는, 또 인천이나 대전이나 광주처럼 꽤 커다란 도시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뿌리내리는 길을 잊거나 잃는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며 사랑해야 비로소 보금자리이면서 마을인데, 보금자리이면서 마을로 발돋움하거나 한결 튼튼하게 서려는 곳은 한국땅에서 어디가 있다 할까. 시장이든 군수이든 구청장이든 면장이든 모조리 ‘경제발전 숫자’에 목매달지 않는가. 시골학교이든 도시학교이든 교장과 교감은 몽땅 ‘더 손꼽히는 대학교에 더 많은 숫자를 넣는’ 데에 얽매이지 않는가.

 일다운 일을 잃고, 배움다운 배움이 없으며, 사랑다운 사랑이 자리하기 힘들지만, 돈이 넘치고 이름값이 높으며 힘부리기 좋은 도시요 큰도시요 서울이다. 도시내기 삶이 바보스러울밖에 없다고 깨닫고 싶다면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깨닫기만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으로 고치고 싶으면 나중에는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같은 책을 애써 읽지 말아야 한다. 척 보아도 무슨 이야기를 담았는가 알아채야 하고, 숫자와 통계와 지식과 정보와는 다른 자리에 있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4343.12.11.흙.ㅎㄲㅅㄱ)


―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월든 벨로 글,김기근 옮김,더숲 펴냄,2010.3.8./1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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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와 글쓰기


 서울에서 이틀을 묵은 뒤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남동 한켠에서 겨우 찾은 3만 원짜리 잠집에서 아침 여덟 시 이십 분에 나온다. 아빠도 아이도 일찍 일어나서 움직인다.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려 한다. 마을버스는 600원만 받는다. 여느 버스는 900원이던데 참 싸네. 시골에서는 요쯤 되는 거리를 달려도 1600원을 내는데, 꽤 눅네.

 아이도 힘들고 아빠도 힘들기에 걷지 않고 버스를 탔으나, 버스는 손님들을 태울 때부터 엉금엉금 거의 달리지 못하더니 연세대 앞문 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거의 제자리걸음. 버스를 모는 일꾼은 사이사이 버스 앞길로 끼어들 뿐더러 버스가 서야 할 자리에마저 끼어들어 손님을 못 내리도록 하는 자동차꾼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날선 말마디를 내뱉는다.

 도무지 버스로는 전철역까지 못 가겠구나 싶어 대충 아무 데나 내려서 걷기로 한다. 버스에서 내려 걸으니 후련하다. 조금 걷자니, 한손에는 서류가방을 든 아저씨가 한손에는 담배를 꼬나물면서 잰걸음으로 우리 앞을 가로지른다. 담배 내음은 고스란히 우리한테 훅 끼친다. “벼리야, 저 따위로 담배 피우는 사람들 참 싫구나.”

 담배 피우는 저 사람, 또 요 사람, 또 옆이며 뒤이며 둘레 사람들은 마음과 몸으로 스멀스물 기어드는 짜증스러움과 힘겨움과 갑갑함을 살짝이나마 털어내면서 차분해지려나. 그렇지만 당신들이 담배를 피울 때에 곁이나 둘레에서 캑캑거리면서 숨이 막힐 사람들은 알려나 모르려나 느끼려나 모르쇠이려나.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우든 한 곳에 서서 담배를 태우든, 하나같이 저만 알거나 저만 헤아리는 사람이다. 지식책을 읽든 문학책을 읽든, 책만 읽는 사람은 한결같이 제 밥그릇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논문글을 쓰든 기사글을 쓰든, 글만 쓰는 사람은 형편없이 제 이름값만 밝히는 사람이다. (4343.12.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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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과 글쓰기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눈은 낮이 되니 가물가물합니다. 한낮을 지나면서 눈발은 새삼스레 굵어지고, 눈발이 굵어지면서 멧자락 나뭇가지에도 눈이 한 켜 두 켜 쌓입니다. 참말 겨울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고단한 나머지 낮잠을 잡니다. 실컷 잠을 자고 난 뒤 벌떡 일어납니다. ‘오늘 볼일 보러 마실을 떠나야겠어! 인천까지 가서 골목 사진을 찍어 볼까? 그때까지 눈이 안 녹으려나?’ 길을 나서기로 마음먹으며 아이한테 물어 봅니다. “아빠하고 이야 갈래?” “아빠하고 갈래.”

 옆지기는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아빠는 짐을 꾸립니다. 시골버스 타는 때에 맞추어 일찌감치 집을 나서고, 천천히 아이랑 거닐면서 눈 펄펄 내리는 시골길을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다가는 아이하고 마음에 살포시 담습니다.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랑 걸상에 나란히 앉습니다. 눈길 때문에 길이 막히는지 버스는 늦고, 자그마한 버스역은 꽤 춥습니다. 버스는 손님 두 사람을 태우고 들어옵니다. 막역이자 첫역인 광벌 버스역에서 아이를 안고 탑니다. 아이랑 함께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시골버스는 눈 내리는 시골길을 천천히 천천히 달립니다. “이야, 벼리야, 저 눈 좀 봐. 온통 눈나라야. 나무에도 눈이고 하늘에도 눈이야. 산에도 눈이고 구름도 눈이야. 나뭇가지마다 눈이 가득 앉았지?”

 시골버스는 멧자락 사이 조그마한 길을 따라 달리고, 숯고개를 넘어 너른 못물을 지나 읍내로 들어섭니다. 읍내도 멧자락처럼 눈이 소복히 덮였으나 멧자락만큼 하얗지는 않습니다. 16시 30분에 동서울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16시 28분에 읍내 버스역에 닿습니다. 얼른 표를 끊습니다. 버스는 아직 안 들어옵니다. 1분 뒤 16시 29분에 버스가 들어오고, 표를 내고 자리에 앉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는 부릉부릉 하면서 움직이고, 찬찬히 달려 다른 읍내 두 군데를 거쳐 다른 손님을 태우고 나서 고속도로로 들어섭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눈발은 더 굵어지고, 서울하고 가까워질수록 바깥은 하얀 눈나라 아닌 잿빛 시커먼 누리입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고속도로를 겨우 벗어나 서울로 들어섭니다. 아이는 버스역에 닿을 때까지 아빠 무릎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줍니다. 가방을 메고 짐을 꾸려 아이를 안고 내리려 하니 비로소 잠에서 깹니다. 아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내내 칭얼거립니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어르며 전철을 탑니다. 숱한 사람으로 꽉 들어찬 전철인데 ‘노약자장애인영유아보호자동반자석’이라는 이름이 길게 붙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용케 사람들이 이 자리를 비워 주었습니다. 품에 안은 아이를 살짝 내리고 등에서 가방을 풀어 한쪽에 앉은 다음 아이를 무릎에 앉힙니다. 전철이고 버스이고 길이고 어디이고, 서울은 사람들이 몹시 많아 서로가 서로를 따스히 살피거나 보듬거나 아끼지 못합니다. 숨막히고 시끄러우며 골아픈 전철을 한창 달리는데 “물. 물 줘.” 하고 아이가 말합니다. 마침 물 하나는 가방에 안 챙겼습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을지로4가에서 전철을 내려 자판기로 물을 삽니다. 조막만 한 플라스틱병이 600원입니다. “벼리야, 여기 물 되게 조그마한 녀석이 되게 비싸다.”

 다시 전철을 탔다가 신촌역에서 내립니다. 사람들이 복닥복닥 붐비는 뒷간으로 갑니다. 장애인 칸은 비었기에 이리로 들어갑니다. 뒷간에서 장애인 칸은 장애인이랑 ‘아이를 데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가방이나 짐이 커야 해서 여느 칸에는 들어가기 아주 힘들어요.

 아이 쉬를 누이고 품에 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굵습니다. 눈발은 굵지만 땅으로 떨어지며 쌓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바람에 따라 휘휘 날릴 뿐입니다.

 큰길이든 골목이든 사람이 넘칩니다. 어디에든 사람이 넘치는 서울인 까닭에 어디를 가든 크고작은 가게입니다. 골목 안쪽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 들러 책방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책 몇 만 원어치 고릅니다. 다시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습니다. 망원역 쪽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출판사 일꾼을 만나려고 오늘처럼 눈 펑펑 쏟아지는 날 일부러 서울마실을 했습니다.

 출판사 일꾼은 먼길 마실을 해 준 두 식구를 오리고기집으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밥을 곧잘 받아먹어 줍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고기집에 들고 나는 손님들을 문득문득 바라보니 한결같이 예쁘고 멋스러운 차림입니다. 그런데 시외버스가 동서울역에 닿아 전철을 타고 망원역으로 오기까지 스친 사람들 가운데 우리 아이처럼 빨간 겉옷을 입는다든지 맑거나 밝은 겉옷을 걸친 사람은 하나도 못 보았습니다. 때마침 못 볼 수 있을 테지만, 사람들 옷차림은 모조리 어두컴컴합니다. 도시 빛깔 잿빛마냥 잿빛이거나 까망이기 일쑤입니다. 하얀 겨울에 맞추어 하얀 겉옷인 사람조차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 지낼 때에는 하얀 빛깔 옷을 입으면 때가 너무 잘 타 자주 빨아야 해요. 처음 입은 몇 시간은 하얀 빛깔이 고울 테지만 금세 허여멀겋게 바뀔 테지요. 맑은 빛깔이나 밝은 빛깔 옷 또한 어슷비슷하겠지요. 흙이나 자연이나 나무나 풀이 마음껏 자라나면서 자연스러운 빛깔과 내음과 무늬가 있기 어려운 도시일 뿐 아니라, 그나마 공산품 물건으로도 맑거나 밝은 빛깔은 마주하기 힘듭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사귀랑 노란 잎사귀조차 마주하지 못하는데, 겨울철에도 하얀 눈송이마저 마주하지 못합니다. 하얀 눈송이를 하얀 눈송이 그대로 마주하며 곱게 쌓이도록 안 하고, 염화칼슘을 길마다 잔뜩 뿌리면서 땀 뻘뻘 흘려야 하는 도시입니다. (4343.12.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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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읍내 장날은 2일과 7일. 내 난날은 7일. 앞으로도 내 난날에는 읍내에 장마당 마실을 나올 수 있겠네.

 - 2010.12.7. 충북 음성군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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